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의 세계관


앤소니 브라운의 『고릴라』는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인가?

2022-09-29
조회수 3756



앤소니 브라운의 『고릴라』는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인가? 



들어가는 글


이 평론의 제목은 매우 파격적이며 도발적으로 들릴 수 있다. 왜냐하면 앤소니 브라운은 수많은 어린이 도서상 수상경력(1)이 증명하듯 매우 탁월한 예술적 기량을 지닌 작가이며, 그의 작품 대부분은 한글로 번역되어 현재 학교와 가정에서 읽히고 있기 때문이다. 2005년 첫 방한 이후 이어진 몇 번의 원화전과 전시회, 그리고 최근 한가람 미술관에서의 전시회로 인해 국내에서의 그의 인지도는 매우 높다.   

다른 한편, 그의 작품은 해석의 난이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그의 작품 대부분에서 열린 결말(open ending)에 대한 해석은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고릴라』의 마지막 장면에서 뒷 모습을 보이며 한나와 함께 걸어가는 성인 남자는 한나의 아버지인가, 아니면 고릴라인가? 『돼지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차를 수리하는 엄마는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겁장이 윌리』는 정말 몸이 커졌던 걸까? 몸은 커졌지만 여전히 겁쟁이로 남아 있는 걸까? 『특별한 손님』에서 아버지와 케이티는 아버지의 여자 친구와 한집에서 살게 될까? 등... 결말이란 도입에서 제시되었던 과제들이 모두 해결되는 부분이므로 작품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열린 결말은 독자에게 종결감과 만족감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기분 나쁜 찜찜함을 남긴다.   

그의 작품의 특성은 여러 각도에서 기술될 수 있겠지만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 “모호함(ambiguity)”라고 할 수 있다. 글과 그림의 의미가 서로 모순되는 장면도 있으며 무엇보다 배경처럼 그려진 이미지의 의미를 알기 힘들다. 이 시각적 이미지들은 플롯에 기여하는 바가 없어 보이므로 대부분 지나치게 되기 쉽다. 심지어 숙련된 독자(competent reader)라 하더라도 이 시각적 이미지를 해석하기는 쉽지 않다. 작가의 의도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표면적인 읽기가 아닌 심층적인 읽기와 문학적 지식(literary knowledge)이 동원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주제를 2021년의 논문(2)에서 다룬 바 있다. 

『고릴라』는 종종 소망 성취의 서사로 해석되곤 한다. 줄거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아버지의 관심과 사랑에 목말라 있던 한나라는 소녀가 생일 전날 밤 아버지처럼 커진 고릴라 인형과 함께 동물원에 가서 고릴라를 보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아침에 아버지의 생일 축하 인사를 받고 같이 손을 잡고 동물원으로 간다. 독자 서평을 읽어보면 대부분의 독자들은 해피엔딩으로 해석하고 만족해 하지만, 때로는 마지막 장면을 해석하는데 어려움을 보인다. 그러나 어떤 식의 반응이던 거의 매 장면마다 그려진 시각적 디테일에 관심을 두고 해석해 보려는 독자들은 거의 없는 듯 하다. 고릴라로 패러디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휘슬러의 『어머니』, 그리고 패러디된 체 게바라와 찰리 채플린의 초상화 포스터, 표지의 고릴라 발 밑에 그려진 투명 피라미드, 어두운 방 구석에서 TV를 보고 있는 한나의 방 벽지에 그려진 어둡고 기괴한 형태의 실루엣 등이 그것이다.   

작가는 이 점에 대해서는 명쾌한 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의 자전적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앤서니 브라운 상상 미술관』(2011)에서 그는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의 해설에 그다지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 않다. 『고릴라』에 대한 해설이 실려있는 5장에서 그는 1983년 출간된 『고릴라』가 고릴라가 등장하는 첫 번째 책이었다고 밝히면서 이 작품에 대한 자신의 특별한 감정을 이렇게 토로하기도 했다. “『고릴라』는 내가 만든 책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다. 『고릴라』를 작업할 당시 나는 처음으로 그림책을 만드는 법을 진정으로 이해했다고 느꼈다. 글과 그림이 함께 있으면서도 따로따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뜻이다“(p.79).    


