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의 세계관
경계 안의 삶이 누리는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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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uly2022-02-08 16:12
글을 읽으며 경계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자유라는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정말 우리사회는 트랜스휴먼의 꿈을 지향하며 나아가는 듯하다는 말씀에 깊이 동감합니다.
특히 저는 동물을 키우는 입장이다보니 여러 관계 중 인간과 동물의 바람직한 관계 설정을 늘 고민하곤 합니다.
요즘 우리사회에서 반려동물은 인간의 가족의 하나로 인식되고 여겨지는데, 이러한 변화도 경계 없는 삶을 반영하는 한 부분이라고 느껴졌습니다.
동물과 인간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며 나타난 반려동물 문화 안에는 인간의 욕망과 욕심의 발현으로 희생되는 여러 동물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현실에서 인간과 동물이 맺어야 할 바람직한 경계와 관계에 대한 해답을 글을 통해 성찰하게 됩니다.
치치, 아모스와 보리스, 그리고 물고기도 결국엔 자신의 자리에서 자유를 되찾은 것 처럼, 경계는 우리에게 자유라는 가치를 선사한다는 점을 배우게 된 유익한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특히 저는 동물을 키우는 입장이다보니 여러 관계 중 인간과 동물의 바람직한 관계 설정을 늘 고민하곤 합니다.
요즘 우리사회에서 반려동물은 인간의 가족의 하나로 인식되고 여겨지는데, 이러한 변화도 경계 없는 삶을 반영하는 한 부분이라고 느껴졌습니다.
동물과 인간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며 나타난 반려동물 문화 안에는 인간의 욕망과 욕심의 발현으로 희생되는 여러 동물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현실에서 인간과 동물이 맺어야 할 바람직한 경계와 관계에 대한 해답을 글을 통해 성찰하게 됩니다.
치치, 아모스와 보리스, 그리고 물고기도 결국엔 자신의 자리에서 자유를 되찾은 것 처럼, 경계는 우리에게 자유라는 가치를 선사한다는 점을 배우게 된 유익한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혜경2022-10-25 13:24
요즘 다양성과 인권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옳고그름 안전과 위험의 경계를 허물고 있습니다. 동성애나 성소수자를 권리로 해석해주는 어리석은 교육을 아이들에게 주입하여 위험을 더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타고난 것, 본질적인 것은 가장 기초적인 것이며 우리의 생명을 더욱 활기차게 해주며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초를 버리고 찾아 떠나는 자유는 순간의 즐거움일수 있지만 거짓 자유이며
착각이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슬픈 일입니다. 가치관 교육이 우리 자녀에게 꼭 적용되기를 기도하며
더 일깨워주는 말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타고난 것, 본질적인 것은 가장 기초적인 것이며 우리의 생명을 더욱 활기차게 해주며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초를 버리고 찾아 떠나는 자유는 순간의 즐거움일수 있지만 거짓 자유이며
착각이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슬픈 일입니다. 가치관 교육이 우리 자녀에게 꼭 적용되기를 기도하며
더 일깨워주는 말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twinkleLee 민옥2025-01-20 13:08
부모의 양육자 유형에서도 방임형과 코칭형의 구분은 경계이다.
방임형과 코칭형은 자녀를 자유롭게 한다는 점이 공통적이기 때문에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는 질문을 받곤 한다.
방임형은 경계가 없이 자유롭게 행동하게 버려두지만 코칭형은 경계를 주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축구 또한 그렇다. 정해진 선 안에서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지만 선 밖을 넘어가면 안 된다.
경계가 없으면 결국 대소동과 혼란이 초래된다.
치치가 멋진 모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관사 짐과 조수 몰리 아저씨가 항상 치치를 닦고 기름질 해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 나의 모습 또한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서 돌보심이 있기 때문이다.
치치를 통해 나의 연약함을, 감사함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물고기, 아모스와 보리스 그리고 나와 우리 모두는
경계 안에서 각자의 자리에 있을 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방임형과 코칭형은 자녀를 자유롭게 한다는 점이 공통적이기 때문에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는 질문을 받곤 한다.
방임형은 경계가 없이 자유롭게 행동하게 버려두지만 코칭형은 경계를 주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축구 또한 그렇다. 정해진 선 안에서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지만 선 밖을 넘어가면 안 된다.
경계가 없으면 결국 대소동과 혼란이 초래된다.
치치가 멋진 모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관사 짐과 조수 몰리 아저씨가 항상 치치를 닦고 기름질 해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 나의 모습 또한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서 돌보심이 있기 때문이다.
치치를 통해 나의 연약함을, 감사함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물고기, 아모스와 보리스 그리고 나와 우리 모두는
경계 안에서 각자의 자리에 있을 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정민2025-01-20 15:41
저는 세 권 중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만 읽었는데요, 교수님의 글을 먼저 접해서 "경계 안에서 누리는 자유"라는 개념을 가지고 그림책을 읽었습니다.
책을 펼치고 처음부터 좀 의아했던 부분이 면지에 분명 교회처럼 보이는 곳에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교회가 아닌가? 갸우뚱 했는데, 결국 뒷 쪽에 사람들이 교회 탑에 오르는 장면이 나오고,
십자가가 희미하게 그려져 있더라구요. 그리고 책 맨 마지막 장면에도 교회탑 부분만 그려져 있는 부분이 있구요,
그리스도의 율법(마5:17), 진리를 주신 하나님을 인간이 떠났을 때를 비유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현 시대는 나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니까요, 인간으로 지켜야 할 것들을 이야기하면 그것을 오히려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악(惡)으로 표현하는 세상.
부모의 잔소리가 인권 침해라고 배우고,
진리는 존재하지 않고 내 생각이 옳고, 내 감정을 선(善)이라고 표현하는 시대이니까요.
과연 그 안에 진정한 자유와 행복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치치가 본인이 만들어진 목적으로 마땅히 해야 하는 일들을 버리고, 자신을 "뽐내고"싶어서 "자유"(?)를 찾아 떠났던 마음처럼,
우리들 마음 안에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목적이 아닌,(하나님이 주인이 아닌)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뽐내고"싶은 마음이
어떤 결과들을 초래하는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치치가 길을 잃고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혼란스러웠던 것처럼 하나님 없는 인생도 실제로 마찬가지입니다.
치치의 마지막 고백이 아이들이 볼 때는 "재미없어."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인생의 정답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세계의 질서 안에서 내가 만들어진 목적을 누리는 것이 곧 자유이고 행복입니다.
책을 펼치고 처음부터 좀 의아했던 부분이 면지에 분명 교회처럼 보이는 곳에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교회가 아닌가? 갸우뚱 했는데, 결국 뒷 쪽에 사람들이 교회 탑에 오르는 장면이 나오고,
십자가가 희미하게 그려져 있더라구요. 그리고 책 맨 마지막 장면에도 교회탑 부분만 그려져 있는 부분이 있구요,
그리스도의 율법(마5:17), 진리를 주신 하나님을 인간이 떠났을 때를 비유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현 시대는 나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니까요, 인간으로 지켜야 할 것들을 이야기하면 그것을 오히려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악(惡)으로 표현하는 세상.
