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그림책
들어가는 글
어린이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그림책이 최근에는 어른들로부터도 사랑받는 도서가 되고 있다. 나이, 학력, 경력, 전공분야 등이 매우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결같이 그림책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이토록 어여쁜 그림책』(2016)이라는 에세이집을 낸 4명의 여성 저자들은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책을 쓴 우리 네 사람은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직장인으로, 엄마로, 딸로, 연인으로, 친구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고민이 저마다 다 다르면서도 또 매우 닮아 있습니다. 어떻게 저 눈앞의 산을 넘어야 할까. 내일은 또 무슨 힘을 끌어와서 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까. 막막해지는 순간이면 우리는 그림책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림책이 안겨주는 위로와 용기에 힘입어 날카롭게 스쳐가는 하루하루를 무사히 통과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비슷한 일상을 살아가는 당신이 이 책을 통해 그림책의 세계로 돌아오시길. 그로 인해 우리가 먼저 받았던 위로가 당신께로 가닿기를 바랍니다.”[i]
『그림책의 힘』의 저자 중 한 명인 야나기다 구니오(河合隼雄, 松居直, 柳田邦男, 2003)는 57세에 25세 된 자신의 아들이 자살한 후 깊은 우울증에 빠져서 아무것도 못한 채 몇 달을 보낸 후 서점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그림책을 통해 위로를 받고 그림책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는 그림책을 통해 인생에서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생의 후반기야말로 그림책을 늘 곁에 두고 찬찬히 읽어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림책을 읽고 있노라면 정신없이 바쁘게 사느라 잊고 있었던 소중한 것들, 유머, 슬픔, 고독, 의지, 이별, 죽음, 생명 등에 대한 생각들이 아련히 떠오릅니다.”(pp. 17-18)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과의 인터뷰 기사를 묶은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의 저자 최혜진(2016)은 그림책과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어른이 되면서 잃어버렸으나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살았던 가치가 있다. 그림책을 보지 않았다면 아마 한참 더 막막함 속에서 더듬거렸을 것이다. 희망, 평등, 우정, 연대, 긍정, 용기... 오늘이 행복하지 않은 수많은 어른이 간절히 찾고자 하는 지혜, 그리워하는 근원적 에너지가 실은 어린 시절 읽었던 그림책 안에 모두 담겨있음을 깨닫고 나는 전율했다. 공감 능력을 잃고 혐오와 조롱의 언어가 일상이 된, 벌레 먹은 한국 사회를 해독할 성분이 그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부터 어린이용 책이니 어른용 책이니 하는 구분은 무의미했다.” (p. 7)
이렇게 그림책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이미 문학, 미술, 출판, 번역과 같이 다른 예술 분야에서 경력을 쌓은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영혼을 울리는 그림책의 특별한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은혜의 그림책
은혜의 정의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자연이나 남에게서 받는 고마운 혜택”이며, 두 번째로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는 사랑’”(두산동아, 1997: 1630)이다. 또한 NAVER 국어사전에서는 “고맙게 베풀어 주는 신세나 혜택” 그 다음에 “하느님, 하나님, 또는 부처님의 은총”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 단어는 문장 안에서 “은혜를 베풀다”, “은혜를 입다”, “은혜를 받다”, “은혜가 함께 하다”와 같이 사용된다. 이러한 사전적 정의를 종합한다면 은혜는 자연, 사람, 종교적ㆍ초월적 존재로부터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것이며 기독교적인 색채가 강한 단어라는것을 알 수 있다. 은혜와 가까운 단어로 ‘사랑’이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너무 자주 사용된 나머지 그저 평범한 단어가 되었고 특히 남녀 관계에서 그 의미는 퇴색되어 원 모습을 찾기 힘들어졌다. 영어에서 ‘은혜’라는 단어는 다행히 비교적 그 원래의 의미의 흔적을 보여준다. 타인의 친절에 고마워하고(grateful), 축하받고(congratulated), 서비스가 마음에 들면 놓는 팁(gratuity), 감사(gratitude)라는 단어들 안에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진 은혜에 대한 기쁨과 감사가 스며들어 있다. 반면에 배은망덕(ingratitude)한 자라는 욕은 은혜를 저버린 자를 지칭한다.
성경 전체는 하나님이 자격 없는 인간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의 이야기이다. 인간의 죄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구속 사역은 은혜의 이야기의 정점을 이룬다. 기독인이 아닌 사람들도 평생에 한번 이상은 들었을, 예수님의 설교인 ‘돌아온 탕자’(눅 15:11-32)는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1862)은 서구 문학이 보여주는, 은혜의 이야기의 백미라고 할만하다. 뮤지컬 영화로 상영되기도 했던 이 작품은 영화가 우리의 영혼에 미치는 압도적인 힘을 보여준다. 관객들은 마지막에 펼쳐지는 극적인 장면에 열광하여 이 작품의 주제를 1832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민중 봉기의 이상이었던 ‘자유, 평등, 박애’라고 해석하기 쉽다. 그러나 그 작품의 주제는 겨우 빵 한 조각을 도둑질한 죄로 18년 동안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였고 그로 인해 증오심으로 뭉쳐 있던 장발장이 미리엘 주교가 베푼 ‘은혜’로 인해 자신도 은혜를 베푸는 자로 변화된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는 은혜를 찾기 어렵다. 적자생존의 세상, 무엇인가를 얻으려면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상식이자 윤리적 태도로 여겨지는 세상이다. 주고 받기(give and take)의 교환의 논리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 사회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인해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복음은 받아들이기 매우 힘든 이야기가 되었다. 기독교인들조차 구원을 십일조, 선행, 금식, 철야 기도 등의 행위로 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은혜란 자신의 노력으로 인한 성취가 아닌 선물로서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다. 은혜의 속성을 베푸는 자와 받는 자의 편으로 나누어 분석한다면, 베푸는 자의 편에서는 ‘조건 없이 용서한다’.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푼다’, ‘수고나 노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아낌없이 베푼다’ 라는 행위이며, 수혜자 편에서는 ‘용서를 구하기 전에 받는다’, ‘받을 자격이 없는 자가 받는다’, ‘수고나 노력 없이 받는다’, ‘분이 넘치게 받는다’이다.
