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의 세계관
친구같은 엄마? : 은희 글, 그림의 『엄마는 언제나 나를 사랑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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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해영2025-09-15 14:05
요즘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훈육하고 교육하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부모님들이 건강한 권위를 지키는 것이 바로 아이들을 살릴 수 있는 기본이 되는 것임을 자녀를 키우면서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부모의 사명을 다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큰 지침이 되는 말씀 감사합니다.
with Chang2025-09-16 00:16
‘친구 같은 부모’ 담론 속에서 권위를 포기한 친밀함이 어떻게 경계를 흐리는지에 대한 분석이 깊이 와 닿습니다.
책 속 엄마-아이 대화를 따뜻하면서도 날카롭게 짚어주셔서 부모와 자녀 관계를 새롭게 돌아보게 됩니다.
공감과 소통은 목적이 아니라 도구이며, 사랑은 한계를 지켜 줄 때 더욱 안전해진다는 말씀에 마음이 멈춥니다.
부모는 친구를 넘어 길잡이요 신앙의 증인이라는 고백에 아멘입니다.
마침 이번 한 주 딸과의 관계로 고민하던 제게 큰 울림이 되었습니다.
이미 성인이 된 자녀와도 꼰대와 친구 사이의 균형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느끼고 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림책에 스며드는 시대정신을 분별하라는 제안은 가정과 교회 교육 현장 모두에 소중한 지침이 되리라 믿습니다.
귀한 통찰 나눔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책 속 엄마-아이 대화를 따뜻하면서도 날카롭게 짚어주셔서 부모와 자녀 관계를 새롭게 돌아보게 됩니다.
공감과 소통은 목적이 아니라 도구이며, 사랑은 한계를 지켜 줄 때 더욱 안전해진다는 말씀에 마음이 멈춥니다.
부모는 친구를 넘어 길잡이요 신앙의 증인이라는 고백에 아멘입니다.
마침 이번 한 주 딸과의 관계로 고민하던 제게 큰 울림이 되었습니다.
이미 성인이 된 자녀와도 꼰대와 친구 사이의 균형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느끼고 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림책에 스며드는 시대정신을 분별하라는 제안은 가정과 교회 교육 현장 모두에 소중한 지침이 되리라 믿습니다.
귀한 통찰 나눔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정민2025-09-27 11:10
'이제 엄마는 나를 사랑할 수 없을 거에요.' '이제 너는 엄마를 사랑할 수 없을 거야.'
저 그림책 속의 "사랑"이라는 단어의 뜻은 무엇일까요?
단어의 의미가 퇴색되어 무언가 핀트가 안 맞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책인 것 같습니다.
그림책이 동전의 양면처럼 아이들에게 중요하기도 하면서 또 위험한 이유는
아직 분별이 없는 아이들에게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던져준다는 것인데요.
부모가 씻기 싫어하는 아이를 씻기는 장면이
마치 "학대"와 같이 표현된 책을 보고 너무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아마 그 책을 접한 아이는 자기가 싫어하는 일을 부모가 억지로 시키는 것을
"학대"로 인식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접한 아이는 자꾸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사랑"이라는 것을 "허용"으로 느끼진 않을까요,
뒷 부분은 부모가 마땅히 가르쳐야 하는 것들을 가르치지 않고
단순히 "미러링치료"로 아이가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
유치하게 느껴지면서도 현 사회를 반영하는 것 같아서 씁쓸합니다.
학교에서 아이들 수업을 하며 가장 힘든 아이들이
"경계" "규칙" "권위"를 인식하지 못하는 아이들인 것 같습니다.
"허용"을 "쿨함" 혹은 "사랑"으로 착각하는 부모들과 아이들.
오히려 이것이 밖에서 아이들을 사랑 받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들인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결국 "심리학"과 "시대 사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좋은 길이라는 것을
늘 마음에 새기며 말씀에 따라 살아가기를 소망 합니다.
저 그림책 속의 "사랑"이라는 단어의 뜻은 무엇일까요?
단어의 의미가 퇴색되어 무언가 핀트가 안 맞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책인 것 같습니다.
그림책이 동전의 양면처럼 아이들에게 중요하기도 하면서 또 위험한 이유는
아직 분별이 없는 아이들에게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던져준다는 것인데요.
부모가 씻기 싫어하는 아이를 씻기는 장면이
마치 "학대"와 같이 표현된 책을 보고 너무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아마 그 책을 접한 아이는 자기가 싫어하는 일을 부모가 억지로 시키는 것을
"학대"로 인식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접한 아이는 자꾸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사랑"이라는 것을 "허용"으로 느끼진 않을까요,
뒷 부분은 부모가 마땅히 가르쳐야 하는 것들을 가르치지 않고
단순히 "미러링치료"로 아이가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
유치하게 느껴지면서도 현 사회를 반영하는 것 같아서 씁쓸합니다.
