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을 해석한다는 것은?
: 의미(meaning)와 의의(significance)를 구분하기

미술비평가인 테리 배릿(Terry Berrett)은 미술 비평이 묘사, 해석, 평가 그리고 이론화작업을 포함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1) 여기에서 이론화작업은 비평가들의 몫이니 이것을 제외하면, 그림책 비평 혹은 서평은 묘사, 해석, 평가를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은 해석(interpretation)이다.
해석은 그동안 텍스트의 ‘의미를 발견하기’로 이해되어 왔다. 즉, 그 텍스트가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서 해석을 이렇게 정의하는 것은 매우 순진한 태도로 여겨질지 모른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 진리를 거부하므로 텍스트의 해석에 있어서도 어떤 단수의, 특정한 의미가 존재함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텍스트에서 가장 적합한(adequate)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기 대신, 독자의 자의적인 해석을 우대한다. 그들은 해석은 저자의 의도나 텍스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고 주장한다. 즉, 해석이라는 행위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이다. 또 그런 해석을 부추기는 플롯도 있다. 소위, ‘열린 결말’이라는 플롯을 가진 서사인데, 얼핏 보면, 독자에게 해석의 무한한 자유를 허용하여 독자를 존중하는 듯하지만, 해석의 자유가 주는 유익은 무엇인가라는 의구심을 떨쳐 버리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해석에서의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21:25)가 아닐까.
이 글에서는 K. Vanhoozer의 해석학을 차용하여 의미(meaning)와 의의(significance)를 구별함으로써 그림책 해석이라는 행위를 더 깊이있게 살펴보고자 한다. 신학자이자 해석학자인 그는 『텍스트에 의미가 있는가』(Is there a meaning in this text?)(1998/2003) 라는 저서에서 성경해석이 다루는 영역이 성경 이외의 텍스트로 확장될 수 있음을 논증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필자는 그의 책 2부에서 다루어진 의미와 의의에 대한 논증이 그림책에도 합리적이며 정당하게 적용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럼, 의미란 무엇인가? 그에 따르면 의미란 ‘의도된 의미’이다. 다시 말해, 작가가 의도한 의미이다. 그에 따르면 텍스트에는 단 하나의 의미만 있다. 이것은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를 인정하는 성경 해석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인간 저자가 창작한 모든 텍스트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렇지만 하나의 의미만 있다는 것이 100% 옳은 해석이 존재할 수 있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독자는 문학적 지식과 작가 연구를 기초로 그 텍스트에 담긴 작가의 의도를 추론할 수 밖에 없으며, 무엇보다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 때문에 완벽한 해석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항상 더 적합한(adequate) 의미는 있을 수 있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즉, 모든 해석은 동등하게 취급받을 수 없으며 분명히 어떤 해석은 다른 것보다 상대적으로 더 적합하다.
그럼 의의란 무엇인가? 의의는 확대된 의미, “재상황된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독자들이 텍스트의 의미를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사회적, 역사적, 정치적 상황에 연결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의의는 의미와는 달리 구체적인 컨텍스트와 구체적 독자들에 대해 상대적이며 복수가 될 수 있다. 즉, 동일한 의미가 여러 다른 상황에서 여러 다른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다. 밴후저는 독서의 유익은 의미를 찾는 것만이 아니라 의의를 찾는 것도 포함된다고 하여 의의 발견의 필요성을 피력하며 독서의 생명력은 의의를 찾는 것에도 있다고 강조한다. 의미와 의의의 차이를 밴후저는 이렇게 구별한다. “의도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지식의 문제인 반면, 의의를 찾는 것은 지혜의 문제”다. 