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아 그림책의 세계관 읽기
엄마들은 왜 아기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려고 하는 것일까요? 아기와 스킨십을 갖기 위해서, 재미있게 놀기 위해서, 아기의 주의를 돌리려고, 말을 가르치려고, 글자를 가르치려고, 창의성 발달을 위해서 등, 책 읽어주는 엄마의 의도나 목적에 따라 그 이유는 매우 다양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림책이라는 사물에 대해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던 문제를 다루어볼까 합니다.
그것은 그림책은 허구의 세상을 보여주고(display)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림 이미지들은 3차원적 실물을 2차원적 이미지로 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밀히 말한다면 실재를 모방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작가가 사물을 그림책으로 보여주려 한다면 자신이 그린 이미지들을 사각형의 틀 안에 넣어야 합니다.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보편적으로 그림책은 사각형의 형태를 갖추니까요. 인물이 등장하고 사건이 벌어지는 서사의 형태를 갖춘 이야기라면 서사의 공간만이 아니라 캐릭터의 움직임과 시간의 흐름도 그 틀 안에 배치되어야 합니다.
그림책의 기술적 정의는 ‘도서의 형태를 갖춘 복제 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술이라는 측면에서 그림책이 하는 일은 다른 예술 작품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철학자이자 예술비평가인 월터스토프(N. Wolterstorff)는 이것을 예술의 ‘세계 투영(world projection)’ 기능이라고 말합니다. ‘세계 투영’이 의미하는 바는 모든 예술 작품에는 작가의 사소한 관심사에서부터 그가 세상에 대해 견지하고 있는 생각들과 신념이 배어있다는 것입니다. 그 신념은 존재론적 차원, 즉 ‘이 세상은 어떤 곳인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인간다움이란 어떤 것인가’에 머물지 않고 ‘인간은(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윤리적 차원으로 이어집니다. 다시 말해, 세계 투영 행위에는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display)과 무엇인가를 주장(assert)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의 실천적 본질은 월터스토프의 책인 『행동하는 예술』(Art in Action) 이라는 책 제목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동물농장』의 작가인 조지 오웰(J. Owell)은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All art is propaganda)라는 문학평론집에서 예술의 이러한 기능적 측면을 건드린 바 있습니다. 사실 이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하고 있는 매체는 광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끌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광고들은 만족스러운 삶이 바로 이것이라고, 이것을 따르라고 끊임없이 호소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예술의 ‘세계 투영’ 기능은 가장 단순한 형태의 그림책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위 자조기술(self-help) 즉, 먹기, 옷 입기, 대소변 가리기, 잠자기를 가르치는 그림책들을 예로 들어볼까요. 고미 타로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누구나 눈다』는 부드럽고 코믹한 그림과 필체의 그림책인데 아기의 배변훈련을 도와주는 것으로 유명한 작품입니다. 앞표지의 그림에는 네 개의 사각형 이미지 안에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발그레한 얼굴에 눈썹이 올라가 있는, 그래서 아랫도리에 힘을 주고 있는 듯한 아기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그 옆에는 말의 엉덩이, 그 아래에 한 입 베어진 빨간 사과, 그 옆에는 청둥오리의 옆 모습이 보입니다. 본문 첫 화면의 가운데에는 코끼리의 옆 모습과 그 엉덩이 밑에 대변 덩어리가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고 오른편 아래에는 작은 생쥐의 옆 모습과 엉덩이 밑에 작고 검은 물체들이 보입니다. 글은 그림에 대한 설명입니다: 코끼리 옆에는 “커다란 코끼리는 큰 똥”, 생쥐 옆에는 “조그만 생쥐는 작은 똥”. 책장을 넘기면 같은 방식으로 동물과 그의 똥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혹이 하나 있는 낙타, 둘이 있는 낙타, 물고기, 새, 각종 포유류, 뱀, 고래 등 동물들은 크기도 다양하고 서식처도 다르지만 각기 다른 크기와 형태의 똥을 눕니다.