학교에서 아이들 수업을 하며 가장 힘든 아이들이
"경계" "규칙" "권위"를 인식하지 못하는 아이들인 것 같습니다.
"허용"을 "쿨함" 혹은 "사랑"으로 착각하는 부모들과 아이들.
오히려 이것이 밖에서 아이들을 사랑 받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들인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결국 "심리학"과 "시대 사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좋은 길이라는 것을
늘 마음에 새기며 말씀에 따라 살아가기를 소망 합니다.
김현경2025-12-22 19:14
아이가 많이 어렸을 때 일입니다. 지역도서관에 특강을 들으러 갔다가, "어떤 엄마가 되고 싶으세요?"라는 질문에 저 역시 철없게도 "친구같은 엄마요."라고 대답했던 것이 떠오릅니다. 그때 저의 대답을 들은 선생님은 단호하게 '친구같은 엄마'가 아니라 '엄마다운 엄마'가 아이들에게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그 대답이 지금까지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그 이후로 '엄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거든요. 저는 성경 속에 등장하는 여러 여인들로부터 좋은 모델을 발견합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잠언 31장의 현숙한 여인에 대한 글과 디모데후서의 '유니게'를 좋아합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이 말씀이 저와 아이에게도 적용되어 "이 믿음은 먼저 네 어머니 현경이 속에 있더니 지온이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교수님께서 글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아이의 기분을 맞추며 최대한 많은 것을 허용하는 엄마가 아니라, 아이에게 마땅히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믿음의 엄마로서의 삶을 경주하듯 잘 살아내고 싶습니다. ^^
서정아2025-12-22 19:59
너무나도 공감이 되는 글입니다.
이 시대 부모들의 어려움은 부모가 아이를 둘러 싸고 있는 거대한 시대사조와도 힘겨루기를 해야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 시대 부모들의 어려움은 부모가 아이를 둘러 싸고 있는 거대한 시대사조와도 힘겨루기를 해야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신애2025-12-22 23:28
부모와 어른에게 부여된 권위가 ‘하나님이 부여하신’ 중요한 질서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보게 되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방식을 배워야,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며 따르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모의 권위가 사라진 세대는, 어쩌면 하나님께 지도받는 방법을 잃어가는 것과도 같은 것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에 어떤 권위라도 포기하는 것이 좋은 것처럼 포장되는 이 현실과 시대사조에 속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며칠 전 아이를 하원하러 나갔는데, 같이 하원하는 장소에 남자아이 두명이 도로에 설치된 주황색 안전봉을 발로 깔고 뭉개며 부서질듯 위태롭게 장난을 치고있는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저는 바로 ”그렇게하면 안전봉이 부러질 것 같아!“라고 주의를 주었는데, 순간 주변에 계신 다른 학부모들이 아이가 민망해 할까봐 걱정되는 표정으로 ”어 너희가 그 봉이 자칫 튀어오르면 다칠까봐 그래~~“라고 황급히 말해주었습니다. 옆에 서있는 영국인 아버지가 그 한국어 의미를 알아 듣고는 제게 왜 한국 부모들은 여기서 아이가 다칠 것을 걱정하는 거냐고 황당해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훼손하는 것은 엄연한 범죄행위인데, 왜 그것을 더 엄격히 가르치지 않냐고 말이지요. 부모와 어른이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배우지 않는 아이들을 만드는 것이고, 교훈과 본보기가 없는 자녀들은 공의의 하나님을 따르는 방법을 알기 어려울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저 또한 한 아이의 엄마와 어른으로서, 하나님께 배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마땅히 가르칠 것들을 권위있게 가르치는 부모가 되어야겠습니다.
우승린2025-12-23 08:28
이 글을 읽으며 부모를 공경하고 자식을 잘 훈육해야 하는 것이 주님의 큰 질서안에 있음을 다시금 인지하게 됩니다. 맞아. 하나님의 질서가 바르게 서야 평온과 평안이 임하게 되는 것이지 하고 말입니다.
또한, 그런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를 자꾸 파괴하는 것이 죄인데 제 삶에서 그런 질서의 파괴가 의식하지 못한 채 있는 것은 없는지 계속 돌아봐야 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갈구하며 저 또한 힘겨루기를 계속 하고 있으니 아직도 죄성의 자아가 살아있음 이겠지요.
