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의 세계관
나의 행복은 어디에서 올까 『무지개 물고기』, 『티코의 황금날개』, 『너는 특별하단다』
15
14
원계실2026-07-28 17:02
'무지개 물고기'는 유치원과 학교에서 실제로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다시 읽어보니 결말에 의구심이 남습니다. 무지개 물고기는 반짝이는 비늘을 하나 씩 나눠 주고서야 무리에 받아들여집니다. 이것을 관계기술로 봐야할까요?
다름은 관계의 장애물이고, 하향 평준화된 자리(여기서는 반짝이는 비늘을 동경하기 때문에)에서만 편안함이 온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참된 나눔은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지, 소속을 얻기 위해 치르는 대가로 보는 것이 맞을지 고민되는 지점입니다. 관계의 조건으로 요구된 균일화는 나눔이 아니라 순응이며, 이는 각 존재를 고유하게 지으신 창조의 질서와도 어긋납니다.
'티코의 황금날개'는 결이 살짝 다른듯해요. 티코는 남과 다른 황금 날개를 가졌다는 이유로 배척 당하지만, 그 날개를 하나 씩 내어 줄 때마다 평범한 깃털(검정색)이 돋고 마침내 친구들과 같아집니다. 언뜻 무지개 물고기와 닮았으나, 이 책은 티코가 내어 준 날개가 저마다 다른 이의 필요를 채웠음을 보여 주고, 마지막에 '우리는 모두 다르'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됩니다. 균일화가 아니라 각자의 다름을 긍정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에 수용되기 위해서는 특별함을 내려놓아야만 했다는 전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너는 특별하단다' 에서의 웸믹들은 서로에게 별표와 점표를 붙이며 인정과 배척을 주고받지만, 주인공 펀치넬로는 자신을 지은 목수 엘리를 만나고서야 그 평가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여기서 가치는 무리의 인정에서 오지 않습니다. 나를 지으신 이의 사랑에서 옵니다. 앞의 두 책이 '어떻게 무리에 받아들여질 것인가'를 물었다면, 이 책은 '나의 가치는 애초에 어디서 오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결국 세 책의 차이는 행복과 존재의 근거를 관계의 순응에 두느냐, 다름의 긍정에 두느냐, 아니면 나를 지으신 이의 사랑에 두느냐의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름은 관계의 장애물이고, 하향 평준화된 자리(여기서는 반짝이는 비늘을 동경하기 때문에)에서만 편안함이 온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참된 나눔은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지, 소속을 얻기 위해 치르는 대가로 보는 것이 맞을지 고민되는 지점입니다. 관계의 조건으로 요구된 균일화는 나눔이 아니라 순응이며, 이는 각 존재를 고유하게 지으신 창조의 질서와도 어긋납니다.
'티코의 황금날개'는 결이 살짝 다른듯해요. 티코는 남과 다른 황금 날개를 가졌다는 이유로 배척 당하지만, 그 날개를 하나 씩 내어 줄 때마다 평범한 깃털(검정색)이 돋고 마침내 친구들과 같아집니다. 언뜻 무지개 물고기와 닮았으나, 이 책은 티코가 내어 준 날개가 저마다 다른 이의 필요를 채웠음을 보여 주고, 마지막에 '우리는 모두 다르'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됩니다. 균일화가 아니라 각자의 다름을 긍정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에 수용되기 위해서는 특별함을 내려놓아야만 했다는 전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너는 특별하단다' 에서의 웸믹들은 서로에게 별표와 점표를 붙이며 인정과 배척을 주고받지만, 주인공 펀치넬로는 자신을 지은 목수 엘리를 만나고서야 그 평가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여기서 가치는 무리의 인정에서 오지 않습니다. 나를 지으신 이의 사랑에서 옵니다. 앞의 두 책이 '어떻게 무리에 받아들여질 것인가'를 물었다면, 이 책은 '나의 가치는 애초에 어디서 오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결국 세 책의 차이는 행복과 존재의 근거를 관계의 순응에 두느냐, 다름의 긍정에 두느냐, 아니면 나를 지으신 이의 사랑에 두느냐의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은혜2026-07-29 00:40
아이가 어린이집 다닐 때부터 화두가 되어서 접해보았던 [무지개 물고기]. 사실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은지 의아했었습니다. 비늘을 내어 줘야만 하는 상황이 억지스럽고, 왜 줘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애초에 주지 않는다고 화내고 따돌리는 친구도 이해 되지 않았습니다. 몇달 전에는 이 무지개물고기 영상을 본 후 아이와 물고기 모양으로 초밥을 만들어 먹는 학부모 참여 프로그램도 있었습니다. 그때도 이 초밥을 만드는 활동에 왜 무지개물고기 책이 사용되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는데, 무분별한 HOW를 경험한 것 같습니다. 그림책의 세계관에 대해 알지 못하는 때였음에도 이런 의문이 들었던 것은, 성경적 세계관에 맞닿아 있지 않은 책이라 그랬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아이에게 '나눔'과 '우애'라는 내용이 남았을지, 아니면 다른 부정적인 내용이 남았을런지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이는 무지개 비늘에 매료되었었습니다. 또한 [너는 특별하단다]를 여러 차례 읽어오면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이야기하며 좋은 방향성으로 지도를 해보려 해도, 어쨌든 아이들은 펀치넬로나 다른 웸믹들이 못생겼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지는 반응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사실 어떤 책을 읽어도 그 그림 속 캐릭터들의 모습에 관심 갖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런 걸 생각해보면, 어린 아이들에겐 특히 비주얼적으로 민감한 아이들(특히 여아)에겐 보여지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것을, 그림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낍니다.
결국 어린 아이들의 이런 솔직한 반응들을 통해 인간이 외형을 중시 여기는 죄성을 더 적나라하게 발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내용의 결은 다를지라도 무지개 물고기, 티코, 펀치넬로 모두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작이 외형으로부터 시작되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모태서부터 신묘막측하게 지으셨고 태초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택하셨기에 우리는 '나'를 존재 자체로 귀하게 여겨야 하는데, 인간들의 사회 문화는 보여지는 모습에 너무 치중 되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가장 존귀하게 여겨지는 성경적 세계관이 아이들에게 더 많이 흘러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루시아와 펀치넬로가 매일 목수 엘리를 만나는 것처럼, 매일의 삶에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구분함으로써 우릴 존귀하게 여겨주심에 감사가 넘치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랬을 때 아이들에게도 올바른 세계관과 정체성을 전해줄 수 있을테지요.
