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클라센의 『모자 삼부작』과 허무주의
존클라센 그림책 모두 보기
1. 들어가는 글
어린이들이 읽는 그림책과 허무주의라는 세계관은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림책도 우리 문화의 한 영역이자 예술가의 창작품이므로 이 사회를 풍미(風靡)하는 시대사조와 작가의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국제적인 도서상을 수상한 작품들일수록 시대정신을 투영하는 경우가 많다.
존 클라센(John Klassen)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모자 삼부작』은 ‘2011년 뉴욕타임즈 올해의 그림책’으로 선정된 『내 모자 어디 갔을까?』 (I want my hat back) (2011년), 2013년 칼데콧 메달상을 받은 『이건 내 모자가 아니야』 (This is not my hat) (2012), 그리고 『모자를 보았어』 (We found a hat) (2016)을 일컫는다. 그림책의 세계관 연구에서 이 세 작품을 같이 읽는 것은 작가의 세계관에 접근하기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1] 복수의 텍스트에서 어떤 일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작가의 사소한 관심사가 아니라 그의 주된 관심사라고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자인 코프만(Kaufmann)(2011)[2]도 한 작품을 깊이 읽는 것만으로는 그 텍스트의 의미를 발견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같은 작가가 쓴 작품 전체와 작품 세계의 변화과정을 관찰할 것을 추천하였다. 그럼으로써 어떤 개별 작품에서 사용된 단어의 의미를 더 정확히 파악하고, 작가의 의도를 확신할 수 있으며, 그 다음에는 독자가 텍스트에서 자신의 생각만을 읽어내고자 하는 위험을 피하는 동시에, 텍스트에 없는 것을 읽어낸 것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자 삼부작』의 평론은 이제까지 주로 미학적 측면에 치우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작품들이 글과 그림의 관계, 레이아웃, 그림책에서는 보기 힘든 캐릭터의 설정 등 기호학과 서사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언어를 선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독창성을 인정 받을만 하지만, 어린이를 위해 그림책을 읽는 독자들은 예술작품에 대한 존재론적 시각에서 작품에 투영된 세계관을 파악하고 그것이 어린이 문학교육적 측면에서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성찰할 책무가 있다.
삼부작에는 어린이 그림책 텍스트에서는 보기 힘든 고도의 암시성(allusivity)이 존재한다. 칼데콧 상 선정 위원이었던 조안 요나스(JoAnn Jonas)는 이 작품의 선정 이유를 “그의 책은 해석에 열려 있으며 독자들도 이것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하며[3], 다의적 해석의 가능성에 점수를 주고 있다. 그러나 전문 서평지와 인터넷 서평자들은 작품이 전달하는 메시지의 모호함을 지적하며 저자의 의도를 궁금해 한다.[4]
2. 『모자 삼부자』의 세계관을 발견하기 위한 읽기
한 사회나 개인의 세계관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파악될 수 있다. 1)이 사회는 어떤 곳인가? 2) 인간(나)는 어떤 존재인가? 3) 이 사회에서 우리(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러나 각 예술 장르(영화, 소설, 회화, 조각 등)를 세계관적으로 읽기 위해 가장 우선되는 것은 그 매체 고유의 특성을 고려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다음과 같은 두텁게 읽기(thick description)가 매우 유용할지 모른다.
1) 글과 그림을 촘촘하게 읽는다.
2) 작품의 장르를 파악한다.
3) 주인공에게 초점을 맞추는 질문을 한다.
1) 글과 그림을 촘촘하게 읽기
세 작품의 글과 그림의 관계는 슐레비츠(Schulevitz)(1997)[5]가 정의한 ‘진정한 그림책’의 특징을 보여준다. 즉, 글 텍스트와 그림 이미지가 전달하는 의미에는 중복(redundancy)이 거의 없다. 글 텍스트는 서술(narration)을 담당하지 않으며 그림 이미지가 해낼 수 없는, 인물들의 대화와 독백을 담당한다. 반면, 그림 이미지는 글 텍스트가 표현하지 않는 인물의 행위, 심리 상태와 시공간적 배경, 플롯을 그린다. 그들의 심리 상태는 주로 눈과 검은 눈동자의 형태에서 드러난다. 시각 이미지가 그리고 있는 공간적 배경은 단조롭고 황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듬성듬성 나 있는 풀과 돌멩이가 전부인 메마른 들판(『내 모자 어디 갔을까?』), 바다풀이 우거진 어두운 바다 속(『이건 내 모자가 아니야』), 황량한 사막(『모자를 보았어』)에서 주조색으로 사용된 회색과 갈색, 보라색, 청록 계열의 색은 음산하고 불안한 분위기를 풍긴다. 모자는 삼부작 모두에서 주요 모티브가 되고 있지만 각 모자의 종류와 형태는 서로 다르다. 첫 번째 작품에서는 고깔모자, 두 번째 작품에서는 중절모, 세 번째 작품에서는 카우보이 모자다. 인물들은 거의 평면적이며 몇 개의 선으로 단순화되어 그려진다. 흥미롭게도 그 모자 주인공의 정체성은 정반합(正反合)의 구조를 갖는다. 첫 번째 작품의 주인공은 모자를 도둑맞은 자이며, 두 번째 작품에서는 모자를 훔친 자이며, 그리고 마지막 작품에서는 두 주인공 모두 모자의 주인은 아니지만 (꿈에서나마) 모자를 소유하게 된다.