의의는 지식 습득이 아니라 지식에 대한 음미와 올바른 사용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만일 성경 말씀이 모든 영역에서도 진리, 즉 완전한 진리(total truth)임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텍스트가 주는 의의도 그것과 관련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 필자의 그림책 평론에서 의미와 의의가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분석해 보기로 한다. 앤소니 브라운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고릴라』는 부성애를 추구하는 소녀의 소원성취 서사로서 해석되곤 한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아버지가 한나에게 생일 선물로 준 고릴라 인형이 밤중에 성인 남자로 의인화되어 자고 있는 한나를 깨운 후 둘은 집을 나선다. 고릴라는 한나를 자기 옆구리에 끼고 담장을 넘어 동물원에 들어가(명백한 불법행위임) 우리 안의 침팬지와 고릴라 등 유인원을 구경하고, 저녁식사를 마친 후 심야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고, 한나의 요청에 따라 귀가하다가 탱고 댄스파티에 합류하고, 한나의 집 현관 앞에서 굿 나잇 키스를 나누고 헤어진다. 다음 날 잠자리에서 눈을 뜬 한나는 침대의 이불 안에서 자기를 마주보고 있는 고릴라 인형과 눈웃음을 하고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가 아버지를 만나 아버지(?)와 함께 동물원에 간다. 그런데 이 마지막 장면은 그들의 뒷모습만 보여주고 있기에 성인 남자의 외투를 입은 자가 누구인지는 애매하다. 만약 이 뒷모습의 남자가 아버지라면 이 서사는 부성애에 굶주린 소녀의 소원 성취로서의 개연성을 갖게 될 것이며, 이 텍스트의 의의는 부모교육적인 측면에서 찾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작품에 담긴 글과 그림의 모순관계, 그리고 그림에 그려진 수많은 시각적 상징 등 애매모호한 기호들을 분석하는 가운데 이 서사의 핵심이 부녀 관계의 문제 해결에 있는 것이 아님을 눈치 채게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해석될 수 있겠지만. 서사와는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시각적 기호들의 분석은 이 작품의 심층의미에 다가가게 하였다.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휘슬러의 <어머니의 초상>과 같은 명화 패러디와 공산주의 혁명가인 체 게바라와 영화 감독이자 배우였던 챨리 채플린의 포스터 패러디, 수많은 프리메이슨의 시각적 상징들, 그리고 이 서사를 이끄는 한나와 고릴라의 심야 외출행위는 ‘문화막시즘’이라는 세계관을 투영하고 있었고, 심지어 한나와 고릴라의 관계는 성인의 소아성애를 암시하는 듯 했다. 문화막시즘이란 문화영역을 잠식한 막시즘으로서 서양 문화를 떠받치고 있던 유대-기독교적 가치를 전복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이 작품의 의미가 문화막시즘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이 해석은 어린이 교육에 관여하는 사람들(작가, 츨판인, 부모, 교사 등)이 그림책에 교묘하게 스며든 세계관을 분별하고 경계해야 한다는 의의를 가진다.
존 번닝햄의 다수의 작품들은 대부분 성인과 어린이의 대화의 단절과 그 결과 초래되는 어린이의 소외라는 메시지를 그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과 그림 관계의 기호학적 특성 과 열린 결말 덕분으로 그의 작품은 어린이보다 그림책 평론가들로부터 많은 관심과 칭송을 받아왔다. 그림책 베이직의 2022년 12월호에서 필자는 “존 버닝햄의 백일몽을 꾸는 아이들”이라는 제목 하에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알도』, 『지각대장 존』 『구름나라』, 그리고 두 편의 셜리 시리즈인 『셜리야 목욕은 그만』과 『셜리야, 물가에 가지마!』를 다루었다. 필자는 이 작품들의 의의를 언급하는 가운데 열린 결말의 실용성, 윤리성, 그리고 현실성 측면을 평가하였다. 여기에서 ‘실용성’이란 해석의 자유가 과연 독자에게 읽기의 유익을 주는가의 문제이며 ‘윤리적’ 측면은 모든 해석이 동등하게 대접받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며, ‘현실성’이란 해석의 자유의 가능성 여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현실성 측면에서의 답은 부정적이다.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캐릭터의 관계를 고려할 때 주인공은 다시금 자신의 백일몽에 빠져들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작품에서 그려진 어린이들의 백일몽은 성경의 절대 진리를 부인한 현대인의 딜레마와 허무주의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리스도인의 그림책 읽기는 어떤 텍스트에 대해 반응하고 또 다른 독자들이 그 반응에 대해 생각해 봄으로써 성경적 의의를 드러낼 수 있다. 그림책 베이직의 2023년 4월호에서 다룬 펫 허친스의 『로지의 산책』(Rosie’s Walk)이라는 작품은 어른의 손바닥만한 작은 크기의, 열 장면도 채 되지 않는 지면에서 벌어지는 사건이지만, 흥미로운 글과 그림 관계를 보여준다. 