다음 장면에서 작가는 동물들이 배변하는 자세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마처럼 서서 누는 똥”, “사슴처럼 걸으면서 누는 똥”, “토끼처럼 여기저기에 누는 똥” 하더니, 아기가 화장실에 가는 모습 옆에 “정해진 곳에 누는 똥”. 그 후에는 배변하는 장소를 보여줍니다. 누는 강변에서 배변하고 악어는 그 물속에서 배변합니다. 그런데 아까 화장실에 들어갔던 아기는 변기에 배변하고 독자를 향해 만족스럽게 웃으며 “나는 휴지로 닦고 물로 씻지요” 라고 말합니다. 결론 부분에서는 동물들과 아기가 독자를 향해 나란히 정렬하여 음식을 먹는 장면을 보여준 후, 모두 뒤로 돌아 배변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모두 서서 땅에 똥을 누지만 아기는 등을 보이고 변기에 앉아 배변합니다. 그리고 “동물들은 누구나 먹기 때문에 모두 모두 똥을 누지요.”라고 마무리됩니다.
이 작품이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인간됨(humanness)에 관한 것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게 들리겠지요? 동물들과 인간 아기는 먹고 배변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그 방식에는 매우 큰 차이가 존재합니다. 동물이 배변하는 행위에는 별다른 준비가 필요없지만 인간의 배변 행위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정해진 장소에서 도구를 이용하여야 하며 배변한 후에는 휴지로 뒤를 씻고 물을 내려 자신의 배설물이 보이지 않게 처리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수세식 변기가 갖추어진 문명 사회에서나 가능한 것이겠지만 그러한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회라 하더라도 인간의 배변 행위는 동물의 그것과는 다를 것이 확실합니다.
우리는 “인간다움”이 무엇인가를 논할 때 추상적인 개념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인간다움이란 탄생의 순간부터 학습됩니다. 부모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먹고, 입고, 씻고, 배변하는 행위와 규칙을 배우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배변 행위는 그저 단순한 자조기술이 아니라 진·선·미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추구하는 행위이며, 자기를 통제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미덕을 배워나가는 인간다운 행위입니다.
역시 영아 그림책으로 분류되는 『손이 나왔네』(하야시 아키코 글, 그림)을 살펴보기로 하지요. 표지에는 기저귀를 찬, 벌거벗은 아기가 머리에 드리워진 빨간 천을 두 손으로 잡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본문의 첫 장면에는 아기가 머리부터 온몸에 두른 빨간 천 안에서 팔을 휘젓고 있는 그림과 함께 “꼼지락 꼼지락 아무 것도 안 보이네. 손은 어디 있을까?”라는 글이 있습니다. 지금 아기는 천 속에서 머리와 손을 빼고자 분투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 다음 장면에서 왼손이 나오고, 그 왼손으로 천을 잡아당겨 머리, 얼굴, 오른손, 오른발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제 왼발만 남았습니다. 아기는 왼발을 천 밖으로 내기 위해 애를 쓰다가 마침내 왼손으로 천을 획 잡아당겨 왼발을 빼냅니다. 매우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기 옆에 3인칭 서술자는 “이제는 다 나왔지? 손, 머리, 얼굴, 발!”라고 말합니다.
이 작품은 언뜻 보면 아기에게 옷 입기를 가르치는 책처럼 보이지만 제목이 보여주듯이 손에 관한 책입니다. 아기들은 생후 3-4개월부터 자신의 손을 사용하는 방법을 익히게 됩니다. 처음 아기가 사물을 향해 손을 뻗는 이유는 그것을 잡아 빨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눈과 엄지와 집게 손가락의 협응이 가능할 때까지는 사물을 제대로 잡지 못합니다. 아기가 자신의 엄지와 집게로 사물을 잡아 힘을 주어 붙들 수 있게 된 후에도 그것을 입 안으로 넣어 빨기 위해서는 손가락의 각도를 입의 위치에 맞게 조정해야 합니다. 떡뻥을 빠는 아기들은 그것의 크기가 작아짐에 따라 손가락의 위치를 수시로 바꾸어서 떨어뜨리지 않게 해야 합니다. 수없이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아기의 모습이 안스러워 엄마가 도와주기도 하지만 결국 그 일은 아기의 몫입니다. 아기는 혼자 있을 때 종종 자신의 손가락 열 개를 유심히 들여다 보기도 하고 한 개씩 꼬물거려 보기도 합니다. 두 손을 맞잡기도 하고 가만히 모빌의 끈도 잡아당겨 보기도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손과 손가락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 쓰임을 알아 나가면서 아기는 문화창조자(culture-maker)로서의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술의 본질은 『누구나 눈다』와 『손이 나왔네』와 같은 매우 단순한 영아 그림책에도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림책은 그냥 보고 즐기는 대상이 아닙니다. 