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행복은 어디에서 올까 『무지개 물고기』, 『티코의 황금날개』, 『너는 특별하단다』

2024-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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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복은 어디에서 올까  『무지개 물고기』, 『티코의 황금날개』, 『너는 특별하단다』


        



어린이 문학에서 가장 자주 다루어지는 주제는 ‘성장’과 ‘정체성’이다. 어린이 소설의  플롯은 대부분 이야기의 도입부에 등장한 어린이 주인공이 몇 가지 갈등을 경험한 후에 좀 더 성숙한 존재로 변화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정체성의 심리학』의 저자인 박선웅 고려대 교수는 “정체성이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삶의 방향에 대해 결단을 내린 정도를 의미한다.”라고 정의하였다.[1]  정체성의 형성은 평생에 걸쳐 진행되는 것이지만 아동기의 정체성은 주변 인물들과의 상호작용 안에서 이루어진다. 지금부터 세 개의 그림책 텍스트(『무지개 물고기』, 『티코와 황금날개』,  『너는 특별하단다』)가 이 주제를 다루고 있는 방식을 비교해 보도록 하자. 

마르쿠스 피스터(Marcus Pfister)(1960- )의 『무지개 물고기』는 매우 일찍 국내에 소개된 번역서이다. 그는 스위스 출생이며 베른 예술학교에서 그림과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하고 에르바 상, 케이트 그린어웨이 상 등 세계적인 일러스트 상을 받은 바 있으며, 이 작품으로 인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2] 원작의 출판일이 1992년이었는데 번역본 초판이 1994년 출간되었을 정도로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 그 이후로 무지개 물고기를 주인공으로 하는 시리즈물이 출간되었는데, 그의 작품이 인기를 얻은 가장 주된  이유로 화려한 일러스트레이션을 들 수 있다. 그가 그림책 제작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는 홀로그램 일러스트레이션  기법은 신비롭고 환상적인 느낌을 주어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표지에는 동그란 눈과 분홍색의 두꺼운 입술을 가진  물고기가 중앙에 크게 그려져 있다. 그 주위의 푸른 바닷물은 그의 비늘이 뿜어내는 광채를 반사하며 아름답게 물결치고 있다. 이 이야기는 3인칭 전지적 시점을 사용하며, 그림에서는  홀로그램 재질이 입혀진 무지개 물고기가 아름답게 빛을 발한다.  본문의 첫 화면은 이 무지개 물고기를 소개하는 내용이다. “깊고 푸른 바다 저 밑에 물고기 한 마리가 살았습니다. 그 물고기는 보통 물고기가 아니라, 온 바다에서 가장 아름다운 물고기였습니다. 파랑, 초록, 자줏빛 비늘 사이사이에 반짝반짝 빛나는 비늘이 박혀 있었거든요.” 그 다음 화면에서 그 물고기는 자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함께 놀자고 다가온 물고기들을 무시하고 지나가 버린다. 다른 물고기들이 다 사라지고 난 후 파란 꼬마 물고기가 다가와 반짝이는 비늘 한 개만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자 무지개 물고기는 ”내가 가장 아끼는 건데 널 달라고? 네가 뭔데 그래? 저리 비켜!“라고 소리를 지른다. 깜짝 놀란 파란 꼬마 물고기가 친구들에게 그 일을 일러바치고, 그 후 아무도 무지개 물고기랑 놀려고 하지 않는다. 아무도 놀아주지 않자 무지개 물고기는 바다 속에서 가장 쓸쓸한 존재가 된다.

그는 불가사리 아저씨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아저씨는 문어 할머니에게 가서 조언을 들으라고 한다. 그의 사정을 이미 알고 있던 문어 할머니는 다른 물고기들에게 비늘을 한 개씩 나눠주면 바다에서 가장 아름답진 못하겠지만 지금보다 훨씬 행복해질 것이라고 충고한다. 무지개 물고기는 ”내 비늘을 나눠 주라고? 이렇게 예쁜 비늘을? 안돼. 비늘이 없으면 난 행복하게 살 수 없는 걸.“라고 하며 거부한다. 조금 후 무지개 물고기에게 파란 꼬마 물고기가 따라와 자신은 그냥 작은 비늘 한 개만 갖고 싶었을 뿐이니 화내지 말라고 사과한다. 무지개 물고기는 가장 작은 비늘 한 개를 뽑아 꼬마 물고기에게 준다. 그 후 그는 다른 물고기에게 자신의 비늘을 하나씩 떼어 나눠 주기 시작한다. 이제 무지개 물고기에게 비늘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지만 주위의 바다는 반짝이는 비늘로 가득해지고 그는 다른 물고기 사이에서 행복감과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이야기는 이렇게 따뜻하게 마무리된다. ‘“이리 와. 무지개 물고기야. 이리 와서 우리랑 같이 놀자!” 물고기들은 무지개 물고기를 불러 냈습니다. “그래. 곧 갈게.” 무지개 물고기는 기분이 좋아서 지느러미를 흔들며 친구들을 만나러 헤엄쳐 갔습니다.”’

