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서니 브라운 『겁쟁이 윌리』 허무함의 굴레에 빠지다
‘자존감’은 아동 양육과 교육에 있어서 핵심 키워드입니다. ‘자아존중감’이라고도 부르는 자존감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가치적 평가에서 형성됩니다. 어떤 부모님들은 자신의 아이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멋지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높은 자존감을 갖길 바라지요.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과 교제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타인이 자신에게 내리는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어렵지요.
저희 큰 딸이 13살이 되자, 또래 관계 안에서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대해 굉장히 예민해졌습니다. 유치원을 다니며 처음 또래 관계를 경험한 제 딸은 친구들이 놀자고 다가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하던 놀이를 계속 하곤 했지요. 초등학교 저학년이 되어도 친구들과 함께 놀지 않고 혼자 노는 것을 좋아하더니 사춘기에 접어 들면서 뒤늦게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에 관심을 갖네요. 그러던 어느 날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엄마 나는 자존감이 낮은 것 같아.”
“너 ‘자존감’이 어떤 것인지 아니?”
“내가 얼마나 능력이 좋고 자신감이 많은 사람인지 설명하는 거 아냐?”
“그럼 왜 네가 자존감이 낮다고 생각하니?”
저의 물음에 제 딸은 자신이 무엇을 못하는지, 자신이 어떤 면이 부족한지에 대해서 술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잘 들어보면, 사회적 관계를 바탕으로 내리는 자기자신의 평가입니다. 친구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체육시간에 피구를 잘 못해서 친구들이 공을 자기에게 주지 않는다, 친구가 자기에게 조금 부당하게 대했는데 화를 내거나 맞받아치지 못하고 당하기만 한 것 같다, 가끔은 친구들이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등이 그 이유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저의 마음이 짐작 가시나요? 어떤 부분에서는 감정이 앞서 ‘그런 친구와는 놀지 말아라!’라는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왔지요. 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의 평가와 상관없이 엄마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설명해주었습니다. 물론 아이의 말 중에서 몇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 하겠지만, 네가 못하는 것이 있고 때론 멋진 모습을 아닐 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너의 모습 그대로 너무 소중하고 귀하다고 다독여주었지요. 그랬더니 저희 아이는 친구들보다 자신에게 소중한 엄마가 나를 사랑하며 가치롭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마음을 추스르며 기뻐하였습니다. ‘자존감’은 일종의 교육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아이는 자신의 존재가 왜 소중한지 배워야 하지요.
이러한 측면에서 앤서니 브라운의 『겁쟁이 윌리』를 읽은 아이는 어떤 자존감을 가지게 될지 함께 생각해볼까 합니다. 앤서니 브라운은 ‘윌리’가 자신의 내면의 자아(shadow of myself in some way)라고 소개하며 『겁쟁이 윌리』는 자신에게 굉장히 의미가 큰 책이라고 말합니다.(1) 이 그림책은 디자인 측면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 첫번째 책이기도 하지만, 자신도 어린시절 책 내용과 비슷한 경험을 하였고 어린 아이들이 자신의 삶에 대처하는 방식이 그림책 속 윌리의 모습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네요.(2)
윌리는 파리 한 마리도 잡지 못하며 길을 걸을 때도 벌레를 밟을까봐 걱정을 합니다. 혹 누군가와 부딪히면 그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어머, 미안합니다.”라고 말하지요. 그래서 윌리는 나쁜 친구들에게 괴롭힘도 많이 당합니다. 그래서 그는 변하기로 결심합니다. 체조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특별한 음식을 먹고, 에어로빅과 권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근육을 키우기 위해 노력한 결과 윌리는 커다란 덩치와 멋진 근육을 가지게 되었지요. 이제 밀리라는 여자 고릴라를 괴롭히던 나쁜 친구들은 윌리가 나타나자마자 도망쳐 버립니다. 밀리가 고마움의 표현으로 윌리에 볼에 키스를 하고 윌리는 더 이상 겁쟁이가 아닌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워 합니다. 그런데 미처 보지 못한 전봇대에 ‘쾅’하고 부딪히는데 그때 윌리는 “어머, 미안합니다.”라고 말하지요. 이 장면에서 윌리는 커다란 덩치에 멋진 근육을 가진 모습이 아닙니다. 첫 장면에 나왔던 파리도 못 잡고 벌레도 못 밟으며 나쁜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초라한 모습으로 되돌아갔지요.