본 평론에서는 이 작품에 그려진 시각적 암시(visual allusion)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여 분석해 보도록 한다.   

1. 명화 패러디

2. 유명인의 포스터 패러디

3. 프리메이슨의 상징들 

4. 고릴라와 한나의 심야 데이트 


1. 명화 패러디

고릴라에서 패러디된 명화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의 『모나리자』와 제임스 휘슬러(1834-1903)의 『어머니』이다. 두 작품 모두 여성의 초상화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모나리자 패러디는 한나가 고릴라 인형을 들고 자기 방으로 뛰어 올라가는 계단 벽에 걸려있다. 미술사가들의 말을 빌면 이 작품은 1503-1506년경 그려졌다고 한다. 그려진 연대도 확실치 않으며, 이 초상화의 주인공 역시 누구인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심지어 실존 인물인지 여부도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나리자가 유명해진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의 미소일 것이다. 이 여인이 왜 미소짓고 있는지 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표현기법 측면에서 이 그림에는 화가가 창시한 ‘스푸마토’(sfumato)라는 새로운 화법이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화법은 이목구비의 가장자리를 흐릿하게 그림자 처리를 함으로써 인물을 더욱 부드러워 보이게 하는 효과를 낳는다. 또한 이 작품이 매력을 더하는 것은 배경이 되는 몽환적인 풍경이다. 바위, 강, 길, 수로가 그려진 풍경은 인물의 좌우에서 서로 맞지 않으며 지평선이나 화가가 보는 각도 등도 서로 다르다. 모나리자가 입고 있는 의상과 포즈가 세련미를 추구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투영하고 있다는 평론가도 있다(3). 이 작품이 그려진 15세기에는 주로 크리스털 주전자, 묵주, 기도서, 또는 유니콘을 통하여 정결, 도덕성, 헌신과 같은 여성상을 상징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모나리자의 여성상은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을 통해서만 표현되고 있으며 그녀의 검은 베일은 초상화의 주인공이 유행과 도덕성을 동시에 추구하려는 여성임을 보여준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이 명화 패러디가 한나의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에 걸려 있다는 점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패러디된 모나리자는 한나가 층계를 오르고 내리는 모습을 항상 지켜볼 수 있는 위치에 걸려져 있다. 반면, 아침에 한나가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가는 장면에서는 그 작품이 보이지 않는다.


두 번째 명화 패러디는 휘슬러의 『어머니』로서 고릴라가 아버지의 외투를 입고 한나와 외출하기 전에 마주보고 있던 현관 옆에 걸려 있다. 휘슬러의 어머니 안나는 아버지가 타계한 후 죽을 때까지 상복을 입었던 전형적인 청교도 여성이었다고 한다. 반면 보헤미안의 기질을 타고난 휘슬러는 그런 어머니가 주는 심리적 압박에서 벗어나려고 일부러 영국 런던으로 가서 그곳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미술사학자 전원경(4)에 따르면 이 작품에서는 휘슬러가 그렸던 젊은 여자의 초상화에서 나타난 감수성 어린 표현이나 따뜻함이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에 대한 어떠한 애정도 보이지 않으며 어머니의 늙은 모습은 무자비할 정도로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휘슬러는  아들을 찾아온 어머니와 런던에서 함께 살기도 했지만, 그녀를 잉글랜드 남부의 요양원으로 보냈고,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거의 찾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패러디된 『어머니』 초상화가 한나와 고릴라의 심야 외출을 목도할 수 있는 현관에 걸려있다는 것도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두 장면에서 명화 패러디가 사용된 것에 대해 국내외의 평론가들은 그 맥락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주로 전복(subversion)의 측면에서 해설할 뿐이다. 예를 들어, S. 베케트라는 유명한 그림책 평론가는 다른 포스트모던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앤소니 브라운의 작품도 우선은 그림책에 대한 관습적 사고에 도전하고 고유한 예술의 장르로서의 그림책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발전시키는 전략으로, 두 번째는 순수 예술에 대해 복수(revenge)하는 것으로서 시각적 암시를 사용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5).


