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의 세계관
토미 웅거러의 소녀들: 제랄다(『제랄다와 거인』), 티파니(『세 강도』), 알뤼메트(『성냥팔이 소녀 알뤼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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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회원2022-08-29 11:24
알뤼메트 마지막 장면에 '우산'은 메리 포핀스의 이미지를 위함일까요? 영국에서 '훌륭한 보모'의 대명사로 불린다는 메리포핀스의 이미지와 알뤼메트의 구호활동 이미지와 겹쳐지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마법사 모자도 그렇네요. 하늘과 소통하여 마법의 힘을 부릴 수 있다는 알뤼메트의 이미지를 극대화하기 위한 소품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교수님이 쓰신 글 마지막에, '그들이 베푸는 물질들은 부자들로부터 빼앗은 것'이라는 글귀과 마음에 박히네요. 알뤼메트가 훌륭한 보모로 세상을 돌보든, 마법과 같은 능력을 베풀든 그녀가 베푸는 물질 또한 가진 자들로부터 온 것이니까요.
백효진2025-01-26 23:15
그림책의 세계관을 읽기 위해 그림책의 글과 그림, 레이아웃과 원서를 촘촘히 볼 뿐 아니라 그림책이 쓰여졌을 시대의 상황과 사조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기존의 사회를 끔찍하고 처참하고 무시무시하게 보고 천진난만한 한 소녀를 통해 모든 것이 새로와지고 기존 사회와는 다른 새로운 공동체가 탄생한다는 이 이야기들이 문화막시즘이라는 이데올로기로 꿰어지네요!
교수님의 글을 읽기 전과 후 각각 그림책을 보며 드는 생각이 다른 것을 느끼며 그림책의 세계관을 다루는 그림책 베이직의 칼럼들이 참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기존의 사회를 끔찍하고 처참하고 무시무시하게 보고 천진난만한 한 소녀를 통해 모든 것이 새로와지고 기존 사회와는 다른 새로운 공동체가 탄생한다는 이 이야기들이 문화막시즘이라는 이데올로기로 꿰어지네요!
교수님의 글을 읽기 전과 후 각각 그림책을 보며 드는 생각이 다른 것을 느끼며 그림책의 세계관을 다루는 그림책 베이직의 칼럼들이 참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이수형2025-02-03 00:07
교수님의 글을 읽기 전에는 정말 알 수 없는 의미에 저는 놀랄뿐입니다.
문화막시즘이라는 계층구조를 활용한 표현이 예술 및 문학에 만연함에도 소녀라는 선으로 포장된 순화 및 정화가 마치 아름다운 것으로 미화된 것에 우리가 속는다는 느낌입니다.
이는 요즘 유행하는 소녀 아이돌의 음악에도 공공연히 보여집니다. 세상의 중심이 나라는 나르시즘을 외치며 예쁘게 치장한 아이돌들이 마치 선의 기준, 세상의 정의의 기준인 듯 자신감이 만연합니다. 이런 노래에 가득 빠진 청소년들은 선의 기준이 잘 못 인식될 것입니다. 당당한 여성, 세상을 지배하는 여성, 무서운 괴물도 잠재우는 여성, 그것도 지혜나 지식이 아닌 아름다움과 맛난 음식을 제공하는 소녀가 마치 좋은 것, 흠모하거나 따라해야 하는 것으로 오인되지 않을까요? 최근 나르시즘을 내세우는 그룹의 인기 많은 아이돌이 인터뷰에서 '철학하지 않음'은 오히려 멋진 것이라고 인터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철학함으로 세상을 규정해버리는 것이 제약이기에 철학하지 않음으로 자유를 누리자는 그녀의 말은 10대들에게 감각적으로 살라는 자극일것입니다. 자유는 얼마나 달콤한 제안이될까요? 철학하지 않음은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오인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철학은 '지혜를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그녀의 주장은 지혜를 잃어버린 삶을 강요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교수님께 배우고 또 교수님의 여러 글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토미 웅거러가 만든 그림책의 표면적 의의와 심층적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문화막시즘이라는 계층구조를 활용한 표현이 예술 및 문학에 만연함에도 소녀라는 선으로 포장된 순화 및 정화가 마치 아름다운 것으로 미화된 것에 우리가 속는다는 느낌입니다.
이는 요즘 유행하는 소녀 아이돌의 음악에도 공공연히 보여집니다. 세상의 중심이 나라는 나르시즘을 외치며 예쁘게 치장한 아이돌들이 마치 선의 기준, 세상의 정의의 기준인 듯 자신감이 만연합니다. 이런 노래에 가득 빠진 청소년들은 선의 기준이 잘 못 인식될 것입니다. 당당한 여성, 세상을 지배하는 여성, 무서운 괴물도 잠재우는 여성, 그것도 지혜나 지식이 아닌 아름다움과 맛난 음식을 제공하는 소녀가 마치 좋은 것, 흠모하거나 따라해야 하는 것으로 오인되지 않을까요? 최근 나르시즘을 내세우는 그룹의 인기 많은 아이돌이 인터뷰에서 '철학하지 않음'은 오히려 멋진 것이라고 인터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철학함으로 세상을 규정해버리는 것이 제약이기에 철학하지 않음으로 자유를 누리자는 그녀의 말은 10대들에게 감각적으로 살라는 자극일것입니다. 자유는 얼마나 달콤한 제안이될까요? 철학하지 않음은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오인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철학은 '지혜를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그녀의 주장은 지혜를 잃어버린 삶을 강요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교수님께 배우고 또 교수님의 여러 글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토미 웅거러가 만든 그림책의 표면적 의의와 심층적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twinkleLee 민옥2025-02-03 01:26
교수님의 서평을 읽으며 얼마나 공부하고 깨어있어야 이렇게 꼼꼼하게 여러 배경들을 결합하여 깊이있게 읽을 수 있을지 놀랍기만 합니다.
저는 아직도 표면에 드러난 보이는대로 읽게 되나 봅니다.
현 시대에도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내게 없는 것을 빼앗으려고만 하는 풍조가 있기도 하죠.
비평해 주신 세 작품이 모두 어린아이에게 적합하지 않아서 진짜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연령 수준, 선과 악,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 있을 때 읽을 수 있을 듯 합니다
다만 세 명의 여자 주인공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이 아닌 것은 그러한 환경적 배경은 그 아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그러한 환경에서도 악을 선으로 바꾸는 힘이 있는 면을 보여 주려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보면 안 되는 것일까요?
예나 지금이나 누구나 모두가 좋은 부모, 좋은 환경에 태어나고 자랄 수는 없으니 그러한 환경에에서도 지혜롭게 헤쳐나가야 한다는 응원의 메시지로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강도가 나중에 착한 일을 했다고 해도 이전의 잘못이 용서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아이들 스스로 판단해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도 그림책의 역할은 아닐지요.
저는 아직도 표면에 드러난 보이는대로 읽게 되나 봅니다.
현 시대에도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내게 없는 것을 빼앗으려고만 하는 풍조가 있기도 하죠.
비평해 주신 세 작품이 모두 어린아이에게 적합하지 않아서 진짜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연령 수준, 선과 악,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 있을 때 읽을 수 있을 듯 합니다
다만 세 명의 여자 주인공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이 아닌 것은 그러한 환경적 배경은 그 아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그러한 환경에서도 악을 선으로 바꾸는 힘이 있는 면을 보여 주려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보면 안 되는 것일까요?
예나 지금이나 누구나 모두가 좋은 부모, 좋은 환경에 태어나고 자랄 수는 없으니 그러한 환경에에서도 지혜롭게 헤쳐나가야 한다는 응원의 메시지로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강도가 나중에 착한 일을 했다고 해도 이전의 잘못이 용서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아이들 스스로 판단해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도 그림책의 역할은 아닐지요.
정민2025-02-03 18:53
아들이 세 강도 책을 읽고, "엄마, 이거 좋은 책인 것 같아요. 읽어보세요."라고 했고 호기심에 읽었다가 갸우뚱 했습니다.
왜 이 강도들은 반성을 안 하지? 아이들을 데려오는 이유가 "돈을 쓰기 위해" 이고, 왜 아이가 길을 잃었는데, 길을 찾아주지 않고, 데려가지? 이건 납치 아닌가?
이 성 앞에 아이들을 데려다 놓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진 어른들인 거야? 설마 부모가 데려다 놓은 건가? 그건 아이를 버리는 거잖아(베이비박스처럼,,) ㅠ 라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찝찝함;
그 때 혹시나 해서 베이직에 와서 검색해 봤고, 이 글을 읽고 "와, 대단한 통찰력이다."라며 무릎을 탁 쳤습니다.
무엇보다 그림책 속에 "정상적인" 가족이 없다는 것이 충격이었고, 그 이후로 책들을 볼 때(특히 프랑스 책;) 가족을 유심히 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아이와는 대화하며 책에서 이상한 점을 하나하나 잘 설명해줬습니다.
