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의 세계관
왜 『아름다운 책』일까?
31
18
twinkleLee 민옥2025-01-20 14:27
눈알 굴리기 하며 교수님 서평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토끼들이 본 책이 글 없는, 그림만 있는 책이었다는 부분에 놀라웠습니다.
그림책의 그림은 본다고 하기 보다는 읽는다고 하니 하나님의 말씀 비유는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림책을 꼼꼼하게 읽기의 방법과 재미를 보여 주는 서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필요의 즐거움과 감상의 즐거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서평도 필요의 즐거움과 감상의 즐거움이 혼재되어야 좋은 서평이 되겠다 싶습니다.
그러려면 전반적인 배경지식에 대한 많은 공부가 필요하겠습니다.
당근이 없을 때는 책을 읽을 여유가 없었지만 당근이 확보가 되니 여유가 들어오는지도 모를 만큼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하루종일 당근 캐러 나가지 않아도 되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를 주심에 감사하게 됩니다.
토끼들이 본 책이 글 없는, 그림만 있는 책이었다는 부분에 놀라웠습니다.
그림책의 그림은 본다고 하기 보다는 읽는다고 하니 하나님의 말씀 비유는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림책을 꼼꼼하게 읽기의 방법과 재미를 보여 주는 서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필요의 즐거움과 감상의 즐거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서평도 필요의 즐거움과 감상의 즐거움이 혼재되어야 좋은 서평이 되겠다 싶습니다.
그러려면 전반적인 배경지식에 대한 많은 공부가 필요하겠습니다.
당근이 없을 때는 책을 읽을 여유가 없었지만 당근이 확보가 되니 여유가 들어오는지도 모를 만큼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하루종일 당근 캐러 나가지 않아도 되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를 주심에 감사하게 됩니다.
yumi2025-01-20 18:46
책을 읽을 때에 사실로만 바라보기 보다는 감정 이입을 하면서 읽을 때가 많습니다.
진짜 있었던 이야기도 그 내용이 감정 이입이 되어 버리면 그 이야기에서 빠져 나오기 힘들기도 합니다.
에르네스트와 빅토르는 책을 참 재밌고 즐겁게 읽습니다. 대화를 하면서 읽는 방법이
지금 나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장면들 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상을 통해서 감상의 즐거움을 느끼고 감상의 즐거움은 감각이 만족 되었다는
느낌 이상의 우리에게 준다는 그 말이 참 와 닿았습니다.
당근은 책상에서 모서리에 덩그러니 있습니다.
책에 빠져있다 보니 당근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입니다.
생리적 욕구나 안전의 욕구보다 자아 실현의 욕구가 우선 이었던 상황으로 보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온종일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자아 실현의 욕구가 채워 지길 바래봅니다.
진짜 있었던 이야기도 그 내용이 감정 이입이 되어 버리면 그 이야기에서 빠져 나오기 힘들기도 합니다.
에르네스트와 빅토르는 책을 참 재밌고 즐겁게 읽습니다. 대화를 하면서 읽는 방법이
지금 나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장면들 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상을 통해서 감상의 즐거움을 느끼고 감상의 즐거움은 감각이 만족 되었다는
느낌 이상의 우리에게 준다는 그 말이 참 와 닿았습니다.
당근은 책상에서 모서리에 덩그러니 있습니다.
책에 빠져있다 보니 당근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입니다.
생리적 욕구나 안전의 욕구보다 자아 실현의 욕구가 우선 이었던 상황으로 보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온종일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자아 실현의 욕구가 채워 지길 바래봅니다.
정민2025-01-20 23:07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제목이 왜 아름다운 책일까? 생각하며, 제목을 마케팅에 유용하게 국내용으로 바꾸는 번역자의?(아님 편집자의?) 마음이겠거니 ~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데, 교수님 서평을 읽으며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의도 된 제목일까, 다시 한번 생각하며 "예수, 아름다우신- 영원한 통치자 ~" 찬양이 떠올랐는데요, 찬양을 하면서도
"아름다운 예수"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 궁금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
교수님의 글에서 "즐거움"이란 무엇일까, 라고 물으셨을 때, C.S 루이스의 즐거움의 구분에 대해 바로 말씀해 주셨지만서도,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이라, "즐거움"을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림책 세계관 글들을 접하면서, 전혀 생각지 못한 것들을 발견하고, 그림책을 꼼꼼히 보는 습관이 생기면서,
뭔가 좀 더 내 안에 더 많은 것들이 채워져 있어야 더 많이 보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더 많은 독서가 필요하다는 결론입니다.
에르네스트와 빅토르가 구할 쓸모 있는 책을(아름다운 책을,,)
저도 구해봐야겠습니다.
껍데기가 딱딱하진 않아도 속에 (세계관 분별을 위한) 필요의 즐거움으로 가득한 책으로 말이죠.
근데, 교수님 서평을 읽으며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의도 된 제목일까, 다시 한번 생각하며 "예수, 아름다우신- 영원한 통치자 ~" 찬양이 떠올랐는데요, 찬양을 하면서도
"아름다운 예수"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 궁금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
교수님의 글에서 "즐거움"이란 무엇일까, 라고 물으셨을 때, C.S 루이스의 즐거움의 구분에 대해 바로 말씀해 주셨지만서도,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이라, "즐거움"을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림책 세계관 글들을 접하면서, 전혀 생각지 못한 것들을 발견하고, 그림책을 꼼꼼히 보는 습관이 생기면서,
뭔가 좀 더 내 안에 더 많은 것들이 채워져 있어야 더 많이 보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더 많은 독서가 필요하다는 결론입니다.
