아이와 그림책 읽기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

2023-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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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기다리는 아이




저에게는 4명의 자녀가 있습니다. 그 중 셋째인 아들은 유독 저에게 달라붙어 있습니다. 흔히 “엄마 껌딱지”라고 불리는 딱 그런 아이이지요. 엄마 품을 차지하기 위해 항상 막내 동생과 경쟁을 합니다. 올 2023년 8살이 되어 이제 초등학교를 들어가기에 조금은 의젓한 모습을 보였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만,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고 제일 예쁘다고 말하는 아들을 보면 너무 사랑스러워 앞으로도 계속 엄마만 좋아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그동안 이런 아들이 생각나 제대로 읽지 못하고 약간은 기피했던 책이 있습니다. 바로 이태준의 동화에 김동성이 그림을 그린 『엄마 마중』(소년한길, 2004)(1) 입니다. 아이들과 동네 도서관에 갔을 때 책장 한 켠에 전시되어 있는 이 책을 발견하고도 제가 그 앞에 가만히 서 있으니, 저희 큰 딸이 “엄마 이 책 재미있어?”라고 묻습니다. 제가 그저 고개를 끄덕이니 아이가 책을 꺼내서 읽기 시작합니다. 

『엄마 마중』은 1983년에 발행된 <조선아동문학집>의 이태준 선생님이 쓰신 글을 원본으로 삼아 김동성이 그린 책으로 2004년에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으며 “동시에 가까운 짧고 간결한 글과 담담한 채색수묵의 그림이 서로 스며들 듯 어우러져 잔잔한 감동을 자아낸다.”(2)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이 그림책은 한 아이가 전차역에서 하염없이 엄마를 기다리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표지에는 1930년대 전후에 우리나라 아이들이 입었을 듯한 복식을 한 아이가 서 있습니다. 작은 얼굴, 작은 손과 발, 빨개진 코에 모자를 쓰고 독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아이를 마주하니, 엄마껌딱지 아들이 생각 나 저는 차마 책장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책을 다 읽은 저희 큰 아이가 “슬픈 이야기네.”라고 합니다. 그래서 “왜?”라고 하니까 아이가 자리를 잡고 앉아 그림책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첫 페이지는 어느 동네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저희 큰 딸은 표지 아이의 옷과 여기에 묘사된 집의 형태를 보고 일제 강점기나 한국 전쟁이 있던 시절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저희 아이의 눈에 주인공 아이는 4살 정도 되어 보인다네요. 속표지에는 이 아이가 어딘가로 가고 있습니다. 이 아이가 향한 곳은 전차 정류장이었지요. 정류장에는 몇몇 사람들이 이미 전차를 기다리고 있지만, 모두 이 아이에게 관심을 갖지는 않습니다. 그저 아이는 나뭇가지를 들고 땅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습니다. 큰 나무를 지나 전차가 들어옵니다. 아이는 갸웃하고 차장에게 묻습니다. “우리 엄마 안 오?” 하지만, 차장은 “너희 엄마를 내가 아니?”하고 지나가버립니다. 함께 있던 모든 사람은 전차에 탔는지 아이 혼자 덩그라니 남아있습니다. 다시 정류장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이번에 전차는 신비로운 초록빛을 뚫고 들어옵니다. 아이는 이번에도 차장에게 “우리 엄마 안 오?”하고 묻습니다. 하지만 이 차장도 “너희 엄마를 내가 아니?”하고 ‘땡땡’하면서 지나갔습니다. 또 다시 사람들은 정류장에 모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이가 제일 앞쪽에 앉아 있습니다. 아이의 뒤로 동생을 업은 어린 소녀도 보이고, 뒷짐을 지신 안경 쓴 어른들도 보이지만 모두 이 작은 아이에게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다들 자신의 관심이 가는 곳에 시선을 둔 채 전차를 기다리고 있지요. 이번 전차는 노란빛을 뚫고 들어옵니다. 아이는 차장에게 또 “우리 엄마 안 오?”라고 물어보지요. 이번 차장은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내려와서 “다칠라. 너희 엄마 오시도록 한 군데만 가만히 섰거라, 응?”하고 갑니다. 


