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의 세계관
우리 가족은 왜 여기 없을까? 『가족의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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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레스트 2025-03-27 21:26
평소 무심코 생각하고 받아들여지던 "가족" 이라는 단어가 주는 뭉클하고 따뜻한 단어가 언제부터인가 무겁고 불편하고 괴롭기조차 한 단어로 바뀌어지고 있다고 하면 그 원인은 과연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늘 가까이에서 존재하고 있기에 딱히 생각해볼 필요조차 없었던 가족의 깊은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는 메시지를 던진 그림책 평론 "우리 가족은 왜 여기 없을까?" (가족의 모양) .여기에는 책의 제목만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들어 있었다. 아.. 가족은 이렇게 다양할수 있구나? 하는 고개 끄덕여지는 공감은 그러나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페이지를 넘겨 갈수록 우리의 시야를 가리고, 부당함을 온전함으로 받아 들이게 하며, 비도덕과 비윤리를 정당하시켜 공감하게 하려는 것이 작가의 의도였다면 평론가의 시각에서 알게 된 내용은 우리에게 가족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또다른 시각을 던져 준 셈이다. 가족은 건강함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물론 신체의 건강함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여기서 건강함이라고 하면 정신적, 정서적, 윤리적 건강함을 함께 말하는 것이다. 가족의 정의와 가정의 정의가 다양성과 포용성이라는 사회적 가치관의 혼돈과 함께 매스컴의 그릇된 시각까지 보태어져 올바른 길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세태만을 탓하기엔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은 위험하고 위태롭기까지 하다. 이 평론을 읽으면서 정말 가족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할까? 그리고 가족의 진정한 형태는 어떤 모습일까? 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 우리 가족은 왜 여기 없을까?" 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비슷하거나 더 도발적이고 더 충동적인 시각에서 출간된 책 여럿편을 함께 살펴보게 된 것은 평론가의 예리한 시각이 안겨 준 또 다른 그림책 읽기의 풍요로움이었다. 미처 알지 못했던 그래서 무심코 지나쳤던 가족의 의미에 대해 정확하고 예리한 통찰력을 던져 준 교수님의 메시지에 감사드린다.
Hyojin2025-03-28 20:00
교수님의 평론을 읽고 <가족의 모양>그림책을 찾아 읽었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2학년인 딸과 함께 읽으며 아이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물어보았어요.
부모님이 글과 그림에 등장하지 않는 부분에서도 아이의 가족은 엄마, 아빠를 포함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더군요.
그런데 뒷부분, 13번 아이 없는 시골에서 자라는 아이를 보며 "옆집도 가족이야?"라고 묻더라구요. 점점 가족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흐려지고 있었고,
책을 읽은 후에는 '가족이란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는 같이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정말 책 한권의 위력이 엄청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교수님의 글을 먼저 읽었기에 아이와 함께 책을 읽은 후에 '가족'에 대해 이야기 나누며 개념을 다시 한번 정리해 줄수 있었지만,
아이들이 이 책을 읽으며 해체되어가는 가족의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될까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부모님이 글과 그림에 등장하지 않는 부분에서도 아이의 가족은 엄마, 아빠를 포함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더군요.
그런데 뒷부분, 13번 아이 없는 시골에서 자라는 아이를 보며 "옆집도 가족이야?"라고 묻더라구요. 점점 가족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흐려지고 있었고,
책을 읽은 후에는 '가족이란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는 같이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정말 책 한권의 위력이 엄청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교수님의 글을 먼저 읽었기에 아이와 함께 책을 읽은 후에 '가족'에 대해 이야기 나누며 개념을 다시 한번 정리해 줄수 있었지만,
아이들이 이 책을 읽으며 해체되어가는 가족의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될까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현은자2025-03-30 13:48
자녀의 반응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림책이 글과 그림으로 빚어내는 스토리의 설득력은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강력하지요.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준다면 아이들은 스폰지같이 그 세계관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점점 더 부모와 교사의 분별력 있는 읽기가 절실해 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준다면 아이들은 스폰지같이 그 세계관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점점 더 부모와 교사의 분별력 있는 읽기가 절실해 지는 것 같습니다.
이수형2025-03-29 09:24
가족이 모양만있을까요?
자상한 엄마의 정과 든든한 아빠의 정은 때론 간절하고 애절하기까지 합니다.
모양새만인 구성가족이 전부가 아니죠...
