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의 세계관
기독 독자와 평론가는 그림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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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2025-06-09 22:35
그림책을 통해 세계관의 세계로 이끌어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단순히 그림책 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사건과 현상들을 보는 시각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의심 없이 자신만의(혹은 누군가가 심어 준)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는 것에 대해 경각심이 생깁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해 줘야 하는 것은 단순히 "이것은 좋고, 이것은 나쁘다."가 아닌
세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과 분별할 수 있는 지식과 지혜가 아닌가 싶습니다.
평론에 대한 글이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지혜에 대한 글 같습니다. "세상을 이렇게 보아라." ^^
마지막 수업 과제로 마음이 무겁지만, 그래도 지혜를 구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갑니다!
단순히 그림책 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사건과 현상들을 보는 시각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의심 없이 자신만의(혹은 누군가가 심어 준)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는 것에 대해 경각심이 생깁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해 줘야 하는 것은 단순히 "이것은 좋고, 이것은 나쁘다."가 아닌
세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과 분별할 수 있는 지식과 지혜가 아닌가 싶습니다.
평론에 대한 글이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지혜에 대한 글 같습니다. "세상을 이렇게 보아라." ^^
마지막 수업 과제로 마음이 무겁지만, 그래도 지혜를 구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갑니다!
김선옥2025-06-16 17:35
아이들은 그림책을 통해 세상을 배웁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어떤 그림책을 보여줘야 하는지 왜 아름답고 은혜의 그림책을 보여줘야 하는지 다시 되새겨 봅니다.
크리스천으로서 그림책을 대하는 자세가 무엇인지 교수님 평론을 읽으면서 알지 못 했던 사실들을 알아갑니다. 모든 분야가 그렇듯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 자세는 '교만'이 되어선 안됩니다. 마음이 교만해 지면 내가 하나님보다 뛰어나다는 착각과 동시에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게 됩니다. 죄인된 우리는 항상 내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 말씀을 기준삼아 살아가야 함을 염두해 두어야 합니다.
그림책을 읽는 독자나 그림책 평론가 모두 하나님이 창조를 겸손히 받아들일 때 그 가치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꾸준히 말씀에 빗대어 그림책을 바라볼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함을 알게 됐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그림책을 대하는 자세가 무엇인지 교수님 평론을 읽으면서 알지 못 했던 사실들을 알아갑니다. 모든 분야가 그렇듯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 자세는 '교만'이 되어선 안됩니다. 마음이 교만해 지면 내가 하나님보다 뛰어나다는 착각과 동시에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게 됩니다. 죄인된 우리는 항상 내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 말씀을 기준삼아 살아가야 함을 염두해 두어야 합니다.
그림책을 읽는 독자나 그림책 평론가 모두 하나님이 창조를 겸손히 받아들일 때 그 가치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꾸준히 말씀에 빗대어 그림책을 바라볼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함을 알게 됐습니다.
경남2025-08-26 16:08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시대처럼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 없는 세상 속에서 절대적 기준과 진리 없이, 나의 생각·감정·상황·경험을 우선시하며 각자 스스로 재판관이 되어 자신이 옳다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기준들이 충돌하고, 가치의 혼란과 분열 속에서 더 이상 무엇이 옳은지 고민조차 하지 않은 채 단지 즐거움만을 좇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이러한 때에 교수님의 기독교 평론은 영적 세계관의 치열한 싸움 가운데 혼란을 겪는 우리 아이들과 부모들을 사단의 미혹으로부터 지켜내는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그림책 기독평론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만이 분별을 잃은 시대 속에서 빛과 같은 기준이 되어,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과 인간과 삶을 통찰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사기 시대처럼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 없는 세상 속에서 절대적 기준과 진리 없이, 나의 생각·감정·상황·경험을 우선시하며 각자 스스로 재판관이 되어 자신이 옳다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기준들이 충돌하고, 가치의 혼란과 분열 속에서 더 이상 무엇이 옳은지 고민조차 하지 않은 채 단지 즐거움만을 좇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이러한 때에 교수님의 기독교 평론은 영적 세계관의 치열한 싸움 가운데 혼란을 겪는 우리 아이들과 부모들을 사단의 미혹으로부터 지켜내는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그림책 기독평론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만이 분별을 잃은 시대 속에서 빛과 같은 기준이 되어,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과 인간과 삶을 통찰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with Chang2025-08-27 00:50
교수님의 글을 읽으며, 그림책 비평과 심리상담이 본질적으로 닮아 있다는 생각을 깊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림책을 묘사–해석–판단하는 과정은 상담에서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상담자는 비슷한 호소문제를 가진 내담자를 만날 때도 언제나 ‘not knowing’의 겸손한 태도로
그 한 사람의 고유한 삶의 이야기에 동행해야 합니다. 그림책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저자의 의도와 메시지를 존중하듯, 내담자의 진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보고
그 마음의 결을 존중할 때 비로소 치유와 변화가 일어납니다.
