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의 세계관


친구같은 엄마? : 은희 글, 그림의 『엄마는 언제나 나를 사랑하나요?』

2025-09-08
조회수 917


친구같은 엄마? : 은희 글, 그림의  『엄마는 언제나 나를 사랑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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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모들은 자녀의 부모보다 친구 되기를 원하는 것 같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도 그런 경우가 많겠지만, 딸을 둔 엄마의 경우 누군가 딸과 친구 같이 보인다면, 칭찬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반대로 자녀에게 꼰대 소리를 듣는 것은 부모-자녀 관계의 실패로 여긴다. 챗 GPT에게 물어보니 ‘꼰대’는 본래는 존칭이었으나 오늘날에는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지 않고 자기 방식만 고집하는 사람을 비판하는 말로 자리잡았다고 알려준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부모만이 아니라 나이든 사람들도 언제, 어디에서나 꼰대가 되지 않으려 매우 노력한다. 일방적인 지시가 아니라 소통하고,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공감하고 배려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환영받는 분위기이다. 그렇다. 소통, 공감, 배려의 가치를 부인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최근 나는 은희 글, 그림의 『엄마는 언제나 나를 사랑하나요?』에 그려진 엄마와 여아의 모습을 보며 부모와 자녀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앞표지에는 제목과 함께 알록달록한 비가 오고 있고, 엄마와 아이가 각기 파란 우산을 쓰고 있다, 지금 엄마의 시선은 아이를 향하고 있지만 아이는 물웅덩이를 발로 밟아보며 즐거워하고, 옆에서 강아지도 덩달아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뒤표지에는 “사탕을 많이 먹어서 이가 썩어도 엄마는 언제나 나를 사랑하나요?”라고 묻는 아이의 질문 아래 큰 노랑색 막대 사탕 나무 위에서 사탕을 가지고 놀고, 그네를 타고, 막대사탕을 빨아먹는 아이의 모습이 연이어 그려져 있다. 면지에는 아이가 그린듯한 나무, 꽃, 집, 나비 그림이 두서없이 흩어져 있고 표제지에는 책 제목과 함께  크고 작은 파랑색 우산이 우산 꽂이에 담겨 있다.

이 작품의 글텍스트는 모두 아이와 엄마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림이 인물과 사건, 배경을 묘사한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엄마! 응? 나, 궁금해요. 뭐가 궁금할까? 엄마는 언제나 나를 사랑하나요? 그럼 물론이지.”  막 비가 갠 듯한 하늘에는 한 조각 검은 구름이 엄마의 머리 위에 떠 있고, 크고 작은 우산 두 개가 담겨져 있는 우산 바구니를 오른쪽 어깨에 맨 엄마가 왼손으로 아이의 오른 손을 잡고 있다. 아래는 모녀의 대화를 화면 순서로 번호를 매긴 것이다.  그림 이미지는 괄호 안에 묘사하였다. 


  1. 사탕을 많이 먹어서 이가 썩어도요? 썩을 정도로 많이 먹는다고....?
    (앞표지와 같은 그림)

  2. 엄마의 뾰족구두를 망가트려도요? 뾰족구두? 그건 새로 산 구두인데...
    (아이와 강아지는 엄마의 빨간 구두를 타고 파도놀이를 하고 있으며 아이는 두 손에 구두의 뒤축을 들고 있다.)

  3.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원피스에 그림을 그려도요? 내가 아끼는 원피스에 뭘 한다고?
    (아이가 엄마의 원피스 치마폭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옆에서는 강아지가 붓을 물고 있고)

  4. 엄마 머리카락에 내 풍선껌이 붙었어요. 이제 엄마는 나를 사랑할 수 없을 거예요. 
    (엄마의 머리카락이 큰 풍선껌에  붙어 엄마는 공중으로 올라가고 있다.)

  5. 그런데 말이야! 엄마도 알고 싶어. 너도 언제나 엄마를 사랑하니? 언제나요? 
    (연두빛의 너른 풀밭 왼쪽에 엄마가 비치 의자에 누워있고 아이와 강아지는 풀밭 가운데에서 신나게 놀고 있다. 그런데 엄마의 공간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지만 아이가 놀고 있는 곳의 하늘은 맑은 날씨이다.)