네 가지 이야기
은혜의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존재했던 이야기들의 세계관적 비교가 도움이 될 것이다. 서사에서는 항상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던가 아니면 실패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의 성공 혹은 실패를 판가름하는가? 그들의 미덕인가 아니면 힘인가, 아니면 또 다른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그 작품의 세계관을 형성한다. 문학 비평가인 Ryken[ii]은 문학의 세계관을 찾아내는데 유용한 질문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1) 인물들, 특별히 주인공의 기본적인 정체는 무엇인가? 인물들의 동기를 유발시키는 것은무엇인가? 그들이 가장 가치있게 여기는 것은 무엇이며 그들이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무엇인가? (2) 인물들(특히 주인공)은 어떤 종류의 행동을 취하는가? (3) 이런 인물들의 행동에 뒤따라오는 결과는 무엇인가? 주인공은 성공하는가? 혹은 실패하는가?
이 질문을 사용하면 세상의 이야기들을 네 가지 세계관적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고대 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과 그 본질을 유지한 채 여러 장르와 형식으로 변주되어 어린이들이 읽는 그림책 안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이다.
1. 보상(reward)의 이야기
‘보상의 이야기’의 공통점은 주인공이 갖춘 선, 정직, 용기, 성실, 인내와 같은 미덕(virtue)으로 인해 보상받는다는 것이다. 이 세계관은 민담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이다. 소위 권선징악의 주제를 담고 있다는 이야기들이 이에 속할 수 있다. 『흥부와 놀부』, 『콩쥐와 팥쥐』, 『은혜 갚은 까치』, 『금도끼 은도끼』 등과 같은 민담에서 주인공들은 그의 미덕으로 인해 자신보다 강한 자나 초자연적인 인물, 혹은 마술의 도움을 받아 추구하는 것을 얻거나 곤경으로부터 벗어난다. 반면, 『개미와 베짱이』에서 여름 내내 일하지 않고 노래하던 베짱이는 겨울이 되어 먹을 것을 구걸하러 개미를 찾아 가지만 문전박대를 당한다. 현대의 보상의 이야기로는 인내, 용기, 도전 정신 등으로 부와 권력을 손에 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2. 처세술의 이야기
이 이야기의 기원은 그리스에서 유래한 이솝 우화라고 할 수 있다. 다수의 이솝 우화에서는 미덕을 갖추었거나 이상적인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자, 약한 자, 게으른 자는 간교한 자, 영리한 자, 강한 자의 술책이나 힘으로 인해 패망한다. 『까마귀와 여우』에서 여우의 거짓 칭찬에 마음을 빼앗긴 까마귀는 자신의 목소리를 뽐내려고 하다가 고기를 빼앗기고, 『농사꾼의 딸을 사랑한 사자』에서 일편단심으로 소녀를 사랑한 순진한 사자는 처녀의 아버지의 꾀에 넘어가 이빨과 발톱을 다 뽑히고 내쫓기게 된다. 우화의 배경이 되는 세상은 초자연적인 힘이 들어설 수 없는, 인간의 힘만으로 움직이는 세계이며 약육강식의 법칙이 작동하는 장소이다. 대체로 우화의 가치는 교훈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 교훈이라는 것은 이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 하는 처세술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 출판계에서 식지 않는 인기를 누리는, 소위 ‘자기 계발서’도 각자의 도생(圖生)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 ‘처세술의 이야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자기 계발서의 원조라고 일컬어지는 데일 카네기의 『친구를 얻고 사람을 움직이는 방법』, 우리나라의 유명인들이 가장 많이 읽는다고 알려진 나폴레온 힐의 『놓치고 싶지 않은 나의 꿈 나의 인생』, 노먼 빈센트 힐이 쓴 46권의 ‘긍정심리학’ 책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성공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삶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3 허무의 이야기
이것은 이 세상과 인간 존재의 의미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는 것으로서 소위 허무주의 세계관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알베르트 카뮈의 철학 에세이의 제목으로 인해 유명해진 『시지프의 신화』에서 시지프는 신의 노여움을 사 크고 무거운 돌을 끊임없이 산 정상으로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은 인물이다. 신들은 의미없고 희망없는 일을 반복하는 것보다 더 가혹한 형벌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시지프가 고통스럽게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면, 바위는 또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져 버린다. 그런데 이러한 운명이 더욱 비극적인 것은 그가 그 허무함을 의식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연극으로 1953년 상연된 S.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F. 카프카의 『성』(1922)을 읽는 독자들은 허무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일반적으로 어린이 문학은 허무주의 세계관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겨졌으나 뜻밖에도 서양의 그림책 중에서 허무주의 세계관을 투영하고 있는 작품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기발한 유머로 칭송받는 배빗 콜의 작품의 기저에도 이러한 허무함이 깔려있다. 『비밀인대 너는 아기 때 대머리였대』(2000)의 글과 그림은 코믹하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파란만장한 삶은 결국 죽음으로 끝나고 그들은 비쩍 마른 닭으로 환생(?)한다. 작가와 이름이 같은 존이라는 소년과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강압적인 교사가 등장하는 존 버닝햄의 『지각대장 존』의 결말은 매우 모호하다. 열린 결말로 남겨진 마지막 장면은 왜 존은 오늘 아침에도 변함없이 자신이 이해받지 못하는 닫힌 공간으로 가고 있을까라는 의문을 남긴다. 그러한 존의 모습은 끝없이 산 정상을 향해 바위를 밀어 올리는, 의미 없는 노역을 감내해야 하는 시지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이 허무주의 세계관은 존 클라센의 『내 모자 어디 갔을까』(2011), 2013년 칼데콧 메달상을 받은 『이건 내 모자가 아니야』(2012), 『모자를 보았어』(2016)의 모자 삼부작에서도 엿볼 수 있다. 앞의 두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원래의 모자 주인들인 곰과 큰 물고기는 도둑을 응징하고 모자를 되찾았지만 쓸쓸한 공간적 배경과 모자를 쓰고 있는 그들의 표정에서는 기쁨보다는 허무함의 느낌이 내비친다. 마지막 작품인 『모자를 보았어』에서 사막에서 발견한 한 개의 카우보이 모자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던 두 거북은 각각 모자를 쓰고 어두운 밤하늘로 부유(浮游)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지만 그 판타지에서나마 그들의 머리보다 큰 모자는 그들의 시야를 가려버리고 만다.
