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에게 ‘좋은 이혼’이 있을까

2023-02-25
조회수 1552


자녀에게 ‘좋은 이혼’이 있을까  



아동권리를 부르짖는 요즘이지만 과연 아동에게 가장 중요한 권리는 무엇일까? 그 답은 ‘친아버지와 친어머니와 같이 살 권리’가 아닐까. 즉 전통적인 가정에서 아이들은 가장 행복할 수 있으며 가장 잘 성장한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국가가 인정하는 것이다. 유엔은 전례 없이 많은 국가(196개국)가 비준한 ‘아동권리협약(The Convention on the Rights of the Child)’(1989)의 제 7조에서 아동이 “부모를 알고 부모에 의하여 양육받을 권리”가 있음을 명기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재난, 질병, 기근, 전쟁 등으로 부모가 일찍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의붓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편부모와 같이 사는 아이들이 흔했다. 『백설공주』, 『신데렐라』, 『헨젤과 그레텔』, 『론포포』, 『콩쥐 팥쥐』, 『해와 달이 된 오누이』와 같은 동서양의 옛이야기에서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부모의 사망 때문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깨어진 가정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 너무 많다. 그러한 가정에서 아이들은 부모의 필요에 따라 삶의 거처를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 하는 존재다. 서양에서는 부모의 잦은 이혼으로 인하여 친부모나 친형제와 분리되어 타인과 함께 한 가정에서 살아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국내 미디어에서 비추어지는 아동의 모습도 점점 더 그들을 닮아가고 있는 것 같다. 이혼과 재혼 관련 리얼리티쇼에서의 관심의 초점은 결혼에 실패한 성인 남녀의 행복 추구권이지, 그들이 양육하고 있는 자녀가 아니다. 그들의 자녀는 부모가 찾는 새 파트너와의 로맨틱한 만남에 끼어든 걸림돌이며, 그들 사이에 잘라 붙여지는 사물처럼 취급된다.

통계적으로도 우리 사회에서 이혼은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다. 통계청 보고에 따르면 21년도 이혼은 10만 2천건이었으며, 혼인 지속 기간별 이혼 구성비는 혼인 4년 이하가 18.8%로 가장 높았다. 자녀 유무로 구분하였을 때 이혼가정 중에서 미성년 자녀가 있는 부부의 이혼 비중은 40.5%이며, 반면 미성년 자녀가 없는 이혼 부부의 구성비는 56.9%다. 이는 매년 미성년 자녀가 있는 가정 약 4만 개가 이혼으로 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가 전공하고 있는 어린이문학에서도 그러한 변화는 일찍부터 감지되고 있었다. 유아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도서인 그림책에서도 전통적인 가족이 등장하는 작품은 점차 찾기 힘들어지고 있다. 영미권의 경우 1960년대 이전에는 자녀와 부모, 혹은 조부모와 3대가 같이 사는 가정의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최근에는 어느 한쪽 부모만 등장한다거나 부모가 등장하더라도 그 관계가 소원하거나 갈등하는 식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번역 그림책 중에는 이혼 부모, 재혼 부모, 심지어 동성애 부모와 함께 사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전통적인 가족의 가치를 언급하는 사람들은 시대에 뒤처진 시대착오적이라거나 ‘편견이 심한 사람’으로 비춰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아동인권가인 파우스트(Faust)와 매닝( Manning)은 『아이들은 정말 괜찮을까. 현대적 가정에서...』(2021)에서 전통적인 가정의 가치를 강력하게 옹호한다. 저자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축적된 통계와 과학적 자료를 토대로 생물학적인 친부모가 자녀에게 가장 좋은 가정을 제공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부모의 이혼을 비롯하여 그동안 그들이 원하지 않은 방식으로 부모를 잃는 자녀들에 관한 연구가 계속 진행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그들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묻혀 있었다. 가장 큰 원인은 성인이 된 그들이 자신의 과거를 드러냈을 때 받을 불이익과 주변 사람들에게 미칠 파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그들이 『thembeforeus.com』과 같은 인터넷 공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세상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부모의 이혼을 경험한 아이들 뿐 아이라 동성 부모에게 입양된 아이들, 대리모로 혹은 정자 기증(매매)으로 인해 출생한 아이들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은 그들의 고통스러웠던 어린 시절과 성인기까지 지속되는 정체성 혼란의 끔찍한 결과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공적으로 크게 소리내어 말하지 않았던 진실, 즉 생물학적인 부모가 자녀에게 가장 좋은 가정을 제공할 수 있음을 확인시킨다.