  6. 네가 좋아하는 사탕을 못 먹게 해도? 한 개도 못 먹어요? 
    (“달콤한 사탕나라”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는 서커스 천막 담 안에 엄마가 팔짱을 하고 서 있고 아이는 담 밖에서 당황한 모습이다.

  7. 네가 무서워하는 곳에 데려가도? 그건 좀 싫은데 
    (아이가 큰 강아지를 타고 ‘안아파병원’이라는 간판이 붙은 건물 위를 날아간다.)

  8. 엉킨 긴 머리를 짧게 잘라도? 짧은 머리 공주님도 있는 거죠? 
    (아이는 가운을 입고 미장원의 거울 앞에 서서 슬퍼하고 있다.)

  9. 때로는 네가 원하는 걸 줄 수 없어. 이제 너는 엄마를 사랑할 수 없을 거야. 
    (인형 집어 올리기 게임기에서 집게가 인형 하나를 집어 올리고 있다. )

  10. 그럴 땐 속상해요. 
    (엄마가 앉아있던 풀밭 위로 검은 구름이 비를 뿌리자 엄마가 깔개를 접고 아이는 강아지와 함께 뛰어가다 끈을 놓친다.)

  11. 내 마음대로 못해서 엉엉 울고 싶고 
    (아이는 파란 바다의 파도 속에서 울고 있고. 파도 속에는 우산, 도시락 바구니와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온 듯한 김밥 도시락, 한 입 문 수박, 바나나 등이 떠 있다)

  12. 엄마가 미워서 혼자 있고 싶어져요. 
    (아이는 바닷 속으로 거꾸로 내려가고 있다.)

  13. 그래도 엄마가 다시 내 옆에 있어 주면 좋겠어요. 그래도 엄마를 사랑해요. 그래도 엄마를 사랑한다고? 왜? 
    (엄마는 바닷 속에서 이리저리 아이를 찾고 있다.)

  14. 이유는 없어요. 자고 일어나면 엄마가 다시 사랑스러워요. 
    (엄마는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아이에게 다가간다.)

  15. 엄마도 정말 그렇단다. 언제나 네가 사랑스러워.
    (깊은 물속에서 머리카락과 몸이 모두 파란색이 된 엄마와 아이가 포옹하고 있다.)


이들의 대화를 좀 더 촘촘히 살펴보자. 아이가 하려는 행위는 여느 아이들의 장난과는 차이가 있다. 아이는 자기 이가 썩을 정도로 사탕을 많이 먹는다거나, 엄마의 뾰족구두의 굽을 망가트린다거나, 엄마의 원피스에 그림을 그린다거나, 그리고 엄마의 머리카락에 껌을 붙여놓을 때에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며 묻는다.  첫 번째는 자기 관리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 세 개는 엄마의 소유물과 신체에 가하는 행위이다. 질문의 성격과 정황상 이 아이가 묘사하고 있는 행위는 어쩌다 저지른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인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지금 아이는 단순히 자신의 질문에 대한 엄마의 반응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엄마의 마음을 떠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 엄마는 의외의 반응을 보인다. 엄마는 결코 “안 돼”라고 하지 않는다. 그 대신 반격성 질문에 나선다. 엄마는 아이에게 사탕을 못 먹게 하면, 병원에 데리고 가면,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짧게 자르면,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으면 넌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러자 아이는 당황하다가, 답을 기피하다가, 속상하고, 엉엉 울고 싶고, 엄마가 싫어서 혼자 있고 싶다고 속내를 내비친다. 그리고 곧 엄마가 곁에 있어주면 좋겠고 엄마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그러자 엄마도 그렇다고 하면서, 둘의  살벌하기까지 한 사랑확인 절차는 포옹으로 훈훈하게 막을 내린다. 