아이에게 '나눔'과 '우애'라는 내용이 남았을지, 아니면 다른 부정적인 내용이 남았을런지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이는 무지개 비늘에 매료되었었습니다. 또한 [너는 특별하단다]를 여러 차례 읽어오면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이야기하며 좋은 방향성으로 지도를 해보려 해도, 어쨌든 아이들은 펀치넬로나 다른 웸믹들이 못생겼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지는 반응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사실 어떤 책을 읽어도 그 그림 속 캐릭터들의 모습에 관심 갖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런 걸 생각해보면, 어린 아이들에겐 특히 비주얼적으로 민감한 아이들(특히 여아)에겐 보여지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것을, 그림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낍니다.
결국 어린 아이들의 이런 솔직한 반응들을 통해 인간이 외형을 중시 여기는 죄성을 더 적나라하게 발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내용의 결은 다를지라도 무지개 물고기, 티코, 펀치넬로 모두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작이 외형으로부터 시작되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모태서부터 신묘막측하게 지으셨고 태초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택하셨기에 우리는 '나'를 존재 자체로 귀하게 여겨야 하는데, 인간들의 사회 문화는 보여지는 모습에 너무 치중 되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가장 존귀하게 여겨지는 성경적 세계관이 아이들에게 더 많이 흘러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루시아와 펀치넬로가 매일 목수 엘리를 만나는 것처럼, 매일의 삶에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구분함으로써 우릴 존귀하게 여겨주심에 감사가 넘치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랬을 때 아이들에게도 올바른 세계관과 정체성을 전해줄 수 있을테지요.
현은자2026-07-30 16:20
세 책에 대한 자녀들의 반응을 소개하고 분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아이들의 반응이 무척 궁금했거든요. 비주얼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서사의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신앙적인 독서 지도의 필요성이 더 절실한 것 같습니다.
김주경2026-07-31 16:54
무지개 물고기와 티코가 모두 자신의 것을 내어준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두 작품이 보여주는 행복관은 서로 다르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이 어려운 것 같아요. 이 차이를 생각하면서, 제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자주 겪어온 딜레마가 떠올랐습니다.
저는 제 에너지가 고갈되거나 아예 상대를 향한 문을 닫아버리는 두 극단 사이에서 많이도 갈팡질팡 했던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두루뭉실하고 순한 성격이었던 저는 무지개 물고기처럼 나의 것을 내어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에 잘 지치곤 했습니다. (그것이 외부로부터 온 압박인지, 혹은 스스로의 생각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때로는 그만큼의 보상을 기대하다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오히려 날을 세우고 냉소적인 태도로 선을 그어 버리기도 했습니다. 책을 대충 읽는다면 나는 왜 무지개 물고기처럼 나의 것을 내어주지 못하는가 하고 자책을 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럴 때 마지막으로 소개해주신 ‘너는 특별하단다’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떠올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을 읽으며 묵상했던 문장들도 생각났습니다.
1. 나는 내가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까지도 모두 벗어 버리고 오직 아무것도 꾸미지 않은 벌거벗은 나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2. 순진한 무지라는 거짓 피난처에서 나와 말씀의 거울 앞에 정직하게 서고, 성령의 다스림을 구하며, 악의 유혹과 시험을 말씀의 능력으로 이겨내고, 자신의 마음을 지켜내는 것이 진정한 청결함이다.
다른 사람의 평가뿐 아니라 스스로 자신에게 내리는 평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저 역시 루시아처럼 매일 엘리 아저씨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비약적인 연결일 수 있지만… 이 이야기를 교회 공동체의 모습과도 연결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제가 문제 삼고 싶은 것은 목회자에게 권위가 치중되어있고, 성도들은 만인제사장으로서 예배의 주체가 되기보다 예배를 보는 관객이 되어 버린 구조입니다. 성도들이 예배자가 되지 않고 소비하는 관객이 된다면 더 유명한 설교자, 더 큰 무대, 더 전문적인 찬양, 더 눈에 띄는 직분을 통해 자신의 신앙적 가치를 확인하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은 결국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들을 신뢰하고 의존할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에서도 은사가 몇 사람에게만 집중되는 것이 아닌 각 사람에게서 발견되고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헌신이 죄책감이나 인정 욕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은혜와 사랑에서 흘러나오도록 매일 예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매일 그 앞에서 자신의 고유한 가치와 정체성을 확인할 때, 우리 자신이 소진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향해 문을 열어주는 그 균형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를 자신의 기준으로 평가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고유한 존재로 바라보며 품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제 에너지가 고갈되거나 아예 상대를 향한 문을 닫아버리는 두 극단 사이에서 많이도 갈팡질팡 했던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두루뭉실하고 순한 성격이었던 저는 무지개 물고기처럼 나의 것을 내어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에 잘 지치곤 했습니다. (그것이 외부로부터 온 압박인지, 혹은 스스로의 생각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때로는 그만큼의 보상을 기대하다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오히려 날을 세우고 냉소적인 태도로 선을 그어 버리기도 했습니다. 책을 대충 읽는다면 나는 왜 무지개 물고기처럼 나의 것을 내어주지 못하는가 하고 자책을 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럴 때 마지막으로 소개해주신 ‘너는 특별하단다’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떠올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을 읽으며 묵상했던 문장들도 생각났습니다.
1. 나는 내가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까지도 모두 벗어 버리고 오직 아무것도 꾸미지 않은 벌거벗은 나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2. 순진한 무지라는 거짓 피난처에서 나와 말씀의 거울 앞에 정직하게 서고, 성령의 다스림을 구하며, 악의 유혹과 시험을 말씀의 능력으로 이겨내고, 자신의 마음을 지켜내는 것이 진정한 청결함이다.
다른 사람의 평가뿐 아니라 스스로 자신에게 내리는 평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저 역시 루시아처럼 매일 엘리 아저씨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비약적인 연결일 수 있지만… 이 이야기를 교회 공동체의 모습과도 연결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제가 문제 삼고 싶은 것은 목회자에게 권위가 치중되어있고, 성도들은 만인제사장으로서 예배의 주체가 되기보다 예배를 보는 관객이 되어 버린 구조입니다. 성도들이 예배자가 되지 않고 소비하는 관객이 된다면 더 유명한 설교자, 더 큰 무대, 더 전문적인 찬양, 더 눈에 띄는 직분을 통해 자신의 신앙적 가치를 확인하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은 결국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들을 신뢰하고 의존할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에서도 은사가 몇 사람에게만 집중되는 것이 아닌 각 사람에게서 발견되고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헌신이 죄책감이나 인정 욕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은혜와 사랑에서 흘러나오도록 매일 예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매일 그 앞에서 자신의 고유한 가치와 정체성을 확인할 때, 우리 자신이 소진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향해 문을 열어주는 그 균형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를 자신의 기준으로 평가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고유한 존재로 바라보며 품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곽서연2026-08-02 21:47
현직에 있을 때 '무지개 물고기'가 아이들에게 너무 유명하기에 책을 읽어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나에게는 딱히 재미있는 책은
아니었는데 이이들은 일단 좋아했습니다. 내용에 상관없이 반짝이고 화려한 색이라는 점과 '움직이는' 물고기라는 점,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는 미덕(?)의 세 포인트로
정리가 되더라구요.
