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읽기의 감각적 즐거움과 심미적 즐거움
C. S. 루이스의 『개인기도』(1)는 말콤이라는 가상의 친구에게 쓴 루이스의 편지글을 모은 책입니다. 서신 교환처럼 쓰여진 이 책의 주제는 ‘기도’지만 그 안에 ‘즐거움’에 관한 글이 있어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그는 모든 즐거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로가 될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 즐거움을 받아들이는 일과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분리될 수 없는 경험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단지 즐거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그는 감사라는 것이 “제게 이것을 주시다니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분입니다”라면, 경외는 “멀리서 잠시 반짝이는 빛이 이 정도라면 도대체 그분은 어떤 존재이신가!”라는 찬탄에 비유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즉, 감각적으로는 햇살을 보면서 우리의 마음은 태양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지요.
그의 글을 직접 인용해보겠습니다. “나는 모든 즐거움을 하나님의 현현으로 보려 하네. 항상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너무 평범하거나 진부한 즐거움이란 없을 걸세. 창문을 열고 내다보는 순간 뺨 전체를 스치는 공기의 첫맛은 물론이고, 잠잘 때 신는 슬리퍼의 부드러운 감촉도 예외가 아니네.” 사물인 슬리퍼의 부드러운 감촉조차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찬탄하는 통로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요. 봄꽃들의 눈부신 향연이 벌어지고 있는 이 계절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루이스 자신도 그 목표를 항상 달성하는 것은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루이스는 그 원인을 몇 가지로 분석합니다 우선, 부주의와 그 대상에게 주의 집중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 두 번째는 즐거움을 자신의 신경 체계 안에서 벌어지는 일로만 여기는 것, 세 번째는 “한번 더” 라는 탐욕스러운 마음,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자만입니다.
그는 대상이 우리의 감각체계에 주는 감각적 즐거움과 대상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미적 즐거움이 구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감각적 즐거움과 심미적 즐거움은 동시에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삶을 당연한 것처럼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우리가 그의 쾌락관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다소 어려운 훈련이 필요하겠지만, 만일 그것이 성공한다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비추시는 빛은 점점 더 밝아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하는 많은 그림책들은 바로 그 일을 도와주는 도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어린이들과 함께 심미적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통로로써 말입니다. 아마도 『All the world』 같은 작품이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작품은 2010년 칼데콧 명예(honor)상을 수상하였고, 우리말로도 『온 세상을 노래해』로 번역이 되어 인지도가 높은 작품입니다. 이 그림책은 “온 세상” 이라는 책 제목에 걸맞게 가로·세로 28.5 cm의 정사각형의 큰 판형으로 제작되었으며, 그 공간 안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펼쳐지는, 바닷가 마을 사람들의 평범하며 소소한 일상의 삶을 보여줍니다. 리즈 갈튼 스캔런이 시를 쓰고 말라 프레이지가 그림을 그린 이 그림책은 글과 그림 작가는 다르지만 두 언어는 더할 수 없이 탁월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시의 처음 몇 연(stanza)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바위, 돌멩이, 조약돌, 모래
온몸, 어깨, 팔, 손.
도랑을 파요. 조가비를 주워요
세상은 넓고도 깊어요.
벌통, 꿀벌, 날개, 윙윙
옥수수껍질, 옥수수, 노란 알갱이, 냠냠!
토마토꽃, 새빨간 열매
온 세상이 커다란 뜰이에요.
이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시어와 그림 언어의 특별한 보완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어에는 서사성이 거의 없으나, 그림 언어에서는 비닷가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등장하며, 그들의 하루 일과가 아침, 점심, 저녁, 밤 순으로 그려져 있어서 자연스럽게 서사가 생성됩니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은 영상 언어와 같이 근경으로, 그리고 그들의 삶의 터전인 창조세계의 모습은 원경으로, 교차·반복되어 비추어 지면서 시에 내재된 리듬감은 그림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있습니다.
서사는 부모와 남매로 이루어진 힌 가족이 바닷가에서 놀이하는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오빠와 신나게 모래 놀이를 하던 소녀는 손에 든, 모래밭에서 주워 온 조가비를 엄마에게 보여줍니다. 다음 장면에서 이 가족은 빨간 트럭을 타고 바닷가를 떠나 농부들이 농장에서 수확한 작물들을 매매하는 시장에 들릅니다. 그 후 남매들은 큰 나무를 타고 올라가고, 호숫가에서 놀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해 따뜻한 식당으로 들어가고, 노을을 보며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난롯불 옆에 모입니다. 어두움이 몰려오고 온 세상이 고요히 잠들어갈 때 따뜻하고 밝은 방에 모인 가족들은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고 대화하며 하루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즐깁니다.