수업 참여를 위해 몇 일 전 제랄다와 거인을 도서관에서 빌렸습니다. 그리고는 이 끔찍한 책을 아이들이 보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습니다.
어떤 책 보다도 너무 끔찍하고 너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토미 웅거러 책들은 정말 기괴하고 끔찍하고 이상한데, (어질어질한 느낌이 듭니다.)
아무리 상을 많이 탄 작가의 책이라도, 이런 책들을 아이들에게 이것을 보여줄 때 정말 이상하지 않을까?
분별없는 책 읽기가 아이들 마음과 생각 속에 어떤 씨앗을 심을지 끔찍합니다.
그림책 뿐만 아니라 어린이 책들을 보면 어른을 위선적이고 악하며 탐욕적이게 그리는 건 그냥 일상인 것 같습니다.
아이들 교과서에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어요!"라며 아이들이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며,
집회 시위 등을 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는데, 이것도 같은 선상이겠죠 ㅠㅠ
대한민국에 음란한 문화가 덮고 있어서, 음란한 것들을 봐도 사람들이 무감각해진 것처럼,
어린이 책임에도 그림도 내용도 이상한 문화에 젖어서 분별할 생각조차 못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왜 이 강도들은 반성을 안 하지? 아이들을 데려오는 이유가 "돈을 쓰기 위해" 이고, 왜 아이가 길을 잃었는데, 길을 찾아주지 않고, 데려가지? 이건 납치 아닌가?
이 성 앞에 아이들을 데려다 놓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진 어른들인 거야? 설마 부모가 데려다 놓은 건가? 그건 아이를 버리는 거잖아(베이비박스처럼,,) ㅠ 라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찝찝함;
그 때 혹시나 해서 베이직에 와서 검색해 봤고, 이 글을 읽고 "와, 대단한 통찰력이다."라며 무릎을 탁 쳤습니다.
무엇보다 그림책 속에 "정상적인" 가족이 없다는 것이 충격이었고, 그 이후로 책들을 볼 때(특히 프랑스 책;) 가족을 유심히 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아이와는 대화하며 책에서 이상한 점을 하나하나 잘 설명해줬습니다.
수업 참여를 위해 몇 일 전 제랄다와 거인을 도서관에서 빌렸습니다. 그리고는 이 끔찍한 책을 아이들이 보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습니다.
어떤 책 보다도 너무 끔찍하고 너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토미 웅거러 책들은 정말 기괴하고 끔찍하고 이상한데, (어질어질한 느낌이 듭니다.)
아무리 상을 많이 탄 작가의 책이라도, 이런 책들을 아이들에게 이것을 보여줄 때 정말 이상하지 않을까?
분별없는 책 읽기가 아이들 마음과 생각 속에 어떤 씨앗을 심을지 끔찍합니다.
그림책 뿐만 아니라 어린이 책들을 보면 어른을 위선적이고 악하며 탐욕적이게 그리는 건 그냥 일상인 것 같습니다.
아이들 교과서에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어요!"라며 아이들이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며,
집회 시위 등을 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는데, 이것도 같은 선상이겠죠 ㅠㅠ
대한민국에 음란한 문화가 덮고 있어서, 음란한 것들을 봐도 사람들이 무감각해진 것처럼,
어린이 책임에도 그림도 내용도 이상한 문화에 젖어서 분별할 생각조차 못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yumi2025-02-03 19:41
그림책을 먼저 보고, 교수님의 서평을 읽으면서 다시 그림책을 폈습니다.
처음 보지 못했던 부분을 다시 서평을 읽은 후에 보니 더 생생하고 넓은 시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림책을 보면서 내내 마음이 불편하고, 정확히 말하면 불편함을 넘어선 거북했습니다.
처음 세강도가 위협하고 빼앗은 돈으로 아이들을 돌보는 것인데, 아무리 착한 일을 한다고 해도
처음 했던 잘못된 행동에 대한 돌이킴이 없이 한다는 것은 죄에 대한 무지입니다. 분별을 못한 것입니다.
제랄다와 거인, 성냥팔이 소녀 알뤼메트에서도 성인들은 무책임하고,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며
죄를 아무렇게나 짓고 있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주인공들도 거기에 아무런 배움도 없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살아갑니다.
아이가 어른이 되고, 어른이 아이처럼 구는 행동을 보이기도 합니다.
결국 물질로 모든 것이 통하는 행복의 결말로 보이는 것에 다시 한번 그림책을 촘촘히 읽어봐야겠습니다.
처음 보지 못했던 부분을 다시 서평을 읽은 후에 보니 더 생생하고 넓은 시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림책을 보면서 내내 마음이 불편하고, 정확히 말하면 불편함을 넘어선 거북했습니다.
처음 세강도가 위협하고 빼앗은 돈으로 아이들을 돌보는 것인데, 아무리 착한 일을 한다고 해도
처음 했던 잘못된 행동에 대한 돌이킴이 없이 한다는 것은 죄에 대한 무지입니다. 분별을 못한 것입니다.
제랄다와 거인, 성냥팔이 소녀 알뤼메트에서도 성인들은 무책임하고,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며
죄를 아무렇게나 짓고 있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주인공들도 거기에 아무런 배움도 없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살아갑니다.
아이가 어른이 되고, 어른이 아이처럼 구는 행동을 보이기도 합니다.
결국 물질로 모든 것이 통하는 행복의 결말로 보이는 것에 다시 한번 그림책을 촘촘히 읽어봐야겠습니다.
옥희진2025-02-03 21:12
______교수님께서 올려 주신 이 글을 읽으며,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위험성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림책 한 권의 무게가 얼마나 강력하고 큰 지를 느끼며 묵직한 책임감 또한 품고 갑니다.
______그림책 <제랄다와 거인>을 읽으며 불편함과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표지부터 시작해 핏기가 도는 칼을 든 거인이 등장하는데, 이 장면은 처음부터 강한 거부감을 주었습니다. 이후 거인의 식탁 장면에서는 칠면조 발에 빨간 구두( 06. 신데렐라 식 칠면조.라고는 하지만) 를 신긴 그림이 눈에 띄었습니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배치한 듯하지만, 불쾌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다음 장면에서는 거인이 칠면조 다리를 베어 먹으려 하는데, 이 장면이 너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거인의 잔인성을 극대화하려는 의도로 보이지만, 이는 단순한 연출을 넘어 어린 독자들에게는 지나치게 충격적인 장면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______이야기의 흐름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림책 속 주인공 제랄다는 재정적인 문제로 인해 성까지 따라가 요리를 해주기로 결정 했을지는 몰라도, 거인의 제안에 제랄다가 깊이 고민하지 않고 바로(잠시 생각후) 따라가는 장면은 현실적인 관점에서 위험한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모들은 흔히 ‘아는 사람이라도 함부로 따라가지 말라’고 교육하지만, 이 책에서는 ‘금’이라는 물질적 보상이 이를 쉽게 무너뜨리는 것은 아닐까, 하고요. 어린 독자들이 이 장면을 보면서 어떤 인식을 하게 될지 걱정스럽습니다.
______그림책을 덮고 나서는 불안한 마음에 다음 이야기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평화로운 결말처럼 보이지만, 언제든지 같은 상황이 반복될 수 있는 불안정한 구조였습니다. 마지막 페이지 그림에서 거인만 웃고 있을 뿐 제랄다는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거인과 제랄다의 관계가 진정한 신뢰로 맺어진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이익에 의해 형성된 만큼, 근본적인 갈등이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정작 거인이 식인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결혼을 하게 된 주인공이니까요. 읽는 내내 ‘사기 결혼이야, 사기…’ 그런 마음으로 답답했습니다.
더 무서운 뒷이야기가 이어질 것만 같은 여운이 남았습니다.
이들이 사는 세상에서 전쟁이나 기근이 닥쳐 먹을 것이 부족해진다면, 거인들은 또 다시 아이들을 찾아 헤매겠는걸? 하고요.
______그림책 <제랄다와 거인>을 읽으며 불편함과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표지부터 시작해 핏기가 도는 칼을 든 거인이 등장하는데, 이 장면은 처음부터 강한 거부감을 주었습니다. 이후 거인의 식탁 장면에서는 칠면조 발에 빨간 구두( 06. 신데렐라 식 칠면조.라고는 하지만) 를 신긴 그림이 눈에 띄었습니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배치한 듯하지만, 불쾌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다음 장면에서는 거인이 칠면조 다리를 베어 먹으려 하는데, 이 장면이 너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거인의 잔인성을 극대화하려는 의도로 보이지만, 이는 단순한 연출을 넘어 어린 독자들에게는 지나치게 충격적인 장면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______이야기의 흐름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림책 속 주인공 제랄다는 재정적인 문제로 인해 성까지 따라가 요리를 해주기로 결정 했을지는 몰라도, 거인의 제안에 제랄다가 깊이 고민하지 않고 바로(잠시 생각후) 따라가는 장면은 현실적인 관점에서 위험한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모들은 흔히 ‘아는 사람이라도 함부로 따라가지 말라’고 교육하지만, 이 책에서는 ‘금’이라는 물질적 보상이 이를 쉽게 무너뜨리는 것은 아닐까, 하고요. 어린 독자들이 이 장면을 보면서 어떤 인식을 하게 될지 걱정스럽습니다.