글텍스트는 화창한 어느 날, 집을 나선 암탉 로지가 동네로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동선을 보여주지만, 그림은 로지의 뒤에서 그녀를 잡아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여우의 동선을 보여준다. 그런데 로지의 걷기는 일관성 있고 단순하지만, 여우의 행위는 매우 역동적으로 그려져 있으므로 독자의 시선은 로지보다 여우에게 향하게 된다. 결국 독자들은 그의 모든 시도가 실패하고 꿀벌들의 공격을 받아 줄행랑치는 여우의 모습을 보며 통쾌함을 느끼게 되고, 강자가 제 꾀에 넘어가고 만다는 ‘권선징악’의 교훈을 얻게 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필자는 ‘은혜’라는 성경적 의의를 발견하게 되었다. 오래전 사건을 떠올리며 우리를 눈동자같이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想起)하였던 것이다. 복도식 아파트 1층에 부모님과 나란히 살고 있었던 시기가 있었는데, 사건이 일어난 밤에 부모님의 102호에 절도범이 들었는데, 마침 부모님은 그 날 지방 본가로 내려가 계셔서 빈집인 상태였고, 그 옆 101호에 살던 우리 가족은 남편의 지방 출장으로 인해 나만 아이 둘과 함께 자고 있었다. 이 한 밤중의 소동은 내가 출근한 후 파출부 아주머니의 황급한 전화로 인해 알게 되었고, 나는 옆집에 들었던 도둑이 만일 우리 집으로 건너왔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상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던 것이다.
1987년 칼데콧 메달상을 수상하였고, 국내에서는 2013년 『새가 된 청소부』로 번역되어 출간된 『HEY, AL』(아서 요링크스 글, 리처드 아겔스키 그림)에서도 성경적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AI는 이 텍스트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한다. “현실의 고단함에서 도피하기 위해 선택한 안락함이 때로는 우리의 영혼을 옥죄는 감옥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며, 동시에 부족하더라도 소중한 이와 함께하는 평범한 일상이 가장 빛나는 낙원임을 일깨워주는 작품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인 “The paradise lost is sometimes the heaven found”라는 문장도 “헛된 욕망(가짜 낙원)을 포기했을 때 비로소 곁에 있는 소중한 일상(진정한 천국)을 발견하게 된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텍스트의 글과 그림을 좀 더 촘촘히 읽어 본다면 번역본 제목이 시사하듯 단순한 교훈 이상의 의미와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그림책의 표지는 주인공을 소개하거나 본문의 한 장면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작품의 표지 그림은 본문에 없는 것이다. 표지의 그림은 오래된 호텔 건물의 복도를 청소하고 있는 에디와 알의 뒤에서 엘리베이터의 문을 통해 쏟아져 나온 각양각색의 화려한 새들의 모습이고 그 위에 “HEY, AL”(표지 제목) 이라고 제목이 쓰여져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큰 새는 알과 에디를 낙원으로 데려갔었고, 다른 새들도 알과 에디가 낙원섬에서 만났던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왜 이 장면이 표지로 사용되었을까. 이 사건을 서사에 포함시킨다면, 맨 앞(주인공을 소개하기 전) 아니면 결말(그들이 낙원섬에서 돌아온 후), 둘 중 어느 지점에 위치하는 것이 더 개연성이 있을까.
또 눈여겨봐야 할 장면은 아직 인간의 손을 가지고 지팡이를 짚고 있는 새의 존재다. 이것은 이 새도 과거에는 알처럼 인간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정황들을 고려할 때 이 텍스트의 표면 의미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현실에 만족하자”는 교훈성 메시지를 넘어서는 것이 될 수 있다. 알을 호명하는 “Hey Al!”은 우리에게도 좀 더 안락한 삶, 일하지 않아도 편하게 살 수 있는 삶을 택하라는 목소리가 아닐까. 알과 에디가 낙원섬에서 탈출할 때 새들은 그들의 비상(飛上)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왜 그들을 저지하지 않았을까. 표지에 그려진 것처럼 언제 어디서라도 그들에게 말을 걸고, 유혹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성화(聖化)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는 매 순간 성경의 진리를 따르지 말고 네 자신의 욕구를 따르라는 목소리를 듣고 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문화는 시시 때때로 우리를 호명하며 말을 건넨다. 그것뿐인가. 아직 벗어버리지 못한 우리의 죄성 때문에 우리는 그 목소리에 기꺼이 화답하곤 한다.