에르네스트와 빅토르가 구할 쓸모 있는 책을(아름다운 책을,,)
저도 구해봐야겠습니다.
껍데기가 딱딱하진 않아도 속에 (세계관 분별을 위한) 필요의 즐거움으로 가득한 책으로 말이죠.
백효진2025-01-21 00:25
아이들과 함께 가볍게 읽어버렸던(!) 책을 다시 찾아 옆에 두고 교수님의 서평과 함께 읽다보니 이렇게 재미있는 책의 요소요소들을 몰라줬다는 생각에 그림책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르네스트가 빅토르에게 책을 읽는 방법을 알려주고 현실감각을 놓치지 않도록 지도하는 모습이 꼭 첫째가 막내에게 책을 읽어주는 모습같아서 웃음이 났습니다.
에르네스트와 빅토르가 되어 책속의 책으로 들어갈 때, 서사가 이어진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책이, 특히나 그림책이 저의 필요의 즐거움과 감상의 즐거움을 만족시키는 것처럼 허나님의 말씀 또한 그러하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에르네스트와 빅토르가 되어 책속의 책으로 들어갈 때, 서사가 이어진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책이, 특히나 그림책이 저의 필요의 즐거움과 감상의 즐거움을 만족시키는 것처럼 허나님의 말씀 또한 그러하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yunkyung2025-01-21 01:05
교수님의 평론을 읽고 난 후 ‘왜 <아름다운 책>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했을까?’에 대한 궁금증을 안고 다시 그림책을 펼쳐보았습니다. 그림과 텍스트를 촘촘히 읽다보니 책을 대하는 에르네스트의 태도의 변화가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책을 읽기 전 책에 대해 간략하게 정의했던 에르네스트는 책을 읽은 경험과 책을 도구로 사용했던 경험을 통해 책은 ‘즐겁다’, '유용하다'의 의미를 더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만난 에르네스트와 빅토르는 책 덕분에 위기를 벗어나게 되고 책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며 더욱 짜릿한 순간이었으리라 짐작해봅니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제목에 ‘아름다운, 유용한, 멋진, 훌륭한...’의 의미로 사용되는 ‘beau’라는 단어를 통해 책의 여러 면모를 함축적으로 표현하려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번역자가 원제인 'Un beau livre'에서 'beau'가 가진 여러 의미 중에 ‘아름다운’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하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필요의 즐거움과 감상의 즐거움을 모두 느낀 에르네스트의 입에서 터져 나왔을 법한 ‘얼마나 아름다운 책인가!’라는 감탄의 의미로써 <아름다운 책> 이라는 번역이 의미있게 다가왔습니다.
책을 읽기 전 책에 대해 간략하게 정의했던 에르네스트는 책을 읽은 경험과 책을 도구로 사용했던 경험을 통해 책은 ‘즐겁다’, '유용하다'의 의미를 더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만난 에르네스트와 빅토르는 책 덕분에 위기를 벗어나게 되고 책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며 더욱 짜릿한 순간이었으리라 짐작해봅니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제목에 ‘아름다운, 유용한, 멋진, 훌륭한...’의 의미로 사용되는 ‘beau’라는 단어를 통해 책의 여러 면모를 함축적으로 표현하려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번역자가 원제인 'Un beau livre'에서 'beau'가 가진 여러 의미 중에 ‘아름다운’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하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필요의 즐거움과 감상의 즐거움을 모두 느낀 에르네스트의 입에서 터져 나왔을 법한 ‘얼마나 아름다운 책인가!’라는 감탄의 의미로써 <아름다운 책> 이라는 번역이 의미있게 다가왔습니다.
옥희진2025-01-21 07:28
_
형제가 책을 읽으며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책의 본질을 쉽게 풀어내는 방식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그래, 눈알 굴리기 운동으론 최고지”나 “…믿는 척하면서 재미있어하는 것은 돼?” 같은 생생하고 재미있는 어투가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듯 느껴져서 생생했습니다.
_
반면에, “봤지? 책은 정말 쓸모 있는 거야.” “맞아, 빨리 또 하나 구해 와야겠어.”라는 부분에서는,
작가가 독자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치 은연중에 "책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메시지를 주입하려는 것처럼 느껴져서 아쉬움이 있습니다.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충분히 이해는 되지만,
독자가 이를 텍스트를 통해 직접 느끼기보다는 스스로 경험하고 발견할 수 있도록 여유를 남겨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_
‘아름답다’를 저는 그동안, 그저 멋지다!는 뜻으로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네이버에서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1. 보이는 대상이나 음향, 목소리 따위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눈과 귀에 즐거움과 만족을 줄 만하다.
2. 하는 일이나 마음씨 따위가 훌륭하고 갸륵한 데가 있다.
3. 즐거움과 기쁨을 줄 만큼 예쁘고 곱다.
4. 감탄을 느끼게 하거나 감동을 줄 만큼 훌륭하고 갸륵하다.
책이 눈과 귀에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형제를 살려준 책이라서
아름답다 : 갸륵하다(착하고 장하다)_고 표현한 것일까요?