______그림책을 덮고 나서는 불안한 마음에 다음 이야기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평화로운 결말처럼 보이지만, 언제든지 같은 상황이 반복될 수 있는 불안정한 구조였습니다. 마지막 페이지 그림에서 거인만 웃고 있을 뿐 제랄다는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거인과 제랄다의 관계가 진정한 신뢰로 맺어진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이익에 의해 형성된 만큼, 근본적인 갈등이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정작 거인이 식인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결혼을 하게 된 주인공이니까요. 읽는 내내 ‘사기 결혼이야, 사기…’ 그런 마음으로 답답했습니다.
더 무서운 뒷이야기가 이어질 것만 같은 여운이 남았습니다.
이들이 사는 세상에서 전쟁이나 기근이 닥쳐 먹을 것이 부족해진다면, 거인들은 또 다시 아이들을 찾아 헤매겠는걸? 하고요.
yunkyung2025-02-04 01:47
토미 웅거러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전쟁과 불안 속에서 성장한 경험이 그의 그림책에 투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작품에는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거나 사회적으로 방치된 주인공들이 등장하며, 이는 작가 자신의 어린 시절과 닮아있습니다. 그림책 『제랄다와 거인』 속 ‘거인’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점령 하에 경험했던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대상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또 작가가 주인공들을 ‘소녀’로 그린 이유를 생각해보면 가장 여리고 힘없는 존재, 곧 그의 어린 시절을 대변하는 인물로도 보입니다. 그는 당시 아이로는 감당하기 힘들었던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홀로 상상했을 법한 일들을 성인이 되어 그림책 속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해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독창적인 그림과 강렬한 풍자, 비판적인 시각으로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통해 예술가로 좋은 평가도 받았지만, 그림책의 독자가 일차적으로 아동이라는 점에서 그의 그림책을 권하기가 더 망설여집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색채, 섬뜩하고도 괴이한 그림과 과격한 표현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또 그림책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신뢰할 수 없는 성인의 모습(폭력적, 권위적, 무능함)이 등장하는 점, 세 작품 모두 주인공의 성공은 심리적이거나 영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에 기인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야를 제한 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듭니다.
평론을 읽고 난 후 작가의 성장 배경을 찾아보고 다시 그림책을 곱씹어보니 토미 웅거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복음을 알았다면 그의 그림책이 '전복'의 주제가 아닌 '샬롬' 의 주제로 그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 그의 책을 읽은 독자들을 향해 전하고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예레미야 29:11)
그들의 삶에 희망은 그림책 속 이상이 아닌 실재이길 바라는 마음으로요.
그의 작품에는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거나 사회적으로 방치된 주인공들이 등장하며, 이는 작가 자신의 어린 시절과 닮아있습니다. 그림책 『제랄다와 거인』 속 ‘거인’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점령 하에 경험했던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대상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또 작가가 주인공들을 ‘소녀’로 그린 이유를 생각해보면 가장 여리고 힘없는 존재, 곧 그의 어린 시절을 대변하는 인물로도 보입니다. 그는 당시 아이로는 감당하기 힘들었던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홀로 상상했을 법한 일들을 성인이 되어 그림책 속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해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독창적인 그림과 강렬한 풍자, 비판적인 시각으로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통해 예술가로 좋은 평가도 받았지만, 그림책의 독자가 일차적으로 아동이라는 점에서 그의 그림책을 권하기가 더 망설여집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색채, 섬뜩하고도 괴이한 그림과 과격한 표현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또 그림책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신뢰할 수 없는 성인의 모습(폭력적, 권위적, 무능함)이 등장하는 점, 세 작품 모두 주인공의 성공은 심리적이거나 영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에 기인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야를 제한 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듭니다.
평론을 읽고 난 후 작가의 성장 배경을 찾아보고 다시 그림책을 곱씹어보니 토미 웅거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복음을 알았다면 그의 그림책이 '전복'의 주제가 아닌 '샬롬' 의 주제로 그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 그의 책을 읽은 독자들을 향해 전하고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예레미야 29:11)
그들의 삶에 희망은 그림책 속 이상이 아닌 실재이길 바라는 마음으로요.
김주연2025-07-10 11:32
평론을 읽기 전에 먼저 <성냥팔이 소녀 알뤼메트>를 읽어보았습니다. 제가 그냥 읽기에 조금 눈살이 찌푸려지는 부분은 소녀의 치마가 너무 짧은 것과 너무 그림이 세세하다.. 별로 보고 싶은 그림은 아니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내용적인 면에서는 소녀가 구조대를 이끄는 리더가 되었고, 후반부에는 그래도 선하게 바뀐 어른들이었기에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평론을 읽으면서 무릎을 많이 쳤습니다. 짚어주신 부분들이 정말 다 맞는 부분이고, 염려되는 부분들이네요. 확실히 아이들에게 원가족에 대한, 그리고 사회 어른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끔 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막시즘이 영향력이 미친다는 사실이 무서웠고, 정말 깨어있어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에 토미 웅거러의 작품들 중 <즐로티/2009>와 <섬/2012> <NON STOP: '아무것도 아닌'을 위하여/2022> <루푸스 색깔을 사랑한 박쥐/1980> <아델라이드/1980> 등이 있어서 더 읽어보았습니다. 나름 아이들이 읽기에 좋은 작품들도 있습니다만, 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늘 특이성, 변종 등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인게 명확해보입니다. 날개가 생긴 캥거루, 흑백이 아닌 색깔을 사랑하게 된 박쥐 등이요. 그러나 평론에서 다루신 세 책은 정말 막시즘이 크게,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 같습니다.
학교에 토미 웅거러의 작품들 중 <즐로티/2009>와 <섬/2012> <NON STOP: '아무것도 아닌'을 위하여/2022> <루푸스 색깔을 사랑한 박쥐/1980> <아델라이드/1980> 등이 있어서 더 읽어보았습니다. 나름 아이들이 읽기에 좋은 작품들도 있습니다만, 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늘 특이성, 변종 등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인게 명확해보입니다. 날개가 생긴 캥거루, 흑백이 아닌 색깔을 사랑하게 된 박쥐 등이요. 그러나 평론에서 다루신 세 책은 정말 막시즘이 크게,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 같습니다.
윤진희2025-07-13 17:03
영미권 작가들과 유럽의 작가들은 비슷한 인종, 비슷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영미권의 그림책 작가들은 기존 사회 질서에 반하는 전복적인 주제의 그림책들도 많지만, 청교도적인 가치관의 책들도 꾸준히 나오는 것에 반해 유럽의 그림책은 유럽 작가 특유의 리버럴하고 진보적인 소재의 책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복지와 평등, 자유를 중요시 하는 사회민주주의 적인 질서를 가진 나라들이 많기 때문에 많은 국가들에서 문화막시즘을 자연스레 체득하는 사회 풍조가 형성되는 것 같습니다.
토미 웅게러 역시 프랑스 작가입니다. 프랑스는 여전히 다른 유럽 국가들과 같이 공산당이 존재하고 똘레랑스로 대표되는 정신으로 사회문화적으로 종교적 표현을 금지하는 국가입니다. 모든 종교를 인정함으로 모두 종교적 가치를 드러내지 말자는 주의입니다. 이런 사회에 영향을 받은 토미 웅게러는 그의 그림책에서 사회주의적인 색깔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세 강도>에서는 가족의 해체로 인한 부모의 부재, 부의 평등한 분배 세 강도가 건설한 공동체는 가족 단위가 아닌 국가로만 존재하는 권위주의적인 공동체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이를 통해 모든 갈등이 해결됩니다.<제랄다와 거인>에서 제랄다는 권위주의적인 사회 질서에 순응하며 제랄다의 아이들은 끝까지 인간성을 회복하지 못한 체로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 <성냥팔이 소녀 알뤼메트>는 사회주의적인 면모가 명백하게 드러나는 그림책입니다. 원작인 성냥팔이 소녀 자체가 초기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인 아동의 노동력 착취, 자본가와 노동자의 빈부격차 문제를 배경으로 쓰여진 책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도 갈등의 해결은 부의 재분배입니다.
지금의 유럽은 난민으로 인한 복지의 실패, 경제적 어려움, 전쟁등으로 빠르게 극우화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극우화가 전통적인 기독교 가치관으로의 회귀가 아닌 경제적인 문제에서 기인한 것이라 아쉬움이 남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제도에 완벽한 제도는 없습니다. 이러한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제도가 아닌 모든 제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가치관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그 어떤 신념보다 하나님의 가치관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길 기도합니다.
