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에 관하여: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케빈 행크스의 『Waiting』

2022-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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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에 관하여: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케빈 행크스의 『Waiting』




사무엘 베케트(1906-1989)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서양의 대표적인 부조리극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작품을 오래 전 대학로의 극장에서 접했는데 최근 유튜브 영상으로 다시 보면서 그 당시의 쓸쓸하고 공허했던 느낌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었다. 스토리를 짧게 요약한다면, 무대에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명의 남자가 등장하여 고도라는 이름의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무대 조명은 어둡고, 무대 장식이라고는 휘어진 앙상한 가지가 뻗어있는 작은 나무 한 그루 뿐이다. 그런데 그들은 고도가 누구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그들이 고도로부터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도 모르며, 심지어 고도가 실존 인물인지조차 모르고 있다. 그들의 대화는 두서없고 때로는 무의미하기만 하다. 그들이 무대 위에 있는 동안 여러 인물들이 등장했다 퇴장하기도 하지만 그들 또한 고도에 대한 어떤 의미있는 정보도 주지 않는다. 고도를 기다리다 지친 에스트라공이 차라리 멀리 떠나자고 하지만 블라디미르는 내일 고도를 만나러 여기 와야 한다고 상기시킨다. 둘은 에스트라공의 허리끈으로 나무에 목이나 매어서 자살을 하려고 하나 줄이 끊어져 실행하지도 못한다. 그들은 내일은 끈을 챙겨오자고 하면서 막이 내린다. 결국 그들은 끝까지 고도를 만나지도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나지도 못한 채로 드라마는 끝난다. 

밝고 부드러운 파스텔 색조의 작고 앙증맞은 인형들이 등장하는 케빈 행크스의 『조금만 기다려봐』를 보면서 이 음울한 연극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의 원제는 『Waiting』(1) 으로서 직역한다면 그저 “기다리기”가 될 것이다. 이 작품으로 케빈 행크스는 2016년에 칼데콧 아너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표지에는 독자에게 뒷모습을 보인 채 유리창 선반 위에서 창밖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올빼미, 꼬마 돼지, 아기곰, 강아지, 그리고 별토끼가 그려져 있다. 한결같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캐릭터이다. 구름들의 모양은 이 인형들과 그들이 들고 있는 사물들의 형태와 닮았다. 온종일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그들은 각기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점박이 올빼미는 달님을 기다리고, 우산을 든 꼬마 돼지는 비를 기다리고, 연을 든 아기곰은 바람을 기다리고, 썰매를 타고 있는 강아지는 함박눈을 기다린다. 그런데 목이 긴 별토끼는 특별히 기다리는 것이 없다. 그저 창밖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것 자체를 즐길 뿐이다.

달님이 둥실 떠오르자 점박이 올빼미가 기뻐하고, 주룩주룩 비가 내리면 우산을 들고 있는 꼬마 돼지가 행복했고, 살랑살랑 바람이 불면 아기곰이 좋아했고, 함박눈이 펑펑 내리면 강아지가 행복해했다. 강아지는 그 선반을 떠나기도 했지만 곧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느 날은 표제지에서 그려졌던 구슬, 도토리, 조가비 같은 작은 물건이 선물로 갑자기 선반에 올라왔으나 다음 장면에서 작은 선물들은 사라진다. 하루는 멀리서 도자기로 만든 코끼리 인형이 방문하여 얼마간 그곳에 머물렀으나 선반 아래로 떨어져 산산조각나기도 하였다. 어느 날 얼룩 고양이가 선반에 놓였다. 고양이는 특별히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지 않았는데, 사실은 고양이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었다. 고양이의 윗부분이 열리더니,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그 안에서 고양이 넷이 차례대로 나타났다. 모두 열이 된 그들은 다음에 벌어질 일을 기다리며 행복했다.

이것이 글텍스트와 그림 이미지가 전달하는 스토리의 개요이다. 이 작품에 대한 서평을 찾아보니 기다림의 즐거움, 기다림 끝의 행복, 기다림이 있음으로써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등 감상적인 평이 대부분이다. 어떤 서평은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다. “...모든 순간에는 기다림이 존재합니다.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기다림 저 끝에 행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테니까요”.

그럼, 글과 그림을 좀 더 촘촘히 읽어보자. 우선, 캐릭터를 분석한다면 그들은 의인화된 장난감 인형이다. 아동문학에서 의인화된 인형이 등장할 경우에는 의인화된 동물과는 달리 능동성이 결여되는 특성을 보이는데 이 작품의 캐릭터도 예외는 아니다. 이 인형들은 보이지 않는 더 큰 힘에 의해 조종당하는 무력한 존재들이다. 잠시 그 자리를 떠났던 썰매 탄 강아지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이동했던 것이고, 선반 위에 올려놓은 도자기 코끼리의 추락은 인형 주인의 실수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얼굴에는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으며 서로 간에 대화나 눈맞춤도 없다. 작은 선물이 선반에 놓였을 때에도 인형들은 딱히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며, 그들은 멀리서 온 코끼리가 선반에 놓였을 때 그것과 거리를 두고 있다가 코끼리가 선반에서 떨어져 산산조각난 상황에서도 그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 별다른 반응이 없다. 정확히 말한다면 그 장면에서 그려지지 않았다. 그 장면에서는 오직 올빼미와 목이 긴 토끼만 등장하는데, 올빼미는 무표정하게 눈을 감고 있으며, 긴 목을 늘여 조각난 코끼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목이 긴 별토끼의 표정에서 안타까움에 가까운 정서를 읽을 수 있다.