많은 가정이 이혼으로 깨어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혼 가정 자녀들의 아픔과 고통은 경감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야기가 작품에서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있는지 여부를 평가하는 일은 그림책 비평가의 사회적 책무의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아이들은 이혼의 과정에서 어떠한 결정권도 없는 약자이므로 평론가들은 성인이 쓰고 그린 그림책이 아이들의 목소리를 얼마나 잘 대변하고 있는지를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혼을 그린 그림책 두 편을 비교해 보려고 한다.

국내에서 부모의 이혼과 관련하여 가장 널리 읽히는 작품은 영국 작가, 배빗 콜(Babette Cole)(1949-2017) 글, 그림의 『따로 따로 행복하게』(Two of Everything)라고 할 수 있다. 이 작가는 영국을 대표하는 아동문학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평가받고 있으며 영국의 대표적인 아동도서상인 케이트 그린어웨이 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비평가들은 그가 출산, 이혼, 성역할, 죽음 등 그동안 그림책에서 다루지 않았던 무거운 주제를 특유의 유머 감각을 발휘하여 어린이 독자의 수준에 맞게 다룬다고 평론한다. 아기의 탄생을 그린 『엄마가 알을 낳았대』와 함께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이 작품은 이혼으로 인해 겪는 자녀의 죄책감을 덜어주고 이혼에 대한 편견을 깨트릴 수 있다고 호평받고 있으며, 교육현장에서는 소위 ‘반편견’ 그림책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3인칭 서술로 쓰여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남매다. 본문 첫 화면의 그림은 이 가족의 초상(肖像)이다. “드미트리어스와 폴라는 아주 아주 귀여운 아이들이에요. ... 두 아이의 엄마 아빠는 서로 눈곱만큼도 마음이 맞지 않았답니다.” 화면 왼편에는 남매가 발랄하고 천진난만한 얼굴로 나란히 앞을 보고 있고, 우편에는 성장(盛裝)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눈을 감고 있다. 그 후  펼쳐지는 그림과 이야기는 부모들이 사사건건 다투고 있는 모습이다. 서로 미워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보니 엄마 아빠의 얼굴도 점점 더 보기 싫게 변하고 만다. 그것도 모자라 부모들은 서로에게 못된 짓을 하게 되고 급기야 복수에 복수를 거듭하면서 집안은 점점 더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남매는 자신들이 부모 갈등의 원인이 아닐까 걱정한다. 남매는 부모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아이들은 모이라고 알림판에 글을 올리고, 구름같이 몰려든 아이들은 부모의 싸움이 자신들 잘못은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남매는 목사님에게 부모의 ‘끝혼식’ 주례를 맡아 달라고 부탁하고 부모들도 기뻐한다. 모두들 ‘끝혼식’을 기쁘게 치룬 후, 부모들은 각자 따로 ‘끝혼 여행’을 떠나고 그 동안 아이들은 살던 집을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집을 두 채 짓는다. 마지막 장면은 “이렇게 두 집에서 살게 되니까, 뭐든지 두 배가 되었답니다. 물론 부모님도 두 분이죠, 엄마랑 아빠는 지금 아주 아주 행복하세요. 앞으로도 오래오래 행복하실 거고요. 엄마 따로 아빠 따로, 따로따로요! ...”라는 글과 함께 남매 역시 양쪽 집에서 매우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얼마나 사실적(realistic)일까? 문학에서 사실주의(realism)란 표현적 혹은 묘사적 사실주의와 내용적 사실주의를 포함한다.(1) 표현적 사실주의란 글로 표현된 실재가 얼마나 현실에서 있음직한 것인가를 가리키며, 내용적 사실주의란 내용이 역시 능히 있을 법한 일인가를 말한다. 문학작품은 이 둘 다를 갖출 수 있고, 한 가지만을 표현할 수 있고, 혹은 둘 다 부족할 수 있다. 그러나 내용적인 사실주의를 갖춘 작품만이 삶의 본질과 진실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이 작품의 경우 글과 그림의 표현은 매우 과장되어 있고 판타지에 가까우므로 표현적 사실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내용적으로는 얼마나 그럴 듯할까? 다시 말해, 부모의 이혼을 주도한다는 도발적인 아이디어는 차치하고라도, 자녀들이 부모의 이혼 전보다 이후에 더 만족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다음 작품은 독일 작가인 네레 마어(1938-)가 글을 쓰고 베레나 빌하우스(1951-)가 그림을 그린 『아빠는 지금 하인리히 거리에 산다』이다. 네레 마어는 언어학과 심리학을 공부하고 심리학 학위를 받은 후 가족 심리 치료사, 어린이책 번역일을 하였다. 베레나 발하우스는 무대 미술 일을 하였으며 80년대 중반부터 어린이책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였다. 1989년 독일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그림책치고는 글이 다소 길며 그림은 사실적으로 그려졌다.