14화면에서 “엄마가 다시 사랑스러워요.”라는 표현이 좀 어색하여 사전[1]을 찾아보았더니 “사랑스럽다”의 정의는 “사람이 또는 무엇이 마음에 들어서 좋다.”이며, 용례로는 “아내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사랑스러운 남편.” 이며 관련 어휘는 ”귀엽다, 예쁘다, 좋다.“로 나와 있다. 챗 GPT에게 ”사랑스러워라는 형용사는 어린 사람이 어른에게 쓸 수 있나요?“라고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답을 준다. “나이나 지위에 관계없이 사용할 수 있지만, 상황과 말투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어요. 기본 의미와 사용으로 누군가가 귀엽고 애정이 가고,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느낌을 줄 때 쓰는 표현이에요. 나이와 상관없이 행동, 말투, 표정, 성격 등이 사랑스럽다고 느껴질 때 사용할 수 있어요.” 용례로는 “할머니는 정말 사랑스러우셔.” “아빠 오늘 장난치는 거 너무 사랑스러웠어요.”를 들고 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이 형용사의 사용은 문법적 오류는 아니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맥락에 맞지 않는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왜 이 아이는 엄마와의 밀고 당기는 듯한 대화 후에 엄마가 사랑스럽다고 고백하는 것일까.    

또 한 가지, 주의깊게 들여다 볼 부분이 있다. 언뜻 보면, 이 아이는 엄마와 상상놀이를 즐기는 듯 싶지만, 실은 자신의 행동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시험하고 있는 중이다. 즉, 자신에게 허용되는 행동의 한계를 탐색하는 중이다. 강도가 점점 더 심해진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 아이는 단 것 마구 먹기->엄마의 구두축 망가뜨리기-> 원피스에 그림 그리기->껌으로 엄마의 머리카락 엉키게 하기로 도발(挑發)의 범위를 시험하고 있다. 사실 거의 모든 아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자신의 행위가 허용되는 경계를 탐색하면서 자라난다고 할 수 있다. 자기 관리, 자신과 주변 사물 혹은 환경과의 관계, 타인과 자신의 관계 등 인생에서 지켜야 할 법칙과 규칙은 매우 많고, 그것 대부분은 자신의 욕구에 반하는 것이다.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그 규칙은 유동적이 되기도 하고, 범위도 확장되지만. 항상 그들을 위해서나 사회적 관계를 위해 “안 돼”라고 단호하게 거부해야 할 것도 있기 마련이다. 아이들의 천성은 선하지 않다. 그들도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들이다. 그래서 알면서도 일탈적인 행위를 시도해본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의 엄마는 “안 돼”라는 단호함을 보이기보다는 아이가 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아이의 반응을 떠 본다. (물론 이 엄마의 행위는 악의적인 것이 아니다. )

하바드대 심리학과 교수였던 조던 B. 피터슨(Jordan B. Peterson)교수는 그의 책 <12가지 인생의 법칙>(2018/2018)에서 요즘 부모들은 대체로 아이와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아이의 친구가 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고 지적하였다. 자녀와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심지어 자녀의 존경 따위는 기꺼이 포기하기까지 한다고 꼬집는다. 언어의 특성상 인간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한국어 사용에서 그런 부모-자녀 관계를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요즈음은 어린 자녀들 중에 부모에게 존댓말하는 아이들은 찾기 힘들 정도이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TV 드라마에서는 그 정도가 더 심하다. 성인 자녀들까지 부모와 조부모에게까지 반말지거리를 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두 사람간의 대사만 본다면 친구들끼리의 대화가 아닌가 싶을 정도인데 부모들은 그것에 별로 개의치 않아 하는 듯하다.

그러나 피터슨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부모는 아이의 친구 대리인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아이는 살아가면서 많은 친구를 둘 수 있고, 친구는 바뀔 수도 있지만, 부모는 둘 뿐이기 때문이다. 부모는 친구를 넘어서는 존재이다. 부모는 자녀와 사회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자녀가 성장하여 독립하면 그 관계의 성격은 바뀔지 몰라도 부모-자녀 관계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       

챗 GPT 에게 이에 관해 질문을 해보았다. 
친구같은 부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아니나 다를까 1초도 안되어 다음과 같이 장점과 단점, 그리고 정리를 보여준다. 

장점으로는 1.정서적 친밀감: 자녀가 부모를 두려움 없이 대하고 자신의 고민이나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됩니다.; 2. 개방적 소통: 권위적으로 명령하는 방식 대신, 서로 의견을 나누며 관계가 더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 3. 신뢰 형성: 부모가 친구처럼 들어주고 공감해 줄 때, 자녀는 ‘내 편이 있다’는 안정감을 가집니다.