동시에, 그림책을 읽는 독자 개개인의 경험과 심리 상태가 해석에 깊이 스며든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같은 그림책이라도 각자의 ‘마음의 눈’으로 읽을 때 의미는 무한히 확장되고 새롭게 빚어집니다.
이는 포스트모던적 ‘독자 중심 해석’과는 달리, 작가의 의도를 무시하지 않으면서
독자의 삶의 맥락과 그림책이 만나 창조적인 대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림책을 성경적 시각에서 깊이 이해하고 해석하여 비 성경적인 작가의 세계관을 판단할 수 있어야겠다는 책임감을 느낍니다.
앞으로도 그림책을 성경적 세계관 안에서 탐구하며, 한 영혼의 내면 치유를 위한 귀한 도구로 삼는
사역에 힘쓰고자 합니다. 귀한 통찰을 나누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림책을 묘사–해석–판단하는 과정은 상담에서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상담자는 비슷한 호소문제를 가진 내담자를 만날 때도 언제나 ‘not knowing’의 겸손한 태도로
그 한 사람의 고유한 삶의 이야기에 동행해야 합니다. 그림책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저자의 의도와 메시지를 존중하듯, 내담자의 진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보고
그 마음의 결을 존중할 때 비로소 치유와 변화가 일어납니다.
동시에, 그림책을 읽는 독자 개개인의 경험과 심리 상태가 해석에 깊이 스며든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같은 그림책이라도 각자의 ‘마음의 눈’으로 읽을 때 의미는 무한히 확장되고 새롭게 빚어집니다.
이는 포스트모던적 ‘독자 중심 해석’과는 달리, 작가의 의도를 무시하지 않으면서
독자의 삶의 맥락과 그림책이 만나 창조적인 대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림책을 성경적 시각에서 깊이 이해하고 해석하여 비 성경적인 작가의 세계관을 판단할 수 있어야겠다는 책임감을 느낍니다.
앞으로도 그림책을 성경적 세계관 안에서 탐구하며, 한 영혼의 내면 치유를 위한 귀한 도구로 삼는
사역에 힘쓰고자 합니다. 귀한 통찰을 나누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신애2025-12-08 12:56
일전에 교수님께서 수업 시간에 “걷는다는 행위에 전제되는 것이 있을까요?”라고 질문하셨던 순간이 떠오릅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걷는다는 것은 곧 ‘이 땅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모든 행위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믿음과 전제 위에 서 있다는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그림책 또한 작가가 행한 하나의 행위의 결과물이라면, 그 역시 특정한 신념과 전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어떤 해석이든 가능하다”, “정해진 의미는 없다”는 진술은 결국 무의미한 주장일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글과 그림을 교차하며 새겨진 신념 체계와 메시지를 잘 읽어내기 위해 위 평론에서 말씀해 주신 '묘사–해석–평가'라는 세 가지 읽기 기술의 층위를 성실하게 거쳐야 한다는 점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독자가 의미를 마음대로 창안해낼 수 있고, 어떠한 해석도 옳다고 말하는 태도는 유효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한 면에서 그러한 주장은 작가가 드러낸 바르지 못하거나 세속적인 세계관을 간파당하지 않고자 하는 말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동안 그림책을 보며 제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했거나 누구나 좋다고 하는 책들을 좋아했던 저의 태도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책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이나 선입견에 휩쓸리지 않고, 성경 신자로서 진리의 빛으로 텍스트를 비추어 보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깊이 느낍니다. 이 매거진을 그러한 통로로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정아2025-12-08 23:06
"해석의 확실성을 자랑하는 것은 교만의 죄를 짓는 것이며, 반대로 어떤 해석도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태만이라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하나의 해석만이 옳다는 주장은 대화의 가능성을 닫게 하며, 반대로 독자의 해석을 텍스트이 저자나 텍스트 자체보다 우위에 두는 것은 독자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다."
