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의 세계관


경계 안의 삶이 누리는 자유

2022-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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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안의 삶이 누리는 자유


지금 우리 사회는 ‘경계(boundary) 없는 삶’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참과 거짓, 선과 악, 진리와 비진리, 남성과 여성, 가족과 비가족, 아버지와 어머니, 인간과 동물, 실제 세계와 가상 세계 등. 우리 삶의 기초를 흔들고 있는 이 ‘경계 없음’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KJV 창 3: 5)라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선악과를 먹고 자신들도 신과 같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그 결과 본래 영생을 누리도록 창조되었던 인간은 생명 나무로의 접근이 금지되고 낙원에서 추방되어 먼지로 돌아가는 슬픈 운명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제 현대의 과학기술은 인간이 기계가 되고 기계가 인간이 된다는 트랜스휴먼(trans-human)의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인공 지능과 나노 기술, 로봇 기술의 힘을 빌려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새로워 보이지만 결코 새것이라 할 수 없는 이 모험 이야기는 결국 어떤 결말을 가져올까요?

버지니아 리 버튼의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 레오 리오니의 『물고기는 물고기야』, 윌리암 스타이그의 『아모스와 보리스』는 모두 그림책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작품들입니다. 이 세 이야기는 문학적으로 몇 가지 특성을 공유합니다. 우선 모험 모티프(motif)라는, 픽션의 대표적인 문학적 전략입니다. 여기에서 주인공은 한두 가지의 심리적 결핍을 경험하며,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합니다. 따라서 이 이동은 신체적인 것만이 아니라 심리적, 혹은 사회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공통점은 의인화된 캐릭터입니다. 기관차라는 기계, 호수에서 사는 물고기와 올챙이(후에 개구리가 되는), 그리고 육지 동물인 생쥐와 해양 동물인 고래입니다. 서사에 등장하는 의인화된 캐릭터는 그것이 동식물과 같은 생명체든, 아니면 사물이든 간에 인간의 속성을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 체험의 중요한 측면을 이야기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들은 말하는 자와 보는 자, 모두 3인칭 시점이므로 독자들은 등장인물의 생각과 행동을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자세히 보기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의 주인공은 기관차 치치입니다. 이 작품은 흑백의 목탄화로 그려져 투박해 보이지만 그림은 거의 모든 장면이 대각선 구도를 사용하고 있어 속도감과 역동감을 자아내며, 글 텍스트 또한 기찻길처럼 보이게 하는, 아이코노텍스트(iconotext)의 효과를 십분 발휘하는 작품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여기 꼬마 기관차가 있어요. 이름은 치치라고 하지요. 치치는 새까맣고 반짝반짝 빛나는, 예쁘고 귀여운 기관차랍니다.” 그런데 사실 치치가 이렇게 멋진 모습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기관사 짐과 조수 몰리 아저씨가 항상 치치를 닦고 기름칠해 주었기 때문이지요.

어느 날 치치는 자신이 혼자 달린다면 훨씬 더 빨리 달릴 수 있고 모든 사람이 자신만 쳐다보면서 자신의 멋진 외모에 감탄할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래서 다음 날 아저씨들이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 쉬고 있을 때 냅다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치치가 건널목의 신호도 무시하고 내달리는 바람에 철로 옆의 사람들과 건널목을 건너던 차들 모두 넘어지고 부딪히며 대소동이 벌어집니다. 다리를 건너다 탄수차를 잃어버리기까지 한 치치는 몇십 년 동안 기차가 오가지 않은, 아주 오래된 낡은 기찻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치치는 자신에게 동력을 제공할 탄수차도 없어 오르막길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동안 짐 아저씨는 사람들과 동물들의 도움을 받아 치치를 찾아내고 큰 역으로 데려옵니다. 짐과 몰리 아저씨는 치치에게 다친 곳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춥니다. 치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짐 아저씨에게 말합니다. “아저씨, 이제 다시는 도망하지 않을게요. 도망쳐 봤자, 별로 재미도 없더라구요. 앞으로는 사람들을 가득 채운 객차랑, 짐을 잔뜩 실은 화차를 끌며 작은 마을에서 대도시까지 왔다 갔다, 왔다 갔다만 할 거예요.”