이 부분은 조금 납득하기 어려운데, 왜냐하면 독자들은 창가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그들에게서 우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친밀한 관계를 기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원본 텍스트는 “Once a visitor arrived from far away. He stayed a while.” 인데, 직역하면, “어느 날 먼 곳으로부터 방문객이 와서 잠시 머물렀지요” 지만, 번역본에서는 “어느 날 멀리서 코끼리 아저씨가 찾아왔어요. 친구들은 함께여서 행복했지요.”로 번역되었다. 의역을 넘어서서 변개(變改)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이 문장의 의미를 바꾸어 놓았다. 사실 원본에서 “friends”라는 단어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번역본에서 “친구”라고 번역된 단어는 원본에서는 “them” 혹은 “they”이다. ‘친구’와 ‘그들’이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는 매우 다르다. 즉, 그들은 좁은 선반 위에서 나란히 줄지어 서 있으나, ‘친구’라고 불리울 만한 관계는 아닌 것이다.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글과 그림이 보여주는 모순적인 관계이다. 주의깊은 독자가 아니라면 이 아이러니를 눈치채지 못할지 모른다. 그런데 몇 장면에서 보여지는 글과 그림의 불일치는 이 스토리의 해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므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무엇인가를 기다리던 인형들은 각자 기다리는 것과 조우(遭遇)하지만 정작 그것을 누리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주룩주룩 비가 내리면 꼬마 돼지는 행복했어요. 우산이 옷을 젖지 않게 해 주었거든요”라는 글텍스트와는 달리 꼬마 돼지는 여전히 집안 유리창 안에 갇혀 있을 뿐이다. 아기곰도 창밖에서 부는 바람에 연을 날리지 못하며, 강아지는 함박눈이 내려도 썰매 타기를 즐기지 못한다. 반면에 달뜨기를 기다리는 올빼미와 그냥 창밖을 내다보며 어떤 특별한 것도 기다리지 않는 별토끼의 모습에서 글과 그림은 대응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창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받는 듯 하지만 이 창은 미디어의 사각형의 형태와 닮았다. 즉, 이 인형들의 모습은 온종일 네모난 유튜브 영상 앞에서 미디어를 통해 보여지는 타인의 경험을 간접 경험하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흡사하다고도 볼 수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와 『Waiting』은 문학적 요소와 세계관적 측면에서 매우 흥미로운 유사성을 보여준다. 물론 두 작품 간에는 매체와 문학적 장르와 내포 독자의 측면에서 매우 큰 간극이 존재하지만 문학적 지식(literary knowledge)을 동원한 텍스트 해석을 통해 세계관적 비교가 가능할 수 있다. 두 작품의 배경(setting)과 캐릭터와 플롯을 비교해 보자.

우선, 서사가 소위 ‘닫힌 체계’(closed system)라는 공간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자의 공간적 배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무 한 그루만이 서 있는 어두운 무대 공간이며, 후자의 경우는 작고 네모난 유리창 안 선반이다. 또한 캐릭터에 있어서 전자의 두 주인공은 고도를 만나리라는 공허한 기대에 사로잡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으며, 인형들은 누군가가 자신을 움직여 주기 전에는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는 수동적인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행위의 결과를 비교할 때 전자의 주인공은 결국 고도를 만나지 못하는 허무한 결말을 맞지만, 인형들은 모두들 자기들이 기다리는 것을 얻게 되므로 해피엔딩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유리창을 매개로 인지된 것으로서 직접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전자의 인물들은 서로 대화를 시도하지만 그것은 부조리하며 무의미한 독백에 흡사하며, 인형들도 서로 가까이 위치하고 있지만 눈맞춤이나 어떤 소통도 없이 그냥 그곳에 놓여 있을 뿐이다. 플롯도 두 작품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 간에 인과성이 거의 없는 에피소드식 연결에 가까우며, 결론도 종결감을 주기보다 열린 결말의 성격을 띠고 있다. 즉, 그들의 행위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순환구조를 보여준다. 전자의 두 인물은 여전히 고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나지도 못한 채 막이 내리며, 『Waiting』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인형들은 여전히 독자에게 등을 보인 채 창밖에서 벌어질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서 있다. 그런데 그 일들은 매일, 혹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반복되어 일어나는 일들이다. 첫 장면과의 차이라면 그들에게 다섯 개의 고양이가 합류하여 이제는 열이 되었다는 것이지만 사실, 그들도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는 존재들이다.