그 당시에는 무지개 물고기가 비늘을 나누어줘야만 친구들과 놀이할 수 있는 것인가?
물고기들은 비늘을 받아야만 무지개 물고기와 놀아 주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친구 사이에 무지개 물고기가 비늘을 안주면 왕따를 당할 수도 있는거구나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그러나 평론을 읽으면서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무지개 물고기가 비늘을 나누어 주는 것에 대해 '놀이와 비늘의 교환'이라는 관점으로도 생각해보았습니다.
나눔이라는 것은 나눈 후에 억울함과 후회가 없어야 하는데 무지개 물고기는 자신이 아끼는 비늘을 친구들에게 나누어 준 후 '나 억울해 내 비늘 돌려줘 '라는 말을 하지 않고 친구들과
놀이했다는 점에서 무지개 물고기는 놀이 동산에 티켓을 끊고 입장하여 놀이를 즐긴 것 처럼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물론 초대 교회의 서로 자기의 물건을 가지고 와서 아까와 하지 않고 서로 나누는 개념 하고는 다르지만)
'그는 "너는 아주 특별하단다.나는 결코 좋지 못한 나무 사람을 만든적이 없어" 라고 말한다.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판치넬로가 문을 나서며" 아마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라고 행각하는 순간,
그의 몸에 붙어있던 점표 하나가 땅에 떨여진다.'
이 부분에서는 '우리의 생각, 우리의 숨결 하나에도 반응해주시는 분'이 계시는 것에 감사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이 성경에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그림책인 것 같습니다.
아니었는데 이이들은 일단 좋아했습니다. 내용에 상관없이 반짝이고 화려한 색이라는 점과 '움직이는' 물고기라는 점,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는 미덕(?)의 세 포인트로
정리가 되더라구요.
그 당시에는 무지개 물고기가 비늘을 나누어줘야만 친구들과 놀이할 수 있는 것인가?
물고기들은 비늘을 받아야만 무지개 물고기와 놀아 주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친구 사이에 무지개 물고기가 비늘을 안주면 왕따를 당할 수도 있는거구나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그러나 평론을 읽으면서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무지개 물고기가 비늘을 나누어 주는 것에 대해 '놀이와 비늘의 교환'이라는 관점으로도 생각해보았습니다.
나눔이라는 것은 나눈 후에 억울함과 후회가 없어야 하는데 무지개 물고기는 자신이 아끼는 비늘을 친구들에게 나누어 준 후 '나 억울해 내 비늘 돌려줘 '라는 말을 하지 않고 친구들과
놀이했다는 점에서 무지개 물고기는 놀이 동산에 티켓을 끊고 입장하여 놀이를 즐긴 것 처럼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물론 초대 교회의 서로 자기의 물건을 가지고 와서 아까와 하지 않고 서로 나누는 개념 하고는 다르지만)
'그는 "너는 아주 특별하단다.나는 결코 좋지 못한 나무 사람을 만든적이 없어" 라고 말한다.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판치넬로가 문을 나서며" 아마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라고 행각하는 순간,
그의 몸에 붙어있던 점표 하나가 땅에 떨여진다.'
이 부분에서는 '우리의 생각, 우리의 숨결 하나에도 반응해주시는 분'이 계시는 것에 감사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이 성경에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그림책인 것 같습니다.
백효진2026-08-02 23:43
'무지개 물고기'는 나눔의 미덕을 강조하는 좋은 그림책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교훈이 명확한 그림책이라는 생각에 자세히 읽지도 않았던 것 같아요. 교수님의 평론을 통해 그 안에 담긴 내용을 비로소 파악하게 되고 교훈이 명확하다고 여겨지는 그림책이라하더라도 촘촘히 읽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당연하지만 제 안에 없던 사실을 새겨둡니다
나 자신에 대해 어떻게 정의하고 관계 가운데 정체성을 형성해가느냐 하는 것은 비단 어린 아이들 뿐 아니라 평생에 걸친 과제일 것입니다. 삶의 모든 시기와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주인되심을 인정하고,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됨을 선포하는 삶이기를, 그림책을 통해 그 일이 확장되기를 소망해봅니다.
나 자신에 대해 어떻게 정의하고 관계 가운데 정체성을 형성해가느냐 하는 것은 비단 어린 아이들 뿐 아니라 평생에 걸친 과제일 것입니다. 삶의 모든 시기와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주인되심을 인정하고,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됨을 선포하는 삶이기를, 그림책을 통해 그 일이 확장되기를 소망해봅니다.
이아름2026-08-03 00:20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평가가 당연시 되는 세상 속에서 온전한 ‘나’로 살아가는 것은 참 쉽지않은 것 같아요.
세상의 시선뿐만 아니라 스스로조차도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모습, 다른 사람이 이뤄낸 성과를 바라보며 누군가 정해둔 기준에 나를 맞추려 애를 쓰는 듯합니다.
그림책 속의 무지개 물고기와, 타코처럼요..
하지만 내가 무엇에 시선을 두고 살아가느냐가 나의 정체성을 알게 하고, 진정한 삶의 방향성을 결정하게 돼요.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도, 부지런과 게으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선의 차이인 것 같아요.
토끼는 거북이를 보면서 경주했기에 경주를 안일하게 생각했어요. 만약 거북이가 토끼를 보고 경주를 했다면 이미 포기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거북이는 결승점을 보고 경주를 했기에 끝까지 경주를 할 수 있었어요.
이렇듯, 우리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펀치넬로처럼, 믿음의 주,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나의 정체성을 알고 잘 살아갈 수 있어요.
그래야 하나님께서 주신 때와 사명을 알고, 조급하지 않게 나의 페이스를 잘 맞춰 살아갈 수 있어요.
하지만 사람인지라 어른인 저도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이루고 있는 것들이 눈에 보이기에 중심을 잡기 어렵더라구요...
그래서 더욱이 어제의 은혜로 오늘을 살 수 없고, 매일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오늘 부어주신 은혜로 살아가게 되는 것 같아요.