형제가 책을 읽으며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책의 본질을 쉽게 풀어내는 방식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그래, 눈알 굴리기 운동으론 최고지”나 “…믿는 척하면서 재미있어하는 것은 돼?” 같은 생생하고 재미있는 어투가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듯 느껴져서 생생했습니다.
_
반면에, “봤지? 책은 정말 쓸모 있는 거야.” “맞아, 빨리 또 하나 구해 와야겠어.”라는 부분에서는,
작가가 독자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치 은연중에 "책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메시지를 주입하려는 것처럼 느껴져서 아쉬움이 있습니다.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충분히 이해는 되지만,
독자가 이를 텍스트를 통해 직접 느끼기보다는 스스로 경험하고 발견할 수 있도록 여유를 남겨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_
‘아름답다’를 저는 그동안, 그저 멋지다!는 뜻으로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네이버에서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1. 보이는 대상이나 음향, 목소리 따위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눈과 귀에 즐거움과 만족을 줄 만하다.
2. 하는 일이나 마음씨 따위가 훌륭하고 갸륵한 데가 있다.
3. 즐거움과 기쁨을 줄 만큼 예쁘고 곱다.
4. 감탄을 느끼게 하거나 감동을 줄 만큼 훌륭하고 갸륵하다.
책이 눈과 귀에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형제를 살려준 책이라서
아름답다 : 갸륵하다(착하고 장하다)_고 표현한 것일까요?
김주연2025-07-04 15:56
클로드 부종의 이 책은, 제가 2학년을 대상으로 "책 읽는 태도 배우기"라는 수업을 할때 쓰는 교재입니다. 형 에르네스토가 동생 빅토르에게 해주는 말들이, 다 제가 아이들에게 책을 읽을 때 가져야 하는 태도들-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근이 나오는건 저도 알고 있었지만, 당근이 언제, 얼마나 나오는지, 그리고 위치가 중심부에서 가장자리로 밀려나는지는 전혀 인지를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부분을 보면, 확실히 토끼형제가 먹는것(자신들이 힘들게 구해온 것들)을 마다하고 책에 흠뻑 빠졌나봅니다.
내용도, 그림도, 담고 있는 가치들도 너무나도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습니다.
당근이 나오는건 저도 알고 있었지만, 당근이 언제, 얼마나 나오는지, 그리고 위치가 중심부에서 가장자리로 밀려나는지는 전혀 인지를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부분을 보면, 확실히 토끼형제가 먹는것(자신들이 힘들게 구해온 것들)을 마다하고 책에 흠뻑 빠졌나봅니다.
내용도, 그림도, 담고 있는 가치들도 너무나도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습니다.
윤진희2025-07-06 22:49
왜 아름다운 책일까? 평론 글의 제목을 보고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언뜻 보기에 책 제목이 내용이랑 상관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아름다운이라는 말의 의미를 좀 더 확장해 본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책이 토끼 형제에게 준 유익은 그저 지식을 전달 함에서 그치지 않고 재미와 감동, 생명을 구해주기까지 합니다. 이런 점에서 토끼 형제에게 책은 아름다운 물건이었을 것 같습니다.
책을 보며 느낀 점
1. 에른네스트와 빅토르가 책을 보며 했던 대화는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책을 읽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책은 읽기도 하고 보기도 하는 것, 대리 만족을 하기도 현실을 직시하게도 하는 것, 비판적인 사고도 필요하지만 허구가 주는 즐거움을 있는 그대로 즐길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
2. 당근을 유의해서 보니 더 보는 재미가 있는 책이었습니다. 레오 리오니의 <프레드릭>이라는 책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삶에서 필요한 것은 먹을 양식만이 아닌 마음의 양식도 필요하다는 것
책을 보며 느낀 점
1. 에른네스트와 빅토르가 책을 보며 했던 대화는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책을 읽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책은 읽기도 하고 보기도 하는 것, 대리 만족을 하기도 현실을 직시하게도 하는 것, 비판적인 사고도 필요하지만 허구가 주는 즐거움을 있는 그대로 즐길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
2. 당근을 유의해서 보니 더 보는 재미가 있는 책이었습니다. 레오 리오니의 <프레드릭>이라는 책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삶에서 필요한 것은 먹을 양식만이 아닌 마음의 양식도 필요하다는 것
김은수2025-07-07 16:14
교수님의 평론을 통해 제 안의 '얼어붙어 있던 바다가 깨지는' 경험을 하고 있지만, 이번 평론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미 익히 알고 있던 그림책이었음에도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들까지 '촘촘히' 읽어주시니, 지금까지 나의 그림책 읽기는 수박 겉 핥기에 불과했구나 싶습니다. 그래서 바라게 됩니다. 수박의 껍질만 핥는 것에서 벗어나 수박을 쪼개어 그 빨간 속살을 한 입 크게 베어 물며 시원한 단맛을 만끽하고 싶다고요. 때로는 혀에서 걸리는 씨앗들을 뱉어내면서 말이지요.
『아름다운 책』 의 원제 Un beau livre 에 대한 설명을 읽으니, 교수님께서 원서와 번역서를 함께 놓고 읽을 필요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생각나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즐거움에 관한 부분에서 인용된 C.S.루이스의 『네 가지 사랑』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구요.
아름다운 책을 보며 개인적으로 읽어낸(?) 부분들 몇 가지를 덧붙여봅니다.