모든 사람들이 떠나고 또 아이만 혼자 정류장에 남습니다. 우성의원, 종로식당, 마산정공사, 진미국수 등이 있는 번화한 종로의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아이의 건너편 길에서 바삐 움직이며 이 아이에게는 관심을 주지 않습니다. 저희 아이는 이 장면이 너무 슬펐다고 합니다. 어둑한 거리에 홀로 전차를 기다리는 아이의 모습은 참 쓸쓸하고 안쓰러웠답니다. 그동안은 배경이 생략되어 있어서 잘 몰랐는데, 이 장면은 배경이 빼곡히 그려져 있으니, 아이가 더 외로워 보인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 다음 장면부터는 정말 마음이 아팠답니다. 왜냐하면 아이가 바람이 불어도 꼼짝 안 하고, 전차가 와도 다시는 묻지 않고, 코와 손이 새빨개지도록 가만히 서 있으니까요. 급기야 이제 눈도 오기 시작합니다. 


“엄마 이 책은 시대가 옛날이잖아. 내 생각에 일제 강점기나 6.25가 있던 때 같아. 그래서 이 책은 그런 시절에 고아가 된 아이의 이야기를 쓴 거야.”

“이 아이가 고아야?”

“응. 엄마가 죽었거나 없는데 그것도 모르고 계속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그때 많았대. 이 책도 그런 아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거 아닐까?”


저희 딸은 이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이 아이가 눈을 맞으며 쓸쓸하게 마무리 되는 것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생각은 달랐지요. 마지막 장면을 보면 소복이 눈이 쌓인 동네가 나옵니다. 앞 서 첫 장면에서 나왔던 동네이지요. 이 눈 덥힌 거리를 아이는 엄마의 손을 잡고 걸어 올라갑니다. 아이의 손에는 빨간 사탕인지, 장난감인지 모르지만 무언가 들려 있지요. 엄마는 돌아오며 자신을 기다리는 아이를 위해 작은 선물을 하나 사 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서로 마주보며 눈 길을 걸어 올라가는 두 모자의 모습이 참으로 정겹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장면을 다시 제 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당연히 엄마와 아이의 모습이 어디에 그려져 있는지 가르쳐주지는 않았지요. 한 참을 봐도 잘 모르겠는지 고개를 갸우뚱하길래 어쩔 수 없이 살짝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그제서야 엄마와 아이를 발견합니다. 


“아, 엄마가 왔네. 엄마가 있었네.”

“이 장면이 아이의 상상일까? 네 처음 생각처럼 엄마는 없는데, 작가는 아이의 상상을 그린 걸까?”

“음… 아닌 거 같아. 그냥 엄마가 온 게 맞는 거 같아.”

“왜?”

“이 장면의 배경이 뭔가 따뜻하잖아. 어쩐지 아까 눈이 오는 장면에서도 하늘이 초록색이더라. 난 밤이라서 초록색을 썼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밤인데 초록색을 쓴 게 이상하긴 했어.”

“이 장면도 그렇고 앞에 눈이 처음 오는 장면도 그렇고, 엄마도 왜 눈이 오는데 배경을 초록빛으로 했는지 궁금했어. 네 생각은 어때?”

“아이랑 엄마가 만나니까. 결국 엄마가 와서 아이가 행복해지고 좋아지잖아. 그러니까 초록색이랑 노란색을 써서 좀 따뜻한 분위기를 만든 거 아닐까? 나는 처음에는 엄마가 없는데 아이가 그것도 모르고 계속 기다리는 거라고 생각하고 이 마지막 장면에 노란빛도 있길래 낮이라고 생각했거든. 눈이 다음 날까지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럼 내용이 너무 슬프잖아. 그래서 덜 슬프게 하려고 따뜻한 느낌이 들게 초록색이랑 노란색을 같이 썼다고 생각했지.”