예술과 마찬가지로 그림책도 엄청나게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아기의 놀이감이 되기도 하며, 아름다운 언어와 그림 이미지를 들려주고 보여주기도 하고, 기쁨과 슬픔을 표현하기도 하고, 지식을 전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물에 관한 정보책을 포함하여 인간과 의인화된 인물이 등장하는 모든 그림책은 인간에 관해, 그리고 이 세상에 관해 무엇인가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림책에 투영된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글과 그림을 세심히 읽고, 작가가 세상과 인간에 대해 견지하고 있는 근본 신념을 찾아보려고 노력하고, 그 신념들을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작가의 세계관을 지적인 체계로 정리하는 것이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술작품에 대해, 그리고 그림책에 대해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생각하도록 훈련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나 일반인들의 서평은 그 작품이 독자 개인에게 주는 느낌이나 정서의 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그림책의 세계관적 읽기’는 직관적이거나 감각적 읽기가 주지 못하는 많은 유익을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우리의 삶에 은밀히 스며들어 우리의 생각과 생활 방식의 일부가 된 세계관을 확인하게 해 줍니다. 그런 세계관은 우리의 문화 속에 숨어 있는 까닭에 우리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세상과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놀랍게도 그림책은 어떤 매체보다도 그러한 세계관을 전파하는, 매우 호소력있는 장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림책을 읽으며 우리를 이끌어가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이야기를 이루는 신념 체계를 끄집어내어 성찰할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온전하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여러분들이 그림책 연구자라면 ‘행동하는 예술’로서 그림책을 다룰 수 있는 풍부한 지적 자원을 손에 넣게 될 것입니다.
|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후 Eastern Michigan University 에서 석사,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어린이문학교육학회 회장 및 한국 기독교 유아교 육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아동 청소년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대학 부설 생활과 학 연구소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기독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이해>(공저), <그림책과 예술교육>(공저>, <그림책으로 보는 아동과 우리사회>(공저), <100권의 그림책>(공저) 등 그림책 관련 저서가 있습니다. |
영아 그림책의 세계관 읽기
엄마들은 왜 아기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려고 하는 것일까요? 아기와 스킨십을 갖기 위해서, 재미있게 놀기 위해서, 아기의 주의를 돌리려고, 말을 가르치려고, 글자를 가르치려고, 창의성 발달을 위해서 등, 책 읽어주는 엄마의 의도나 목적에 따라 그 이유는 매우 다양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림책이라는 사물에 대해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던 문제를 다루어볼까 합니다.
그것은 그림책은 허구의 세상을 보여주고(display)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림 이미지들은 3차원적 실물을 2차원적 이미지로 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밀히 말한다면 실재를 모방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작가가 사물을 그림책으로 보여주려 한다면 자신이 그린 이미지들을 사각형의 틀 안에 넣어야 합니다.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보편적으로 그림책은 사각형의 형태를 갖추니까요. 인물이 등장하고 사건이 벌어지는 서사의 형태를 갖춘 이야기라면 서사의 공간만이 아니라 캐릭터의 움직임과 시간의 흐름도 그 틀 안에 배치되어야 합니다.
