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의 세계관


죽음이 내 친구가 될 수 있을까 ; 『내가 함께 있을게』

2025-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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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내 친구가 될 수 있을까 :  『내가 함께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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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그림책 평론 작업에서도 AI는 매우 유용하다. 내가 [그림책 세계관 연구소]에서 진행하는 ‘그림책의 세계관’, ‘기독 신앙과 그림책 읽기’ 강의 준비에도 큰 도움을 준다. 본 칼럼에서는 챗 GPT의 사용경험을 기초로 하여 그림책 세계관 연구에서의 AI의 유용성과 한계, 그리고 제안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분석 대상 그림책 텍스트는 볼프  에를브루흐((Wolf Erlbruch 1948-)의 [내가 함께 있을게](Ente, Tod and Tulpe)(2007/2007)이다. 독일을 대표하는 그림책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라고 평가받고 있는 그가 처음 한국에 알려진 계기는 [누가 내 머리에 똥쌌어](1989/1993)라는 동물 의인화 그림책이었다. 이 작품은 두더지가 자기 머리 위에 떨어진 똥의 임자(?)를 찾으러 다닌다는, 소재 면에서도 어린 아이들이 매우 좋아할 만한 코믹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그의 다른 작품들은 삶과 죽음, 존재의 의미 같은 깊이 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까닭에 어린이만을 위한 것이 아닌, 모든 연령의 독자에게 실존적 질문을 던지는 그림책 작가로도 유명하다(챗 GPT).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내가 함께 있을게]는 창작에 10여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는 후문이 있을 정도이니 그가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 작품임을 짐작케 한다.   


『내가 함께 있을게』 글, 그림 읽기


이 그림책의 예술적 특징은 짧은 문장과 콜라주 기법의 간결한 그림, 그리고 무채색의 차분한 색조라고 할 수 있다. 의인화된 죽음은 해골 같은 머리와 어두운 체크무늬의 허름한 검은 망토를 입고 있고, 오리는 흰색으로 그려져 있어 색의 대비를 이루고 있다. 앞표지에는 목을 길게 빼고 위를 바라보고 있는 가녀린 오리가, 뒤표지에는 검붉은 튤립 한 송이가 그려져 있다. 앞표지를 넘기면 백지로 된 면지가 나타나고, 다음 화면에는 오리가 긴 목을 돌려 왼편을 바라보고 있다. 이야기는 오리와  죽음이 마주보고 서있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오리가 뒤에 이상한 느낌을 느끼며 목을 돌려 “대체 누구야? 왜 내 뒤를 슬그머니 따라다니는 거야?”라고 묻자, 죽음은 “와, 드디어 내가 있는 걸 알아챘구나. 나는 죽음이야.”라며 자기를 소개한다. 이후부터 오리와 죽음의 대화가 서사를 이끌어간다. 죽음은 만약을 대비하여 줄곧 오리 뒤에 있었다고 하면서 네 앞에 여우가 나타났다는 생각을 해보라고 한다. 오리는 그건 절대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오소소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지만, 미소 짓고 있는 죽음을 보고 죽음만 아니라면 꽤 괜찮은 친구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연못의 물속에도 들어가고 잠에서 깨어나 하루를 같이 보내면서 사후(死後)의 일을 이야기하고, 나무 위에 올라가서 연못을 내려다보기도 하고, 오리 자신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시간이 갈수록 오리와 죽음은 점점 더 연못에 가지 않게 되고 그 대신 풀 속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말도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어느 날, 오리는 한기를 느끼고 죽음에게 자기를 따뜻하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오리와 죽음은 두 손을 맞잡은 채 서로를 그윽하게 바라본다. 부드러운 눈이 내리는 날, 오리는 땅위에 반듯이 누워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고 죽음은 그의 곁에 앉아서 죽은 오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죽음은 오리를 두 손에 받쳐 들고 강으로 가서 조심스레 물위에 띄우고 살짝 발을 밀어 강을 따라 내려가게 한다. “죽음은 오랫동안 떠내려가는 오리를 바라보았습니다. 마침내 오리가 보이지 않게 되자 죽음은 조금 슬펐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장면에서 뒷짐 지고 천천히 걸어가는 죽음의 뒤에서는 여우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력을 다해 도망치고 있는 토끼를 노려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여우에게 쫓기는’ 마지막 장면은 죽은 오리가 상상하기도 겁내했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 죽음이 들고 있는 튤립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는 듯하다. 튤립은 첫 화면에서부터 작품 전체에 걸쳐 등장하지만 오리는 끝까지 죽음이 들고 있는 튤립을 한 번도 보지 못한다. 이 튤립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시들어가다가 죽음이 오리의 사체를 들고 갈 때 오리처럼 축 늘어져 있다.  