피끓은 감정으로 생각하고 위하고 사랑하고 보듬는 부모와 그걸 느끼는 자녀가 있는 가족은 기본인데요. 자녀는 그 사랑을 마음의 중심으로 삼아 사회에서 타인과 관계 맺을 수 있고, 따뜻함을 주고 받고 살아갑니다. 또 부모님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나쁜 행동을 멈추기도 하지요. 인간의 근본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부모의 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물론 복잡해진 현대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같은 모습일수는 없습니다.
같은 모습이되라고 강요하거나 그렇지 않다고 질책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 속에 여러 형태의 가족을 만들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근본이 사라지는건 아닙니다.
부모를 향한 애절한 감정과 자녀를 위한 끝없는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빠졌습니다.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신 하나님과 비할 수 없지만 그것을 원형삼은 부모님의 사랑을 자녀는 모를리없습니다.
그림책 <가족의 모양>은 허울뿐인 외형을 늘어놓으며 진실을 왜곡할뿐 입니다.
자상한 엄마의 정과 든든한 아빠의 정은 때론 간절하고 애절하기까지 합니다.
모양새만인 구성가족이 전부가 아니죠...
피끓은 감정으로 생각하고 위하고 사랑하고 보듬는 부모와 그걸 느끼는 자녀가 있는 가족은 기본인데요. 자녀는 그 사랑을 마음의 중심으로 삼아 사회에서 타인과 관계 맺을 수 있고, 따뜻함을 주고 받고 살아갑니다. 또 부모님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나쁜 행동을 멈추기도 하지요. 인간의 근본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부모의 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물론 복잡해진 현대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같은 모습일수는 없습니다.
같은 모습이되라고 강요하거나 그렇지 않다고 질책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 속에 여러 형태의 가족을 만들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근본이 사라지는건 아닙니다.
부모를 향한 애절한 감정과 자녀를 위한 끝없는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빠졌습니다.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신 하나님과 비할 수 없지만 그것을 원형삼은 부모님의 사랑을 자녀는 모를리없습니다.
그림책 <가족의 모양>은 허울뿐인 외형을 늘어놓으며 진실을 왜곡할뿐 입니다.
경남2025-08-05 20:24
교수님의 평론을 읽으며 가족의 본질적인 의미에 대해 깊이 성찰할 기회를 얻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가족은 결혼을 통해 시작될 수 있는 법적, 사회적 개념인 동시에, 가정을 이루는 물리적, 정서적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며 상호작용하는 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본질적인 의미와 가치가 작금의 현실 속에서 퇴색되고 있는 점은 매우 안타깝습니다. 생육과 번성을 위해서는 본질적으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연합을 통해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출산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오늘날 비혼 증가나 동성 결혼 등 다양한 가족 형태의 확산이 맞물려 출산율 저하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정은 결혼이라는 법적, 사회적 약속을 기반으로 사랑과 헌신, 신뢰와 책임이 따르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언약 관계를 맺으시고 변치 않는 영원한 약속을 주셨듯이, 결혼 또한 법적 구속력이 있는 언약의 개념으로 평생에 걸쳐 사랑과 헌신, 신뢰와 책임이 수반됩니다. 그러나 요즘은 자신의 유익에 따라 '살아보고 안 맞으면 헤어지자'는 계약의 개념으로 접근하여, 본능과 감정에 치우쳐 가정을 쉽게 해체하고 이혼하는 가정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세상은 이러한 현실을 '다양성', '포용성','약자보호', '평등'이라는 그럴싸한 명분으로 합리화하며, 해체된 가족의 모습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경향까지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생육과 번성의 명령, 영원히 변치 않는 결혼 언약의 엄중함, 그리고 가족 간의 사랑과 희생, 신뢰와 책임 속에서 도덕적 가치를 가르치며 자녀를 양육하는 소중한 가치들이 점차 무너지고 있는 듯합니다. 마치 가족의 의미가 경제적, 정서적 유대 관계 안에서의 '돌봄의 공동체' 정도로 변형되고 확대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가족의 본질적 의미를 깊이 되새겨 볼 수 있는 귀한 통찰을 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가족은 결혼을 통해 시작될 수 있는 법적, 사회적 개념인 동시에, 가정을 이루는 물리적, 정서적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며 상호작용하는 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본질적인 의미와 가치가 작금의 현실 속에서 퇴색되고 있는 점은 매우 안타깝습니다. 