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탉 ‘로지’의 산책을 따라가는 은혜의 삶: 팻 허친스의 『Rosie’s Walk』

2023-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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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탉 ‘로지’의 산책을 따라가는 은혜의 삶:  팻 허친스의 『Rosie’s W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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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팻 허친스(Pat Huchins)(1942-2017)는 다채로운 경력의 소유자이다. 영국 태생의 그녀는 작가이자 배우, 방송인이지만 그림책 작가로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녀를 그림책 작가로서 유명하게 한 계기는 『바람이 불었어』(The Wind Blew)가 1974년 케이트 그린어 웨이 메달 수상작이 된 것이다. 1968년 출판된 『로지의 산책』(Rosie’s Walk)은 그녀의 첫 번째 그림책이다. 32개의 단어와 3개의 색 (노랑, 빨강, 검정)만을 사용한 지극히 단순해 보이는 작품이지만 여기에서도 우리는 삶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작품의 영어판 뒤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짧은 서평이 들어있다. “이제 어린 아동들은 여우에 의해 쫓김을 당하고 있는 것도 모르는 암탉의 이야기를 즐길 수 있다. -팻 허친스의 유머 가득한 그림은 아주 어린 유아에게도 완벽하다.” 이 서평처럼 이 작은 그림책의 글과 그림은 어린 유아들에게도 쉽게 이해될 수 있고 재미를 주는 것이지만 평론가들이 이 작품에 주목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그림책의 글과 그림의 기호학적 관계를 설명할 때 ‘대위’(counterpointing)를 이루는 좋은 예가 되기 때문이다. 즉, 이 작품에서 글과 그림은 다른 것을 가리키고 있다. 글은 암탉 로지의 산책 경로를, 그리고 그림은 여우의 움직임을 가리킨다. 로지의 걸음과 태도는 초지일관 매우 안정되어 있는 반면, 여우의 행위는 매우 동적이고 위협적이다. 게다가 여우는 로지보다 더 크게 그려진 탓에 독자의 시선은 주인공인 암탉 로지가 아니라 여우에게 집중된다. 이러한 글, 그림의 대위법은 독자로 하여금 더 능동적인 태도로 읽기에 참여하도록 이끈다.  

가로로 약간 긴 직사각형 판형의 앞표지와 뒤표지의 그림은 연결되어 한 장면을 그리고 있다. 앞표지 오른편에는 앞만 보고 걷는 로지가, 그리고 앞표지와 뒤표지를 연결하는 책등의 좌우로는 로지를 쫓아가는 여우가 크게 그려져 있다. 그럼 이제 영어 텍스트로 본문의 글과 그림을 촘촘히 읽어보기로 하자. 각 화면의 글과 그림은 매우 일정한 패턴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한 개의 에피소드마다 번호를 붙여서 묘사하고자 한다.  

1. 햇빛이 대지를 따스하게 비추는 화창한 어느 날, 화면 왼편에서는 주둥이가 긴 여우가 닭장 밑에 숨어 혀를 날름거리면서 로지를 주시하고 있다. 오른편에는 몸통은 붉고 벼슬과 날개, 꽁지가 노란색인 로지가 닭장을 내려와 밖으로 걸어나간다. 뒤에서 여우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로지의 발걸음은 매우 안정되어 있다. 오른 발바닥은 땅을 딛고 있고, 왼발은 앞으로 나가기 위해 들려져 있다. 그리고 그 아래의 글은 “Rosie the hen went for a walk.(암탉 로지는 산책을 나갔습니다)”이다. 이 화면의 배경에는 수레와 큰 우유통과 창고가 전면에 있고 뒤에는 몇 그루의 나무가 보인다. 