저는 특히 어떤 해석도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태만이라는 죄일 수 있다는 말씀에 공감이 많이 됩니다.
어떤 그림책이던 있는 그대로 읽는 열린 마음이 있나 우선 돌아 보아야겠습니다.
요즘 그림책을 평가하고 비평하는 목소리들을 보면 너무 한 가지 세계관(인본주의)으로 치우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독 신앙관을 가진 비평글들도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저는 특히 어떤 해석도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태만이라는 죄일 수 있다는 말씀에 공감이 많이 됩니다.
어떤 그림책이던 있는 그대로 읽는 열린 마음이 있나 우선 돌아 보아야겠습니다.
요즘 그림책을 평가하고 비평하는 목소리들을 보면 너무 한 가지 세계관(인본주의)으로 치우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독 신앙관을 가진 비평글들도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우승린2025-12-09 05:27
더 느끼는 것은 없을까 싶어서 미루던 댓글을 이제야 씁니다. 그림첵보기가 아직도 제게는 먼 이야기 같고, 촘촘하게 그림책을 읽는 다는 것이 처음엔 너무나 막막했는데, 이글을 보면서 수용의 관점으로 있는 그대로를 보는것이 이런 것이구나 아주 조금씩 살을 붙여가기 시작헀습니다. 많은 세계관의 특징이 제 속에 구분이 되지 않아서 지식도 많이 필요하구나 더 느끼구요. 언젠가 기술하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순서의 자유로움을 직관적인 눈으로 맛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김현경2025-12-09 06:37
저는 마지막 부분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평론가에게도 인간 존재론적 자각과 겸손의 태도가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하나의 해석만이 옳다는 주장은 대화의 가능성을 닫게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에 태만해서는 안 되겠지만, 대화의 공간을 열어놓는 것 역시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교수님께서 인용하신 바흐친의 '창조적 이해'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습니다.
김주경2026-07-11 18:54
이 칼럼을 읽으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림책에 투영된 세계관이 기독교 신앙과 일치하는지를 분별하려면 무엇보다 성경 말씀을 깊이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작품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보고 듣는 태도도 필요하다고 느꼈다.
칼럼에서 소개한 C. S. 루이스의 ‘수용하는 태도’에도 공감했다. 자신의 관심사와 취향, 선입견을 잠시 내려놓고 작품이 먼저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기다리는 태도는 그림책을 읽을 때뿐 아니라 사람과 상황을 대할 때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작품 속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거나, 텍스트라는 거울을 통해 오직 자기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가치관만 확인하려는 ‘읽기의 나르시시즘’은 나 역시 조심해야 할 태도라고 느꼈다.
그런데 나는 그림책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나 어떤 상황을 바라볼 때도 그것을 곧바로 나 자신과 연결하고, 그 안에서 나를 비추어 보는 일이 거의 자동화되어 있는 것 같다. 물론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다 보면 정작 눈앞의 대상이나 사람을 충분히 바라보지 못하고, 나 자신에게 더 집중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먼저 그것이 무엇인지,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보고 들은 뒤에 나 자신을 돌아보는 연습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 자신조차 있는 그대로 예수님 앞에 내어놓기보다, 먼저 스스로를 해석하고 판단하고 고친 뒤에 나아가려 할 때가 많다. 다른 사람과 작품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이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 앞에서 내가 먼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은혜를 경험할수록, 나와 다른 사람들도 성급히 판단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생기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림책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해석하려면 폭넓은 배경지식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배경지식이 없다면 칼럼에서 언급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휘슬러의 어머니, 체 게바라와 찰리 채플린, 프리메이슨의 상징 등 여러 문화적 요소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릴 것이다.
칼럼에서 한 작가의 여러 작품을 함께 읽고 나누는 방법을 제안한 것도 좋았다. 나도 오래전부터 책을 함께 읽고 진지한 신앙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한편에 지니고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늘 성가대 반주를 맡아 청년부에 참석하기 어려웠고, 짬을 내어 참여하더라도 깊은 신앙의 고민보다는 형식적이고 겉도는 이야기만 나누는 경우가 많아 실망하곤 했다. 더욱이 지금은 또래 청년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치앙마이에 살고 있으니, 온라인으로라도 이런 모임을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긴다.