특히 이 세 번째 작품의 구성은 그림책에서는 보편적으로 보기 힘든 챕터 북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모자를 보며’, ‘지는 해를 보며’, 그리고 ‘잠을 자며’라고 명명된 각 장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두 거북이의 심리적 긴장을 보여준다. 글 텍스트는 두 거북이가 주고받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고, 그림 이미지는 두 거북이가 보여주는 두 종류의 시선을 그리고 있다. 서로 마주 보거나 아니면 한 방향을 응시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그들의 시선은 모자를 향하거나 등지고 있으며 이 때 두 거북 사이의 미묘한 긴장 관계가 감지된다.
2) 장르 파악하기
『모자 삼부자』은 블랙 코미디(black comedy)와 흡사한 문학적 형식과 내용을 보여준다. 블랙 코미디란 원래 연극에서 사용되는 용어로서 그 정의는 “판타지적이거나 악몽과 같은 현대 세계에서 악의적이거나 순진무구하거나 혹은 서투른 캐릭터가, ...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는 것으로서 그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자주 코믹하고 공포스럽고 비합리적이다.”[6] 블랙 코미디의 등장인물은 서투르며 상대의 생각을 훔쳐보며, 때로는 악의적이기도 하다. 그들의 연기는 코믹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긴장을 자아낸다. 이러한 캐릭터는 독자의 숙련된 읽기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1960년대 이후 영국의 어린이 문학에서 죽음, 병, 학대, 마약, 강간, 전쟁, 테러 등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작품에서 블랙 유머(black humor)가 종종 발견된다는 보고도 있다.[7]
존 클라센 작가 자신이 밝힌 창작과정은 이 작품들의 장르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클라센은 『이건 내 모자가 아니야』가 에드가 알렌 포(Edgar Allen Poe)(1809-1849)의 공포 소설에 의해 영감을 받았음을 밝히고 있다.[8] 그는 특히 포의 단편 소설인 『고자질하는 심장』(The tell-tale heart)(1843)을 언급하였는데,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검은 고양이』(The little cat)(1843)와 모티브가 매우 유사하다. 『고자질하는 심장』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집주인을 살해하게 된 동기와 살해 정황을 독백으로 풀어내며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이 살인자의 불안한 독백 기법과 『이건 내 모자가 아니야』의 작은 물고기의 독백이 보여주는 문학적 장치는 닮은 꼴이다. 『고자질하는 심장』의 주인공은 완벽한 거짓말로 자신의 범죄를 끝까지 은폐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내면의 불안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살인을 자백한다. 『이건 내 모자가 아니야』의 작은 물고기도 장면을 거듭하며 자신이 모자를 훔친 사실을 아무도 모를 것이고 설사 이를 알았다 하더라도 자신이 어디로 도망가고 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며 설사 이 또한 알아낸다 하더라도 아무도 찾지 못할 안전한 곳에 숨을 것이므로 자신은 절대로 안 잡힐 것이라 확신한다. 그러나 주의 깊게 책을 읽노라면 작은 물고기가 정말로 완전 범죄에 대해 자신이 있는것인지, 실은 그 자신도 불안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3) 분석적 읽기
분석적 읽기에서 사용되는 질문은 (1) 인물들의 기본적인 정체는 무엇인가? 그들의 동기를 유발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2) 그들은 어떤 종류의 행동을 취하는가? (3) 그 행동의 결말은 무엇인가? 그들은 성공하는가? 혹은 실패하는가? (4) 그들은 주변의 인물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9]이다.
주인공의 행위를 추동(推動)하는 것은 모자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모자’라는 단어는 세 작품 모두의 제목 안에 들어 있으며 본문 첫 장면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독백은 모자에 대한 소유욕과 관심을 강하게 드러낸다. “내 모자가 없어졌어. 찾아봐야겠어.”, “이건 내 모자가 아니야. 이건 그냥 몰래 가져온 거야.”, “모자를 보았어. 우리 함께 보았어.” 이 ‘걱정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주인공은 모자를 찾으러 나서거나 원래의 소유주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거나 아니면 제 3의 방법을 모색한다. 두 거북은 모자를 소유하기 위해 팽팽한 신경전을 벌인다. 모자의 소유주들은 결국 모자 되찾기에 성공한다. 그들은 모자 도둑 또한 잡아먹음으로써 그를 응징한다. ‘먹었다’는 비인격적 관계의 좋은 은유이다. 부버(Buber)(2015)[10]는 비인격적 관계에서는 ‘가진다’만이 남고 그것은 곧 ‘먹는다’를 상징한다고 하였다. 『모자를 보았어』에서 두 거북은 모자에 대한 미련으로 인해 그 자리를 뜨지 못한다. 두 거북 모두 모자를 쓰고 밤하늘을 날아가는 식으로 극적인 해결을 보이지만 이는 환상일 뿐이다.
또한 주인공들은 주변의 어떤 다른 인물들과도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그들의 관계는 ‘나- 너’가 아니라 ‘나- 그것’에 가깝다. 『내 모자 어디 갔을까?』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발화는 대화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시선이나 곰에게 준 정보에서 의미 있는 내용을 찾기 어렵다. 심지어 곰은 모자를 쓰고 있는 토끼의 대답 속에 담겨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알아채지 못한다. 『이건 내 모자가 아니야』에서 꽃게는 자신의 소재를 큰 물고기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라는 작은 물고기의 기대를 저버린다. 『모자를 보았어』의 두 거북은 처음엔 서로에게 친절한 듯 보였지만 모자를 두고 벌이는 신경전에서 그들 관계의 본질이 드러난다. 결국 세 작품 모두에서 등장인물들은 서로 부버의 ‘나-그것’ 의 관계인 ‘대상’으로서 인식될 뿐이다. 그들의 관계는 가장(假裝), 두려움, 의심, 가혹함으로 얼룩져 있는 반면, 그들에게서 신의, 배려, 용서, 양보와 같은 덕목은 전혀 기대할 수 없다.