챗 GPT 와의 문답


다음은 챗 GPT에게 던진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이다.(챗의 답변은 “”로 표시함)


1) 첫 번째 질문: 이 작품을 평론해 보세요. 

 

“그림책 『내가 함께 있을게』에서 표현된 죽음관은 죽음을 두려움이나 단절이 아닌,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따뜻하고 철학적인 시선입니다.

...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삶의 일부입니다. 오리의 삶에 늘 함께 있었던 죽음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곁에 있었다고 말하죠. 죽음은 고요하고 자연스러운 이별입니다. 오리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죽음은 조용히 오리를 강물에 띄워 보내며 슬픔을 느끼지만, 그것이 곧 삶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이해와 수용의 대상입니다. 오리와 죽음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이해하고,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됩니다. 이처럼 『내가 함께 있을게』는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죽음을 성찰하게 만드는 그림책으로, 죽음을 삶의 동반자처럼 따뜻하게 그려낸 점이 인상적입니다."


2) 두 번째 질문: 기독교적으로 평론해 보세요.

  

“1. 죽음에 대한 인격화와 동행

책 속에서 ‘죽음’은 무섭고 폭력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리 곁에 조용히 머물며 마지막까지 함께하는 따뜻한 동반자로 그려집니다. 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편 23:4)라는 말씀과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여정의 일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2. 삶과 죽음의 연속성

기독교는 죽음을 끝이 아닌 새로운 생명의 시작으로 이해합니다. 오리가 죽음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삶을 되돌아보고, 마지막 순간을 평화롭게 맞이하는 모습은 요한복음 11장 25절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문입니다.


3. 공감과 위로의 이미지

죽음이 오리를 안아주고, 오리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슬퍼하는 장면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위로자 되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고린도후서 1장 3절은 하나님을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 부르며, 고통 중에도 함께하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이 책은 어린이에게도 죽음을 두려움이 아닌 사랑과 위로 속에서 맞이할 수 있는 사건으로 그려줍니다.


4. 검은 튤립의 상징성

죽음이 들고 있는 검은 튤립은 애도의 상징이자, 기독교적으로는 부활의 신비를 암시할 수도 있습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듯(요한복음 12:24),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피어난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함께 있을게』는 죽음을 회피하거나 공포로 그리지 않고, 사랑과 동행, 그리고 평화로운 이별로 그려냄으로써 기독교적 세계관과도 깊이 공명합니다.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준비할 것인가에 대한 묵상을 선물하는 작품이죠.“


이 답변은 성경 구절까지 인용하고 있으므로 ‘기독교적 평론’같은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튤립의 상징성은 솔직히 내가 인지하지 못한 부분이다. 그러나 이 평론을 주의깊게 읽어보면  기독 교리와 맞지 않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함께 있을게』는 죽음을 회피하거나 공포로 그리지 않고, 사랑과 동행, 그리고 평화로운 이별로 그려냄으로써 기독교적 세계관과 깊이 공명합니다.”라는 해석이다. 이것은 C.S.루이스가 비판한 “텍스트 이용(use)”의 전형적인 예가 아닐까 싶다. 텍스트를 있는 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사사 21:25)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조금 후에 밝히고자 한다. 


3) 세 번째 질문: 기독교적으로 볼 때 믿지 않는 자에게 죽음은 영원한 형벌을 의미합니다. 