마지막 세 화면에 걸쳐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는 모든 것 그 모든 것이 세상이지요. 모든 것이 너와 나, 우리랍니다. 희망과 평화와 사랑과 믿음” 바닷가 사람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감각적인 즐거움을 그려내었던 시인은 이제 “희망과 평화와 사랑과 신뢰”라는, 추상적인 단어로 그가 꿈꾸고 있는 세상의 비전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세상은 우리 모두에요.”(All the world is all of us)라는 시구와 함께 끝납니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는 앞서 보았던 소녀가 잠옷 차림으로 홀로 등장하여 두 손을 모으고 그 안의 무언가를 바라봅니다. 여기에서 독자의 시선 역시 소녀가 응시하고 있는 것을 따라가게 됩니다. 주의 깊은 독자라면 그것이 소녀가 모래밭에서 주워 온 소라 껍데기라는 것을 눈치챌 것입니다. 그 소라 껍데기는 사실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전, 표제지에도 그려져 있었고 온 가족이 모여 있는 방에서 사촌 언니와 놀고 있던 소녀의 무릎 옆 바닥에도 놓여 있었지요.
표제지로부터 시작하여 본문과 뒤표지까지 반복되어 등장하는 소라 껍데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세상은 우리 모두에요.”(All the world is all of us)“라는 시어에 함축되어 있겠지요. 일반적으로 이 시구는 세상의 모든 것들, 즉 인간으로부터 소라 껍데기 같이 작은 사물에 이르기까지, 우주 안의 모든 존재가 하나됨(oneness)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식으로 해석되곤 합니다. 그러나 만일 작가가 우리가 오감을 통해 지각할 수 있는 세상 모든 것들이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한 목소리로 찬양하고 있음을 의도한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다면 이 작품은 루이스가 말한, 감각적 즐거움과 심미적 즐거움이 분리될 수 없음을 드러내는 완벽한 예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도 “하늘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고 궁창이 그분의 손으로 행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서 지식을 보이니 그것들의 음성이 들리지 않은 말이나 언어가 없도다.”(KJV 시편 19: 1-3)라고 노래하였으니까요.
우리가 노력을 기울인다면 그림책은 감각적 즐거움 이상의 즐거움을 다채로운 방식으로 선사하는 통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엄마, 잠깐만』으로 번역된 앙트아네트 포티스의 『Wait』는 출근길의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전철역으로 향하는 모습을 그린 책입니다. 이 작품에서 사용된 단어는 오직 “Wait”와 “Hurry” 뿐입니다. “Wait” 은 아이의 것이고 “Hurry”는 엄마의 언어입니다. 출근길 엄마의 가방 밖으로는 우산과 아이의 우비가 엿보입니다. 엄마는 연신 손목 시계를 쳐다보면서 전차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서두르는데 아이는 주위의 온갖 것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애완견, 공사판의 아저씨, 호숫가에서 오리들에게 먹이를 주는 아저씨, 아이스크림 차의 광고판, 수족관의 물고기, 풀숲에 숨어있는 나비 등... 한눈을 파는 아이의 손은 길을 재촉하는 엄마의 손에 잡혀 있습니다. 결국 하나 둘 빗방울이 떨어지고, 엄마는 아이에게 우비를 입히고 전철 승강장 쪽으로 급히 올라갑니다. 그런데 전철 안으로 들어가려는 엄마의 코트 자락을 아이가 잡아당기고, 엄마는 뒤를 돌아봅니다. 기차는 떠나고 엄마와 아이는 도시의 하늘을 가로지른 쌍무지개를 바라봅니다. 처음으로 클로즈업된 엄마의 입에서는 “Hurry” 대신 “Yes, wait”라는 감탄사가 흘러 나옵니다.
