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의 세계관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다비드 칼리의 『나는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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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2025-02-17 22:21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평론의 뒷 부분을 읽으며
잃어버렸었는데,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잊었던,, 소중한 것에 대한 기억을 찾은 것 같습니다.
다비드 칼리의 "나는 기다립니다"의 운명론적 세계관을 보고
결론에서 북한 주민을 떠올리셨다는 것이.. 제게 너무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생각을 풀어 쓰거나 사람들과 대화 하다 보면 결국 그 사람 마음에 담겨져 있는 것이 나오는데,
과연 나에게 이런 마음이 있는가 돌아보게 합니다.
복음을 듣지 못하고 노예로 살고 있는 이천오백만의 북한 주민들.
그들을 향한 긍휼과 애통..
북한을 위해 눈물 쏟으며 기도했던 시간들이 있었음에도....
지금은 북한주민들의 해방을 위해 북한 정권이 무너지게 기도하면서도,
진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북한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무감각해진 제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혼란한 현 시국에서
내가 바라는 건 그냥 나의 "안일"은 아닐까,
반기독교를 외치며 자유를 해치는 (나를 불편하게 하는) 그들이 "응징" 되는 것은 아닐까,
나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평론의 뒷 부분을 읽으며
잃어버렸었는데,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잊었던,, 소중한 것에 대한 기억을 찾은 것 같습니다.
다비드 칼리의 "나는 기다립니다"의 운명론적 세계관을 보고
결론에서 북한 주민을 떠올리셨다는 것이.. 제게 너무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생각을 풀어 쓰거나 사람들과 대화 하다 보면 결국 그 사람 마음에 담겨져 있는 것이 나오는데,
과연 나에게 이런 마음이 있는가 돌아보게 합니다.
복음을 듣지 못하고 노예로 살고 있는 이천오백만의 북한 주민들.
그들을 향한 긍휼과 애통..
북한을 위해 눈물 쏟으며 기도했던 시간들이 있었음에도....
지금은 북한주민들의 해방을 위해 북한 정권이 무너지게 기도하면서도,
진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북한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무감각해진 제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혼란한 현 시국에서
내가 바라는 건 그냥 나의 "안일"은 아닐까,
반기독교를 외치며 자유를 해치는 (나를 불편하게 하는) 그들이 "응징" 되는 것은 아닐까,
나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이수형2025-02-17 23:39
글을 읽으며 "운명에 끌려가지 말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굳게 서라"라고 말씀하시는 교수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운명론은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되어진 상태와 같은 결정론(determinism)과도 유사합니다. 과학이 학계를 주도하고, 기술 우위의 시대에 논리적 함의를 지닌 과학적 사고는 결정론을 신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사에 있어서 결정된 것이 있다고 믿는 사상인 결정론은 기적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저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에서 기적과도 같은 기도의 이루어짐을 경험합니다. 반대로, 고민을 기도로 아무리 물어도 형상으로 실재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말씀을 들려주시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 한 주의 끝에 예배에서 들려주시는 목사님의 강론이 제 기도의 주제와 일치하는 기적 같은 경험 또한 다수였습니다. 도저히 답이 없는 문제를 예배에서 풀어갈 해답을 얻었던 것입니다.
운명론이나 결정론은 인간을 조금도 설명해 주지 못할 뿐 더러 다람쥐 쳇바퀴에 갇힌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희망보다는 포기하라는 함의도 느껴집니다. 어차피 쳇바퀴처럼 제자리일 것이니까요. 북한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 바로 이런 운명론이 아닐까요. 그들의 삶은 얼마나 허무할지, 우리의 삶은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지만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는 현재에 감사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세계관 공부를 하면서 사상이라는 것이 만들어내는 이론과 학파들이 차용한 이론적 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최근 들어 그 의미가 다르게 교육되고 받아 들여지는 사회 현상들, 시대 정신들의 근본이 무엇인지 찾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와 막시즘, 문화막시즘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라고 봅니다. 역사가 오래될수록 레퍼런스하여 펼쳐나가는 이론가들이 많을수록 변용되는 것들의 함의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읽다보면, 그럴싸해 보이던 그림책들의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게 됩니다. 다만, 교수님의 설득력있는 글과 같이 풀어내기에는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뿐입니다.
그러나, 만사에 있어서 결정된 것이 있다고 믿는 사상인 결정론은 기적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저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에서 기적과도 같은 기도의 이루어짐을 경험합니다. 반대로, 고민을 기도로 아무리 물어도 형상으로 실재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말씀을 들려주시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 한 주의 끝에 예배에서 들려주시는 목사님의 강론이 제 기도의 주제와 일치하는 기적 같은 경험 또한 다수였습니다. 도저히 답이 없는 문제를 예배에서 풀어갈 해답을 얻었던 것입니다.
운명론이나 결정론은 인간을 조금도 설명해 주지 못할 뿐 더러 다람쥐 쳇바퀴에 갇힌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희망보다는 포기하라는 함의도 느껴집니다. 어차피 쳇바퀴처럼 제자리일 것이니까요. 북한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 바로 이런 운명론이 아닐까요. 그들의 삶은 얼마나 허무할지, 우리의 삶은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지만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는 현재에 감사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세계관 공부를 하면서 사상이라는 것이 만들어내는 이론과 학파들이 차용한 이론적 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최근 들어 그 의미가 다르게 교육되고 받아 들여지는 사회 현상들, 시대 정신들의 근본이 무엇인지 찾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와 막시즘, 문화막시즘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라고 봅니다. 역사가 오래될수록 레퍼런스하여 펼쳐나가는 이론가들이 많을수록 변용되는 것들의 함의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읽다보면, 그럴싸해 보이던 그림책들의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게 됩니다. 다만, 교수님의 설득력있는 글과 같이 풀어내기에는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뿐입니다.
twinkleLee 민옥2025-02-18 01:03
다비드 칼리는 다작을 하는 작가인데 작가의 그림책으로 제일 먼저 알게 된 것이 <나는 기다립니다>로 기억된다.