2. 두 번째 화면 왼편에서는 여우가 뒷다리로 땅을 박차고 몸을 펄쩍 날리고 있고, 로지는 여전히 안정된 발걸음으로 “acroos the yard”(마당을 가로질러)가고 있다. 그런데 여우의 추락 지점에 날카로운 날이 달린 쇠스랑이 놓여 있어 웬지 불길한 느낌을 준다. 아니나 다를까, 그 다음 화면에서는 여우가 쇠스랑날을 밟는 바람에 쇠스랑 자루가 여우의 코를 강타한다. 아마도 그 소리가 로지에게도 들렸음 직한데 로지는 여전히 앞만 바라보고 안정된 자세로 걸어간다.  

3. 화면 왼편에서 여우는 또 다시 로지를 향해 몸을 날리고 있고, 로지는 여전히 태연하게 “around the pond”(연못 주위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다음 화면에서 여우는 연못 속에 코를 박고 풍덩 빠지고 만다. 연못 바위 위에 올라가서 여우를 보고 있던 개구리들이 그 충격으로 공중으로 튀어 올라가고, 오른편 나무 꼭대기 위에 앉아 로지와 여우를 보고 있던 새는 후닥닥 날아가 버린다. 역시 로지는 여우가 연못 속에 빠진 것도 모르고 앞으로 전진할 뿐이다. 

4. 그 다음 화면에서 로지는 “over the haystack”(건초더미를 넘어) 가고, 여우는 건초더미 위로 몸을 날려 로지 뒤로 다가간다. 이 장면에서는 로지와 여우 외에 세 마리의 동물들이 등장하는데, 건초더미 위에 앉은 작은 두 마리 생쥐와 풀밭 위의 말뚝에 묶여 있는 염소가 이 모습을 보고 있는 중이다. 그 다음 화면에는 여우가 건초더미 속에 파묻혀 로지를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클로즈업되어 있다. 생쥐들은 혼비백산하여 건초더미 위에서 뛰어 내려가고, 염소는 무심히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로지는 여전히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5. 이제는 화면 오른편에 로지와 여우가 모두 배치되어 있다. 왼편 장면에서는 저 멀리 로지가 지나왔던 풀밭과 염소와 건초더미가 보이고, 근거리에서는 나무 밑에서 다람쥐가 두 발로 서서 로지와 여우를 바라보고 있다. 오른편 노란색 방앗간과 풍차 날개와 도르래 그리고 도르래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밀가루 자루가 보인다. 그런데 “past the mill”(방앗간을 지나서) 씩씩하게 걸어가는 로지의 다리에 방앗간의 도르래에서 드리워진 선이 감겨 있다. 아마도 로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줄이 감긴 것 같다. 여우는 방앗간 뒤에 몸을 숨기고 로지를 노리고 있다. 그 다음 화면에서는 로지의 다리에 감겨 있던 줄이 풀리고, 밀가루 푸대가 찢어져 밀가루 가루가 여우 위에 쏟아진다.   

6. 로지가 “through the fence”(울타리의 빈 틈을 통해) 걸어나가고 있고, 여우는 로지를 향하여 울타리 위로 몸을 던지고 있다. 울타리 밖에는 농장에서 쓰는 수레가 세 대 놓여져 있는데 한 대는 비어 있고 두 대에는 옥수수 포대가 가득 차 있다. 화면 오른편에는 벌통이 세 개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다음 장에서 울타리를 넘어 로지에게 몸을 던졌던 여우는 빈 수레 위로 추락하고 로지는 여전히 당당히 걸어간다. 

7. 로지는 여전히 “under the beehives(벌통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고, 여우가 올라 탄 수레는 언덕을 굴러 내려가다 벌통을 들이받아 다섯 개의 벌통이 연쇄적으로 쓰러진다. 다음 화면에서 벌통에서 날아오른 벌떼에 쫓긴 여우가 언덕 위로 달아나고 로지는 여전히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8. 마지막 화면에서 로지는 “and got back in time for dinner.(저녁 시간에 맞추어 집에 돌아갔다.)”. 배경에는 로지의 산책길이 펼쳐져 있다. 여우가 낭패를 당했던 마당, 연못, 건초더미, 방앗간, 울타리, 수레, 벌통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제 위치로 돌아와 있다. 이 장면에서는 로지의 산책 경로가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지는 않다. 로지가 직선으로 걸어갔던 길을 한 장면에 싣고 있으니까... 결국 지금까지의 글텍스트는 “로지는 산책을 나갔어요 그리고 저녁 식사시간에 맞추어 집으로 돌아왔지요”라는 문장에 로지의 행위를 묘사하는 구절들이 삽입된 것이다. 