계속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메세지를 이 글을 보며 또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질서가 이 땅에, 모든 가정에, 제가 아는 모든 사람과 제 삶에, 제 자아에 세워지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그런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를 자꾸 파괴하는 것이 죄인데 제 삶에서 그런 질서의 파괴가 의식하지 못한 채 있는 것은 없는지 계속 돌아봐야 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갈구하며 저 또한 힘겨루기를 계속 하고 있으니 아직도 죄성의 자아가 살아있음 이겠지요.
계속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메세지를 이 글을 보며 또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질서가 이 땅에, 모든 가정에, 제가 아는 모든 사람과 제 삶에, 제 자아에 세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친구같은 엄마? : 은희 글, 그림의 『엄마는 언제나 나를 사랑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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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모들은 자녀의 부모보다 친구 되기를 원하는 것 같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도 그런 경우가 많겠지만, 딸을 둔 엄마의 경우 누군가 딸과 친구 같이 보인다면, 칭찬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반대로 자녀에게 꼰대 소리를 듣는 것은 부모-자녀 관계의 실패로 여긴다. 챗 GPT에게 물어보니 ‘꼰대’는 본래는 존칭이었으나 오늘날에는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지 않고 자기 방식만 고집하는 사람을 비판하는 말로 자리잡았다고 알려준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부모만이 아니라 나이든 사람들도 언제, 어디에서나 꼰대가 되지 않으려 매우 노력한다. 일방적인 지시가 아니라 소통하고,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공감하고 배려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환영받는 분위기이다. 그렇다. 소통, 공감, 배려의 가치를 부인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최근 나는 은희 글, 그림의 『엄마는 언제나 나를 사랑하나요?』에 그려진 엄마와 여아의 모습을 보며 부모와 자녀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앞표지에는 제목과 함께 알록달록한 비가 오고 있고, 엄마와 아이가 각기 파란 우산을 쓰고 있다, 지금 엄마의 시선은 아이를 향하고 있지만 아이는 물웅덩이를 발로 밟아보며 즐거워하고, 옆에서 강아지도 덩달아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뒤표지에는 “사탕을 많이 먹어서 이가 썩어도 엄마는 언제나 나를 사랑하나요?”라고 묻는 아이의 질문 아래 큰 노랑색 막대 사탕 나무 위에서 사탕을 가지고 놀고, 그네를 타고, 막대사탕을 빨아먹는 아이의 모습이 연이어 그려져 있다. 면지에는 아이가 그린듯한 나무, 꽃, 집, 나비 그림이 두서없이 흩어져 있고 표제지에는 책 제목과 함께 크고 작은 파랑색 우산이 우산 꽂이에 담겨 있다.
이 작품의 글텍스트는 모두 아이와 엄마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림이 인물과 사건, 배경을 묘사한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엄마! 응? 나, 궁금해요. 뭐가 궁금할까? 엄마는 언제나 나를 사랑하나요? 그럼 물론이지.” 막 비가 갠 듯한 하늘에는 한 조각 검은 구름이 엄마의 머리 위에 떠 있고, 크고 작은 우산 두 개가 담겨져 있는 우산 바구니를 오른쪽 어깨에 맨 엄마가 왼손으로 아이의 오른 손을 잡고 있다. 아래는 모녀의 대화를 화면 순서로 번호를 매긴 것이다. 그림 이미지는 괄호 안에 묘사하였다.
(앞표지와 같은 그림)
(아이와 강아지는 엄마의 빨간 구두를 타고 파도놀이를 하고 있으며 아이는 두 손에 구두의 뒤축을 들고 있다.)
(아이가 엄마의 원피스 치마폭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옆에서는 강아지가 붓을 물고 있고)
(엄마의 머리카락이 큰 풍선껌에 붙어 엄마는 공중으로 올라가고 있다.)
(연두빛의 너른 풀밭 왼쪽에 엄마가 비치 의자에 누워있고 아이와 강아지는 풀밭 가운데에서 신나게 놀고 있다. 그런데 엄마의 공간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지만 아이가 놀고 있는 곳의 하늘은 맑은 날씨이다.)
(“달콤한 사탕나라”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는 서커스 천막 담 안에 엄마가 팔짱을 하고 서 있고 아이는 담 밖에서 당황한 모습이다.
(아이가 큰 강아지를 타고 ‘안아파병원’이라는 간판이 붙은 건물 위를 날아간다.)
(아이는 가운을 입고 미장원의 거울 앞에 서서 슬퍼하고 있다.)
(인형 집어 올리기 게임기에서 집게가 인형 하나를 집어 올리고 있다. )
(엄마가 앉아있던 풀밭 위로 검은 구름이 비를 뿌리자 엄마가 깔개를 접고 아이는 강아지와 함께 뛰어가다 끈을 놓친다.)