주의할 점 : 1. 경계(경험적 지혜)의 상실: 부모가 지나치게 친구처럼만 행동하면, 자녀가 필요로 하는 가르침·규율·안전망을 제공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2. 역할 혼란: 부모는 여전히 “친구”가 아닌 “부모”이기에, 자녀가 성장 과정에서 기대하는 권위와 지도가 부족해질 수 있습니다. :3. 책임감 부족: 자녀가 부모를 ‘완전히 동등한 친구’로 여기면, 때로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지도를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리 : “친구 같은 부모”는 공감과 대화에서는 친구처럼, 가르침과 책임에서는 부모답게 하는 균형이 필요합니다. 즉, 친구보다 더 깊은 신뢰와 권위 있는 사랑을 주는 것이 이상적이지요.

 

두 번째 질문을 해보았다.
기독교적 부모관은 무엇입니까? 성경의 십계명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출애굽기 20:12)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챗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1. 부모 공경은 단순한 도덕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연결된 계명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생명을 주었고, 양육과 훈육의 책임을 가진 존재입니다. 따라서 자녀가 부모를 존중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인정하는 행위가 됩니다.

2. 훈육과 사랑의 조화

에베소서 6:1-4에서는 자녀에게는 순종, 부모에게는 주 안에서 양육을 명령합니다. 즉, 권위적 억압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의 권위가 성경적 모델입니다.

요약하면, 성경은 부모가 자녀와 친구처럼 친근할 수 있지만, 그보다 우선적으로 부모의 권위를 존중하고 공경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부모는 단순히 “좋은 친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책임지는 영적 지도자이며, 자녀는 부모를 공경함으로써 하나님을 공경하는 삶을 배우게 됩니다.


흠잡을 데 없는 ‘성경적’ 답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내 생각으로는, 성경이 주는, 부모의 역할에 대한 가장 좋은 해답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언 22: 6)가 아닐까 싶다. 기독인의 교육의 기초는 신앙이어야 한다. 기독 부모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살아있는 신앙을 물려주는 것이다. 성경의 인물과 믿음의 선조들의 삶을 책으로나 이야기로 가르치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부모가 살아내고 있는 믿음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교육은 친구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신 부모의 권위로만 가능하다. 부모의 권위는 말로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내려고 분투하는 삶의 모습을 자녀에게 보임으로서 세워지는 것이다. 부모를 나무에, 자녀를 열매에 비유한다면, 좋은 나무에 좋은 열매가 열리게 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의 스승되는 부모가 자녀에게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빌 4:9)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이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게다가 지금 우리는 점점 더 부모의 영적 권위를 세우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 안의 죄성과 더불어 이 시대의 문화는 전 방위적으로 부모와 자녀 세대를 유혹하고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란 우리가 항상 호흡하고 있는 공기와 같으므로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부지불식간에 우리와 자녀의 영혼 안에 스며들어 이 세상 풍조를 따르도록 부추긴다. 일반적으로 ‘어린이용’이라고 생각되는 그림책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림책은 순진한 도서가 아니다. 그 안에서 어린 아이들과 의인화된 귀여운 동물들이 훈훈한 이야기가 펼쳐진다고 해도 교묘히 문화막시즘, 허무주의, PC주의, 뉴에이지 등 반기독교적 시대정신이 스며들어 있기도 하다. 그림책을 창작하는 작가 역시 이 시대사조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부모들도 아이의 친구가 되고 싶어서 라기보다는 부모의 권위가 사라진 이 세상에서 『엄마는 언제나 나를 사랑하나요?』의 엄마처럼 아이와 위태로운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엄마의 머리 위에만 떠있는 검은 구름 한 조각과 빗줄기는 엄마의 불안함과 두려움의 실존적 상태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1]  위키낱말사전에서는 형용사로서 어원은 사랑 + 스럽다. 활용은 “사랑스러원, 사랑스러우니”로 나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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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이며 그림책 평론 작업을 하고 있다. 미국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1989년부터 2023년까지 성대 아동청소년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2021년부터 웹진 <그림책 베이직>에 '그림책의 세계관'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그림책 세계관 연구소에서 운영하고 있는 '그림책 세계관 지도사 과정'에서 '그림책의 세계관', '기독 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세계관>, 공저로는 <그림책의 이해1, 2>, <그림책과 예술교육>, <세계 그림책의 역사>, <어린이교육전문가가 엄선한 100권의 그림책>, <신앙이 자라는 그림책 읽기>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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