의인화된 동물들이 등장하여 유사한 패턴의 사건이 반복되는 매우 단순한 텍스트지만 이 작품 안에서도 문학에서 사용하는 원형(archetype)을 발견할 수 있다. ‘쫓고 쫓기다’, ‘잡아 먹고 잡아 먹히다’, 그리고 ‘원정’이다. 일반적으로 원정이라 함은 영웅이 먼 곳으로 나가 모험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뜻하지만, 이 작품에서도 로지가 집을 떠나 자신도 모르게 목숨을 건 모험을 한 셈이니 일종의 원정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에도 세상과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이 사회는 어떤 곳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의 답을 제공한다. 즉, 세상은 표면적으로는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고, 포식자가 항상 약자를 잡아먹으려 노리고 있는 곳이다. 여우는 항상 로지를 바짝 쫓고 있었고 다섯 번이나 로지를 덮치려고 했다. 그러나 로지의 깃털 하나 건드릴 수 없었고, 로지는 자신의 뒤에서 그런 소동이 일어났다는 것도 전혀 모른 채 여느 때처럼 산책을 마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즉, 이 세상은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필자도 로지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후 우리 가족은 꽤 오랫동안 부모님과 단독주택에서 살았는데, 아이들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교육환경이 더 좋은 동네로 이사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강건너 Y구에 위치한 아파트 1층에 부모님과 우리 가족이 나란히 세 들어 살게 되었다. 엘리베이터를 가운데 두고 101호와 102호, 그리고 103호와 104호 두 세대씩 나누어진 복도식 아파트였는데, 101호와 102호를 모두 소유하고 있던 집주인이 경비실 옆에 현관문을 만들고 복도에 카펫을 깔아서 독자적인 공간을 만들어 놓았었다. 그 당시 부모님들은 주중에는 지방에 내려가 계시고 주말에만 교회 출석을 위해서 올라오시므로 우리 가족에게는 그 구조가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101호에, 부모님들은 102호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 사건이 일어난 날 부모님은 지방에 내려가 계셨고, 남편은 출장을 가고 없어서 필자와 아이들만 자고 있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출근하였는데 파출 아주머니의 급한 전화를 받게 되었다. 부모님 댁에 도둑이 들었다는 것이다. 자기가 현관문을 열고 부모님 댁부터 청소하려고 들어가 보니 도둑이 들어와 옷장과 집안을 온통 뒤지고 갔다는 것이다. 황급히 집에 돌아가 보니 경찰관이 와 있었고, 도둑이 전날 밤 102호 창문을 뜯고 침입한 것 같다고 하였다. 우리 집이 아파트 1층이라 밖에서 들어오기 쉬운 구조이기는 했다. 부모님께 전화 드리니 귀중품은 없었을 것이라며 안심시키신다. 생각할수록 참으로 아찔한 시간이었다. 그 도둑들이 내처 우리 집으로 건너왔으면 어땠을까. 혹시라도 내가 옆집에 도둑이 침입했다는 것을 눈치챘었더라면 얼마나 공포스러웠을까.  

