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의 세계관
어린이에게 좋은 그림책은 무엇인가? 세계관적 접근
16
14
서정아2025-12-08 23:39
그림책이 이젠 더 이상 아이들의 책이 아니라 모든 연령대를 위한 책으로 창작되고 있고, 창작자들 또한 다양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각자의 말을 쏟아내고 있는 지금의 모습을 봅니다. 오히려 인류가 오랫동안 다듬어 오고 지켜온 가치들을 부정하는 내용일 수록 더 격려받고 있는 모습이 혼란스럽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무질서와 혼돈과 방황과 허무가 고스란히 담긴 어른들의 그림책이 따로 구분되지 않고 어린이들이 읽는 서가에 꽂혀지고 있다는 것이죠. 어른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어린이들이 읽고 있는 책이 어떤 책인지 관심을 가지고 살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무질서와 혼돈과 방황과 허무가 고스란히 담긴 어른들의 그림책이 따로 구분되지 않고 어린이들이 읽는 서가에 꽂혀지고 있다는 것이죠. 어른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어린이들이 읽고 있는 책이 어떤 책인지 관심을 가지고 살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현경2025-12-09 06:39
너무 공감하는 바입니다. 어른들이 책임감을 갖고 어린이책을 직접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음식을 주려는 것처럼, 마음의 양식이라 불리는 책도 아이가 먹어도 되는 것인지 살펴야 합니다.
김현경2025-12-09 07:07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이 처한 자리가 어디이건 간에 그림책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영적 전쟁을 볼 수 있는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는 부분을 되새기게 됩니다. 예전에 중학교였는지 고등학교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중도'의 바른 뜻을 설명해주셨던 선생님이 종종 떠오릅니다. 중도는 A와 B 사이에 어중간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중도라는 말은 우리가 걸어가는 길의 중앙으로 올바르게 걸어간다는 뜻이라고 배웠습니다. 어쩌면 성경에서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그런 뜻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진리는 하나이고, 그 진리의 길을 걸어갈 때, 우리가 때로는 느슨해져서 길 밖으로 즉, 즉 길의 왼쪽으로 혹은 오른쪽으로 치우쳐서 걸으면 길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중도(길 가운데)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림책의 세계에서 저 역시 신앙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바르게 서서, 진리의 길 중앙으로 바르게 걸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김주경2026-07-22 12:40
그림책을 분별하는 작업은 마치 엄마가 마트에서 식품의 성분표를 하나씩 확인하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느껴집니다. 식품회사의 화려한 마케팅, 입에 맞는 것만 찾으려는 우리의 식성을 뒤로하고, 성분을 꼼꼼히 살펴 장을 보고 그것을 아이의 발달 수준에 맞게 잘 조리하여 먹이는 이 모든 과정들은 분명 번거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 우리의 몸을 형성하므로 이런 과정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스며드는 그림책을 분별하는 일 역시 그에 못지않은 수고와 정성이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그림책을 고를 때 그림이 주는 느낌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밝고 따뜻하고 산뜻한 분위기, 감정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어주는 그림책을 선호했습니다. 상을 받거나 다른 사람들의 평가가 좋은 책을 우선해서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책을 읽고 나면 "좋다, 별로다, 뭔가 이상하다"라는 두루뭉술한 느낌만 남았을 뿐, 이 그림책이 왜 좋고, 이상한지 구체적으로 언어화하는 것이 막연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앞으로는 그림의 분위기만 살피는 것이 아니라 글, 페리텍스트까지 촘촘히 관찰하는 훈련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림책이라는 매체에 대한 이해와 문학적 지식, 그리고 성경 지식과 교리,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지식을 갖춰 나가야겠습니다. 아직 작품 속 가치와 세계관을 스스로 분별하기 어려운 어린이에게는 좋은 책을 골라 주는 문지기의 역할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명절에 가족들이 한데 모여 다같이 음식을 준비하고 나누어 먹는 복작복작한 시간을 좋아했습니다. 명절에 가족들이 모여 음식을 준비하는 것처럼, 때로는 어른들이 다함께 모여 토론하며 공부하는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모습을 통해서 아이들은 책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의 깊게 보고 분별하는 태도를 자연스럽게 익혀갈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그림책을 고를 때 그림이 주는 느낌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밝고 따뜻하고 산뜻한 분위기, 감정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어주는 그림책을 선호했습니다. 상을 받거나 다른 사람들의 평가가 좋은 책을 우선해서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책을 읽고 나면 "좋다, 별로다, 뭔가 이상하다"라는 두루뭉술한 느낌만 남았을 뿐, 이 그림책이 왜 좋고, 이상한지 구체적으로 언어화하는 것이 막연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앞으로는 그림의 분위기만 살피는 것이 아니라 글, 페리텍스트까지 촘촘히 관찰하는 훈련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림책이라는 매체에 대한 이해와 문학적 지식, 그리고 성경 지식과 교리,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지식을 갖춰 나가야겠습니다. 아직 작품 속 가치와 세계관을 스스로 분별하기 어려운 어린이에게는 좋은 책을 골라 주는 문지기의 역할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명절에 가족들이 한데 모여 다같이 음식을 준비하고 나누어 먹는 복작복작한 시간을 좋아했습니다. 명절에 가족들이 모여 음식을 준비하는 것처럼, 때로는 어른들이 다함께 모여 토론하며 공부하는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모습을 통해서 아이들은 책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의 깊게 보고 분별하는 태도를 자연스럽게 익혀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은혜2026-07-23 00:02