2. 유명인의 포스터 패러디

서양의 평론가들이l 『모나리자』와 『어머니』 와 같은 순수 예술 패러디에 다소간 관심을 기울이는 것과는 달리 체 게바라(Che Guevara)(1928-1967)와 챨리 체플린(Charlie Chaplin) (1889-1977)의 패러디된 이미지에 대한 평론은 거의 찾기 힘들다. 이 두 인물에게는 크게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둘 다 공산주의 이념과 관련된 인물이라는 것이고, 복제된 그들의 이미지는 전 세계적으로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이 되었다는 점이다. 체 게바라의 포스터 패러디는 고릴라가 한나를 목마 태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담벽에 붙어 있다. 그럼 체 게바라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바스크-아일랜드 혈통의 중산층 가정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매우 총명했고 그의 가정은 부유하였다고 한다. 그는 1953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에서 전문 의사 면허증을 취득한 후, 오토바이로 중남미 대륙을 탐사하는 여행길에 나섰다가 원주민과 민중의 비참한 현실에 한없는 연민을 느끼고 의사라는 전문직과 편안한 삶을 희생하고 공산 혁명에 헌신하였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반군 지도자가 된 그는 쿠바의 공산 혁명이 성공한 후 정부 각료가 되었으며 쿠바를 떠난 후 볼리비아에서 무장 투쟁을 하다가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잡혀서 총살당하였다.

쿠바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도처에 깔린 그의 사진이나 초상화, 그리고 티셔츠에까지 그려진 그의 이미지를 발견하는 반면, 국부인 피델 카스트로의 사진이나 초상화는 보기 힘들다고 한다. 죽은 체 게바라가 쿠바인의 정신적인 지주가 된듯한 분위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카스트로가 체 게바라를 내세워 쿠바 국민을 40여 년 전의 쿠바혁명의 달콤한 꿈에 묶어두려는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6). 남미를 공산화하려던 시도가 실패하고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산주의의 이상을 상징하는 이미지로서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 그의 이미지는 ‘그래픽 혁명’이 만들어낸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되어 내의, 핀, 포스터, 시계, 맥주에까지, 그리고 광고물로도 활용된다. 그렇게 해서 팔리고 구매되는 체 게바라의 이미지는 항상 긴머리, 거친 수염, 별이 달린 베레모를 쓰고 있는 모습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바로 그 다음 장면이다. 고릴라는 집에 가고 싶다고 한 한나를 집으로 곧장 데려다주지 않고 풀밭 위의 댄스파티로 이끌고 가서 춤을 추고 있다. 그들 주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커플들의 춤사위로 미루어볼 때 그 춤의 형태는 ‘탱고’ 댄스로 짐작된다. 탱고라는 춤은 체 게바라의 모국 아르헨티나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며 탱고 음악은 이탈리아 남부에서 온 가난한 이민자의 삶을 대변하는 음악으로 알려져 있다(7). 여기에서 우리는 체 게바라의 패러디 초상화와 탱고 춤의 연속 배치가 우연이거나 그저 단순한 배경에 지나지 않음을 짐작하게 된다. 


찰리 채플린의 패러디된 초상화 또한 체 게바라처럼 끊임없이 복제되고 재생산되는 이미지이다. 그의 본명은 찰스 스펜서 채플린이다. 그의 이름과 함께 떠오르는 이미지는 특유의 콧수염에다 중산모, 대나무 지팡이, 목이 올라간 커다란 구두, 익살맞은 동작과 함께 어딘가 모르게 우울하고 슬픈 눈이다. 그는 영국에서 태어났으나 20대에 미국으로 떠나 그곳에서 20세기를 대표하는 배우가 된다. 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그의 이미지는 그의 철저한 관리의 결과였다고 한다. 그는 배우로서 성공한 이후에 소품, 배경, 무대 장치 등을 지휘하는 감독이 되었으며 영화 제작 현장에서 다른 배우들의 동작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안무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때로는 관객들의 취향에 맞도록 자신의 이미지를 변화시킬 만큼 자신의 이미지 관리에 굉장히 신중했다. 게다가 최초로 프로모션 전략을 구사한 인물로도 유명한데 우편엽서와 만화 그리고 자신을 모델로 한 인형 등을 상품화시킨 것이 그 증거다. 