성경적 세계관으로 그림책을 조명할 때 우리는 성경에서 그림책으로, 그리고 그림책에서 성경으로 순환하는 ‘해석학적 순환’(2)에 초대받게 된다. 우리는 그림책을 읽으며 심층의미에 다가가고 또 그것에 대해 반응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의의를 나누며 신앙의 공동체로서 서로를 세워줄 수(edify) 있다. 그런데 이 작업이 우리를 절대 진리의 수호자로 자라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나(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이 텍스트가 보여주는 세상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그것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라는 세계관적 질문으로 부단히 자신을 훈련시켜야 한다. 어린이 독자를 겨냥한 듯 보이는 그림책 텍스트 안에도 이 시대의 세계관이 은밀하게 스며들어 있으며, 유명 도서 수상작으로 포장되어 있는 책일수록 더욱 그러하므로 분별력이 필요하다. 현 시대의 그림책 비평가들도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소위 ‘예술적 탁월성’, ‘새로운 것’, ‘창의적인 것’(?)을 우선시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전문가들의 평판에 의지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그림책 읽기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분별에 관한 것이다. 영적 전쟁를 치르고 있는 우리는 그림책 읽기에 있어서도 항상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야겠다.
(1) T. Barrett (2000/2004)l. 미술 비평 (Criticizing Art). 서울: 아트북스
(2) R. Jonstone은 그의 책 [영화와 영성](2000/2003)에서 관객은 성경과 영화 읽기에서 ‘해석학적 순환’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하였다.
 |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이며 그림책 평론 작업을 하고 있다. 미국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1989년부터 2023년까지 성대 아동청소년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2021년부터 웹진 <그림책 베이직>에 '그림책의 세계관'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그림책 세계관 연구소에서 운영하고 있는 '그림책 세계관 지도사 과정'에서 '그림책의 세계관', '기독 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세계관>, 공저로는 <그림책의 이해1, 2>, <그림책과 예술교육>, <세계 그림책의 역사>, <어린이교육전문가가 엄선한 100권의 그림책>, <신앙이 자라는 그림책 읽기> 등 다수가 있다. |
그림책을 해석한다는 것은?
: 의미(meaning)와 의의(significance)를 구분하기
미술비평가인 테리 배릿(Terry Berrett)은 미술 비평이 묘사, 해석, 평가 그리고 이론화작업을 포함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1) 여기에서 이론화작업은 비평가들의 몫이니 이것을 제외하면, 그림책 비평 혹은 서평은 묘사, 해석, 평가를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은 해석(interpretation)이다.
해석은 그동안 텍스트의 ‘의미를 발견하기’로 이해되어 왔다. 즉, 그 텍스트가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서 해석을 이렇게 정의하는 것은 매우 순진한 태도로 여겨질지 모른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 진리를 거부하므로 텍스트의 해석에 있어서도 어떤 단수의, 특정한 의미가 존재함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텍스트에서 가장 적합한(adequate)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기 대신, 독자의 자의적인 해석을 우대한다. 그들은 해석은 저자의 의도나 텍스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고 주장한다. 즉, 해석이라는 행위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이다. 또 그런 해석을 부추기는 플롯도 있다. 소위, ‘열린 결말’이라는 플롯을 가진 서사인데, 얼핏 보면, 독자에게 해석의 무한한 자유를 허용하여 독자를 존중하는 듯하지만, 해석의 자유가 주는 유익은 무엇인가라는 의구심을 떨쳐 버리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해석에서의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21:25)가 아닐까.
이 글에서는 K. Vanhoozer의 해석학을 차용하여 의미(meaning)와 의의(significance)를 구별함으로써 그림책 해석이라는 행위를 더 깊이있게 살펴보고자 한다. 신학자이자 해석학자인 그는 『텍스트에 의미가 있는가』(Is there a meaning in this text?)(1998/2003) 라는 저서에서 성경해석이 다루는 영역이 성경 이외의 텍스트로 확장될 수 있음을 논증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필자는 그의 책 2부에서 다루어진 의미와 의의에 대한 논증이 그림책에도 합리적이며 정당하게 적용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럼, 의미란 무엇인가? 그에 따르면 의미란 ‘의도된 의미’이다. 다시 말해, 작가가 의도한 의미이다. 그에 따르면 텍스트에는 단 하나의 의미만 있다. 이것은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를 인정하는 성경 해석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인간 저자가 창작한 모든 텍스트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렇지만 하나의 의미만 있다는 것이 100% 옳은 해석이 존재할 수 있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독자는 문학적 지식과 작가 연구를 기초로 그 텍스트에 담긴 작가의 의도를 추론할 수 밖에 없으며, 무엇보다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 때문에 완벽한 해석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항상 더 적합한(adequate) 의미는 있을 수 있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즉, 모든 해석은 동등하게 취급받을 수 없으며 분명히 어떤 해석은 다른 것보다 상대적으로 더 적합하다.