토미 웅게러 역시 프랑스 작가입니다. 프랑스는 여전히 다른 유럽 국가들과 같이 공산당이 존재하고 똘레랑스로 대표되는 정신으로 사회문화적으로 종교적 표현을 금지하는 국가입니다. 모든 종교를 인정함으로 모두 종교적 가치를 드러내지 말자는 주의입니다. 이런 사회에 영향을 받은 토미 웅게러는 그의 그림책에서 사회주의적인 색깔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세 강도>에서는 가족의 해체로 인한 부모의 부재, 부의 평등한 분배 세 강도가 건설한 공동체는 가족 단위가 아닌 국가로만 존재하는 권위주의적인 공동체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이를 통해 모든 갈등이 해결됩니다.<제랄다와 거인>에서 제랄다는 권위주의적인 사회 질서에 순응하며 제랄다의 아이들은 끝까지 인간성을 회복하지 못한 체로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 <성냥팔이 소녀 알뤼메트>는 사회주의적인 면모가 명백하게 드러나는 그림책입니다. 원작인 성냥팔이 소녀 자체가 초기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인 아동의 노동력 착취, 자본가와 노동자의 빈부격차 문제를 배경으로 쓰여진 책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도 갈등의 해결은 부의 재분배입니다.
지금의 유럽은 난민으로 인한 복지의 실패, 경제적 어려움, 전쟁등으로 빠르게 극우화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극우화가 전통적인 기독교 가치관으로의 회귀가 아닌 경제적인 문제에서 기인한 것이라 아쉬움이 남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제도에 완벽한 제도는 없습니다. 이러한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제도가 아닌 모든 제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가치관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그 어떤 신념보다 하나님의 가치관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길 기도합니다.
이영진2025-07-13 21:45
그림책 속 세계관에 대해 공부하면서 그림책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게 되는데요.
<세 강도>와 <제랄다와 거인>을 보면서 진정한 변화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세 강도와 거인이 기존의 하던 일을 멈췄다는 것이 진정한 변화라고 할 수 있을까? 과거에 대한 진정한 사과 혹은 반성 없는 모습은 진정한 변화라기 보다는 일시적 멈춤상태라고 보여집니다. 제랄다와 거인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식인습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한 그림이 이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요. 또한 글과 댓글에서 지적해주셨던 것과 같이 강도들과 제랄다가 문제를 극복한 것처럼 보이는 방식이 좋은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여전히 듭니다. 어린이들이 가정을 떠나 성에 모여 사는 방식이 어린이들에게 적합한 것인지 등이요.
글 덕분에 심층적인 각도에서 그림책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촘촘히 그림책 읽는 연습을 하며 이면의 메시지들을 탐색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세 강도>와 <제랄다와 거인>을 보면서 진정한 변화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세 강도와 거인이 기존의 하던 일을 멈췄다는 것이 진정한 변화라고 할 수 있을까? 과거에 대한 진정한 사과 혹은 반성 없는 모습은 진정한 변화라기 보다는 일시적 멈춤상태라고 보여집니다. 제랄다와 거인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식인습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한 그림이 이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요. 또한 글과 댓글에서 지적해주셨던 것과 같이 강도들과 제랄다가 문제를 극복한 것처럼 보이는 방식이 좋은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여전히 듭니다. 어린이들이 가정을 떠나 성에 모여 사는 방식이 어린이들에게 적합한 것인지 등이요.
글 덕분에 심층적인 각도에서 그림책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촘촘히 그림책 읽는 연습을 하며 이면의 메시지들을 탐색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김은수2025-07-14 14:27
평론을 읽으며 마음속에 떠오른 단어가 있습니다. '제자리' 입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마땅한 자리를 넘보며 탐냈던 순간부터 이 세상의 죄가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죄의 시작은 바로 그곳에서부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제자리를 지키며 그분 안에서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참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한 이들은 혼돈과 공허에 빠지게 됩니다. 나름의 자유와 기쁨을 찾으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파멸과 고통만을 남기게 됩니다. 토미 웅거러의 이 세 그림책에서도 이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려는 노력은 얼마나 모순되고 허무한 것인지요.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창조해주신 모습 그대로를 회복하며 살아가는 '제자리'의 소중함을 다시금 새깁니다.
고진슬2025-07-14 14:51
그림에 대한 묘사만 보더라도 어린이를 독자로 하는 책의 그림인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림책 외에도 작고 약해 보이는 '소녀(여성)'들을 중심으로 전복의 서사가 반영되어 있는 작품들이 많아지는 것도 말씀하신 '문화막시즘 확산'의 흐름 가운데 있는 것 같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해녀'를 소재로 한 작품이나 그것이 모티프로 반영되어 있는 것을 볼 때
그들 중의 일부에서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거부감을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일제 시대 때 제주도에서 크게 있었던 반일 운동을 해녀들이 주도했고,
해녀들이 그와 같은 '투쟁'을 주도하게 된 배경에는 공산주의자들의 계획,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된 해녀와 도민들이 있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이에 저는 해녀들의 투쟁을 강조하고 해녀들의 서사가 주류화되는 것에는 문화막시즘이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개인적인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다고 해녀가 소재인 모든 작품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평론의 소재인 토미 웅거러의 <세 강도>, <제랄다와 거인>, <성냥팔이 소녀 알뤼메트>와 같은 문화막시즘적 작품과
제가 거부감을 느꼈던 여성 주인공 서사는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육신의 양식을 먹이는 데에는 점점 세상이 편리해지고 있지만
영혼의 양식을 먹이는 데에는 점점 세상이 악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양식이라도 영혼에 먹이는 것은 더더욱 좋은 것을 먹여야 하기에
앞으로 그림책의 그림과 내용을 좀더 꼼꼼히 살펴보고 무엇이 선하고 의로우며 진실한 것인지 찾아가야겠습니다.
그림책 외에도 작고 약해 보이는 '소녀(여성)'들을 중심으로 전복의 서사가 반영되어 있는 작품들이 많아지는 것도 말씀하신 '문화막시즘 확산'의 흐름 가운데 있는 것 같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해녀'를 소재로 한 작품이나 그것이 모티프로 반영되어 있는 것을 볼 때
그들 중의 일부에서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거부감을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일제 시대 때 제주도에서 크게 있었던 반일 운동을 해녀들이 주도했고,
해녀들이 그와 같은 '투쟁'을 주도하게 된 배경에는 공산주의자들의 계획,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된 해녀와 도민들이 있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이에 저는 해녀들의 투쟁을 강조하고 해녀들의 서사가 주류화되는 것에는 문화막시즘이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개인적인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다고 해녀가 소재인 모든 작품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평론의 소재인 토미 웅거러의 <세 강도>, <제랄다와 거인>, <성냥팔이 소녀 알뤼메트>와 같은 문화막시즘적 작품과
제가 거부감을 느꼈던 여성 주인공 서사는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육신의 양식을 먹이는 데에는 점점 세상이 편리해지고 있지만
영혼의 양식을 먹이는 데에는 점점 세상이 악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양식이라도 영혼에 먹이는 것은 더더욱 좋은 것을 먹여야 하기에
앞으로 그림책의 그림과 내용을 좀더 꼼꼼히 살펴보고 무엇이 선하고 의로우며 진실한 것인지 찾아가야겠습니다.
이정아2025-07-14 23:16
결손, 도시의 뒤켠에 있는 아이 위 세 그림책은 왜 아이를 그렇게 표현했을까?
중간 과정은 굉장히 그럴싸해보이지만
결론엔 성을 쌓고, 강도를 위해 세 개의 기둥을 세우고,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타공동체와는 단절시켰을까?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과정을 중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을 목적으로 삼아 사회에서 존재하게 한다.
그래서 결말이 아름답다면 거기에 초점을 맞춘다.
성경에도 어린아이를 표현하는 내용들이 나온다.
예수님은 어떤 사회적지위에 있는 지 모를 아이를 중심에 세우시고, 안으시고, 축복하시고, 어린아이를 하나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거하는 천국에 아이들을 끼워넣으신다.
아이에 대한 순수성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천국은 순수성만으로 가는 곳이 아니다. 천국은 영접을 통해 가고 영접은 특별한 과정을 거쳐야한다.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를 죄에서 구원해주신 분임을 고백하는 것이 영접이고 교회는 그것을 세례라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아이도 죄인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성경은 아이도 죄에서 구원해주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충분히 갖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왜 아이들을 성경에 근거하여 바르고, 온전하게 그리고 죄인임을 가르쳐야 하는지 깨닫게 된다.
중간 과정은 굉장히 그럴싸해보이지만
결론엔 성을 쌓고, 강도를 위해 세 개의 기둥을 세우고,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타공동체와는 단절시켰을까?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과정을 중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을 목적으로 삼아 사회에서 존재하게 한다.