3. 『모자 삼부작』에 투영된 세계관
지금까지의 읽기를 기초로 이 작품에 함의된 세계관을 앞서 제안한 질문들을 사용하여 파악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1. ‘이 세상은 어떤 곳인가?
삼부작이 그려내는 세상은 타인의 친절, 관심, 용서, 배려, 양보를 기대할 수 없는 냉혹한 곳이다. 모자 도둑은 죽음으로 응징되며, 신뢰할 수 있는 이웃은 없다. 욕망의 대상이 왜 하필 모자인가는 삼부작이 그리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모자의 존재는 아이러니를 발생시키는 장치가 된다. 모자는 필수품은 아니지만 직업이나 지위, 재력을 직접 드러내거나 상징화할 수 있는 물건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삼부작에서의 모자는 그러한 상징성과는 거리가 멀다. 작가 자신은 “모자가 필수품이 아닌 부수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소재로 선택했다.”[11]고 언급한 바 있다. 즉, 모자가 돈이나 음식과 달리 필수품이 아닌 탓에 등장 인물들이 모자를 훔치는 것이 어느 정도 용인되었으므로 작품의 소재로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모자가 사실 그것의 소유주에게는 심미적으로나 기능적으로 유용하지 않다는 것이다. 모자를 되찾고 싶어 하는 곰과 큰 물고기에게 모자는 그들의 머리와 몸 크기에 비해 너무 작아 부자연스럽고, 오히려 그것을 훔친 토끼나 작은 물고기(그는 이것으로 자신의 절도 행위를 합리화한다)에게 심미적으로나 크기 면에서 더 잘 어울리는 듯 하다. 게다가 사막에서 우연히 발견한 카우보이 모자는 두 거북들의 시야를 가리는 거추장스러운 물건일 뿐이다.
2.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부버는 인간의 존재는 인간과 다른 인간, 창조 세계, 그리고 초월적 존재와의 대화적 관계에서 드러난다고 하였다.[12] 삼부작의 등장인물들은 서로 어떤 형태로든(대화, 눈빛, 행위) 소통하고 있지만 그들 각자는 대양에 떠있는 섬처럼 고독하고 불안한 존재들이다. 『내 모자 어디 갔을까?』에서 입이 없는 곰과 다른 동물들은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 소통한다. 이 때문에 그들은 초점 없는 일방적인 대화를 이어간다. 사슴만이 누워있는 곰과 시선을 맞추고 대화하며, 그 순간 곰은 모자의 소재(所在)를 깨닫게 된다. 『이건 내 모자가 아니야』에서 작은 물고기와 꽃게의 신뢰 관계(이것도 작은 물고기의 일방적인 생각이었는지 모르지만)는 큰 물고기의 출현으로 인해 금방 깨어진다. 『모자를 보았어』에서 두 거북의 대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의심과 불신, 거짓의 냄새를 풍긴다. 삼부작의 공간이 닫힌 체계(closed system)라는 점도 등장인물의 실존을 밝히는 단서가 된다. 각 등장인물들은 황량한 들판, 어두운 바다 속, 사막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살아가며 작은 모자를 욕망하며 암투를 벌인다. 『모자를 보았어』에서 그 모순성은 한층 더 부각된다. 각기 모자를 쓴 그들은 우주로 유영함으로써 사막이라는 닫힌 공간을 탈출하지만, 모자로 인해 시각을 잃게 된다.
3.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은 인간 행위의 당위성과 관련된 것으로서 윤리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다. 독자들은 삼부작의 등장인물로부터 어떤 미덕도 기대하기 힘들다. 무엇보다도 세 작품 모두 도덕적 딜레마가 존재하는 까닭에 (어린) 독자들은 등장인물들의 행동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내 모자 어디 갔을까?』에서 다른 동물들이 모자의 소재를 알고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사슴이 모자를 찾고 있는 곰을 환기(喚起)시키게 되고 곰은 토끼를 찾으러 허둥지둥 뛰어간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동물들은 아마도 토끼에게 벌어질 일을 예감했을지 모른다. 모자를 되찾고 만족하고 있었던 곰에게 다람쥐가 다가가 토끼의 소재를 물었을 때 그는 토끼가 자기에게 했던 거짓말 그대로 응대한다. 그 행위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이건 내 모자가 아니야』에서 작은 물고기는 작은 모자가 자기에게 더 잘 맞는다면서 자신의 절도 행위를 합리화하며, 꽃게는 큰 물고기에게 작은 물고기의 향방을 알려준다. 그는 모자를 되찾아 쓰고 돌아가는 큰 물고기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또한 『모자를 보았어』의 결말은 해피엔딩같이 보이지만 끝내 그들은 ‘양보’라는 미덕을 발휘하지 않은 채 상상 속에서 그 욕구를 충족한다.