기다리는 순간순간들이 꽤나 공감되는 부분들이 있었고 빨간 실로 풀어나가는 인생이야기가 나름 번뜩이는 기지도 보여 좋은 그림책이라고 생각했다.
‘기다립니다’라는 말 자체가 능동적인 것과는 반대이며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수동적인 자세,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에도
여전히 교수님의 평론을 보고서야 깨닫게 된다.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나 눈 막고 귀 닫힌 북한의 사람들이나 같은 사람이지 않은가 싶다.
서평을 더 부지런히 읽고 눈과 귀가 열리도록 해야겠다.
기다리는 순간순간들이 꽤나 공감되는 부분들이 있었고 빨간 실로 풀어나가는 인생이야기가 나름 번뜩이는 기지도 보여 좋은 그림책이라고 생각했다.
‘기다립니다’라는 말 자체가 능동적인 것과는 반대이며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수동적인 자세,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에도
여전히 교수님의 평론을 보고서야 깨닫게 된다.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나 눈 막고 귀 닫힌 북한의 사람들이나 같은 사람이지 않은가 싶다.
서평을 더 부지런히 읽고 눈과 귀가 열리도록 해야겠다.
love022025-02-18 04:40
붉은 실타래가 도드라지게 책장마다 펼쳐진다. 그렇게 붉은 색깔을 지닌 끈에 대해 교수님께서는 인생을 이끌어 가는 동인(動因)의 역할이라 하였고 아무리 애써도 바꿀 수 없는 운명론적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고 하셨다. 이러한 운명론은 기독교 세계관과 상반된 관계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닌 아모르파티나 사주팔자처럼 인간을 수동적이고 폐쇄적으로 단정 짓는 반기독교 사상이 팽배해 있다. 그래서 한치 앞도 예측하지 못하는 나약한 기독교인들은 알게 모르게 잠식당하고 있으며 선에 걸려 넘어질 때도 있다. 어쨌거나 삶속에서 행복을 결정 짓는 가장 중요한 “관계”라는 망을 통해 사이를 잇고 그러한 이음과 연대라는 연결선상에서 마치 줄다리기를 하듯 밀고 당기며 때로는 씨실이 되고 때로는 날실이 되어 곱거나 투박하게 함께 공존하고 있는 것 같다. 아무튼 멋진 역사를 써 내러 가며 아름답게 그려나가면 좋겠지만 타인을 이해하며 격어야만 하는 충돌로 생긴 아픔들은 쉽게 사그라 들지 않는 것 같다. 그렇게 작은 불씨가 이제는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혼란하기 짝이없는 가운데 교수님은 어떻게 이 작은 그림책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애민사상과 분단 너머의 북한 동포들의 고통까지도 실타래로 뽑아낼 수 있었을까? 인간의 굴레 속에서 내 손을 잡아 주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연결된 튼튼한 동아줄을 꼭 잡고서 교수님처럼 나도 남북통일을 기다리려 한다.
hyojin2025-02-18 06:32
제작년인가 한 도서관에서 초등 아이들과 그림책을 읽고 씨앗을 심는 활동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빨간 실로 화분을 장식하며 이 그림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메인 그림책이 아니라 생각했기에 단순히 '기다림'이라는 것과 예쁜 빨간 실에만 초점을 맞추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날 한 아이가 이 그림책을 읽고 "계속 기다리는 거네요"라고 이야기를 했었어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었는데 교수님의 서평을 읽으며 그 아이가 생각이 났습니다. 더불어 내 아이에게도 물론이겠지만 수업 등에서 다음 세대 친구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활동을 할 때, 그림책을 면밀히 분석하고 그 안에 담긴 세계관을 바르게 파악한 후에 사용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어쩌다 나라를 위한 기도회에서나 떠올렸던 북한 아이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형상일진대 내 것만 바라보며 전전긍긍하는 저의 우둔함 또한 부끄러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북한의 아이들과 함께 그림책을 읽으며 하나님을 이야기 할 그 날을 꿈꾸어 봅니다.
메인 그림책이 아니라 생각했기에 단순히 '기다림'이라는 것과 예쁜 빨간 실에만 초점을 맞추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날 한 아이가 이 그림책을 읽고 "계속 기다리는 거네요"라고 이야기를 했었어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었는데 교수님의 서평을 읽으며 그 아이가 생각이 났습니다. 더불어 내 아이에게도 물론이겠지만 수업 등에서 다음 세대 친구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활동을 할 때, 그림책을 면밀히 분석하고 그 안에 담긴 세계관을 바르게 파악한 후에 사용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어쩌다 나라를 위한 기도회에서나 떠올렸던 북한 아이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형상일진대 내 것만 바라보며 전전긍긍하는 저의 우둔함 또한 부끄러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북한의 아이들과 함께 그림책을 읽으며 하나님을 이야기 할 그 날을 꿈꾸어 봅니다.