그럼 의의란 무엇인가? 의의는 확대된 의미, “재상황된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독자들이 텍스트의 의미를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사회적, 역사적, 정치적 상황에 연결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의의는 의미와는 달리 구체적인 컨텍스트와 구체적 독자들에 대해 상대적이며 복수가 될 수 있다. 즉, 동일한 의미가 여러 다른 상황에서 여러 다른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다. 밴후저는 독서의 유익은 의미를 찾는 것만이 아니라 의의를 찾는 것도 포함된다고 하여 의의 발견의 필요성을 피력하며 독서의 생명력은 의의를 찾는 것에도 있다고 강조한다. 의미와 의의의 차이를 밴후저는 이렇게 구별한다. “의도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지식의 문제인 반면, 의의를 찾는 것은 지혜의 문제”다. 의의는 지식 습득이 아니라 지식에 대한 음미와 올바른 사용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만일 성경 말씀이 모든 영역에서도 진리, 즉 완전한 진리(total truth)임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텍스트가 주는 의의도 그것과 관련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 필자의 그림책 평론에서 의미와 의의가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분석해 보기로 한다. 앤소니 브라운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고릴라』는 부성애를 추구하는 소녀의 소원성취 서사로서 해석되곤 한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아버지가 한나에게 생일 선물로 준 고릴라 인형이 밤중에 성인 남자로 의인화되어 자고 있는 한나를 깨운 후 둘은 집을 나선다. 고릴라는 한나를 자기 옆구리에 끼고 담장을 넘어 동물원에 들어가(명백한 불법행위임) 우리 안의 침팬지와 고릴라 등 유인원을 구경하고, 저녁식사를 마친 후 심야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고, 한나의 요청에 따라 귀가하다가 탱고 댄스파티에 합류하고, 한나의 집 현관 앞에서 굿 나잇 키스를 나누고 헤어진다. 다음 날 잠자리에서 눈을 뜬 한나는 침대의 이불 안에서 자기를 마주보고 있는 고릴라 인형과 눈웃음을 하고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가 아버지를 만나 아버지(?)와 함께 동물원에 간다. 그런데 이 마지막 장면은 그들의 뒷모습만 보여주고 있기에 성인 남자의 외투를 입은 자가 누구인지는 애매하다. 만약 이 뒷모습의 남자가 아버지라면 이 서사는 부성애에 굶주린 소녀의 소원 성취로서의 개연성을 갖게 될 것이며, 이 텍스트의 의의는 부모교육적인 측면에서 찾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작품에 담긴 글과 그림의 모순관계, 그리고 그림에 그려진 수많은 시각적 상징 등 애매모호한 기호들을 분석하는 가운데 이 서사의 핵심이 부녀 관계의 문제 해결에 있는 것이 아님을 눈치 채게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해석될 수 있겠지만. 서사와는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시각적 기호들의 분석은 이 작품의 심층의미에 다가가게 하였다.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휘슬러의 <어머니의 초상>과 같은 명화 패러디와 공산주의 혁명가인 체 게바라와 영화 감독이자 배우였던 챨리 채플린의 포스터 패러디, 수많은 프리메이슨의 시각적 상징들, 그리고 이 서사를 이끄는 한나와 고릴라의 심야 외출행위는 ‘문화막시즘’이라는 세계관을 투영하고 있었고, 심지어 한나와 고릴라의 관계는 성인의 소아성애를 암시하는 듯 했다. 문화막시즘이란 문화영역을 잠식한 막시즘으로서 서양 문화를 떠받치고 있던 유대-기독교적 가치를 전복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이 작품의 의미가 문화막시즘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이 해석은 어린이 교육에 관여하는 사람들(작가, 츨판인, 부모, 교사 등)이 그림책에 교묘하게 스며든 세계관을 분별하고 경계해야 한다는 의의를 가진다.