이와 같은 분석에 의거하여 삼부작에 그려진 세계는 ‘허무주의’(nihilism)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이어에 따르면 허무주의란 어떤 지적 체계라기보다 하나의 느낌(a feeling)으로 경험되는 것이라고 하였다.[13] 그것은 공허로 말미암은 고통, 즉 가치도 없고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는 삶으로 인한 고통의 느낌이다. 작은 모자를 욕망하는, 의인화된 주인공들의 모습은 존재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지 못한 인간의 모습과 흡사해 보인다. 그 자신의 의미를 잃은 자는 타인과 세계에도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다. 그러나 허무주의의 딜레마는 인간은 철저한 허무주의, 혹은 허무한 느낌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삶에 의미를 부여해야만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허무주의가 짙게 스며든 작품의 작가라도 자신의 창작품의 의미를 인정받으려는 모순된 욕구를 가지게 되며, 그러한 욕구는 내적 긴장을 일으킨다.[14] 허무주의는 인식론적 허무주의를 낳으며 그 결과는 끊임없는 내적 긴장일 뿐이다. 클라센의 작품에 영향을 미친 포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삼부작은 삶의 의미를 상실한 실존적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는 인간상들을 공포소설의 형식으로 보여준다.
『내 모자 어디 갔을까?』에서 메마르고 황량한 벌판에서 등을 돌린 채 홀로 앉아 있는 곰의 옆 모습에서 우리는 허무한 느낌과 함께 그의 내적 긴장을 엿보게 된다. 『이건 내 모자가 아니야』의 작은 물고기가 큰 물고기에게 잡아먹힌 후 이어지는 세 페이지의 침묵과 정적 속 검은 바다는 이 작품이 히치코크 감독의 영화 『사이코』에서 주인공의 죽음이 주는 강렬한 공허감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 진 것이라는 작가의 고백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모자를 보았어』에서 시야를 가려버린 모자로 인해 어두운 밤하늘에서 부유하는 거북들의 모습은 허무주의가 봉착하는 인식론적 딜레마를 은유하는 듯 하다.
4. 나가는 글
결론적으로, 본 평론이 시사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단순한 글과 그림으로 인해 어린이 도서로 인식되고 있는 그림책도 세상과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에 답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 그림책, 특히 국제적인 도서상을 수상하고 있는 작품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시대 사조에 깊이 물들어 있다. 유대-기독교의 신을 부인하고 근대를 지탱해 왔던 이성과 합리성도 부인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허무주의를 배태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어린이를 위해 그림책을 읽는 사람들은 예술로서의 그림책의 독창성과 심미성만이 아니라 문학 교육적 측면에서 세계관적 읽기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특히 유명한 해외 도서상을 수상한 작품이라면 무조건 수용하는 태도를 경계하고, 우리 어린이들이 이 작품을 통해 보게 되는 세상이 어떤 곳일지, 그리고 성인들은 그것에 대해 어린이들과 어떤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1] 이 연구는 『존 클라센의 모자 삼부작에 대한 세계관적 접근』(현은자, 김주아, 국경아)이라는 제목으로 어린이문학교육연구 19:4. 199-224에 게재된 바 있음.
[2] Kaufmann, W. (2011). 인문학의 미래. [The future of humanities: Teaching art, religion,philosophy, literature and history]. (이은정 역). 파주: 동녘. (원본발간일 1994년)pp. 154-155.
[3] Gelt, J. (2016). Children's book author Jon Klassen and the morally ambiguous universe ofhats. http://www.latimes.com/books/la-ca-jc-jon-klassen-20161117-story.html에서 2018년9월 18일 인출
[4] Amazon, The Horn Book Magazine, Publishers Weekly, School Library Journal, Aladin 등의 웹사이트에 올라온 전문가 혹은 독자 서평을 참고하였다.
[5] Schulevitz, U. (1997). Writing with pictures: how to write and illustrate children’s books.NY: Watson-Guptill Publications
[6] Abrams, M. H. (2005). A glosssary of literary terms (8th ed.). Boston, MA: Thomson
[7] 고선주 (2008). 영국 그림책의 유머 분석. 어린이문학교육연구, 9(1), 167-196
[8] Hammond, H. K., & Nordstrom, G. D. (2014). Reading the art in Caldecott award books.Lanham, MA: Rowman & littlefield(Hammond & Nordstrom. p.203.
[9] 기독 문학평론가인 R. Ryken(1991)이 『기독교와 문학』에서 제안한 앞의 세 개의 질문에 연구자가 네 번째 질문을 덧붙인 것이다. .
[10] Buber, M. (2015). 나와 너. [Ich und du] (김천배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원본발간일1937년).
[11] Gelt, J. (2016). Children's book author Jon Klassen and the morally ambiguous universe ofhats. http://www.latimes.com/books/la-ca-jc-jon-klassen-20161117-story.html에서 2018년9월 18일 인출
[12] Buber, M. (2015). 나와 너. [Ich und du] (김천배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원본발간일1937년).
[13] Sire, J. W.(1995).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 사상. [The universe next door]. (김헌수 역). 서울: IVP. (원본발간일 1988년).
[14] Sire, J. W.(1995).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 사상. [The universe next door]. (김헌수 역). 서울: IVP. (원본발간일 1988년).
|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후 Eastern Michigan University 에서 석사,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어린이문학교육학회 회장 및 한국 기독교 유아교 육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아동 청소년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대학 부설 생활과 학 연구소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기독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이해>(공저), <그림책과 예술교육>(공저>, <그림책으로 보는 아동과 우리사회>(공저), <100권의 그림책>(공저) 등 그림책 관련 저서가 있다. |
존 클라센의 『모자 삼부작』과 허무주의
존클라센 그림책 모두 보기
1. 들어가는 글
어린이들이 읽는 그림책과 허무주의라는 세계관은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림책도 우리 문화의 한 영역이자 예술가의 창작품이므로 이 사회를 풍미(風靡)하는 시대사조와 작가의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국제적인 도서상을 수상한 작품들일수록 시대정신을 투영하는 경우가 많다.