맷 데 라 페냐가 글을 쓰고 크리스티안 로빈슨이 그린 『행복을 나르는 버스』는 2016년에 뉴베리상과 칼데콧 명예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글 작가는 기독인이던가 아니면 기독신앙에 우호적인 인물로 여겨집니다. 시제이라는 남자아이가 할머니와 예배를 마치고 교회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과 할머니의 언어에 사랑과 희락, 그리고 온유함이 배어 있는 것도 그 증거가 될 수 있겠지요. 두 사람은 무료 급식소로 향하는 길에서 많은 대화를 나눕니다. 할머니는 버스 안에서 만난 시각 장애인과 기타 연주자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고 그 대화에 시제이도 참여시킵니다. 지저분한 도시 거리를 지나며 불평하는 시제이에게 할머니는 하늘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합니다. “시제이, 저길 보렴. 아름다운 것은 어디에나 있단다. 늘 무심코 지나치다 보니 알아보지 못할 뿐이야.” 건물 위로 둥글게 솟아오른 무지개를 보면서 시제이는 할머니는 생각도 못한 곳에서 항상 아름다운 것을 찾아낸다고 신기해 합니다.
마이클 베다드가 글을 쓰고 바바라 쿠니가 그림을 그린 『에밀리』는 신비한 여성 에밀리와 그가 사는 마을로 이사온 가족의 이야기에 바바라 쿠니의 서정적인 그림이 더해진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19세기에 영국에 실존했던 여류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실제 삶에 허구적인 요소를 덧붙인 이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는 에밀리가 어머니와 함께 그 집을 방문한 이웃집 소녀에게 전해 준 시를 소개합니다. “지상에서 천국을 찾지 못한 자는 하늘에서도 천국을 찾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든 간에, 천사들이 우리 옆집을 빌리기 때문이다.”
루이스가 주장했듯이 만일 우리가 주변의 작은 일에서부터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외하는 습관을 기르지 못한다면 큰일에서도 그분을 경외하지 못할 것입니다. 시편 기자도 “주께서 선하신 것을 맛보아 알지어다”(taste and see that the Lord is good)(KJV 시편 34:8)라고 노래하지 않았던가요. 작가가 기독인이건 아니건 그림책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수 있는 이야기와 언어가 풍성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글과 그림에 주의 집중을 하지 않거나, 그것을 그저 감각적 즐거움으로 축소해 버리거나, 마음이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을지 모릅니다.
|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후 Eastern Michigan University 에서 석사,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어린이문학교육학회 회장 및 한국 기독교 유아교 육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아동 청소년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대학 부설 생활과 학 연구소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기독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이해>(공저), <그림책과 예술교육>(공저>, <그림책으로 보는 아동과 우리사회>(공저), <100권의 그림책>(공저) 등 그림책 관련 저서가 있다. |
그림책 읽기의 감각적 즐거움과 심미적 즐거움
C. S. 루이스의 『개인기도』(1)는 말콤이라는 가상의 친구에게 쓴 루이스의 편지글을 모은 책입니다. 서신 교환처럼 쓰여진 이 책의 주제는 ‘기도’지만 그 안에 ‘즐거움’에 관한 글이 있어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그는 모든 즐거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로가 될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 즐거움을 받아들이는 일과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분리될 수 없는 경험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단지 즐거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그는 감사라는 것이 “제게 이것을 주시다니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분입니다”라면, 경외는 “멀리서 잠시 반짝이는 빛이 이 정도라면 도대체 그분은 어떤 존재이신가!”라는 찬탄에 비유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즉, 감각적으로는 햇살을 보면서 우리의 마음은 태양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지요.
그의 글을 직접 인용해보겠습니다. “나는 모든 즐거움을 하나님의 현현으로 보려 하네. 항상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너무 평범하거나 진부한 즐거움이란 없을 걸세. 창문을 열고 내다보는 순간 뺨 전체를 스치는 공기의 첫맛은 물론이고, 잠잘 때 신는 슬리퍼의 부드러운 감촉도 예외가 아니네.” 사물인 슬리퍼의 부드러운 감촉조차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찬탄하는 통로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요. 봄꽃들의 눈부신 향연이 벌어지고 있는 이 계절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루이스 자신도 그 목표를 항상 달성하는 것은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루이스는 그 원인을 몇 가지로 분석합니다 우선, 부주의와 그 대상에게 주의 집중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 두 번째는 즐거움을 자신의 신경 체계 안에서 벌어지는 일로만 여기는 것, 세 번째는 “한번 더” 라는 탐욕스러운 마음,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자만입니다.