미국에서 활동할 당시 그는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으며 정치적인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정치적 이념은 1930년대부터 구체화되었고 사회 비평적인 요소들은 그의 영화작품에 반영되었다. 2치 대전 후 미국 사회에 불어 닥친 반공산주의 분위기 속에서 그가 가진 공산주의 성향으로 인해 그는 미국 정부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혔으며, 1952년 영국 여행으로 미국을 떠난 후 미국 정부가 비자 갱신을 거부하여 다시는 미국으로의 재입국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의 영화계인 할리우드의 분위기를 고려할 때 그가 공산주의 사상을 접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더구나 그는 자기 작품 안에서 전체주의와 함께 자본주의를 풍자한 것으로 유명하다.

체 게바라와 챨리 채플린은 거의 동시대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활동 무대는 달랐지만, 전자는 라틴 아메리카의 공산주의 혁명에 가담했으며, 후자는 공산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고  미국의 시장경제와 대량생산 체제를 비판한 바 있다. 또한 미디어가 만들어낸 그들의 이미지는 부가가치가 많은 상품이 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3. 프리메이슨의 상징들

혹자는 프리메이슨 관련 담론을 음모론으로 폄하하기도 하지만 음모론이라고 하기에는 구체적인 사료들과 증거가 존재한다. 게다가 최근 들어 프리메이슨은 굳이 자신을 숨기려 하지 않으며 다양한 미디어와 건축물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다. 프리메이슨이란 중세 영국의 석공들이 구성한 롯지에서 시작되었으며 현재 전 세계 곳곳에서 여러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단체다. 그러나 그 기원은 솔로몬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 건축에 참여했던 석공들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주장도 있다(8). 그들은 현재 영국에 가장 큰 기반을 두고 있으며 도덕성과 철학적 믿음을 나누는 사교 단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단원이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유일신이 아닌 신적 절대자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을 믿어야한다는 점과 승급 단계에서 일련의 의식이 있다는 점에서 사교(邪敎)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9). 프리메이슨은 특정 상징의 사용으로도 유명하다. 예컨대 컴퍼스와 직각자, 하얀 앞치마와 같은 석공과 관련된 물품, 격자무늬 바닥, 야긴과 보아스라고 불리는 두 기둥과 같은 성경과 관련된 상징, 그리고 이집트 문화와 관련된 피라미드, 오벨리스크, 태양과 달, 영국 왕실 문양, 악한 세력을 상징하는 마녀, 용이 대표적인 것이다. 

피라미드

고릴라의 한글 번역판 표지에는 고릴라의 발아래의 작은 실루엣들에서 투명한 유리 피라미드 두 개를 볼 수 있다. 다른 건물들의 실루엣은 검게 그려져 있지만 두 피라미드만은 투명하다. 1798년 이집트의 프리메이슨 롯지는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과 함께 설립되었다고 한다. 프리메이슨은 피라미드를 비롯한 이집트 건축물에 매료되어 이를 프리메이슨 상징으로 택하였으며 추후에 식민지 이집트의 자치와 해방을 위한 정치적 활동의 기반 역할을 하며 이집트 내에서 다양한 종교와 사회적 배경을 가진 단원을 모으게 되었다고 한다(10).


석공의 작업 도구와 태양과 달 이미지

삼각형과 ㄱ자 모양은 최초의 석공이었던 메이슨(mason)의 작업 도구를 상징하는 직각자와 흡사한 형태이다. 프리메이슨 입회식에서 신입 단원은 생명의 빛을 잃는다는 의미로 안대를 착용하게 되며, 의식이 끝나고 안대를 벗으며, 세 가지 ‘위대한 빛’인 태양, 달, 그리고 절대자를 통하여 세속의 삶에서 벗어나 프리메이슨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11). 영국 프리메이슨 전통은 여기에서 더 나아간다. 안대를 벗은 뒤 제단에 무릎을 꿇고 직각자와 삼각형 모양의 컴퍼스, 성경을 옮기고 나서야 프리메이슨 단원으로 인정받는다.