생육과 번성을 위해서는 본질적으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연합을 통해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출산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오늘날 비혼 증가나 동성 결혼 등 다양한 가족 형태의 확산이 맞물려 출산율 저하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정은 결혼이라는 법적, 사회적 약속을 기반으로 사랑과 헌신, 신뢰와 책임이 따르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언약 관계를 맺으시고 변치 않는 영원한 약속을 주셨듯이, 결혼 또한 법적 구속력이 있는 언약의 개념으로 평생에 걸쳐 사랑과 헌신, 신뢰와 책임이 수반됩니다. 그러나 요즘은 자신의 유익에 따라 '살아보고 안 맞으면 헤어지자'는 계약의 개념으로 접근하여, 본능과 감정에 치우쳐 가정을 쉽게 해체하고 이혼하는 가정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세상은 이러한 현실을 '다양성', '포용성','약자보호', '평등'이라는 그럴싸한 명분으로 합리화하며, 해체된 가족의 모습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경향까지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생육과 번성의 명령, 영원히 변치 않는 결혼 언약의 엄중함, 그리고 가족 간의 사랑과 희생, 신뢰와 책임 속에서 도덕적 가치를 가르치며 자녀를 양육하는 소중한 가치들이 점차 무너지고 있는 듯합니다. 마치 가족의 의미가 경제적, 정서적 유대 관계 안에서의 '돌봄의 공동체' 정도로 변형되고 확대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가족의 본질적 의미를 깊이 되새겨 볼 수 있는 귀한 통찰을 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정민2025-08-05 23:28
‘다양한 가족’을 다룬 책들이 마치 필수 트렌드인 양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가족의 모양'이라는 제목 자체가 '다양한 가족'을 의미하는 것이죠.)
이 책들은 겉으로는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듯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가족의 해체’를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흐름 속에 놓여 있습니다.
물론 이 시대엔 깨어진 가정, 상처 받은 아이들, 다양한 현실 속 가족 형태들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들을 편견 없이 바라보고, 따뜻하게 품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아픔을 이념적으로 소비하며, 그 틈에 동성애적 가족 이론을 끼워 넣는 책들을 마주할 때면,
그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12번째 이모와 이모 친구의 관계가 의심스럽습니다.)
‘다양한 가족’이라는 말은 가족의 정의를 흐리는 언어가 되어버렸습니다.
교수님 글에도 쓰셨듯이 건강가정기본법에 “가족이란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 단위로,
부양·양육·보호·교육의 기능을 수행하는 생활공동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즉, 가족이란 ‘같이 사는 사람’이 아니고 "언약과 법적 관계"를 전제로 한 실체이지,
기분 좋고 따뜻한 감정만으로 성립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다양한 가족"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위의 법적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 관계는 가족이 아닌 것이죠.
작가가 정말 가족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혹시 ‘다양한 가족’이 유행하니, 트렌드에 편승해서 판매부수를 늘리거나 상이라도 받을 요량으로 책을 쓴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아님 누군가에게 지령이라도 받은 것일까요?
이런 책들은 결국 진리를 상대화하고, ‘가족의 정의’를 개인 감정과 합의로 대체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이것이 단순히 ‘동성애’라는 하나의 이슈를 넘어서
가정과 공동체, 사회 질서 자체를 해체하려는 더 큰 흐름의 일부라는 사실입니다.
‘언약’은 사라지고 ‘합의’만 남은 시대, ‘질서’는 무시되고 ‘내 마음에 옳은 대로’가 기준이 되는 시대,
그 결과는 결국 "가족의 해체"로 개인과 사회에 더 큰 상처와 아픔만 남길 뿐입니다.
해체된 가족의 상처를 위로하고 감싸는 듯한 이런 책의 결과물이 또 다른 가족의 해체를 낳는 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것 같습니다.
마치 돌팔이 의사에게 병이 더 악화되는 약을 처방 받은 느낌이랄까요...
우리는 단순히 "착해 보이는 것"에 속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다시 창조 질서 안의 가족의 정의와 의미를 세워 나가야 합니다.
('가족의 모양'이라는 제목 자체가 '다양한 가족'을 의미하는 것이죠.)
이 책들은 겉으로는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듯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가족의 해체’를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흐름 속에 놓여 있습니다.
물론 이 시대엔 깨어진 가정, 상처 받은 아이들, 다양한 현실 속 가족 형태들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들을 편견 없이 바라보고, 따뜻하게 품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아픔을 이념적으로 소비하며, 그 틈에 동성애적 가족 이론을 끼워 넣는 책들을 마주할 때면,
그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12번째 이모와 이모 친구의 관계가 의심스럽습니다.)