교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정말 전신갑주를 입고, 매일 영적전쟁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그림책의 세상 또한...! 나도 모르게 끄덕이게 되는, 점차 서서히 스며들게 하는, 그 모든 것들을 깨어 바라보고 분별하며 지혜를 더해주시기를.....!오늘도 기도합니다....!
세상의 시선뿐만 아니라 스스로조차도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모습, 다른 사람이 이뤄낸 성과를 바라보며 누군가 정해둔 기준에 나를 맞추려 애를 쓰는 듯합니다.
그림책 속의 무지개 물고기와, 타코처럼요..
하지만 내가 무엇에 시선을 두고 살아가느냐가 나의 정체성을 알게 하고, 진정한 삶의 방향성을 결정하게 돼요.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도, 부지런과 게으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선의 차이인 것 같아요.
토끼는 거북이를 보면서 경주했기에 경주를 안일하게 생각했어요. 만약 거북이가 토끼를 보고 경주를 했다면 이미 포기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거북이는 결승점을 보고 경주를 했기에 끝까지 경주를 할 수 있었어요.
이렇듯, 우리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펀치넬로처럼, 믿음의 주,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나의 정체성을 알고 잘 살아갈 수 있어요.
그래야 하나님께서 주신 때와 사명을 알고, 조급하지 않게 나의 페이스를 잘 맞춰 살아갈 수 있어요.
하지만 사람인지라 어른인 저도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이루고 있는 것들이 눈에 보이기에 중심을 잡기 어렵더라구요...
그래서 더욱이 어제의 은혜로 오늘을 살 수 없고, 매일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오늘 부어주신 은혜로 살아가게 되는 것 같아요.
교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정말 전신갑주를 입고, 매일 영적전쟁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그림책의 세상 또한...! 나도 모르게 끄덕이게 되는, 점차 서서히 스며들게 하는, 그 모든 것들을 깨어 바라보고 분별하며 지혜를 더해주시기를.....!오늘도 기도합니다....!
김하순2026-08-03 06:36
아티클을 읽으며, 수년 전부터 가슴 한구석에 품고 있던 교육적 고민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얻고 눈이 밝아지는 깊은 통찰을 경험했습니다.
1. 예술성에 가려진 메시지의 위험성을 깨달은 경험
오랫동안 『무지개 물고기』와 『너는 특별하단다』 책을 아이들과 손주들에게 읽어주고 며 좋은 교육 자료라 여겨왔었습니다. 그런데 3~4년 전 쯤 수채화 배우기 강좌를 신청해서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숲 체험 분야에서 유명한 그 강사님이 난데없이 "무지개 물고기 책을 아이들에게 많이 읽어주는데, 그 책 완전 나쁜 책이다. 그런 책 아이들에게 읽어주면 안된다."고 얘기해서 깜짝 놀랐어요. '나눔을 강요하여 아이들을 힘들게 하는 나쁜 책'이라는 강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처음엔 수용하기 어려웠는데, 책을 다시 읽어보며 자기주장이 약한 다섯 살 손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자신이 아끼는 걸 내어주어야만 친구에게 받아들여지고 하나님이 좋아하신다는 메시지가 계속 주어지면 자기 표현이 어려운 타자 중심적인 여린 아이들에게 올무로 작용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이후 무지개빛 물고기 책을 구석에 처박아 놓았다가 책들 정리할 때 버렸던 경험이 있었는데, 이아티클을 이 책에 대해 다시 한 번 심층있게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 주일학교 현장에서 느꼈던 오랫동안의 고민과 해답
실제로 저는 주일학교에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우물을 계속 내어준 이삭' 이야기를 오랫동안 설교하지 못했습니다. 현실의 교실은 양육강식의 정글과도 같은데, 정당하게 자신의 소유와 경계를 지키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무조건적인 양보'만을 배운다면 가해자 아이들에게 이용당하고 지쳐버리기 때문입니다. 『무지개 물고기』와 같은 메시지가 정당한 자기 방어나 소유권을 허물어뜨릴 때, 아이가 겪을 삶의 고단함을 잘 알기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3. 소유권과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참된 은혜의 분별
이번 아티클을 통해 개인의 소유욕과 소유권을 무조건 죄악시하고 '모두가 똑같이 나누어 소유해야만 행복하다'는 프레임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근간을 흔드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개인의 건강한 경계와 자율성을 지켜주는 바탕 위에서 참된 나눔과 은혜가 흘러가야 함을 배웁니다.
4. 선발대 부대와 같은 경계심으로 그림책을 심층 읽기
유명한 수상작이나 수많은 사람에게 호평을 받는 책이라 할지라도, 아이들의 영혼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독과 같은 요소'가 복병처럼 숨어있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치 적진을 향하는 선발대 부대가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복병을 경계하듯, 그림책을 읽을 때 눈과 귀를 크게 열고 사방을 경계하는 태도가 필요함을 실감합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먹일 밥을 차릴 때 원산지와 영양 성분을 꼼꼼히 살피듯, 우리 아이들의 영혼에 공급될 그림책 역시 성령님의 조명 아래 심층적인 의미까지 꼼꼼히 분별하여 읽혀주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오랫동안 품어온 고민에 혜안을 주시고, 텍스트 뒤에 숨은 세계관을 깊이 있게 읽어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 예술성에 가려진 메시지의 위험성을 깨달은 경험
오랫동안 『무지개 물고기』와 『너는 특별하단다』 책을 아이들과 손주들에게 읽어주고 며 좋은 교육 자료라 여겨왔었습니다. 그런데 3~4년 전 쯤 수채화 배우기 강좌를 신청해서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숲 체험 분야에서 유명한 그 강사님이 난데없이 "무지개 물고기 책을 아이들에게 많이 읽어주는데, 그 책 완전 나쁜 책이다. 그런 책 아이들에게 읽어주면 안된다."고 얘기해서 깜짝 놀랐어요. '나눔을 강요하여 아이들을 힘들게 하는 나쁜 책'이라는 강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처음엔 수용하기 어려웠는데, 책을 다시 읽어보며 자기주장이 약한 다섯 살 손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자신이 아끼는 걸 내어주어야만 친구에게 받아들여지고 하나님이 좋아하신다는 메시지가 계속 주어지면 자기 표현이 어려운 타자 중심적인 여린 아이들에게 올무로 작용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이후 무지개빛 물고기 책을 구석에 처박아 놓았다가 책들 정리할 때 버렸던 경험이 있었는데, 이아티클을 이 책에 대해 다시 한 번 심층있게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 주일학교 현장에서 느꼈던 오랫동안의 고민과 해답
실제로 저는 주일학교에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우물을 계속 내어준 이삭' 이야기를 오랫동안 설교하지 못했습니다. 현실의 교실은 양육강식의 정글과도 같은데, 정당하게 자신의 소유와 경계를 지키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무조건적인 양보'만을 배운다면 가해자 아이들에게 이용당하고 지쳐버리기 때문입니다. 『무지개 물고기』와 같은 메시지가 정당한 자기 방어나 소유권을 허물어뜨릴 때, 아이가 겪을 삶의 고단함을 잘 알기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3. 소유권과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참된 은혜의 분별
이번 아티클을 통해 개인의 소유욕과 소유권을 무조건 죄악시하고 '모두가 똑같이 나누어 소유해야만 행복하다'는 프레임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근간을 흔드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개인의 건강한 경계와 자율성을 지켜주는 바탕 위에서 참된 나눔과 은혜가 흘러가야 함을 배웁니다.