정말 여러 분야의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교육계에 종사하거나 부모가 되지 않는 한 그림책을 접하거나 관심을 갖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조차도 그러했으니까요. 그저 그림책은 어린 아이들의 책으로 여기고 펼쳐볼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부모가 되고 하나 둘 씩 책을 접하다보니 이제서야 그림책에 정말 많은 것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SNS에서 유명한 육아 인플루언서가 소개하는 그림책이 그저 좋다고 맹신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이들 읽는다고 추천 받은 책들을 구매하거나 중고거래한 후 살펴보다보면, 막상 마음이 꺼림칙하던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성경동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책을 좋아라하지 않았던 제 어린시절을 생각하며, 우리 아이는 책을 많이 접하게 해야지~라며 일부러 책과 친해지는 시간을 갖게 하거나 일부러 어린이 도서관에 가고는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책을 쉬이 집에 들이기도, 도서관에 데려가기도 꺼려지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너무 다양한 사상과 생각들이 모여.. 좋고 나쁨을 느끼는 기준이 모두 다르고, 또 기독교인이 아니면 그 세계관이 일치하긴 어렵겠지만(심지어 같은 기독교인이어도 다르기도 하지요.) 적어도, 아이들의 순수한 영혼을 지켜줄 수 있는 책인지 아닌지는 분별할 수 있는 어른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트렌드에 민감하여 그것을 따라가기보다 오래도록 남길 수 있는 선한 영향력을 가진 매체인지(책 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에 있어서) 아닌지 많은 고민이 필요해보입니다. 책을 통해 세상을 배울 수 있다는 말도 있는데, 우리 아이들이 책을 통해 어떤 세상을 배우고 있는지 .. 안일하게 두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특히 기관과 선생님들께 맡기지 않고, 부모가 더욱 크게 책임을 가져야함을 느낍니다.
더불어, 기독교 세계관이 지혜롭게 내포된 그림책들이 많아지길 소망합니다. 요즘 '합심'이라는 단어에 묵상을 하고 있는데요, 더 많은 기독교인들이 합심하여, 혼란한 이 시대, 이 나라와 열방을 위하여 기도하고, 예수님께서 너무나 사랑해주신 어린 아이들이자 다음을 이어갈 미래 세대들의 문화를 지켜줄 수 있도록 합심하여 기도하길 소망합니다. 마치 에스라와 모든 백성들이 합심하여 나라를 위해 금식 기도했듯이..
너무 다양한 사상과 생각들이 모여.. 좋고 나쁨을 느끼는 기준이 모두 다르고, 또 기독교인이 아니면 그 세계관이 일치하긴 어렵겠지만(심지어 같은 기독교인이어도 다르기도 하지요.) 적어도, 아이들의 순수한 영혼을 지켜줄 수 있는 책인지 아닌지는 분별할 수 있는 어른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트렌드에 민감하여 그것을 따라가기보다 오래도록 남길 수 있는 선한 영향력을 가진 매체인지(책 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에 있어서) 아닌지 많은 고민이 필요해보입니다. 책을 통해 세상을 배울 수 있다는 말도 있는데, 우리 아이들이 책을 통해 어떤 세상을 배우고 있는지 .. 안일하게 두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특히 기관과 선생님들께 맡기지 않고, 부모가 더욱 크게 책임을 가져야함을 느낍니다.
더불어, 기독교 세계관이 지혜롭게 내포된 그림책들이 많아지길 소망합니다. 요즘 '합심'이라는 단어에 묵상을 하고 있는데요, 더 많은 기독교인들이 합심하여, 혼란한 이 시대, 이 나라와 열방을 위하여 기도하고, 예수님께서 너무나 사랑해주신 어린 아이들이자 다음을 이어갈 미래 세대들의 문화를 지켜줄 수 있도록 합심하여 기도하길 소망합니다. 마치 에스라와 모든 백성들이 합심하여 나라를 위해 금식 기도했듯이..
원계실2026-07-25 00:54
파울러(James W. Fowler)는 유아기의 신앙을 직관적·투사적 신앙으로 설명합니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상상과 현실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으며, 논리적 사고보다 이미지와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신앙을 형성합니다. 이러한 특징은 3~7세 유아와 초등 저학년에게 어떤 그림책을 먼저 경험하게 할 것인지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이 시기의 어린이들에게는 예술적 완성도가 높고 아름다운 그림을 담고 있으면서도 성경적 진리를 왜곡하지 않는 그림책이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아이들은 글보다 그림을 먼저 읽고, 이미지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림은 단순한 삽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세계와 복음의 진리를 마음속에 형성하는 중요한 통로가 됩니다.
우리 학교에서는 환경 주제를 프로젝트로 접근 할 때 먼저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지닌 아름다움을 사진과 그림을 통해 충분히 감상하게 한 뒤, 훼손된 자연의 모습을 제시하며 문제를 인식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먼저 경험한 아이일수록 그 아름다움이 왜 지켜져야 하는지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교육에서도 아름답고 진실한 이미지를 먼저 경험한 아이는 성경의 세계관을 보다 자연스럽게 내면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아직 글을 자유롭게 읽지 못하는 어린이에게 그림책을 처음 건네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대부분의 경우 그 출발점은 부모이며, 이후 유치원과 학교, 교회와 같은 교육기관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그림책의 첫 번째 독자는 어린이이지만, 그 책을 선택하는 첫 번째 독자는 부모와 교사인 셈입니다. 성인 독자가 먼저 그림책을 읽고 그 안에 담긴 세계관과 메시지를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추는 훈련이 중요한 이유가 그것이기 떄문입니다.