(아이는 파란 바다의 파도 속에서 울고 있고. 파도 속에는 우산, 도시락 바구니와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온 듯한 김밥 도시락, 한 입 문 수박, 바나나 등이 떠 있다)
(아이는 바닷 속으로 거꾸로 내려가고 있다.)
(엄마는 바닷 속에서 이리저리 아이를 찾고 있다.)
(엄마는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아이에게 다가간다.)
(깊은 물속에서 머리카락과 몸이 모두 파란색이 된 엄마와 아이가 포옹하고 있다.)
이들의 대화를 좀 더 촘촘히 살펴보자. 아이가 하려는 행위는 여느 아이들의 장난과는 차이가 있다. 아이는 자기 이가 썩을 정도로 사탕을 많이 먹는다거나, 엄마의 뾰족구두의 굽을 망가트린다거나, 엄마의 원피스에 그림을 그린다거나, 그리고 엄마의 머리카락에 껌을 붙여놓을 때에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며 묻는다. 첫 번째는 자기 관리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 세 개는 엄마의 소유물과 신체에 가하는 행위이다. 질문의 성격과 정황상 이 아이가 묘사하고 있는 행위는 어쩌다 저지른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인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지금 아이는 단순히 자신의 질문에 대한 엄마의 반응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엄마의 마음을 떠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 엄마는 의외의 반응을 보인다. 엄마는 결코 “안 돼”라고 하지 않는다. 그 대신 반격성 질문에 나선다. 엄마는 아이에게 사탕을 못 먹게 하면, 병원에 데리고 가면,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짧게 자르면,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으면 넌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러자 아이는 당황하다가, 답을 기피하다가, 속상하고, 엉엉 울고 싶고, 엄마가 싫어서 혼자 있고 싶다고 속내를 내비친다. 그리고 곧 엄마가 곁에 있어주면 좋겠고 엄마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그러자 엄마도 그렇다고 하면서, 둘의 살벌하기까지 한 사랑확인 절차는 포옹으로 훈훈하게 막을 내린다.
14화면에서 “엄마가 다시 사랑스러워요.”라는 표현이 좀 어색하여 사전[1]을 찾아보았더니 “사랑스럽다”의 정의는 “사람이 또는 무엇이 마음에 들어서 좋다.”이며, 용례로는 “아내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사랑스러운 남편.” 이며 관련 어휘는 ”귀엽다, 예쁘다, 좋다.“로 나와 있다. 챗 GPT에게 ”사랑스러워라는 형용사는 어린 사람이 어른에게 쓸 수 있나요?“라고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답을 준다. “나이나 지위에 관계없이 사용할 수 있지만, 상황과 말투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어요. 기본 의미와 사용으로 누군가가 귀엽고 애정이 가고,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느낌을 줄 때 쓰는 표현이에요. 나이와 상관없이 행동, 말투, 표정, 성격 등이 사랑스럽다고 느껴질 때 사용할 수 있어요.” 용례로는 “할머니는 정말 사랑스러우셔.” “아빠 오늘 장난치는 거 너무 사랑스러웠어요.”를 들고 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이 형용사의 사용은 문법적 오류는 아니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맥락에 맞지 않는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왜 이 아이는 엄마와의 밀고 당기는 듯한 대화 후에 엄마가 사랑스럽다고 고백하는 것일까.
또 한 가지, 주의깊게 들여다 볼 부분이 있다. 언뜻 보면, 이 아이는 엄마와 상상놀이를 즐기는 듯 싶지만, 실은 자신의 행동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시험하고 있는 중이다. 즉, 자신에게 허용되는 행동의 한계를 탐색하는 중이다. 강도가 점점 더 심해진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 아이는 단 것 마구 먹기->엄마의 구두축 망가뜨리기-> 원피스에 그림 그리기->껌으로 엄마의 머리카락 엉키게 하기로 도발(挑發)의 범위를 시험하고 있다. 사실 거의 모든 아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자신의 행위가 허용되는 경계를 탐색하면서 자라난다고 할 수 있다. 자기 관리, 자신과 주변 사물 혹은 환경과의 관계, 타인과 자신의 관계 등 인생에서 지켜야 할 법칙과 규칙은 매우 많고, 그것 대부분은 자신의 욕구에 반하는 것이다.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그 규칙은 유동적이 되기도 하고, 범위도 확장되지만. 항상 그들을 위해서나 사회적 관계를 위해 “안 돼”라고 단호하게 거부해야 할 것도 있기 마련이다. 아이들의 천성은 선하지 않다. 그들도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들이다. 그래서 알면서도 일탈적인 행위를 시도해본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의 엄마는 “안 돼”라는 단호함을 보이기보다는 아이가 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아이의 반응을 떠 본다. (물론 이 엄마의 행위는 악의적인 것이 아니다. )
하바드대 심리학과 교수였던 조던 B. 피터슨(Jordan B. Peterson)교수는 그의 책 <12가지 인생의 법칙>(2018/2018)에서 요즘 부모들은 대체로 아이와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아이의 친구가 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고 지적하였다. 자녀와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심지어 자녀의 존경 따위는 기꺼이 포기하기까지 한다고 꼬집는다. 언어의 특성상 인간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한국어 사용에서 그런 부모-자녀 관계를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요즈음은 어린 자녀들 중에 부모에게 존댓말하는 아이들은 찾기 힘들 정도이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TV 드라마에서는 그 정도가 더 심하다. 성인 자녀들까지 부모와 조부모에게까지 반말지거리를 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두 사람간의 대사만 본다면 친구들끼리의 대화가 아닌가 싶을 정도인데 부모들은 그것에 별로 개의치 않아 하는 듯하다.