4. 은혜의 이야기
모든 이야기는 우리의 삶과 관련되어 있다. 특히 오랜 옛날부터 전해온, 문학의 원형을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나름대로 우리에게 삶의 방식을 가르치는 데 있다. ‘보상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선함과 정직함, 겸손함과 같은 도덕 규범을 가르치며, ‘처세술의 이야기’는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생존경쟁의 사회에서 살아남는 법을 알려주며. ‘허무’의 이야기는 구원자의 존재를 부인하며 살아가는 삶의 필연적 결말을 깨닫게 해 준다. 그리고 ‘은혜의 이야기’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자의 곁에도 돕는 손길이 있음을 알려준다.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민담 안에는 권선징악이 아닌, 아무런 미덕이 없는 자들이 갈망하던 것을 노력 없이 거저 얻는다는 이야기도 다수 존재한다. 그러한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이렇다 할 덕목이나 장점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도움으로 위험을 피하고 살아남는다. 한국의 민담인 『해님과 달님』과 그림 동화의 『빨간 모자』의 주인공은 착하기보다는 약하고, 어리석고, 미련하고, 때로는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어린 아이일 뿐이며, 『좁쌀 한 알로 장가간 총각』의 주인공은 결코 성실하거나 착하지 않았지만 그저 우연히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부잣집 사위가 되는 행운을 얻게 된다.
이렇게 은혜의 관점으로 그림책을 읽게 되면 평소 즐겨 읽던 작품에서도 기대하지 않던 은혜의 빛을 발견할 수 있다. 은혜를 베푸는 대상으로는 부모가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사물, 혹은 의인화된 동물, 초월적 존재, 사물, 자연세계 등 창조 세계의 모든 것이 은혜를 베푸는 자로 그려진다. 어린이를 주 독자로 하는 그림책에서 은혜를 베푸는 등장인물은 주로 부모로 설정된다. 최숙희의 『괜찮아』(2009)에는 자녀의 약점은 문제 삼지 않고 장점을 알려주며 괜찮다고 격려하는 엄마가 등장하며, 『나도 나도』(2009)의 엄마는 어린이에게 자신감을 가지라고 격려한다. 영미권에서 최장의 스테디셀러인, 로버트 먼치 글의 『언제나 너를 사랑해』(2000)의 첫 장면에서 독자들은 젊은 엄마가 갓난아기를 안고 “너를 사랑해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 어떤 일이 닥쳐도, 내가 살아 있는 한, 너는 늘 나의 귀여운 아기”라고 노래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엄마는 아들이 자라나면서 온갖 말썽을 부리고 때로는 청소년기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에도 밤이 되면 잠자고 있는 아들을 안고 변함없이 노래를 들려준다. 세월이 흘러 늙고 병든 엄마를 찾아간 아들은 이제 자신이 엄마를 안고 그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곤히 잠자고 있는 자신의 갓난아기를 안고 같은 노래를 들려준다. 이렇게 해서 부모의 무조건적 사랑은 엄마로부터 아들에게, 그리고 그 아들로부터 그의 아기에게 전해진다. 고전이 된 실버스타인의 『아낌 없이 주는 나무』(2000)는 나무를 의인화한 그림책이지만 그 나무의 모습은 이기적인 자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쁘게 내어주는 부모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윌리암 스타이그의 작품 『아모스와 보리스』(1996)의 이야기는 바다의 모든 것을 사랑하던 생쥐 아모스가 바다 여행을 감행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파도를 만나 망망대해에서 배와 모든 것을 잃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아모스 앞에 큰 고래, 보리스라는 구원자가 나타난다. 그리고 둘은 아모스의 집으로 돌아가면서 아름다운 우정을 쌓는다. 삶의 터전이 다른 둘은 어쩔 수 없이 헤어지지만 얼마 후 보리스는 폭풍으로 인해 아모스가 사는 바닷가 모래톱으로 밀려 오고, 이를 발견한 아모스는 친절한 코끼리 두 마리의 도움을 받아 보리스를 구해준다. 아모스를 망망대해에서 구원해 것은 그가 치밀하게 준비한 항해 물품과 배, 그리고 항해 지식이 아니라 고래들의 회의에 참석차 우연히 그 곳을 지나던 보리스였으며, 보리스를 죽음에서 구해준 것은 그의 힘과 크기가 아니라 아모스의 요청에 부응하여 달려온, 자신과 일면식도 없었던 코끼리 두 마리였던 것이다.
어떤 그림책들에서 은혜의 목소리는 종종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초월적 존재로부터 온다. 낸시 틸먼의 작품인 『네가 어디에 있든 너와 함께 할 거야』(2011)의 첫 화면에서 독자는 물소를 타고 평화롭게 황금빛 들판을 가로지르는 아이의 뒷모습과 함께 “나는 너를 사랑해. 네가 어디에 있어도 나는 너와 함께 할 거야” 라는 시구를 읽게 된다. 뒤를 이은 모든 화면에서 “나는 너와 함께 할 거야”와 “내 사랑은...”이라는 시구가 반복된다. 그러나 글에서도, 그림에서도 그 시인이 누구인지는 그려져 있지 않다. 그 목소리는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는 아이와 항상동행하는 무소부재(無所不在)한 초월자의 것이다. 인간의 지각 범위를 벗어나 있는 그 초월자는 그림책 속 아이에게 “너는 나의 천사, 나의 사랑, 나의 별이야. 네가 어디에 있든 나는 너를 사랑할거야”라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속삭인다.
프랑스 작가인 클로드 부종의 『아름다운 책』(2002)은 간명한 선과 형태, 영상 언어와 흡사한 그림 언어, 다층적 의미를 갖고 있는 문장들, 늘 여우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토끼 형제가 읽고 있던 책으로 여우를 물리쳤다는 기발하고 통쾌한 결말, 여우의 머리통을 내리칠 수 있을 것 같은 큰 판형의 책 등, 글과 그림, 페리텍스트 면에서 매력적인 작품이다. 그런데 글에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 당근이 거의 매 장면 그려져 있어 그 이유가 궁금해진다. 당근은 아마도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이 경작하던 것을 훔쳐 온 것일테지만, 책은 우연히 길에서 주워 온 것이다. 그런데 정작 토끼 형제의 생명을 구한 것은 수고로 얻은 당근이 아니라, 거저 손에 넣게 된 책이었다.