4. 선발대 부대와 같은 경계심으로 그림책을 심층 읽기
유명한 수상작이나 수많은 사람에게 호평을 받는 책이라 할지라도, 아이들의 영혼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독과 같은 요소'가 복병처럼 숨어있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치 적진을 향하는 선발대 부대가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복병을 경계하듯, 그림책을 읽을 때 눈과 귀를 크게 열고 사방을 경계하는 태도가 필요함을 실감합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먹일 밥을 차릴 때 원산지와 영양 성분을 꼼꼼히 살피듯, 우리 아이들의 영혼에 공급될 그림책 역시 성령님의 조명 아래 심층적인 의미까지 꼼꼼히 분별하여 읽혀주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오랫동안 품어온 고민에 혜안을 주시고, 텍스트 뒤에 숨은 세계관을 깊이 있게 읽어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최은아2026-08-04 00:46
우리는 속을 볼 수 없기에 겉으로 들어나는 겉모습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의도가 어디와 누구와 맛닿아 있는지를 놓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나눔이 중요하다기보다 무엇을 위한 나눔인지 누구를 위한 나눔인지가 중요한 것처럼, "너는 특별하단다"라는 말보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에 특별함을 매순간 기억해야 함을 다시 상기해 봅니다.
지민규2026-08-04 02:02
와.. <무지개 물고기> 평론부터 너무 놀라웠습니다.
결국 사회주의가 이야기하는 모두 똑같이 소유해야 행복하다는 생각이 담겨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작가가 갖고 있는 가치관이 이렇게 이야기에 반영되었던 것이구나.
'모든 저자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독자와 공유하기를 바란다.
즉, 독자들이 자신의 관점에 동의하기를 바라면서 창작활동을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다양한 설득전략을 사용한다.'
이 말씀이 정말 공감이 많이 됐습니다. 이것이 거의 본능처럼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티코와 황금날개>와의 비교도 참 재미있었습니다. 결론에서 나타나는 작가의 가치관.
유사한 스토리에서도 이렇게 다르게 다른 가치관을 보여줄 수 있구나.
그리고 너무나 감명깊게 읽었던 <너는 특별하단다> 책과의 비교도 정말 깊이 있는 통찰에 감사드립니다.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자기가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의 위험성.
공동체의 기준을 나를 평가하는 원천으로 삼는 것과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것 사이의 딜레마.
결국 주님과의 깊은 교제와 사랑을 경험하는 방법 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얻은 것이지만 구원받은 후 우리의 삶은 놀이터가 아니라 내 자신 안에 도사린 죄성과 타락한 이 시대 정신에 대항하여 싸우는 영적 전쟁터가 되었다'
마지막 문장에 정말 소름이 돋았습니다.
정신이 번쩍 납니다... 놀이터가 아니라 전쟁터.
결국 사회주의가 이야기하는 모두 똑같이 소유해야 행복하다는 생각이 담겨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작가가 갖고 있는 가치관이 이렇게 이야기에 반영되었던 것이구나.
'모든 저자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독자와 공유하기를 바란다.
즉, 독자들이 자신의 관점에 동의하기를 바라면서 창작활동을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다양한 설득전략을 사용한다.'
이 말씀이 정말 공감이 많이 됐습니다. 이것이 거의 본능처럼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티코와 황금날개>와의 비교도 참 재미있었습니다. 결론에서 나타나는 작가의 가치관.
유사한 스토리에서도 이렇게 다르게 다른 가치관을 보여줄 수 있구나.
그리고 너무나 감명깊게 읽었던 <너는 특별하단다> 책과의 비교도 정말 깊이 있는 통찰에 감사드립니다.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자기가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의 위험성.
공동체의 기준을 나를 평가하는 원천으로 삼는 것과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것 사이의 딜레마.
결국 주님과의 깊은 교제와 사랑을 경험하는 방법 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얻은 것이지만 구원받은 후 우리의 삶은 놀이터가 아니라 내 자신 안에 도사린 죄성과 타락한 이 시대 정신에 대항하여 싸우는 영적 전쟁터가 되었다'
마지막 문장에 정말 소름이 돋았습니다.
정신이 번쩍 납니다... 놀이터가 아니라 전쟁터.
나의 행복은 어디에서 올까 『무지개 물고기』, 『티코의 황금날개』, 『너는 특별하단다』
어린이 문학에서 가장 자주 다루어지는 주제는 ‘성장’과 ‘정체성’이다. 어린이 소설의 플롯은 대부분 이야기의 도입부에 등장한 어린이 주인공이 몇 가지 갈등을 경험한 후에 좀 더 성숙한 존재로 변화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정체성의 심리학』의 저자인 박선웅 고려대 교수는 “정체성이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삶의 방향에 대해 결단을 내린 정도를 의미한다.”라고 정의하였다.[1] 정체성의 형성은 평생에 걸쳐 진행되는 것이지만 아동기의 정체성은 주변 인물들과의 상호작용 안에서 이루어진다. 지금부터 세 개의 그림책 텍스트(『무지개 물고기』, 『티코와 황금날개』, 『너는 특별하단다』)가 이 주제를 다루고 있는 방식을 비교해 보도록 하자.