그래서 결말이 아름답다면 거기에 초점을 맞춘다.
성경에도 어린아이를 표현하는 내용들이 나온다.
예수님은 어떤 사회적지위에 있는 지 모를 아이를 중심에 세우시고, 안으시고, 축복하시고, 어린아이를 하나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거하는 천국에 아이들을 끼워넣으신다.
아이에 대한 순수성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천국은 순수성만으로 가는 곳이 아니다. 천국은 영접을 통해 가고 영접은 특별한 과정을 거쳐야한다.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를 죄에서 구원해주신 분임을 고백하는 것이 영접이고 교회는 그것을 세례라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아이도 죄인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성경은 아이도 죄에서 구원해주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충분히 갖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왜 아이들을 성경에 근거하여 바르고, 온전하게 그리고 죄인임을 가르쳐야 하는지 깨닫게 된다.
김현경2025-07-15 01:07
전에도 교수님의 이 글을 읽었었지만, 어젠다 필름을 본 후 이 그림책들이 다시 새롭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특히 <알뤼메트> 그림책 속의 자립하지 못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필름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사회주의 정책이 국민들을 하향 평준화하여 무능력하게 만들고 정부에 의지하게 만드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세 강도>나 <알뤼메트>에서 사람들에게 물질을 나누어주는 것도 이상적인 복지사회를 보여주는 것 같아 이전에 이 그림책을 읽었을 때와는 다르게 느껴집니다. 여성 주인공들의 영웅적인 면모는 아무래도 페미니즘과 연관된 작가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겠지요..? (교수님 글에 달린 여러 사람들의 댓글도 여러 생각을 해 보는 데 도움이 되어 감사하네요. ^^)
특히 <알뤼메트> 그림책 속의 자립하지 못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필름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사회주의 정책이 국민들을 하향 평준화하여 무능력하게 만들고 정부에 의지하게 만드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세 강도>나 <알뤼메트>에서 사람들에게 물질을 나누어주는 것도 이상적인 복지사회를 보여주는 것 같아 이전에 이 그림책을 읽었을 때와는 다르게 느껴집니다. 여성 주인공들의 영웅적인 면모는 아무래도 페미니즘과 연관된 작가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겠지요..? (교수님 글에 달린 여러 사람들의 댓글도 여러 생각을 해 보는 데 도움이 되어 감사하네요. ^^)
우승린2025-07-15 12:33
이해가 가면서도 어렵습니다. 문화막시즘의 창으로 바라보니 해석 구구절절이 맞는 이야기에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 이야기가 지금 이 시대에 읽히는 것은 정말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어린시절에 본 삐삐 롱스타킹은 어린이에게 위로와 쾌감을 주어 그 안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한다는 개념으로 제게 받아들여졌기에 처음에는 이 이야기가 아이들에게 독립이나 자립, 그리고 어려움을 해쳐간다는 의미로만 받아들여질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가 환경과 사회 분위기에 따라 그 받아들임이 달라질 수도 있겠구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사회적 분위기로 보면 아이들이 충분히 새로운 가족의 형태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고 빈부격차가 심해진 사회와 기성세대와 부패한 정부에 대한 반감으로 슬쩍 제시된 해법이 당연한 이야기다라고 여겨질 수 있겠네요.
왜냐하면, 제가 어린시절에 본 삐삐 롱스타킹은 어린이에게 위로와 쾌감을 주어 그 안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한다는 개념으로 제게 받아들여졌기에 처음에는 이 이야기가 아이들에게 독립이나 자립, 그리고 어려움을 해쳐간다는 의미로만 받아들여질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가 환경과 사회 분위기에 따라 그 받아들임이 달라질 수도 있겠구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사회적 분위기로 보면 아이들이 충분히 새로운 가족의 형태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고 빈부격차가 심해진 사회와 기성세대와 부패한 정부에 대한 반감으로 슬쩍 제시된 해법이 당연한 이야기다라고 여겨질 수 있겠네요.
토미 웅거러의 소녀들:
제랄다(『제랄다와 거인』), 티파니(『세 강도』), 알뤼메트(『성냥팔이 소녀 알뤼메트』)
토미 웅거러(Tomy Ungerer, 1931-2019)는 그림책 이외에도 회화, 조각, 포스터, 장난감 디자인, 건축 디자인 등 예술 전방위에서 두각을 나타낸 예술가이다. 그의 수상경력은 매우 화려하다. 1962년에는 뉴욕 타임즈 올해의 최고 일러스트레이티드북, 1990년에는 프랑스 정부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 1998년에는 아동문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을 수상하였고, 2000년에는 유럽 의회의 어린이 교육 대사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명성에 걸맞게 그의 책은 어린이용을 포함하여 28개의 언어로 140종이 번역되었으며 그의 대표작인 『곰인형 오토』는 독일과 프랑스에서 초등학교 교과서가 되었다.
그의 그림책에 대한 국내의 평가는 주로 인성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이루어졌다.(1) ‘타인을 향한 포용과 환대’ 라든가 ‘배려, 존중, 협력, 나눔, 질서, 효’ 등과 같은 덕목이 포함되어 있다 하여 어린이 교육을 위한 텍스트로도 사용되고 있다. 또한 그의 그림책은 무거운 주제를 특유의 익살과 유머, 풍자로 녹여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한 개의 단어로 요약한다면 ‘전복’(subversion)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기대하라’라는 그의 모토에도 잘 드러나 있다.(2)
본 평론에서는 『세 강도』(1963/1995), 『제랄다와 거인』(1970/2000), 『성냥팔이 소녀 알뤼메트』(1974/2011)를 예로 들어 이 주제를 심도있게 다루어보고자 한다. 이 세 작품을 선정한 이유는 그들 간에 다음과 같은 매우 흥미로운 유사성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1) 주인공은 ‘티파니’, ‘제랄다’, ‘알뤼메트’라는 이름의 소녀들이다. (2) 그들은 홀 부모와 고아와 같은 결손가정 출신이다. (3) 알뤼메트를 제외하고 티파니와 제랄다는 주류사회와는 고립된 곳에서 가족 혹은 공동체를 이루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4) 티파니와 제랄다의 가족 형태는 다른 종과의 결혼, 혹은 그들만의 공동체라는 특이한 모습을 띠고 있으며, 알뤼메트는 구조대라는 공동체를 이끌게 된다. (5) 소녀 주위의 성인들은 대부분 폭력적이거나, 사납거나, 어리석거나, 멍청하거나, 이기적이거나, 위선적인, 비도덕적인 인물들로 그려진다. (6) 성인 캐릭터들은 서사가 진행되면서 이타적인 인물로 변화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태도의 변화는 오로지 소녀들 덕분이다.
그럼, 가장 먼저 출판된 『세 강도』의 서사를 글과 그림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표지 그림에는 제목과 같이 세 강도가 그려져 있다. 검은 모자와 망토를 두른 그들은 언뜻 보면 세쌍둥이처럼 똑같아 보이지만 각자의 모자와 시선에서의 미세한 차이로 인해 각기 독립적인 인격체임을 드러낸다. 그들의 검은 모자에 그려진 선의 숫자와 위치가 다르고, 좌측 강도의 눈동자는 왼편을, 가운데는 정면을, 그리고 우측 강도의 눈동자는 오른편을 주시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 주도면밀하게 주위를 경계하고 있는 듯 보인다. 푸른색 배경, 검은색 모자와 뒤표지까지 연이은 검은 망토, 게다가 핏빛과도 같은 도끼의 빨간 양날은 매우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옛날 옛날에 무시무시한 강도 세 사람이 있었대....” 옛 이야기의 시작과 같은 전지적 시점의 서술과 원경과 중경, 그리고 근경이 교차되는 객관적 시점의 그림은 독자가 이 이야기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거리를 두고 보게 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본문의 전반부는 강도들이 티파니를 만나기 전의 행각을 그리고 있으며, 후반부는 티파니를 만난 후의 선행으로 이어진다. 강도들은 보름달이 뜬 컴컴한 한밤중에 각각 나팔총, 후춧가루 발사기, 도끼를 이용하여 여행객들을 공격하고 위협하여 물건을 빼앗아 높은 산 위의 동굴에 은닉해 놓았다. 그러던 중 그들은 티파니라는 고아를 만나게 된다. 이 소녀는 심술궂은 숙모네로 살러 가던 참이라 오히려 강도를 만나게 되어 기뻤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의 티파니는 어린 소녀라기보다는 장난감 인형처럼 왜소하게 그려졌다. 강도는 그녀를 망토로 소중하게 감싸고 그들의 동굴로 데려갔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티파니가 강도들의 보물함을 보고 “이게 다 뭐에 쓰는 거예요?”라고 묻자 강도들은 난감해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보물의 용도를 생각해 본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은 길을 잃은 아이, 불행한 아이, 버려진 아이들을 닥치는 대로 데려왔다. 펼침면에 그려진, 몇 개의 마차에 나누어 강도를 따라고 있는 많은 아이들은 손을 들고 기뻐하고 있다. 길가에서는 그 행렬을 거나하게 취한 어떤 남자가 보고 있다. 아이들을 데려온 강도들은 그동안 모아놓은 돈으로 모두 함께 살 수 있는 성을 구입했다. 강도의 모자와 망토와 같은 디자인의(심지어 모자 위의 줄무늬도 세 강도의 것과 같다), 붉은 색 옷을 똑같이 입고 새 집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줄지어 들어가는 아이들은 명랑하고 행복해 보인다. 이 소문은 온 나라에 퍼져서 날마다 강도네 문가에는 제 발로 찾아온 아이와 누군가 데려다 놓은 아이들이 놓였다. 자라난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결혼하여 성 근처에 집을 지어 살게 되었으며, 뾰족 지붕이 있는 높은 탑 세 개를 지어서 양아버지인 세 강도를 기렸다.