‘다양한 가족’이라는 말은 가족의 정의를 흐리는 언어가 되어버렸습니다.
교수님 글에도 쓰셨듯이 건강가정기본법에 “가족이란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 단위로,
부양·양육·보호·교육의 기능을 수행하는 생활공동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즉, 가족이란 ‘같이 사는 사람’이 아니고 "언약과 법적 관계"를 전제로 한 실체이지,
기분 좋고 따뜻한 감정만으로 성립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다양한 가족"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위의 법적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 관계는 가족이 아닌 것이죠.
작가가 정말 가족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혹시 ‘다양한 가족’이 유행하니, 트렌드에 편승해서 판매부수를 늘리거나 상이라도 받을 요량으로 책을 쓴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아님 누군가에게 지령이라도 받은 것일까요?
이런 책들은 결국 진리를 상대화하고, ‘가족의 정의’를 개인 감정과 합의로 대체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이것이 단순히 ‘동성애’라는 하나의 이슈를 넘어서
가정과 공동체, 사회 질서 자체를 해체하려는 더 큰 흐름의 일부라는 사실입니다.
‘언약’은 사라지고 ‘합의’만 남은 시대, ‘질서’는 무시되고 ‘내 마음에 옳은 대로’가 기준이 되는 시대,
그 결과는 결국 "가족의 해체"로 개인과 사회에 더 큰 상처와 아픔만 남길 뿐입니다.
해체된 가족의 상처를 위로하고 감싸는 듯한 이런 책의 결과물이 또 다른 가족의 해체를 낳는 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것 같습니다.
마치 돌팔이 의사에게 병이 더 악화되는 약을 처방 받은 느낌이랄까요...
우리는 단순히 "착해 보이는 것"에 속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다시 창조 질서 안의 가족의 정의와 의미를 세워 나가야 합니다.
전보람2025-08-05 23:42
단순히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라 가정을 책임지게되고 아이를 낳고 양육하면서 겪은 모든 경험이 그 이전의 어떤 경험보다도 나를 성숙하게 했다라고 장담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족을 허락하신 이유는 끊을 수도 없고 끊어지지도 않는, 가끔은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혈육의 사랑을 통해 알려주시기 위함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은 쉽게 멀리 떠나기도 하며 멀리서 떠나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함께하는 의미의 가족의 의미가 더 희석되는것 같기도 합니다. 또 풍요롭고 안락한 사회에서는 더 새롭고 더 남다른것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사실 요새 밖에 유모차인가 하고 보면 개모차(?)인 경우가 많아서 당황할때가 많습니다. 애완동물을 반려동물, 가족이라 하며 아기처럼 다루는 모습이 그렇게 좋게 보이지만은 않지만 그것이 당연한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혈육이 아닌 다양한 관계의 사람을 가족으로 인정하는것을 넘어 동물이 인간의 영역에 들어오고 대체되고 있고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은 추락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이것또한 경계의 문제라고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질서인 혈육의 가족의 의미가 희미해지며 누구든지, 무엇이든 내가 좋으면, 내가 원하면 가족이 되기도 하고 싫고 힘들면 가족을 떠나거나 해체하는 인간의 죄성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 알려주시고 싶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독이되는 자유를 누릴것인지 진리안에서 참 기쁨을 얻을것인지는 언제나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네요.
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은 쉽게 멀리 떠나기도 하며 멀리서 떠나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함께하는 의미의 가족의 의미가 더 희석되는것 같기도 합니다. 또 풍요롭고 안락한 사회에서는 더 새롭고 더 남다른것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사실 요새 밖에 유모차인가 하고 보면 개모차(?)인 경우가 많아서 당황할때가 많습니다. 애완동물을 반려동물, 가족이라 하며 아기처럼 다루는 모습이 그렇게 좋게 보이지만은 않지만 그것이 당연한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혈육이 아닌 다양한 관계의 사람을 가족으로 인정하는것을 넘어 동물이 인간의 영역에 들어오고 대체되고 있고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은 추락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이것또한 경계의 문제라고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질서인 혈육의 가족의 의미가 희미해지며 누구든지, 무엇이든 내가 좋으면, 내가 원하면 가족이 되기도 하고 싫고 힘들면 가족을 떠나거나 해체하는 인간의 죄성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 알려주시고 싶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독이되는 자유를 누릴것인지 진리안에서 참 기쁨을 얻을것인지는 언제나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네요.