존 클라센(John Klassen)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모자 삼부작』은 ‘2011년 뉴욕타임즈 올해의 그림책’으로 선정된 『내 모자 어디 갔을까?』 (I want my hat back) (2011년), 2013년 칼데콧 메달상을 받은 『이건 내 모자가 아니야』 (This is not my hat) (2012), 그리고 『모자를 보았어』 (We found a hat) (2016)을 일컫는다. 그림책의 세계관 연구에서 이 세 작품을 같이 읽는 것은 작가의 세계관에 접근하기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1] 복수의 텍스트에서 어떤 일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작가의 사소한 관심사가 아니라 그의 주된 관심사라고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자인 코프만(Kaufmann)(2011)[2]도 한 작품을 깊이 읽는 것만으로는 그 텍스트의 의미를 발견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같은 작가가 쓴 작품 전체와 작품 세계의 변화과정을 관찰할 것을 추천하였다. 그럼으로써 어떤 개별 작품에서 사용된 단어의 의미를 더 정확히 파악하고, 작가의 의도를 확신할 수 있으며, 그 다음에는 독자가 텍스트에서 자신의 생각만을 읽어내고자 하는 위험을 피하는 동시에, 텍스트에 없는 것을 읽어낸 것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자 삼부작』의 평론은 이제까지 주로 미학적 측면에 치우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작품들이 글과 그림의 관계, 레이아웃, 그림책에서는 보기 힘든 캐릭터의 설정 등 기호학과 서사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언어를 선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독창성을 인정 받을만 하지만, 어린이를 위해 그림책을 읽는 독자들은 예술작품에 대한 존재론적 시각에서 작품에 투영된 세계관을 파악하고 그것이 어린이 문학교육적 측면에서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성찰할 책무가 있다.
삼부작에는 어린이 그림책 텍스트에서는 보기 힘든 고도의 암시성(allusivity)이 존재한다. 칼데콧 상 선정 위원이었던 조안 요나스(JoAnn Jonas)는 이 작품의 선정 이유를 “그의 책은 해석에 열려 있으며 독자들도 이것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하며[3], 다의적 해석의 가능성에 점수를 주고 있다. 그러나 전문 서평지와 인터넷 서평자들은 작품이 전달하는 메시지의 모호함을 지적하며 저자의 의도를 궁금해 한다.[4]
2. 『모자 삼부자』의 세계관을 발견하기 위한 읽기
한 사회나 개인의 세계관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파악될 수 있다. 1)이 사회는 어떤 곳인가? 2) 인간(나)는 어떤 존재인가? 3) 이 사회에서 우리(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러나 각 예술 장르(영화, 소설, 회화, 조각 등)를 세계관적으로 읽기 위해 가장 우선되는 것은 그 매체 고유의 특성을 고려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다음과 같은 두텁게 읽기(thick description)가 매우 유용할지 모른다.
1) 글과 그림을 촘촘하게 읽는다.
2) 작품의 장르를 파악한다.
3) 주인공에게 초점을 맞추는 질문을 한다.
1) 글과 그림을 촘촘하게 읽기
세 작품의 글과 그림의 관계는 슐레비츠(Schulevitz)(1997)[5]가 정의한 ‘진정한 그림책’의 특징을 보여준다. 즉, 글 텍스트와 그림 이미지가 전달하는 의미에는 중복(redundancy)이 거의 없다. 글 텍스트는 서술(narration)을 담당하지 않으며 그림 이미지가 해낼 수 없는, 인물들의 대화와 독백을 담당한다. 반면, 그림 이미지는 글 텍스트가 표현하지 않는 인물의 행위, 심리 상태와 시공간적 배경, 플롯을 그린다. 그들의 심리 상태는 주로 눈과 검은 눈동자의 형태에서 드러난다. 시각 이미지가 그리고 있는 공간적 배경은 단조롭고 황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듬성듬성 나 있는 풀과 돌멩이가 전부인 메마른 들판(『내 모자 어디 갔을까?』), 바다풀이 우거진 어두운 바다 속(『이건 내 모자가 아니야』), 황량한 사막(『모자를 보았어』)에서 주조색으로 사용된 회색과 갈색, 보라색, 청록 계열의 색은 음산하고 불안한 분위기를 풍긴다. 모자는 삼부작 모두에서 주요 모티브가 되고 있지만 각 모자의 종류와 형태는 서로 다르다. 첫 번째 작품에서는 고깔모자, 두 번째 작품에서는 중절모, 세 번째 작품에서는 카우보이 모자다. 인물들은 거의 평면적이며 몇 개의 선으로 단순화되어 그려진다. 흥미롭게도 그 모자 주인공의 정체성은 정반합(正反合)의 구조를 갖는다. 첫 번째 작품의 주인공은 모자를 도둑맞은 자이며, 두 번째 작품에서는 모자를 훔친 자이며, 그리고 마지막 작품에서는 두 주인공 모두 모자의 주인은 아니지만 (꿈에서나마) 모자를 소유하게 된다.