부모의 잔소리가 인권 침해라고 배우고,
진리는 존재하지 않고 내 생각이 옳고, 내 감정을 선(善)이라고 표현하는 시대이니까요.
과연 그 안에 진정한 자유와 행복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치치가 본인이 만들어진 목적으로 마땅히 해야 하는 일들을 버리고, 자신을 "뽐내고"싶어서 "자유"(?)를 찾아 떠났던 마음처럼,
우리들 마음 안에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목적이 아닌,(하나님이 주인이 아닌)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뽐내고"싶은 마음이
어떤 결과들을 초래하는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치치가 길을 잃고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혼란스러웠던 것처럼 하나님 없는 인생도 실제로 마찬가지입니다.
치치의 마지막 고백이 아이들이 볼 때는 "재미없어."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인생의 정답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세계의 질서 안에서 내가 만들어진 목적을 누리는 것이 곧 자유이고 행복입니다.

jihye2025-01-20 23:12
의인화된 치치와 물고기, 아모스와 보리스를 보며 인간의 연약함과 같다고 느꼈습니다. 경험과 지식의 유한성으로 인해 자신이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절대 깨닫거나 미리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약함 또는 미련함이라고 보여집니다.
물고기가 편안히 자유를 누리며 사는 연못은 곧 에덴동산과 같이 하나님이 마련하신 온전한 자유의 세계인데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하고, 오히려 내가 하나님 되려 하는 죄성이 스스로의 자유 경계를 무너트리는 결과를 초래함을 보게 됐습니다.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에서 치치는 짐 아저씨가 날마다 돌보아 주었기 때문에 빛날 수 있었지만 이것을 자신의 의로 착각하고 돋보이기 위해 탈출을 감행합니다. 현재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인데 마치 그것을 나의 의인양, 나의 면류관인양 드러내고 싶어하진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그럼에도 치치가 돌아와 기뻐 춤추며 치치를 맞아주고 사랑해 주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고, 돌아온 탕자의 아버지 마음이라 여겨집니다.
물고기가 편안히 자유를 누리며 사는 연못은 곧 에덴동산과 같이 하나님이 마련하신 온전한 자유의 세계인데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하고, 오히려 내가 하나님 되려 하는 죄성이 스스로의 자유 경계를 무너트리는 결과를 초래함을 보게 됐습니다.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에서 치치는 짐 아저씨가 날마다 돌보아 주었기 때문에 빛날 수 있었지만 이것을 자신의 의로 착각하고 돋보이기 위해 탈출을 감행합니다. 현재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인데 마치 그것을 나의 의인양, 나의 면류관인양 드러내고 싶어하진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그럼에도 치치가 돌아와 기뻐 춤추며 치치를 맞아주고 사랑해 주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고, 돌아온 탕자의 아버지 마음이라 여겨집니다.
백효진2025-01-21 00:59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부분에 '나의 아들 아리스에게'라는 글귀와 기차레일을 둥글게 만들고 기차놀이를 하던 한 아이가 어딘가에서 비춰오는 한줄기 빛을 올려다보는 그림이 등장합니다.
이 부분을 보며 저는 '교훈이 너무 드러나는 책은 싫어!'라고 생각하는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언가 가르치려는 시도가 느껴질 때, 내가 틀렸고 공감받지 못하며 무시당한다는 생각으로 연결되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경계를 허물고 싶어하는 죄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도 물고기도 아모스도 현실에 만족하고 감사하기보다는 단순한 호기심을 마음에 품고 점점 키워낸 결과 이길 수 없는 욕구가 되어 결국 침범해서는 안되는 영역에 발을 디디게 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어쩌면 그 영역 너머를 다녀왔기에 물고기는 물고기인 것을 알게 되고, 아모스와 보리스는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기억하는 것만으로 행복할 수 있으며 치치도 지금하는 일이 제일 재미있고 의미있는 일임을 알게 된 것일테니 그 호기심 또한 값지다고 말해주어야 할 것인가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나 또. 경계를 넘지 않고도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이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가장 좋은 자리임을 모두가 다 깨닫고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이런 재미있는 그림책이 나오지 않았을수도 있었겠다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머리속에 그득합니다.
이 부분을 보며 저는 '교훈이 너무 드러나는 책은 싫어!'라고 생각하는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언가 가르치려는 시도가 느껴질 때, 내가 틀렸고 공감받지 못하며 무시당한다는 생각으로 연결되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경계를 허물고 싶어하는 죄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도 물고기도 아모스도 현실에 만족하고 감사하기보다는 단순한 호기심을 마음에 품고 점점 키워낸 결과 이길 수 없는 욕구가 되어 결국 침범해서는 안되는 영역에 발을 디디게 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어쩌면 그 영역 너머를 다녀왔기에 물고기는 물고기인 것을 알게 되고, 아모스와 보리스는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기억하는 것만으로 행복할 수 있으며 치치도 지금하는 일이 제일 재미있고 의미있는 일임을 알게 된 것일테니 그 호기심 또한 값지다고 말해주어야 할 것인가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나 또. 경계를 넘지 않고도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이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가장 좋은 자리임을 모두가 다 깨닫고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이런 재미있는 그림책이 나오지 않았을수도 있었겠다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머리속에 그득합니다.
옥희진2025-01-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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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와 보리스>를 혼자 읽었을 때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경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맞는 삶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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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을 창작하는 사람으로서 책을 만들 때 세상의 기준이 아닌,
이 책이 하나님 나라에 어떤 유익이 될 수 있을지, 그리고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고민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아모스와 보리스>를 혼자 읽었을 때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경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맞는 삶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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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을 창작하는 사람으로서 책을 만들 때 세상의 기준이 아닌,
이 책이 하나님 나라에 어떤 유익이 될 수 있을지, 그리고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고민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yunkyung2025-01-21 09:24
부르심을 알지 못하면 내게 주어진 은혜를 모르고, 은혜를 모르면 내 삶에 감사할 수 없고, 감사가 없으면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없기에 경계를 넘는 것만이 자신이 자유를 누릴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고기는 물고기야> 그림책에서 물고기가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좋은 곳인 물 안 세상을 잊은 채 물 밖 세상에 대한 동경으로 온 힘을 다해 둑으로 뛰어올랐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경계 안에 거한다는 것은 창조 섭리 안에 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내용이 와 닿았습니다.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고 오늘도 내게 가장 좋은 것, 선한 것들을 허락하신 그 분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지금, 여기에서 주어진 자유를 온전히 누리길 소망 합니다.
<물고기는 물고기야> 그림책에서 물고기가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좋은 곳인 물 안 세상을 잊은 채 물 밖 세상에 대한 동경으로 온 힘을 다해 둑으로 뛰어올랐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경계 안에 거한다는 것은 창조 섭리 안에 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내용이 와 닿았습니다.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고 오늘도 내게 가장 좋은 것, 선한 것들을 허락하신 그 분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지금, 여기에서 주어진 자유를 온전히 누리길 소망 합니다.