우리 학교에서는 환경 주제를 프로젝트로 접근 할 때 먼저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지닌 아름다움을 사진과 그림을 통해 충분히 감상하게 한 뒤, 훼손된 자연의 모습을 제시하며 문제를 인식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먼저 경험한 아이일수록 그 아름다움이 왜 지켜져야 하는지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교육에서도 아름답고 진실한 이미지를 먼저 경험한 아이는 성경의 세계관을 보다 자연스럽게 내면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아직 글을 자유롭게 읽지 못하는 어린이에게 그림책을 처음 건네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대부분의 경우 그 출발점은 부모이며, 이후 유치원과 학교, 교회와 같은 교육기관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그림책의 첫 번째 독자는 어린이이지만, 그 책을 선택하는 첫 번째 독자는 부모와 교사인 셈입니다. 성인 독자가 먼저 그림책을 읽고 그 안에 담긴 세계관과 메시지를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추는 훈련이 중요한 이유가 그것이기 떄문입니다.
백효진2026-07-26 13:59
아이들이 그림책을 보면서 세계를 바라보는 틀을 갖게되고, 마땅히 배워야 할 바른 태도를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세 아이를 키우며 어릴때부터 그림책을 많이 보여주고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원리로, 그림책을 통해 우리 아이들의 신앙이 흔들리게 되고 하나님을 떠나게 될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충격적이고 마음이 아픕니다. 그림책을 어른의 마음을 만져주는 치료의 도구로만 여겼던 모습을 회개합니다.
그림책에서 그림의 느낌과 신선한 발상을 보기 이전에 우리 아이들에게 이 그림책이 어떻게 보여질 것인가, 아이들의 삶을 어떻게 가꾸어갈 그림책인가를 먼저 분석하는 지혜를 훈련하는 것이 너무나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그림책 관계자들이 그림책의 세계관을 분석하는 이 수업을 듣기를 추천합니다.
그림책에서 그림의 느낌과 신선한 발상을 보기 이전에 우리 아이들에게 이 그림책이 어떻게 보여질 것인가, 아이들의 삶을 어떻게 가꾸어갈 그림책인가를 먼저 분석하는 지혜를 훈련하는 것이 너무나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그림책 관계자들이 그림책의 세계관을 분석하는 이 수업을 듣기를 추천합니다.
최은아2026-07-26 22:31
그림책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적 접근은 그림책 텍스트에 투영되어 있는 세계관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 대안을 제공하는 데까지 나아간다고 하신 말씀에 공감합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조 목적을 거스르고 교묘히 가려 놓은 타락인 인간의 탐욕과 거짓을 잘 분별하여 구속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삶으로 연결할 수 있는 힘은 말씀이 주시는 힘인 듯 합니다. 가벼움을 덜어내고 심사숙고하는 진지함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말씀을 깊이 알고 대안을 마련하는 많은 분들이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곽서연2026-07-26 23:36
< 그림책의 독자는 '0세부터 100세까지'라는 ... 정작 어린이 독자에게 적합한 작품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노력이 필요해진 것 같다.>
라는 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앞서 읽은 '고민 해결사 펭귄 선생님' 에서도 그림과 글이 일치하지 않는 점(아이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점), 어른 수준의 판단을 요하는
상황 전개는 오히려 아이들에게 의미 없는 책으로 보여질 것 같습니다.
해마다 쏟아져 나오는 그림책은 넘쳐 나는데 적합한 작품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일이 과제인것 같습니다.
별도의 노력이 필요해진 것 같다.>
라는 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앞서 읽은 '고민 해결사 펭귄 선생님' 에서도 그림과 글이 일치하지 않는 점(아이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점), 어른 수준의 판단을 요하는
상황 전개는 오히려 아이들에게 의미 없는 책으로 보여질 것 같습니다.
해마다 쏟아져 나오는 그림책은 넘쳐 나는데 적합한 작품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일이 과제인것 같습니다.
이아름2026-07-27 00:28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수업을 할 때,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와 관련되어 어떻게 하나님의 일하심을 아이들에게 느끼게 할 수 있을까?
어떤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연구하며 수업준비를 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성경을 더 많이 알고 싶다. 더 배우고 싶다. 그리고 꼭 더 배워야만 한다라는 생각이 깊게 들었습니다.
정말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시중에 있는 그림책을 기독교 세계관으로 바라 볼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성경을 더 알아야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이수형 교수님께 그림읽기 수업을 들을 때도 여러 세계관을 알아야 그것이 보인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정말 배움에는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더 많이 배워서 분별할 수 있는 힘을 길렀으면 좋겠고, 지금 이렇게 기독교세계관으로 바라보는 그림책 연구가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중요성과 필요성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연구하며 수업준비를 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성경을 더 많이 알고 싶다. 더 배우고 싶다. 그리고 꼭 더 배워야만 한다라는 생각이 깊게 들었습니다.