이 책을 읽은 저희 큰 딸은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엄마 나도 이 윌리랑 똑같아.”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마지막에 윌리는 다시 나약한 본 모습으로 돌아가잖아. 겉모습이 아무리 멋지고 좋게 바뀌어도 사실 본래의 내 모습은 바뀌지 않는 거지. 나도 그런 것 같아. 무언가 바뀌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나약한 모습이 원래 내 모습인 거지. 그건 안 바뀌는 거야.”
저희 딸은 이 책에서 앤서니 브라운이 숨겨 놓은 여러 장치들을 발견했습니다. 몸을 키운 윌리가 거울을 보며 만족하고 있는 장면에서 거울 옆 탁자 위에 있는 흑백 액자를 발견했지요. 그 액자에는 머리 위에 먹구름을 달고 근심 어린 표정으로 서 있는 윌리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윌리를 표현한 색감의 변화도 발견했지요. 첫 장면의 구부정한 윌리는 연한 파스텔로 칠해져 있고 외곽선도 희미한데, 변한 윌리는 채색이 진하고 선명하게 바뀌었고, 외각선도 뚜렷해 집니다. 그런데 밀리를 구해준 후 자신만만하게 길을 가다 전봇대에 부딪히는 윌리의 모습이 4컷 병렬 구조로 배열된 화면에서 윌리의 채색이 점점 연해지는 것 같다네요. 그러다 마지막 장면에서 전봇대에 사과하는 윌리는 첫 장면의 모습대로 작고 구부정하지만 채색도 분명 다시 연해졌으며 외각선도 희미해진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저희 아이는 이러한 장치들을 통해 이 그림책이 ‘겉모습이 변할지라도 윌리는 본 모습은 그대로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원래대로 돌아간다. 너의 나약함은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답니다.
왜 앤서니 브라운은 열심히 노력했으나 결국은 변하지 못한 윌리의 모습으로 책을 마무리 지었을까요? 저는 이 책에서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는 메시지를 발견하고 굉장히 허무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우리 아이도 저와 같은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하필이면 사춘기에 접어들어 자존감에 대해 고민이 많은 제 딸이 이러한 감정을 느꼈기에 저는 참 속상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매일의 사회생활 속에서 상처를 받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타인이 자신에게 내리는 평가가 만족스럽지 않을 때는 자기자신에게 실망하기도 하겠지요. 그러면서 자존감은 자꾸만 낮아집니다. 그렇기에 부모는 아이의 나이와 상관없이 매일 아이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아이는 결코 가치 없는 아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존재 자체로 아름답고 귀중한 아이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 그림책은 우리 아이를 허무함의 굴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듭니다. 현은자, 김주아, 국경아(2018)는 존 클라센의 작품을 분석한 연구에서 허무주의 세계관을 발견하고 제임스 사이어의 견해를 소개합니다.(3) 허무주의란 어떤 지적 체계라기 보다 하나의 느낌으로 경험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공허로 말미암은 고통, 즉 가치도 없고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는 삶으로 인한 고통의 느낌입니다. 이 책을 덮고 아이에게 제일 처음 든 생각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아무리 우리가 노력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 너는 나약하고 겁쟁이인 그대로일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허무한 감정이 우리 아이의 머리와 마음 속에 박혀 있으며 아이의 자존감을 갉아 먹을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속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이 후 아이와 많은 대화를 했습니다. 우선 ‘겁쟁이 윌리’가 과연 가치 없는 존재인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저희 아이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합니다. 윌리가 자기 잘못이 아니더라도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을 ‘나약한 행동’이라고만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저희 아이는 친구가 자신에게 부당하게 대했을 때, 화를 내면 더 큰 싸움으로 번질 수 있으니 참고 넘어간 적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 그 친구와 다시 이야기 나누어 오해를 풀고 서로에게 상한 감정을 풀어냈지요. 저희 아이는 이 일을 굉장히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담임 선생님께 칭찬을 받기도 하지만, 분내거나 싸우지 않고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 스스로도 지혜롭게 잘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윌리의 위와 같은 행동은 분명 평가 절하를 받을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한답니다. 그래서 저는 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그림책에서는 윌리의 이런 모습을 ‘겁쟁이’라고 했을까?”