전보람2025-07-22 21:45
[경계 안에 거한다는 것은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 그 이상의 가치를 뜻합니다. 그것은 ‘자유’입니다.]
경계를 허물고 경계를 뛰어넘는 것이 '이상적인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는 착각 속에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주제는 사춘기 때부터 다른사람보다 특별해지고 싶어했던 저를 힘들게 했던 것 같습니다. 분명히 경계를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 인의 모습이 맞다고 생각하지만 방종과 진정한 자유를 구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안에서 결국 참된 자유를 얻지 못하고 방황하고 세상과 타협하고 진리와 멀어지는 삶을 살아왔던 지난날이 안타깝고 후회도 됩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다른 무엇보다도 다음세대에게 진짜 즐거운 자유, 진짜 유익이 되는 상상의 힘을 가르쳐주는 교사가 되고 싶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경계를 허물고 경계를 뛰어넘는 것이 '이상적인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는 착각 속에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주제는 사춘기 때부터 다른사람보다 특별해지고 싶어했던 저를 힘들게 했던 것 같습니다. 분명히 경계를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 인의 모습이 맞다고 생각하지만 방종과 진정한 자유를 구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안에서 결국 참된 자유를 얻지 못하고 방황하고 세상과 타협하고 진리와 멀어지는 삶을 살아왔던 지난날이 안타깝고 후회도 됩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다른 무엇보다도 다음세대에게 진짜 즐거운 자유, 진짜 유익이 되는 상상의 힘을 가르쳐주는 교사가 되고 싶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with Chang2025-07-23 13:34
세 그림책을 통해 풀어낸 이 글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와 ‘경계’ 안에서 비로소 누릴 수 있는 자유를 깊이 있게 조명해주었습니다. 경계를 넘는 것이 곧 자유라는 시대의 목소리와 달리, 진리이신 하나님 안에 머물 때 참 자유가 주어진다는 요한복음 8장 32절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물고기는 물고기이기에, 치치는 기관차이기에, 보리스는 고래이기에 아름다운 존재지요.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맞는 자리를 허락하시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피어날 수 있도록 경계를 주셨음을 깨닫습니다. 이 글을 통해 자유와 질서, 존재와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기술의 혁신이 거듭되는 시대지만 창조의 진리를 잊지말라는 메세지로 받겠습니다..
우승린2025-12-01 13:16
경계 안에 머문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잘 아는 것이자 나의 소명을 아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가 물고기 인지, 기관차인지, 뭍에 사는 생쥐인지 아니면 바다에 사는 고래인지를 아는 것이 자유를 누리는 첫 출발점인 것 같습니다. 인생에서 경계를 모를 때 우리는 건강을 잃기도 하고, 관계가 무너지기도 하며, 인생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됨도 경험합니다. 인간이기에 진정한 행복과 자유를 위해서는 주님이 꼭 필요함을 사람들은 왜 모를까 싶은 안타까움이 많이 드네요 교통 신호만 보아도 우리에게 질서와 안녕이라는 행복과 자유를 주는 것이 이 신호라는 룰과 경계인데 말입니다…
이신애2025-12-01 14:31
경계를 이탈해 죽을 뻔했지만 기가 막힌 은혜로 다시 살게 되는 이야기,
스스로가 빚어낸 혼란에서 질서의 자리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 이야기,
모든 것이 섭리 안에 있음을 깨닫게 하는 이야기-
이러한 이야기들이 아이들 마음속에 심겨질 때,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신뢰할 수 있는 내적인 기초가 되어줄 것이라 믿습니다.
그림책 속에서 이러한 빛나는 이야기를 발견하도록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들의 마음에 이런 이야기를 심어주는 부모와 교사로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스스로가 빚어낸 혼란에서 질서의 자리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 이야기,
모든 것이 섭리 안에 있음을 깨닫게 하는 이야기-
이러한 이야기들이 아이들 마음속에 심겨질 때,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신뢰할 수 있는 내적인 기초가 되어줄 것이라 믿습니다.
그림책 속에서 이러한 빛나는 이야기를 발견하도록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들의 마음에 이런 이야기를 심어주는 부모와 교사로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서정아2025-12-01 18:36
생각의 지경을 넓혀주는 글 잘 읽었습니다.
분명 어떤 컨디션 안에서만 살 수 있는 존재로 지음받은 존재인데 그 경계를 거부하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을 다시 보게되네요.
현대의 문화속에 '절대적인 진리'는 이미 거부되어 사라진 지 오래되었고, 그렇게 자신의 기원을 잃어버린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창작물은 길을 찾는 이들을 더 혼란스럽게 할 뿐인 것 같습니다. 그 혼란은 가장 기초적인 예술인 그림책 영역에도 들어와 이제 막 걸음마 하는 아이들이 길을 나서기도 전에 길을 잃는 상황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길을 떠나기 전에 "나는 누구인가?" 를 먼저 확인해야 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분명 어떤 컨디션 안에서만 살 수 있는 존재로 지음받은 존재인데 그 경계를 거부하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을 다시 보게되네요.
현대의 문화속에 '절대적인 진리'는 이미 거부되어 사라진 지 오래되었고, 그렇게 자신의 기원을 잃어버린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창작물은 길을 찾는 이들을 더 혼란스럽게 할 뿐인 것 같습니다. 그 혼란은 가장 기초적인 예술인 그림책 영역에도 들어와 이제 막 걸음마 하는 아이들이 길을 나서기도 전에 길을 잃는 상황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길을 떠나기 전에 "나는 누구인가?" 를 먼저 확인해야 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김현경2025-12-01 19:44
저는 몇년 전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는 마음이 좀 답답했었습니다. 나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현실의 벽 같은 이미지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치 "넌 안 돼~"라는 말을 듣는 것처럼 좀 슬프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몇년 사이 여러 일들을 겪고 이 글을 다시 보니 내게 주어진 경계는 나를 억압하는 한계가 아니라, 나를 보호하려는 울타리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사논문을 마치고 한껏 들떠있던 저는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여러가지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그런데 박사졸업을 한 후 이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닫히고, 저 문이 열리는가 싶었는데 역시 예기치 못한 일들로 닫히는 일을 반복해서 경험하게 됐습니다. 처음엔 이게 무슨 일이지 어리둥절했는데, 차차 나를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는구나 하는 보호의 손길이 느껴져서 감사했습니다.
저는 태어날 때 위험하게 태어났다고 합니다. 병원에서는 아기나 산모 중에 선택해야한다고 했고 아마 아기가 살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빠가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간신히 준비해두신 인큐베이터가 무색하게도 인큐베이터 없이 숨도 잘 쉬고 잘 살아남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연약한 육체를 지니고 있지만 그런 나를 꼭 보내셔야만 했던 이유, 하나님의 계획이 있나보다 하고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연약한 육체가 아쉬울 때도 있지만, 약한 나를 통해 강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볼때면 참으로 이것이 은혜구나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신 그대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앞으로도 나를 돌보시고 보호하실 주님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제가 경계안의 자유를 누리는 삶에 감사하며 살아가길 바랍니다.