이번에는 『제랄다와 거인』(원 제목은 『제랄다의 거인』임)을 살펴보자. 표지에는 오른손에 찻잔을 들고 왼편에는 날 선 짧은 손칼을 들고 있는 거인이 위 아래 치아가 다 보일 정도로 입 을 크게 벌리고 있고, 그의 품 안에는 금발의 소녀가 해맑은 얼굴로 그를 올려다 보고 있다. 두 사람의 모순된 태도와 표정은 이들의 관계에 대해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표제지의 그림에는 성문이 그려져 있고 그 성문 위에는 포크와 나이프가 그려진 문장(紋章)이 걸려있다.
첫 장면은 『세 강도』와 같이 주인공인 거인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옛날에 사람을 잡아먹는 거인이 혼자 외로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 잡아먹는 거인들이 대부분 그렇듯, 이는 날카롭고, 수염은 가시처럼 뽀죽뾰죽, 코는 큼지막했어요. 물론, 기다란 칼도 갖고 있었고요. 괴팍스런 성미에, 먹성은 엄청났답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은요, 아침밥으로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것이었어요.” 그림은 글보다 더 무시무시하다. 앞서 표지에 그려졌던 거인은 지금 피묻은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있고, 그 칼 아래에는 나무 상자에 갇혀 쇠창살을 부여잡고 있는 어린아이의 가녀린 두 손이 보인다. 아마도 이 아이가 거인의 아침밥인 듯 하다. 거인의 소개가 끝난 후 화자는 거인이 날마다 마을로 와서 아이들을 잡아가는 통에 마을은 공포의 도가니가 되었다고 서술한다. 다음 펼침면은 위와 아래로 나누어져 아비규환의 마을 모습을 보여준다. 땅 위에서는 거인이 매고 가는 망태기 안에서 발버둥치는 듯한 아이의 팔이 보이고 옆에는 엄마인 듯 싶은 여자가 졸도하여 쓰러져있다. 아이들이 사라진 학교 앞에는 교사가 하릴없이 앉아 있으며, 부모는 밖을 내다보며 서둘러 건물 지하로 내려가는 사다리 입구를 닫고 있다. 땅 아래에는 건물 지하에 숨어 있는 아이들과 아이들이 숨을 곳을 만드느라 헛간의 벽을 부수고 있는 남자가 그려져 있다.
아이들이 숨어버리자 거인은 매일 반복되는 빈약한 식사로 인해 성이 나기 시작했다. 다음 장면에서는 주인공인 제랄다와 그 아버지가 등장한다. 아버지는 침대에 누워있고 음식을 가져오고 있는 제랄다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글 텍스트는 이렇게 제랄다의 가정을 소개한다. “농부는 일 년에 한 번 읍내로 나가 감자와 곡식, 고기와 생선을 팔았습니다.” 이 첫 문장은 그들이 외 딴 곳에 살고 있어 무시무시한 거인과 마을의 소동을 알지 못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아버지는 제랄다에게 점심에 제랄다가 만들어준 사과 만두를 너무 많이 먹어 몸이 안좋으니 다음 날 읍내에는 네가 대신 가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아버지의 핑계는 왠지 석연치 않다. 왜냐하면 그의 긴 코는 붉고, 침대 아래에는 술병같이 생긴 병이, 그리고 침대 옆 탁자에는 술을 마실 때 사용되었을 듯 싶은 컵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는 제랄다의 사과 만두가 아니라 과한 음주로 인해 누워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받기에 충분하다. 그의 침대 머리맡에는 십자가가, 오른편 액자에는 검은 띠를 두른 여성의 초상화가 달려있다.
제랄다는 아버지 대신 다음 날 새벽에 수레에 음식을 잔뜩 싣고 읍내로 가게 되었다. 오랜만에 사람의 냄새를 맡게 된 거인은 기뻐서 허둥대다가 바위에서 떨어져 발목이 삐고 코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었다. 제랄다는 코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거인의 코피를 닦아주고 거인이 배가 고프다며 어린 아이의 고기를 읖조리는 소리를 듣고 수레에 실은 식재료로 요리하여 거인에게 먹였다. 제랄다의 음식맛에 반한 거인은 제랄다에게 자기를 따라와 요리를 해준다면 자신의 성에 있는 많은 금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제랄다는 그 제안을 승낙하고 아버지가 사온 제일 좋은 식재료로 거인의 식탁에 매일 각양각색의 엄청난 양의 요리를 올렸다. 이웃에 사는 여자 거인, 남자 거인들을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하니 이 식인 거인들도 아이들을 먹고 싶은 생각이 싹 달아났다.
이제 마을은 평화를 되찾았다. 숨어있던 아이들은 밖으로 나오고 거인은 마을로 내려와 아이들에게 막대 사탕을 나눠 주었다. 아름다운 처녀로 성장한 제랄다와 거인은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았다. 마지막 장면이 보여주는 그 가정의 모습은 제랄다가 갓난 아기를 안고, 말쑥해진 거인이 아기에 손을 얹고 있으며, 아기의 손 윗 형제인 듯한 세 명의 자녀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괴이한 것은 뒷짐 진 아들이 들고 있는 포크와 나이프이다. 이 아이는 지금 등 뒤로 포크와 나이프를 숨기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는 이것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성냥팔이 소녀 알뤼메트』를 보자. 이 작품은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를 패러디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표지에는 남루한 옷을 입은 소녀가 왼손에 그녀의 키만큼 크고 팔 두께만큼 큰 성냥개비를 들고 있다. 눈가에는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고 긴 머리카락은 손질되지 않은 듯 늘어져 있어서 이 소녀의 물리적, 심리적 상황을 짐작케 한다. 그녀는 그림틀 속에 갇혀있는데, 이는 그녀가 들고 있는 성냥갑을 닮았다. 면지에서는 앤디 워홀의 그림처럼 표지의 그림이 반복되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성냥이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사물이라는 것을 시사하는 듯 하다. 그림틀 밑에는 프랑스어로 ‘성냥’이라는 뜻의 “ALLUMETTE”라는 단어가 적혀있다. 네모난 그림틀은 알뤼메트의 증명사진처럼 보이기도 한다. 표제지에는 달팽이가 그려진 성냥갑이 있는데 달팽이의 솟아있는 두 눈은 성냥개비처럼 보인다.
본문은 소녀의 소개로부터 시작한다. “누더기 소녀 알뤼메트는 부모님도 없고 살 집도 없었습니다.”. 글 텍스트와 함께 그림을 보면 소녀가 가진 것은 그녀가 걸치고 있는, 상체만 겨우 가린 남루한 짧은 스커트와 성냥갑들뿐이다. 다음 장면에서 화자는 “알뤼메트는 커다란 쓰레기통을 뒤져 끼니를 때우고 남의 집 현관 앞에서 비바람을 피하다가 버려진 자동차 안에 들어가 잠을 잤어요...”고 서술한다. 컴컴한 밤에 쓰레기통 안에서 가시만 남은 생선과 뼛조각을 들고 기뻐하고 있는 소녀의 주변에는 고양이만한 몸집의 쥐들이 돌아다닌다. 두 문이 뜯기고 후드는 열려 있는, 버려진 차 밖으로 너부러져 있는 남자의 두 다리가 보인다. 뜯겨진 차 문으로 가림벽을 한 판자집의 빨랫줄에는 여자의 속옷이 걸려있다. 쓰레기통, 쥐, 말라서 죽어버린 나무, 부서진 울타리, 버려진 차, 판자집, 빨래줄에 걸린 허름한 속옷 등 소녀가 살아가는 뒷골목은 가난과 함께 자연물과 인공물의 쇠락해가는 이미지로 가득하다.