1. 등장인물을 부모-자녀 관계가 아닌 형제로 설정함으로써 책에 대한 가르침(?)을 어린이들의 눈높이에서 풀어갈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만약 아빠나 엄마토끼가 아이토끼에게 "책은 조심해서 다루는 거야!" 라거나 "나라면 그렇게 마음을 놓지 않겠어."라고 이야기했다면 에르네스트와 빅토르 사이의 대화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되었을 듯합니다. 저희 아이들(오빠와 여동생)을 보더라도 둘째 아이가 아빠, 엄마의 설명보다 오빠의 설명을 더 단박에 잘, 그리고 재미있게 이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빅토르에게 있어 에르네스트와 책 보기의 경험은 그러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어린이 독자에게 보다 친근하게 와닿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2. 토끼가 무시무시한 초록용을 떄려 눕힌 장면에서 '둘은, 넋을 잃고 쳐다보았습니다' 라는 이야기가 덧붙여집니다. 이 장면에서부터 에르네스트도 책 읽기에 완전히 몰입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전 장면까지 에르네스트는 빅토르에게 한 치의 말미도 없이 '책은 조심해서 다루는 것이며 마음을 놓지 않고 현실을 잊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책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있는 느낌이랄까요. 그런데 이 장면을 기점으로 책에 대한 자신의 시각(?)은 유지하지만 이제는 책 속으로 풍덩 뛰어 들어간 것처럼 보입니다. 다음 장면에서 에르네스트와 빅토르의 책 읽는 자세도 바뀌어 있거든요. '둘은 꼭 붙어 앚아 다시 책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3. '둘은 꼭 붙어 앉아 다시 책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우측 하단에 놓여진 한 무더기의 당근이 보입니다. 이 당근들은 원래 에르네스트와 빅토르의 집 한 편에 쌓여있었던 것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작가가 이 장면에 한 무더기의 당근을 배치한 것은 에르네스트와 빅토르가 보고 있던 그림책 속 한 장면을 생각나게 합니다. 여우가 싱싱한 당근 한 자루를 토끼들 앞에 쏟아 놓는 그 장면이요. 이후에 여우가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복선으로, 독자들에게 힌트를 준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책』 의 원제 Un beau livre 에 대한 설명을 읽으니, 교수님께서 원서와 번역서를 함께 놓고 읽을 필요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생각나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즐거움에 관한 부분에서 인용된 C.S.루이스의 『네 가지 사랑』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구요.
아름다운 책을 보며 개인적으로 읽어낸(?) 부분들 몇 가지를 덧붙여봅니다.
1. 등장인물을 부모-자녀 관계가 아닌 형제로 설정함으로써 책에 대한 가르침(?)을 어린이들의 눈높이에서 풀어갈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만약 아빠나 엄마토끼가 아이토끼에게 "책은 조심해서 다루는 거야!" 라거나 "나라면 그렇게 마음을 놓지 않겠어."라고 이야기했다면 에르네스트와 빅토르 사이의 대화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되었을 듯합니다. 저희 아이들(오빠와 여동생)을 보더라도 둘째 아이가 아빠, 엄마의 설명보다 오빠의 설명을 더 단박에 잘, 그리고 재미있게 이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빅토르에게 있어 에르네스트와 책 보기의 경험은 그러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어린이 독자에게 보다 친근하게 와닿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2. 토끼가 무시무시한 초록용을 떄려 눕힌 장면에서 '둘은, 넋을 잃고 쳐다보았습니다' 라는 이야기가 덧붙여집니다. 이 장면에서부터 에르네스트도 책 읽기에 완전히 몰입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전 장면까지 에르네스트는 빅토르에게 한 치의 말미도 없이 '책은 조심해서 다루는 것이며 마음을 놓지 않고 현실을 잊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책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있는 느낌이랄까요. 그런데 이 장면을 기점으로 책에 대한 자신의 시각(?)은 유지하지만 이제는 책 속으로 풍덩 뛰어 들어간 것처럼 보입니다. 다음 장면에서 에르네스트와 빅토르의 책 읽는 자세도 바뀌어 있거든요. '둘은 꼭 붙어 앚아 다시 책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3. '둘은 꼭 붙어 앉아 다시 책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우측 하단에 놓여진 한 무더기의 당근이 보입니다. 이 당근들은 원래 에르네스트와 빅토르의 집 한 편에 쌓여있었던 것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작가가 이 장면에 한 무더기의 당근을 배치한 것은 에르네스트와 빅토르가 보고 있던 그림책 속 한 장면을 생각나게 합니다. 여우가 싱싱한 당근 한 자루를 토끼들 앞에 쏟아 놓는 그 장면이요. 이후에 여우가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복선으로, 독자들에게 힌트를 준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이정아2025-07-07 18:06
어렸을 적 초등학교 국어시간에 6하원칙을 배운다.
초등학교에서 배운 왜? 도대체 왜? 가 여기서 또 나온다.
왜 아름다울까?
왜 책은 아름다울까?
왜 저자는 당근이 아니라 책에 더 많은 힘을 주지?
왜 에른네스트는 책을 가져왔을까?
왜, 왜, 왜?
그래서 어떻게하라고? 어떻게 적용할 건데?
어떻게와 실용적인 것에 더 힘을 주고 있는 이 세상에서 왜? 가 가진 질문은 늘 근원적인 것에 관심을 갖게 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간음한 여인이 붙잡혀 온 뒤 예수님은 그 여자를 율법으로 처벌하려 돌을 든 자들을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한 마디로 정리한다.