자유의 여신상

고릴라와 한나가 들어간 영화관의 스크린에는 수퍼맨 의상과 자세를 취한 고릴라가 뉴욕 하늘을 날고 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 전에 한나와 고릴라가 보았던, 철창에 갇혀있는 동물원의 유인원들과 이 슈퍼맨 고릴라는 극적인 힘의 대조를 이룬다. 뉴욕의 다른 고층 빌딩들은 흐릿하지만, 날아가는 고릴라 아래의 자유의 여신상만은 두꺼운 선과 음영으로 그려져 부각되어 있다. 자유의 여신상은 프리메이슨의 상징 중 하나로 여겨지는 것이다. 여신상은 뉴욕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로서 프랑스가 19세기 말에 미국의 독립 100주년을 축하하며 선물한 것이다. 이 상을 조각한 프레드릭 어거스트 바르톨디는 1875년에 파리의 알사스-로렌 롯지에서 프리메이슨이 되었다고 한다. 바르톨로디가 가졌던 프리메이슨 신념은 자유의 여신상이 상징하는 민주적 계몽주의의 기초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12)). 이는 자유의 여신상이 완성된 19세기 후반 당시 미국에서는 프리메이슨 주최 행사가 흔히 이루어졌는데 자유의 여신상 완공 행사 또한 프리메이슨 공직자들의 연설과 축하로 진행되었다는 사실로 뒷받침된다(13)


한나 방의 벽지

한나가 자신의 방에 홀로 앉아 TV를 보고 있는 장면에서 모니터의 빛이 방구석에 앉은 한나를 비추고 있다. 그 빛은 한나 주변의 벽지에 그려진 화려한 꽃과 나비, 버섯 등의 어린이 같은(childish) 이미지를 비추고 있다. 그러나 그 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벽지는 박쥐, 마녀, 늑대, 용과 같은 어둠과 악을 상징하는 존재들의 실루엣으로 가득하며, 그 벽 위편에는 어두운 아프리카 대륙 액자가 걸려있다.


4. 한나와 고릴라의 심야 데이트

한나와 고릴라의 물리적 만남은 한나가 아버지로부터 생일 선물로 받은 고릴라 인형이 계기가 되었지만, 고릴라는 그전부터 한나의 소망이 투영된 대상이었다. 한나는 아버지가 동물원에 자신을 데리고 가는 대신 인형을 선물한 것에 실망하여 그 인형을 방구석에 내던졌다(“threw the gorilla into a corner...”). 그리고 그 밤에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난다. 인형 고릴라가 점점 커지더니 침대 발치에서 한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고릴라는 두려워하는 한나를 안심시키고 동물원에 데려다주겠다고 제안한다.

여기에서 고릴라가 한나의 친구가 아니라 아버지 혹은 성인 남성의 대리인으로 추측되는 두 가지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대체로 환상의 친구는 주인공과 유사한 연령이거나 혹은 같은 성(性)의 인물로 등장하지만 여기에서는 의인화된 성인 남성이며, 두 번째로, 고릴라는 아버지의 의상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고릴라는 아버지 옷을 입은 후에 “아주 잘 맞는데”라고 하며 속삭인다. 외투를 입은 고릴라와 한나는 보름달이 뜬 밤중에 아버지 모르게 집을 나간다. 그들의 동선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나무를 타고 동물원에 도착한 후 동물원에서 오랑우탄과 침팬지를 관람한다. 그 후 극장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하고 영화관 좌석에 앉아서 수퍼맨복장을 한 고릴라가 등장하는 영화를 관람한다. 그 다음에는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풀밭에서 춤을 춘다. 그리고 집에 도착한 후 현관 앞에서 굿나잇 키스를 나누고 헤어진다. 이 동선을 따라가 보면 한나와 고릴라의 행위는 성인과 어린이가 아니라 성인 남녀의 데이트와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심야에 이루어졌으므로 심야 데이트라고 할 수 있다.