정말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시중에 있는 그림책을 기독교 세계관으로 바라 볼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성경을 더 알아야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이수형 교수님께 그림읽기 수업을 들을 때도 여러 세계관을 알아야 그것이 보인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정말 배움에는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더 많이 배워서 분별할 수 있는 힘을 길렀으면 좋겠고, 지금 이렇게 기독교세계관으로 바라보는 그림책 연구가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중요성과 필요성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강다혜2026-07-27 17:17
제가 온라인으로 수업해서 전문학사 학위를 주는 평생교육원에서 오랫동안 과제 채점을 하는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데요, 아동문학 수업에서 아동문학의 가치를 정리하고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을 주로 기말과제로 내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일반 수강생들의 레포트를 읽어보면, 대부분 '즐거움을 주는 것', '아동의 심리를 잘 이해해주는 것'과 같은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저도 예전에는 아동들이 그림책을 읽으며 즐거움을 얻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그림책이 어른들도 읽는 책이 되었을 때, 그림책의 독자인 어른도 아이들이 즐겁다고 생각할 부분을 즐겁게 여기길 것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요즘 시대의 '즐거운 것'은 제가 생각한 '즐거운 것'과 굉장히 달라졌습니다. 단순히 유머러스한 것, 우스꽝스러운 것을 넘어서서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으로 좀 어긋나더라도 아동들이 '재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 좋다고 느끼는 풍조가 생겨났고, 이는 곧 쾌락주의를 따라 흘러간다고 느꼈습니다. 실제로 저희 큰 아이가 초등학교 때 학교 교장선생님께서 "자율적이고 독립적이며 주체적인 아동"을 길러내는 것이 학교의 목표라고 생각하셨는데, 그래서 학생 자치동아리를 열심히 운영하셨습니다. 그런데 말이 자치 동아리이지, 선생님들의 방관속에 아이들이 마음껏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었죠.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게 되면 곧 타락하고 만다는 것을 저는 그때 확실히 느꼈습니다. 아이들은 정말 쾌락만 쫓아 동아리를 운영했고, 음식 동아리에서는 월남쌈이라고 짜파게티를 월남페이퍼에 싸 먹는 활동을 하였죠. 그런데 이런 것에 대해서 교사들이 전혀 제지를 안 하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그림책의 세계관 분석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책의 미적 분석이나 기호학적 분석은 결국 포스트모던의 쾌락주의나 허무주의를 따라가게 되며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외면하게 됩니다. 세계관 분석은 이와 다르게, 우리가 사는 세계가 어떠하며 그곳에서 우리는 무엇에 의미를 두고 살아가야 하는가를 고민하기 때문에, 쾌락만 쫓는 이 시대의 행태를 반성하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림책의 세계관 분석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책의 미적 분석이나 기호학적 분석은 결국 포스트모던의 쾌락주의나 허무주의를 따라가게 되며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외면하게 됩니다. 세계관 분석은 이와 다르게, 우리가 사는 세계가 어떠하며 그곳에서 우리는 무엇에 의미를 두고 살아가야 하는가를 고민하기 때문에, 쾌락만 쫓는 이 시대의 행태를 반성하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지민규2026-07-28 00:28
포스트 모더니즘, 진리보다 상대주의, 기존의 진리에 대한 의심과 회의가 주류인 시대에
어린이에게 좋은 그림책이란 무엇인가 라는 가치론적 측면의 질문 대신
기호학적, 심리학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는 설명이 다가왔습니다.
현은자 교수님께서 이전 수업에서도 가르쳐주셨던 월터스토프의 이론-
예술작품은 감상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세계관이 투영되고
그 영향으로 인해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행위(action)를 이끌어낸다.
는 것도 정말 다가옵니다.
그림책 세계관 평론의 예들을 대략적으로 정리해주신 것을 보며
그간 배웠던 그림책들도 다시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상가 그람시가 말한 '진지전'이 생각납니다.
좌경화된 출판계와 다양한 비성경적인 세계관을 품고 있는 그림책들.
평론 말미에 적잖은 예술가들이 그림책 창작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가
그림책의 기호학적 속성이 그들에게 창작의 영감을 제공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말씀이 정말 공감이 많이 됐습니다.
저도 그들과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생산해내는지도 모르고 이 시대 사조에 편승해서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도 모르고(알고 하는 앤서니 브라운 같은 작가도 있을 것이고) 그냥 비성경적인 세계관 범벅된 창작물을 만들어내서 아이들에게 먹이고 그림책 영역을 자신들의 유희 놀이터마냥 활용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비판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 대안을 제공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도 잘 마음에 새기고 기억하겠습니다.
어린이에게 좋은 그림책이란 무엇인가 라는 가치론적 측면의 질문 대신
기호학적, 심리학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는 설명이 다가왔습니다.
현은자 교수님께서 이전 수업에서도 가르쳐주셨던 월터스토프의 이론-
예술작품은 감상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세계관이 투영되고
그 영향으로 인해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행위(action)를 이끌어낸다.
는 것도 정말 다가옵니다.
그림책 세계관 평론의 예들을 대략적으로 정리해주신 것을 보며
그간 배웠던 그림책들도 다시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상가 그람시가 말한 '진지전'이 생각납니다.
좌경화된 출판계와 다양한 비성경적인 세계관을 품고 있는 그림책들.
평론 말미에 적잖은 예술가들이 그림책 창작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가
그림책의 기호학적 속성이 그들에게 창작의 영감을 제공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말씀이 정말 공감이 많이 됐습니다.
저도 그들과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생산해내는지도 모르고 이 시대 사조에 편승해서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도 모르고(알고 하는 앤서니 브라운 같은 작가도 있을 것이고) 그냥 비성경적인 세계관 범벅된 창작물을 만들어내서 아이들에게 먹이고 그림책 영역을 자신들의 유희 놀이터마냥 활용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비판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 대안을 제공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도 잘 마음에 새기고 기억하겠습니다.
김하순2026-07-28 09:02
이 글을 읽으며 오늘날 어린이 그림책을 둘러싼 문화적 지형의 변화와 그 속에서 교육자와 부모가 가져야 할 책임감이 얼마나 엄중한지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다음 세 가지 지점에서 큰 공감과 도전이 되었습니다.
첫째, '어린이 그림책'의 주 독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우려입니다.