존 번닝햄의 다수의 작품들은 대부분 성인과 어린이의 대화의 단절과 그 결과 초래되는 어린이의 소외라는 메시지를 그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과 그림 관계의 기호학적 특성 과 열린 결말 덕분으로 그의 작품은 어린이보다 그림책 평론가들로부터 많은 관심과 칭송을 받아왔다. 그림책 베이직의 2022년 12월호에서 필자는 “존 버닝햄의 백일몽을 꾸는 아이들”이라는 제목 하에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알도』, 『지각대장 존』 『구름나라』, 그리고 두 편의 셜리 시리즈인 『셜리야 목욕은 그만』과 『셜리야, 물가에 가지마!』를 다루었다. 필자는 이 작품들의 의의를 언급하는 가운데 열린 결말의 실용성, 윤리성, 그리고 현실성 측면을 평가하였다. 여기에서 ‘실용성’이란 해석의 자유가 과연 독자에게 읽기의 유익을 주는가의 문제이며 ‘윤리적’ 측면은 모든 해석이 동등하게 대접받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며, ‘현실성’이란 해석의 자유의 가능성 여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현실성 측면에서의 답은 부정적이다.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캐릭터의 관계를 고려할 때 주인공은 다시금 자신의 백일몽에 빠져들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작품에서 그려진 어린이들의 백일몽은 성경의 절대 진리를 부인한 현대인의 딜레마와 허무주의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리스도인의 그림책 읽기는 어떤 텍스트에 대해 반응하고 또 다른 독자들이 그 반응에 대해 생각해 봄으로써 성경적 의의를 드러낼 수 있다. 그림책 베이직의 2023년 4월호에서 다룬 펫 허친스의 『로지의 산책』(Rosie’s Walk)이라는 작품은 어른의 손바닥만한 작은 크기의, 열 장면도 채 되지 않는 지면에서 벌어지는 사건이지만, 흥미로운 글과 그림 관계를 보여준다. 글텍스트는 화창한 어느 날, 집을 나선 암탉 로지가 동네로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동선을 보여주지만, 그림은 로지의 뒤에서 그녀를 잡아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여우의 동선을 보여준다. 그런데 로지의 걷기는 일관성 있고 단순하지만, 여우의 행위는 매우 역동적으로 그려져 있으므로 독자의 시선은 로지보다 여우에게 향하게 된다. 결국 독자들은 그의 모든 시도가 실패하고 꿀벌들의 공격을 받아 줄행랑치는 여우의 모습을 보며 통쾌함을 느끼게 되고, 강자가 제 꾀에 넘어가고 만다는 ‘권선징악’의 교훈을 얻게 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필자는 ‘은혜’라는 성경적 의의를 발견하게 되었다. 오래전 사건을 떠올리며 우리를 눈동자같이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想起)하였던 것이다. 복도식 아파트 1층에 부모님과 나란히 살고 있었던 시기가 있었는데, 사건이 일어난 밤에 부모님의 102호에 절도범이 들었는데, 마침 부모님은 그 날 지방 본가로 내려가 계셔서 빈집인 상태였고, 그 옆 101호에 살던 우리 가족은 남편의 지방 출장으로 인해 나만 아이 둘과 함께 자고 있었다. 이 한 밤중의 소동은 내가 출근한 후 파출부 아주머니의 황급한 전화로 인해 알게 되었고, 나는 옆집에 들었던 도둑이 만일 우리 집으로 건너왔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상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던 것이다.