“기독교 신학 안에서 믿지 않는 자의 죽음이 어떻게 이해되는지는 교단과 전통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고전적인 복음주의나 개신교 정통 교리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 곧 지옥에서의 형벌을 겪는다고 해석됩니다....”

“이 주제는 단순히 공포나 정죄로 다루기보다, 기독교 복의 해석인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과 은혜를 통해 조명되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형벌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딤2 2:4)을 함께 강조합니다“ 라고 덧붙인다.   

 

이러한 스탠스(stance)는 챗GPT가 종종 이 시대의 이슈들에 대해 보이는 애매한 입장과도 결을 같이 한다. 예컨대, 동성애에 관한 챗과의 대화를 통해 나는 그가 ‘사랑’, ‘회복’, ‘동행’이라는 단어를 주로 언급하는 반면, ‘죄’라는 단정적인 답변은 피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이유를 동성애가 아니라 다른 여러 신학적 견해들(천사를 환대하지 않은 것, 폭력과 지배)을 들어서 반박하거나, 혹은 고대 근동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더 강조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관점과도 관련이 있다. 현대인들, 심지어 교인들도 하나님의 속성을 이야기할 때 사랑의 하나님만을 강조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전에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주를 두려워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악을 떠나느니라(잠언 16:6).” 인간의 죄를 반드시 심판하셔야 하는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희생 제물로 삼으셨던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를 모르고 사랑만 알면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내가 함께 있을게]의 본문에서 오리와 죽음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오리: “땅속 저 밑에는 나쁜 오리를 불로 굽는 지옥이 있다고도 했어.”

죽음: “너희 오리들이 그런 말을 하다니 놀랍군. 하지만 누가 알겠어?” 

오리: 그럼 너도 모르는구나!“

오리가 꽥꽥 댔습니다. 죽음은 오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이 장면의 그림은 죽음이 실망하는 오리를 뒤로 하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4) 네 번째 질문: 이 작품에 대한 독자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많은 독자들은 이 책이 죽음을 따뜻하고 섬세하게 다뤘다는 점에 감동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오리와 죽음이라는 상징적인 캐릭터를 통해, 죽음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서 곁에 머무는 존재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해준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특히 어린이뿐 아니라 성인 독자들에게도 울림이 큰 책으로, “죽음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주는 그림책”, “삶의 소중함을 다시금 느끼게 해주는 이야기”라는 반응이 많았어요. 그림의 색감과 구성도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감정을 자극해, 철학적이면서도 감성적인 독서 경험을 선사한다는 평이 많습니다. 이 책을 읽은 후 “죽음이 꼭 슬프기만 한 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독자도 있었고, “아이와 함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부모들의 반응도 인상적이었어요.“

많은 기독인들의 반응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까. [문화신학](2007/2009)의 저자인 K. 밴후저(K Vanhoozer)는 문화텍스트를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세계를 바라보는 일정한 방식을 전유(傳諭)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독자의 반응을 존재론적 문제로서 바라볼 것을 촉구한 바 있다. 다시 말해, 문화 텍스트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독자는 실제로 독자 자신도 선택한다. 우리는 문화텍스트를 대할 때 마다 “나는 다른  방식이 아닌 이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라고 나의 상상력에 말을 거는 제안에 승낙할 것인가?”에 답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견지하고 있는 기독 신앙에 의거하여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그러한 분별력과 자원(resource)을 갖추고 있는가? 다른 문화텍스트와 마찬가지로 그림책 텍스트도 온갖 문학적 장치(캐릭터, 플롯, 시공간적 배경, 화자, 시점 등)와 시각적 요소(선, 면, 색, 구도, 형태 등)를 사용하여 우리를 설득한다. 기독 신앙인이 그 제안이 성경적인지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주의력, 문학적 지식(literary knowledge), 기독 교리(doctrin)적 지식, 그리고 확고한 기독교 세계관이  필요하다.