보편 진리를 간결하게 담아내면서도 접근하기 쉬운 그림책을 매개로, 청년들이 함께 읽고 기독교 세계관에 뿌리내린 건강한 관점과 태도에 대해 이야기나누고 배워갈 수 있다면 좋겠다.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자신의 해석을 돌아보는 경험은 장기적으로 건강한 관계와 가정을 이루고 다음 세대를 양육하는 데에도 작은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림책을 읽는 일은 사람을 만나는 일과도 닮아 있다. 묘사, 해석, 판단 이 세 요소는 사람을 이해하거나 특히 학생을 가르칠 때에도 적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피아노를 가르치며 아이들을 더욱 세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해야겠다고 느끼고 있는데 이런 관점이 그 과정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
교사는 좋은 샘플, 즉 모범이 되는 좋은 음악을 많이 듣고 거기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래야 학생의 연주를 듣고 현재 상태와 다음 단계에 필요한 것을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학생의 연주에는 그 아이의 태도와 상태가 어느 정도 드러나기도 한다. 내가 만난 어떤 아이는 사고가 유연하고 새로운 것을 쉽게 받아들이는 아이였는데 음악도 비교적 쉽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표현했다. 틀려도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이어서 나갈 수 있는 아이였다. 다만 연습을 너무 안하고 정확성이 많이 떨어졌다^^; 또 다른 학생중에는 내가 들려준 연주와 자신의 연주 사이의 차이를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학생도 있었다. 평상시에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지 못하는 경향이 있고 고집이 센 편이었다.
다만 레슨을 통해 본 모습만으로 그 아이의 성격 전체를 단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니 먼저관찰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반복적인 관찰을 통해 나의 판단을 수정해 가야 할 것이다.
결국 그림책을 읽는 일과 사람을 이해하는 일에는 비슷한 태도가 필요한 것 같다. 먼저 충분히 보고 들으며, 그다음에 해석하고 판단하되, 나의 해석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의 본이 되시는 예수님을 기준으로 분별력을 길러 가면서도,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그림책을 읽는 일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만나고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칼럼에서 소개한 C. S. 루이스의 ‘수용하는 태도’에도 공감했다. 자신의 관심사와 취향, 선입견을 잠시 내려놓고 작품이 먼저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기다리는 태도는 그림책을 읽을 때뿐 아니라 사람과 상황을 대할 때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작품 속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거나, 텍스트라는 거울을 통해 오직 자기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가치관만 확인하려는 ‘읽기의 나르시시즘’은 나 역시 조심해야 할 태도라고 느꼈다.
그런데 나는 그림책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나 어떤 상황을 바라볼 때도 그것을 곧바로 나 자신과 연결하고, 그 안에서 나를 비추어 보는 일이 거의 자동화되어 있는 것 같다. 물론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다 보면 정작 눈앞의 대상이나 사람을 충분히 바라보지 못하고, 나 자신에게 더 집중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먼저 그것이 무엇인지,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보고 들은 뒤에 나 자신을 돌아보는 연습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 자신조차 있는 그대로 예수님 앞에 내어놓기보다, 먼저 스스로를 해석하고 판단하고 고친 뒤에 나아가려 할 때가 많다. 다른 사람과 작품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이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 앞에서 내가 먼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은혜를 경험할수록, 나와 다른 사람들도 성급히 판단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생기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림책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해석하려면 폭넓은 배경지식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배경지식이 없다면 칼럼에서 언급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휘슬러의 어머니, 체 게바라와 찰리 채플린, 프리메이슨의 상징 등 여러 문화적 요소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릴 것이다.
칼럼에서 한 작가의 여러 작품을 함께 읽고 나누는 방법을 제안한 것도 좋았다. 나도 오래전부터 책을 함께 읽고 진지한 신앙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한편에 지니고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늘 성가대 반주를 맡아 청년부에 참석하기 어려웠고, 짬을 내어 참여하더라도 깊은 신앙의 고민보다는 형식적이고 겉도는 이야기만 나누는 경우가 많아 실망하곤 했다. 더욱이 지금은 또래 청년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치앙마이에 살고 있으니, 온라인으로라도 이런 모임을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긴다.