추운 겨울이 오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왔지만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고 분주하게 돌아다닐 뿐 누구 하나 알뤼메트에게는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알뤼메트는 제과점의 유리창에 코를 박고 그 안에 있는 케이크를 바라보다가 주인에게 쫓겨나고, 공사장에서 추위를 견디기 위해 성냥불로 불을 피웠다가 소방차가 몰려오는 바람에 도망친다. 기진맥진해진 알뤼메트는 주저앉아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살려주세요. 조금만 더 살게 해 주세요. 케이크가 얼마나 맛있는지, 아니면 칠면조 고기나 햄 한 조각이 얼마나 맛있는지 알 수 있을 때까지만이라도 살게 해 주세요. 정말 정말 소원에요. 오 제발! ” 그리고 시계탑이 밤 열두 시를 알리는 순간 번개가 번쩍하고 천둥이 치더니만 그가 소원했던 모든 것이 하늘에서 마구 쏟아졌다. 먹을 것과 담요와 깃털, 세발자전거, 그 밖의 온갖 잡동사니가 땅바닥에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집에서 돈을 세고 있던 제과점 라크루트씨 부부는 값나가는 물건들을 잡으려고 집밖으로 뛰쳐나갔다가 봉변을 당하고 만다. 다음 날 아침 알뤼메트는 우체부 아저씨를 만나고 그와 함께 하늘에서 쏟아진 선물들을 도시의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도시의 권력자들은 이 일을 탐탁히 여기지 않았고 군대까지 출동시켰다가 그 원인이 작은 소녀라는 것을 깨닫고 머쓱해진다. 그 동안 제과점 주인 부부는 알뤼메트에게 용서를 구하고 알뤼메트와 함께 물건을 정리하여 자기 창고에 보관한다. 그 다음부터 부자들이 물건을 기부하기 시작하고 라크루트씨 창고는 구조대의 본부가 되고 자원봉사자들이 전 세계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가게 되었다. 이제 알뤼메트는 구조대의 지도자로 성장했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행복했다.
그럼 이 세 작품에 그려진 가족, 성인, 소녀의 이미지를 차례대로 분석해 보기로 하자.
가족
앞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이 세 명의 소녀들은 결손가정 출신이다. 제랄다는 홀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며, 티파니는 고아가 되어 숙모에게 맡겨질 운명이었고, 알뤼메트는 처음부터 그냥 고아로 등장한다. 그들은 또한 사회적으로도 고립되어 있다. 제랄다와 아버지는 무시무시한 거인 소문을 듣지 못할 정도로 외딴 농촌에서 살고 있으며, 숙모집으로 가는 티파니는 동행자나 돌봐주는 사람 없이 혼자 마차에 타고 있다. 알뤼메트는 사람들이 북적이는 도시에 살고 있으나 그의 삶의 터전은 더럽고 냄새나는 도시의 뒷골목이다.
결론에서 그들이 이루는 가족 역시 전통적인 가족의 이미지와는 매우 거리가 멀다. 『세 강도』에서 아이들이 강도들의 도움으로 성장하여 가정을 이루게 되지만 이를 해피엔딩으로 평가하는 것은 재고해 볼 문제다. 아이들이 모두 제복과도 같은 옷을 입고 줄지어서 성으로 들어가는 모습, 자기들끼리 결혼하여 그들만의 공동체를 건설한 모습, 그리고 그 마을에 세워진, 강도들을 기리는 세 개의 높은 탑은 전통적인 가족 공동체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식인 거인을 따라간 제랄다는 나이 들어 거인과 결혼하고 자녀도 낳아 가족을 이루지만 한 자녀는 여전히 식인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 장면은 이종(異種) 결합에 드리워진 그림자로 해석될 수 있다. 알뤼메트는 고아로 시작하지만 여전히 혼자 생활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진작부터 그녀는 부모나 가족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부모와 집을 구하는 대신, 그저 생존을 위해, 그리고 맛있는 음식 맛을 보게 해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구조대의 지도자가 된 것으로 만족했다.
덧붙여, 해피엔딩의 플롯을 이끈 모티프에서도 흥미로운 공통점이 발견된다. 티파니와 세 강도를 따라간 아이들은 부모나 보호자의 따뜻한 보호와 사랑 대신 세 강도의 물질로 인해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으며, 제랄다는 거인이 자기 집으로 가서 요리를 해주면 많은 돈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거인의 성에 들어가게 되었고, 알뤼메트는 기적처럼 하늘에서 쏟아진 온갖 재화들과 그리고 부자들의 기부금으로 인해 구조대를 조직할 수 있었다. 즉, 세 작품 모두 주인공들이 맛보게 된 행복은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자원에 기인한 것이었다.
성인의 이미지
『세 강도』의 글과 그림에 등장하는 성인은 여행객, 강도, 그리고 숙모이다. 마차의 바퀴를 쳐부수는 도끼는 충분히 위협적일 수 있지만, 후추가루 발사기와 나팔총은 익살스러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도들에게 습격당한 여행객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속수무책으로 재물을 빼앗긴다. 또한 강도들은 폭력적이고 비도덕적이고 어리석기도 하다. 그들은 여행자의 재물을 강탈하여 은닉해 놓았지만 티파니의 질문을 받고 당황한다. 타파니의 숙모는 시각적으로 그려지지 않았지만 글을 통해 ‘사악한’ (wicked) 캐릭터로 소개된다. 아이들이 탄 마차 행렬을 나무 밑에 앉아 술통을 끼고 보고 있던 남자는 알콜중독자같은 인상을 준다. 또한 세 강도가 아이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강탈한 재물 덕분이었지만 이에 대한 반성이나 뉘우침은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마을의 아이들로부터 길이 존경받는 인물로 남는다.
제랄다의 아버지는 무책임하고 절제력이 부족한 캐릭터로 보인다. 다음날이 일년에 한번 열리는 장날임에도 불구하고 그 전날 낮의 음주로 인해 어린 제랄다를 대신 장에 내보낸다. 그리고 자영농이었던 그는 거인의 돈으로 제랄다에게 필요한 식재료를 조달하여 제랄다와 함께 미식가가 된 거인의 식탐을 채우는, 거인성의 일군이 된다. 거인이 마을로 내려와 아이들을 잡아갈 때 보이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도 비겁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거인에 대항하는 대신 아이들을 지하실이나 땅밑에 숨기기 바빴다. 학교 교사들은 학교 앞 의자에서 이 비극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며 하릴없이 앉아 있을 뿐이다. 식인 거인은 사악하고 잔인하지만 서두르다 바위 위에서 떨어지는 어수룩함도 보인다. 그가 제랄다로 인해 식인 습성을 버린 후에도 아이들을 포획하여 잡아먹었던 과거의 악행을 뉘우치거나 마을 사람들에게 용서를 빌지 않았다. 그가 한 선행이라고는 마을의 아이들에게 막대사탕을 하나씩 나눠준 것뿐이다. 오히려 그는 출처가 수상한 재물 덕분으로 요리 솜씨가 좋고 외모도 아름다운 제랄다와 결혼하고 가정을 가지게 되었으니 『세 강도』와 마찬가지로 그의 악행은 비난받기는커녕 보상을 받은 모양새를 취한다.
알뤼메트의 주변에 그려진 성인들 중 제과점 주인, 우체부, 시장의 캐릭터를 살펴보도록 하자. 제과점 주인은 인정머리 없고 탐욕스러운 캐릭터로 그려지지만, 알뤼메트의 기도가 가져온 기적을 보고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다. 우체부는 선량하기는 하나 하늘에서 떨어진 곰 인형을 엉겁결에 끌어안고는 두려움에 떠는 소심하고 겁많은 인물이다. 시장은 가난한 사람이 알뤼메트가 주는 선물을 받으려고 행렬을 이루자 어떤 선동가가 나타났는가 오해하여 군대까지 출동시킨다. 그러나 그 소동의 원인이 어린 소녀라는 것을 깨닫고 대중들 앞에서 연설할 기회를 갖고자 했으나 그의 연설을 듣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우리 사회에도 존재하는 위선적인 권력자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소녀들의 이미지
소녀들의 나이는 불확실하나 미성년자인 것은 확실하다. 이들은 소녀라는 성과 연령 외에도 주류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을 갖는다. 티파니는 고아이며, 제랄다는 외딴 시골에, 그리고 고아인 알뤼메트는 도시의 뒷골목에서 산다. 그러나 그들은 용기있고, 야심있고, 독립적이고, 이타적이며, 어떤 성인보다도 지혜롭다. 티파니는 강도를 만났을 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강도의 소굴로 들어가서도 보물함의 용도를 묻는 당돌함을 보인다. 제랄다 역시 사납게 생긴 거인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거인의 제안을 승낙하여 거인성에 들어간다. 알뤼메트는 도시의 어둡고 더러운 뒷골목에서 혼자 잠자리를 찾고 음식 찌꺼기를 먹으며 생존해 나간다.