오늘날 출판 시장에는 '어린이 도서'로 분류되어 있으면서도 정작 성인의 시각과 감성에 맞춰 제작된 작품들이 무분별하게 제공되고 있습니다. 발달 심리와 정신 세계가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의 어린이들에게 이러한 책들이 검증 없이 노출되는 것은 단순한 우려를 넘어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격변하는 세상 속에서 어린이에게 읽혀 줄 만한 문학과 그렇지 않은 것을 올바르게 구분해 내는 일은, 특히 기독교 부모와 교육자들에게 미룰 수 없는 시급한 책무임을 다시금 가슴에 새기게 됩니다.
둘째, 그림책 활용의 '유용성'에 치우쳐 텍스트의 '심층 의미'를 놓치는 위험성입니다.
과거에는 유아교육 전문가들이 아동의 발달 단계에 맞춰 검증된 고전 그림책을 주로 활용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성인 독자층이 확대되고 상담, 코칭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림책이 쓰이면서 성급하게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How)'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특히 유명하고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일수록 은유와 함축, 그리고 강력한 세계관이 숨어 있습니다. 제대로 된 해석과 심층 읽기가 선행되지 않으면 문화 속에 잠식된 메시지를 오독하거나 아이들에게 잘못 전달할 수 있으므로, 텍스트 뒤에 숨은 세계관을 신중하게 분별하는 시도가 필요합니다.
셋째, 가치관의 부재와 공감 유도 방식에만 치중하는 현실에 대한 경각심입니다.
기존의 진리와 가치관에 대한 회의가 주류를 이루면서, 정작 "어린이에게 좋은 그림책이란 무엇인가?"라는 가치론적 질문은 사라지고 "어떻게 독자의 공감을 끌어낼 것인가"라는 기호학적·기술적 측면에만 치우쳐 있음을 보았습니다. 어른들의 눈길이나 감정을 사로잡는 공감 기술에 속지 않고, 아이들의 영혼에 참된 가치를 심어주는 진짜 '좋은 그림책'을 분별해 내는 시각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오늘날의 혼란스러운 문화적 소용돌이 속에서 아이들의 영적·정신적 울타리가 되어주기 위해, 저부터 텍스트의 심층을 읽어내는 안목을 다지고 분별의 사명을 다해야겠습니다. 귀한 통찰을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째, '어린이 그림책'의 주 독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우려입니다.
오늘날 출판 시장에는 '어린이 도서'로 분류되어 있으면서도 정작 성인의 시각과 감성에 맞춰 제작된 작품들이 무분별하게 제공되고 있습니다. 발달 심리와 정신 세계가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의 어린이들에게 이러한 책들이 검증 없이 노출되는 것은 단순한 우려를 넘어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격변하는 세상 속에서 어린이에게 읽혀 줄 만한 문학과 그렇지 않은 것을 올바르게 구분해 내는 일은, 특히 기독교 부모와 교육자들에게 미룰 수 없는 시급한 책무임을 다시금 가슴에 새기게 됩니다.
둘째, 그림책 활용의 '유용성'에 치우쳐 텍스트의 '심층 의미'를 놓치는 위험성입니다.
과거에는 유아교육 전문가들이 아동의 발달 단계에 맞춰 검증된 고전 그림책을 주로 활용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성인 독자층이 확대되고 상담, 코칭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림책이 쓰이면서 성급하게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How)'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특히 유명하고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일수록 은유와 함축, 그리고 강력한 세계관이 숨어 있습니다. 제대로 된 해석과 심층 읽기가 선행되지 않으면 문화 속에 잠식된 메시지를 오독하거나 아이들에게 잘못 전달할 수 있으므로, 텍스트 뒤에 숨은 세계관을 신중하게 분별하는 시도가 필요합니다.
셋째, 가치관의 부재와 공감 유도 방식에만 치중하는 현실에 대한 경각심입니다.
기존의 진리와 가치관에 대한 회의가 주류를 이루면서, 정작 "어린이에게 좋은 그림책이란 무엇인가?"라는 가치론적 질문은 사라지고 "어떻게 독자의 공감을 끌어낼 것인가"라는 기호학적·기술적 측면에만 치우쳐 있음을 보았습니다. 어른들의 눈길이나 감정을 사로잡는 공감 기술에 속지 않고, 아이들의 영혼에 참된 가치를 심어주는 진짜 '좋은 그림책'을 분별해 내는 시각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오늘날의 혼란스러운 문화적 소용돌이 속에서 아이들의 영적·정신적 울타리가 되어주기 위해, 저부터 텍스트의 심층을 읽어내는 안목을 다지고 분별의 사명을 다해야겠습니다. 귀한 통찰을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린이에게 좋은 그림책은 무엇인가?:
세계관적 접근 [1]
1. 들어가며
30년전인 1995년 ‘한국어린이문학교육연구회’(한국어린이문학교육학회’의 전신)의 설립 동기는 어린이 문학 교육을 연구하기 위함이었다. 학회 명칭인, 어린이+문학+교육에서도 나타나듯이, 학회 창립자들은 주로 유아교육, 아동학 전공자였으므로 ‘유아’ 보다는 좀 더 연령의 폭이 넓은 ‘어린이’(출생-초등 저학년)을 염두에 두었으며, 연구 대상으로는 주로 어린 연령이 접하는 그림책 형태의 도서를 다루게 되었고, ’교육‘이라는 단어는 가치 지향적인 함의를 지니는 만큼 바람직한 방향으로 어린이를 이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 학회는 순수하게 어린이문학만 연구하는 다른 학회들과는 설립 동기가 달랐다고 볼 수 있다.