예수님은 율법을 적용하려 어떻게 해야지 마음 먹은 유대인들의 대척점에서 어떻게 처벌할 지에 대한 답보다
율법이 가진 가치 "왜" 에 질문을 던진다. 왜 율법이 있지?
또 다시 왜에 관심을 갖게 한다.
초등학교에서 배운 왜? 도대체 왜? 가 여기서 또 나온다.
왜 아름다울까?
왜 책은 아름다울까?
왜 저자는 당근이 아니라 책에 더 많은 힘을 주지?
왜 에른네스트는 책을 가져왔을까?
왜, 왜, 왜?
그래서 어떻게하라고? 어떻게 적용할 건데?
어떻게와 실용적인 것에 더 힘을 주고 있는 이 세상에서 왜? 가 가진 질문은 늘 근원적인 것에 관심을 갖게 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간음한 여인이 붙잡혀 온 뒤 예수님은 그 여자를 율법으로 처벌하려 돌을 든 자들을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한 마디로 정리한다.
예수님은 율법을 적용하려 어떻게 해야지 마음 먹은 유대인들의 대척점에서 어떻게 처벌할 지에 대한 답보다
율법이 가진 가치 "왜" 에 질문을 던진다. 왜 율법이 있지?
또 다시 왜에 관심을 갖게 한다.
이영진2025-07-07 21:42
'문송합니다'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문과라서 죄송하다'라는 뜻인데요. 기술사회인 현대사회에서 문과생으로 살아남는 것의 어려움이 드러나는 말입니다. 이야기가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왜 이야기가 필요할까요? 아마도 <아름다운 책> 에서 그 이유를 말해주고 있는 듯 합니다. 이야기는 우리에게 감상의 즐거움과 상상력, 나를 넘어 다른 사람들과의 공감을 통한 연결됨을 느낄 수 있도록 합니다. 또한 실제적인 지식도 쌓을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하구요.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이야기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더불어서 교수님과 위의 다른 선생님들이 말씀해주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약속을 주시는 것도 '말'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말과 이야기'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이 있구요. 말과 이야기의 중요성을 <아름다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네요.
오늘은 문과생으로 어깨 좀 펴고 자야겠습니다.!^^
더불어서 교수님과 위의 다른 선생님들이 말씀해주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약속을 주시는 것도 '말'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말과 이야기'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이 있구요. 말과 이야기의 중요성을 <아름다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네요.
오늘은 문과생으로 어깨 좀 펴고 자야겠습니다.!^^
고진슬2025-07-07 23:30
어릴 적 자주 불렀던 어린이 찬양 가사 중에 하나가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네. 구세주의 사랑 이야기.'였습니다.
성경에 담긴 이야기,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곧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뜻이겠지요.
평론을 읽으면서 왜 성경을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했을지 다시 한번 그 가사를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필요의 즐거움과 감상의 즐거움에 대해 각자가 생각하는 '필요'와 '감상'의 우선순위, 기준을 이야기 나누어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합니다.
오늘날 그림책 동네는 필요의 즐거움에서 소위 말하는 교육적 필요만 너무 강조하지 않는지,
감상의 즐거움을 추구한다면 그 '감상'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안에 있는 것인지도 궁금해집니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네. 구세주의 사랑 이야기.'였습니다.
성경에 담긴 이야기,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곧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뜻이겠지요.
평론을 읽으면서 왜 성경을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했을지 다시 한번 그 가사를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필요의 즐거움과 감상의 즐거움에 대해 각자가 생각하는 '필요'와 '감상'의 우선순위, 기준을 이야기 나누어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합니다.
오늘날 그림책 동네는 필요의 즐거움에서 소위 말하는 교육적 필요만 너무 강조하지 않는지,
감상의 즐거움을 추구한다면 그 '감상'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안에 있는 것인지도 궁금해집니다.
박유정2025-07-08 01:39
우선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몰입해서 보았습니다. 책을 나란히 읽고 있는 두 형제의 모습에서 책 속으로 들어간 듯이 보이는 시점의 변화가 재미있었고, 순수하게 상상력을 동원하고 있는 동생 빅토르와 현실적 관점으로 책을 대하다가 책 속에 빠져드는 형 에르네스트의 변화가 재미있었습니다. 두 형제가 읽고 있는 책 속에서 여우가 당근을 쏟아 놓는 장면이 어쩌면 실제로 여우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또 "나라면 그렇게 마음을 놓지 않겠어.."라고 말했던 에르네스트가 책을 읽어갈수록 현실에서 여우가 자신들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재미있는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변화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아름답고 쓸모 있는 책으로 실제 여우를 물리쳤다는 마지막 해피엔딩이 책의 제목에 대해 어느 정도 수긍하게 합니다. C.S루이스의 <네 가지 사랑>에서 나오는 '필요의 즐거움'과 '감상의 즐거움'의 혼재로 책의 제목에 대해 평론하신 관점이 신선하게 여겨졌습니다.