보편 진리를 간결하게 담아내면서도 접근하기 쉬운 그림책을 매개로, 청년들이 함께 읽고 기독교 세계관에 뿌리내린 건강한 관점과 태도에 대해 이야기나누고 배워갈 수 있다면 좋겠다.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자신의 해석을 돌아보는 경험은 장기적으로 건강한 관계와 가정을 이루고 다음 세대를 양육하는 데에도 작은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림책을 읽는 일은 사람을 만나는 일과도 닮아 있다. 묘사, 해석, 판단 이 세 요소는 사람을 이해하거나 특히 학생을 가르칠 때에도 적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피아노를 가르치며 아이들을 더욱 세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해야겠다고 느끼고 있는데 이런 관점이 그 과정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
교사는 좋은 샘플, 즉 모범이 되는 좋은 음악을 많이 듣고 거기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래야 학생의 연주를 듣고 현재 상태와 다음 단계에 필요한 것을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학생의 연주에는 그 아이의 태도와 상태가 어느 정도 드러나기도 한다. 내가 만난 어떤 아이는 사고가 유연하고 새로운 것을 쉽게 받아들이는 아이였는데 음악도 비교적 쉽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표현했다. 틀려도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이어서 나갈 수 있는 아이였다. 다만 연습을 너무 안하고 정확성이 많이 떨어졌다^^; 또 다른 학생중에는 내가 들려준 연주와 자신의 연주 사이의 차이를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학생도 있었다. 평상시에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지 못하는 경향이 있고 고집이 센 편이었다.
다만 레슨을 통해 본 모습만으로 그 아이의 성격 전체를 단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니 먼저관찰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반복적인 관찰을 통해 나의 판단을 수정해 가야 할 것이다.
결국 그림책을 읽는 일과 사람을 이해하는 일에는 비슷한 태도가 필요한 것 같다. 먼저 충분히 보고 들으며, 그다음에 해석하고 판단하되, 나의 해석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의 본이 되시는 예수님을 기준으로 분별력을 길러 가면서도,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그림책을 읽는 일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만나고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은혜2026-07-12 01:10
이제서야 문화막시즘과 포스트모던 시대사조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였는데.. 교수님의 글이 몇 해 전 글인 것을 보며, 지금은 그 시대의 흐름이 더 팽배해졌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정말 안타깝습니다. 이제서야 관심을 갖게 된 것이 부끄럽기도 하지만 이제서라도 알기 시작한 것에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맡겨주신 아이들을 바르게 길러내라고 보여주고 들려주고 계신 것 같습니다. 부디 기독교적 세계관과 창조 질서가 눈과 귀와 입을 모두 막고 있는 어두운 시대의 밝은 빛의 역할을 감당해내길 소망합니다.
더불어, 교수님의 말씀처럼, 제 자신이 읽기에 방해물이 되지 않도록,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지 않도록, 읽기의 나르시시즘에 빠지거나 성경 구절의 '자기 소견'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근거 없는 판단은 비교육적인 것이니, 그냥저냥 대강 아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도록 탐구에 열심을 내겠습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저로서는 주관적인 느낀점만 읊어대기 쉬울 것 같은데 객관적인 비평을 할 수 있도록 지식을 쌓도록 해야할 것 같습니다. 교만의 죄를 짖지도, 태만의 죄를 범하지도 않도록요!
더불어, 교수님의 말씀처럼, 제 자신이 읽기에 방해물이 되지 않도록,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지 않도록, 읽기의 나르시시즘에 빠지거나 성경 구절의 '자기 소견'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근거 없는 판단은 비교육적인 것이니, 그냥저냥 대강 아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도록 탐구에 열심을 내겠습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저로서는 주관적인 느낀점만 읊어대기 쉬울 것 같은데 객관적인 비평을 할 수 있도록 지식을 쌓도록 해야할 것 같습니다. 교만의 죄를 짖지도, 태만의 죄를 범하지도 않도록요!
강다혜2026-07-12 13:48
아이들을 키우고 가르치며 성인들에게 강의도 하고, 교회에서는 사모의 자리에서 섬기는 저는 교수님의 이 글에 무척 공감이 갑니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어떤 태도와 자세 및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를 계속 생각해보게 합니다. 책 한권 한권을 읽을 때마다, 그 책에 대해서 단 한마디 말을 할지라도 꼼꼼히 고심하고 또 고심하겠습니다.