“이 그림책 작가가 다른 사람을 이기거나 우위에 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 아닐까?”
“왜 다른 사람의 우위에 서야 할까?”
“내가 더 강하고 멋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깔보고 싶어서 그런 거 같아.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서 더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은거지”
저는 아이와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대화를 이어나갔습니다.
“왜 윌리는 자신의 근육을 키운 것일까?”
“외모가 멋있어 지고, 강해보이고 싶어서 그랬겠지?”
“근육이 많으면 멋있어?”
“남자들은 근육이 많고 얼굴이 잘생기고, 여자는 날씬하고 예쁜 얼굴을 가지고 싶어 하잖아.”
“왜 얼굴이 예쁘거나 잘생긴 것이 좋은 것일까?”
“외모가 멋있거나 예쁘면 다른 사람들이 다 좋아하고 부러워하니까 아까 우리가 말한 것처럼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설 수 있잖아.”
저희 아이와 나눈 대화의 내용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적 세계관에서 나오는 가치들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다윈이 말하는 ‘자연선택’, ‘생존경쟁’, ‘적자생존’ 등은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므로 생존 경쟁을 해야 하고 자연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과정에서 적합하지 못하면 소외되고 멸종되고 말지요.(4) 그렇기에 우리들은 남들보다 우위에 서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이 세상을 살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 시대의 흐름을 잘 타야 하며,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의 우위에 서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외모는 나를 다른 사람보다 더 낫게 보이게 하는 강점이므로 이를 가꾸어 내 삶의 무기로 삼아야 하는 것이지요.
이 책을 읽고 저희 딸과 찾아낸 이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변할 수 없다’는 허무주의적 비관 말고도, ‘다른 사람을 이겨서 우위를 차지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가치있는 사람이다’, ‘멋진 외모를 가져야 한다’ 등의 진화론적 세계관인 적자생존, 약육강식, 외모지상주의 입니다. 이를 찾아내고 나서 제 딸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이 그림책은 나같은 아이 혼자 보면 안되겠다. 내가 엄마랑 같이 읽었으니까 이 책의 문제점을 찾았지. 혼자 봤으면 몰랐을거야. 그냥 노력해봤자 소용없다는 메시지때문에 허무한 느낌만 계속 들었을 거 같아.”
그림책은 그 자체로서 예술로 인정받기도 하지만, 다양한 교육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중요한 매체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는 그림책이 전달력이 강한 매체라는 사실을 방증하지요. 그림책은 독자가 모르는 사이, 세상이 말하는 관점과 시각을 가르치고 이를 받아들이게 합니다. 아이를 양육하거나 교육하는 어른들은 그림책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유명한 작가가 그렸거나, 공인된 상을 수상하였다고 무조건 좋다고 할 것이 아니라, 그 책이 말하는 가치와 기준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림책에 대한 위상이 날로 높아져 가는 요즘은 그림책의 독자를 어린이로만 한정 짓지 않습니다. 그림책을 사랑하고 즐기는 어른들이 많아지고 있기에, 그림책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림책이 예술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그 지평이 넓어졌다고 말하지요. 그렇기에 저는 그림책을 대하는 어른들은 '하나의 중요한 책무'를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림책을 꼼꼼하고 면밀하게 읽어 그림책에 담긴 주제가 이를 읽는 어린이들에게 어떻게 전달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그림책 학자 바바라 베이더는 그림책은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기록이자 무엇보다도 어린이에게는 하나의 경험’이라고 하였습니다.(5) 우리는 이를, 그림책을 읽는 어린이들이 그 세계의 사회와 문화 그리고 역사를 그림책으로 경험한다고 풀이해도 좋을 것입니다. 즉, 어린이들은 그림책을 통해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을 경험합니다. 그림책을 즐기는 어른들은 이러한 가치들이 우리 어린이들이 전인적으로 성장하는데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고민해야 할 책무가 있지 않을까요? 최근 앤서니 브라운의 <윌리 시리즈>를 분석한 논문이 나왔습니다.(6) 그런데 이 논문에서 연구자는 『겁쟁이 윌리』를 ‘독립적인 문제 해결 및 해피엔딩’의 스토리로 분석하였습니다(이 논문 148쪽 참고). 그런데 이 그림책에서 윌리는 자신의 문제를 독립적으로 해결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또한 마지막에 전봇대에 부딪히고 “어머, 미안합니다.”라고 말한 윌리의 모습이 '해피엔딩으로 끝났다'고 해석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러한 분석이 글과 그림을 면밀하게 살펴보지 않았기에 발생된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위의 논문처럼 이 그림책을 분석한 어른들은 이 책을 어린이에게 소개해줄 때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여 행복하게 된 이야기’로 설명을 해주겠지요. 이 책을 읽고 난 아이들은 전혀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말이지요.