     
<물고기는 물고기야> 자세히 보기


레오 리오니의 『물고기는 물고기야』는 ‘교훈을 주기 위한 짧은 이야기’인 우화로 분류되는 작품입니다. 물고기와 개구리의 대화 위주인 글과 경쾌하고 강렬한 원색의 꼴라주 그림은 언어적이며 시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주인공인 물고기와 올챙이는 연못에서 사이좋게 살고 있는 친구입니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나자 올챙이는 몸에서 다리가 나오더니 개구리가 되어 그 연못을 떠나버렸습니다. 개구리가 없는 동안 어른이 된 물고기는 친구 개구리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합니다. 어느 날 개구리가 행복한 얼굴로 연못으로 돌아와 세상에 나가 신기한 것들을 많이 보았다며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날개와 다리가 둘 달리고 깃털이 알록달록한 새, 다리가 네 개이고 뿔이 달리고 풀을 뜯어 먹고 분홍색 젖이 달린 젖소, 남자, 여자, 아이들과 같은 사람... 자신의 인식의 틀에 따라 나름대로 그 형상들의 이미지를 상상하던 물고기는 호기심을 억누를 길 없어 온 힘을 다해 둑으로 뛰어오릅니다. 그러나 물 밖에 떨어진 물고기는 곧 숨을 쉴 수도, 몸을 움직일 수도 없어 숨만 헐떡거리는 신세가 됩니다. 마침 근처에서 놀고 있던 개구리가 물고기를 발견하고 다시 연못 속으로 밀어 넣어 줍니다. 정신을 차린 물고기는 개구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말이 맞았어. 물고기는 물고기야!”


     
<아모스와 보리스> 자세히 보기


『아모스와 보리스』는 위대한 스토리텔러(great storyteller)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윌리암 스타이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작품입니다. 바닷가에 사는 생쥐 아모스는 매일 바다를 바라보며 바다 저 멀리에 어떤 세계가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는 주도면밀하게 항해를 준비하고 만조가 되기를 기다려 바다로 떠납니다. 바다의 신비와 아름다움에 푹 빠져 있던 아모스는 갑작스러운 파도 때문에 배와 준비물을 모두 잃고 망망대해에 혼자 남겨집니다. 바다에 떠서 하룻밤을 넘기고 다음 날 낮이 되자 살 소망이 없어진 아모스는 자신의 죽음과 죽음 이후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때 큰 고래 보리스가 등장하여 아모스를 구해주고, 아모스는 이제 모험은 실컷 했으니 보리스에게 집으로 데려가 달라고 합니다(사실 보리스는 전 세계 고래들의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떠난 참이었지요).

아모스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그들은 서로의 꿈과 비밀을 나누며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갑니다. 아모스는 집으로 돌아오고, 그들은 각자 뭍과 물에서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느날 바다에 사나운 폭풍 허리케인이 불어닥쳐서 이번엔 보리스가 아모스가 사는 해변으로 밀려옵니다. 태풍의 피해를 살펴보려고 바닷가로 나온 아모스가 몸이 말라 죽게 된 보리스를 발견합니다. 친구를 구하기 위해 아모스는 가장 큰 코끼리 두 마리에게 부탁해 보리스를 바닷속으로 굴려 넣습니다. 목숨을 건진 보리스는 “바닷속 감촉이 얼마나 좋은지 제대로 알려면 바다 밖으로 나가보지 않으면 안 돼. 그렇고 말고, 고래라면”이라고 중얼거리고 바다 깊은 곳으로 헤엄쳐 갔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작별인사를 하는 주인공을 대신하여 서술자는 이렇게 이야기를 맺습니다. “아모스와 보리스는 서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하지만, 서로를 절대로 잊지 않으리란 것도 알고 있었어.”