그는 대상이 우리의 감각체계에 주는 감각적 즐거움과 대상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미적 즐거움이 구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감각적 즐거움과 심미적 즐거움은 동시에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삶을 당연한 것처럼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우리가 그의 쾌락관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다소 어려운 훈련이 필요하겠지만, 만일 그것이 성공한다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비추시는 빛은 점점 더 밝아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하는 많은 그림책들은 바로 그 일을 도와주는 도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어린이들과 함께 심미적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통로로써 말입니다. 아마도 『All the world』 같은 작품이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작품은 2010년 칼데콧 명예(honor)상을 수상하였고, 우리말로도 『온 세상을 노래해』로 번역이 되어 인지도가 높은 작품입니다. 이 그림책은 “온 세상” 이라는 책 제목에 걸맞게 가로·세로 28.5 cm의 정사각형의 큰 판형으로 제작되었으며, 그 공간 안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펼쳐지는, 바닷가 마을 사람들의 평범하며 소소한 일상의 삶을 보여줍니다. 리즈 갈튼 스캔런이 시를 쓰고 말라 프레이지가 그림을 그린 이 그림책은 글과 그림 작가는 다르지만 두 언어는 더할 수 없이 탁월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시의 처음 몇 연(stanza)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시어와 그림 언어의 특별한 보완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어에는 서사성이 거의 없으나, 그림 언어에서는 비닷가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등장하며, 그들의 하루 일과가 아침, 점심, 저녁, 밤 순으로 그려져 있어서 자연스럽게 서사가 생성됩니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은 영상 언어와 같이 근경으로, 그리고 그들의 삶의 터전인 창조세계의 모습은 원경으로, 교차·반복되어 비추어 지면서 시에 내재된 리듬감은 그림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있습니다.
서사는 부모와 남매로 이루어진 힌 가족이 바닷가에서 놀이하는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오빠와 신나게 모래 놀이를 하던 소녀는 손에 든, 모래밭에서 주워 온 조가비를 엄마에게 보여줍니다. 다음 장면에서 이 가족은 빨간 트럭을 타고 바닷가를 떠나 농부들이 농장에서 수확한 작물들을 매매하는 시장에 들릅니다. 그 후 남매들은 큰 나무를 타고 올라가고, 호숫가에서 놀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해 따뜻한 식당으로 들어가고, 노을을 보며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난롯불 옆에 모입니다. 어두움이 몰려오고 온 세상이 고요히 잠들어갈 때 따뜻하고 밝은 방에 모인 가족들은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고 대화하며 하루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즐깁니다.
마지막 세 화면에 걸쳐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는 모든 것 그 모든 것이 세상이지요. 모든 것이 너와 나, 우리랍니다. 희망과 평화와 사랑과 믿음” 바닷가 사람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감각적인 즐거움을 그려내었던 시인은 이제 “희망과 평화와 사랑과 신뢰”라는, 추상적인 단어로 그가 꿈꾸고 있는 세상의 비전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세상은 우리 모두에요.”(All the world is all of us)라는 시구와 함께 끝납니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는 앞서 보았던 소녀가 잠옷 차림으로 홀로 등장하여 두 손을 모으고 그 안의 무언가를 바라봅니다. 여기에서 독자의 시선 역시 소녀가 응시하고 있는 것을 따라가게 됩니다. 주의 깊은 독자라면 그것이 소녀가 모래밭에서 주워 온 소라 껍데기라는 것을 눈치챌 것입니다. 그 소라 껍데기는 사실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전, 표제지에도 그려져 있었고 온 가족이 모여 있는 방에서 사촌 언니와 놀고 있던 소녀의 무릎 옆 바닥에도 놓여 있었지요.
표제지로부터 시작하여 본문과 뒤표지까지 반복되어 등장하는 소라 껍데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세상은 우리 모두에요.”(All the world is all of us)“라는 시어에 함축되어 있겠지요. 일반적으로 이 시구는 세상의 모든 것들, 즉 인간으로부터 소라 껍데기 같이 작은 사물에 이르기까지, 우주 안의 모든 존재가 하나됨(oneness)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식으로 해석되곤 합니다. 그러나 만일 작가가 우리가 오감을 통해 지각할 수 있는 세상 모든 것들이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한 목소리로 찬양하고 있음을 의도한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다면 이 작품은 루이스가 말한, 감각적 즐거움과 심미적 즐거움이 분리될 수 없음을 드러내는 완벽한 예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도 “하늘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고 궁창이 그분의 손으로 행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서 지식을 보이니 그것들의 음성이 들리지 않은 말이나 언어가 없도다.”(KJV 시편 19: 1-3)라고 노래하였으니까요.