김혜영2025-02-20 08:04
평론을 통해 이 그림책을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나름 그림책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참 그 분야가 좁고 한정되었구나 새삼 느끼게 됩니다.
내용만 들어봐도 어른들이 참 좋아할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에 대해서 어떤 정의를 내려 주기를 좋아하니까요. 그것이 옳던 그르던 뭔가 내가 생각했던 것이랑 비슷하기만 하면 맞는 것으로 여기고 마음을 한껏 두는...
그림책에 대한 서평에 독후활동이 많았다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림책이 어떤 내용인지 제대로 파악하는 것보다 이 책으로 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구나. 요즘 시대를 나타내는 분위기가 같아서 웃기지만 씁슬한
그림책속의 운명론적 세계관은 참으로 허무하고 공허했습니다.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은 어쩌면 저항하지 않고 극복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잔잔할 수는 있겠지만 그 안에 속해서 운명대로 살아가는 인간이란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 주어진 시나리오대로 인형처럼 끌려간는 그 끝은 결국 죽음인데 주어진 죽음에 열심히 달려가며 사는 것 밖에 되지 않는 다는 것이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모든 것을 주인이시고 주관하시지만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안에서 나는 온전함을 쫓아갑니다. 내 배경, 환경, 조상의 망령된 유전을 극복하고 영원한 것을 소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수님의 평론에서처럼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박탈하는 것만큼 악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선하신 주님게서 주신 사랑과 약속의 징표를 인간이 빼앗은 것이니까요
공산당, 북한의 김씨일가 이들이 주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분명한 것은 그들의 비기독교적인 사상뿐만 아니라 이렇게 주님이 사랑으로 주신 것들을 갈취하고 억압하는 세력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적인 세계관으로 생각하기. 이번 평론을 통해 많이 배우게 되어 감사합니다.
내용만 들어봐도 어른들이 참 좋아할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에 대해서 어떤 정의를 내려 주기를 좋아하니까요. 그것이 옳던 그르던 뭔가 내가 생각했던 것이랑 비슷하기만 하면 맞는 것으로 여기고 마음을 한껏 두는...
그림책에 대한 서평에 독후활동이 많았다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림책이 어떤 내용인지 제대로 파악하는 것보다 이 책으로 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구나. 요즘 시대를 나타내는 분위기가 같아서 웃기지만 씁슬한
그림책속의 운명론적 세계관은 참으로 허무하고 공허했습니다.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은 어쩌면 저항하지 않고 극복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잔잔할 수는 있겠지만 그 안에 속해서 운명대로 살아가는 인간이란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 주어진 시나리오대로 인형처럼 끌려간는 그 끝은 결국 죽음인데 주어진 죽음에 열심히 달려가며 사는 것 밖에 되지 않는 다는 것이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모든 것을 주인이시고 주관하시지만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안에서 나는 온전함을 쫓아갑니다. 내 배경, 환경, 조상의 망령된 유전을 극복하고 영원한 것을 소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수님의 평론에서처럼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박탈하는 것만큼 악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선하신 주님게서 주신 사랑과 약속의 징표를 인간이 빼앗은 것이니까요
공산당, 북한의 김씨일가 이들이 주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분명한 것은 그들의 비기독교적인 사상뿐만 아니라 이렇게 주님이 사랑으로 주신 것들을 갈취하고 억압하는 세력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적인 세계관으로 생각하기. 이번 평론을 통해 많이 배우게 되어 감사합니다.
신혜진2025-02-22 08:55
이 책에는 한 남자의 인생이 그려져 있습니다. 어릴 때는 키가 크기를, 크리스마스가 오기를 기다립니다. 어른이 되어서는 사랑을, 헤어졌던 연인을 다시 만나기를 기다립니다. 그 후 전쟁이 났고, 이 남자는 다쳤는지 병원에 누워있고, 휠체어에 앉아서 편지를 쓰고 있어요. 아마도 연인에게 보내는 고백 편지였는지 한 통의 편지를, "좋아요" 라는 그 사람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이후 결혼을 하고, 아기를 기다리고, 곧 태어날 아기와의 만남을 기다립니다. 또 아이가 크기를, 아이들과 함께 하는 휴가를 기다립니다. 결혼 생활에 크고 작은 트러블이 없을 수 없겠죠. 싸웠는지 서로 얼굴을 돌린 두 사람은 "미안해"라는 한 마디를 기다립니다. 그리고는 시간이 훌쩍 뛰어넘어 성장해서 집을 떠난 아이들의 안부 전화를 기다립니다, 어느덧 나이가 들어 건강에 신경이 쓰일 때가 되면 의사의 "괜찮습니다"라는 말을 기다립니다. 아내가 먼저 병석에 누워 있으니 그녀가 아프지 않기를 기다리던 남자는 결국 아내의 장례를 치르게 됩니다. 이 떄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혼자 남게 된 남자는 다시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아이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손자가 태어나기를 기다립니다...
이 책에는 각 장면마다 다양한 의미로 붉은 실이 등장합니다. 작가는 크리스마스 장식, 엄마의 머리 끈, 아이의 스웨터, 흔드는 손수건 등의 사물을 붉은 실로 표현했습니다. 엄마와 아기를 연결해주는 탯줄이나 며느리의 뱃속에 있는 아기, 병원에 누워있는 남자의 팔에 꽂혀있는 링거줄 등은 핏줄이나 생명줄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남녀를 이어주는 붉은 실은 아내가 죽는 순간 끊어지고, 장례차에는 단정히 정리되어 걸려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월하노인"의 인연의 끈인 것도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기다립니다" 라는 말을 "기대합니다"라는 말로 바꾸어 읽어보았습니다. 우리 인생이 정해져 있는 운명을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계속 기대하는 인생으로 말이죠. 그리스도인들의 인생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우리 삶 속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역사하심을 기대하고, 앞으로 오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는 인생...오늘도 나는 기대합니다!