마르쿠스 피스터(Marcus Pfister)(1960- )의 『무지개 물고기』는 매우 일찍 국내에 소개된 번역서이다. 그는 스위스 출생이며 베른 예술학교에서 그림과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하고 에르바 상, 케이트 그린어웨이 상 등 세계적인 일러스트 상을 받은 바 있으며, 이 작품으로 인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2] 원작의 출판일이 1992년이었는데 번역본 초판이 1994년 출간되었을 정도로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 그 이후로 무지개 물고기를 주인공으로 하는 시리즈물이 출간되었는데, 그의 작품이 인기를 얻은 가장 주된 이유로 화려한 일러스트레이션을 들 수 있다. 그가 그림책 제작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는 홀로그램 일러스트레이션 기법은 신비롭고 환상적인 느낌을 주어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표지에는 동그란 눈과 분홍색의 두꺼운 입술을 가진 물고기가 중앙에 크게 그려져 있다. 그 주위의 푸른 바닷물은 그의 비늘이 뿜어내는 광채를 반사하며 아름답게 물결치고 있다. 이 이야기는 3인칭 전지적 시점을 사용하며, 그림에서는 홀로그램 재질이 입혀진 무지개 물고기가 아름답게 빛을 발한다. 본문의 첫 화면은 이 무지개 물고기를 소개하는 내용이다. “깊고 푸른 바다 저 밑에 물고기 한 마리가 살았습니다. 그 물고기는 보통 물고기가 아니라, 온 바다에서 가장 아름다운 물고기였습니다. 파랑, 초록, 자줏빛 비늘 사이사이에 반짝반짝 빛나는 비늘이 박혀 있었거든요.” 그 다음 화면에서 그 물고기는 자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함께 놀자고 다가온 물고기들을 무시하고 지나가 버린다. 다른 물고기들이 다 사라지고 난 후 파란 꼬마 물고기가 다가와 반짝이는 비늘 한 개만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자 무지개 물고기는 ”내가 가장 아끼는 건데 널 달라고? 네가 뭔데 그래? 저리 비켜!“라고 소리를 지른다. 깜짝 놀란 파란 꼬마 물고기가 친구들에게 그 일을 일러바치고, 그 후 아무도 무지개 물고기랑 놀려고 하지 않는다. 아무도 놀아주지 않자 무지개 물고기는 바다 속에서 가장 쓸쓸한 존재가 된다.
그는 불가사리 아저씨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아저씨는 문어 할머니에게 가서 조언을 들으라고 한다. 그의 사정을 이미 알고 있던 문어 할머니는 다른 물고기들에게 비늘을 한 개씩 나눠주면 바다에서 가장 아름답진 못하겠지만 지금보다 훨씬 행복해질 것이라고 충고한다. 무지개 물고기는 ”내 비늘을 나눠 주라고? 이렇게 예쁜 비늘을? 안돼. 비늘이 없으면 난 행복하게 살 수 없는 걸.“라고 하며 거부한다. 조금 후 무지개 물고기에게 파란 꼬마 물고기가 따라와 자신은 그냥 작은 비늘 한 개만 갖고 싶었을 뿐이니 화내지 말라고 사과한다. 무지개 물고기는 가장 작은 비늘 한 개를 뽑아 꼬마 물고기에게 준다. 그 후 그는 다른 물고기에게 자신의 비늘을 하나씩 떼어 나눠 주기 시작한다. 이제 무지개 물고기에게 비늘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지만 주위의 바다는 반짝이는 비늘로 가득해지고 그는 다른 물고기 사이에서 행복감과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이야기는 이렇게 따뜻하게 마무리된다. "이리 와. 무지개 물고기야. 이리 와서 우리랑 같이 놀자!” 물고기들은 무지개 물고기를 불러 냈습니다. “그래. 곧 갈게.” 무지개 물고기는 기분이 좋아서 지느러미를 흔들며 친구들을 만나러 헤엄쳐 갔습니다.”
『무지개 물고기』에 대한 독자들의 평은 매우 긍정적이다. “나눔”, ‘우애’라는 미덕을 가르치기 적합한 텍스트로 유명하며, 유아교육기관과 가정에서 교육용 텍스트로서 자주 사용된다. 어떤 물건을 두고 유아들 사이에서 흔히 벌어질 수 있는 갈등을 글과 그림으로 잘 녹여서 들려주기 때문일 것이다. 인터넷에도 이 작품과 관련된 수 많은 동영상들이 소개되어 있다. 책 읽어주기를 비롯하여 이야기하기, 무지개 물고기 만들기, 드라마 활동을 하기 등 다양한 사후 활동 영상들은 물론, 상업용 극단의 연극도 인기리에 공연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이 작품의 세계관에 대해서 재고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오래전(30년전쯤?) 유치원을 다니던 아들에게 이 책을 읽어주고 있었을 때였다. 아들이 느닷없이 파란 작은 물고기가 나쁜 애라고 분개하는 것이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파란 물고기가 무지개 물고기에게 자기 것도 아닌 비늘을 달라고 했고, 거절당하자 친구들에게 고자질해서 무지개 물고기를 따돌렸다는 것이다. 나도 여느 성인독자와 같이 이 텍스트의 교육성을 높게 평가하고 있던 터라 어린 아들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하여, 만일 이 텍스트가 ‘나눔’의 미덕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평등한 소유’의 미덕을 옹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구심이 들었다. 무지개 물고기는 행복하려고 친구들에게 비늘을 나눠준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똑같이 소유해야 행복하다’라는 아이디어는 자유 민주주의 경제 체제를 위협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그런데 이것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그동안 거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실은 어린이용이 분명해 보이는 이 텍스트에도 몇가지 문학적 설득전략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저자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독자들과 공유하기를 바란다. 즉, 독자들이 자신의 관점에 동의하기를 바라면서 창작활동을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다양한 설득전략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사용된 설득전략은 무엇일까. 그것은 ‘권선징악’과 ‘대조’이다. 즉, 선한 자가 복을 받고 악한 자는 벌을 받는다는, 거의 모든 서사에서 반복되는 주제이다. 무지개 물고기는 교만하고 욕심쟁이로 비춰지는 반면에, 파란 작은 물고기는 작고 힘이 없으며 예의 바른 캐릭터로 그려지므로 자연스럽게 악과 선의 구도가 발생한다. 나중에 파란 물고기가 무지개 물고기에게 다가와 자신이 비늘 하나를 달라고 한 것에 대해 정중하게 사과하므로 인해 또 다시 파란 물고기의 겸손함과 무지개 물고기의 교만이 대조된다. 하지만 사실 무지개 물고기가 왕따를 당한 직접적인 원인은 파란 작은 물고기의 고자질 때문이었던 것이다. 물론 파란 물고기는 그 후 돌아와서 그 일에 대해 사과를 했지만 말이다.
또한 무지개 물고기의 잘못은 아름다운 비늘의 소유에 있지 않다는 것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 이야기는 그의 비늘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다. 그는 그저 아름다운 비늘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사실 똑같은 조건 하에서 태어나는 인간은 없다. 부모, 외모, 건강, 좋은 DNA…. 등. 같은 가정에서 태어난, DNA가 같은 일란성 쌍둥이도 자라면서 다른 환경에 노출되면서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게다가 인간은 무엇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태어난다. 아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자기 장난감을 갖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재물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도 함께 주셨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 것은 소중히 다루게 되며, 개인의 소유욕과 소유권은 이 자유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근간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욕구 자체를 나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무지개 물고기의 잘못은 비늘의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복의 절대 기준으로 삼고 교만해 졌다는 데 있다.