그림책의 기술적 정의는 ‘도서의 형태를 갖춘 복제 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술이라는 측면에서 그림책이 하는 일은 다른 예술 작품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철학자이자 예술비평가인 월터스토프(N. Wolterstorff)는 이것을 예술의 ‘세계 투영(world projection)’ 기능이라고 말합니다. ‘세계 투영’이 의미하는 바는 모든 예술 작품에는 작가의 사소한 관심사에서부터 그가 세상에 대해 견지하고 있는 생각들과 신념이 배어있다는 것입니다. 그 신념은 존재론적 차원, 즉 ‘이 세상은 어떤 곳인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인간다움이란 어떤 것인가’에 머물지 않고 ‘인간은(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윤리적 차원으로 이어집니다. 다시 말해, 세계 투영 행위에는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display)과 무엇인가를 주장(assert)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의 실천적 본질은 월터스토프의 책인 『행동하는 예술』(Art in Action) 이라는 책 제목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동물농장』의 작가인 조지 오웰(J. Owell)은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All art is propaganda)라는 문학평론집에서 예술의 이러한 기능적 측면을 건드린 바 있습니다. 사실 이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하고 있는 매체는 광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끌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광고들은 만족스러운 삶이 바로 이것이라고, 이것을 따르라고 끊임없이 호소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예술의 ‘세계 투영’ 기능은 가장 단순한 형태의 그림책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위 자조기술(self-help) 즉, 먹기, 옷 입기, 대소변 가리기, 잠자기를 가르치는 그림책들을 예로 들어볼까요. 고미 타로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누구나 눈다』는 부드럽고 코믹한 그림과 필체의 그림책인데 아기의 배변훈련을 도와주는 것으로 유명한 작품입니다. 앞표지의 그림에는 네 개의 사각형 이미지 안에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발그레한 얼굴에 눈썹이 올라가 있는, 그래서 아랫도리에 힘을 주고 있는 듯한 아기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그 옆에는 말의 엉덩이, 그 아래에 한 입 베어진 빨간 사과, 그 옆에는 청둥오리의 옆 모습이 보입니다. 본문 첫 화면의 가운데에는 코끼리의 옆 모습과 그 엉덩이 밑에 대변 덩어리가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고 오른편 아래에는 작은 생쥐의 옆 모습과 엉덩이 밑에 작고 검은 물체들이 보입니다. 글은 그림에 대한 설명입니다: 코끼리 옆에는 “커다란 코끼리는 큰 똥”, 생쥐 옆에는 “조그만 생쥐는 작은 똥”. 책장을 넘기면 같은 방식으로 동물과 그의 똥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혹이 하나 있는 낙타, 둘이 있는 낙타, 물고기, 새, 각종 포유류, 뱀, 고래 등 동물들은 크기도 다양하고 서식처도 다르지만 각기 다른 크기와 형태의 똥을 눕니다.
다음 장면에서 작가는 동물들이 배변하는 자세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마처럼 서서 누는 똥”, “사슴처럼 걸으면서 누는 똥”, “토끼처럼 여기저기에 누는 똥” 하더니, 아기가 화장실에 가는 모습 옆에 “정해진 곳에 누는 똥”. 그 후에는 배변하는 장소를 보여줍니다. 누는 강변에서 배변하고 악어는 그 물속에서 배변합니다. 그런데 아까 화장실에 들어갔던 아기는 변기에 배변하고 독자를 향해 만족스럽게 웃으며 “나는 휴지로 닦고 물로 씻지요” 라고 말합니다. 결론 부분에서는 동물들과 아기가 독자를 향해 나란히 정렬하여 음식을 먹는 장면을 보여준 후, 모두 뒤로 돌아 배변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모두 서서 땅에 똥을 누지만 아기는 등을 보이고 변기에 앉아 배변합니다. 그리고 “동물들은 누구나 먹기 때문에 모두 모두 똥을 누지요.”라고 마무리됩니다.
이 작품이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인간됨(humanness)에 관한 것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게 들리겠지요? 동물들과 인간 아기는 먹고 배변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그 방식에는 매우 큰 차이가 존재합니다. 동물이 배변하는 행위에는 별다른 준비가 필요없지만 인간의 배변 행위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정해진 장소에서 도구를 이용하여야 하며 배변한 후에는 휴지로 뒤를 씻고 물을 내려 자신의 배설물이 보이지 않게 처리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수세식 변기가 갖추어진 문명 사회에서나 가능한 것이겠지만 그러한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회라 하더라도 인간의 배변 행위는 동물의 그것과는 다를 것이 확실합니다.
우리는 “인간다움”이 무엇인가를 논할 때 추상적인 개념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인간다움이란 탄생의 순간부터 학습됩니다. 부모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먹고, 입고, 씻고, 배변하는 행위와 규칙을 배우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배변 행위는 그저 단순한 자조기술이 아니라 진·선·미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추구하는 행위이며, 자기를 통제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미덕을 배워나가는 인간다운 행위입니다.