(1) https://www.youtube.com/watch?v=ImRrQ-TUF-Y 앤서니 브라운 ‘겁쟁이 윌리’ 출간 30주년 기념 인터뷰
(2) 앤서니 브라운, 조 브라운 (2011) 앤서니 브라운 나의 상상 미술관. 웅진 주니어. 86~91쪽.
(3) 현은자, 김주아, 국경아 (2018) 존 클라센의 <모자 삼부작>에 대한 세계관적 접근. 어린이문학교육연구 제 19권 제 4호 199-224쪽
(4) 정소영(2020) 고전이 알려주는 생각의 기원: 네 생각은 어디에서 왔니? 서울: 도서출판 렉스 32~42쪽
(5) 마틴 솔즈베리, 모랙 스타일스(2012) 그림책의 모든 것. 서울: 시공사 75쪽에서 재인용
(6) 이수경(2021) 앤서니 브라운 그림책 <윌리 시리즈>에 나타난 옛이야기 특성. 동화와 번역 제 42집 145~171쪽
| 강다혜 | 성균관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 연구원 대학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하고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아동문학으로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지금은 성균관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 부설 그림책 전문가과정에서 "그림책과 유아동교육"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
앤서니 브라운 『겁쟁이 윌리』 허무함의 굴레에 빠지다
‘자존감’은 아동 양육과 교육에 있어서 핵심 키워드입니다. ‘자아존중감’이라고도 부르는 자존감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가치적 평가에서 형성됩니다. 어떤 부모님들은 자신의 아이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멋지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높은 자존감을 갖길 바라지요.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과 교제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타인이 자신에게 내리는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어렵지요.
저희 큰 딸이 13살이 되자, 또래 관계 안에서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대해 굉장히 예민해졌습니다. 유치원을 다니며 처음 또래 관계를 경험한 제 딸은 친구들이 놀자고 다가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하던 놀이를 계속 하곤 했지요. 초등학교 저학년이 되어도 친구들과 함께 놀지 않고 혼자 노는 것을 좋아하더니 사춘기에 접어 들면서 뒤늦게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에 관심을 갖네요. 그러던 어느 날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엄마 나는 자존감이 낮은 것 같아.”
“너 ‘자존감’이 어떤 것인지 아니?”
“내가 얼마나 능력이 좋고 자신감이 많은 사람인지 설명하는 거 아냐?”
“그럼 왜 네가 자존감이 낮다고 생각하니?”
저의 물음에 제 딸은 자신이 무엇을 못하는지, 자신이 어떤 면이 부족한지에 대해서 술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잘 들어보면, 사회적 관계를 바탕으로 내리는 자기자신의 평가입니다. 친구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체육시간에 피구를 잘 못해서 친구들이 공을 자기에게 주지 않는다, 친구가 자기에게 조금 부당하게 대했는데 화를 내거나 맞받아치지 못하고 당하기만 한 것 같다, 가끔은 친구들이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등이 그 이유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저의 마음이 짐작 가시나요? 어떤 부분에서는 감정이 앞서 ‘그런 친구와는 놀지 말아라!’라는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왔지요. 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의 평가와 상관없이 엄마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설명해주었습니다. 물론 아이의 말 중에서 몇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 하겠지만, 네가 못하는 것이 있고 때론 멋진 모습을 아닐 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너의 모습 그대로 너무 소중하고 귀하다고 다독여주었지요. 그랬더니 저희 아이는 친구들보다 자신에게 소중한 엄마가 나를 사랑하며 가치롭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마음을 추스르며 기뻐하였습니다. ‘자존감’은 일종의 교육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아이는 자신의 존재가 왜 소중한지 배워야 하지요.