이아름2026-07-12 21:12
그림책을 잘 읽어내기 위해서 묘사, 해석, 판단이라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게 되어 좋았습니다. 이 요소들을 고려하여 그림책을 조금 더 촘촘하게 읽어보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또한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림책을 읽을 때, 나의 생각과 가치관을 내려놓고, 겸손함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에 너무나도 공감합니다.
사실상 그렇게 나를 내려놓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배워야하고, 더 많이 알아야하는 것 같습니다.
또 한쪽으로만 치우쳐서 보지 않도록, 나의 경험이 무조건적인 정답이 되지 않도록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 함께 생각을 나누는 것이 참으로 귀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림책을 읽을 때, 나의 생각과 가치관을 내려놓고, 겸손함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에 너무나도 공감합니다.
사실상 그렇게 나를 내려놓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배워야하고, 더 많이 알아야하는 것 같습니다.
또 한쪽으로만 치우쳐서 보지 않도록, 나의 경험이 무조건적인 정답이 되지 않도록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 함께 생각을 나누는 것이 참으로 귀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원계실2026-07-13 09:46
그림책을 읽을 때 묘사, 해석, 평가의 과정을 거치되 이 3가지가 어쩌면 동시적이면서 통합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태복음 5:13-16의 소금과 빛의 비유를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소금이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하면 음식의 맛도 내지 못하고 음식의 부패를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세상을 보는 또 다른 창인 그림책을 통하여 읽혀지는 내용들을 제대로 분별하는 작업이 매우 소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림책은 어른보다 아이들이 먼저 접할 수 있기 때문에 더더욱 세계관적 통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역량있는 작가들과 평론가들이 많이 나와야되는 영역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서점에 나와있는 수 많은 그림책 중에 창조, 타락, 구속의 아름다운 서사가 있는 그림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독교적 영향력이 있는 작가가 더 많아졌으면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명시적인 기독교 창작 출판물뿐 아니라 암시적이되 일반적으로 많이 읽혀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터치하는 공감적 기독교적 문화가 더 잘 세워졌으면 하는 기도를 드리게 되네요.
마태복음 5:13-16의 소금과 빛의 비유를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소금이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하면 음식의 맛도 내지 못하고 음식의 부패를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세상을 보는 또 다른 창인 그림책을 통하여 읽혀지는 내용들을 제대로 분별하는 작업이 매우 소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림책은 어른보다 아이들이 먼저 접할 수 있기 때문에 더더욱 세계관적 통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역량있는 작가들과 평론가들이 많이 나와야되는 영역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서점에 나와있는 수 많은 그림책 중에 창조, 타락, 구속의 아름다운 서사가 있는 그림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독교적 영향력이 있는 작가가 더 많아졌으면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명시적인 기독교 창작 출판물뿐 아니라 암시적이되 일반적으로 많이 읽혀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터치하는 공감적 기독교적 문화가 더 잘 세워졌으면 하는 기도를 드리게 되네요.
지민규2026-07-14 00:00
앞서 올해 봄에 그림책 세계관 8주간 강의 후 이 글을 읽으니
앤서니 브라운과 토미 웅거러 책들에 대해 배웠던 것들도 생각나면서
잘 읽어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몇 주에 걸쳐 자세히 배우지 못했다면 너무나 갑작스러웠겠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작가의 여러 책을 살피며 세계관을 파악할 수 있음도 다시 새길 수 있었습니다.
'해석의 확실성을 자랑하는 것은 교만의 죄를 짓는 것이며, 반대로 어떤 해석도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태만이라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림책 세계관을 접하기 전에는 어떤 콘텐츠든 성경적으로 재해석해버리면 그만 아닐까?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닌가라는 안일한 생각에 경계심 없이 콘텐츠를 소비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열린 결말 또한 열린결말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배웠던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사탄은 교묘하게 진지전을 펴나가며 나와 우리 다음세대가 교묘히 공격받고 있는 이 문화전쟁 시대에서 분별력을 갖추어나가길 소망합니다.
앤서니 브라운과 토미 웅거러 책들에 대해 배웠던 것들도 생각나면서
잘 읽어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몇 주에 걸쳐 자세히 배우지 못했다면 너무나 갑작스러웠겠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작가의 여러 책을 살피며 세계관을 파악할 수 있음도 다시 새길 수 있었습니다.