다시 각 장면의 그림을 자세히 읽어보도록 하자. 보름달이 뜬 밤에 고릴라는 아버지의 코트를 입고 한나를 오른 팔으로 들어 품에 안은 채 담을 넘어 동물원에 들어 간다. 심야에 문 닫힌 동물원 담을 월담하는 행위는 위법적인 것이지만 대부분의 독자에게 이 사건은 그런 식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나의 간절한 소원성취라는 낭만적인 시각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철창에 갇힌 유인원들을 관람한 후 그들은 심야 극장의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한다. 그런데 야간에 미성년자를 부모도 아닌 성인이 극장에 데리고 가는 것은 법적으로 금지된 것은 아닐지라도 부적절한 행위일 수 있다. 관객석의 실루엣을 자세히 관찰하면 한나와 고릴라 가까이에 앉은 두 사람의 실루엣은 포개져 있다.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한나의 요청에 따라 귀갓길에 오르던 그들은 집으로 곧장 향하는 대신 풀밭 위에서 벌어진 댄스파티에 합류한다. 한나는 고릴라의 두 손을 잡고 고릴라의 발등을 딛고 춤을 춘다. 그런데 그들 뒤와 옆에서 춤을 추고 있는 남녀 고릴라들의 춤사위는 영락없는 탱고 동작이다. 탱고는 남녀의 잦은 스킨쉽이 요구되는 춤이다. 이 춤은 아르헨티나 빈민이주민 매춘부와 고객이 함께 어울리던 춤으로부터 유래하였다고 한다(14). 그런데 이 장면 바로 전에는 체 게바라의 포스터가 등장했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체 게바라 초상화와 아르헨티나에서 유래한 탱고의 순차적 배치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가장 불편한 장면은 그 다음 벌어진 일들이다. 한나의 집에 도착한 고릴라와 한나는 현관 앞에서 굿나잇 키스를 하고 헤어진다. 아침에 침대에서 깨어난 한나 옆에는 작아진 고릴라 인형이 누워있다. 그런데 한나는 전혀 놀라거나 당황한 빛을 보이지 않고 그와 눈을 맞추고 미소 짓는다. 이 장면에서 성적인 암시를 읽는 것은 오독(誤讀)일까. 그런데 이 장면을 두고 영국 그림책 비평가 니콜라예바와 스콧은 『그림책을 보는 눈』에서 다음과 같이 해설한 바 있다.“지금 한나 옆에 놓여 있는 고릴라 인형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만약 밤 사이 고릴라와 함께 한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면, 고릴라는 낮에는 인형으로 변신하고 나중에 침대로 들어왔다. 아니면, 한나가 선물을 열어보고 화가 나서 고릴라 인형을 던져버린 후 방에 들어온 아빠가 인형을 침대에 가져다 놓은 것이다”(15). 그리고 곧 이어 저자들은 “We will not speculate on the incestuous implication of this action” (우리는 이 행위의 근친상간적인 함의에 대해서는 숙고하지 않을 것이다)(16) 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 코멘트는 『고릴라』를 그저 아름다운 판타지로만 이해했던 독자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문장은 번역본에서는 누락되었다.) 


나가는 글

앤소니 브라운은 누구보다도 글과 그림 기호의 조합을 탁월하게 구사하는 포스트모던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림책을 독립적인 예술 영역으로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그림책 평론가들에게 그의 작품은 훌륭한 제재(題材)가 된다. 그의 예술성이 높게 평가받는 데에는 극도의 암시성과 다의성도 한몫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언어는 어린이는 물론 일반 독자들도 해독하기 어려운 것이다.