이러한 측면에서 앤서니 브라운의 『겁쟁이 윌리』를 읽은 아이는 어떤 자존감을 가지게 될지 함께 생각해볼까 합니다. 앤서니 브라운은 ‘윌리’가 자신의 내면의 자아(shadow of myself in some way)라고 소개하며 『겁쟁이 윌리』는 자신에게 굉장히 의미가 큰 책이라고 말합니다.(1) 이 그림책은 디자인 측면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 첫번째 책이기도 하지만, 자신도 어린시절 책 내용과 비슷한 경험을 하였고 어린 아이들이 자신의 삶에 대처하는 방식이 그림책 속 윌리의 모습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네요.(2)
윌리는 파리 한 마리도 잡지 못하며 길을 걸을 때도 벌레를 밟을까봐 걱정을 합니다. 혹 누군가와 부딪히면 그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어머, 미안합니다.”라고 말하지요. 그래서 윌리는 나쁜 친구들에게 괴롭힘도 많이 당합니다. 그래서 그는 변하기로 결심합니다. 체조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특별한 음식을 먹고, 에어로빅과 권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근육을 키우기 위해 노력한 결과 윌리는 커다란 덩치와 멋진 근육을 가지게 되었지요. 이제 밀리라는 여자 고릴라를 괴롭히던 나쁜 친구들은 윌리가 나타나자마자 도망쳐 버립니다. 밀리가 고마움의 표현으로 윌리에 볼에 키스를 하고 윌리는 더 이상 겁쟁이가 아닌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워 합니다. 그런데 미처 보지 못한 전봇대에 ‘쾅’하고 부딪히는데 그때 윌리는 “어머, 미안합니다.”라고 말하지요. 이 장면에서 윌리는 커다란 덩치에 멋진 근육을 가진 모습이 아닙니다. 첫 장면에 나왔던 파리도 못 잡고 벌레도 못 밟으며 나쁜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초라한 모습으로 되돌아갔지요.
이 책을 읽은 저희 큰 딸은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엄마 나도 이 윌리랑 똑같아.”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마지막에 윌리는 다시 나약한 본 모습으로 돌아가잖아. 겉모습이 아무리 멋지고 좋게 바뀌어도 사실 본래의 내 모습은 바뀌지 않는 거지. 나도 그런 것 같아. 무언가 바뀌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나약한 모습이 원래 내 모습인 거지. 그건 안 바뀌는 거야.”
저희 딸은 이 책에서 앤서니 브라운이 숨겨 놓은 여러 장치들을 발견했습니다. 몸을 키운 윌리가 거울을 보며 만족하고 있는 장면에서 거울 옆 탁자 위에 있는 흑백 액자를 발견했지요. 그 액자에는 머리 위에 먹구름을 달고 근심 어린 표정으로 서 있는 윌리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윌리를 표현한 색감의 변화도 발견했지요. 첫 장면의 구부정한 윌리는 연한 파스텔로 칠해져 있고 외곽선도 희미한데, 변한 윌리는 채색이 진하고 선명하게 바뀌었고, 외각선도 뚜렷해 집니다. 그런데 밀리를 구해준 후 자신만만하게 길을 가다 전봇대에 부딪히는 윌리의 모습이 4컷 병렬 구조로 배열된 화면에서 윌리의 채색이 점점 연해지는 것 같다네요. 그러다 마지막 장면에서 전봇대에 사과하는 윌리는 첫 장면의 모습대로 작고 구부정하지만 채색도 분명 다시 연해졌으며 외각선도 희미해진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저희 아이는 이러한 장치들을 통해 이 그림책이 ‘겉모습이 변할지라도 윌리는 본 모습은 그대로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원래대로 돌아간다. 너의 나약함은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답니다.