이 자리에서 새삼스럽게 학회 명칭을 거론하는 이유는 다른 유·아동교육 관련 학회와의 차별성을 부각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과거 30년 동안 그리고 그 이전에도 유·아동과 관련된 학회가 수없이 창립되었으며 우리 학회원들도 아마 이런 학회에 두 개 이상 속해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한 와중에도 우리 학회는 ‘어린이문학교육’이라는 고유성을 꽤 잘 유지해 왔을 뿐 아니라, 연구 활동의 외연(外宴) 확장에도 적극적이었던 것 같다. 구성원 대부분이 유아교육 전공자이지만 문학과 조형예술의 조합인 그림책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예술교육과 미디어교육, 그림책 창작, 출판까지 연구 영역을 넓히게 되었고, 교육 현장도 그림책 교육이 이루어지는 다양한 장소(유아교육, 초등교육기관, 사설학원, 대안학교, 방과후 프로그램, 지역사회 교육프로그램 등)까지 이어졌다. 더 나아가 학회 회원이 KBBY [IBBY(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1]의 한국지부]의 임원진으로 활동하면서 효율적으로 학회와 KBBY, 두 기관의 협업이 이루어지고 국제적 교류도 활발해 졌다. 학회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학회지도 창간 이래 거의 한 회도 거르거나 지연되지 않고 발간일에 맞추어 출판되고 있는데, 이는 다른 학회의 사정과 비교해 볼 때 대단한 성과라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이 학회의 일원이라는 것이 항상 자랑스럽다.
2. 본 강연의 목적
지금 전 세계는 정치, 문화, 과학기술 측면에서 대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학회도 시대 변화에 발맞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던 것 같다. 작년 학회의 주제가 AI(artificial intelligence)였던 것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어떻게 변하던[2] 어린이에게 읽혀줄 만한 문학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일은 교육자의 책무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원론적인 문제를 다루어보기 위해 우선 학회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있는 이론적, 실천적 이슈를 몇 가지 짚어 보고. 강연의 주제인, 세계관적으로 그림책을 보는 것에 관한 논의를 통해 조금이나마 어린이문학교육에 이론적 기여를 하고자 한다.
다른 연구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동안 필자를 비롯한 대학의 연구자들이 수행한 그림책 이론 연구는 대부분 영미권의 연구물들에 의존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해외에서도 그림책이라는 텍스트 자체가 학술 연구 대상으로 여겨진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며 따라서 국내의 대학원에서도 그 역사가 20여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들은 대부분 우리 학회의 구성원이었고 마리아 니콜라예바와 페리 노들만[2]과 같은 서구의 연구서와 논문을 접하면서 학술적인 연구를 진행해 왔다. 서양학자들의 연구서가 그림책 연구의 불모지라고 할 수 있는 국내 연구에 크게 공헌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그들의 이론과 저작물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천적 측면에서, 그림책 문화 지형도에도 큰 변화가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그림책의 교육적 측면보다 활용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점점 더 두드러지는 것 같다. 물론 학회원 대부분이 유아동교육 전문가들이다 보니 처음부터 어린이의 발달심리와 학습과 연결시키려는 필요성이 우선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초기의 번역 그림책들은 대부분 그림책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교육성 높은 작품들이었으므로 유아 교사들은 이 작품들을 교육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방법과 교육적 효과를 위해 읽어주는 방법 등에 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활용의 측면에서 그림책을 향유하는 사람들은 유아교육자나 초등 학교교사들처럼 교육현장에 있는 전문가들만이 아니다. 점점 더 많은 성인 독자들이 상담, 치료, 코칭, 숲해설, 원예, 요리와 같은 삶의 다양한 분야에서도 그림책을 활용하고 있다. 그림책의 글과 그림의 기호학적 결합이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강력한 도구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림책의 실천적 적용을 목적으로 그림책에 접근할 때의 문제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성급하게 유용성을 추구하다 보면 텍스트의 의미 ‘해석’을 소홀히 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지도가 높고 예술성이 높다고 인정받는 텍스트일수록 은유적, 함축적으로 메시지와 세계관을 담고 있으므로 제대로 읽지 않으면 오독(誤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림책 이론가들은 우리의 그림책 문화를 주도하고 있는 실천가들에게 적용이나 활용 이전에 정확한 해석이 선행되어야 함을 주지 시킬 필요가 있다.
세 번째는 그림책의 독자에 대한 인식과 관련된 것이다. 그림책의 ‘이중독자’ 혹은 그림책의 독자는 ‘0세부터 100세’까지라는, 그림책 독자 연령의 외연 확장은 그림책 창작과 출판, 소비를 활성화하는 데에 기여하고 있지만, 그 때문에 정작 어린이 독자에게 적합한 작품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노력이 필요해 진 것 같다. 도서관 사서와 부모들만 그러한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이 이슈는 정부나 민간 단체의 그림책 선정 작업 가운데에서 공식적으로 불거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정부에서 주도하는 ‘세종도서’ 선정 작업에서 ‘그림책’으로 분류되어 심사대상 리스트에 포함되는 도서 중에 어린이 독자보다는 성인의 감성에 맞는 것, 성인의 시각으로 쓰여진 작품들이 다수 눈에 띈다. 일반인이 운영하는 홈페이지의 추천도서 선정 작업에서도 그러한 문제가 제기되곤 한다. 예를 들어, ‘그림책 박물관’ 홈페이지의 추천 도서 작업을 위해 매달 심사하는 70-80종의 신간들 중에서 정작 ‘좋은 책’리스트에 올릴만한 작품은 10여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문학적, 예술적 측면에서 수준이 낮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포독자의 불확실성도[3] 주요한 근거가 되곤 한다.