김현경2025-07-08 07:19
교수님의 여러 평론 글들 중에서 저는 특히 이 글이 참 좋습니다. ^^
특히, 에르네스트와 빅토르 형제의 대화 중에서 "믿는 척하면서 재미있어 하는 것은 돼?"라고 빅토르가 형에게 묻는 질문을 보면서 저는 유아의 놀이가 생각났습니다. 1세반 유아들을 보면 이미 유아들은 진짜가 아닌 것을 알지만 ~인 척 가장하는 놀이를 즐깁니다. 아이들은 소꿉 장난감으로 제게 주스나 커피를 만들어 주기도 하고요, 아기 인형을 포대기로 업어 재우기도 합니다.
마치 가상놀이를 하듯, 책 읽기는 우리에게 놀이와 같은 경험을 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가상놀이를 통해 사람들은 즐거움도 느끼지만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꿈을 이루기도 하고 대리 만족을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에르네스트와 빅토르가 책에 점점 빠져드는 모습은 단순한 즐거움 이상의 것으로 느껴지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영화 <아바타>에서 남자 주인공이 현실에서는 다리를 다쳐 휠체어를 타고 있지만, 가상 현실에 접속했을 때는 두 다리를 갖고 뛰어다니며 환희를 느낍니다. 그야말로 '가상 현실'을 현실보다 더 사랑하게 되지요.
그러한 면에서 우리가 책을 읽으며 즐거움을 누리고 여러 유익을 얻을 수는 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책에 빠져들어(상상 속에만 빠져들어) 현실을 외면하고 상상의 세계 속에서만 만족을 누리지 않도록 깨어 있는 것도 필요하겠습니다. 루이스가 언급한 즐거움 중, 필요의 즐거움과 감상의 즐거움이 우리에겐 모두 있고 또 필요한 것이겠지요.
특히, 에르네스트와 빅토르 형제의 대화 중에서 "믿는 척하면서 재미있어 하는 것은 돼?"라고 빅토르가 형에게 묻는 질문을 보면서 저는 유아의 놀이가 생각났습니다. 1세반 유아들을 보면 이미 유아들은 진짜가 아닌 것을 알지만 ~인 척 가장하는 놀이를 즐깁니다. 아이들은 소꿉 장난감으로 제게 주스나 커피를 만들어 주기도 하고요, 아기 인형을 포대기로 업어 재우기도 합니다.
마치 가상놀이를 하듯, 책 읽기는 우리에게 놀이와 같은 경험을 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가상놀이를 통해 사람들은 즐거움도 느끼지만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꿈을 이루기도 하고 대리 만족을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에르네스트와 빅토르가 책에 점점 빠져드는 모습은 단순한 즐거움 이상의 것으로 느껴지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영화 <아바타>에서 남자 주인공이 현실에서는 다리를 다쳐 휠체어를 타고 있지만, 가상 현실에 접속했을 때는 두 다리를 갖고 뛰어다니며 환희를 느낍니다. 그야말로 '가상 현실'을 현실보다 더 사랑하게 되지요.
그러한 면에서 우리가 책을 읽으며 즐거움을 누리고 여러 유익을 얻을 수는 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책에 빠져들어(상상 속에만 빠져들어) 현실을 외면하고 상상의 세계 속에서만 만족을 누리지 않도록 깨어 있는 것도 필요하겠습니다. 루이스가 언급한 즐거움 중, 필요의 즐거움과 감상의 즐거움이 우리에겐 모두 있고 또 필요한 것이겠지요.
우승린2025-07-08 17:15
그림책의 문외한이 들어와 계속 감탄합니다. 이렇게 분석을 할 수도 있구나.
이 다층적이고 숨겨진 관점들에 너무 매료됩니다.
두 형제가 지식이 지혜가 되는(물리적으로도요) 경험을 한 것 같아 성장하고 자라게 하는 그 책은, 분명 아름답게 하는 아름다운 책인 듯 합니다.
이 다층적이고 숨겨진 관점들에 너무 매료됩니다.
두 형제가 지식이 지혜가 되는(물리적으로도요) 경험을 한 것 같아 성장하고 자라게 하는 그 책은, 분명 아름답게 하는 아름다운 책인 듯 합니다.
왜 『아름다운 책』일까?
<아름다운 책> 자세히보기
클로드 부종의 『아름다운 책』에는 그림책을 읽는 두 마리의 토끼 형제가 등장합니다. 형의 이름은 ‘에르네스트’, 동생의 이름은 ‘빅토르’입니다. 형이 어디에선가 책을 발견하고 집으로 가져오자 동생인 빅토르가 달려듭니다. 그러자 형이 “안돼 손 치워! 책은 조심해서 다루는 거야!”라고 주의를 줍니다. 동생이 “그게 뭐 하는 건데?” 라고 묻자 에르네스트는 “책은 읽는 거야. 글씨를 읽을 줄 모르면 그림을 보는 거고... 자, 형이랑 같이 한번 볼래?”라고 다정스레 권합니다. 에르네스트는 이미 글을 읽을 줄 아는데다가 그림책이 어떤 책인지도 파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책은 “읽는” 것이라고 했다가 글자를 모르는 동생을 위해 얼른 책을 “보자”고 바꾸어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형이 가져온 책은 글없는 그림책이었거든요.