우리가 노력을 기울인다면 그림책은 감각적 즐거움 이상의 즐거움을 다채로운 방식으로 선사하는 통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엄마, 잠깐만』으로 번역된 앙트아네트 포티스의 『Wait』는 출근길의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전철역으로 향하는 모습을 그린 책입니다. 이 작품에서 사용된 단어는 오직 “Wait”와 “Hurry” 뿐입니다. “Wait” 은 아이의 것이고 “Hurry”는 엄마의 언어입니다. 출근길 엄마의 가방 밖으로는 우산과 아이의 우비가 엿보입니다. 엄마는 연신 손목 시계를 쳐다보면서 전차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서두르는데 아이는 주위의 온갖 것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애완견, 공사판의 아저씨, 호숫가에서 오리들에게 먹이를 주는 아저씨, 아이스크림 차의 광고판, 수족관의 물고기, 풀숲에 숨어있는 나비 등... 한눈을 파는 아이의 손은 길을 재촉하는 엄마의 손에 잡혀 있습니다. 결국 하나 둘 빗방울이 떨어지고, 엄마는 아이에게 우비를 입히고 전철 승강장 쪽으로 급히 올라갑니다. 그런데 전철 안으로 들어가려는 엄마의 코트 자락을 아이가 잡아당기고, 엄마는 뒤를 돌아봅니다. 기차는 떠나고 엄마와 아이는 도시의 하늘을 가로지른 쌍무지개를 바라봅니다. 처음으로 클로즈업된 엄마의 입에서는 “Hurry” 대신 “Yes, wait”라는 감탄사가 흘러 나옵니다.
맷 데 라 페냐가 글을 쓰고 크리스티안 로빈슨이 그린 『행복을 나르는 버스』는 2016년에 뉴베리상과 칼데콧 명예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글 작가는 기독인이던가 아니면 기독신앙에 우호적인 인물로 여겨집니다. 시제이라는 남자아이가 할머니와 예배를 마치고 교회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과 할머니의 언어에 사랑과 희락, 그리고 온유함이 배어 있는 것도 그 증거가 될 수 있겠지요. 두 사람은 무료 급식소로 향하는 길에서 많은 대화를 나눕니다. 할머니는 버스 안에서 만난 시각 장애인과 기타 연주자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고 그 대화에 시제이도 참여시킵니다. 지저분한 도시 거리를 지나며 불평하는 시제이에게 할머니는 하늘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합니다. “시제이, 저길 보렴. 아름다운 것은 어디에나 있단다. 늘 무심코 지나치다 보니 알아보지 못할 뿐이야.” 건물 위로 둥글게 솟아오른 무지개를 보면서 시제이는 할머니는 생각도 못한 곳에서 항상 아름다운 것을 찾아낸다고 신기해 합니다.
마이클 베다드가 글을 쓰고 바바라 쿠니가 그림을 그린 『에밀리』는 신비한 여성 에밀리와 그가 사는 마을로 이사온 가족의 이야기에 바바라 쿠니의 서정적인 그림이 더해진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19세기에 영국에 실존했던 여류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실제 삶에 허구적인 요소를 덧붙인 이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는 에밀리가 어머니와 함께 그 집을 방문한 이웃집 소녀에게 전해 준 시를 소개합니다. “지상에서 천국을 찾지 못한 자는 하늘에서도 천국을 찾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든 간에, 천사들이 우리 옆집을 빌리기 때문이다.”
루이스가 주장했듯이 만일 우리가 주변의 작은 일에서부터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외하는 습관을 기르지 못한다면 큰일에서도 그분을 경외하지 못할 것입니다. 시편 기자도 “주께서 선하신 것을 맛보아 알지어다”(taste and see that the Lord is good)(KJV 시편 34:8)라고 노래하지 않았던가요. 작가가 기독인이건 아니건 그림책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수 있는 이야기와 언어가 풍성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글과 그림에 주의 집중을 하지 않거나, 그것을 그저 감각적 즐거움으로 축소해 버리거나, 마음이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을지 모릅니다.
(1) 『개인 기도』 홍성사. p. 135.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후 Eastern Michigan University 에서 석사,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어린이문학교육학회 회장 및 한국 기독교 유아교 육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아동 청소년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대학 부설 생활과 학 연구소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기독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이해>(공저), <그림책과 예술교육>(공저>, <그림책으로 보는 아동과 우리사회>(공저), <100권의 그림책>(공저) 등 그림책 관련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