사실 이 세 번째 이슈와 앞의 두 개의 이슈는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60년대 이후 서구의 대학은 포스트모더니즘에 경도되어 왔다. 미국과 유럽에서 학위를 취득한 교수들은 그들이 배운 것을 국내에 전수하게 된다. 마치 조선시대에 중국에서 받아들인 유학(儒學) 중에서도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었던 것처럼...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인본주의를 더욱 극단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사조이므로 그들에게 진리가 무엇인가는 관심사가 아니다. 절대 진리가 사라진 곳에는 상대주의만이 남고 진리 자체의 추구보다는 기존에 진리라고 여겨져 왔던 것에 대한 의심과 회의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이에 따라 서구의 그림책 이론가들은 “어린이에게 좋은 그림책이란 무엇인가”라는 가치론적 측면의 질문 대신, 그림책의 글과 그림이 어떻게 상호 결합하여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독자의 공감을 끌어내는지와 같은 기호학적, 심리학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학원 과정에서 종종 교재로 사용되는 M. 니콜라예바의 [How Picturebooks Work](2001)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
3. 그림책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적 조망
필자는 현재 ‘그림책베이직’이라는 웹진에 격월로 쓰고 있는 평론에서 소위 ‘그림책에 대한 세계관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이 연구 주제에 집중하는 첫 번째 이유는 성경을 절대 진리로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 때문이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성경 신자(Bible believer)라면 삶의 모든 영역을 성경의 기초 위에 두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세계관(worldview)을 형성한다.
세계관이란 단어 그대로 인간과 세상(world)을 보는 총체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이나 사회가 어떤 세계관을 견지하고 있는가를 알아볼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그 개인, 혹은 사회가 다음 서너 가지 질문에 대해 어떤 답을 하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이 세상은 어떤 곳인가? 이 세상에 문제가 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나(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나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물론 이러한 존재론적이며 윤리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은 한 두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이러한 존재론적 질문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살고 있으므로 그 답들은 표면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상충될 수도 있다. 그래서 S. 윌킨스(Steve Wilkens)와 M. 샌포드(Mark Sanford)는 그것을 ‘은밀한 세계관’(hidden worldview)이라고 칭했던 것이다.[4] 따라서 그 세계관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개인 혹은 사회의 사유 방식과 행위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체계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믿고,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면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당연히 성경에 기초한 것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창조(creation: 6일간의 '매우 좋았던' 창조 역사), 타락(fall: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창조세계의 왜곡), 구속(redemption: 예수님의 구속사역으로 인한 회복) 그리고 성화(sanctification: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기)와 영화(glorification: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라는 기독교 세계관의 틀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 기독교 세계관 공부가 필수적인 이유이다. 그러나 성경은 일상적인 삶과 학자들의 연구 활동을 위한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해 주지는 않으므로 기독 학자들은 기독교 세계관의 틀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창세기 1장 28절)에 따라 자신의 연구(research)와 교수(teaching)의 규범적인 방향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다행히 적잖은 기독 학자들의 ‘기독교 세계관’ 연구는 철학, 인문학, 사회과학, 예술, 자연과학 등 모든 학문 영역에서 지적 체계를 제공해 왔으며 필자도 그 시혜자 중의 하나인 셈이다. 그러나 아직 어린이가 주독자라고 할 수 있는 그림책이라는 도서를 기독교 세계관적으로 조망한 연구는 해외에서도 찾기 힘들다.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그림책’이라는 도서가 대학에서 본격적인 학술 대상으로 여겨진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기 때문이다.
예술로서의 그림책에 대한 세계관적 접근은 철학자이자 신학자, 미학자, 교육이론가인 N. 월터스토프(Wolterstorf)의 이론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예술작품은 작가의 “세계 투영”(world projection)이자 “행위”(action)라고 하면서 예술 작품에는 작가의 관심사만이 아니라 그가 견지하고 있는 세계관이 투영되고 있으며 그것은 관객에게 어떤 모종의 행위를 한다고 정의한 바 있다.
그의 이론에 따라 그림책에 대한 세계관적 접근을 아주 단순하게 서술한다면, “How” 아니라 “What”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How”의 접근이란 그림책을 ‘사용’하여 무엇인가를 할 것인가에 집중하는 태도인 반면, “What”의 접근은 이 텍스트는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제나 메시지를 파악하려는 시도도 What 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지만 세계관적 관점은 이상의 것을.요구한다. 다시 말해, 텍스트의 깊은 읽기(thick description)을 통해 표면 의미가 아니라 심층 의미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이다.