그런데 몇년 사이 여러 일들을 겪고 이 글을 다시 보니 내게 주어진 경계는 나를 억압하는 한계가 아니라, 나를 보호하려는 울타리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사논문을 마치고 한껏 들떠있던 저는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여러가지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그런데 박사졸업을 한 후 이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닫히고, 저 문이 열리는가 싶었는데 역시 예기치 못한 일들로 닫히는 일을 반복해서 경험하게 됐습니다. 처음엔 이게 무슨 일이지 어리둥절했는데, 차차 나를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는구나 하는 보호의 손길이 느껴져서 감사했습니다.
저는 태어날 때 위험하게 태어났다고 합니다. 병원에서는 아기나 산모 중에 선택해야한다고 했고 아마 아기가 살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빠가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간신히 준비해두신 인큐베이터가 무색하게도 인큐베이터 없이 숨도 잘 쉬고 잘 살아남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연약한 육체를 지니고 있지만 그런 나를 꼭 보내셔야만 했던 이유, 하나님의 계획이 있나보다 하고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연약한 육체가 아쉬울 때도 있지만, 약한 나를 통해 강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볼때면 참으로 이것이 은혜구나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신 그대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앞으로도 나를 돌보시고 보호하실 주님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제가 경계안의 자유를 누리는 삶에 감사하며 살아가길 바랍니다.
하은혜2026-07-23 01:19
하나님께서 자유를 얻은 출애굽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신 이유도 질서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라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유를 얻은 인간들이 삶의 기초나 경계를 잃을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심지어 삶의 아주 디테일한 부분까지도 지켜야할 규례와 율법을 아주 세세하게 알려주셨지요.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분이지만, 피조물로서의 참된 자유를 누리기 위해 규칙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의 계교에 빠져, 하나님과 멀어져 돌아서는 죄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께 붙어있길 원하셨기에 주신 세밀한 사랑의 결과이자 우리에게 주고 싶으셨던 삶의 기초였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위의 책들 속 주인공들 처럼 '나는 누구인가' 라는 정체성을 두고 찾아 떠나는 여정을 누구나 걷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곳에도 소속되지 않고, 외딴 섬에 있을 때야 비로소 자유를 누리고 나의 정체성을 알 수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왜 무수한 사람들이 다들 떠나 있지 않는 것일까요? 결론적으로 무엇에 속해야하고 무언가를 지녀야만 자기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위 책들의 주인공들이 결국엔 돌아온 것 처럼요. 집을 나간 탕자가 다시 돌아온 것 처럼요.
삶의 이치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생각됩니다. 다이어트=식단+운동이듯이요. 하지만 결국 그 기본을 해내지 못해서 어려울 뿐이지요. 단순한 것이 생각보다 어렵기에, 겉으로 보기 좋은 말들에 속아 그것이 자유다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참 많은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세상인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듯 보이지만 그 경계를 허물기 위해 더 많은 규제를 만들어 내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많은 혼란을 야기합니다. 그들이 외치는 '자유'는 무언가를 지니기 위해서 외치고 있는 것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그것은 자유를 찾기 위함보다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기 위함이겠지요.
위의 책들 속 주인공들 처럼 '나는 누구인가' 라는 정체성을 두고 찾아 떠나는 여정을 누구나 걷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곳에도 소속되지 않고, 외딴 섬에 있을 때야 비로소 자유를 누리고 나의 정체성을 알 수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왜 무수한 사람들이 다들 떠나 있지 않는 것일까요? 결론적으로 무엇에 속해야하고 무언가를 지녀야만 자기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위 책들의 주인공들이 결국엔 돌아온 것 처럼요. 집을 나간 탕자가 다시 돌아온 것 처럼요.
삶의 이치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생각됩니다. 다이어트=식단+운동이듯이요. 하지만 결국 그 기본을 해내지 못해서 어려울 뿐이지요. 단순한 것이 생각보다 어렵기에, 겉으로 보기 좋은 말들에 속아 그것이 자유다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참 많은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세상인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듯 보이지만 그 경계를 허물기 위해 더 많은 규제를 만들어 내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많은 혼란을 야기합니다. 그들이 외치는 '자유'는 무언가를 지니기 위해서 외치고 있는 것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그것은 자유를 찾기 위함보다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기 위함이겠지요.
원계실2026-07-25 00:29
다른 그림책에 비해 판형이 커서 아이들과 함께 읽기에 적합한 책입니다. 그림은 단순하면서도 명확해 어린 독자들이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고, 흑연 연필의 깊은 명암과 섬세한 해칭이 화면에 따뜻한 질감을 더합니다. 특히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가 힘차게 달리는 철길은 연필이라는 재료가 가진 직선의 리듬과 묵직한 표현력이 잘 어우러져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치치의 불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불만의 근원은 작은 기관차라는 사실보다 스스로를 긍정하지 못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다른 기관차처럼 더 빠르고 더 먼 곳을 달리고 싶은 마음은 치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역시 살아가면서 타인의 삶을 부러워하고 자신을 비교하며,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과 은사를 놓칠 때가 많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치치에게 철로가 결코 자유를 빼앗는 장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관차는 철로 위를 달릴 때 비로소 자신의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철로가 움직임을 제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치치의 가능성을 열어 주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길입니다. 자유란 아무 방향으로나 벗어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목적에 맞게 살아갈 때 더욱 온전해질 수 있음을 이 장면은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마다 서로 다른 모습과 역할을 허락하셨으며, 각자의 삶 속에서 부르심을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보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자리에서 감사와 충성을 배우는 것이 참된 자유에 이르는 길입니다.
또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선택할 수 있다는 통제감은 자기효능감을 키우는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이고 성실히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비교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귀하게 여기며 감사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치치의 불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불만의 근원은 작은 기관차라는 사실보다 스스로를 긍정하지 못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다른 기관차처럼 더 빠르고 더 먼 곳을 달리고 싶은 마음은 치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역시 살아가면서 타인의 삶을 부러워하고 자신을 비교하며,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과 은사를 놓칠 때가 많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치치에게 철로가 결코 자유를 빼앗는 장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관차는 철로 위를 달릴 때 비로소 자신의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철로가 움직임을 제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치치의 가능성을 열어 주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길입니다. 자유란 아무 방향으로나 벗어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목적에 맞게 살아갈 때 더욱 온전해질 수 있음을 이 장면은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마다 서로 다른 모습과 역할을 허락하셨으며, 각자의 삶 속에서 부르심을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보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자리에서 감사와 충성을 배우는 것이 참된 자유에 이르는 길입니다.
또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선택할 수 있다는 통제감은 자기효능감을 키우는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이고 성실히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비교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귀하게 여기며 감사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김주경2026-07-25 14:49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를 읽으며 글자의 크기와 음절의 반복, 마치 기차가 달리는 철로처럼 대각선과 곡선으로 배치된 글에서 생생한 속도감과 리듬을 느꼈습니다. 그림보다 글에 시선이 더 집중되는 그림책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정말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를 ‘아이코노텍스트’라고 하는군요!