지금까지의 분석 결과를 다시 정리하자면, 앤소니 브라운과 같은 포스트모던 그림책 작가들이 명화를 패러디하는 전략은 명화의 성스러운 아우라를 잃게 하며 순수 예술을 조롱하는 포스트모던 그림책의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인용된 『모나리자』와 『어머니』는 모두  어머니라는 존재의 물리적, 심리적 부재를 암시할 뿐 아니라 전통적인 모성의 이미지를 패러디한다. 『모나리자』는 정숙한 여성상을, 한나와 고릴라의 허락받지 않은 심야 외출을 목도하고  있는 현관 앞 『어머니』는 부모의 권위를 조롱한다. 공산주의 혁명가인 체 게바라와 공산주의에 경도되었던 찰리 채플린의 포스터 패러디 역시 다층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는 작가의 이념적 성향을 암시하는 동시에, 혁명의 영웅으로 혹은 천재적인 배우로서 추앙받던 인물들이 지금은 각각 그들의 활동 무대였던 길거리와 극장 벽의 싸구려 이미지로 전락하고 있음을 폭로한다. 그 기원이 구약의 솔로몬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인류 최고의 사교 집단인 프리메이슨의 상징 이미지도 이 작품의 전복성을 드러낸다. 프리메이슨의 이념은 인간이 신을 대신하여 자신의 힘으로 이상향을 건설할 수 있다는 극도의 인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나와 고릴라의 심야 데이트는 이 모든 시각적 암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단편적인 시각적 단서들을 관계짓고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맥락을 형성한다. 부성애의 대리인으로서 등장하는 고릴라와 한나의 관계는 근친상간, 혹은 소아성애를 암시한다. 종결 부분의 글텍스트에서 아버지로 지칭되는 존재는 미스테리하기만 하다.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한나는 아래층으로 후닥닥 뛰어 내려갔어. 아빠한테 어젯밤 일을 얘기하려고 말이야. 아빠가 말했어 ”생일 축하한다. 우리 귀염둥이, 동물원에 가고 싶었지?“ 한나는 아빠 얼굴을 바라보았어.” 그런데 지금 한나는 등 뒤의 아빠가 아니라 손에 든 고릴라 그림을 내려다 보고 있다. 이러한 글과 그림 기호의 모순된 관계 역시 다층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한나의 머리 너머로 그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의 바지 뒷주머니에는 바나나가 꽂혀있다. 그는 아버지인가? 아니면 이번에도 역시 아버지로 분한 고릴라인가? 한나가 고릴라 인형을 들고 아버지와 함께 걸어가는 마지막 장면 역시 찜찜하기는 매한가지다. “한나는 무척 행복했어”(She was very happy)라는 상투적 표현 뒤에 감추어진 진실은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고릴라』의 세계관은 문화 막시즘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지난 9월호의 토미 웅거러 평론에서도 다루었듯이 문화 막시즘의 목표는 서양 문명의 두 개의 축이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토의 이성주의적 사유방식과 유대-기독교 가치관을 전복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를 유지시켜 온 전통과 질서를 파괴하며 성적 규범과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 구조를 해체하려 한다. 소아성애의 문제는 문화 막시즘의 가장 주요한 아젠다인 사회주의 성정치(젠더 이데올로기와 성인지 페미니즘), 다문화주의 그리고 생태사회주의 중의 하나가 된다(17).  동성애/소아성애/근친상간은 깊은 관계가 있으며 유럽 68 ‘향락주의적 좌파’에 의해서 사회주의 성혁명과 성정치 운동의 맥락에서 전개되었다. 그런데 2021년 1월에는 프랑스의 유명 정치학자 올리비에 뒤아멜이 30여년 전 10대 의붓아들을 수시로 성폭행했다는 폭로가 터져 나와 프랑스 사회가 큰 충격에 빠진 바 있다. 인권을 부르짖던 그들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르몽드지에 따르면 프랑스인의 14%가 미성년 시절 성적 학대를 경험한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프랑스인의 3%가 가족으로부터 성폭행 등 근친상간 피해를 본 것으로 보고되었다(18).

앤소니 브라운의 작품에 숨겨진 성적인 암시를 작가의 사생활과 연관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모리스 센닥(19)처럼 그의 사후에 무엇이 밝혀질지는 모르지만 지금 우리가 염려해야 하는 것은 다른 데 있다. 포스트모던 작가들은 그들의 작업이 어린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연령(all ages)을 위한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해왔다. 포스트모던 작가만이 아니라 예술가라고 불리기를 원하는 그림책 작가들의 이러한 그림책 관(觀)은 성인만큼 어린이를 존중하는 태도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림책이라는 매체가 어린이의 독서 자료가 아니라 글과 그림 기호들의 실험실 내지 놀이터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우리의 어린 영혼들이 그들의 실험 대상은 아니지 않는가.