우리는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과 장엄함을 대면하게 되면 저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오고 숭고를 경험하게 되지만 일상에서 마주치는 작은 나무와 꽃, 새소리, 공기와 바람, 햇빛이 주는 유익과 기쁨은 자주 잊곤 한다. 우리 주변의 소소한 생명들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수고하여 얻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도 감사하지도 못하고 살아 간다. 그러나 우리는 그림책을 통해 감사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레오 리오니의 그림책 『프레드릭』(1999)의 주인공 프레드릭은 작은 생쥐이다. 그의 가족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여름날에 프레드릭은 바위에 올라가 상상을 즐기고 있다. 추운 겨울이 되고 모은 양식도 바닥이 나자 어두운 굴속에서 살아가는 생쥐 가족은 우울해진다. 프레드릭이 겨울이 오기 전에 햇살과 색깔과 이야기를 모으고 있다고 했던 것을 기억해 낸 그들은 프레드릭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른다. 프레드릭이 햇살의 이야기를 하자 생쥐 가족은 몸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고 색깔 이야기를 하자 그들의 마음 속에 색깔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생쥐 가족이 또 다른 이야기를 부탁하자 프레드릭은 사계절을 찬미하는 시를 들려준다. “... 계절이 넷이니 얼마나 좋아.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딱 사계절.” 그의 시에 감동한 생쥐 가족은“너는 정말 시인이야”라며 칭찬하고 프레드릭은 “나도 알아”라고 만족해한다.
메리 린 레이가 글을 쓰고 바바라 쿠니가 그림을 그린 『바구니달』(2000)은 19세기 미국 북동부 의 깊은 산악지대에서 살던, 지금은 사라진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이다. 3인칭 화법의 글과 녹색과 갈색 주조의 객관적인 시점에서 그려진 그림은 목가적인 산골 동네의 분위기를 잔잔하게 전달한다. 채소나 곡식을 심지 못하는 그 고산지대에서 공동체 사람들의 생계를 이어주는 것은 바구니 제작용 나무들이었다. 주인공 소년은 아버지와 아저씨들이 바구니를 짜면서 나누는,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자신도 그것을 들을수 있을지 궁금해 하지만 조 아저씨는 들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만 들린다고 대답하였다. 아홉 살 생일이 지나 처음으로 아버지를 따라 바구니를 팔러 도시에 나간 날, 소년은 그곳 아이들이 자신을 촌뜨기라고 놀리는 바람에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바구니를 쌓아 놓은 창고로 들어가 바구니들을 발로 차 쓰러뜨리며 좌절감과 분노를 표출한다. 그런데 이 때 창고로 들어온 조아저씨가 들려주는, 바람과 나무와 바구니에 대한 신비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바람의 말을 알아듣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된다. 바구니를 짜면서도 바람의 말을 기다리던 소년은 한밤중에 바람을 따라 바람이 바구니를 짜는 곳으로 가게 된다. 결국 그는 바람이 자신의 이름을 부른 이유가 나무들이 키우는 것이 그가 짤 바구니라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임을 깨닫게 된다. 나무와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함께 살았던 산골 사람들의 삶은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하는 현대인의 굳은 마음을 두드린다.
리즈 갈튼 스캔런이 글을 쓰고 말라 프레이지가 그림을 그린 『온 세상을 노래해』(All the World)(2010)라는 작품은 원어 제목처럼 ‘온 세상’을 노래하는 시 그림책으로서 2010년 칼데콧 영예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책의 제목에 걸맞게 비교적 큰 판형으로 제작된 가로·세로 28.5 cm의 정사각형 책에서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펼쳐지는, 평화롭고 따뜻하며 사랑 넘치는 바닷가 마을 사람들의 삶을 보게 된다. 시의 리듬에 맞게 그림에서도 그들의 삶과 바닷가 마을의 전체적인 조망이 각각 근경과 원경으로 교차되어 리듬감 있게 그려진다. 마지막 네 화면에 걸쳐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당신이 듣고 냄새 맡고 보는 모든 것, 그 모든 것이 세상이지요. 모든 것이 너와 나 우리랍니다. 희망과 평화와 사랑과 신뢰, 모든 세상은 우리 모두에요.” 바닷가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구체적이고 감각적으로 그려내었던 시인은 이제 “희망과 평화와 사랑과 신뢰”라는, 추상적인 단어로 인류의 이상을 피력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는“모든 세상은 우리 모두에요.”(All the world is all of us)라는 시구와 함께 잠옷을 입은 어린 소녀가 그려져 있다. 여기에서 독자의 시선은 소녀가 응시하고 있는, 두 손 안의 어떤 사물로 향하게 된다. 주의 깊은 독자라면 그것이 책의 전반부에서 소녀가 해변의 모래밭에서 주워 온 소라 껍데기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림책의 페리텍스트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독자라면 그것이 앞 표제지에도 그려져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낼 것이다. 표제지로부터 시작하여 본문과 뒷 표지에까지 그려진 소라 껍데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작가는 우리의 삶의 터전과 인류 공동체와 우주의 모든 사물들이 그 작은 소라 껍데기처럼 선물로 주어진 것임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결론
좋은 그림책은 좋은 예술이 하는 일을 한다. 예술이란 현실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 너머의 세상을 그리는 것이다. 고흐의 작품이 위대한 까닭은 그가 처한 비참한 환경과 육체적 조건 가운데에서도 우리 삶 너머의 아름다움을 그렸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아픈 근대사와 삶의 궤적을 같이한 이중섭은 가족과의 생이별을 초래한 전쟁의 비참함과 개인적인 궁핍을 그리는 대신, 작은 담배 은박지에 가족들이 모여 마음껏 놀이를 즐기는 이상향을 그렸다.
작가의 창작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작품에는 작가가 견지하고 있는 인간의 존재론적 관점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필자는 애니메이션 작가와 감독인 미야자끼 하야오가 어린이 문학을 “(어린이들에게) 태어나기를 잘했다라고 응원하는 것이다”[iii] 라고 한 것보다 더 멋있고 통찰력있는 어린이 문학의 정의를 아직 찾지 못했다. 그림책은 어린이 문학 중에서도 이 세상에 첫 발을 내디딘 어린 생명들을 위해 창작되는 도서이다. 그들에게는 “너희들 이 곳에 오길 정말 잘했어. 이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 신기한 것, 재미있는 것들이 정말 많단다. 같이 이 세상을 탐험해 보자꾸나.”라는 환대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런 이야기들은 한편으로는 어린이들에게 기쁨과 격려를, 성인들에게는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용기와 위로를 선사한다.
[i] 이상희, 최현미, 한미화, 강지은(2016). 이토록 어여쁜 그림책.