그러나 사실 우리는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온갖 위험에 노출되어 살고 있다. 나에게도 닥쳤을지 모르는 갖가지 사건 사고와 세계 각처에서의 천재지변 등... 지질학자들은 한반도 지층도 지진에 안전하지 않으며 지난 약 1000년간 휴화산인 상태로 잠자고 있는 백두산의 대폭발도 임박했음을 경고한다. 그 밖에도 사회 전반적으로 우리를 두렵게 하는 일들은 얼마나 많은가. 율리히 백이라는 학자는 1968년에 『위험사회』라는 책에서 현대 문명을 진단하며 “현대인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문명의 화산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설파한 적이 있다. 그 전의 사회가 “나는 배고프다”라는 먹고살기 위한 힘으로 움직여 왔다면 현대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은 “나는 두렵다!”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뉴스는 전쟁, 경제, 환경, 고령화, 실업, 인구 절벽 문제 등으로 차고 넘친다.  

율리히 백이 지적한 것처럼 현대인들은 위험 사회에서 두려움 속에서 살아간다. 예를 들어, 지난 3년간 우리는 COVID 19이라고 하는 전대미문의 팬데믹 앞에서 어떠했는가. 팬데믹의 두려움 앞에서 전 세계인들은 이동, 집회, 신체, 식당 출입, 심지어 예배의 자유까지 빼앗겼다. 어떤 측면에서는 스스로 그 자유를 정부 권력에 양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형교회를 비롯하여 대다수의 교회는 서둘러 예배당 문을 걸어 잠그고 예배 인원을 20명으로 제한하는가 하면, 온라인 예배 시설이 마련되지 않았던 작은 교회들은 교인들을 잃었다. 양심적인 의사와 의학자들이 그 안정성과 효과가 증명되지 않은 백신의 위험을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각국 정부들은 국민들에게 백신 접종을 서둘렀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혹은 반강제적으로 자신의 신체를 주사 바늘 앞에 내주었다. 이제 또다시 그러한 상황이 오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 기독인들은 어떻게 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그가 교회에 보내는 13개의 거의 모든 서신서에서 은혜(grace)와 긍휼(mercy)와 평강(peace)을 간구하는 인사말을 잊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앞 절에 나와 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 창조 세계를 붙들고 계신다. 물리적으로도 우리가 이 땅에 발붙여서 살고 있을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붙드심 때문이다. 이 지구는 시속 1670km의 속도로 자전하고 있다. 이는 KTX 열차의 최고속도인 305km/h보다 5.5배 빠른 속도이다. 게다가 지구는 태양 주위를 107,000km/h로 마하 2의 속도를 내는 초음속기보다 무려 44배나 빠른 속도로 돌고 있다.(1)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중력’이라는, 하나님의 자연 법칙이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 몸 안의 1조개가 넘는 세포를 모두 지으셨고 지금도 그것들이 작동하게 하신다.  또한 우리가 숨 쉬고 있는 공기 안의 원소의 배합은 얼마나 정교한가. 산소 21%, 질소 78%와 기타 원소 1% 라는 배합 덕분에 인간과 지구의 생물체는 생존하고 있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매일 “그분 안에서 살며 움직이며 존재하고“(KJV 행 17: 28) 있는 것이다.   

영적으로도 우리가 화평을 누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의 처소들에 함께 앉히셨”기 때문이다. (KJV 엡 2: 6) 여기에서의 동사의 시제는 미래형인 ‘앉히실’ 것이 아니라 ‘앉히셨다’라는 과거형이다. 우리는 이미 “하늘의 처소들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KJV 엡 1: 3)을 받은 것이다. 이 영적인 복은 세상이 주는 안락함, 성공, 부와 같은 복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직접 교제할 수 있는 복, 성령 안에서 기도할 수 있는 복,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언젠가 도래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생을 누릴 복이다. 그 믿음으로 인해 오늘도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다.   



(1) http://www.astronomer.rocks/news/articleView.html?idxno=86860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후 Eastern Michigan University 에서 석사,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어린이문학교육학회 회장 및 한국 기독교 유아교 육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아동 청소년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대학 부설 생활과 학 연구소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기독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이해>(공저), <그림책과 예술교육>(공저>, <그림책으로 보는 아동과 우리사회>(공저), <100권의 그림책>(공저) 등 그림책 관련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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