그 외에도 각 소녀는 나름대로의 강점이 있다. 티파니는 통찰력이 있으며, 제랄다는 훌륭한 요리 솜씨를, 그리고 알뤼메트는 전 세계적으로 기부금을 모으고 빈민 구조대를 창설할 정도의 훌륭한 리더십을 갖추고 있다. 그들의 장점은 그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성인에 대해 배려심이 많고 관대하며 포용력이 있다. 티파니는 강도의 악행과 어리석음을 나무라지 않고 그들을 선행으로 이끌며, 제랄다는 식인 거인을 동정하며, 알뤼메트는 자신을 혐오하던 제과점 주인을 용서하고 그도 구조대의 일익을 담당하게 하며, 소심하고 겁많은 우체부도 빈민 구조대에 초대한다. 더 나아가 사회의 기득권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녀의 일에 동참하게 만든다. 마지막 장면에서 알뤼메트는 누추한 짧은 스커트 대신 팔을 가리는 회색 브라우스와 검은색 긴 스커트를 입고 발코니에 나와 천둥 번개치는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브라우스의 색은 회색 하늘과, 스커트의 색은 검은 구름과 일치한다. 기적을 베풀어주었던 하늘과 교감하는 그녀는 세상의 어느 권력자들보다도 더 큰 힘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세 소녀의 이야기에 투영된 전복의 이데올로기
‘전복’의 사전적 정의는 “차나 배 따위가 뒤집힘, 혹은 사회 체제가 무너지거나 정권 따위를 뒤집어엎음”이다.(3) 유사어로는 ‘destruct’, ‘destroy’가 있으며 그것의 반대말은 ‘건설하다’이다. 아동문학 평론에서 전복이라는 단어는 주로 성인과 어린이의 힘의 관계를 뒤집는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성인과 어린이의 힘의 관계를 전복시킨 대표적인 캐릭터는 스웨덴의 아동문학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1907-2002)(4)의 『삐삐 롱스타킹』(1945)의 주인공 소녀 삐삐일 것이다. 삐삐는 동거인도 없이 혼자 마을 밖에서 살지만, 힘이 세고 자유분방하며 항상 신나는 모험을 즐기고 못된 어른들을 골려주기도 한다. 마을의 권력자들이 강요하는 사회적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즐겁게 살아가는 소녀의 모습은 성인보다 높고 우월해 보인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사범대학 교수인 마리아 니콜라예바(Maria Nikolajeva)와 같은 포스트모던 평론가는 『삐삐 롱스타킹』에 대해서 찬사를 쏟아낸다.(5) 그런데 삐삐 롱스타킹과 티파니, 제랄다, 알뤼메트의 캐릭터는 놀랄 만큼 유사하지 않은가? 심지어 알뤼메트는 도시 뒷골목의 쓰레기통을 뒤지던 고아였으나 빈자와 약자, 전쟁 피해자를 돕는 전 세계적인 구조대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녀의 이미지는 프리드리히 니체가 추구했던 초인(超人)의 면모를 투영하는 듯 하다.
어린이문학 평론가들이 토미 웅거러의 세 소녀와 같이 서구 사회의 전통과 질서에 맞서는 어린이 캐릭터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20세기부터 유럽과 미국 사회의 지성계와 문화를 지배하기 시작한 문화막시즘 이데올로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막시즘이란 종전의 경제적 막시즘에 대체하고자 막시즘 이론가들이 개발한, 변형된 K. 막스(K.Marx)의 혁명이론으로서 동성애, 젠더 이데올로기, 급진적 페미니즘, 프리섹스, 다문화주의, 가정의 해체를 꾀한다. 문화막시즘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과 미국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으며, 미국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세워진 사회연구소의 막시스트들이 히틀러를 피해 1923년 뉴욕으로 건너감으로써 전파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후 대부분의 문화막시스트 학자들은 유럽으로 돌아와 영향력을 넓혔으나 마르쿠제만 미국에 남아 계속 그 이론을 가르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6) 토미 웅거러의 세 작품이 프랑스에서 출판된 1960-70년대가 문화막시스트들이 주도했던 프랑스의 68운동 전후라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간 유럽의 문화막시즘을 연구해 온 정일권은 21세기 들어 유럽에서는 문화막시즘이 황혼기에 들어섰다고 지적한다.(7) 20세기 후반 사회민주주의를 추진했던 독일과 프랑스, 영국 등이 그 부작용을 현실적으로 체험하면서 21세기에 접어들어서는 문화막시즘의 정치적 토양이었던 사회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유럽 정신은 문화막시즘의 일탈적 사유로부터 점차 벗어나 건강하고 시민적인 일상의 철학과 사유를 재발견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김대중 정부 때인 2000년경 좌파 이론가들이 문화막시즘을 우리나라로 유입한 후 사회 전반에 반지성적이며 비도덕적인 문화를 퍼뜨리고 있다. 유럽에서는 저물어가고 있는 시대사조가 최근 들어 부쩍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이유로는 지난 5년간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좌파 정권의 비호와 지원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올해 9월부터 12월 9월까지 100일간의 정기국회에서 가정 해체를 조장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건강가족기본법개정안을 통과시키려고 전력을 다하고 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문화막시즘이 퀴어문화 축제, 영화, 책, 웹툰, 드라마 등 문화 영역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언론조차 이들의 영향권 아래 놓여있어 많은 국민들이 그 법안들의 해악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화막시즘의 목표는 2000년간 서구 사회가 유지하고 있던 유럽의 전통문화와 기독교 문화를 말살하는 것이다. 그들은 백인 남성은 권력자로, 여성과 아동은 약자로 분류하며, 후자가 전자에게 대항하도록 촉구하고, 궁극적으로는 가족의 해체를 추구한다.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건강가족기본법개정안은 동성애자와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인정하여, 마치 인권을 옹호하는 선한 법처럼 보이지만 실은 전체주의 독재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매우 사악한 수단일 뿐이다. 가족이 해체되면 부모의 보살핌과 교육을 받지 못하게 된 어린이들이 정부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그들이 원하는 전체주의 사회 건설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토미 웅거러의 작품에서는 문화막시즘의 망령(亡靈)이 어른거린다. 처음부터 주인공들은 결손가정 출신으로 그려지며, 결말에서도 남성과 여성이 결혼하여 자녀를 출산하는 대신, 대안(代案)적인 공동체가 제시된다. 『제랄다와 거인』에서는 인간과 식인 거인과의 이종결합, 『세 강도』에서는 전체주의 사회, 혹은 교주가 이끄는 이단 종교집단과 같은 공동체, 그리고 『성냥개비 소녀 알뤼메트』에서는 ‘초인’과도 같은 능력을 지닌 독신 여성의 등장이다. 그러나 그들이 찾은 행복이 그들이 탈취한 것이든, 기부받은 것이든 그들이 비난하는 기득권층의 재화 덕분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결론적으로, 자신의 쾌락 추구가 아니라 어린이를 위해 그림책을 읽는 사람들은 작품의 수상 경력이나 언론과 출판사, 인터넷 서평, 혹은 전문가의 평론을 비판없이 수용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화려한 수상경력은 작품의 오독(誤讀)을 부추길 위험성이 높다. 외국의 유명 어린이 도서상은 그림책이 독립적인 예술 작품으로서 인정받는 데 기여한 반면, 반기독교적 시대 정신을 퍼뜨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8) 우리가 “이 시대를 본받지 말아야”(롬 12:2)할 삶의 영역 중에서 어린이 도서 영역은 너무나 중요하다. 지금 대한민국의 그림책 문화는 문화막시즘이 왕성하게 열매 맺는 비옥한 토양이 되어 어린 영혼들을 좀먹고 있기 때문이다.
(1) 나선희. (2020). 환대의 가능성-토미 웅거러의 그림책을 중심으로. 동화와 번역, 40, 43-68.
(2) 박유진 (2017). 토미 웅거러(Tomi Ungerer) 그림책에 나타난 아동 등장인물의 인성적 특성 분석. 동아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청구논문.
Tomi Ungerer - Official Website
(3) 표준국어대사전, 2020
(4)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어린이 도서상은 우리 나라 백희나 작가가 2021년 수상함으로써 대중의 인지도가 높아지기도 했다.
(5) Nikolajeva, M. (2012). 힘과 목소리, 주체성-어린이 문학에 나타난. [Power, voice and subjectivity in literature for young readers]. (고선주 역). 파주: 교문사. (원본발간일 2009
(6) 정일권(2020). 문화막시즘의 황혼.
(7) 정일권(2020). 문화막시즘의 황혼.
(8) 이수형, 현은자 (2022). Astrid Lindgren Memorial Award 수상 그림책의 세계관 분석. 어린이문학교육연구. 23: 2, 203-229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후 Eastern Michigan University 에서 석사,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어린이문학교육학회 회장 및 한국 기독교 유아교 육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아동 청소년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대학 부설 생활과 학 연구소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기독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이해>(공저), <그림책과 예술교육>(공저>, <그림책으로 보는 아동과 우리사회>(공저), <100권의 그림책>(공저) 등 그림책 관련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