이번엔 레오 리오니(Leo, lionni)(1910-1999)의 『티코와 황금날개』(1964)를 읽어보도록 하자. 그는 그래픽 디자이너로 경력을 쌓았으나 50세가 되던 해, 손주에게 잡지를 찢어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붙여서 작품을 만든 사건(이 작품은 후에 『파랑이와 노랑이』로 출판됨)이 계기가 되어 그림책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의 그림은 꼴라쥬 기법과 수채화 등 다양한 기법을 섞어서 다양한 질감과 시각적 자극, 색채의 조화를 보여준다. 개성있는 예술성 외에도 그의 작품은 깊은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으므로 그림책이 어린이 독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3]
『티코와 황금날개』는 그의 다른 작품들처럼 다층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 행복, 나눔과 희생, 우정, 성장과 변화. 자기 정체성 등. 액자식 구성의 이 이야기는 책의 도입부에 한 인물이 등장하여 독자들에게 티코라는 새를 소개해 주고, 티코가 자신의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야기 도입 부분에서 화자가 하는 말은 이탤릭체로, 티코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정자체로 되어 있어 두 이야기가 구분된다. 그림은 대체로 가까운 거리에서 정면에서 바라보는 시점을 취하므로 독자들은 등장인물의 감정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이 작품에서 특이한 점은 인도풍의 그림 스타일이다. 등장인물의 머리에 두른 터번과 베일, 화려한 색감의 인도 전통 의상 등은 이국적 느낌을 전달하며, 황금 날개를 지닌 새는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표지에서는 녹갈색의 나무잎 위를 황금 날개를 활짝 핀 티코가 날고 있다. 본문에서 티코는 이렇게 자신을 소개한다. “어렸을 때 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날개가 없었어요. 다른 새들처럼 노래도 하고 팔짝팔짝 뛰기도 잘 했지만 날지는 못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그를 사랑했고 나무에서 열매를 따 그에게 가져다 주었다. 매일 튼튼한 황금빛 날개가 생기는 꿈을 꾸곤 하던 티코는 어느 여름날 저녁 진주빛이 나는 이상한 새 한 마리로부터 황금 날개 한 쌍을 선물받게 된다. 황금 날개를 얻은 그는 아주 높이 날 수 있어서 매우 행복했다. 하지만 친구들은 그가 잘난 척한다고 비난하고 모두 떠나버린다. 그는 이렇게 자문한다. “친구들이 왜 가 바렸을까? 왜 화가 난 것일까? 나는 독수리만큼 높이 날 수 있었고, 내 황금 날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어요. 그런데도 친구들은 떠나 버렸고 나는 혼자가 되었어요.”
어느 날 티코는 자기 오두막집 앞에 앉아 눈물 흘리고 있는 남자를 만나게 되고, 그가 슬퍼하는 이유를 묻는다. 남자가 아이에게 약을 사 줄 돈이 없다고 답하자 티코는 자신의 황금 깃털을 뽑아 그에게 준다. 그 다음 부터 티코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황금 날개를 한 개씩 뽑아 준다. 꼭두각시 인형이 필요한 가난한 서커스단, 담요 짤 물레가 필요한 가난한 할머니, 나침반이 필요한 어부, 아름다운 신부 등.... 신기하게도 황금 깃털이 뽑힌 자리에는 까만 깃털이 돋아난다. 친구들과 똑같이 까만 깃털을 갖게 된 그가 친구들을 찾아가자 그들은 기뻐 노래하며 “너 이제 우리와 같구나”라며 그를 반겨 준다. 그들과 함께 꼭 붙어서 잠을 청하는 티코는 너무 행복해서 잠을 자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행복한 이유는 그들에게 인정받아서가 아니었다. 본문 마지막 문장에서 그는 자신이 도와 주었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이렇게 독백한다. “이제 내 날개는 까만색이야. 그렇지만 나는 친구들하고 똑같지는 않아. 우리 모두는 조금씩 달라.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추억과 서로 다른 황금빛 꿈을 가지고 있으니까.”
서사가 결말을 맺는 방식은 그 작품의 전체 의미를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작품의 결말이 맺어지는 방식이 등장인물과 그 행위에 대해 작가 자신이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는가를 해석하는 열쇠가 된다. 무지개 물고기와 티코의 서사는 외적으로는 그 구성이나 결말이 거의 유사해 보인다. 빛나는 비늘을 소유하고 있는 까닭에, 혹은 황금빛 깃털 때문에 동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던 주인공들이 그것을 동료들에게 나눠주거나, 혹은 선행을 베푸는데 소진함으로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인정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의 행복관은 상당히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행복해지기 위해 『무지개 물고기』는 친구들과 동등한 소유를 선택한 반면, 티코는 친구들과 같은 외양을 갖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추억과 꿈 때문에 행복해졌다. 무지개 물고기와 티코가 자아를 확인하게 되는 경로도 다르다. 무지개 물고기는 ‘다름’에서 ‘같음’으로 변화하지만, 티코는 ‘다름’-‘다름’-‘같음’으로 진행한다. 『티코와 황금날개』에 인도의 문화적 요소들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은 작가와 인도라는 나라에 대한 호기심을 자아낸다. 게다가 본문에서 "내 마지막 금빛 깃털을 아름다운 신부에게 주었을 때, 내 날개는 인도 잉크처럼 검었다"라는 표현도 사용하고 있다. Chat GPT로 검색해 해 본 결과, 작가와 인도와의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으며 이 문장은 단지 티코의 날개가 짙은 검은색으로 변했음을 비유하는 것이라는 해석을 보여준다. 세계관을 비교해 본다면, 전자가 물질적 평등(equity)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반면, 후자는 각 개인이 고유성과 삶의 의미를 결정한다는 면에서 개인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맥스 루케이도(Max Lucado)의 『너는 특별하단다.』를 보자. 이 이야기는 ‘웸믹’이라고 불리는 나무 사람들의 동네에서 벌어진 일로 시작한다. 그들은 언덕 위에 사는 목수 엘리 아저씨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였지만 모두 달랐다. 그들의 일과는 다른 나무 사람들에게 별표를 붙이고 다니는 것이 전부였다. 무엇인가 특출난 것이 있는 나무 사람들에게는 금빛 별표를, 내세울 것이 없는 자들에게는 잿빛 점표를 붙여주었다. 그러다 보니 웸믹들은 다들 타인에게 잘 보여서 금빛 별표를 받으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펜치넬로라는 웸믹은 잘 하는 것이 없고, 실수가 많아 잿빛 점표만 몸에 가득 붙게 되었다. 자존감이 매우 낮아진 그는 어느 날 몸에 아무 것도 붙지 않은 루시아라는 여자 웸믹을 만나게 된다. 루시아에게도 웸믹들이 금빛 별표를, 혹은 잿빛 점표를 붙였지만 곧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루시아가 부러웠던 펀치넬로가 그 이유를 묻자 루시아는 자신은 매일 엘리 아저씨를 만나러 가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망설이던 펀치넬로는 용기를 내어 언덕 위 엘리 아저씨의 작업장으로 간다. 엘리 아저씨는 반갑게 그를 맞이하며 자신이 펀치넬로를 만들었고, 날마다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펀치넬로의 몸에 붙은 표는 자신이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할 때만 붙는 것이라고 일러준다. 대신, 펀치넬로가 엘리 아저씨의 사랑을 깊게 신뢰하면 할수록 그 표들에 신경을 덜 쓰게 될 것이라고 덧붙인다. 그는 펀치넬로에게 매일 자신을 찾아오라고 하며 “너는 아주 특별하단다. 나는 결코 좋지 못한 나무 사람을 만든 적이 없어.”라고 말한다.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펀치넬로가 문을 나서며 “아마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몸에 붙어 있던 점표 하나가 땅에 떨어진다.