작가의 다른 작품도 궁금해져서 이어서 '작은 집 이야기'도 찾아 읽어 보았습니다.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 치치 이야기와 비슷하게 느껴졌고, 그림이 아름다워 읽는 동안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렇게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기관차와 집을 이야기로 풀어낸 작가의 관찰력과 상상력이 놀라웠습니다.
서평에서 창조질서가 무너진 모습을 이야기하는 부분을 읽으며, 태국에서 소수민족 사역을 하시는 선교사님께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어느 소수민족 마을에서는 여성들이 밭을 매고, 자기 키만큼 높은 짐을 머리에 인 채 산을 내려와 장에 내다 팔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고 합니다. 반면 많은 남성은 집에 누워 마약을 하며 지낸다고 했습니다. 선교사님은 이를 창조질서가 무너진 모습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세 그림책의 주인공들이 집을 떠나 여러 사건을 겪은 뒤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서 음악의 흐름도 떠올랐습니다. 많은 조성 음악은 으뜸조에서 출발하여 여러 화성과 조성을 거친 뒤 다시 으뜸조로 돌아옵니다. 마치 피노키오가 제페토 할아버지를 떠나 여러 사건을 경험한 뒤 돌아오는 것처럼, 음악도 자기 자리에서 벗어나 긴장과 방황을 경험합니다.
특히 많은 곡은 마지막 으뜸화음으로 해결되기 전에 딸림화음을 거칩니다. 딸림화음에는 으뜸화음으로 향하려는 강한 성질이 있습니다. 저는 때때로 이 딸림화음에서 으뜸화음으로 해결되는 이 흐름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다시 화해와 생명의 자리로 이끄는 결정적인 전환점처럼 느껴집니다. 여러 사건을 겪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마지막 으뜸화음이 울릴 때면 “휴”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되는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어쩌면 인간의 dna 깊은 곳에는 이런 이야기와 음악에 반응하는 무엇인가가 새겨져 있나 봅니다. 창조에서 시작하여 타락과 구속을 거쳐 회복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대서사시와 닮은 흐름 말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거대한 이야기 안에 사는 존재들이라니... 저는 이런 게 느껴지는게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버지니아 리 버튼의 수상 연설도 와닿았습니다.
“가장 기초적인 것은 항상 가장 중요하며, 좋은 예술은 확실히 기초적인 것이다.”
맞아요. 좋은 예술은 확실히 기초적인 것입니다. 삶과 인간 존재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진실을 선명하고 아름답게 드러내요. 하나님의 대서사시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러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발견하고 표현할 수 있는 관찰력과 상상력이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런 이야기를 알아보고 반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기를 소망합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궁금해져서 이어서 '작은 집 이야기'도 찾아 읽어 보았습니다.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 치치 이야기와 비슷하게 느껴졌고, 그림이 아름다워 읽는 동안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렇게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기관차와 집을 이야기로 풀어낸 작가의 관찰력과 상상력이 놀라웠습니다.
서평에서 창조질서가 무너진 모습을 이야기하는 부분을 읽으며, 태국에서 소수민족 사역을 하시는 선교사님께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어느 소수민족 마을에서는 여성들이 밭을 매고, 자기 키만큼 높은 짐을 머리에 인 채 산을 내려와 장에 내다 팔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고 합니다. 반면 많은 남성은 집에 누워 마약을 하며 지낸다고 했습니다. 선교사님은 이를 창조질서가 무너진 모습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세 그림책의 주인공들이 집을 떠나 여러 사건을 겪은 뒤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서 음악의 흐름도 떠올랐습니다. 많은 조성 음악은 으뜸조에서 출발하여 여러 화성과 조성을 거친 뒤 다시 으뜸조로 돌아옵니다. 마치 피노키오가 제페토 할아버지를 떠나 여러 사건을 경험한 뒤 돌아오는 것처럼, 음악도 자기 자리에서 벗어나 긴장과 방황을 경험합니다.
특히 많은 곡은 마지막 으뜸화음으로 해결되기 전에 딸림화음을 거칩니다. 딸림화음에는 으뜸화음으로 향하려는 강한 성질이 있습니다. 저는 때때로 이 딸림화음에서 으뜸화음으로 해결되는 이 흐름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다시 화해와 생명의 자리로 이끄는 결정적인 전환점처럼 느껴집니다. 여러 사건을 겪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마지막 으뜸화음이 울릴 때면 “휴”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되는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어쩌면 인간의 dna 깊은 곳에는 이런 이야기와 음악에 반응하는 무엇인가가 새겨져 있나 봅니다. 창조에서 시작하여 타락과 구속을 거쳐 회복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대서사시와 닮은 흐름 말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거대한 이야기 안에 사는 존재들이라니... 저는 이런 게 느껴지는게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버지니아 리 버튼의 수상 연설도 와닿았습니다.
“가장 기초적인 것은 항상 가장 중요하며, 좋은 예술은 확실히 기초적인 것이다.”
맞아요. 좋은 예술은 확실히 기초적인 것입니다. 삶과 인간 존재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진실을 선명하고 아름답게 드러내요. 하나님의 대서사시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러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발견하고 표현할 수 있는 관찰력과 상상력이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런 이야기를 알아보고 반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기를 소망합니다.
곽서연2026-07-27 00:04
예전에 교사로 일할 떄 '물고기는 물고기야'를 아이들에게 읽어준 적이 있는데 오히려 내가 은혜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다른 세상이 보고 싶어 뭍으로 뛰어 올랐다가 오히려 평안함과 자유를 잃어버릴 뻔한 물고기가 다시 연못으로 돌아와
물속을 자유롭게 헤엄쳐 다니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의 구속하심을 감사하고 '구속하심'이 어떠함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질문을 하고 그 대답에 다시 반응해 주며 그 시간을 즐겼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림책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은혜를 누릴 수 있듯이
그림책을 통해서 악한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알아야 될 것 같습니다.
다른 세상이 보고 싶어 뭍으로 뛰어 올랐다가 오히려 평안함과 자유를 잃어버릴 뻔한 물고기가 다시 연못으로 돌아와
물속을 자유롭게 헤엄쳐 다니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의 구속하심을 감사하고 '구속하심'이 어떠함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질문을 하고 그 대답에 다시 반응해 주며 그 시간을 즐겼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림책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은혜를 누릴 수 있듯이
그림책을 통해서 악한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알아야 될 것 같습니다.
백효진2026-07-27 00:19
이전에 제가 썼던 댓글을 보며 놀랐습니다. 지금과는 많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림책의 세계관 수업을 들으며 그림책에 대한 생각이 정리될 뿐 아니라 복잡했던 내면이 하나님 안에서 질서를 찾아가고 있다고 느껴져 감사한 시간입니다.
경계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진짜 자유입니다. 경계 밖은 무질서하고 혼란스럽습니다. 하지만 저도 그렇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아프게 경험해야 비로소 진리를 깨우친다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이런 그림책들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참지혜와 선한 마음이 자라나 경계 안의 아름다운 자유를 누리는 아이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림책의 세계관 수업을 들으며 그림책에 대한 생각이 정리될 뿐 아니라 복잡했던 내면이 하나님 안에서 질서를 찾아가고 있다고 느껴져 감사한 시간입니다.