『아름다운 책』은 판형도 크고 등장인물인 토끼 두 마리의 윤곽선도 굵고 시원하며 배경도 단순하고 글밥도 많지 않아 빅토르처럼 아직 글을 익히지 못한 유아들에게 강추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게다가 힘없는 토끼 형제가 자신들을 잡아먹으려던 여우를 책으로 물리쳤다는 통쾌한 해피엔딩 스토리는 어린 독자들에게 만족감을 선사하게 되지요. 그런데 이 책에는 놓치기 아까운, 매우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가 몇 가지 있습니다. 제일 먼저, 시점의 변화입니다. 서두에서 독자들은 토끼 형제가 책을 보는 모습을 앞에서 보다가, 몇 장을 넘기면 그들과 같은 시점을 공유하게 됩니다. 즉, 토끼 형제들이 보고 있는 그림책을 우리도 보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시점은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는 것을 도와줍니다. 그 다음의 근거리 시점을 통해 우리는 주인공이 점점 더 책에 몰입해 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서두에서는 형이 왼팔로 동생의 어깨를 감싼 자세로 옆으로 나란히 앉아 책을 보다가, 몇 장면 지나지 않아 동생은 형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 몸을 구부려 책을 보고 있습니다. 마치 둘이 혼연일체가 되어 책 속에 빠져들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의 관전 포인트는 문법적 형태는 단순해 보이지만 다층적 의미를 담고 있는 글텍스트입니다. 즐겁게 구슬치기를 하는 책 속의 토끼들을 보고 빅토르가 부러워하자 에르네스트가 “그래, 눈알 굴리기 운동으론 최고지”라고 대꾸합니다. 그런데 지금 책을 보고 있는 토끼 형제나 독자인 우리들도 눈알 굴리기 운동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눈알을 굴리면서요. 또한 그들의 대화는 픽션을 대하는 두 종류의 읽기 태도를 보여줍니다. 책 속의 여우가 토끼들 앞에서 당근을 한 보따리 가져와 쏟아 보이자 빅토르는 여우를 대신해서 “토끼 여러분, 맛있게 드세요!”라고 소리 지릅니다. 토끼들에게는 매우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지요. 그러자 형은 기뻐하는 동생에게 “흠, 나라면 그렇게 마음을 놓지 않겠어. 어떤 일이 있어도, 토끼는 여우한테서 도망을 쳐야 해. 이것은 절대 변할 수 없는 법칙이라고.” 라고 주의를 줍니다. 순진한 동생 빅토르는 책의 이야기를 실제로 여기는 반면. 형 에르네스트는 책의 스토리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책 속의 토끼가 용을 때려눕힌 장면을 보고 빅토르가 황홀해하자 에르네스트는 동생을 흔들어 깨우고 “책에 나오는 걸 그대로 다 믿으면 안돼” 라고 훈계합니다. 계속되는 형의 경고에, 빅토르가 드디어, “... 믿는 척하면서 재미있어 하는 것은 돼?”라고 묻습니다. 빅토르의 천진난만함이 드러나는 질문이지만 실은 “믿는 척하면서 재미있어한다”라는 것은 픽션을 읽는 독자들의 ‘불신을 잠시 거둔’ 상태를 뜻하는 문장입니다. 책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빅토르가 픽션의 본질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사실 어떤 상황에서는 불신을 거둔 상태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토끼 형제들이 그림책의 토끼가 콩알만한 여우들을 마음껏 부리는 모습을 보고 통쾌함을 만끽하고 있는 동안 여우가 토끼 굴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우가 그들을 잡아먹으려고 달려들자 동생을 끌어안고 있던 에르네스트는 정신을 차리고 읽던 책을 들어 여우의 머리통을 내리쳤습니다. 그리고 뜻밖의 반격에 혼이 나간 여우의 주둥이에 책을 쿡 쑤셔 박아 버립니다. 이빨에 큰 책이 박혀버린 여우는 책을 물고 줄행랑을 칠 수밖에요. 여우를 퇴치한 토끼 형제는 한껏 고무되었습니다.
에르네스트는 때를 놓치지 않고 말했습니다. “봤지? 책은 정말 쓸모 있는거야.” 빅토르도 맞장구쳤습니다. “맞아. 빨리 또 하나 구해 와야겠어.” 그러자 에르네스트가 덧붙여 말했지요. “그래, 껍데기가 커다랗고 딱딱한 걸로. 속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한 걸로!”. 에르네스트는 이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동생에게 책의 내용을 무조건 믿어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주던 에르네스트가 이제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한 책을 구해와야겠다고 합니다. 또한 책을 전혀 모르던 빅토르도 책의 쓸모(?)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토끼들의 책상 위에 놓인 당근의 존재입니다. 이 당근은 에르네스트가 책을 가져오기 전에는 책상 가운데 놓여 있다가 책 때문에 모서리로 밀려났을 것입니다. 책상 말고는 가구가 거의 없는 토끼 형제의 굴 속에서 이 당근은 본문의 여러 곳에 그려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와 글텍스트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학부 수업에서 종종 이 작품을 읽어주고 당근을 보았냐고 묻곤 했는데, 놀랍게도 대부분의 학생들은 당근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곤 합니다. 한 장면에서는 방구석에 수북이 쌓여 있기까지 했는데도 말이지요. 저는 학생들에게 그림책에서 의미없는 디테일(detail)은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당근의 존재 이유를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당근과 책의 취득 경위와 역할을 비교해 보라면서요. 책은 우연히 거저 에르네스트의 손에 들어온 것이었지만 당근은 토끼 형제가 재배한 것이거나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당근밭에서 가져온 것이겠지요. 그들은 베아트리스 포터의 『피터 토끼 이야기』의 피터처럼 당근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모험을 감행했을지도 모릅니다. 당근은 그들의 생명을 유지시켜 줄 양식이니까요. 그런데 정작 이 이야기에서 그들의 생명을 구한 것은 당근이 아니라, 어디에선가 거저 얻은 책이었습니다.