역시 영아 그림책으로 분류되는 『손이 나왔네』(하야시 아키코 글, 그림)을 살펴보기로 하지요. 표지에는 기저귀를 찬, 벌거벗은 아기가 머리에 드리워진 빨간 천을 두 손으로 잡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본문의 첫 장면에는 아기가 머리부터 온몸에 두른 빨간 천 안에서 팔을 휘젓고 있는 그림과 함께 “꼼지락 꼼지락 아무 것도 안 보이네. 손은 어디 있을까?”라는 글이 있습니다. 지금 아기는 천 속에서 머리와 손을 빼고자 분투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 다음 장면에서 왼손이 나오고, 그 왼손으로 천을 잡아당겨 머리, 얼굴, 오른손, 오른발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제 왼발만 남았습니다. 아기는 왼발을 천 밖으로 내기 위해 애를 쓰다가 마침내 왼손으로 천을 획 잡아당겨 왼발을 빼냅니다. 매우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기 옆에 3인칭 서술자는 “이제는 다 나왔지? 손, 머리, 얼굴, 발!”라고 말합니다.
이 작품은 언뜻 보면 아기에게 옷 입기를 가르치는 책처럼 보이지만 제목이 보여주듯이 손에 관한 책입니다. 아기들은 생후 3-4개월부터 자신의 손을 사용하는 방법을 익히게 됩니다. 처음 아기가 사물을 향해 손을 뻗는 이유는 그것을 잡아 빨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눈과 엄지와 집게 손가락의 협응이 가능할 때까지는 사물을 제대로 잡지 못합니다. 아기가 자신의 엄지와 집게로 사물을 잡아 힘을 주어 붙들 수 있게 된 후에도 그것을 입 안으로 넣어 빨기 위해서는 손가락의 각도를 입의 위치에 맞게 조정해야 합니다. 떡뻥을 빠는 아기들은 그것의 크기가 작아짐에 따라 손가락의 위치를 수시로 바꾸어서 떨어뜨리지 않게 해야 합니다. 수없이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아기의 모습이 안스러워 엄마가 도와주기도 하지만 결국 그 일은 아기의 몫입니다. 아기는 혼자 있을 때 종종 자신의 손가락 열 개를 유심히 들여다 보기도 하고 한 개씩 꼬물거려 보기도 합니다. 두 손을 맞잡기도 하고 가만히 모빌의 끈도 잡아당겨 보기도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손과 손가락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 쓰임을 알아 나가면서 아기는 문화창조자(culture-maker)로서의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술의 본질은 『누구나 눈다』와 『손이 나왔네』와 같은 매우 단순한 영아 그림책에도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림책은 그냥 보고 즐기는 대상이 아닙니다. 예술과 마찬가지로 그림책도 엄청나게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아기의 놀이감이 되기도 하며, 아름다운 언어와 그림 이미지를 들려주고 보여주기도 하고, 기쁨과 슬픔을 표현하기도 하고, 지식을 전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물에 관한 정보책을 포함하여 인간과 의인화된 인물이 등장하는 모든 그림책은 인간에 관해, 그리고 이 세상에 관해 무엇인가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림책에 투영된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글과 그림을 세심히 읽고, 작가가 세상과 인간에 대해 견지하고 있는 근본 신념을 찾아보려고 노력하고, 그 신념들을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작가의 세계관을 지적인 체계로 정리하는 것이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술작품에 대해, 그리고 그림책에 대해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생각하도록 훈련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나 일반인들의 서평은 그 작품이 독자 개인에게 주는 느낌이나 정서의 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그림책의 세계관적 읽기’는 직관적이거나 감각적 읽기가 주지 못하는 많은 유익을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우리의 삶에 은밀히 스며들어 우리의 생각과 생활 방식의 일부가 된 세계관을 확인하게 해 줍니다. 그런 세계관은 우리의 문화 속에 숨어 있는 까닭에 우리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세상과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놀랍게도 그림책은 어떤 매체보다도 그러한 세계관을 전파하는, 매우 호소력있는 장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림책을 읽으며 우리를 이끌어가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이야기를 이루는 신념 체계를 끄집어내어 성찰할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온전하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여러분들이 그림책 연구자라면 ‘행동하는 예술’로서 그림책을 다룰 수 있는 풍부한 지적 자원을 손에 넣게 될 것입니다.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후 Eastern Michigan University 에서 석사,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어린이문학교육학회 회장 및 한국 기독교 유아교 육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아동 청소년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대학 부설 생활과 학 연구소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기독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이해>(공저), <그림책과 예술교육>(공저>, <그림책으로 보는 아동과 우리사회>(공저), <100권의 그림책>(공저) 등 그림책 관련 저서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