우리 가족은 왜 여기 없을까? 『가족의 모양』
그림책 자세히 보기
이 작품은 일종의 정보그림책이라고 할 수 있다. 각 화면마다 한 아이가 등장하여 자신의 가족(?)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성만을 놓고 볼 때 볼로냐 라가지 상을 수상하였던 강경수 작가의 『거짓말같은 이야기』(2011)라는 작품과 유사하다.『거짓말같은 이야기』에서는 화가가 꿈인 대한민국의 소년 앞에 전쟁과 빈곤으로 고통받고 있는 제 3세계의 아이들이 한 명씩 나타나 자신의 비참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주인공은 그들의 이야기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거짓말이지?”라고 소리치고, 친구들은 모두 “아니, 거짓말 같은 우리의 진짜 이야기란다.”라고 답한다.
그러나 전미화 작가의 『가족의 모양』의 메시지와 분위기는 『거짓말같은 이야기』와는 사뭇 다르다. 표지에는 볼에 홍조를 띠고 있는 아이가 자고 있는 고양이를 품에 안고 독자를 응시하고 있다. 뒤표지에는 12번째 화면에 등장하는 여아의 모습과 “모양은 달라도 마음은 하나 우리가 만들어가는 가족이야기”라는 문구가 있다. 면지에는 표준국어대사전의 ”가족“이라는 단어의 정의가 다음과 같이 인용되어 있다. “[명사]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그 구성원,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이루어진다. 비슷한 말, 식구”
그런데 이 정의는 대한민국의 건강가정기본법의 그것과 다소 차이가 있다. 건강가정기본법에 따르면 가족은 “혼인, 혈연, 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단위로, 부양, 양육, 보호, 교육 등의 생활공동체이다”라고 정의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자에서는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우선되고 있는 반면, 후자에서는 “부양, 양육, 보호, 교육 등의 생활공동체“의 기능이 덧붙여져 있다. 즉, 후자의 정의가 더 포괄적임을 알 수 있다. 작가가 이것을 모를 리 없었을 텐데 왜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를 선택했는지 궁금해진다.
표제지에는 ”가족의 모양“이라는 제목 아래에 볼품없는 외양의 강아지가 앞을 보고 앉아 있다. 왜 표제지에 사람이 아닌 강아지만 그려놓았을까. 이 강아지는 세 번째 화면에 다시 등장한다. 그 다음 펼쳐지는 본문에서 작가는 총 16개의 가족의 형태를 소개하고 있다. 이 중에서 친(양)부와 친(양)모의 존재가 글 혹은 그림으로 언급되지 않았음을 괄호 안에 밝혔다.
1. 할머니, 엄마, 아빠, 고모, 동생 둘과 사는 아이
2. 각각 자신의 부모와 살고 있는 외동 여아와 남아. 이들은 부모는 달라도 남매처럼 지낸다.
3. 유기견과 함께 사는 아이 (글, 그림에 없음)
4. 주말에만 만나는 아빠와 사는 아이(엄마는 없음)
5. 조부모와 함께 사는 아이 (부모는 없음)
6. 장애가 있는 오빠와 사는 여아 (부모는 없음)
7. 엄마와 둘이 사는 아이 (아버지는 없음)
8, 엄마가 재혼하여 의붓 아버지와 형과 함께 넷이 사는 남아
9. 다섯 살에 어떤 부부에게 입양된 아이
10. 아버지가 외국인인 다문화 가정의 아이
11. 누나와 함께 사는 탈북인 가정의 아이(부모는 없음)
12. 이모와 이모친구와 사는 아이(부모는 없으며 이모와 이모 친구의 관계는 모호함)
13. 아이가 없는 시골에서 자라나는 아이 (부모는 없음)
14. 두 달에 한번 만나는 친엄마가 있는 위탁가정의 아이(아버지는 없음)
15. 고아원에서 사는 아이 (부모 모두 없음)
16. 전쟁난민으로 한국에 들어와 고양이와 함께 사는 아이 (부모는 없음)
이 열 여섯 아이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 중 3, 13, 14, 15, 16는 표준국어대사전이나 건강가정기본법의 가족의 정의에 해당하지 않는다. 심지어 3은 반려견과 함께 사는 아이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친(양)부모 양측이 그려진 가족은 1, 2, 8번 뿐이다. 그 밖에는 글과 그림 모두에서 부모 양측 모두가 없거나 아니면 어머니 혹은 아버지 한 편만 등장한다.