'해석의 확실성을 자랑하는 것은 교만의 죄를 짓는 것이며, 반대로 어떤 해석도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태만이라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림책 세계관을 접하기 전에는 어떤 콘텐츠든 성경적으로 재해석해버리면 그만 아닐까?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닌가라는 안일한 생각에 경계심 없이 콘텐츠를 소비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열린 결말 또한 열린결말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배웠던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사탄은 교묘하게 진지전을 펴나가며 나와 우리 다음세대가 교묘히 공격받고 있는 이 문화전쟁 시대에서 분별력을 갖추어나가길 소망합니다.
기독 독자와 평론가는 그림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그림책 베이직을 발행한 지도 벌써 1년이 지났다. 그동안 ‘그림책의 세계관’ 코너를 방문한 독자들은 이 글들이 ‘그림책 비평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임을 눈치챘을 것이다. 기독 평론가로서 나의 첫 번째 관심은 그림책에 투영된 세계관이 기독교 신앙과 일치하는지 여부를 살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 신자(bible believer)라면 누구나 말씀의 빛으로 모든 생각과 이론을 비추어 판단하려고 노력할 것이다(고후 10:3-6). 진정으로 성경 말씀이 진리라고 믿는 사람들은 포스트모던 시대사조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 때에 그림책 비평에서도 분별력이 필요함을 자각하게 된다. 그러나 신앙의 관점으로 그림책을 비평한다는 행위가 비기독인과 다른 읽기 기술을 요구하거나 그 안에 신비한 요소가 있음을 시사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탐구 과정의 본질은 연구자의 신앙 여부를 떠나 동일한 종류의 활동이다. 물리학의 본질은 물질과 그것의 시공간에서의 운동을 정확히 보는 것이며, 생물학의 본질은 식물이나 동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며, 심리학의 본질은 보이지 않는 인간 내면을 보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림책 비평의 본질도 그림책을 잘 읽어 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책을 잘 읽어내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나는 이것을 묘사 혹은 기술(description), 해석(interpretation), 판단(judge), 이 세 요소로 나누어 살펴 보고자 한다.[1]
첫째, 묘사는 비평가가 어떤 작품에 대한 정보를 독자에게 제공하는 첫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그림책 비평에서 묘사의 역할은 글과 그림, 페리텍스트를 촘촘하게 읽어내어 그 책을 보지 않은 사람도 그림책의 특징과 서사를 파악하고 감상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좋은 묘사는 서술에서 끝나지 않으며 독자들을 위해 글을 다듬고 해석과 판단의 발전된 형식으로 나아간다. 평론가가 묘사한 정보가 부정확하거나 심하게 완성도가 떨어지면 해석과 판단의 신빙성이 떨어지게 된다. 좋은 묘사는 해석과 판단의 기초가 되며 그것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이것은 C.S. 루이스(2002)가 촉구하는, 텍스트에 대해 선입견을 버리고 수용(reception)하는 태도로 읽는 것이다. 수용이란 “그 작품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행하기를 기다리는 것”[2] 이다. 즉 자신의 관심사와 취향과 선입견을 내려놓고 그 작품이 우리에게 무엇을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용한다는 것이 꼭 텍스트가 말하는 바를 무조건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 자신이 읽기에 방해물이 되지 않도록 자신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후에야 그 텍스트가 우리에게 행하고자 하는 것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으며 그것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반대로 ‘나쁜 독서’ 태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책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것”이며[3] “텍스트라는 거울에서 오직 자신만을 보는, 자신의 가치관이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이데올로기만을 보는”[4] 것이다. 그것은 심리학적으로는 읽기의 나르시시즘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신학적으로는 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사사기 21:25)와 흡사한 것이다.