특히 이 세 번째 작품의 구성은 그림책에서는 보편적으로 보기 힘든 챕터 북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모자를 보며’, ‘지는 해를 보며’, 그리고 ‘잠을 자며’라고 명명된 각 장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두 거북이의 심리적 긴장을 보여준다. 글 텍스트는 두 거북이가 주고받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고, 그림 이미지는 두 거북이가 보여주는 두 종류의 시선을 그리고 있다. 서로 마주 보거나 아니면 한 방향을 응시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그들의 시선은 모자를 향하거나 등지고 있으며 이 때 두 거북 사이의 미묘한 긴장 관계가 감지된다.
2) 장르 파악하기
『모자 삼부자』은 블랙 코미디(black comedy)와 흡사한 문학적 형식과 내용을 보여준다. 블랙 코미디란 원래 연극에서 사용되는 용어로서 그 정의는 “판타지적이거나 악몽과 같은 현대 세계에서 악의적이거나 순진무구하거나 혹은 서투른 캐릭터가, ...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는 것으로서 그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자주 코믹하고 공포스럽고 비합리적이다.”[6] 블랙 코미디의 등장인물은 서투르며 상대의 생각을 훔쳐보며, 때로는 악의적이기도 하다. 그들의 연기는 코믹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긴장을 자아낸다. 이러한 캐릭터는 독자의 숙련된 읽기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1960년대 이후 영국의 어린이 문학에서 죽음, 병, 학대, 마약, 강간, 전쟁, 테러 등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작품에서 블랙 유머(black humor)가 종종 발견된다는 보고도 있다.[7]
존 클라센 작가 자신이 밝힌 창작과정은 이 작품들의 장르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클라센은 『이건 내 모자가 아니야』가 에드가 알렌 포(Edgar Allen Poe)(1809-1849)의 공포 소설에 의해 영감을 받았음을 밝히고 있다.[8] 그는 특히 포의 단편 소설인 『고자질하는 심장』(The tell-tale heart)(1843)을 언급하였는데,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검은 고양이』(The little cat)(1843)와 모티브가 매우 유사하다. 『고자질하는 심장』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집주인을 살해하게 된 동기와 살해 정황을 독백으로 풀어내며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이 살인자의 불안한 독백 기법과 『이건 내 모자가 아니야』의 작은 물고기의 독백이 보여주는 문학적 장치는 닮은 꼴이다. 『고자질하는 심장』의 주인공은 완벽한 거짓말로 자신의 범죄를 끝까지 은폐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내면의 불안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살인을 자백한다. 『이건 내 모자가 아니야』의 작은 물고기도 장면을 거듭하며 자신이 모자를 훔친 사실을 아무도 모를 것이고 설사 이를 알았다 하더라도 자신이 어디로 도망가고 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며 설사 이 또한 알아낸다 하더라도 아무도 찾지 못할 안전한 곳에 숨을 것이므로 자신은 절대로 안 잡힐 것이라 확신한다. 그러나 주의 깊게 책을 읽노라면 작은 물고기가 정말로 완전 범죄에 대해 자신이 있는것인지, 실은 그 자신도 불안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3) 분석적 읽기
분석적 읽기에서 사용되는 질문은 (1) 인물들의 기본적인 정체는 무엇인가? 그들의 동기를 유발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2) 그들은 어떤 종류의 행동을 취하는가? (3) 그 행동의 결말은 무엇인가? 그들은 성공하는가? 혹은 실패하는가? (4) 그들은 주변의 인물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9]이다.
주인공의 행위를 추동(推動)하는 것은 모자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모자’라는 단어는 세 작품 모두의 제목 안에 들어 있으며 본문 첫 장면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독백은 모자에 대한 소유욕과 관심을 강하게 드러낸다. “내 모자가 없어졌어. 찾아봐야겠어.”, “이건 내 모자가 아니야. 이건 그냥 몰래 가져온 거야.”, “모자를 보았어. 우리 함께 보았어.” 이 ‘걱정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주인공은 모자를 찾으러 나서거나 원래의 소유주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거나 아니면 제 3의 방법을 모색한다. 두 거북은 모자를 소유하기 위해 팽팽한 신경전을 벌인다. 모자의 소유주들은 결국 모자 되찾기에 성공한다. 그들은 모자 도둑 또한 잡아먹음으로써 그를 응징한다. ‘먹었다’는 비인격적 관계의 좋은 은유이다. 부버(Buber)(2015)[10]는 비인격적 관계에서는 ‘가진다’만이 남고 그것은 곧 ‘먹는다’를 상징한다고 하였다. 『모자를 보았어』에서 두 거북은 모자에 대한 미련으로 인해 그 자리를 뜨지 못한다. 두 거북 모두 모자를 쓰고 밤하늘을 날아가는 식으로 극적인 해결을 보이지만 이는 환상일 뿐이다.
또한 주인공들은 주변의 어떤 다른 인물들과도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그들의 관계는 ‘나- 너’가 아니라 ‘나- 그것’에 가깝다. 『내 모자 어디 갔을까?』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발화는 대화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시선이나 곰에게 준 정보에서 의미 있는 내용을 찾기 어렵다. 심지어 곰은 모자를 쓰고 있는 토끼의 대답 속에 담겨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알아채지 못한다. 『이건 내 모자가 아니야』에서 꽃게는 자신의 소재를 큰 물고기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라는 작은 물고기의 기대를 저버린다. 『모자를 보았어』의 두 거북은 처음엔 서로에게 친절한 듯 보였지만 모자를 두고 벌이는 신경전에서 그들 관계의 본질이 드러난다. 결국 세 작품 모두에서 등장인물들은 서로 부버의 ‘나-그것’ 의 관계인 ‘대상’으로서 인식될 뿐이다. 그들의 관계는 가장(假裝), 두려움, 의심, 가혹함으로 얼룩져 있는 반면, 그들에게서 신의, 배려, 용서, 양보와 같은 덕목은 전혀 기대할 수 없다.
