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보여주는 창, 그림책

2021-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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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여주는 창, 그림책



어린이들이 보는 그림책은 창(window)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부족한 유아들은 그림책을 통해 세상의 많은 것들을 보게 됩니다. 그림책의 그림은 실물이 아니라 이차원적인 이미지에 불과하지만 부모가 그것의 이름을 부르고 유아가 그 언어와 이미지의 대응 관계를 알아차리게 되면서 그들의 마음속에서 주변 세상은 서서히 자리를 잡아갑니다. 


이 비유를 잘 보여주는 두 그림책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찰스 키핑 글, 그림의 <창 너머>라는 작품과 아라이 료지 글, 그림의 <아침에 창문을 열면>입니다. 우선 <창 너머>를 살펴보도록 하지요. 앞뒤 표지를 펼치면 레이스 커튼 사이의 창을 통해 얼굴을 반쯤 내민 소년이 크게 뜬 오른쪽 눈으로 독자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면지의 전면(全面)은 흰색 레이스 커튼으로 장식되어 있고, 표제지에서는 표지에 등장했던 큰 눈의 소년이 방 왼편에 놓인 의자에 두 손을 모으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오전의 햇살에도 불구하고 실내에 있는 가구들과 사물의 윤곽은 흐릿합니다. 본문 첫 장면에서 서술자는 이 소년의 이름이 ‘제이콥’이며 그가 이층 거실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이 길이 제이콥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 그래서 그에게는 이 길이 세상의 전부라고 말합니다. 창 오른편 벽에는 해군 군복을 입은 남자의 액자가 걸려 있는데, 이 인물은 아마도 해군에 복무하던 그의 아버지를 그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커튼 사이로 드러난 소년의 이마 위에 맞은편 교회 건물 위의 십자가 그림자가 뚜렷하게 비칩니다. 글은 이 교회에서 사람들은 결혼식을 하고 장례식을 했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제이콥은 이 창문을 통해 인간의 가장 행복한 시간과 슬픈 시간을 관찰했을 것입니다. 그 오른편 장면에서는 더 많이 열린 커튼 사이로 교회 건물의 전모가 드러납니다. 이후부터 그림 이미지는 제이콥이 커튼을 열어 젖힌 만큼의 거리 풍경을 보여줍니다. 전반적으로 푸르고 붉은 색조로 그려진 거리의 풍경은 음울하게 느껴집니다.  



교회와 꼬부랑할머니가 사는 집의 문, 양조장, 알프네 과자 가게 다음에 소년은 집 밖으로 나온 꼬부랑 할머니와 그의 비쩍 마른 개, 청소부 위레트씨, 양조장 짐마차, 제이콥과 동년배인듯한 소년인 조지가 차례로 지나가는 것을 봅니다. 제이콥은 사람들에게 침을 뱉곤 하는 조지를 싫어하지만, 알프네 과자 가게로 들어가는 그를 보고 부러워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두 마리의 흰색 비둘기들이 하늘로 날아오르더니 양조장을 뛰쳐나온 말들이 무서운 속도로 질주합니다. 마부와 양조장 사람들이 입을 벌린 채 그 말들을 쫒아가고 위레트씨와 쭈그렁 할머니가 그 뒤를 따라갑니다. 이 긴박한 사건들을 커튼 사이로 훔쳐 보면서 소년은 자신은 이 층에 있으니 안전하다고 안도합니다. 조금 후 마부가 말들을 제어하여 돌아오지만 쭈그렁 할머니는 축 늘어진 개를 안고 슬퍼하는 듯이 보이며 안고 있는 개의 몸에는 붉은 상처가 여럿 보입니다. 그 다음 화면에서 제이콥 쪽으로 구부러진 등을 보이고 있는 할머니 뒤에서 마부가 두 손을 펴서 할머니에게 무엇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고 그 뒤에서는 다섯 명의 양조장 사람들이 죄지은 사람들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제이콥은 “우리 개가 말하고 싸운 걸 거야. 그래 분명히 그랬을 거야.”라고 애써 불안함과 두려움을 숨기려 합니다. 이제 제이콥의 엄마가 차를 끓이려고 이층으로 올라올 시간입니다. 소년은 유리창에 입김을 후욱 불고는 할머니가 자신의 개를 안고 있는 모습을 그립니다. 할머니와 개가 함빡 미소짓고 있는 그 그림에서는 눈물처럼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아침에 창문을 열면>의 분위기는 <창 너머>와는 사뭇 다릅니다. 표지에는 화병에 꽂힌 흰 꽃과 붉은 꽃이 가득하고, 표제지에는 하단에 분홍빛 꽃무늬가 수놓아져 있는 밝은 빛깔의 커튼이 창에 드리어져 있습니다. 본문 첫 장면에서는 화면을 가득 채운 진초록의 높은 산과 그 산기슭 밑의 붉은 지붕의 작은 집, 그리고 활짝 열려진 창이 보입니다. 그 창을 두 팔을 뻗어 활짝 열고 있는 인물은 그 형체가 너무 작아 주의 깊은 독자가 아니라면 인지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이 시 그림책은 “아침이 밝았어요. 창문을 활짝 열어요”라고 시작되는, 일곱 개의 연(stanza)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림 이미지에서는 각 연의 내용과 대응되는 풍광들이 차례로 펼쳐집니다: 높은 산과 나무, 차와 사람으로 북적이는 도시, 유유히 흐르는 강과 강에서 뛰노는 물고기, 따뜻한 햇살이 내려앉은 집 앞 흙길, 구릉 위의 밭, 푸른빛 바다. 독자들은 이야기 중간 이후에야 비로소 처음에 그 형체를 알 수 없었던 인물이 실은 아주 작은 소녀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소녀는 의자 위에 서서 자기 키보다 훨씬 높은 유리창을 활짝 열고 밖을 보고 있는 중입니다. 그 뒤에는 식탁 위에 소박한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는데 식탁 위에 물컵이 두 개 놓인 것을 보아 소녀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케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를 읊고 있는 화자는 바로 이 소녀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에 그려진 다채로운 이미지들은 대부분 소녀의 상상이거나 혹은 소녀의 기억으로 그려진 것이겠지요. “아침이 밝았어요. 창문을 활짝 열어요”로 시작된 시의 연은 항상 “나는 (혹은 우리는) 이곳이 좋아요.”로 마무리됩니다. 그 목소리에는 만족감과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곳이 높은 산이던, 마을이던, 사람들이 북적이는 도시던, 시골길이나 유유히 흐르는 강이던, 꽃이 가득한 정원이던, 바다이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창조세계는  그 자체가 소녀에게 기쁨입니다. “바다는 오늘도 저기에 있고 하늘도 역시 저기에 있어요. 그래서 나는 이곳이 좋아요”.