경계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진짜 자유입니다. 경계 밖은 무질서하고 혼란스럽습니다. 하지만 저도 그렇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아프게 경험해야 비로소 진리를 깨우친다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이런 그림책들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참지혜와 선한 마음이 자라나 경계 안의 아름다운 자유를 누리는 아이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최은아2026-07-27 00:53
원죄로 인해 창조 질서보다 무질서를 더 편안해 하는 우리의 삶 속에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말씀하신 '진리 안에서' 라는 경계선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심을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 하나님은 우리를 꾸짖지 않으시지만 항상 '진리 안에서', '예수 안에서' 라고 경계선을 알려주시니 성경 말씀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아름2026-07-27 03:17
자유는 마음대로 막 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말아야할 것을 하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리스도인은 참된 진리이신 예수그리스 안에 거할 때 비로소 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요즘 세상은 참된 진리와 절대적인 기준을 잃어버려서 더욱이 죄로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흐림을 바라보면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이토록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아이들이 말씀 안에서 바로 서도록 가르치고 지키는 일마저 버겁게 느껴져 마음이 아픕니다..
사실 몇 년 전에도 말씀이 기준이 되지 않는 세상이었지만, 지금처럼 심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요즘은 말씀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도 무너진 채 모든 것을 자유와 존중이라는 이름아래 모든 것을 허용하곤 합니다.
결국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사사시대의 모습처럼 무조건적인 허용이 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온통 기준이 흔들리고 어두움이 짙어진 세상이지만, 그렇기에 말씀의 기준을 꼭 붙들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각자 삶의 자리에서 작은 ‘빛’을 비추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야 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순종해야 할 거룩한 부르심인 것 같습니다.
또한 아이들에게도 마음껏 해 라는 자유를 허용하며 가르쳐주기 보다는,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선택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참된 진리 안에서의 자유를 가르쳐줘야겠습니다.
그러한 부모님들이, 교사들이 더욱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그림책을 감상하며,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를 바라보고,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것이
너무도 재미있습니다. 또 교수님의 글을 통해 생각치 못했던 더 깊은 생각을 하며 시야가 넓어 질 수 있어 너무도 감사합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아이들과 함께 하나님을 떠올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생각하며 감상할 수 있는 그림책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참된 진리이신 예수그리스 안에 거할 때 비로소 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요즘 세상은 참된 진리와 절대적인 기준을 잃어버려서 더욱이 죄로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흐림을 바라보면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이토록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아이들이 말씀 안에서 바로 서도록 가르치고 지키는 일마저 버겁게 느껴져 마음이 아픕니다..
사실 몇 년 전에도 말씀이 기준이 되지 않는 세상이었지만, 지금처럼 심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요즘은 말씀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도 무너진 채 모든 것을 자유와 존중이라는 이름아래 모든 것을 허용하곤 합니다.
결국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사사시대의 모습처럼 무조건적인 허용이 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온통 기준이 흔들리고 어두움이 짙어진 세상이지만, 그렇기에 말씀의 기준을 꼭 붙들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각자 삶의 자리에서 작은 ‘빛’을 비추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야 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순종해야 할 거룩한 부르심인 것 같습니다.
또한 아이들에게도 마음껏 해 라는 자유를 허용하며 가르쳐주기 보다는,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선택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참된 진리 안에서의 자유를 가르쳐줘야겠습니다.
그러한 부모님들이, 교사들이 더욱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그림책을 감상하며,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를 바라보고,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것이
너무도 재미있습니다. 또 교수님의 글을 통해 생각치 못했던 더 깊은 생각을 하며 시야가 넓어 질 수 있어 너무도 감사합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아이들과 함께 하나님을 떠올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생각하며 감상할 수 있는 그림책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강다혜2026-07-27 17:53
얼마 전 아이랑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다가, 낮 시간 동안 걷는 만큼의 땅을 주겠다고 하여 욕심을 부리고 열심히 걷다가 그만 죽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저희 교회 6층에 있는 도서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우리가 걸어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우리가 그동안 교회 근처에 걷던 곳을 짚어보며, 여기서 저기까지 얼마나 걸렸지 뭐 이런 대화를 하다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정말 욕심이 많았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저희 아이가, "그냥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먼저 정해주지 왜 그랬대?"라고 말하더라구요. 처음부터 경계가 있었으면 안전하게 그 땅을 차지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경계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막스주의 사상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를 제한하는 것을 적이라고 간주하고 억압을 받는 것이라며 선동 당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은 경계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지 알면서도 말입니다. 저희 첫째는 교복을 입고 학교를 가는 것이 너무 좋다고 말합니다. 어떤 옷을 입을까 신경쓰고 고민하는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는 것이지요. 제가 어릴 때 과연 교복을 입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는 당골 토론 주제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교복을 입기 때문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에너지가 더욱 풍성해지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잊는 것 같습니다.
지민규2026-07-28 00:56
예전에 배웠던 성경공부 내용 중
물고기는 물 안에 있을 때, 나무는 땅에 뿌리를 박고 있을 때,
사람은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 있을 때
자유를 누릴 수 있고 풍성하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섭리대로 존재할 때.
경계가 모호해지는 시대에
그림책 문화에서도 올바른 경계 안과 잘못된 밖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시야를 열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물고기는 물 안에 있을 때, 나무는 땅에 뿌리를 박고 있을 때,
사람은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 있을 때
자유를 누릴 수 있고 풍성하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섭리대로 존재할 때.
경계가 모호해지는 시대에
그림책 문화에서도 올바른 경계 안과 잘못된 밖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시야를 열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김하순2026-07-28 09:23
경계가 허물어져 가는 세상 속에서 교육자와 기독교 부모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아이들을 이끌어야 하는지 가슴을 뒤흔드는 깊은 도전과 울림을 받았습니다.
첫째, '경계 없음'의 시대가 가져오는 본질적 위기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참과 거짓, 선과 악, 남성과 여성, 인간과 동물, 심지어 가상과 실제의 경계까지 무너뜨리는 현대 사회의 흐름과 트랜스휴머니즘의 시도는 겉보기엔 '진보'처럼 보이지만, 결국 인간의 존재론적 기초를 흔드는 위험한 모험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라는 거룩한 경계가 허물어질 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단순한 우연의 소산물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번 글을 통해 경계를 넘어서려는 시도가 가져올 결말을 엄중하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둘째, '경계 안'이야말로 진정한 생명과 자유의 터전임을 깨달았습니다.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 『물고기는 물고기야』, 『아모스와 보리스』와 같은 고전 그림책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너무나 명확합니다. 선로 위를 달리는 치치, 연못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창조주가 정해주신 '경계 안에 거하는 것'이야말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길입니다. 경계를 벗어난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위험과 위험천만한 방황일 뿐이며, 창조 질서의 테두리 안에서만 인간은 비로소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셋째, 버지니아 리 버턴의 말처럼 '가장 기초적이고 진실된 개념'을 전하는 사명을 가슴에 새깁니다.