이렇게 당근과 책의 역할을 비교해 보니,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KJV 마태복음 4:4)라는 성경 말씀이 떠오릅니다. 만약 당근을 빵에, 책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유할 수 있다면 말이지요. 그런데 사실 토끼 형제가 읽고 있던 책에는 그림만 있었지, 글은 없었으니 이것도 적합한 비유는 아닐지 모릅니다.
어쨌거나 작가가 이 작품에서 토끼들의 생명을 구한 것은 책이지 당근은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해석은 그럴듯합니다. 『아름다운 책』(Un beau livre)이라는 제목에 ‘책’이 들어가 있는 것이 그 근거가 될 수 있겠지요. 일반적으로 제목에는 주인공의 이름을 사용하는데 (예를 들어, 『아모스와 보리스』, 『피터의 의자』, 『피터 토끼 이야기』 등), 이 작품에서는 의인화된 토끼 형제의 이름 대신 ‘책’(livre)을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앞에 정관사 “le”를 쓰지 않고 부정관사인 “un”을 사용함으로써 특정한 책이 아니라 보편적인 ‘책’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번역자는 왜 책의 제목에 “아름다운”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했을까요? 물론 불어의 “beau"는 우리 말로 “아름다운”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만, “아름답다”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사물의 시지각적 측면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는 단어라면 여기에서의 책과 아름다움은 별로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beau” 에는 “유용함”이라는 용례도 있으니 에르네스트가 “봤지? 책은 정말 쓸모 있는거야.”라고 한 것처럼 ‘쓸모있는 책’ 혹은 ‘유용한 책’ 으로 번역하는 것이 맥락상 더 적합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이것 또한 성급한 제안일지 모릅니다. 시편 저자는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편 8:9)라고 노래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빅토르가 한 권 더 구해오자고 하자 에르테스트는 이렇게 답합니다. “그래, 껍데기가 커다랗고 딱딱한 걸로. 속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한 걸로!”. 여기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란 ‘즐거움을 주는 이야기’라고도 바꾸어 말할 수 있겠지요. 사실 우리가 픽션을 읽는 주된 목적은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즐거움’(pleasure)란 무엇일까요. C.S. 루이스는 『네 가지 사랑』에서 즐거움을 ‘필요의 즐거움’과 ‘선물의 즐거움’, 그리고 ‘감상의 즐거움’, 세 가지로 구분한 적이 있습니다 . 여기에서는 현안과 직접 관련이 있는 첫 번째와 세 번째 즐거움만을 인용해 보기로 하지요(1). "필요의 즐거움(need-pleasure)는 우리가 목이 마를 때 한 컵의 물을 마시면서 경험하는 것과 같은, 자신의 필요를 충족할 때 느끼는 즐거움인 반면, 감상의 즐거움(pleasures of appreciation)은 아침 산책길에 꽃향기를 맡은 사람이 “아, 얼마나 좋은 냄새인가”라고 말할 때의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필요의 즐거움은 일단 얻고 난 다음에는 놀라울 정도로 급격히 시들해지지만, 감상의 즐거움은 감각이 만족되었다는 느낌 이상의 것으로 우리를 이끈다"고 루이스는 말합니다. 감상의 즐거움은 무언가 그런 감상을 받아 마땅한 대상이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감상의 즐거움을 주는 대상들은 우리에게 그것들을 맛보고 주목하고 찬양할 의무가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루이스는 여기까지 즐거움을 구분한 다음에, 실제 삶에서는 이 두 종류의 즐거움이 순간 순간 섞이며 서로를 잇따르기도 한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어떤 것이 필요의 대상이었다가 감상의 대상이 되는 일은 종종 일어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부르짖다가도 주님이 하신 놀라운 일에 대해 감사하고 찬양드리곤 하지 않나요? 사실 우리의 기도에서는 필요의 부르짖음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것으로 우리가 비난받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상황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항구적인 빈곤함을 깨닫고 자신이 전적으로 의존적인 존재임을 기뻐하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아는 자일 것입니다.
다시 토끼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에르테스트가 다다른 결론, “그래, 껍데기가 커다랗고 딱딱한 걸로. 속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한 걸로!”에는 루이스가 말한 ‘필요의 즐거움’과 ‘감상의 즐거움’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육식동물로부터의 ‘잡아먹힘’을 피해 항상 전전긍긍하며 살아가야 하는 토끼 형제에게 우연히 손에 들어온 책은 생명을 지킬 수 있는 ‘필요의 즐거움’을 제공하는 동시에, 찬탄을 자아내는 ‘감상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사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책”이라는 제목은 일면(一面) 타당해 보이기도 합니다.
(1) 『네 가지 사랑』 홍성사. pp. 31-35.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후 Eastern Michigan University 에서 석사,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어린이문학교육학회 회장 및 한국 기독교 유아교 육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아동 청소년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대학 부설 생활과 학 연구소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기독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이해>(공저), <그림책과 예술교육>(공저>, <그림책으로 보는 아동과 우리사회>(공저), <100권의 그림책>(공저) 등 그림책 관련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