성경의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는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엘리 아저씨는 창조주 하나님을, 나무 사람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을 비유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도 매일 나무 사람들처럼 서로를 평가하고 점수를 매기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특별하게 만드셨다고 하시며, 영원히 변치 않는 그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펀치넬로가 엘리 아저씨를 매일 찾아가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항상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이야기와 티코의 이야기를 비교해 보면 흥미로운 차이가 나타난다. 티코가 자신만의 꿈을 꾸는 이유는 자기 충족의 욕구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함이라고도 할 수 있다. 티코는 자신이 날개가 없을 때 잘 대해주던 동료들이 도리어 황금 날개가 생기자 그를 거부했다는 사실을 잊지 못할 것이며,. 그 경험이 티코에게는 큰 상처로 남아있을 지 모른다. 따라서 그가 자신만의 꿈을 꾸며 행복해 하는 이유는 변덕스러운 친구들로 인해 또 다시 같은 상처 받기를 회피하기 위해서일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자기가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자칫 개인주의의 오류로 흐를 수 있다.[4] 인간의 유한성으로 인해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나의 정체성을 정립할 수 있고 나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합리적이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나의 출생이 내 의지로 된 것이 아닌 것처럼 죽음을 비롯하여 내게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도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한 내가 어떻게 나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미 우리 사회는 이러한 메시지들로 넘쳐나고 있다. “네가 네 삶의 주인이다.“, “너의 한계는 바로 너다.”... 유명한 의류 업체인 나이키의 광고는 그러한 세계관을 부추긴다. “Just do it.”(그냥 네가 해 버려-> 지금 네 욕망을 충족시켜라는 의미), “There is no finish line.”(결승선은 없어->: 너의 한계는 없다는 뜻.). 심지어 미국 새들백 교회의 목사인 릭 워렌이 쓴 『목적이 이끄는 삶』과 같은 신앙서적도 ‘나 중심주의’의 세계관을 선포한다.
공동체의 기준을 나를 평가하는 원천으로 삼는 것과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것 사이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인간의 삶을 초월하는 기준을 나의 정체성과 가치의 참조점(reference)로 삼는 것이다. 성경은 수없이 우리의 존재와 가치는 우주의 중심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고, 창조세계를 잘 관리하기를 바라셨지만 그들은 금지된 과일을 따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탄이 지배하는 나라로 추락하게 되었다(창 1장-3장). 영생을 살도록 창조된 그들은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으며 출산과 노동의 고통을 짊어지게 되었고, 땅도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어둠의 세상에 속하게 된 인간을 다시 찾아 오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통해 그것을 성취하셨다.
크리스찬은 교회에 출석하고 헌금내고 기도하는 등의 외형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물론 그것도 성도의 삶에서 중요한 것이지만 진정한 크리스찬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성경 신자(bible believer)이다. 그는 창조(creation) -타락(fall) -구속(redemption) -성화(sanctification) -영화(glorification)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사실로서 믿고, 자신도 그 안에 거하는 자이다. 성경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어둠의 세상에서 빛의 왕국으로 옮겨진 자임을 믿고 매일 성화의 과정을 밟아간다. 성화라는 것은 어떤 신비하고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가정과 일터와 취미생활, 교제 등…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신 곳은 하나도 없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얻은 것이지만 구원받은 후 우리의 삶은 놀이터가 아니라 내 자신 안에 도사린 죄성과 타락한 이 시대 정신에 대항하여 싸우는 영적 전쟁터가 되었다(엡 6: 12). 우리는 악한 날에 능히 버티어 내고 모든 일을 행한 뒤에 서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갑, 화평의 복음의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를 입고 싸워야 하는 군사로서 살아간다 (엡 6: 13-17). 그림책 평론도 예외는 아니다. 점점 더 많은 그림책 작가들이 그림책이라는 매체에는 독자의 경계가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하나님을 대적하는 진화론, 젠더주의, 문화막시즘, 뉴에이지를 글과 그림 안에 교묘히 그려내고 있다. 문화는 우리가 숨쉬는 공기와 같으므로 우리의 영이 깨어있지 않으면 문화 안에 스며든 시대 정신을 그대로 흡입하게 된다. 이는 어린이용으로 제작된 『무지개 물고기』와 같은 단순한 서사마저도 주의깊게 읽어볼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작가들 역시 그 사회와 시대의 세계관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1] https://www.edui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253
[2] https://m.blog.naver.com/sgb1515/100120182507
[3] 현대 우화의 거장, '레오 리오니'의 대표작 : 네이버 포스트 (naver.com)
[4] Wilkens, S. & Sanford, M. L. (2013). 은밀한 세계관. IVP.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이며 그림책 평론 작업을 하고 있다. 미국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1989년부터 2023년까지 성대 아동청소년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2021년부터 웹진 <그림책 베이직>에 '그림책의 세계관'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그림책 세계관 연구소에서 운영하고 있는 '그림책 세계관 지도사 과정'에서 '그림책의 세계관', '기독 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세계관>, 공저로는 <그림책의 이해1, 2>, <그림책과 예술교육>, <세계 그림책의 역사>, <어린이교육전문가가 엄선한 100권의 그림책>, <신앙이 자라는 그림책 읽기>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