3. 『모자 삼부작』에 투영된 세계관
지금까지의 읽기를 기초로 이 작품에 함의된 세계관을 앞서 제안한 질문들을 사용하여 파악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1. ‘이 세상은 어떤 곳인가?
삼부작이 그려내는 세상은 타인의 친절, 관심, 용서, 배려, 양보를 기대할 수 없는 냉혹한 곳이다. 모자 도둑은 죽음으로 응징되며, 신뢰할 수 있는 이웃은 없다. 욕망의 대상이 왜 하필 모자인가는 삼부작이 그리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모자의 존재는 아이러니를 발생시키는 장치가 된다. 모자는 필수품은 아니지만 직업이나 지위, 재력을 직접 드러내거나 상징화할 수 있는 물건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삼부작에서의 모자는 그러한 상징성과는 거리가 멀다. 작가 자신은 “모자가 필수품이 아닌 부수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소재로 선택했다.”[11]고 언급한 바 있다. 즉, 모자가 돈이나 음식과 달리 필수품이 아닌 탓에 등장 인물들이 모자를 훔치는 것이 어느 정도 용인되었으므로 작품의 소재로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모자가 사실 그것의 소유주에게는 심미적으로나 기능적으로 유용하지 않다는 것이다. 모자를 되찾고 싶어 하는 곰과 큰 물고기에게 모자는 그들의 머리와 몸 크기에 비해 너무 작아 부자연스럽고, 오히려 그것을 훔친 토끼나 작은 물고기(그는 이것으로 자신의 절도 행위를 합리화한다)에게 심미적으로나 크기 면에서 더 잘 어울리는 듯 하다. 게다가 사막에서 우연히 발견한 카우보이 모자는 두 거북들의 시야를 가리는 거추장스러운 물건일 뿐이다.
2.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부버는 인간의 존재는 인간과 다른 인간, 창조 세계, 그리고 초월적 존재와의 대화적 관계에서 드러난다고 하였다.[12] 삼부작의 등장인물들은 서로 어떤 형태로든(대화, 눈빛, 행위) 소통하고 있지만 그들 각자는 대양에 떠있는 섬처럼 고독하고 불안한 존재들이다. 『내 모자 어디 갔을까?』에서 입이 없는 곰과 다른 동물들은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 소통한다. 이 때문에 그들은 초점 없는 일방적인 대화를 이어간다. 사슴만이 누워있는 곰과 시선을 맞추고 대화하며, 그 순간 곰은 모자의 소재(所在)를 깨닫게 된다. 『이건 내 모자가 아니야』에서 작은 물고기와 꽃게의 신뢰 관계(이것도 작은 물고기의 일방적인 생각이었는지 모르지만)는 큰 물고기의 출현으로 인해 금방 깨어진다. 『모자를 보았어』에서 두 거북의 대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의심과 불신, 거짓의 냄새를 풍긴다. 삼부작의 공간이 닫힌 체계(closed system)라는 점도 등장인물의 실존을 밝히는 단서가 된다. 각 등장인물들은 황량한 들판, 어두운 바다 속, 사막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살아가며 작은 모자를 욕망하며 암투를 벌인다. 『모자를 보았어』에서 그 모순성은 한층 더 부각된다. 각기 모자를 쓴 그들은 우주로 유영함으로써 사막이라는 닫힌 공간을 탈출하지만, 모자로 인해 시각을 잃게 된다.
3.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은 인간 행위의 당위성과 관련된 것으로서 윤리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다. 독자들은 삼부작의 등장인물로부터 어떤 미덕도 기대하기 힘들다. 무엇보다도 세 작품 모두 도덕적 딜레마가 존재하는 까닭에 (어린) 독자들은 등장인물들의 행동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내 모자 어디 갔을까?』에서 다른 동물들이 모자의 소재를 알고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사슴이 모자를 찾고 있는 곰을 환기(喚起)시키게 되고 곰은 토끼를 찾으러 허둥지둥 뛰어간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동물들은 아마도 토끼에게 벌어질 일을 예감했을지 모른다. 모자를 되찾고 만족하고 있었던 곰에게 다람쥐가 다가가 토끼의 소재를 물었을 때 그는 토끼가 자기에게 했던 거짓말 그대로 응대한다. 그 행위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이건 내 모자가 아니야』에서 작은 물고기는 작은 모자가 자기에게 더 잘 맞는다면서 자신의 절도 행위를 합리화하며, 꽃게는 큰 물고기에게 작은 물고기의 향방을 알려준다. 그는 모자를 되찾아 쓰고 돌아가는 큰 물고기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또한 『모자를 보았어』의 결말은 해피엔딩같이 보이지만 끝내 그들은 ‘양보’라는 미덕을 발휘하지 않은 채 상상 속에서 그 욕구를 충족한다.