『무지개 물고기』에 대한 독자들의 평은 매우 긍정적이다. “나눔”, ‘우애’라는 미덕을 가르치기 적합한 텍스트로 유명하며, 유아교육기관과 가정에서 교육용 텍스트로서 자주 사용된다. 어떤 물건을 두고 유아들 사이에서 흔히 벌어질 수 있는 갈등을 글과 그림으로 잘 녹여서  들려주기 때문일 것이다. 인터넷에도 이 작품과 관련된 수 많은 동영상들이 소개되어 있다. 책 읽어주기를 비롯하여 이야기하기, 무지개 물고기 만들기,  드라마 활동을 하기 등 다양한 사후 활동 영상들은 물론, 상업용 극단의 연극도 인기리에 공연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이 작품의 세계관에 대해서 재고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오래전(30년전쯤?) 유치원을 다니던 아들에게 이 책을 읽어주고 있었을 때였다. 아들이 느닷없이 파란 작은 물고기가 나쁜 애라고 분개하는 것이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파란 물고기가 무지개 물고기에게 자기 것도 아닌 비늘을 달라고 했고, 거절당하자 친구들에게 고자질해서 무지개 물고기를 따돌렸다는 것이다. 나도 여느 성인독자와 같이 이 텍스트의 교육성을 높게 평가하고 있던 터라 어린 아들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하여, 만일 이 텍스트가 ‘나눔’의 미덕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평등한 소유’의 미덕을 옹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구심이 들었다. 무지개 물고기는 행복하려고 친구들에게 비늘을 나눠준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똑같이 소유해야 행복하다’라는 아이디어는 자유 민주주의 경제 체제를 위협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그런데 이것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그동안  거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실은 어린이용이 분명해 보이는 이 텍스트에도 몇가지 문학적 설득전략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저자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독자들과 공유하기를 바란다. 즉, 독자들이 자신의 관점에 동의하기를 바라면서 창작활동을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다양한 설득전략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사용된 설득전략은 무엇일까. 그것은 ‘권선징악’과 ‘대조’이다. 즉, 선한 자가 복을 받고 악한 자는 벌을 받는다는, 거의 모든 서사에서 반복되는 주제이다. 무지개 물고기는 교만하고 욕심쟁이로 비춰지는 반면에, 파란 작은 물고기는 작고 힘이 없으며 예의 바른 캐릭터로 그려지므로 자연스럽게 악과 선의 구도가 발생한다. 나중에 파란 물고기가 무지개 물고기에게 다가와 자신이 비늘 하나를 달라고 한 것에 대해 정중하게 사과하므로 인해 또 다시 파란 물고기의 겸손함과 무지개 물고기의 교만이 대조된다.  하지만 사실 무지개 물고기가 왕따를 당한 직접적인 원인은 파란 작은 물고기의 고자질 때문이었던 것이다. 물론 파란 물고기는 그 후 돌아와서  그 일에 대해 사과를 했지만 말이다.

또한 무지개 물고기의 잘못은 아름다운 비늘의 소유에 있지 않다는 것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 이야기는 그의 비늘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다. 그는 그저 아름다운 비늘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사실 똑같은 조건 하에서 태어나는 인간은 없다.  부모, 외모, 건강, 좋은 DNA…. 등.  같은 가정에서 태어난, DNA가  같은 일란성 쌍둥이도 자라면서 다른 환경에 노출되면서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게다가 인간은 무엇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태어난다. 아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자기 장난감을 갖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재물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도 함께 주셨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 것은 소중히 다루게 되며, 개인의 소유욕과 소유권은 이 자유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근간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욕구 자체를 나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무지개 물고기의 잘못은 비늘의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복의 절대 기준으로 삼고 교만해 졌다는 데 있다.