1987년 칼데콧 메달상을 수상하였고, 국내에서는 2013년 『새가 된 청소부』로 번역되어 출간된 『HEY, AL』(아서 요링크스 글, 리처드 아겔스키 그림)에서도 성경적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AI는 이 텍스트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한다. “현실의 고단함에서 도피하기 위해 선택한 안락함이 때로는 우리의 영혼을 옥죄는 감옥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며, 동시에 부족하더라도 소중한 이와 함께하는 평범한 일상이 가장 빛나는 낙원임을 일깨워주는 작품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인 “The paradise lost is sometimes the heaven found”라는 문장도 “헛된 욕망(가짜 낙원)을 포기했을 때 비로소 곁에 있는 소중한 일상(진정한 천국)을 발견하게 된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텍스트의 글과 그림을 좀 더 촘촘히 읽어 본다면 번역본 제목이 시사하듯 단순한 교훈 이상의 의미와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그림책의 표지는 주인공을 소개하거나 본문의 한 장면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작품의 표지 그림은 본문에 없는 것이다. 표지의 그림은 오래된 호텔 건물의 복도를 청소하고 있는 에디와 알의 뒤에서 엘리베이터의 문을 통해 쏟아져 나온 각양각색의 화려한 새들의 모습이고 그 위에 “HEY, AL”(표지 제목) 이라고 제목이 쓰여져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큰 새는 알과 에디를 낙원으로 데려갔었고, 다른 새들도 알과 에디가 낙원섬에서 만났던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왜 이 장면이 표지로 사용되었을까. 이 사건을 서사에 포함시킨다면, 맨 앞(주인공을 소개하기 전) 아니면 결말(그들이 낙원섬에서 돌아온 후), 둘 중 어느 지점에 위치하는 것이 더 개연성이 있을까.
또 눈여겨봐야 할 장면은 아직 인간의 손을 가지고 지팡이를 짚고 있는 새의 존재다. 이것은 이 새도 과거에는 알처럼 인간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정황들을 고려할 때 이 텍스트의 표면 의미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현실에 만족하자”는 교훈성 메시지를 넘어서는 것이 될 수 있다. 알을 호명하는 “Hey Al!”은 우리에게도 좀 더 안락한 삶, 일하지 않아도 편하게 살 수 있는 삶을 택하라는 목소리가 아닐까. 알과 에디가 낙원섬에서 탈출할 때 새들은 그들의 비상(飛上)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왜 그들을 저지하지 않았을까. 표지에 그려진 것처럼 언제 어디서라도 그들에게 말을 걸고, 유혹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성화(聖化)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는 매 순간 성경의 진리를 따르지 말고 네 자신의 욕구를 따르라는 목소리를 듣고 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문화는 시시 때때로 우리를 호명하며 말을 건넨다. 그것뿐인가. 아직 벗어버리지 못한 우리의 죄성 때문에 우리는 그 목소리에 기꺼이 화답하곤 한다.
성경적 세계관으로 그림책을 조명할 때 우리는 성경에서 그림책으로, 그리고 그림책에서 성경으로 순환하는 ‘해석학적 순환’(2)에 초대받게 된다. 우리는 그림책을 읽으며 심층의미에 다가가고 또 그것에 대해 반응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의의를 나누며 신앙의 공동체로서 서로를 세워줄 수(edify) 있다. 그런데 이 작업이 우리를 절대 진리의 수호자로 자라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나(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이 텍스트가 보여주는 세상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그것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라는 세계관적 질문으로 부단히 자신을 훈련시켜야 한다. 어린이 독자를 겨냥한 듯 보이는 그림책 텍스트 안에도 이 시대의 세계관이 은밀하게 스며들어 있으며, 유명 도서 수상작으로 포장되어 있는 책일수록 더욱 그러하므로 분별력이 필요하다. 현 시대의 그림책 비평가들도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소위 ‘예술적 탁월성’, ‘새로운 것’, ‘창의적인 것’(?)을 우선시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전문가들의 평판에 의지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그림책 읽기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분별에 관한 것이다. 영적 전쟁를 치르고 있는 우리는 그림책 읽기에 있어서도 항상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야겠다.
(1) T. Barrett (2000/2004)l. 미술 비평 (Criticizing Art). 서울: 아트북스
(2) R. Jonstone은 그의 책 [영화와 영성](2000/2003)에서 관객은 성경과 영화 읽기에서 ‘해석학적 순환’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하였다.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이며 그림책 평론 작업을 하고 있다. 미국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1989년부터 2023년까지 성대 아동청소년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2021년부터 웹진 <그림책 베이직>에 '그림책의 세계관'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그림책 세계관 연구소에서 운영하고 있는 '그림책 세계관 지도사 과정'에서 '그림책의 세계관', '기독 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세계관>, 공저로는 <그림책의 이해1, 2>, <그림책과 예술교육>, <세계 그림책의 역사>, <어린이교육전문가가 엄선한 100권의 그림책>, <신앙이 자라는 그림책 읽기>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