이 책에는 각 장면마다 다양한 의미로 붉은 실이 등장합니다. 작가는 크리스마스 장식, 엄마의 머리 끈, 아이의 스웨터, 흔드는 손수건 등의 사물을 붉은 실로 표현했습니다. 엄마와 아기를 연결해주는 탯줄이나 며느리의 뱃속에 있는 아기, 병원에 누워있는 남자의 팔에 꽂혀있는 링거줄 등은 핏줄이나 생명줄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남녀를 이어주는 붉은 실은 아내가 죽는 순간 끊어지고, 장례차에는 단정히 정리되어 걸려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월하노인"의 인연의 끈인 것도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기다립니다" 라는 말을 "기대합니다"라는 말로 바꾸어 읽어보았습니다. 우리 인생이 정해져 있는 운명을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계속 기대하는 인생으로 말이죠. 그리스도인들의 인생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우리 삶 속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역사하심을 기대하고, 앞으로 오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는 인생...오늘도 나는 기대합니다!
이영진2025-08-01 15:36
기다리는 일들은 일상에서 많이 일어납니다.
그래서인지 기다림은 익숙한 일입니다.
기다리는 일은 지루하지만 그 끝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바라며 기다림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평론을 읽으며 다시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리고 기다림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기다림은 수동적 기다림과 적극적 기다림으로 나눠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에서의 기다림은 수동적인 기다림으로 보여졌습니다.
사랑을 주기보다 받는 것을 기다리고, 누군가의 말(자녀, 의사 등)만을 기다리고.
평론을 읽으면서 이러한 부분들이 운명론적 세계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그 그 끝의 허무가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적극적인 기다림도 있는 것 같습니다.
신앙인이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적극적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활용하여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서요.
이전에는 단순히 이 책의 심미적 특성에만 집중하였는데, 평론을 통해 그 안에 있는 세계관을 보게 됩니다.
생각의 틀을 넓혀주는 글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인지 기다림은 익숙한 일입니다.
기다리는 일은 지루하지만 그 끝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바라며 기다림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평론을 읽으며 다시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리고 기다림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기다림은 수동적 기다림과 적극적 기다림으로 나눠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에서의 기다림은 수동적인 기다림으로 보여졌습니다.
사랑을 주기보다 받는 것을 기다리고, 누군가의 말(자녀, 의사 등)만을 기다리고.
평론을 읽으면서 이러한 부분들이 운명론적 세계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그 그 끝의 허무가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적극적인 기다림도 있는 것 같습니다.
신앙인이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적극적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활용하여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서요.
이전에는 단순히 이 책의 심미적 특성에만 집중하였는데, 평론을 통해 그 안에 있는 세계관을 보게 됩니다.
생각의 틀을 넓혀주는 글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윤진희2025-08-03 17:48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나와 유명세를 탄 이 책은 일러스트가 예쁘고 유럽 작가의 책이지만 동양적인 정서가 녹아있어 우리나라에서 이름이 알려진 것 같습니다. 책의 서사가 운명과 윤회라는 세계관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어서 로맨틱하고 운명적인 사랑이 느껴지는 책입니다. 그 당시 접했을 때도 느꼈지만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지금 평론을 보고 다시 읽어보니 더욱 어린이가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책의 주인공이 삶을 대하는 태도가 적극적인 자세가 아닌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수동적인 태도로 그려집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내가 하는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는 허무주의적인 사상이 잘 나타나있는 그림책인 것 같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장 9절>의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언뜻 보면 이 또한 하나님의 뜻으로 모든 것이 좌지우지 되는 것 느껴질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사람의 자유 의지를 하나님께서 주셨고 하나님의 주권에 자유 의지로 순종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허무주의 사상을 배우면서 더욱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다비드 칼리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면 상상력이 돋보이는 책들이 많아서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많은 편입니다. 하지만 책의 내용이 포스트 모더니즘 적이거나 젠더 이슈에서 자유롭지 못한 책들이 많습니다. 수업을 하면 할수록 좋은 책을 분별하는 지혜의 눈이 필요함을 느끼게 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장 9절>의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언뜻 보면 이 또한 하나님의 뜻으로 모든 것이 좌지우지 되는 것 느껴질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사람의 자유 의지를 하나님께서 주셨고 하나님의 주권에 자유 의지로 순종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허무주의 사상을 배우면서 더욱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다비드 칼리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면 상상력이 돋보이는 책들이 많아서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많은 편입니다. 하지만 책의 내용이 포스트 모더니즘 적이거나 젠더 이슈에서 자유롭지 못한 책들이 많습니다. 수업을 하면 할수록 좋은 책을 분별하는 지혜의 눈이 필요함을 느끼게 됩니다.
고진슬2025-08-03 22:09
<나는 기다립니다>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는 단순히 인간의 삶에 대한 전체적인 통찰을 빨간 실 하나로 엮어낸 작가의 아이디어가 신선하다고만 생각했었습니다.