사무엘 베케트가 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창작하였다는 『고도를 기다리며』는 하나님을 부인한 현대인의 딜레마를 탁월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은 곧 하나님의 창조물이자 형상(God’s image bearer)인 인간의 죽음을 함축한다. 서양 문화의 기초가 되었던 기독교 정신을 잃어버리자 실재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론적, 가치론적 신념도 무너져 내렸다. 고도가 무엇인지, 과연 오는 것인지, 온다 해도 그것을 알아볼 수 있을지, 기다림의 행위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회의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신을 떠난 인간의 실존적 비극을 보여준다. 삶의 목적과 의미를 잃어버린 허무주의의 논리적인 귀결은 자신의 무화(無化)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살하지도 못하고, 고도를 계속 기다려야 할지 여부도 판단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뿐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황량하고 불길하며 어두운 분위기와는 달리, 『Waiting』의 분위기는 밝고 부드럽고 행복해 보인다. 그러나 창틀 선반에서 의미와 목적도 없이 무언가를 반복적으로 기다리며 온종일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이 자그마한 인형들의 이야기에 허무주의의 음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은 부인하기 힘들다.

이 두 작품을 보며 지금 기독인들이 궁극적으로 갈망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여러분이 만약 성경 신자(bible believer)라면 이미 그 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성경 66권의 주제는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으로 요약될 수 있다. 구약의 대언자들(모세, 다윗, 다니엘, 이사야, 요엘 등)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기다렸으며, 신약에서 예수님과 사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예언하였다. 구약에서는 예수님의 초림이 125회, 재림은 329회 언급되었으며, 신약에서는 재림이 318회 언급되었다. 신구약 전체를 통해 예수님의 재림이 초림보다 8배나 많이 예언된 셈이다.(2)

초림이 그러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분명히 다시 오실 것이지만 그것으로 이 광대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생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영생은 실체(實體, substance)이며, 직접 보고, 듣고, 맛보고, 만져볼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은 “...내가 반드시 속히 가리라(Surely I come quickly)”라고 약속하셨으며, 사도 요한은 그에 대해 “아멘, 주 예수님이여 과연 그와 같이 오시옵소서”(계 22:20)라고 화답하였다.

성경의 이야기는 창세 전 영원부터 시작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원한 삶으로 이어지는 메타 서사(meta narrative)이다. 그것과 비교하면 그림책에 담긴 이야기는 너무나 작고 소소한 것임에 틀림없다. 사실 이 두 종류의 텍스트는 비교 자체가 가당치 않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는 인간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맥락을 제공한다는 면에서 인간의 실존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나 플라토가 청년들에게 주어지는 이야기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것도 이러한 이야기의 힘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책이 전달하는 작은 이야기조차도 우리의 내밀한 부분을 건드리는 영적인 힘이 있다.(3)  그증거는 『Waiting』에 대한 독자 서평,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러면 행복이 올 거예요.”와 그것에 공감하는 반응들이다.

어떤 텍스트(소설, 드라마, 영화, 그림책, 등)를 세계관적으로 읽는 작업은 몇 가지 측면에서 우리에게 유익을 제공할 수 있다. 우선, 이 텍스트에 투영된, 그러나 우리 자신도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시대 정신을 파악할 수 있으며, 기독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기독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모르는 영혼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지적, 영적인 자원과 훈련이 필요할지 모른다. 첫째는 그림책의 매체적 속성에 대한 이해이며, 둘째는 예술 행위에 대한 이해이며, 셋째는 문학과 서사에 대한 이해이며, 마지막으로는 바른 성경 교리(doctrine)에 입각한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이해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 무엇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지를 자문해 보는 것이다. 나는 세상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아니라 성경의 이야기에 이끌리고 있는가? 내가 하는 일을 통해 이 위대한 이야기의 일부분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는가? “내가 반드시 속히 가리라”라는 주님의 목소리에 “아멘, 주 예수님이여 과연 그와 같이 오시옵소서”(계 22: 20)라고 기쁘게 화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바울 선생님은 로마의 감옥에서 처형을 앞두고 디모데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권면하였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끝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므로 이후로는 나를 위해 의의 왕관이 예비되어 있나니 주 곧 의로우신 심판자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요, 내게만 아니라 그 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시리라´(딤후 4: 8). 이 말씀이 그림책을 읽는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기도할 뿐이다.    



(1) 이 칼럼에서는 작품의 원제를 사용함. 왜냐하면 별토끼는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고 있으나 번역본의 제목은 모든 인형이 어떤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2) 정동수(2014). 재림과 휴거 바로 알기. 그리스도 예수 안에
(3) 현은자(2017). 그림책 해석의 영성적 접근: 은혜 개념을 중심으로. 어린이문학교육연구. 18:3. 21-42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후 Eastern Michigan University 에서 석사,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어린이문학교육학회 회장 및 한국 기독교 유아교 육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아동 청소년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대학 부설 생활과 학 연구소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기독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이해>(공저), <그림책과 예술교육>(공저>, <그림책으로 보는 아동과 우리사회>(공저), <100권의 그림책>(공저) 등 그림책 관련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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