소녀는 집 안에 머물지 않고 밖으로 나와 나무 그늘에서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맞으며 즐거워하기도 하고, 때로는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그 쪽 마을은 날씨가 맑게 개었나요?”라고 말을 건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소녀가 사는 바닷가 마을과 흰 구름이 둥실 떠 있는 맑은 하늘 그리고 파란 바다가 펼져집니다. 그리고 또 다시 반복되는, “창문을 활짝 열어요.”라는 목소리는 마치 우리에게 “다음은 당신 차례에요” 속삭이는 듯합니다.

    

<창 너머>와 <아침에 창문을 열며>가 독자에게 보도록 허락하는 세상에는 매우 큰 간극이 존재합니다. 전자는 자신의 집 앞 골목에서 벌어진 외로운 할머니의 개의 죽음을 그리고 있는  반면, 후자는 다채롭고 약동하는 창조 세계를 보여줍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한다면, 전자는 닫힌 세상이며 후자는 열린 세상입니다. 그것은 보는 방식과 깊이 맞물려 있습니다. 제이콥은 자신이 칩거하고 있는 이층 거실에서 길 위의 사람들과 사건을 커튼 사이로 내려다 보고 있으며, 독자 또한 그가 벌려 놓은 커튼 사이로 보여지는 세상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아침에 창문을 열면>의 소녀의 시야는 산과 들과 도시와 정원과 바다로 확장되고 있을 뿐 아니라, 독자에게도 그들의 창문을 열어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얻으라고 촉구합니다.


그런데 정확히 말한다면 이 소녀는 제이콥처럼 유리로 만든 창을 통해 밖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창을 열고 우주의 공기와 햇빛을 한껏 맛보고, 결국 집 밖으로 나와 바닷가의 높은 야자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습니다. 대자연과 하나가 된 이 소녀는 “오늘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나무 그늘이 내 방이에요. 언제나 살랑살랑 바람이 불지요. 역시 나는 이곳이 좋아요.”라고 노래합니다. 제이콥의 세상은 모호함과 불안감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 반면, 이 이름 모를 소녀의 세상은 환희와 기대와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어린이들이 보고 있는 그림책은 바로 이러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림책과 창의 형태도 똑같이 사각형이라는 점도 함축하는 바가 큽니다. 그림책의 무대에서도 우리의 세상과 마찬가지로 나름의 시공간이 펼쳐지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캐릭터가 등장하며,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펼쳐진 세상은 그림책을 덮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어린이 독자의 마음 어딘가에 새겨져서 언젠가 살아 움직이며 그에게 말을 건넬 것입니다. C. S. 루이스(1898-1963)는 <문학비평에서의 실험>이라는 책에서 자신은 어렸을 때 베아트리스 포터의 <피터 래빗 이야기>에 그려진,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동물들에게 매료되었다고 회상합니다. 그의 마음속에 각인된 말하는 동물들은 그의 유명한 판타지 소설인 <나니아 연대기>에서 신화적 캐릭터로 구현되어 인간 주인공들과 함께 나니아 너머의 세상을 향해 모험을 떠나 마침내 영원한 나라로 들어갑니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신의 자녀들이 살아갈 세상은 지금보다 더 행복하고 안전한 곳이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 세상은 미야자끼 하야오가 말한, 어린이들에게 “이 세상에 태어나기를 잘 했다”라고 응원하고 환대하는 세상이고, C.S.루이스가 말한, 우리 모두가 ‘갈망(longing)’하는 세상입니다. 제이콥이 입김으로 그린, 웃음 짓고 있는 할머니와 개는 바로 그러한 세상에 대한 갈망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림책들은 어떤 식으로 어린 생명들을 환대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아직 만나본 적이 없지만 누구나 마음 깊이 갈망하는 세상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과연 그림책에 그런 힘이 있을까요? 저는 그렇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과 함께 그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후 Eastern Michigan University 에서 석사,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어린이문학교육학회 회장 및 한국 기독교 유아교 육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아동 청소년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대학 부설 생활과 학 연구소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기독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이해>(공저), <그림책과 예술교육>(공저>, <그림책으로 보는 아동과 우리사회>(공저), <100권의 그림책>(공저) 등 그림책 관련 저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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