둘째, 해석은 비평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이자 가장 복잡한 활동일 것이다. 어린이가 읽는 그림책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인격체인 작가의 창작물이라면 세상과 인간과 관련된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해석의 역할은 그것을 밝히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해석에 있어서 상대주의적이거나 독자중심적인 접근과 대비된다. 포스트모던 비평가들은 텍스트의 의미는 그 텍스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창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독자가 없으면 텍스트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자의 해석에 전적으로 의존하다 보면 수많은 해석이 존재할 수 있으며 결국 해석이라는 활동은 무의미해진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제인 욜런이 글을 쓰고 바바라 쿠니가 그림을 그린, 『강물이 흘러가도록』은 스위프트 강이 흐르던 아름다운 마을이 댐 건설로 인해 강물 아래에 잠기게 되었다는, 미국 매사추세츠주에서 있었던 실화에 기반한 작품이다. 바바라 쿠니는 많은 그림책 독자들이 애호하는 작가이며 그의 작품들은 『달구지를 타고』, 『바구니달』, 『미스 럼피우스』와 같이 주로 흙냄새 나는 곳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고 살아가는 평화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래서 어떤 독자들(특히 환경보호론자의 경우)은 이 작품이 댐 건설로 인한 자연 환경과 인간의 황폐화를 고발하는 텍스트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제인 욜런이 글을 쓴 이 작품은 인생에 대한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Letting Swift River Go』(스위프트 강을 흘러가게 하기)라는 원어 제목과 본문에서 두 번 반복된, 주인공 샐리 엄마의 “놔 주렴”(Let them go)(아이들이 개똥벌레를 병에 가두었을 때와 마지막 장에서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타고 호수에 간 샐리가 강물을 두 손에 담았을 때)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이 텍스트의 의미는 ‘너의 것이 아닌 것’ 혹은 ‘과거의 것’에 집착하지 말고 그것들이 제 길을 가도록 놓아주라는 의미로 해석하게 된다.
그림책 베이직에 실린 “앤서니 브라운의 『고릴라』는 어린이를 위한 텍스트인가”라는 제목의 평론은 바로 ‘그림책을 있는 그대로 읽고 묘사하기’를 시도한 것이었다.[5] 국내의 그림책 독자에게 널리 알려진 이 작품은 열린 결말(open ending), 모호함(ambiguity), 패러디(parody),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 그리고 불확정성(indeterminacy)과 같은 포스트모던 문학의 특성과 더불어 시각적 인유(visual allusions)와 글과 그림의 아이러니(irony)가 생성하는 다층적 의미로 인해 일반 독자는 물론, 평론가에게도 해석의 어려움을 안겨주고 있다. 높은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이 텍스트의 암시성은 평론가들에 의해 단편적으로 다루어져 왔으며, 작가 자신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는 『앤서니 브라운 나의 상상 미술관』(2021/2021)에서도 그에 대한 언급은 찾아보기 힘들다.
[1] 현은자(2017). 어린이 그림책 서평에 내포된 윤리적 속성. 『어린이문학교육연구』 18:2.207-226.
[2] C.S. Lewis (1961/2001). 『문학비평에서의 실험』 p. 35.
[3] Boorstin(1962/2004). 『이미지와 환상』
[4] Vanhoozer 외 (2007/2009). 『문화해석』 p. 653
[5] 현은자, 이지운 (2020). Anthony Browne 의 『고릴라』에 그려진 전복의 이미지. 『어린이문학교육연구』 22(1). 1-25. 현은자(2022) 앤서니 브라운의 『고릴라』는 어린이를 위한 텍스트인가. 『그림책 베이직』 9월호.
[6] 현은자, 김주아, 국경아 (2018). 존 클라센의 『모자 삼부작』에 대한 세계관적 접근. 『어린이문학교육연구』 19(4). 199-224.
[7] 정일권(2020). 『문화막시즘의 황혼』
[8] 현은자(2022) 존 버닝햄의 백일몽을 꾸는 아이들. 『그림책 베이직』 12월호
[9] K. Vanhoozer (1998/2003). 『이 텍스트에 의미가 있는가』 pp. 741-747.
[10] Barrett(2000/2004) 『미술비평』
[11] 문학이론가 바흐친(M. Bakhtin)은 공감을 통해 다른 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그가 “창조적 이해”라고 부른 것을 제안했다. 이에 따르면 거대하고 비판적인 대화에서 모든 당사자가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을 유지하지만, 다른 이들한테서 홀로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운다. (재인용, D. Naugle, 『세계관』, p. 543.)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이며 그림책 평론 작업을 하고 있다. 미국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1989년부터 2023년까지 성대 아동청소년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2021년부터 웹진 <그림책 베이직>에 '그림책의 세계관'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그림책 세계관 연구소에서 운영하고 있는 '그림책 세계관 지도사 과정'에서 '그림책의 세계관', '기독 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세계관>, 공저로는 <그림책의 이해1, 2>, <그림책과 예술교육>, <세계 그림책의 역사>, <어린이교육전문가가 엄선한 100권의 그림책>, <신앙이 자라는 그림책 읽기>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