[ii] Riken, L. (1991). 기독교와 문학. 원제. Windows to the World. pp. 146-147
[iii] 미야자끼 하야오(2013). 책으로 가는 길. 서문.
|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후 Eastern Michigan University 에서 석사,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어린이문학교육학회 회장 및 한국 기독교 유아교 육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아동 청소년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대학 부설 생활과 학 연구소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기독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이해>(공저), <그림책과 예술교육>(공저>, <그림책으로 보는 아동과 우리사회>(공저), <100권의 그림책>(공저) 등 그림책 관련 저서가 있다. |
은혜의 그림책
들어가는 글
어린이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그림책이 최근에는 어른들로부터도 사랑받는 도서가 되고 있다. 나이, 학력, 경력, 전공분야 등이 매우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결같이 그림책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이토록 어여쁜 그림책』(2016)이라는 에세이집을 낸 4명의 여성 저자들은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책을 쓴 우리 네 사람은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직장인으로, 엄마로, 딸로, 연인으로, 친구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고민이 저마다 다 다르면서도 또 매우 닮아 있습니다. 어떻게 저 눈앞의 산을 넘어야 할까. 내일은 또 무슨 힘을 끌어와서 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까. 막막해지는 순간이면 우리는 그림책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림책이 안겨주는 위로와 용기에 힘입어 날카롭게 스쳐가는 하루하루를 무사히 통과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비슷한 일상을 살아가는 당신이 이 책을 통해 그림책의 세계로 돌아오시길. 그로 인해 우리가 먼저 받았던 위로가 당신께로 가닿기를 바랍니다.”[i]
『그림책의 힘』의 저자 중 한 명인 야나기다 구니오(河合隼雄, 松居直, 柳田邦男, 2003)는 57세에 25세 된 자신의 아들이 자살한 후 깊은 우울증에 빠져서 아무것도 못한 채 몇 달을 보낸 후 서점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그림책을 통해 위로를 받고 그림책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는 그림책을 통해 인생에서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생의 후반기야말로 그림책을 늘 곁에 두고 찬찬히 읽어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림책을 읽고 있노라면 정신없이 바쁘게 사느라 잊고 있었던 소중한 것들, 유머, 슬픔, 고독, 의지, 이별, 죽음, 생명 등에 대한 생각들이 아련히 떠오릅니다.”(pp. 17-18)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과의 인터뷰 기사를 묶은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의 저자 최혜진(2016)은 그림책과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어른이 되면서 잃어버렸으나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살았던 가치가 있다. 그림책을 보지 않았다면 아마 한참 더 막막함 속에서 더듬거렸을 것이다. 희망, 평등, 우정, 연대, 긍정, 용기... 오늘이 행복하지 않은 수많은 어른이 간절히 찾고자 하는 지혜, 그리워하는 근원적 에너지가 실은 어린 시절 읽었던 그림책 안에 모두 담겨있음을 깨닫고 나는 전율했다. 공감 능력을 잃고 혐오와 조롱의 언어가 일상이 된, 벌레 먹은 한국 사회를 해독할 성분이 그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부터 어린이용 책이니 어른용 책이니 하는 구분은 무의미했다.” (p. 7)
이렇게 그림책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이미 문학, 미술, 출판, 번역과 같이 다른 예술 분야에서 경력을 쌓은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영혼을 울리는 그림책의 특별한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은혜의 그림책
은혜의 정의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자연이나 남에게서 받는 고마운 혜택”이며, 두 번째로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는 사랑’”(두산동아, 1997: 1630)이다. 또한 NAVER 국어사전에서는 “고맙게 베풀어 주는 신세나 혜택” 그 다음에 “하느님, 하나님, 또는 부처님의 은총”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 단어는 문장 안에서 “은혜를 베풀다”, “은혜를 입다”, “은혜를 받다”, “은혜가 함께 하다”와 같이 사용된다. 이러한 사전적 정의를 종합한다면 은혜는 자연, 사람, 종교적ㆍ초월적 존재로부터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것이며 기독교적인 색채가 강한 단어라는것을 알 수 있다. 은혜와 가까운 단어로 ‘사랑’이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너무 자주 사용된 나머지 그저 평범한 단어가 되었고 특히 남녀 관계에서 그 의미는 퇴색되어 원 모습을 찾기 힘들어졌다. 영어에서 ‘은혜’라는 단어는 다행히 비교적 그 원래의 의미의 흔적을 보여준다. 타인의 친절에 고마워하고(grateful), 축하받고(congratulated), 서비스가 마음에 들면 놓는 팁(gratuity), 감사(gratitude)라는 단어들 안에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진 은혜에 대한 기쁨과 감사가 스며들어 있다. 반면에 배은망덕(ingratitude)한 자라는 욕은 은혜를 저버린 자를 지칭한다.
성경 전체는 하나님이 자격 없는 인간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의 이야기이다. 인간의 죄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구속 사역은 은혜의 이야기의 정점을 이룬다. 기독인이 아닌 사람들도 평생에 한번 이상은 들었을, 예수님의 설교인 ‘돌아온 탕자’(눅 15:11-32)는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1862)은 서구 문학이 보여주는, 은혜의 이야기의 백미라고 할만하다. 뮤지컬 영화로 상영되기도 했던 이 작품은 영화가 우리의 영혼에 미치는 압도적인 힘을 보여준다. 관객들은 마지막에 펼쳐지는 극적인 장면에 열광하여 이 작품의 주제를 1832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민중 봉기의 이상이었던 ‘자유, 평등, 박애’라고 해석하기 쉽다. 그러나 그 작품의 주제는 겨우 빵 한 조각을 도둑질한 죄로 18년 동안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였고 그로 인해 증오심으로 뭉쳐 있던 장발장이 미리엘 주교가 베푼 ‘은혜’로 인해 자신도 은혜를 베푸는 자로 변화된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는 은혜를 찾기 어렵다. 적자생존의 세상, 무엇인가를 얻으려면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상식이자 윤리적 태도로 여겨지는 세상이다. 주고 받기(give and take)의 교환의 논리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 사회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인해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복음은 받아들이기 매우 힘든 이야기가 되었다. 기독교인들조차 구원을 십일조, 선행, 금식, 철야 기도 등의 행위로 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은혜란 자신의 노력으로 인한 성취가 아닌 선물로서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다. 은혜의 속성을 베푸는 자와 받는 자의 편으로 나누어 분석한다면, 베푸는 자의 편에서는 ‘조건 없이 용서한다’.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푼다’, ‘수고나 노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아낌없이 베푼다’ 라는 행위이며, 수혜자 편에서는 ‘용서를 구하기 전에 받는다’, ‘받을 자격이 없는 자가 받는다’, ‘수고나 노력 없이 받는다’, ‘분이 넘치게 받는다’이다.