왜 앤서니 브라운은 열심히 노력했으나 결국은 변하지 못한 윌리의 모습으로 책을 마무리 지었을까요? 저는 이 책에서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는 메시지를 발견하고 굉장히 허무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우리 아이도 저와 같은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하필이면 사춘기에 접어들어 자존감에 대해 고민이 많은 제 딸이 이러한 감정을 느꼈기에 저는 참 속상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매일의 사회생활 속에서 상처를 받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타인이 자신에게 내리는 평가가 만족스럽지 않을 때는 자기자신에게 실망하기도 하겠지요. 그러면서 자존감은 자꾸만 낮아집니다. 그렇기에 부모는 아이의 나이와 상관없이 매일 아이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아이는 결코 가치 없는 아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존재 자체로 아름답고 귀중한 아이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 그림책은 우리 아이를 허무함의 굴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듭니다. 현은자, 김주아, 국경아(2018)는 존 클라센의 작품을 분석한 연구에서 허무주의 세계관을 발견하고 제임스 사이어의 견해를 소개합니다.(3) 허무주의란 어떤 지적 체계라기 보다 하나의 느낌으로 경험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공허로 말미암은 고통, 즉 가치도 없고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는 삶으로 인한 고통의 느낌입니다. 이 책을 덮고 아이에게 제일 처음 든 생각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아무리 우리가 노력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 너는 나약하고 겁쟁이인 그대로일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허무한 감정이 우리 아이의 머리와 마음 속에 박혀 있으며 아이의 자존감을 갉아 먹을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속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이 후 아이와 많은 대화를 했습니다. 우선 ‘겁쟁이 윌리’가 과연 가치 없는 존재인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저희 아이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합니다. 윌리가 자기 잘못이 아니더라도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을 ‘나약한 행동’이라고만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저희 아이는 친구가 자신에게 부당하게 대했을 때, 화를 내면 더 큰 싸움으로 번질 수 있으니 참고 넘어간 적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 그 친구와 다시 이야기 나누어 오해를 풀고 서로에게 상한 감정을 풀어냈지요. 저희 아이는 이 일을 굉장히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담임 선생님께 칭찬을 받기도 하지만, 분내거나 싸우지 않고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 스스로도 지혜롭게 잘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윌리의 위와 같은 행동은 분명 평가 절하를 받을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한답니다. 그래서 저는 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그림책에서는 윌리의 이런 모습을 ‘겁쟁이’라고 했을까?”
“이 그림책 작가가 다른 사람을 이기거나 우위에 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 아닐까?”
“왜 다른 사람의 우위에 서야 할까?”
“내가 더 강하고 멋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깔보고 싶어서 그런 거 같아.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서 더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은거지”
저는 아이와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대화를 이어나갔습니다.
“왜 윌리는 자신의 근육을 키운 것일까?”
“외모가 멋있어 지고, 강해보이고 싶어서 그랬겠지?”
“근육이 많으면 멋있어?”
“남자들은 근육이 많고 얼굴이 잘생기고, 여자는 날씬하고 예쁜 얼굴을 가지고 싶어 하잖아.”
“왜 얼굴이 예쁘거나 잘생긴 것이 좋은 것일까?”
“외모가 멋있거나 예쁘면 다른 사람들이 다 좋아하고 부러워하니까 아까 우리가 말한 것처럼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설 수 있잖아.”
저희 아이와 나눈 대화의 내용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적 세계관에서 나오는 가치들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다윈이 말하는 ‘자연선택’, ‘생존경쟁’, ‘적자생존’ 등은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므로 생존 경쟁을 해야 하고 자연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과정에서 적합하지 못하면 소외되고 멸종되고 말지요.(4) 그렇기에 우리들은 남들보다 우위에 서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이 세상을 살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 시대의 흐름을 잘 타야 하며,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의 우위에 서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외모는 나를 다른 사람보다 더 낫게 보이게 하는 강점이므로 이를 가꾸어 내 삶의 무기로 삼아야 하는 것이지요.