책에서 담고 있는 소중한 이들과의 관계와 시간도 소중하지만 영원한 의미를 가진 무엇인가를 기다리기보다는 마르는 풀, 시드는 꽃과 같은 것을 기다리는 인간의 모습이 드러난 책이라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를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존재로서 그려진다는 말씀에도 동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어
(Freedom is Not Free, But Free라고나 할까요...) '자유'를 얻은 이들은 무엇을 기다려야 할지,
기다리면서 어떤 삶을 살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아직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북한 땅의 동포들에게 자유와 복음이 들어가는 그 날이 속히 오길 기도합니다.
평론을 통해 다시 한번 자유의 소중함을 상기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책에서 담고 있는 소중한 이들과의 관계와 시간도 소중하지만 영원한 의미를 가진 무엇인가를 기다리기보다는 마르는 풀, 시드는 꽃과 같은 것을 기다리는 인간의 모습이 드러난 책이라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를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존재로서 그려진다는 말씀에도 동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어
(Freedom is Not Free, But Free라고나 할까요...) '자유'를 얻은 이들은 무엇을 기다려야 할지,
기다리면서 어떤 삶을 살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아직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북한 땅의 동포들에게 자유와 복음이 들어가는 그 날이 속히 오길 기도합니다.
평론을 통해 다시 한번 자유의 소중함을 상기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주연2025-08-03 22:21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정말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쓴 다비드 칼리는 정말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입니다. 이미 주목을 받아서인지, 작가가 쓴 책들은 대부분 다 한국에 소개가 되고 학교도서관에도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별 생각없이 이 책을 접했었는데, 교수님의 평론과 다른 분들의 댓글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주인공은 수동적으로 기다립니다. 그리고 이는 허무주의로 쉽게 생각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운명”이라는 단어가 주는 그 남모른 로맨틱함이 있습니다. 사랑 이야기에서 쉽게 “우린 운명이야!”라고 미디어에서 접할 수 있어서 그럴까요. 하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의지 없이 단순히 끌려가다보면, 우리의 죗성이 이끄는 곳으로 정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자유의지‘에 대해 다시 깊게 생각해보게 됩니다.
사실 저는 별 생각없이 이 책을 접했었는데, 교수님의 평론과 다른 분들의 댓글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주인공은 수동적으로 기다립니다. 그리고 이는 허무주의로 쉽게 생각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운명”이라는 단어가 주는 그 남모른 로맨틱함이 있습니다. 사랑 이야기에서 쉽게 “우린 운명이야!”라고 미디어에서 접할 수 있어서 그럴까요. 하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의지 없이 단순히 끌려가다보면, 우리의 죗성이 이끄는 곳으로 정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자유의지‘에 대해 다시 깊게 생각해보게 됩니다.
김은수2025-08-04 11:30
십 몇 년 전, 지인이 본인이 참 좋아하는 책이라며 이 책을 소개해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단순하고 깔끔한 일러스트와 간결한 내용이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고나서 왜인지 모를 허무함이 느껴졌는데, 교수님의 평론을 읽으니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저자와는 별개로,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다시 오실 에수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모습입니다. 저희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나중에 엄마는 천국에서 마당에 아주 큰 체리나무를 심고 사자와 함께 놀 거야." 그러나 한 편으로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 아직 주님을 모르는 어둠 가운데 있는 이들이 속히 주님께 돌아오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제게 조금이라도 더 부어지기를 바라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디모데후서 4:7) 사도바울의 이 고백처럼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지키며 이 세상에서의 길을 끝까지 달려가고 싶다는 소원을 주님께 드려봅니다. 그렇게 잘 '달려서' 다음세대인 어린이들에게 바통을 '잘 건네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 삶 속에서 기다림은, 믿음의 선배들로부터 이어받은,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건네줄 '빨간 바통' 입니다.
이정아2025-08-04 12:40
허무주의 라는 큰 틀 안에 존재하는 운명론적 세계관을 들여다 보았다.
누군가의 운명이 정해져 있고, 그 운명을 기다리는 무기력함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물론 인간에게 기다림은 필연적인 것이다.
전도서의 저자는 성서에서 손꼽을 만한 허무주의자이다.
그러나 그에게 허무는 단순한 기다림이나 무기력함을 제공하지 않는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음을 그 때를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임을 전제로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중략)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도서 3장 1~11)
이러한 다스림의 때는 곧 영원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현재의 신실함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영원의 때 안에 우리의 몸이 부활하고,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또 다른 이루어짐을 목도하게 하실 것을 기대한다.
그러니 기독인에게 기다림은 이러한 때를 기다리는 부활 소망과 영원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향하는 것으로 만족하리라!
누군가의 운명이 정해져 있고, 그 운명을 기다리는 무기력함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물론 인간에게 기다림은 필연적인 것이다.
전도서의 저자는 성서에서 손꼽을 만한 허무주의자이다.
그러나 그에게 허무는 단순한 기다림이나 무기력함을 제공하지 않는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음을 그 때를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임을 전제로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중략)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도서 3장 1~11)
이러한 다스림의 때는 곧 영원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현재의 신실함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영원의 때 안에 우리의 몸이 부활하고,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또 다른 이루어짐을 목도하게 하실 것을 기대한다.
그러니 기독인에게 기다림은 이러한 때를 기다리는 부활 소망과 영원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향하는 것으로 만족하리라!