이 세 작품은 모험, 죽음, 구원자, 집을 떠남, 돌아옴과 같은 문학의 모티프를 반복합니다. 주인공들은 다른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에 이끌려 모험을 감행합니다. 그러나 낯선 세상에서 그들은 위기의 순간을 맞게 되고, 다행히 구원자를 만나 생명을 건지게 됩니다. 거추장스런 객차와 화차를 떼어버리고 자신을 뽐내기 위해 일탈을 감행한 치치, 자신이 만들어 낸 뭍의 이미지에 이끌려 뭍으로 뛰어 오른 물고기, 바다 너머 세상을 동경하여 항해를 시작한 아모스, 그리고 자신의 의지가 아닌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해변으로 떠밀려 온 보리스. 그들이 자신의 경계를 벗어난 이유는 다양하지만 모두 자신의 집에 돌아와 안정감과 만족감과 기쁨을 되찾습니다. 생명을 나눈 아모스와 보리스에게 이별은 분명히 슬픈 일이었겠지만 성숙해진 그들은 그들의 우정을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기고 헤어집니다.

경계 안에 거한다는 것은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 그 이상의 가치를 뜻합니다. 그것은 ‘자유’입니다. 치치는 정해진 선로 위에서 자유롭게 달릴 수 있게 되었고, 물고기는 연못 속에서 마음껏 헤엄칠 수 있게 되었고, 아모스와 보리스는 각자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서 행복한 삶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유는 때로는 물리적인 생명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지닙니다. 자유 없는 생명은 노예나 종과 같은 굴종의 삶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자유를 얻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 고귀한 인물들을 칭송하는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경계 안에 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 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의 일탈 이후 그 선(線)을 넘으려는 시도는 수없이 재현되었습니다. 급기야 19세기에 등장한 진화론이 과학의 이름으로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허물어트리자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 형상의 담지자(image bearer of God)가 아니라 우연의 소산물로 여겨졌습니다. 그 다음에는 인간의 성(性)의 경계가 무너져 기존의 성을 가리키던 남(男)과 여(女))라는 단어는 언어유희의 놀이감이 되어 LGBTQ를 비롯한 수십 개의 명칭으로 치환되었습니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사람, 밤낮으로 성정체성이 변하는 사람, 의료기술의 힘으로 다른 성(性)이 된 사람, 남성이지만 여성으로 불리기를 원하는 사람, 그리고 그 반대의 존재 등. 그런데 만일 인간이 우연의 산물이라면 성(性)이 무엇이든, 인간이 동물이 되든, 기계가 되든, 심지어 돌이 되든 매한가지가 아닐까요?

그림책의 이야기는 줄거리가 간결하므로 그 주제가 더욱 선명한 형태로 드러납니다. 기관차와 물고기와 쥐와 고래가 엮어내는 이 비유의 이야기들은 여느 학자의 글보다도 간명하게 인간됨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함축합니다. 우리는 버지니아 리 버튼이 1943년 그의 작품 『작은 집 이야기』의 칼데콧 수상 연설에서 한 이 말을 오랫동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기초적인 것은 항상 가장 중요하며, 좋은 예술은 확실히 기초적인 것이다. 아동도서라는 미디어를 통해 어린 마음에 인상을 주는 것은 어린이에게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진실된 개념을 줄 수 있는 가장 가능한, 좋은 일이다(1).



(1) Elleman, B. (2004). The picture-book story in twentieth-century America westport. In Pavonetti, L. M. (Eds.), Children’s literature remembered: issues, trends, and favorite books (pp. 27-38). CO: Libraries Unlimited.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후 Eastern Michigan University 에서 석사,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어린이문학교육학회 회장 및 한국 기독교 유아교 육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아동 청소년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대학 부설 생활과 학 연구소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기독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이해>(공저), <그림책과 예술교육>(공저>, <그림책으로 보는 아동과 우리사회>(공저), <100권의 그림책>(공저) 등 그림책 관련 저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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