“그럼 아이가 죽었다고 생각했어?”

“응. 눈이 오니까 죽었거나, 아님 뭐 그냥 그 자리에 있거나. 아무튼 그 시절에는 그런 불쌍한 아이들이 많았다고 하니까 이 책도 그런 아이들의 이야기를 쓴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닌 거 같아?”

“응. 마지막은 그냥 밤에 엄마가 와서 아이랑 만난 거 같아. 그래서 같이 집에 가는 거지.”


아이가 엄마를 혼자 기다리는데 하늘에서 눈이 내리는 장면에 작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눈을 통해 독자도 함께 하늘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런데 하늘은 우리가 생각하는 색이 아닙니다. 초록빛과 노란빛이 어우러져 마치 석양이 진 저녁 하늘로 보입니다. 이런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눈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백상출판문화상의 평가자도 “글 없이 눈 내리는 거리 풍경만 나오는 마지막 3점의 삽화가 압권”이라고 평하였지요. 보통 노란빛은 따스함을, 초록빛은 안정감을 갖게 한다고 말하는데, 그림작가는 홀로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가 앞으로 따스하며 안전한 엄마 품에 안길 것이라고 독자에게 가르쳐주는 것일까요? 

그런데 저는 이 책을 아이와 함께 읽으며 조금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이 그림책의 시대적 배경을 아이가 이해한다 하지만, 어린 아이를 홀로 놔두고 어디로 가버린 엄마나, 정류장에 혼자 서 있는데도 관심을 주지 않는 주변 사람들, 잠깐 나오지만 동생을 포대기에 업고 있는 어린 소녀 등이 아이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혼자 이렇게 엄마를 기다리는 모습이 어때? 엄마가 이 어린 아이를 혼자 놔두고 어디를 가버렸잖아.”

“그러게. 그건 좀 위험하지 않나? 이 아이가 4살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데. 우리 집 막내정도 밖에 안 되는데 혼자 집에 있으면 위험하잖아.”

“근데 왜 작가는 이런 아이의 모습을 그렸을까?”

“그때는 이런 아이들이 많았으니까. 선생님이 그 시절에는 다들 힘들고 어려웠다고 가르쳐주셨어. 그래서 이 그림책도 전체적으로 배경이 좀 어두운 거 같아. 좀 갈색을 많이 썼잖아. 근데 그래서 마지막에 눈 오는 장면이 더 아름다운 거 같아. 계속 갈색 빛만 보다가 밝은 초록빛이랑 노란빛을 보니까.”


다행히 아이는 지금 시대의 눈으로 그림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고 그림책을 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희 집 둘째는 달랐지요. 


“엄마, 난 이 그림책이 좀 싫어.”

“왜?”

“너무 슬퍼. 엄마가 아이를 놓고 나가고, 아이는 엄마를 계속 기다리고. 밤까지.”

“이 그림책에서 아이가 엄마 기다리는 모습이 슬펐어?”

“전차 차장도 쌀쌀 맞고, 엄마는 너무 늦게 온 거 같아.”

“엄마는 언제 오셨을까?”

“한 밤 중에.”

“왜 그렇게 생각해?”

“원래 일하다가 늦게 오잖아. 일찍 못 오잖아.”


2023년에 10살이 된 저희 둘째는 아직 엄마가 아이를 놓고 늦게 들어오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파서 이 책이 싫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엄마가 보살펴 주어야 하는데, 엄마가 없는 것이 너무 슬프다네요. 저는 두 딸에게 “그런데 이 아이는 엄마를 기다리며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라고 물었지요. 둘째는 엄마가 늦게 와서 너무 속상했을 거 같다고 하며 엄마를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 같다고 합니다. 하지만 첫째는 그냥 엄마가 빨리 왔으면 하는 마음 정도만 있고 별 다른 생각은 없었을 것 같다고 하네요. 하지만 “이 아이가 왜 엄마를 기다릴까?”라는 질문에는 둘이 같은 답을 이야기 합니다. “엄마니까. 엄마가 좋으니까.”