김현경2025-08-04 14:44
꽤 오래전 이 그림책을 처음 만났을 때 빨간 실을 사용한 콜라주 기법과 사진 기법 등 다양한 기법을 활용한 이 그림책이 매력적이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평론을 통해 다시 이 그림책을 생각해보니 '빨간 끈'은 동양문화권의 운명론적인 빨간 실과 닮아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수님께서 지적해주신 것처럼, 다양한 영화, 드라마에서 이 소재를 차용했는데 제가 기억하는 드라마 <신사의 품격>에서도 첫 장면에서 두 남녀 주인공의 만남을 빨간 실이 엮어줍니다. 이 비평 글에 댓글을 달아주신 여러 선생님들도 지적해 주셨지만, '운명'은 로맨틱한 분위기와 함께 '운명적인 사랑'을 떠올리게 하지요. 그러나 운명론적 세계관이 그렇게 로맨틱한 것은 아닙니다. 그 안에 갇혀서 살아가는 삶이란 얼마나 허무한지요. 이미 어떻게 해볼 도리도 없이, 무기력한 나의 끝을 기다려야 하니까요. 저는 문득 이 성경 말씀이 떠오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우리에게 진짜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또한 북한 동포들의 진정한 자유에 우리가 좀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 반성해 봅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다비드 칼리의 『나는 기다립니다.....』 (2005/2007)
<나는 기다립니다> 자세히 보기
다비드 칼리가 글을 쓴 이 작품은 어린이보다는 성인 독자가 더 사랑하는 그림책이 아닐까 싶다. 그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1972년 스위스에서 태어나 이탈리아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나는 기다립니다...』으로 2005년 바오밥상을 받았으며 『피아노 치기는 지겨워』로 2006년 볼로냐 라기치상을 받았고 『적』, 『나도 가족일까?』, 『사랑의 모양』 등을 비롯하여 20여 개의 작품이 있다.[1]
책의 형태는 가로로 긴 직사각형이며 크기는 두 손에 들어갈 정도로 작다. 2007년의 번역 초판본의 앞표지에는 책의 형태와 비슷한 작고 큰 두 개의 직사각형 안에 각각 “나는” “기다립니다...”라는 제목이 들어가 있고, 그 아래 네모 칸에 그려진 어린아이의 얼굴 밑에는 빨간 실타래가 그려져 있다. 뒤표지의 중앙에는 하트 모양의 빨간 끈이 그려져 있고 “삶의 끈을 따라서...”라는, 말 줄임표로 끝나는 문장이 있다. 표지 다음의 면지 전체는 끈과 같은 온통 붉은색이다. 표제지의 오른편 구석에는 빨간 끈이 한 줄 늘어져 있으며, 본문 화면의 오른쪽에서는 한 어린이가 그 끈을 힘껏 잡아당기고 있는 중이다. 그 화면의 왼쪽 위에는 “나는 기다립니다. 어서 키가 크기를”이라는 글 텍스트가 있다. 즉, 글은 제목과 같이 1인칭 화법으로, 정면에 그려진 그림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으므로 독자들은 객관적 시점으로 그의 이야기를 보고 듣게 된다.
그 다음 화면의 왼편에는 조금 열린 방문이, 오른편에는 작은 침대에 누워 방문 쪽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는 작은 아이가 있는데 이 아이의 코 밑에는 붉은 색 실타래가 늘어져 있다. 그 다음 화면의 글텍스트는 “잠자기 전 나에게 와서 뽀뽀해 주기를” 는 미완성 문장인데, 책 제목인 “기다립니다”로 완성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후 “케이크가 다 구워지기를”, “비가 그치기를...”, “크리스마스가 오기를” 과 같은 글귀와 그림이 연속되며, 그 다음 화면에서는 이제 성인이 된 아이가 오른쪽으로 걸어가고 그 뒤를 구불구불한 끈이 뒤따른다. “나는 기다립니다. 사랑을”이라는 글텍스트는 그의 삶에서 또 다른 국면이 펼쳐질 것임을 암시한다. 그는 영화관에서 어떤 여성을 만나고, 참전으로 인해 그녀와 헤어지게 되고,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한 그는 침상에서 그녀의 편지를 기다리고, 자신의 프러포즈에 대한 그녀의 답을 기다린다. 그 다음 화면에서 그는 “나는 기다립니다. 우리 아기를”라고 독백한다. 임신한 아내의 뜨개질 실에서 이어지는 끈은 지금보다 훨씬 굵게 그려져 있다. 그녀는 자신의 신체와 연결된 빨간 끈을 달고 나오는 아기를 출산한다. 이제 아버지가 된 주인공은 두 아이와 놀아주며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린다. 부부는 때로는 다투고 외면하기도 하고, 상대가 먼저 “미안해”라는 말을 해주기를 기다린다. 그 다음 화면에서는 그의 아내가 전화기를 들고 있으며. 그녀의 귀에서는 빨간 끈이 구불구불 화면 밖으로 이어지고 있다. “나는 기다립니다. 아이들의 안부 전화를”이라는 글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이 자녀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중임을 알 수 있다.