네 가지 이야기
은혜의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존재했던 이야기들의 세계관적 비교가 도움이 될 것이다. 서사에서는 항상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던가 아니면 실패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의 성공 혹은 실패를 판가름하는가? 그들의 미덕인가 아니면 힘인가, 아니면 또 다른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그 작품의 세계관을 형성한다. 문학 비평가인 Ryken[ii]은 문학의 세계관을 찾아내는데 유용한 질문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1) 인물들, 특별히 주인공의 기본적인 정체는 무엇인가? 인물들의 동기를 유발시키는 것은무엇인가? 그들이 가장 가치있게 여기는 것은 무엇이며 그들이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무엇인가? (2) 인물들(특히 주인공)은 어떤 종류의 행동을 취하는가? (3) 이런 인물들의 행동에 뒤따라오는 결과는 무엇인가? 주인공은 성공하는가? 혹은 실패하는가?
이 질문을 사용하면 세상의 이야기들을 네 가지 세계관적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고대 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과 그 본질을 유지한 채 여러 장르와 형식으로 변주되어 어린이들이 읽는 그림책 안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이다.
1. 보상(reward)의 이야기
‘보상의 이야기’의 공통점은 주인공이 갖춘 선, 정직, 용기, 성실, 인내와 같은 미덕(virtue)으로 인해 보상받는다는 것이다. 이 세계관은 민담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이다. 소위 권선징악의 주제를 담고 있다는 이야기들이 이에 속할 수 있다. 『흥부와 놀부』, 『콩쥐와 팥쥐』, 『은혜 갚은 까치』, 『금도끼 은도끼』 등과 같은 민담에서 주인공들은 그의 미덕으로 인해 자신보다 강한 자나 초자연적인 인물, 혹은 마술의 도움을 받아 추구하는 것을 얻거나 곤경으로부터 벗어난다. 반면, 『개미와 베짱이』에서 여름 내내 일하지 않고 노래하던 베짱이는 겨울이 되어 먹을 것을 구걸하러 개미를 찾아 가지만 문전박대를 당한다. 현대의 보상의 이야기로는 인내, 용기, 도전 정신 등으로 부와 권력을 손에 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2. 처세술의 이야기
이 이야기의 기원은 그리스에서 유래한 이솝 우화라고 할 수 있다. 다수의 이솝 우화에서는 미덕을 갖추었거나 이상적인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자, 약한 자, 게으른 자는 간교한 자, 영리한 자, 강한 자의 술책이나 힘으로 인해 패망한다. 『까마귀와 여우』에서 여우의 거짓 칭찬에 마음을 빼앗긴 까마귀는 자신의 목소리를 뽐내려고 하다가 고기를 빼앗기고, 『농사꾼의 딸을 사랑한 사자』에서 일편단심으로 소녀를 사랑한 순진한 사자는 처녀의 아버지의 꾀에 넘어가 이빨과 발톱을 다 뽑히고 내쫓기게 된다. 우화의 배경이 되는 세상은 초자연적인 힘이 들어설 수 없는, 인간의 힘만으로 움직이는 세계이며 약육강식의 법칙이 작동하는 장소이다. 대체로 우화의 가치는 교훈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 교훈이라는 것은 이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 하는 처세술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 출판계에서 식지 않는 인기를 누리는, 소위 ‘자기 계발서’도 각자의 도생(圖生)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 ‘처세술의 이야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자기 계발서의 원조라고 일컬어지는 데일 카네기의 『친구를 얻고 사람을 움직이는 방법』, 우리나라의 유명인들이 가장 많이 읽는다고 알려진 나폴레온 힐의 『놓치고 싶지 않은 나의 꿈 나의 인생』, 노먼 빈센트 힐이 쓴 46권의 ‘긍정심리학’ 책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성공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삶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3 허무의 이야기
이것은 이 세상과 인간 존재의 의미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는 것으로서 소위 허무주의 세계관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알베르트 카뮈의 철학 에세이의 제목으로 인해 유명해진 『시지프의 신화』에서 시지프는 신의 노여움을 사 크고 무거운 돌을 끊임없이 산 정상으로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은 인물이다. 신들은 의미없고 희망없는 일을 반복하는 것보다 더 가혹한 형벌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시지프가 고통스럽게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면, 바위는 또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져 버린다. 그런데 이러한 운명이 더욱 비극적인 것은 그가 그 허무함을 의식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연극으로 1953년 상연된 S.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F. 카프카의 『성』(1922)을 읽는 독자들은 허무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일반적으로 어린이 문학은 허무주의 세계관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겨졌으나 뜻밖에도 서양의 그림책 중에서 허무주의 세계관을 투영하고 있는 작품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기발한 유머로 칭송받는 배빗 콜의 작품의 기저에도 이러한 허무함이 깔려있다. 『비밀인대 너는 아기 때 대머리였대』(2000)의 글과 그림은 코믹하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파란만장한 삶은 결국 죽음으로 끝나고 그들은 비쩍 마른 닭으로 환생(?)한다. 작가와 이름이 같은 존이라는 소년과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강압적인 교사가 등장하는 존 버닝햄의 『지각대장 존』의 결말은 매우 모호하다. 열린 결말로 남겨진 마지막 장면은 왜 존은 오늘 아침에도 변함없이 자신이 이해받지 못하는 닫힌 공간으로 가고 있을까라는 의문을 남긴다. 그러한 존의 모습은 끝없이 산 정상을 향해 바위를 밀어 올리는, 의미 없는 노역을 감내해야 하는 시지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이 허무주의 세계관은 존 클라센의 『내 모자 어디 갔을까』(2011), 2013년 칼데콧 메달상을 받은 『이건 내 모자가 아니야』(2012), 『모자를 보았어』(2016)의 모자 삼부작에서도 엿볼 수 있다. 앞의 두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원래의 모자 주인들인 곰과 큰 물고기는 도둑을 응징하고 모자를 되찾았지만 쓸쓸한 공간적 배경과 모자를 쓰고 있는 그들의 표정에서는 기쁨보다는 허무함의 느낌이 내비친다. 마지막 작품인 『모자를 보았어』에서 사막에서 발견한 한 개의 카우보이 모자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던 두 거북은 각각 모자를 쓰고 어두운 밤하늘로 부유(浮游)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지만 그 판타지에서나마 그들의 머리보다 큰 모자는 그들의 시야를 가려버리고 만다.