이 작품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아이들이 양육되는 다양한 공동체의 형태에 눈을 뜨게 하는 효과가 있겠지만 웬지 찜찜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현행 법적으로 가족이라고 부를 수 없는 형태가 더 많이 그려져 있거니와 무엇보다도 친부모와 함께 사는 아이는 2번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부부와 미혼 자녀로 구성된 가족”을 뜻하는 핵가족의 비율은 1980년 56.5%에서 2000년 57.8%, 21년에는 43.3% 로 점점 줄어드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인 가족의 형태인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핵가족 안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이 책을 읽으며 무엇을 생각하게 될까.
‘가족’이라는 주제를 선택한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전 세계적으로 가족의 형태는 점점 더 다양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이 책에서 소개된 것 외에도 정자 기증으로 태어난 아이들, 대리모로부터 얻은 아이들, 동성애 부모를 둔 아이들, 동거 커플이 낳은 아이들, 비혼으로 낳은 아이들 등, 앞으로 얼마나 더 다양한 형태가 등장할지 모른다. 작가는 대한민국에서도 가족의 개념을 확장시킬 뿐 아니라 그들 역시 행복할 수 있음을 주장하려는 듯 하다. 이 의도는 뒷 면지에서 확인된다. 작가는 뒷 면지에서 앞 면지에 인용되었던 가족의 차가운 법적 정의 대신 가족의 훈훈한 순기능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가족은 나한테 행복을 주는 사람이에요. 가족은 아프면 안아줘요. 가족은 맛있을 것을 같이 먹어요. 가족은 슬플 때 달래 줘요. 가족은 서로 웃긴 이야기를 많이 해요. 가족은 무섭지 않게 해 줘요. 가족은 화가 풀릴 때까지 기다려 줘요. 가족은 힘들 때 응원해요. 가족은 칭찬을 잘해 줘요. 가족은 내 말을 끝까지 들어워요. 가족은 그래요.” 누구나 소망하는 가족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이러한 인간관계, 혹은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모두 가족의 범주 안에 넣을 수 있느냐의 문제다.
최근 들어, 서양 그림책에서 가족의 범주를 확장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지속되어 왔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서, 1990년에 출판된 [Daddy’s Roommate](M. 윌 호이트 글, 그림)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동성애라는 주제를 다룬 첫 번째 어린이 도서 중 하나로서도 유명하다. 어린 소년이 화자로 등장하는 이 이야기는 "나의 엄마와 아빠는 작년에 이혼했어요."라는 소년의 회상으로부터 시작한다. 아버지가 짐가방을 들고 집을 나간 이후부터 이 소년은 엄마 집과 프랭크라는 남자와 같이 사는 아버지의 집을 왕래하기 시작한다. “WORLD'S BEST MOM”(세계에서 가장 좋은 엄마)이라고 쓰인 앞치마를 입고 있는 어머니는 소년에게 아버지와 프랭크의 관계를 게이라고 알려주고 그 뜻을 묻는 소년에게 게이란 “just one more kind of love”(그저 또 한 종류의 사랑)이라고 설명한다. 프랭크는 친부모처럼 소년을 돌보고 놀아주며. 아버지와 프랭크는 서로 다정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다투기도 하며 여느 부부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 마지막 화면의 왼쪽에서 소년은 "아버지와 그의 룸메이트는 매우 행복해요."라고 말하며, 오른쪽 장면에서 소년은 극장 앞에서 아버지와 프랭크 사이에 서서 입장을 기다리면서 독자를 향해 미소 지으며 “And I’m happy too.(그리고 나도 행복해요.)”라고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끝맺는다. 단순한 스토리, 각 화면 당 한 개의 짧은 문장, 굵은 윤곽선으로 그려진 인물 위주의 그림 등 유아용으로 보이는 작품이지만 그 내용은 심히 도발적이다.