시간이 흘러 그는 병든 아내를 진찰하는 의사의 “괜찮습니다.”라는 한마디를 기다리고, 병상에 누워 죽어가고 있는 아내의 고통이 멈추기를 기다린다. 아내의 장례식을 치루고 혼자 된 그는 다시 봄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는 앉아서 손에 든 작은 붉은 끈 조각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기다립니다. 초인종 소리를” 이라는 글텍스트와 함께. 홀로 된 그 사람은 이제 아이들의 방문을 기다리는 중이다. “아이들이 나를 보러 오기를”에 등장한 아들은 마치 아버지와 자신의 아내를 이어주려는 듯 작은 끈 조각을 아버지와 그의 아내에게 건네고 있다. 마지막 화면은 아들이 임신한 아내를 자랑하듯 앞세우고 아버지를 방문하는 모습과 함께 “새 식구가 될 손자를 나는 기다립니다“ 는 글로 마무리된다. 며느리 복부 안의 빨간 끈은 태아를 연상케 한다. 뒤 면지에는 빨간 실타래 아래 “끝”이라는 글자가 있는데, 그 글자의 받침 “ㅌ” 은 지워지고 “ㄴ”으로 바뀌어 “끈”이 되었다.
배경이 거의 없다시피 한, 텅빈 공간에 배치된 등장인물은 끊어질 듯 말 듯한 가는 윤곽선으로만 그려졌다. 이 작품에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빨간 끈이다.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혹은 오른 편에서 왼편으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빨간 끈은 첫 장면에 등장했던 한 아이의 인생을 이끌어가는 동인(動因) 역할을 한다. 이 끈은 때로는 이어지기도, 꼬이기도, 엉키기도, 끊어지기도 하면서 주인공과 다른 인물들을 이어주고 있다. 병상에 누워있는 아내와 주인공을 이어주는 가느다란 빨간 끈은 끊겨 있어 아내의 죽음으로 그 둘간의 관계가 소멸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럼 이 빨간 끈의 의미는 무엇일까. 뒤표지에 그려진 붉은 실 매듭은 동양에서 ‘인연’을 상징하는 붉은 실을 연상케 한다.[2] 인터넷 사전인 '나무위키'는 붉은 실 이미지는 남녀 간의 인연을 이어준다는 설화와, 여기에서 유래되어 동아시아에서 널리 믿어지고 있는 미신적 문화요소를 가리키고 있다고 알려준다. 이 붉은 실은 중국어로는 ‘훙센’(홍선), 일본어로는 아카이이토라 부른다. 도교의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 지역 전반에서 이 이야기가 출현하며, 한국, 일본, 베트남 등 나라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인도에서는 결혼식 등 행사에서 붉은 천과 견장을 사용하고, 대한민국에서는 청실과 홍실이 부부의 연을 상징하며 전통 혼례에서 자주 쓰인다. 대중 매체에서도 이 붉은 실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재료로 종종 사용된다. 일본과 한국에서 방영되었던 드라마들(예: 한국 애니메이션 tvN드라마 『도깨비』, 일본의 『Red String by Christal Chang)에서 이 붉은 실은 인간이 아무리 애써도 바꿀 수 없는 운명을 상징한다.
이렇듯 붉은 실은 운명론적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위키백과[3]에 따르면 운명론이란 세상의 모든 사건은 이미 정해져 있고 인간의 노력으로 그것을 바꿀 수 없다는 세계관이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일에는 논리적인 인과관계 같은 것을 전혀 없으며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과 행동들 모두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는 존재는 누구일까. 다신교를 믿었던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그 것을 다신(多神)에서 찾았으며, 동양에서 운명을 지배하는 힘은 형태가 없는 비인격적이고 초월적 존재로 여겨졌다. 주역에서는 그것을 사주 혹은 팔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운명론이 함축하는 인간관은 인간은 운명에 의해 지배되는 수동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궁금하여 인터넷 서평란을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작품 자체의 평론보다는 매우 다양한 독후 활동들이 소개되어 있었다. 지금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쓰기, 그것을 그리기, 몸으로 표현하기, 과거에 무엇을 기다렸으며, 지금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그리고 이후에는 무엇을 기다릴 것인지를 말하기, 자신의 인생 곡선을 그려보기,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경험을 비교해 보기, 등 실로 다양한 활동들이 소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활동들은 아이들에게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성찰하도록 격려하며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도록 돕는 효과가 있다는 보고도 있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초등 고학년 정도의 아이들에게(연령은 정확하게 소개되어 있지 않았음.) ‘나는 열 다섯 살이 되면 어떠할까’, 그리고 ‘스무살일 때 어떤 모습일까’를 몸으로 표현하게 하였더니, 열 다섯이 되었을 때 술 마시는 모습, 담배 피는 모습, 한쪽 구석에 가서 우울하게 있는 모습을 표현하는 아이들이 꽤 많았다는 것이다. 스무살로 상상해 보게 했을 때에도 그들 중 많은 아이들이 어두운 미래를 표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독서지도사는 아이들의 이런 모습을 성인들의 책임이라고 여겨 아이들에게 작은 꿈을 품게 하는 일들을 해보게 했고, 그 결과 긍정적인 효과를 얻었다고 보고한다.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를 요약하면, 이 작품은 다양한 연령의 독자가 ‘끈에 대해 이야기하기’와 ‘끈을 소재로 이야기하기’를 위해 사용되고 있었다. 아마도 기다림의 연속으로 그려지고 있는 한 인간의 삶이 독자의 존재론적 사유를 촉발하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실제로 『나는 기다립니다...』는 심리치료 현장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작품이라고 한다. 그러나 독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읽고 자신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도록 하기 전에, 작품의 글과 그림을 촘촘히 보게 하고, 주인공의 이야기를 이어보게 하면 어떠할까. 즉, 마지막 에피소드인 손주를 기다리는 그의 삶 이후를 상상하고 그려보게 하는 것이다. 그는 남은 시간 동안 계속 무엇을 기다리며 살게 될까. 혹시 이 이야기의 종말은 "나는 죽음을 기다립니다"가 되는 것이 아닐까.