*"가장 기초적인 것은 가장 중요하며 좋은 예술은 확실히 기초적인 것이다."*라는 버지니아 리 버턴의 고백이 제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줍니다. 어린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부모와 교사, 그리고 작가들 모두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원칙입니다.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어린이들의 마음에 헛된 환상이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진실된 개념(창조 질서와 진리)'**을 심어주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숭고하고 가치 있는 일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이들이 거룩한 경계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며 자랄 수 있도록, 진리의 기준을 단단히 지키는 파수꾼의 역할을 다하겠습니다. 귀하고 도전이 되는 글 감사합니다.
첫째, '경계 없음'의 시대가 가져오는 본질적 위기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참과 거짓, 선과 악, 남성과 여성, 인간과 동물, 심지어 가상과 실제의 경계까지 무너뜨리는 현대 사회의 흐름과 트랜스휴머니즘의 시도는 겉보기엔 '진보'처럼 보이지만, 결국 인간의 존재론적 기초를 흔드는 위험한 모험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라는 거룩한 경계가 허물어질 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단순한 우연의 소산물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번 글을 통해 경계를 넘어서려는 시도가 가져올 결말을 엄중하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둘째, '경계 안'이야말로 진정한 생명과 자유의 터전임을 깨달았습니다.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 『물고기는 물고기야』, 『아모스와 보리스』와 같은 고전 그림책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너무나 명확합니다. 선로 위를 달리는 치치, 연못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창조주가 정해주신 '경계 안에 거하는 것'이야말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길입니다. 경계를 벗어난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위험과 위험천만한 방황일 뿐이며, 창조 질서의 테두리 안에서만 인간은 비로소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셋째, 버지니아 리 버턴의 말처럼 '가장 기초적이고 진실된 개념'을 전하는 사명을 가슴에 새깁니다.
*"가장 기초적인 것은 가장 중요하며 좋은 예술은 확실히 기초적인 것이다."*라는 버지니아 리 버턴의 고백이 제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줍니다. 어린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부모와 교사, 그리고 작가들 모두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원칙입니다.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어린이들의 마음에 헛된 환상이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진실된 개념(창조 질서와 진리)'**을 심어주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숭고하고 가치 있는 일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이들이 거룩한 경계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며 자랄 수 있도록, 진리의 기준을 단단히 지키는 파수꾼의 역할을 다하겠습니다. 귀하고 도전이 되는 글 감사합니다.
경계 안의 삶이 누리는 자유
지금 우리 사회는 ‘경계(boundary) 없는 삶’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참과 거짓, 선과 악, 진리와 비진리, 남성과 여성, 가족과 비가족, 아버지와 어머니, 인간과 동물, 실제 세계와 가상 세계 등. 우리 삶의 기초를 흔들고 있는 이 ‘경계 없음’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KJV 창 3: 5)라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선악과를 먹고 자신들도 신과 같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그 결과 본래 영생을 누리도록 창조되었던 인간은 생명 나무로의 접근이 금지되고 낙원에서 추방되어 먼지로 돌아가는 슬픈 운명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제 현대의 과학기술은 인간이 기계가 되고 기계가 인간이 된다는 트랜스휴먼(trans-human)의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인공 지능과 나노 기술, 로봇 기술의 힘을 빌려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새로워 보이지만 결코 새것이라 할 수 없는 이 모험 이야기는 결국 어떤 결말을 가져올까요?
버지니아 리 버튼의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 레오 리오니의 『물고기는 물고기야』, 윌리암 스타이그의 『아모스와 보리스』는 모두 그림책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작품들입니다. 이 세 이야기는 문학적으로 몇 가지 특성을 공유합니다. 우선 모험 모티프(motif)라는, 픽션의 대표적인 문학적 전략입니다. 여기에서 주인공은 한두 가지의 심리적 결핍을 경험하며,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합니다. 따라서 이 이동은 신체적인 것만이 아니라 심리적, 혹은 사회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공통점은 의인화된 캐릭터입니다. 기관차라는 기계, 호수에서 사는 물고기와 올챙이(후에 개구리가 되는), 그리고 육지 동물인 생쥐와 해양 동물인 고래입니다. 서사에 등장하는 의인화된 캐릭터는 그것이 동식물과 같은 생명체든, 아니면 사물이든 간에 인간의 속성을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 체험의 중요한 측면을 이야기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들은 말하는 자와 보는 자, 모두 3인칭 시점이므로 독자들은 등장인물의 생각과 행동을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자세히 보기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의 주인공은 기관차 치치입니다. 이 작품은 흑백의 목탄화로 그려져 투박해 보이지만 그림은 거의 모든 장면이 대각선 구도를 사용하고 있어 속도감과 역동감을 자아내며, 글 텍스트 또한 기찻길처럼 보이게 하는, 아이코노텍스트(iconotext)의 효과를 십분 발휘하는 작품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여기 꼬마 기관차가 있어요. 이름은 치치라고 하지요. 치치는 새까맣고 반짝반짝 빛나는, 예쁘고 귀여운 기관차랍니다.” 그런데 사실 치치가 이렇게 멋진 모습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기관사 짐과 조수 몰리 아저씨가 항상 치치를 닦고 기름칠해 주었기 때문이지요.
어느 날 치치는 자신이 혼자 달린다면 훨씬 더 빨리 달릴 수 있고 모든 사람이 자신만 쳐다보면서 자신의 멋진 외모에 감탄할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래서 다음 날 아저씨들이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 쉬고 있을 때 냅다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치치가 건널목의 신호도 무시하고 내달리는 바람에 철로 옆의 사람들과 건널목을 건너던 차들 모두 넘어지고 부딪히며 대소동이 벌어집니다. 다리를 건너다 탄수차를 잃어버리기까지 한 치치는 몇십 년 동안 기차가 오가지 않은, 아주 오래된 낡은 기찻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치치는 자신에게 동력을 제공할 탄수차도 없어 오르막길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동안 짐 아저씨는 사람들과 동물들의 도움을 받아 치치를 찾아내고 큰 역으로 데려옵니다. 짐과 몰리 아저씨는 치치에게 다친 곳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춥니다. 치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짐 아저씨에게 말합니다. “아저씨, 이제 다시는 도망하지 않을게요. 도망쳐 봤자, 별로 재미도 없더라구요. 앞으로는 사람들을 가득 채운 객차랑, 짐을 잔뜩 실은 화차를 끌며 작은 마을에서 대도시까지 왔다 갔다, 왔다 갔다만 할 거예요.”