4. 은혜의 이야기
모든 이야기는 우리의 삶과 관련되어 있다. 특히 오랜 옛날부터 전해온, 문학의 원형을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나름대로 우리에게 삶의 방식을 가르치는 데 있다. ‘보상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선함과 정직함, 겸손함과 같은 도덕 규범을 가르치며, ‘처세술의 이야기’는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생존경쟁의 사회에서 살아남는 법을 알려주며. ‘허무’의 이야기는 구원자의 존재를 부인하며 살아가는 삶의 필연적 결말을 깨닫게 해 준다. 그리고 ‘은혜의 이야기’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자의 곁에도 돕는 손길이 있음을 알려준다.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민담 안에는 권선징악이 아닌, 아무런 미덕이 없는 자들이 갈망하던 것을 노력 없이 거저 얻는다는 이야기도 다수 존재한다. 그러한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이렇다 할 덕목이나 장점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도움으로 위험을 피하고 살아남는다. 한국의 민담인 『해님과 달님』과 그림 동화의 『빨간 모자』의 주인공은 착하기보다는 약하고, 어리석고, 미련하고, 때로는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어린 아이일 뿐이며, 『좁쌀 한 알로 장가간 총각』의 주인공은 결코 성실하거나 착하지 않았지만 그저 우연히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부잣집 사위가 되는 행운을 얻게 된다.
이렇게 은혜의 관점으로 그림책을 읽게 되면 평소 즐겨 읽던 작품에서도 기대하지 않던 은혜의 빛을 발견할 수 있다. 은혜를 베푸는 대상으로는 부모가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사물, 혹은 의인화된 동물, 초월적 존재, 사물, 자연세계 등 창조 세계의 모든 것이 은혜를 베푸는 자로 그려진다. 어린이를 주 독자로 하는 그림책에서 은혜를 베푸는 등장인물은 주로 부모로 설정된다. 최숙희의 『괜찮아』(2009)에는 자녀의 약점은 문제 삼지 않고 장점을 알려주며 괜찮다고 격려하는 엄마가 등장하며, 『나도 나도』(2009)의 엄마는 어린이에게 자신감을 가지라고 격려한다. 영미권에서 최장의 스테디셀러인, 로버트 먼치 글의 『언제나 너를 사랑해』(2000)의 첫 장면에서 독자들은 젊은 엄마가 갓난아기를 안고 “너를 사랑해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 어떤 일이 닥쳐도, 내가 살아 있는 한, 너는 늘 나의 귀여운 아기”라고 노래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엄마는 아들이 자라나면서 온갖 말썽을 부리고 때로는 청소년기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에도 밤이 되면 잠자고 있는 아들을 안고 변함없이 노래를 들려준다. 세월이 흘러 늙고 병든 엄마를 찾아간 아들은 이제 자신이 엄마를 안고 그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곤히 잠자고 있는 자신의 갓난아기를 안고 같은 노래를 들려준다. 이렇게 해서 부모의 무조건적 사랑은 엄마로부터 아들에게, 그리고 그 아들로부터 그의 아기에게 전해진다. 고전이 된 실버스타인의 『아낌 없이 주는 나무』(2000)는 나무를 의인화한 그림책이지만 그 나무의 모습은 이기적인 자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쁘게 내어주는 부모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윌리암 스타이그의 작품 『아모스와 보리스』(1996)의 이야기는 바다의 모든 것을 사랑하던 생쥐 아모스가 바다 여행을 감행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파도를 만나 망망대해에서 배와 모든 것을 잃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아모스 앞에 큰 고래, 보리스라는 구원자가 나타난다. 그리고 둘은 아모스의 집으로 돌아가면서 아름다운 우정을 쌓는다. 삶의 터전이 다른 둘은 어쩔 수 없이 헤어지지만 얼마 후 보리스는 폭풍으로 인해 아모스가 사는 바닷가 모래톱으로 밀려 오고, 이를 발견한 아모스는 친절한 코끼리 두 마리의 도움을 받아 보리스를 구해준다. 아모스를 망망대해에서 구원해 것은 그가 치밀하게 준비한 항해 물품과 배, 그리고 항해 지식이 아니라 고래들의 회의에 참석차 우연히 그 곳을 지나던 보리스였으며, 보리스를 죽음에서 구해준 것은 그의 힘과 크기가 아니라 아모스의 요청에 부응하여 달려온, 자신과 일면식도 없었던 코끼리 두 마리였던 것이다.
어떤 그림책들에서 은혜의 목소리는 종종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초월적 존재로부터 온다. 낸시 틸먼의 작품인 『네가 어디에 있든 너와 함께 할 거야』(2011)의 첫 화면에서 독자는 물소를 타고 평화롭게 황금빛 들판을 가로지르는 아이의 뒷모습과 함께 “나는 너를 사랑해. 네가 어디에 있어도 나는 너와 함께 할 거야” 라는 시구를 읽게 된다. 뒤를 이은 모든 화면에서 “나는 너와 함께 할 거야”와 “내 사랑은...”이라는 시구가 반복된다. 그러나 글에서도, 그림에서도 그 시인이 누구인지는 그려져 있지 않다. 그 목소리는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는 아이와 항상동행하는 무소부재(無所不在)한 초월자의 것이다. 인간의 지각 범위를 벗어나 있는 그 초월자는 그림책 속 아이에게 “너는 나의 천사, 나의 사랑, 나의 별이야. 네가 어디에 있든 나는 너를 사랑할거야”라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속삭인다.
프랑스 작가인 클로드 부종의 『아름다운 책』(2002)은 간명한 선과 형태, 영상 언어와 흡사한 그림 언어, 다층적 의미를 갖고 있는 문장들, 늘 여우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토끼 형제가 읽고 있던 책으로 여우를 물리쳤다는 기발하고 통쾌한 결말, 여우의 머리통을 내리칠 수 있을 것 같은 큰 판형의 책 등, 글과 그림, 페리텍스트 면에서 매력적인 작품이다. 그런데 글에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 당근이 거의 매 장면 그려져 있어 그 이유가 궁금해진다. 당근은 아마도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이 경작하던 것을 훔쳐 온 것일테지만, 책은 우연히 길에서 주워 온 것이다. 그런데 정작 토끼 형제의 생명을 구한 것은 수고로 얻은 당근이 아니라, 거저 손에 넣게 된 책이었다.