이 작품에서 말 줄임표 없는 문장은 주인공이 생의 다른 국면(局面)을 맞았다는 것을 함축한다. 여섯 개로 구성된 국면들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어서 키가 크기를”, “사랑을” “우리 아기를”, “아이들의 안부 전화를” “초인종 소리를”, “새 식구가 될 손자를” 첫 번째 국면은 성장기 아동의 기다림을 표현한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결혼과 출산을, 네 번째는 자녀의 출가 이후,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는 노년기를 가리킨다. 이러한 국면의 전환은 모두 가족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과의 만남은 운명의 실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이란 운명의 실타래가 풀어내는 태어나고, 만나고, 헤어지고, 죽는 것에 불과한 것인가.
운명론적 세계관의 대척점에 자유의지의 관점이 있다. 이 자유의지는 기독교의 인간관을 논할 때 예외없이 거론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이미지(image)에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창 2장)에는 이 자유의지도 포함되었다. 하나님은 자신과 같은 인격체로서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이 자유의지로 말미암아 인간은 뱀으로 위장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금지된 과일을 먹고 그 때문에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결국 어두움의 세력 밑에서 살게 되었지만 이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어두움 가운데 그냥 두지 않으셨다. 죄많은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엡 2: 1-5). 그런데 이 구원은 자동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 과정에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필요하다. 즉, ‘구원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로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믿음으로 받아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노예가 아닌 자유로운 존재로 만드셨고 그렇게 살기를 원하신다. 킹제임스 성경(KJB)의 갈라디아서 5장 1절 “그리스도께서 자유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으니 그러므로 그 자유 안에 굳게 서고 다시 속박의 멍에를 매지 말라.”(Stand fast therefore in the liberty wherewith Christ hath mad us free, and be not entangled again with the yoke of bondage)에서 “그 자유 안에”는 영어로 “in the liberty”이다. liberty와 동의어같이 사용되는 단어가 freedom이다. 그러나 liberty와 freedom간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freedom은 의지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이며, 행위할 수 있는 힘을 가짐을 말한다. 반면, liberty는 자의적인 의지로 행해지는 억압을 봉쇄하는 것에 관심을 갖기에 연루된 모든 이의 권리를 고려한다.” 성경 말씀에서 ‘속박의 멍에’란 바울 사도가 서신을 작성할 때의 맥락 안에서는 유대인들의 전통인 할례,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었다[4]. 그러나 광의의 개념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 된 우리를 얽어매는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산주의 이념에 맞서 기독교 정신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하신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유언처럼 이 성경 말씀을 남기셨다. 그 ‘속박의 멍에’란 하나님이 세우신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무너뜨리고 우리를 노예 삼으려는 공산주의의 영을 가리킨다.
결론적으로, 기독 신앙은 붉은 실이 함축하고 있는 동양의 운명론을 배격한다. 우리의 삶은 운명이라는 비인격적인 힘에 메어 있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된 우리에게는 ‘양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다. 이 자유는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대한민국 헌법 9조와 10조에 각각 명기되었다. 단, 우리의 자유의지로 행한 자유로운 행위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극도의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살고 있다. 게다가 굳이 진실과 거짓, 사실과 허구를 구별하지 않으려는 시대 정신은 진리를 선포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분위기이다. 그보다 더 참담한 것은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면 닿을 수 있는 북한 땅에서 해방 후 약 80년 동안 김씨 일가의 우상 숭배라는 흑암의 권세 하에서 복음을 듣지도 못한 채 죽어가고 있는 북한 주민들이다. 영육간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신음하고 있는 이천 오백만 북한 주민들은 언제 사탄의 올무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역사의 주관자이신 주님만이 그 날을 알고 계실 것이다. 하늘들이 땅보다 먼 것 같이 내 길들은 너희 길들보다 높으며 내 생각들은 너희 생각들보다 높다 (KJB 55:9)고 하신 하나님, 지금은 하나님의 뜻은 알 수 없으나 주님이 주신 이 아름다운 비전을 붙들고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세요.
“주께서 시온의 포로된 것을 되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자들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노래가 가득하였도다.
그 때에 이교도들 가운데 거하는 자들이 이르기를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들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들을 행하셨으니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즐겁도다.
오 주여, 남쪽에 있는 시내들을 되돌리시듯 우리의 포로 된 것을 되돌리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들은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귀중한 씨를 가지고 나아가 우는 자는
반드시 기뻐하며 자기의 곡식 단들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KJB 시편 126편)
[1] https://www.kyobobook.co.kr/service/profile/information?chrcCode=2000522201
[2] 운명의 붉은 실 - 나무위키 (namu.wiki)
[3] https://ko.wikipedia.org/wiki/%EC%9A%B4%EB%AA%85%EB%A1%A0
[4] https://m.cafe.daum.net/ReformedChurch/4lXa/503?listURI=%2FReformedChurch%2F4lXa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이며 아동문학과 그림책 평론 작업을 하고 있다. 미국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1989년부터 2023년까지 성대 아동청소년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2021년부터 웹진 <그림책 베이직>에 '그림책의 세계관'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성균관대학교 생활과학대학연구소 부설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그림책의 세계관', '기독 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세계관>, 공저로는 <그림책의 이해>, <그림책의 그림 읽기>, <세계 그림책의 역사>, <어린이교육전문가가 엄선한 100권의 그림책>, <신앙이 자라는 그림책 읽기>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