세계관 연구의 방법론은 각 예술과 문화영역마다 다를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술이란 그 메시지와 세계관을 은유적, 함축적으로 표현하며 그 형식은 장르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림책 읽기의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필자는 그 동안 문학 비평가인 R. Lyken, 예술비평가인 E. J. Beith, 또한 문화해석자이자 해석학자인 K. Vanhoozer 등의 연구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어떤 방법론을 사용하든지 그림책 읽기에서 가장 우선되는 것은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텍스트의 글과 그림, 페리텍스트를 촘촘하게 읽어내는 것이다. 그 다음에 그림책이라는 매체에 대한 이해와 문학적 지식(literary knowledge), 그리고 성경 지식과 교리(doctrine),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4. 그림책의 세계관 평론의 예
필자의 작업은 2021년 12월부터 매월, 혹은 격월로 그림책 박물관에서 발행하고 있는 웹진인 <그림책 베이직> 의 ‘그림책 세계관’ 에 칼럼 형태로 소개되어 있다. 처음에는 국내 독자들에게 인지도가 높은 외국 작가의 작품들(존 버닝햄, 앤소니 브라운, 토미 웅거러, 배빗 콜, 윌리암 스타이그, 바바라 쿠니 등)이 주 평론 대상이었으나 지난 최근에는 근간(近刊) 번역 외국 작품과 한국 작가들의 작품들도 다루고 있다. 평론의 대상이 된 작품들을 세계관의 분석결과에 따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문화막시즘
19-20세기의 막시즘이 문화 영역으로 파고 들어간 것으로서 서구의 이성주의, 가족 중심의 전통과 이것을 뒷받침해온 유대-기독교의 가치관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이념이다. 남성과 여성,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전복시키고, 가정을 해체하고 전체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다.
2) 허무주의
서구문화가 유대-기독교 가치와 절대 진리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결과 나타난, 목적도 없고 가치도 없는 공허한 삶으로 인한 고통의 느낌을 보여주는 세계관이다. 허무주의의 대표 문학으로는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등을 들 수 있다. 그림책과 허무주의는 낯선 조합인 듯 싶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작품들에서도 종종 허무주의의 분위기를 발견하게 된다.
3) PC주의
PC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줄임말로서 사회적 소수자나 약자에 대한 차별이나 편견을 줄이기 위해 언어와 행동을 조심하자는 문화나 태도이다. PC주의는 LGBTQ, 여성, 이민자, 유색인종, 비기독교인, 장애인 등 소수자의 차별방지를 목적으로 하고 있지만,기초 철학은 인간애가 아니라 소위 문화막시즘이라는 좌파 이념이다. DEI(diversity:다양성 Equity:형평성, Inclusion: 포용성)정책을 앞세워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고 다수에 대한 역차별을 초래한다.
4) 유물론
19세기 챨스 다윈의 진화론은 우주와 인간의 기원을 하나님의 창조 사역 대신 자연론적인 가정을 채택함으로써 유물론적 사고의 기초를 놓았다. 이에 따라 인간의 존엄성을 지지할 수 있는 기반을 잃게 되고 인간은 동물 혹은 물질에 불과하다는 세계관이 형성되었다. 유물론적 인간관은 문화막시즘의 기초가 되고 있으므로 문화 전반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국 배빗 콜의 작품 대부분은 유물론적 사유방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이것이다.
5. 나가며
그림책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적 접근은 그림책 텍스트에 투영되어 있는 세계관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 대안을 제공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문화막시즘과 그것이 정책화된 PC주의는 수천 년간 유대-기독교에 기초를 두고 발전해 온 서구의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있다. 그들의 목적은 교회와 가정을 해체하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결국은 전체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의 전쟁은 무기를 들고 전쟁터에서 치루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초를 둔 자유민주주의와 그것을 파괴하려는 전체주의의 체제 전쟁이며, 본질적으로는 진리와 반진리가 싸우고 있는 영적 전쟁이다. 지난 9월에 암살당한 미국 청년보수주의의 리더인 챨리 커크가 감당했던 싸움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림책 문화 안에서도 반진리의 세력들은 이미 넓고 깊게 스며들고 있다. 적잖은 예술가들이 그림책 창작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각종 국내외 도서상과 금전적인 보상이라는 유인책도 있겠지만, 그림책의 기호학적 속성이 그들에게 창작의 영감을 제공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은 독자에게 해석의 자유를 허용한다면서 이 시대 사조에 편승한 작품들을 창작하고 있는 듯 싶다.
반진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진리를 용기있게 선포하는 그리스도인일 것이다. 그림책으로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이 처한 자리가 어디이건 (부모, 교사, 사서, 작가, 편집자, 출판사 등) 그림책의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영적 전쟁을 볼 수 있는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믿음의 공동체와 함께 하는 말씀 읽기와 기도, 그리고 끊임없는 배움의 자세와 행동을 동반한다. 원고를 마무리하며, 바울 선생님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권면한 이 말씀을 나누고 싶다.
“형제들아, 무엇이든지 진실한 것과 무엇이든지 정직한 것과 무엇이든지 의로운 것과 무엇이든지 순수한 것과 무엇이든지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지 좋은 평판이 있는 것과 덕이 되는 것과 칭찬이 되는 것이 있거든 이런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라.”(KJB 빌 4: 8)
[1] 2025년 한국어린이문학교육학회 창립 30주년 추계학술대회 기조강연
[2] M. Nikolayeva (2001/2011) How Picturebooks Work. 그림책을 보는 눈. 서정숙 외 역. 서울:마루벌.
[3] P. Nodelman (1996/2001) The Pleasures of Children’s Picturebooks. 어린이문학의 즐거움. 김서정 역. 서울:시공주니어.
[4] S. Wilkens & M. 샌포드. (2001/2013) [은밀한 세계관]. 안종희 역. 서울: IVP.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이며 그림책 평론 작업을 하고 있다. 미국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1989년부터 2023년까지 성대 아동청소년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2021년부터 웹진 <그림책 베이직>에 '그림책의 세계관'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그림책 세계관 연구소에서 운영하고 있는 '그림책 세계관 지도사 과정'에서 '그림책의 세계관', '기독 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세계관>, 공저로는 <그림책의 이해1, 2>, <그림책과 예술교육>, <세계 그림책의 역사>, <어린이교육전문가가 엄선한 100권의 그림책>, <신앙이 자라는 그림책 읽기>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