『내가 함께 있을게』의 세계관


결론적으로, [내가 함께 있을게]에 투영된 죽음관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우선, 죽음은 우리의 친구가 아니라 원수다. 원래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세계에는 죽음이 계획되어 있지 않았다. 죽음은 최초의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이 세상에 들어온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아가는 죽음은 우리의 원수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슬퍼하신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닥친 죽음의 파괴적인 결과를 보셨기 때문이다(요한 11:36). 그러나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인해 우리는 죽음의 결박을 끊고 부활과 영생을 선물받았고(롬 6: 23; 고전 15:51),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아, 너희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힘은 율법이니라.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KJB 고전 15: 55-57)라고 기뻐 외칠 수 있다. 우리 대다수는 자신에게 죽음이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르고 살아가지만, 이것 역시 세상과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선한 계획안에 있음을 믿고, 죽은 후에는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여 영생을 누릴 것이라는 소망으로 살아간다. 기독인의 가장 큰 소망은 장차  “다시는 사망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으며 또 아픔도 다시는 없을”(KJB 계 21: 4) 새 하늘과 새 땅, 거룩한 새 예루살렘 성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다. (계 21:3)  성경은 인간의 사후에는 두 가지 길만이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믿고 구원받은 자에게는 천국에서의 영생(계 21:4; 요한 14:2),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지옥 불못에서의 영원한 형벌(마 10:28; 계 20:15)이다. 오리는 “땅 속 저 밑에는 나쁜 오리를 불로 굽는 지옥이 있다고도 했어”라고 하며 지옥의 존재를 언급했지만 죽음은 그에 대한 인정도, 부인(否認)도 아닌, 회피를 택한다.  

팀 켈러(Tim Keller)(1950-2023)[1]는 [죽음에 대하여]라는 소책자에서 현대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2] 첫째, 현대 의학은 죽음을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가려놓았다. 19세기만 해도 죽음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가족의 삶을 앗아갔다. 전염병으로, 예기치 못한 사고로, 출산 과정에서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했다. 18세기 식민지 시대의 미국인의 기대 수명은 40세 안팎이었다고 한다. 누구나 가정에서 죽었으므로 부모, 자녀, 이웃, 친척 등 주위의 사람들이 죽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사망은 집이 아니라 병원에서 이루어지므로 성인이 될 때까지 한 사람의 죽음도 지켜보지 못하는 일이 당연시되었다. 그 결과, 임박한 죽음의 불가피성을 부정하며 살게 되었던 것이다. 둘째, 세속화를 들 수 있다. 현세의 의미와 만족만을 추구하는 세계관은 인간 역사에서 최근에 나타난 것이다. 전 시대에는 가족과 종족보전을 삶의 주목표로 여겼으며, 개인의 삶은 사후에도 자손을 통해 지속된다고 믿었다. 게다가 그들의 종교(이집트 다신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 무속신앙, 유교 등)는 사후세계를 인정했다. 즉, 삶의 주목표가 물질계와 현세의 바깥에 있었으므로 죽음을 덜 두려워할 수 있었다. 셋째는 깊은 무의미감이다. 현대인들은 죽음의 존재를 부정하다가 깊은 무의미감에 빠지게 되었다. 인간에게 가장 가혹한 딜레마는 피할 수 없는 죽음과 더불어 실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누군가는 어차피 죽으면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런 느낌도 없고 고통이나 고뇌도 없으니 두려워할 까닭도 없다고 자위(自慰)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논리는 대다수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이자,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지막 이유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다. 팀 켈러는 인간은 자신의 원죄로 인해 누구나 죄를 지을 수밖에 없으며, 누구나 할 것 없이 평생 그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간다고 말한다. 19세기에 니체는 인간 안에 죄책감이 출현한 것은 초월적 신들을 우리가 복종해야 할 대상으로 믿기 때문이며 이제 신이 죽었으니 죄책감의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선포했으나, 그는 틀렸다. 인간은 스스로 죄책감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양심에 화인(火印)받은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인간은 죽어갈 때 후회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떨게 된다.  