이번엔 레오 리오니(Leo, lionni)(1910-1999)의 『티코와 황금날개』(1964)를 읽어보도록 하자. 그는 그래픽 디자이너로 경력을 쌓았으나 50세가 되던 해, 손주에게 잡지를 찢어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붙여서 작품을 만든 사건(이 작품은 후에 『파랑이와 노랑이』로 출판됨)이  계기가 되어 그림책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의 그림은 꼴라쥬 기법과 수채화 등 다양한 기법을 섞어서 다양한 질감과 시각적 자극, 색채의 조화를 보여준다. 개성있는 예술성 외에도 그의 작품은 깊은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으므로 그림책이 어린이 독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3] 

『티코와 황금날개』는 그의 다른 작품들처럼 다층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 행복, 나눔과 희생, 우정, 성장과 변화. 자기 정체성 등. 액자식 구성의 이 이야기는 책의 도입부에 한 인물이 등장하여 독자들에게 티코라는 새를 소개해 주고, 티코가 자신의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야기 도입 부분에서 화자가 하는 말은 이탤릭체로, 티코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정자체로 되어 있어 두 이야기가 구분된다. 그림은 대체로 가까운 거리에서 정면에서 바라보는 시점을 취하므로 독자들은 등장인물의 감정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이 작품에서 특이한 점은 인도풍의 그림 스타일이다. 등장인물의 머리에 두른 터번과 베일, 화려한 색감의 인도 전통 의상 등은 이국적 느낌을 전달하며, 황금 날개를 지닌 새는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표지에서는 녹갈색의 나무잎 위를 황금 날개를 활짝 핀 티코가 날고 있다. 본문에서 티코는 이렇게 자신을 소개한다. “어렸을 때 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날개가 없었어요. 다른 새들처럼 노래도 하고 팔짝팔짝 뛰기도 잘 했지만 날지는 못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그를 사랑했고 나무에서 열매를 따 그에게 가져다 주었다. 매일 튼튼한 황금빛 날개가 생기는 꿈을 꾸곤 하던 티코는 어느 여름날 저녁  진주빛이 나는 이상한 새 한 마리로부터 황금 날개 한 쌍을 선물받게 된다. 황금 날개를 얻은 그는 아주 높이 날 수 있어서 매우 행복했다. 하지만 친구들은 그가 잘난 척한다고 비난하고 모두 떠나버린다. 그는 이렇게 자문한다. “친구들이 왜 가 바렸을까? 왜 화가 난 것일까? 나는 독수리만큼 높이 날 수 있었고, 내 황금 날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어요. 그런데도 친구들은 떠나 버렸고 나는 혼자가 되었어요.”

어느 날 티코는 자기 오두막집 앞에 앉아 눈물 흘리고 있는 남자를 만나게 되고, 그가 슬퍼하는 이유를 묻는다. 남자가 아이에게 약을 사 줄 돈이 없다고 답하자 티코는 자신의 황금 깃털을 뽑아 그에게 준다. 그 다음 부터 티코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황금 날개를 한 개씩 뽑아 준다. 꼭두각시 인형이 필요한 가난한 서커스단, 담요 짤 물레가 필요한 가난한 할머니, 나침반이 필요한 어부, 아름다운 신부 등. ... 신기하게도 황금 깃털이 뽑힌 자리에는 까만 깃털이 돋아난다. 친구들과 똑같이 까만 깃털을 갖게 된 그가 친구들을 찾아가자 그들은 기뻐 노래하며 “너 이제 우리와 같구나”라며 그를 반겨 준다. 그들과 함께 꼭 붙어서 잠을 청하는 티코는 너무 행복해서 잠을 자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행복한 이유는 그들에게 인정받아서가 아니었다. 본문 마지막 문장에서 그는 자신이 도와 주었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이렇게 독백한다. “이제 내 날개는 까만색이야. 그렇지만 나는 친구들하고 똑같지는 않아. 우리 모두는 조금씩 달라.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추억과 서로 다른 황금빛 꿈을 가지고 있으니까.” 