이 책을 읽고 저희 딸과 찾아낸 이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변할 수 없다’는 허무주의적 비관 말고도, ‘다른 사람을 이겨서 우위를 차지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가치있는 사람이다’, ‘멋진 외모를 가져야 한다’ 등의 진화론적 세계관인 적자생존, 약육강식, 외모지상주의 입니다. 이를 찾아내고 나서 제 딸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이 그림책은 나같은 아이 혼자 보면 안되겠다. 내가 엄마랑 같이 읽었으니까 이 책의 문제점을 찾았지. 혼자 봤으면 몰랐을거야. 그냥 노력해봤자 소용없다는 메시지때문에 허무한 느낌만 계속 들었을 거 같아.”
그림책은 그 자체로서 예술로 인정받기도 하지만, 다양한 교육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중요한 매체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는 그림책이 전달력이 강한 매체라는 사실을 방증하지요. 그림책은 독자가 모르는 사이, 세상이 말하는 관점과 시각을 가르치고 이를 받아들이게 합니다. 아이를 양육하거나 교육하는 어른들은 그림책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유명한 작가가 그렸거나, 공인된 상을 수상하였다고 무조건 좋다고 할 것이 아니라, 그 책이 말하는 가치와 기준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림책에 대한 위상이 날로 높아져 가는 요즘은 그림책의 독자를 어린이로만 한정 짓지 않습니다. 그림책을 사랑하고 즐기는 어른들이 많아지고 있기에, 그림책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림책이 예술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그 지평이 넓어졌다고 말하지요. 그렇기에 저는 그림책을 대하는 어른들은 '하나의 중요한 책무'를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림책을 꼼꼼하고 면밀하게 읽어 그림책에 담긴 주제가 이를 읽는 어린이들에게 어떻게 전달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그림책 학자 바바라 베이더는 그림책은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기록이자 무엇보다도 어린이에게는 하나의 경험’이라고 하였습니다.(5) 우리는 이를, 그림책을 읽는 어린이들이 그 세계의 사회와 문화 그리고 역사를 그림책으로 경험한다고 풀이해도 좋을 것입니다. 즉, 어린이들은 그림책을 통해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을 경험합니다. 그림책을 즐기는 어른들은 이러한 가치들이 우리 어린이들이 전인적으로 성장하는데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고민해야 할 책무가 있지 않을까요? 최근 앤서니 브라운의 <윌리 시리즈>를 분석한 논문이 나왔습니다.(6) 그런데 이 논문에서 연구자는 『겁쟁이 윌리』를 ‘독립적인 문제 해결 및 해피엔딩’의 스토리로 분석하였습니다(이 논문 148쪽 참고). 그런데 이 그림책에서 윌리는 자신의 문제를 독립적으로 해결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또한 마지막에 전봇대에 부딪히고 “어머, 미안합니다.”라고 말한 윌리의 모습이 '해피엔딩으로 끝났다'고 해석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러한 분석이 글과 그림을 면밀하게 살펴보지 않았기에 발생된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위의 논문처럼 이 그림책을 분석한 어른들은 이 책을 어린이에게 소개해줄 때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여 행복하게 된 이야기’로 설명을 해주겠지요. 이 책을 읽고 난 아이들은 전혀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말이지요.
(1) https://www.youtube.com/watch?v=ImRrQ-TUF-Y 앤서니 브라운 ‘겁쟁이 윌리’ 출간 30주년 기념 인터뷰
(2) 앤서니 브라운, 조 브라운 (2011) 앤서니 브라운 나의 상상 미술관. 웅진 주니어. 86~91쪽.
(3) 현은자, 김주아, 국경아 (2018) 존 클라센의 <모자 삼부작>에 대한 세계관적 접근. 어린이문학교육연구 제 19권 제 4호 199-224쪽
(4) 정소영(2020) 고전이 알려주는 생각의 기원: 네 생각은 어디에서 왔니? 서울: 도서출판 렉스 32~42쪽
(5) 마틴 솔즈베리, 모랙 스타일스(2012) 그림책의 모든 것. 서울: 시공사 75쪽에서 재인용
(6) 이수경(2021) 앤서니 브라운 그림책 <윌리 시리즈>에 나타난 옛이야기 특성. 동화와 번역 제 42집 145~171쪽
강다혜 | 성균관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 연구원
대학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하고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아동문학으로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지금은 성균관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 부설 그림책 전문가과정에서 "그림책과 유아동교육"을 강의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