이 작품은 부모의 이혼과 동성애, 그리고 동성 커플의 자녀라는 복합적인 이슈로 인해 출간되자마자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으며, 많은 학교와 도서관에서 검열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1990년에서 1999년 사이에 가장 도전적인 책 2위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빈약한 서사와 서투른 일러스트레이션에도 불구하고 2009년 게이 문학의 발판을 놓았다 하여 CCBC(Cooperative Chdildren’s Book Center)를 비롯한 유명 서평지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1) 작가는 2000년 출판 10주기를 기념한 판본(edition)에 자신의 창작 목적은 동성 부부의 아이들에게 단순하고 재미있으면서 그들 자신을 볼 수 있는 거울과 같은 책을 제공함과 동시에 전통적인 가족의 어린이들에게는 게이 가족에 대해 교육시키는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문장, 즉 “나도 행복해요.”라는 소년의 진술은 단순한 정보 전달 이상의 것을 전달하고 있다. 즉, 작가는 주인공 소년의 입을 빌어 게이 커플도 얼마든지 남녀 부부 못지않게 행복할 수 있으며 자녀에게도 좋은 가정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세상에서 가장 좋은 엄마"인 소년의 엄마가 소년에게 게이를 “그저 또 하나의 사랑”이라고 쿨(?)하게 정의하고 있는 장면도 억지스럽다. 즉, 이 작품은 문학 작품이라기 보다 게이 커플을 옹호하는 일종의 선전(propaganda) 도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친부모와 함께 사는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일반적으로 더 행복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경험적으로,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2) 무엇보다 해체된 가족 관계는 아이들에게 신체적, 심리적 불안을 야기한다. 예컨대, 미국의 통계이기는 하지만, 생물학적 아버지의 부재는 더 높은 10대 임신, 알콜 중독, 마약 중독, 고등학교 중퇴, 폭력, 범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3)
이렇듯 서구에서 증명된, 가족 붕괴의 수많은 해악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는 결혼 제도를 약화시키려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미디어에 비춰지는 가족 붕괴의 모습은 이미 위험 수위를 넘어섰으며, 법적, 정치적 상황 역시 심각하다. 2024년 7월 18일 대법원 판결에 의해 동성 커플에게도 사실혼 관계와 동일하게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이 인정되었다. 이는 동성혼 합법화의 물꼬를 터준 것이나 다름없다. 정치권에서는 전통적인 가족 관계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법안들이 통과되거나 계속 법안으로 상정되거나 거론되고 있다. 이 이슈에서는 여·야간 차이가 없다. 더불어 민주당의 이광희 의원은 동성커플에게도 출산 휴가, 육아 휴직들을 허용하게 될 수 있는 법안을 발의하였고. 국민의 힘 나경원 의원은 정우성, 문가비 비혼 출산 논란에 맞추어 출산율 증진을 위한 “등록동거혼” 제도를 도입하자고 주장하였다.(4) 또한 이기일 보건복지부 1차관도 프랑스의 ‘팍스(PACS)’제도를 언급하며, 비혼 출산이 가능한 가족 형태를 확대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다. 팍스란 프랑스에서 도입된 시민연대계약으로, 사실혼 관계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제도로서, 팍스를 체결한 커플은 일부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그는 “팍스가 한국출산율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겠지만 신세대가 자유로운 형태의 가정 구성이 가능하다는 점에선 긍정적 효과가 기대된다” 라고 하여 제도 도입의 목적이 출산율 증가가 아니라 가족 형태의 확대라는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5) 혼전 동거가 출산율 증가는 커녕, 가족 붕괴를 부추김은 미국, 유럽 국가가 증명한 바인데 왜 정치인들은 이 제도를 앞 다투어 도입하려는 것일까. 시류에 편승하는 정치인의 속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들의 행보가 가족 제도의 파괴라는, 문화막시즘의 아젠더(agenda)와 관련된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6)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를 선택할 권리가 없는 반면, 그들이 살아갈 가족의 형태는 이기적인 부모와 잘못된 법과 사회 제도가 결정한다. 그렇게 해서 생성된 다양한 형태의 가족 안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그림책 작가들도 이 문제를 공론화할 필요를 감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회적 문제를 보여줄 때는 항상 ‘어떻게’가 관건이 된다. 예술이 현실의 모방 혹은 반영이라는 예술론은 여러 예술론 중의 하나일 뿐이다. 예술 작품은 현실을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이 아니며 그것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 같은 인물이나 풍경을 찍는 사진도 사진사마다 다른 결과물을 보이기 마련이다. 즉, 실재(reality)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은 항상 창작 작업에 영향을 미친다.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e)의 [죽음의 수용소에서](Man’s Search for Meaning)(1946) 만큼 그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작품도 없을 것이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겪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쓴 이 자전적 에세이에서 작가는 인간이 희망과 삶의 의미를 잃지 않는다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도 견뎌낼 수 있음을 증언하였던 것이다.