서사가 결말을 맺는 방식은 그 작품의 전체 의미를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작품의 결말이 맺어지는 방식이 등장인물과 그 행위에 대해 작가 자신이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는가를 해석하는 열쇠가 된다. 무지개 물고기와 티코의 서사는 외적으로는 그 구성이나 결말이 거의 유사해 보인다. 빛나는 비늘을 소유하고 있는 까닭에, 혹은 황금빛 깃털 때문에 동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던 주인공들이 그것을 동료들에게 나눠주거나, 혹은 선행을 베푸는데 소진함으로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인정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의 행복관은 상당히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행복해지기 위해 『무지개 물고기』는 친구들과 동등한 소유를 선택한 반면, 티코는 친구들과 같은 외양을 갖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추억과 꿈 때문에 행복해졌다. 무지개 물고기와 티코가 자아를 확인하게 되는 경로도 다르다. 무지개 물고기는 ‘다름’에서 ‘같음’으로 변화하지만, 티코는 ‘다름’-‘다름’-‘같음’으로 진행한다. 『티코와 황금날개』에 인도의 문화적 요소들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은 작가와 인도라는 나라에 대한 호기심을 자아낸다. 게다가 본문에서 "내 마지막 금빛 깃털을 아름다운 신부에게 주었을 때, 내 날개는 인도 잉크처럼 검었다"라는 표현도 사용하고 있다. Chat GPT로 검색해 해 본 결과, 작가와 인도와의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으며 이 문장은 단지 티코의 날개가 짙은 검은색으로 변했음을 비유하는 것이라는 해석을 보여준다. 세계관을 비교해 본다면, 전자가 물질적 평등(equity)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반면, 후자는 각 개인이 고유성과 삶의 의미를 결정한다는  면에서 개인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맥스 루케이도(Max Lucado)의 『너는 특별하단다.』를 보자. 이 이야기는 ‘웸믹’이라고 불리는 나무 사람들의 동네에서 벌어진 일로 시작한다. 그들은 언덕 위에 사는 목수 엘리 아저씨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였지만 모두 달랐다. 그들의 일과는 다른 나무 사람들에게 별표를 붙이고 다니는 것이 전부였다. 무엇인가 특출난 것이 있는 나무 사람들에게는 금빛 별표를, 내세울 것이 없는 자들에게는 잿빛 점표를 붙여주었다. 그러다 보니 웸믹들은 다들 타인에게 잘 보여서 금빛 별표를 받으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펜치넬로라는 웸믹은 잘 하는 것이 없고, 실수가 많아 잿빛 점표만 몸에 가득 붙게 되었다. 자존감이 매우 낮아진 그는 어느 날 몸에 아무 것도 붙지 않은 루시아라는 여자 웸믹을 만나게 된다. 루시아에게도 웸믹들이 금빛 별표를, 혹은 잿빛 점표를 붙였지만 곧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루시아가 부러웠던 펀치넬로가 그 이유를 묻자 루시아는 자신은 매일 엘리 아저씨를 만나러 가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망설이던 펀치넬로는 용기를 내어 언덕 위 엘리 아저씨의 작업장으로 간다. 엘리 아저씨는 반갑게 그를 맞이하며 자신이 펀치넬로를 만들었고, 날마다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펀치넬로의 몸에 붙은 표는 자신이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할 때만 붙는 것이라고 일러준다. 대신, 펀치넬로가 엘리 아저씨의 사랑을 깊게 신뢰하면 할수록 그 표들에 신경을 덜 쓰게 될 것이라고 덧붙인다. 그는 펀치넬로에게 매일 자신을 찾아오라고 하며 “너는 아주 특별하단다. 나는 결코 좋지 못한 나무 사람을 만든 적이 없어.”라고 말한다.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펀치넬로가 문을 나서며 “아마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몸에 붙어 있던 점표 하나가 땅에 떨어진다.