그러나 피터슨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부모는 아이의 친구 대리인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아이는 살아가면서 많은 친구를 둘 수 있고, 친구는 바뀔 수도 있지만, 부모는 둘 뿐이기 때문이다. 부모는 친구를 넘어서는 존재이다. 부모는 자녀와 사회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자녀가 성장하여 독립하면 그 관계의 성격은 바뀔지 몰라도 부모-자녀 관계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
챗 GPT 에게 이에 관해 질문을 해보았다.
친구같은 부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아니나 다를까 1초도 안되어 다음과 같이 장점과 단점, 그리고 정리를 보여준다.
두 번째 질문을 해보았다.
기독교적 부모관은 무엇입니까? 성경의 십계명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출애굽기 20:12)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챗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흠잡을 데 없는 ‘성경적’ 답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내 생각으로는, 성경이 주는, 부모의 역할에 대한 가장 좋은 해답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언 22: 6)가 아닐까 싶다. 기독인의 교육의 기초는 신앙이어야 한다. 기독 부모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살아있는 신앙을 물려주는 것이다. 성경의 인물과 믿음의 선조들의 삶을 책으로나 이야기로 가르치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부모가 살아내고 있는 믿음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교육은 친구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신 부모의 권위로만 가능하다. 부모의 권위는 말로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내려고 분투하는 삶의 모습을 자녀에게 보임으로서 세워지는 것이다. 부모를 나무에, 자녀를 열매에 비유한다면, 좋은 나무에 좋은 열매가 열리게 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의 스승되는 부모가 자녀에게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빌 4:9)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이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게다가 지금 우리는 점점 더 부모의 영적 권위를 세우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 안의 죄성과 더불어 이 시대의 문화는 전 방위적으로 부모와 자녀 세대를 유혹하고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란 우리가 항상 호흡하고 있는 공기와 같으므로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부지불식간에 우리와 자녀의 영혼 안에 스며들어 이 세상 풍조를 따르도록 부추긴다. 일반적으로 ‘어린이용’이라고 생각되는 그림책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림책은 순진한 도서가 아니다. 그 안에서 어린 아이들과 의인화된 귀여운 동물들이 훈훈한 이야기가 펼쳐진다고 해도 교묘히 문화막시즘, 허무주의, PC주의, 뉴에이지 등 반기독교적 시대정신이 스며들어 있기도 하다. 그림책을 창작하는 작가 역시 이 시대사조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부모들도 아이의 친구가 되고 싶어서 라기보다는 부모의 권위가 사라진 이 세상에서 『엄마는 언제나 나를 사랑하나요?』의 엄마처럼 아이와 위태로운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엄마의 머리 위에만 떠있는 검은 구름 한 조각과 빗줄기는 엄마의 불안함과 두려움의 실존적 상태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1] 위키낱말사전에서는 형용사로서 어원은 사랑 + 스럽다. 활용은 “사랑스러원, 사랑스러우니”로 나와있다.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이며 그림책 평론 작업을 하고 있다. 미국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1989년부터 2023년까지 성대 아동청소년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2021년부터 웹진 <그림책 베이직>에 '그림책의 세계관'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그림책 세계관 연구소에서 운영하고 있는 '그림책 세계관 지도사 과정'에서 '그림책의 세계관', '기독 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세계관>, 공저로는 <그림책의 이해1, 2>, <그림책과 예술교육>, <세계 그림책의 역사>, <어린이교육전문가가 엄선한 100권의 그림책>, <신앙이 자라는 그림책 읽기>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