이 그림책의 아이가 엄마를 기다리는 장면은 배경이 거의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독자는 인물에 더 집중이 되지요. 이 때문에 독자는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의 모습에 강하게 감정이 이입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배경이 화려하고 다양한 색채로 그려진 장면도 몇 있지요. 바로 전차가 오는 모습을 그린 세 장면과, 세 번째 차장이 가고 나서 홀로 남은 아이를 그린 장면, 그리고 눈이 오는 마지막 장면 세 컷입니다. 전차가 오는 세 장면에는 넓은 들판을 가로지르는 전차, 정어리가 떼 지어 다니는 바다 속을 지나오는 전차, 새들과 함께 하늘에서 날아서 오는 전차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마치 아이는 엄마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기에 미지의 세계에서 전차를 타고 온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차장의 말을 듣고 홀로 남은 아이는 이제 상상에서 벗어나 현실에 서 있습니다. 엄마가 올 때까지 그저 묵묵히 그 시간을 견딜 뿐이지요. 그래서 독자는 이런 아이의 모습에 마음이 참으로 안쓰럽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위로하듯 하얀 눈이 포근하게 내리는 초록빛 하늘은 아이가 곧 엄마와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낼 것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러한 색감의 변화는 독자에게 심미적인 즐거움을 줍니다. 그러나 여전히 독자의 마음을 두드리는 질문이 있습니다. “아이에게 엄마는 어떤 존재이기에, 이토록 힘들게 엄마를 기다릴까?”

자녀를 키우는 엄마로서 아이의 무조건적인 신뢰와 사랑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아이들이 집을 너무 어지럽혀 모두를 모아 놓고 혼낸 적이 있습니다. 온갖 짜증이 저를 뒤덮어서 좀처럼 아이들에게 화 내는 것을 조절하기 어려웠지요. 그런데 “엄마 나 미워하지마, 나 엄마 사랑해.”라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저에게 안기는 아들을 보니, 갑자기 확 정신이 들며 아이들에게 화를 너무 많이 낸 것 같아 미안했습니다. ‘조금 더 참을 수 있었는데, 조금 더 좋은 말로 타이를 수 있었는데.’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쩜 이 아이는 내가 이렇게 좋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아이들은 엄마를 참 좋아합니다. 거기에는 사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엄마’니까 좋아하지요. ‘엄마’라서 나의 말에 따르지요. 내가 때로는 잘못된 것을 가르쳐도 아마 아이는 ‘엄마’가 가르쳐준 것이니까 그대로 할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의 자리는 참으로 중요하고도 무거운 자리인 것 같습니다. 나를 오롯이 따르고 사랑하는 한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니까요. 2023년이 시작되는 1월 나는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할지 고민해봅니다. 

 



(1) 2013년에 보림에서 이 책을 다시 출판하였고, 초판 1쇄는 2013년 10월 30일이다.
(2) 한국일보 2004년 12월 14일자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0412140014511230


강다혜 | 성균관대학원 아동청소년학과 박사과정 수료

시와 글을 쓰며 책을 좋아하던 저는 국문학을 전공하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총신대 유아교육학과에 입학하였을 때 한편으로는 좌절했지만,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하나님이 내가 제일 잘 하는 곳으로 나를 이끄셨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대학 4년을 보내면서 제가 깨달은 것은 역시 하나님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유아교육의 분야 중에서도 유아문학이 또 그 중에서 그림책이 저에게 가장 즐거웠고 또 적성에 맞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에 입학해 현은자 교수님 밑에서 박사과정을 마쳤습니다. 지금은 4명의 자녀와 함께 공기 좋고 초목이 푸르른 경상남도 합천에서 끝나지 않는 집안일과 육아로 정신없이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그림책 속 세계관을 연구하여 다음 세대에 진심으로 추천해줄 수 있는 좋은 그림책을 발견하고 소개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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