<물고기는 물고기야> 자세히 보기
레오 리오니의 『물고기는 물고기야』는 ‘교훈을 주기 위한 짧은 이야기’인 우화로 분류되는 작품입니다. 물고기와 개구리의 대화 위주인 글과 경쾌하고 강렬한 원색의 꼴라주 그림은 언어적이며 시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주인공인 물고기와 올챙이는 연못에서 사이좋게 살고 있는 친구입니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나자 올챙이는 몸에서 다리가 나오더니 개구리가 되어 그 연못을 떠나버렸습니다. 개구리가 없는 동안 어른이 된 물고기는 친구 개구리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합니다. 어느 날 개구리가 행복한 얼굴로 연못으로 돌아와 세상에 나가 신기한 것들을 많이 보았다며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날개와 다리가 둘 달리고 깃털이 알록달록한 새, 다리가 네 개이고 뿔이 달리고 풀을 뜯어 먹고 분홍색 젖이 달린 젖소, 남자, 여자, 아이들과 같은 사람... 자신의 인식의 틀에 따라 나름대로 그 형상들의 이미지를 상상하던 물고기는 호기심을 억누를 길 없어 온 힘을 다해 둑으로 뛰어오릅니다. 그러나 물 밖에 떨어진 물고기는 곧 숨을 쉴 수도, 몸을 움직일 수도 없어 숨만 헐떡거리는 신세가 됩니다. 마침 근처에서 놀고 있던 개구리가 물고기를 발견하고 다시 연못 속으로 밀어 넣어 줍니다. 정신을 차린 물고기는 개구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말이 맞았어. 물고기는 물고기야!”
<아모스와 보리스> 자세히 보기
『아모스와 보리스』는 위대한 스토리텔러(great storyteller)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윌리암 스타이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작품입니다. 바닷가에 사는 생쥐 아모스는 매일 바다를 바라보며 바다 저 멀리에 어떤 세계가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는 주도면밀하게 항해를 준비하고 만조가 되기를 기다려 바다로 떠납니다. 바다의 신비와 아름다움에 푹 빠져 있던 아모스는 갑작스러운 파도 때문에 배와 준비물을 모두 잃고 망망대해에 혼자 남겨집니다. 바다에 떠서 하룻밤을 넘기고 다음 날 낮이 되자 살 소망이 없어진 아모스는 자신의 죽음과 죽음 이후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때 큰 고래 보리스가 등장하여 아모스를 구해주고, 아모스는 이제 모험은 실컷 했으니 보리스에게 집으로 데려가 달라고 합니다(사실 보리스는 전 세계 고래들의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떠난 참이었지요).
아모스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그들은 서로의 꿈과 비밀을 나누며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갑니다. 아모스는 집으로 돌아오고, 그들은 각자 뭍과 물에서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느날 바다에 사나운 폭풍 허리케인이 불어닥쳐서 이번엔 보리스가 아모스가 사는 해변으로 밀려옵니다. 태풍의 피해를 살펴보려고 바닷가로 나온 아모스가 몸이 말라 죽게 된 보리스를 발견합니다. 친구를 구하기 위해 아모스는 가장 큰 코끼리 두 마리에게 부탁해 보리스를 바닷속으로 굴려 넣습니다. 목숨을 건진 보리스는 “바닷속 감촉이 얼마나 좋은지 제대로 알려면 바다 밖으로 나가보지 않으면 안 돼. 그렇고 말고, 고래라면”이라고 중얼거리고 바다 깊은 곳으로 헤엄쳐 갔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작별인사를 하는 주인공을 대신하여 서술자는 이렇게 이야기를 맺습니다. “아모스와 보리스는 서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하지만, 서로를 절대로 잊지 않으리란 것도 알고 있었어.”
이 세 작품은 모험, 죽음, 구원자, 집을 떠남, 돌아옴과 같은 문학의 모티프를 반복합니다. 주인공들은 다른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에 이끌려 모험을 감행합니다. 그러나 낯선 세상에서 그들은 위기의 순간을 맞게 되고, 다행히 구원자를 만나 생명을 건지게 됩니다. 거추장스런 객차와 화차를 떼어버리고 자신을 뽐내기 위해 일탈을 감행한 치치, 자신이 만들어 낸 뭍의 이미지에 이끌려 뭍으로 뛰어 오른 물고기, 바다 너머 세상을 동경하여 항해를 시작한 아모스, 그리고 자신의 의지가 아닌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해변으로 떠밀려 온 보리스. 그들이 자신의 경계를 벗어난 이유는 다양하지만 모두 자신의 집에 돌아와 안정감과 만족감과 기쁨을 되찾습니다. 생명을 나눈 아모스와 보리스에게 이별은 분명히 슬픈 일이었겠지만 성숙해진 그들은 그들의 우정을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기고 헤어집니다.
경계 안에 거한다는 것은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 그 이상의 가치를 뜻합니다. 그것은 ‘자유’입니다. 치치는 정해진 선로 위에서 자유롭게 달릴 수 있게 되었고, 물고기는 연못 속에서 마음껏 헤엄칠 수 있게 되었고, 아모스와 보리스는 각자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서 행복한 삶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유는 때로는 물리적인 생명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지닙니다. 자유 없는 생명은 노예나 종과 같은 굴종의 삶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자유를 얻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 고귀한 인물들을 칭송하는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경계 안에 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 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의 일탈 이후 그 선(線)을 넘으려는 시도는 수없이 재현되었습니다. 급기야 19세기에 등장한 진화론이 과학의 이름으로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허물어트리자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 형상의 담지자(image bearer of God)가 아니라 우연의 소산물로 여겨졌습니다. 그 다음에는 인간의 성(性)의 경계가 무너져 기존의 성을 가리키던 남(男)과 여(女))라는 단어는 언어유희의 놀이감이 되어 LGBTQ를 비롯한 수십 개의 명칭으로 치환되었습니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사람, 밤낮으로 성정체성이 변하는 사람, 의료기술의 힘으로 다른 성(性)이 된 사람, 남성이지만 여성으로 불리기를 원하는 사람, 그리고 그 반대의 존재 등. 그런데 만일 인간이 우연의 산물이라면 성(性)이 무엇이든, 인간이 동물이 되든, 기계가 되든, 심지어 돌이 되든 매한가지가 아닐까요?
그림책의 이야기는 줄거리가 간결하므로 그 주제가 더욱 선명한 형태로 드러납니다. 기관차와 물고기와 쥐와 고래가 엮어내는 이 비유의 이야기들은 여느 학자의 글보다도 간명하게 인간됨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함축합니다. 우리는 버지니아 리 버튼이 1943년 그의 작품 『작은 집 이야기』의 칼데콧 수상 연설에서 한 이 말을 오랫동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기초적인 것은 항상 가장 중요하며, 좋은 예술은 확실히 기초적인 것이다. 아동도서라는 미디어를 통해 어린 마음에 인상을 주는 것은 어린이에게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진실된 개념을 줄 수 있는 가장 가능한, 좋은 일이다"(1).
(1) Elleman, B. (2004). The picture-book story in twentieth-century America westport. In Pavonetti, L. M. (Eds.), Children’s literature remembered: issues, trends, and favorite books (pp. 27-38). CO: Libraries Unlimited.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이며 그림책 평론 작업을 하고 있다. 미국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1989년부터 2023년까지 성대 아동청소년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2021년부터 웹진 <그림책 베이직>에 '그림책의 세계관'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그림책 세계관 연구소에서 운영하고 있는 '그림책 세계관 지도사 과정'에서 '그림책의 세계관', '기독 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세계관>, 공저로는 <그림책의 이해1, 2>, <그림책과 예술교육>, <세계 그림책의 역사>, <어린이교육전문가가 엄선한 100권의 그림책>, <신앙이 자라는 그림책 읽기>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