아동문학의 사실주의(realistic fiction) 작가로서 잘 알려진 이브 번팅(Eve Bunting) (1928-2023)은 사회 문제를 자주 다루는 작가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노숙자, 인종갈등, 재혼가정 등의 심각한 문제를 다루면서도 희망과 인간애를 잃지 않는다. 그가 글을 쓰고, 로날드 히믈러(Ronald Himler)가 그린 [Fly away Home](집으로 날아가)(1991)는 공항에서 노숙하는 아버지와 아들을 그린 작품이다. 그들은 공항 경찰에게 잡히지 않도록 눈에 잘 띄지 않는 외모를 하고 터미널을 수시로 옮기며 살아간다. 낮에 아버지는 공항 셔틀버스를 타고 도시로 나가서 청소부 일을 하고 아들은 승객들의 짐을 들어주면서 팁을 받아 돈을 모으면서 언젠가 집도 사고 학교에 갈 수 있는 날을 기다린다. 어느 날 소년은 메인 터미널에 들어온 작은 갈색 새 한 마리를 발견한다. 그 새는 유리벽에 부딪히고 바닥에 떨어지기를 반복하기를 수차례 하던 끝에 드디어 슬라이딩 도어가 열린 틈으로 밖으로 날아간다. 아이는 비상하는 새에게 “집으로 날아가(Fly away home!”)라고 낮게 속삭인다. 공항 터미널에서 아버지와 함께 투명인간처럼 숨죽이며 살아가는 그 소년은 자신도 언젠가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
『가족의 모양』은 윌호이트의 [Daddy’s Roommate]처럼 두 종류의 독자를 향하고 있는 것 같다. 전통적인 형태가 아닌 가족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에게는 긍정적인 자화상을, 그리고 전통적인 가족의 어린이들에게는 그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전통적인 형태가 아닌 가족에서도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목적을 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16개의 나레이션(narration)은 감동을 줄만한 서사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으며, 뒷 면지의 글은 가족의 순기능을 나열한 정보 전달에 불과하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염려스러운 것은 이 작품을 읽게 되는 어린이 독자들(성인도 마찬가지겠지만)의 반응이다. 가족 해체의 산물인 공동체와 그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어린이 독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우리는 이 시대에 만연한 가족 해체의 대가는 아무 잘못이 없고 힘없는 아이들이 지불하고 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동안 드라마와 영화와 같은 미디어는 성인의 시각에서 이러한 아이들의 모습을 종종 외면하고 왜곡하면서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그동안 세상에 드러내지 못했던, 성장기와 성인기까지 지속적으로 겪고 있는 신체적, 정신적 고통이 <Them Before Us.>와 같은 글로벌 아동 인권 운동을 통해 알려지고 있다.(7) 비로소 우리는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진실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남녀의 결혼이 아이들의 건강, 교육, 복지를 위한 최고의 고유한 조직일 뿐 아니라 국가 구성원의 유대감을 유지시키는 가장 강력한 제도임은 역사가 증명한 바다. 그렇기 때문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문화권에서는 결혼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규범이 존재해 왔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다음 세대와 국가 공동체를 위해 결혼 문화와 전통적인 가족을 재건하는 것이 문화적, 정치적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한다. 어린이 독자를 염두에 두고 창작 작업을 하는 그림책 작가들도 가족 해체라는 작금의 시류에 편승하는 대신, 결혼과 가족에 대한 진리를 옹호하는 목소리를 내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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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s://en.wikipedia.org/wiki/Daddy%27s_Roommate#Summary
(2) K. 피우스트 & S. 매닝. (2021), 아이들은 정말 괜찮을까?현대적 가정에서 . 서울: 도서출판 콜슨
(3) K. 피우스트 & S. 매닝. (2021), 아이들은 정말 괜찮을까?현대적 가정에서 . 서울: 도서출판 콜슨
(4) https://www.chosun.com/politics/assembly/2024/11/30/RPHQRGOY4FAGTIUPRHAQV2N42I
(5) https://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96157
(6) https://www.picturebook-basic.com/44/?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12660009&t=board
(7) K. 피우스트 & S. 매닝. (2021), 아이들은 정말 괜찮을까?현대적 가정에서. 서울: 도서출판 콜슨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이며 아동문학과 그림책 평론 작업을 하고 있다. 미국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1989년부터 2023년까지 성대 아동청소년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2021년부터 웹진 <그림책 베이직>에 '그림책의 세계관'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성균관대학교 생활과학대학연구소 부설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그림책의 세계관', '기독 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세계관>, 공저로는 <그림책의 이해>, <그림책의 그림 읽기>, <세계 그림책의 역사>, <어린이교육전문가가 엄선한 100권의 그림책>, <신앙이 자라는 그림책 읽기>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