이와 같은 분석에 의거하여 삼부작에 그려진 세계는 ‘허무주의’(nihilism)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이어에 따르면 허무주의란 어떤 지적 체계라기보다 하나의 느낌(a feeling)으로 경험되는 것이라고 하였다.[13] 그것은 공허로 말미암은 고통, 즉 가치도 없고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는 삶으로 인한 고통의 느낌이다. 작은 모자를 욕망하는, 의인화된 주인공들의 모습은 존재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지 못한 인간의 모습과 흡사해 보인다. 그 자신의 의미를 잃은 자는 타인과 세계에도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다. 그러나 허무주의의 딜레마는 인간은 철저한 허무주의, 혹은 허무한 느낌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삶에 의미를 부여해야만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허무주의가 짙게 스며든 작품의 작가라도 자신의 창작품의 의미를 인정받으려는 모순된 욕구를 가지게 되며, 그러한 욕구는 내적 긴장을 일으킨다.[14] 허무주의는 인식론적 허무주의를 낳으며 그 결과는 끊임없는 내적 긴장일 뿐이다. 클라센의 작품에 영향을 미친 포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삼부작은 삶의 의미를 상실한 실존적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는 인간상들을 공포소설의 형식으로 보여준다.
『내 모자 어디 갔을까?』에서 메마르고 황량한 벌판에서 등을 돌린 채 홀로 앉아 있는 곰의 옆 모습에서 우리는 허무한 느낌과 함께 그의 내적 긴장을 엿보게 된다. 『이건 내 모자가 아니야』의 작은 물고기가 큰 물고기에게 잡아먹힌 후 이어지는 세 페이지의 침묵과 정적 속 검은 바다는 이 작품이 히치코크 감독의 영화 『사이코』에서 주인공의 죽음이 주는 강렬한 공허감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 진 것이라는 작가의 고백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모자를 보았어』에서 시야를 가려버린 모자로 인해 어두운 밤하늘에서 부유하는 거북들의 모습은 허무주의가 봉착하는 인식론적 딜레마를 은유하는 듯 하다.
4. 나가는 글
결론적으로, 본 평론이 시사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단순한 글과 그림으로 인해 어린이 도서로 인식되고 있는 그림책도 세상과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에 답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 그림책, 특히 국제적인 도서상을 수상하고 있는 작품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시대 사조에 깊이 물들어 있다. 유대-기독교의 신을 부인하고 근대를 지탱해 왔던 이성과 합리성도 부인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허무주의를 배태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어린이를 위해 그림책을 읽는 사람들은 예술로서의 그림책의 독창성과 심미성만이 아니라 문학 교육적 측면에서 세계관적 읽기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특히 유명한 해외 도서상을 수상한 작품이라면 무조건 수용하는 태도를 경계하고, 우리 어린이들이 이 작품을 통해 보게 되는 세상이 어떤 곳일지, 그리고 성인들은 그것에 대해 어린이들과 어떤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1] 이 연구는 『존 클라센의 모자 삼부작에 대한 세계관적 접근』(현은자, 김주아, 국경아)이라는 제목으로 어린이문학교육연구 19:4. 199-224에 게재된 바 있음.
[2] Kaufmann, W. (2011). 인문학의 미래. [The future of humanities: Teaching art, religion,philosophy, literature and history]. (이은정 역). 파주: 동녘. (원본발간일 1994년)pp. 154-155.
[3] Gelt, J. (2016). Children's book author Jon Klassen and the morally ambiguous universe ofhats. http://www.latimes.com/books/la-ca-jc-jon-klassen-20161117-story.html에서 2018년9월 18일 인출
[4] Amazon, The Horn Book Magazine, Publishers Weekly, School Library Journal, Aladin 등의 웹사이트에 올라온 전문가 혹은 독자 서평을 참고하였다.
[5] Schulevitz, U. (1997). Writing with pictures: how to write and illustrate children’s books.NY: Watson-Guptill Publications
[6] Abrams, M. H. (2005). A glosssary of literary terms (8th ed.). Boston, MA: Thomson
[7] 고선주 (2008). 영국 그림책의 유머 분석. 어린이문학교육연구, 9(1), 167-196
[8] Hammond, H. K., & Nordstrom, G. D. (2014). Reading the art in Caldecott award books.Lanham, MA: Rowman & littlefield(Hammond & Nordstrom. p.203.
[9] 기독 문학평론가인 R. Ryken(1991)이 『기독교와 문학』에서 제안한 앞의 세 개의 질문에 연구자가 네 번째 질문을 덧붙인 것이다. .
[10] Buber, M. (2015). 나와 너. [Ich und du] (김천배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원본발간일1937년).
[11] Gelt, J. (2016). Children's book author Jon Klassen and the morally ambiguous universe ofhats. http://www.latimes.com/books/la-ca-jc-jon-klassen-20161117-story.html에서 2018년9월 18일 인출
[12] Buber, M. (2015). 나와 너. [Ich und du] (김천배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원본발간일1937년).
[13] Sire, J. W.(1995).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 사상. [The universe next door]. (김헌수 역). 서울: IVP. (원본발간일 1988년).
[14] Sire, J. W.(1995).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 사상. [The universe next door]. (김헌수 역). 서울: IVP. (원본발간일 1988년).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후 Eastern Michigan University 에서 석사,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어린이문학교육학회 회장 및 한국 기독교 유아교 육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아동 청소년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대학 부설 생활과 학 연구소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기독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이해>(공저), <그림책과 예술교육>(공저>, <그림책으로 보는 아동과 우리사회>(공저), <100권의 그림책>(공저) 등 그림책 관련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