우리는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과 장엄함을 대면하게 되면 저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오고 숭고를 경험하게 되지만 일상에서 마주치는 작은 나무와 꽃, 새소리, 공기와 바람, 햇빛이 주는 유익과 기쁨은 자주 잊곤 한다. 우리 주변의 소소한 생명들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수고하여 얻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도 감사하지도 못하고 살아 간다. 그러나 우리는 그림책을 통해 감사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레오 리오니의 그림책 『프레드릭』(1999)의 주인공 프레드릭은 작은 생쥐이다. 그의 가족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여름날에 프레드릭은 바위에 올라가 상상을 즐기고 있다. 추운 겨울이 되고 모은 양식도 바닥이 나자 어두운 굴속에서 살아가는 생쥐 가족은 우울해진다. 프레드릭이 겨울이 오기 전에 햇살과 색깔과 이야기를 모으고 있다고 했던 것을 기억해 낸 그들은 프레드릭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른다. 프레드릭이 햇살의 이야기를 하자 생쥐 가족은 몸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고 색깔 이야기를 하자 그들의 마음 속에 색깔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생쥐 가족이 또 다른 이야기를 부탁하자 프레드릭은 사계절을 찬미하는 시를 들려준다. “... 계절이 넷이니 얼마나 좋아.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딱 사계절.” 그의 시에 감동한 생쥐 가족은“너는 정말 시인이야”라며 칭찬하고 프레드릭은 “나도 알아”라고 만족해한다.
메리 린 레이가 글을 쓰고 바바라 쿠니가 그림을 그린 『바구니달』(2000)은 19세기 미국 북동부 의 깊은 산악지대에서 살던, 지금은 사라진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이다. 3인칭 화법의 글과 녹색과 갈색 주조의 객관적인 시점에서 그려진 그림은 목가적인 산골 동네의 분위기를 잔잔하게 전달한다. 채소나 곡식을 심지 못하는 그 고산지대에서 공동체 사람들의 생계를 이어주는 것은 바구니 제작용 나무들이었다. 주인공 소년은 아버지와 아저씨들이 바구니를 짜면서 나누는,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자신도 그것을 들을수 있을지 궁금해 하지만 조 아저씨는 들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만 들린다고 대답하였다. 아홉 살 생일이 지나 처음으로 아버지를 따라 바구니를 팔러 도시에 나간 날, 소년은 그곳 아이들이 자신을 촌뜨기라고 놀리는 바람에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바구니를 쌓아 놓은 창고로 들어가 바구니들을 발로 차 쓰러뜨리며 좌절감과 분노를 표출한다. 그런데 이 때 창고로 들어온 조아저씨가 들려주는, 바람과 나무와 바구니에 대한 신비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바람의 말을 알아듣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된다. 바구니를 짜면서도 바람의 말을 기다리던 소년은 한밤중에 바람을 따라 바람이 바구니를 짜는 곳으로 가게 된다. 결국 그는 바람이 자신의 이름을 부른 이유가 나무들이 키우는 것이 그가 짤 바구니라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임을 깨닫게 된다. 나무와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함께 살았던 산골 사람들의 삶은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하는 현대인의 굳은 마음을 두드린다.
리즈 갈튼 스캔런이 글을 쓰고 말라 프레이지가 그림을 그린 『온 세상을 노래해』(All the World)(2010)라는 작품은 원어 제목처럼 ‘온 세상’을 노래하는 시 그림책으로서 2010년 칼데콧 영예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책의 제목에 걸맞게 비교적 큰 판형으로 제작된 가로·세로 28.5 cm의 정사각형 책에서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펼쳐지는, 평화롭고 따뜻하며 사랑 넘치는 바닷가 마을 사람들의 삶을 보게 된다. 시의 리듬에 맞게 그림에서도 그들의 삶과 바닷가 마을의 전체적인 조망이 각각 근경과 원경으로 교차되어 리듬감 있게 그려진다. 마지막 네 화면에 걸쳐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당신이 듣고 냄새 맡고 보는 모든 것, 그 모든 것이 세상이지요. 모든 것이 너와 나 우리랍니다. 희망과 평화와 사랑과 신뢰, 모든 세상은 우리 모두에요.” 바닷가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구체적이고 감각적으로 그려내었던 시인은 이제 “희망과 평화와 사랑과 신뢰”라는, 추상적인 단어로 인류의 이상을 피력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는“모든 세상은 우리 모두에요.”(All the world is all of us)라는 시구와 함께 잠옷을 입은 어린 소녀가 그려져 있다. 여기에서 독자의 시선은 소녀가 응시하고 있는, 두 손 안의 어떤 사물로 향하게 된다. 주의 깊은 독자라면 그것이 책의 전반부에서 소녀가 해변의 모래밭에서 주워 온 소라 껍데기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림책의 페리텍스트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독자라면 그것이 앞 표제지에도 그려져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낼 것이다. 표제지로부터 시작하여 본문과 뒷 표지에까지 그려진 소라 껍데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작가는 우리의 삶의 터전과 인류 공동체와 우주의 모든 사물들이 그 작은 소라 껍데기처럼 선물로 주어진 것임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결론
좋은 그림책은 좋은 예술이 하는 일을 한다. 예술이란 현실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 너머의 세상을 그리는 것이다. 고흐의 작품이 위대한 까닭은 그가 처한 비참한 환경과 육체적 조건 가운데에서도 우리 삶 너머의 아름다움을 그렸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아픈 근대사와 삶의 궤적을 같이한 이중섭은 가족과의 생이별을 초래한 전쟁의 비참함과 개인적인 궁핍을 그리는 대신, 작은 담배 은박지에 가족들이 모여 마음껏 놀이를 즐기는 이상향을 그렸다.
작가의 창작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작품에는 작가가 견지하고 있는 인간의 존재론적 관점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필자는 애니메이션 작가와 감독인 미야자끼 하야오가 어린이 문학을 “(어린이들에게) 태어나기를 잘했다라고 응원하는 것이다”[iii] 라고 한 것보다 더 멋있고 통찰력있는 어린이 문학의 정의를 아직 찾지 못했다. 그림책은 어린이 문학 중에서도 이 세상에 첫 발을 내디딘 어린 생명들을 위해 창작되는 도서이다. 그들에게는 “너희들 이 곳에 오길 정말 잘했어. 이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 신기한 것, 재미있는 것들이 정말 많단다. 같이 이 세상을 탐험해 보자꾸나.”라는 환대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런 이야기들은 한편으로는 어린이들에게 기쁨과 격려를, 성인들에게는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용기와 위로를 선사한다.
[i] 이상희, 최현미, 한미화, 강지은(2016). 이토록 어여쁜 그림책.
[ii] Riken, L. (1991). 기독교와 문학. 원제. Windows to the World. pp. 146-147
[iii] 미야자끼 하야오(2013). 책으로 가는 길. 서문.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후 Eastern Michigan University 에서 석사,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어린이문학교육학회 회장 및 한국 기독교 유아교 육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아동 청소년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대학 부설 생활과 학 연구소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기독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이해>(공저), <그림책과 예술교육>(공저>, <그림책으로 보는 아동과 우리사회>(공저), <100권의 그림책>(공저) 등 그림책 관련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