챗 GPT의 제한점


 챗이 보인 반응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맨 뒷장의, 뒷짐 지고 무심코 걸어가고 있는 죽음의 앞뒤에서 여우와 토끼가 쫓고 쫓기는 장면에 대한 해석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그 점을 재차 지적해도 AI는 오리가 강물에 흘러내려가는 것이 스토리의 마지막이라고 계속 우긴다(?). 심지어 나에게 다른 작품과 혼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렇다면 독일어 원본에 없는 장면이 번역본에 편집되었다는 말인가. 아직 원본과 번역본을 비교해 보지는 못했지만,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챗의 한계를 또 한 번 확인한 셈이다. 

내가 이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두는 이유는 스토리가 어떻게 끝나는가는 작가의 세계관을 해석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노화 때문인지, 아니면 병 때문인지 모르지만 오리는 눈 오는 날 평화롭게 조용히 죽음을 맞이했고, 그의 사체는 죽음이 떠미는 대로 강물을 따라 흘러갔다. 이 시적인 장면은 독자들에게 죽음이 우리 삶의 친절한 동반자라는 느낌을 더 해 주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곧 이어 죽음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긴박하고도 슬픈 사건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만일 토끼가 여우에게 포획되었다면 그의 몸은 여우의 날카로운 이빨로 인해 무참히 찢겨져 여우의 입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그 자리에는 사체의 조각들과 낭자한 핏자국만이 남겨졌을 것이다. 아니면 여우는 자기 새끼들을 위해 그 시체를 질질 끌고 여우굴로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오리의 평화롭고 조용한 죽음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이미지가 아닐 수 없다. 작가는 왜 오리의 죽음 이야기 뒤에 이 장면을 덧붙였을까. 작가가 이 작품을 10년동안 손에서 놓지 못했던 이유는 평화로운 것이든 참혹한 것이든 죽음은 매한가지라는 것, 그리고 평생 이러한 죽음과 동행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삶도 허무(vanity)에 불과함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현대의 적지 않은 그림책에서 죽음을 가볍고 유머스럽게 그리거나 따뜻하고 친근한 삶의 반려자로 은유하는 이유는 하나님 없이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해 보려는 슬픈 몸부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가며

이 글의 원래 목적으로 돌아가, 지금까지의 검색과 논의에 의거하여, 기독신앙인으로서 그림책 읽기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유념해야 할 챗의 유용성과 한계를 정리,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것은 2025년 6월 25일까지의 검색 결과를 기반으로 함). 

1. 챗은 정보를 수집, 분석, 정리, 요약하는 기능에서 놀라운 효율성을 발휘한다. 
2. 그러나 챗은 단순한 정보 제공에서도 실수할 때가 있다. 저자나 작품명을 혼동하기도 한다.
3. 챗도 모르는 것이 있으며, 때로는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4. 챗에게도 세계관적 편향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고자 한다.  

1. 그림책에 대한 문학적 지식과 촘촘히 읽기(글, 그림, 페리텍스트), 교리적 지식, 그리고 확고한 기독교 세계관은 AI 활용의 선행 조건이 되어야 한다. 
2. 기독인들이 진리 수호를 위해 인터넷상에서의 글쓰기, youtube 제작하기 등 정보 생산의 도구들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1]  https://ko.wikipedia.org/wiki/%ED%8C%80_%EC%BC%88%EB%9F%AC
      그는 미국 뉴욕의 리디머 장로 교회에서 20년동안 다양한 젊은 직장인들을 전도하여 대형교회로 성장시켰으며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48개의 도시에서 250개 교회를 개척했다.

[2] Timothy Keller, (2020/2020).  죽음에 대하여 (On Death). 서울:두란노.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이며 아동문학과 그림책 평론 작업을 하고 있다. 미국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1989년부터 2023년까지 성대 아동청소년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2021년부터 웹진 <그림책 베이직>에 '그림책의 세계관'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성균관대학교 생활과학대학연구소 부설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그림책의 세계관', '기독 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세계관>, 공저로는 <그림책의 이해>, <그림책의 그림 읽기>, <세계 그림책의 역사>, <어린이교육전문가가 엄선한 100권의 그림책>, <신앙이 자라는 그림책 읽기>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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