이 평론이 시사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어린이를 위해 그림책을 창작하는 사람들과 읽어주는 사람들은 어린이 도서상(아무리 세계적인 상이라 하더라도)이나 시대 정신에 휘둘리지 말고 분별력 있게 자신의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간 심심치 않게 들려오던 국내 작가들의 해외 도서상 수상 소식에 뒤이어 드디어 2020년에는 백희나 작가가 ‘그림책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도서상’을, 올해 2022년에는 이수지 작가가 ‘안데르센 도서상’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몇몇 작가들의 화려한 성공 신화 뒤에서 우리의 그림책 문화는 점점 더 혼탁해져 가고 있다. 우리는 지금 문화계를 잠식한 문화 막시즘과 치열한 영적 전쟁 중이다.  



(1)  1983년 『고릴라』로 The Kate Greenaway Medal과 Kurt Maschler Medal을 수상하였으며, 1992년에 『동물원』으로 또 한 번 The Kate Greenaway Medal을 수상하였고, 2000년에는 Hans Christian Andersen Illustration Awards를 수상하였다.
(2) 현은자, 이지운(2021) <Anthony Browne의 『고릴라』에 그려진 전복(subversion)의 이미지>
(3) Zöllner, F. (1993). Leodardo’s portrait of Mona Lisa Del Giocondo. Gazette des Beaux-Arts, 121,115-138
(4) 전원경(2016: 526) . 예술, 역사를 만들다. 서울: 시공아트
(5) S. Beckett(2010/2014: 116-136) 는 『Crossover Picturebook』의 6장, “그림책 안의 예술적인 암시(artistic allusions in picturebooks)”)에서 앤서니 브라운의 고릴라,공원에서 일어난 이야기, 돼지책을 순수 예술 작품의 패러디화의 대표적인 사례로 들었다. 
(6) 강준만(2000) ). 필링은 진보, 행동은 극우: 한국에서 체 게바라는 어떻게 소비되는가?. 인물과 사상, 31, 82-107
(7) 김명주, 강현희(1999). 페미니즘 관점에서 본 모던 탱고(Tanggo). 움직임의 철학: 한국체육철학회지,7(2), 217-230.
(8) Jeffers, H. P. (2007). 프리메이슨. [Freemasons]. (이상원 역). 서울: 황소자리. (원본발간일 2005년)
(9) Jeffers, H. P. (2007). 프리메이슨. [Freemasons]. (이상원 역). 서울: 황소자리. (원본발간일 2005년)
(10) Wynn, L. L. (2008). Shape shifting lizard people, Israelite slaves, and other theories of pyramidbuilding: Notes on labor, nationalism and archaeology in Egypt. Journal of Social Archaeology,8(2), 272-295
(11) de Hoyos, A. (2014). Masonic Rites and Systems. In C. M. Cusack & J. R. Lewis (Eds).,Handbook of reemasonry (pp. 355-377). Netherlands: Brill.
(12) Moreno, B. (2004) . The statue of liberty. Charleston, SC: Arcadia Publishing.
(13) Dumeniil, L. (2016). Freemasonry and american culture, 1880-1930. Princeton, NJ: PrincetonUniversity Press.
(14) 김명주, 강현희(1999). 페미니즘 관점에서 본 모던 탱고(Tanggo). 움직임의 철학: 한국체육철학회지,7(2), 217-230.
(15) Nikolajeva & Scott (2001) How Picturebooks Work p. 289
(16) 같은 책, 같은 페이지
(17) 정일권(2021) 『미셀 푸코와 주디스 버틀러의 황혼:성 소수자 인권의 아동인권유린과 젠더의 종말』
(18) 동아일보 2021년 3월 31일 기사 “기소르망의 폭로, ‘철학의 왕’푸코, 9-10살 어린이성폭행했다”
(19) 모리스 센닥은 죽기 4년 전에야 NY Times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50년간 동성애자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후 Eastern Michigan University 에서 석사,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어린이문학교육학회 회장 및 한국 기독교 유아교 육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아동 청소년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대학 부설 생활과 학 연구소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기독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이해>(공저), <그림책과 예술교육>(공저>, <그림책으로 보는 아동과 우리사회>(공저), <100권의 그림책>(공저) 등 그림책 관련 저서가 있다.

21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