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해 질 녘』 자연의 빛, 도시를 밝히는 빛

2022-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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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도에 번역되어 출간되었던 유리 슐레비츠의 『겨울 저녁』이 『겨울 해 질 녘』으로 개정되어 출간되었습니다. 원제목이 ‘DUSK(황혼, 땅꺼미)’ 라니 더 알맞은 한글제목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겨울 해 질 녘(DUSK)』을 감상하다보니 저절로 『새벽(DAWN)』이 생각납니다.

20여년 전 유리 슐레비츠의 그림책 『새벽』을 보며 느꼈던 흥분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호숫가 나무 아래 잠을 청합니다. 서늘하고 습한 대지 위로 담요 하나 의지하여 잠을 청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느낌일까요? 삐걱거리는 노를 저어 호수 한 가운데까지 나아가는 그 새벽의 풍경은 마침내 산 위로 눈부시게 비치며 솟아오르는 태양을 맞이하며 마무리됩니다. 자연을 향한 경외감과 언어와 그림의 표현력은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만드는 마술 같았습니다. 그림책이 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바로 그 『새벽』의 마지막 장면이었던, 호수와 산 위로 떠오르던 태양은 『겨울 해 질 녘』의 도시를 온통 붉게 물들이며 노을져가는 석양과 묘하게 겹쳐집니다. 표지를 살펴보면 저무는 석양의 노란빛이 강물과 건물 위로 강하게 반사되며 보랏빛 건물들의 그림자와 대조를 이루며 해질 녘의 분위기를 물씬 풍깁니다. 산책하는 노인과 소년과 개의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 역시 곧 해가 지고 저녁이 될 것을 감지하게 해줍니다.

제목에서 이미 겨울임을 알려주고 있지만 길가에 쌓여 있는 눈의 흔적이 한 겨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석양이 남기는 마지막 빛으로 인해 약간의 따스함이 남아 보이지만 금새 추워질텐데 이들이 얼른 집에 가서 따뜻한 난롯가에 몸을 녹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다르게 이들에게 추위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아 보입니다. 할아버지와 아이의 산책길을 따라가 볼까요?

한 아이가 개를 데리고 수염 할아버지와 함께 산책을 나오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산책’이라는 단어만으로도 벌써 마음이 살랑살랑 부드러워집니다. 산책은 몸의 건강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마음과 정신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따스한 날의 산책도 좋지만 겨울날 두꺼운 외투와 모자와 장갑과 목도리로 무장하고 나서는 한 겨울 산책은 우리 몸과 영혼을 더욱 풍요롭게 해줄 것 같습니다. 더구나 할아버지와의 산책이라니 더 깊은 의미로 다가옵니다.

유대인인 유리 슐레비츠는 할아버지와의 교감이 특별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자손 대대로 이어지는 유대인들의 특별한 가정교육은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대를 이어 지혜와 지식이 전수되기에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 3대가 세대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께서 직접 손자 손녀에게 삶의 의미와 지식을 가르치시는 모습은 현대인들이 놓쳐서는 안될 소중한 전통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그림책 속 아이는 할아버지와 온종일 손 붙잡고 정다운 대화를 나누며 삶의 지혜과 즐거움과 목적을 배웠을 것입니다. 


겨울이에요. 

낮이 짧아졌습니다. 

밤은 길어졌고요.


짧고 단순한 문장이 이렇게도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이 바로 유리 슐레비츠의 힘인것 같습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어느 곳에서나 똑같이, 세상이 작동하고 있음에 경외감과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듭니다. 웅크리기 쉬운 겨울이지만 짧아진 낮시간 끝자락에 지팡이 들고 산책을 나선 할아버지와 손자의 모습이 건강하고 아름답습니다. 강가에 이를 무렵 표지에서 보았던 그 노을지는 석양을 볼 수 있습니다.

셋이 나란히 도시로 돌아갈 때쯤에는 서둘러 걷는 사람들로 거리가 북적이기 시작합니다. 거리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해지는 시간을 만끽하며 활기차게 갈길을 재촉합니다. 건물들이 점점 흐릿해지고 하늘도 어둑해집니다. 햇빛이 사라지면서 도시는 불을 켜기 시작합니다. 하나가 켜지고 또 하나가 켜지고, 줄지어 가로등이 빛을 밝힙니다.

거리에는 갖가지 조명이 개성을 뽐내고, 창문을 통해서도 밝은 불빛이 새어 나옵니다. 메노라(촛대)의 촛불과 트리에 밝혀진 색색의 작은 불빛들을 보니 크리스마스 시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거리의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서 악기연주를 듣습니다. 크고 화려한 건물일수록 더욱 아름답게 크리스마스 장식품이 쇼윈도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상점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붙잡고, 거리의 사람들은 선물 한 보따리씩 안고 지나갑니다.

많은 가게들 중에서 특별히 할아버지께서 들리신 곳이 Children’s Books 이네요. 너무 반가워서 그림 속 책장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봅니다. 밤이 깊어질수록 도시는 새로운 빛을 발합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행복으로 가득합니다. 『새벽』 마지막 장면이 할아버지와 손자가 호수 위에서 산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마무리 되듯이, 『겨울 해 질 녘』의 마지막 장면은 도시가 온통 알록 달록 환하게 빛을 뿜어내며 마무리 됩니다. 아이가 외칩니다. “대낮처럼 환해요!”

도시의 아름다움과 순수함이 노을지는 풍경과 어우러지며 밤이 깊어질수록 자연의 빛은 사라지지만 서서히 도시는 새로운 빛의 향연으로 채워집니다. 유리 슐레비츠의 섬세함이 묻어나오는 각종 가게의 진열대와 이웃 집 창문을 통해 엿볼 수 있는,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정함이 전해집니다. 거리를 걷는 활기찬 사람들의 표정과 몸가짐을 통해 도시의 품격이 전해집니다. 음악이 연주되고 있는 거리를 산책하며 알록달록 전구들이 밝힌 다양한 가게들과 책방들 사이로 이토록 충만한 크리스마스 축제를 보낼 수 있는 도시는 어디일까 생각해봅니다. 밤이 아름다웠던 체코의 프라하도 생각나고 매일 밤 석양을 보며 감동했던 하와이도 생각납니다.

상상속의 그림책처럼 완벽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이지만 해지는 노을에 길어지는 그림자를 바라보며 산책을 나서고 싶어집니다. 내가 사는 동네를 산책하며 가게와 이웃을 축복하고 싶습니다. 한 겨울 크리스마스가 특별히 더 아름다워지는 거리와 골목이 되기를 바라며 이 거리를 아름답게, 내가 사는 도시를 아름답게, 삶이 아름다운 향기가 되도록 가꾸어가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도시가 산책하기에 아름다운 도시라면 참 좋겠습니다.



  • 겨울 해 질 녘(Dusk)
  • 그림작가 유리 슐레비츠(Uri Shulevitz)
  • 글작가 유리 슐레비츠 
  • 번역 이상희
  • 페이지 36 쪽
  • 출판사 시공주니어
  • 발행일 2021-12-20





임해영 | 그림책박물관 운영

일러스트레이터들을 위한 산그림 (picturebook-illust.com)을 운영하고 있으며, 다음세대에게 아름다운 그림책을 전하기 위하여 그림책을 역사적으로 정리하는 그림책박물관 (picturebook-museum.com)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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