성경의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는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엘리 아저씨는 창조주 하나님을, 나무 사람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을 비유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도 매일 나무 사람들처럼 서로를 평가하고 점수를 매기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특별하게 만드셨다고 하시며, 영원히 변치 않는 그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펀치넬로가 엘리 아저씨를 매일 찾아가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항상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이야기와 티코의 이야기를 비교해 보면 흥미로운 차이가 나타난다. 티코가 자신만의 꿈을 꾸는 이유는 자기 충족의 욕구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함이라고도 할 수 있다. 티코는 자신이 날개가 없을 때 잘 대해주던 동료들이 도리어 황금 날개가 생기자 그를 거부했다는 사실을 잊지 못할 것이며,. 그 경험이 티코에게는 큰 상처로 남아있을 지 모른다. 따라서 그가 자신만의 꿈을 꾸며 행복해 하는 이유는 변덕스러운 친구들로 인해 또 다시 같은 상처 받기를 회피하기 위해서일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자기가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자칫 개인주의의 오류로 흐를 수 있다.[4] 인간의 유한성으로 인해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나의 정체성을 정립할 수 있고 나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합리적이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나의 출생이 내 의지로 된 것이 아닌 것처럼 죽음을 비롯하여 내게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도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한 내가 어떻게 나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미 우리 사회는 이러한 메시지들로 넘쳐나고 있다. “네가 네 삶의 주인이다. “, “너의 한계는 바로 너다.”... 유명한 의류 업체인 나이키의 광고는 그러한 세계관을 부추긴다. “Just do it.”(그냥 네가 해 버려-> 지금 네 욕망을 충족시켜라는 의미), “There is no finish line.”(결승선은 없어->: 너의 한계는 없다는 뜻.).  심지어 미국 새들백 교회의 목사인 릭 워렌이 쓴 『목적이 이끄는 삶』과 같은 신앙서적도  ‘나 중심주의’의 세계관을 선포한다.

공동체의 기준을 나를 평가하는 원천으로 삼는 것과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것 사이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인간의 삶을 초월하는 기준을 나의 정체성과 가치의 참조점(reference)로 삼는 것이다. 성경은 수없이 우리의 존재와 가치는 우주의 중심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고, 창조세계를 잘 관리하기를 바라셨지만 그들은 금지된 과일을 따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탄이 지배하는 나라로 추락하게 되었다(창 1장-3장). 영생을 살도록 창조된 그들은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으며 출산과 노동의 고통을 짊어지게 되었고, 땅도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어둠의 세상에 속하게 된 인간을 다시 찾아 오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통해 그것을 성취하셨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KJB 요 3: 16).


크리스찬은 교회에 출석하고 헌금내고 기도하는 등의 외형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물론 그것도 성도의 삶에서 중요한 것이지만 진정한 크리스찬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성경 신자(bible believer)이다. 그는 창조(creation) -타락(fall) -구속(redemption) -성화(sanctification) -영화(glorification)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사실로서 믿고, 자신도 그 안에 거하는 자이다. 성경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어둠의 세상에서 빛의 왕국으로 옮겨진 자임을 믿고 매일 성화의 과정을 밟아간다. 성화라는 것은 어떤 신비하고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가정과 일터와 취미생활, 교제 등…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신 곳은 하나도 없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얻은 것이지만 구원받은 후 우리의 삶은 놀이터가 아니라 내 자신 안에 도사린 죄성과 타락한 이 시대 정신에  대항하여 싸우는 영적 전쟁터가 되었다(엡 6: 12). 우리는 악한 날에 능히 버티어 내고 모든 일을 행한 뒤에 서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갑, 화평의 복음의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를 입고 싸워야 하는 군사로서 살아간다 (엡 6: 13-17). 그림책 평론도  예외는 아니다. 점점 더 많은 그림책 작가들이 그림책이라는 매체에는 독자의 경계가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하나님을 대적하는 진화론, 젠더주의, 문화막시즘, 뉴에이지를 글과 그림 안에 교묘히 그려내고 있다.  문화는 우리가 숨쉬는 공기와 같으므로 우리의 영이 깨어있지 않으면 문화 안에 스며든 시대 정신을 그대로 흡입하게 된다. 이는 어린이용으로 제작된 『무지개 물고기』와 같은 단순한 서사마저도 주의깊게 읽어볼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작가들 역시 그 사회와 시대의 세계관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1] https://www.edui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253
[2] https://m.blog.naver.com/sgb1515/100120182507
[3] 현대 우화의 거장, '레오 리오니'의 대표작 : 네이버 포스트 (naver.com)
[4] Wilkens, S. & Sanford, M. L.  (2013). 은밀한 세계관. IVP.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후 Eastern Michigan University 에서 석사,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어린이문학교육학회 회장 및 한국 기독교 유아교 육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아동 청소년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대학 부설 생활과 학 연구소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기독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이해>(공저), <그림책과 예술교육>(공저>, <그림책으로 보는 아동과 우리사회>(공저), <100권의 그림책>(공저) 등 그림책 관련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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