첫 장면에서는 주인공 아이 베른트와 그의 인형 보보와 도도가 소개된다. 베른트는 부모 몰래 보보와 도도를 가지고 인형놀이를 한다. 소꼽놀이에서 보보는 남편이고 도도는 주부이다. 퇴근한 보보와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친 그들은 설거지하고 노래를 부르는 부부이다. 한 때 베른트의 엄마 아빠도 그러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그들의 관계가 소원해지더니 엄마는 TV에만 눈을 주고, 아빠와 따로 자기 시작한다. 어느 일요일 베른트가 안방으로 들어가니 엄마 자리가 비어 있었다. 베른트가 아빠에게 “어제 내가 내 방 청소를 하지 않아서 엄마가 나간 거예요?”라고 묻자 아빠는 베른트 탓이 아니라고 안심시킨다. 점차 엄마와 아빠는 집안에서 하루 종일 서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얼굴을 돌린 채 각자 다른 일을 하며 지내는 날이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베른트의 인형 보보와 도도는 격렬하게 싸운다. 어느 날 아빠가 짐을 꾸리고 집을 나가면서 베른트에게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엄마가 혼자 있고 싶어 해서 헤어지기로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둘이 헤어지는 것은 네 탓이 아니라 아빠 문제이며 너는 언제까지나 내 아들이고, 나는 언제까지나 네 아빠라고 안심시킨다.

며칠 후 아빠가 남은 가구를 가져가느라 들어와서 책상 밑에 숨어 있는 베른트를 발견하고는 하인리히 거리에 있는 아빠 집에 가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베른트는 엄마와 함께 있겠다며 그 요청을 거절한다. 그 이후부터 엄마와 같이 자기 시작한 베른트는 어느 날엔 악몽을 꾸며 울고, 우는 베른트를 엄마가 위로하며 같이 운다. 그 후부터 베른트는 아빠 집에 가서 식사도 같이 하고 카드놀이도 한다. 어느 날 베른트가 용기를 내어 아빠에게 언제 집에 올거냐고 묻자 아빠는 “베른트, 네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게 있단다. 우리 셋은 이제 다시 함께 살지 못할거야. 지금은 여기가 내 집이야. 너의 두 번째 집이기도 하고”라고 말한다. 그 후부터 베른트는 엄마와 아빠 집을 왕래하는 일에 점차 익숙해져 간다. 아빠는 자신의 작은 집에 베른트를 위한 침대를 마련해 주고, 베른트와 엄마는 토요일에 조부모님댁이나 동물원을 가기도 하고 영화 관람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베른트는 슬프다. 베른트의 마음을 작가는 이렇게 표현한다. “베른트는 아빠를 사랑해요. 그리고 엄마도 사랑해요. 그런데 왜 아빠 엄마는 서로 사랑하지 않을까요?” 베른트는 아빠가 방문을 열고 “베른트 어서 나와. 밥먹자”하고 말하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빠는 지금 하인리히 거리에 살고 있다. 베른트는 다음에 아빠한테 갈 때는 도도를 아빠 집에 갖다 놔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도도도 보보도 자신의 침대에 있는 거니까.

이 작품은 글, 그림 모두 3인칭 관찰자 시점을 사용하여 부모의 이혼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있으며, 베른트의 인형 놀이는 그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투영하고 있다. 베른트는 한때 자신에게 안정감과 행복을 제공했던 가정이 금이 가고 깨어져 분리되는 과정을 고통스럽게 바라볼 뿐이다. 결국, 엄마의 집과 아빠의 새집을 오가면서 살게 된 베른트는 분노와 고통과 슬픔을 보듬어 안고 주어진 현실에 적응해 나가려고 노력한다.

허구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베른트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대다수의 이혼 가정의 아이들처럼 베른트도 자라나면서 잃어버린 부모와 자신의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릴 것이다. 만약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면 자신을 길러준 부모에게 불만족한 것으로 비춰질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TV의 리얼리티쇼가 보여주듯, 미성년 자녀를 두고도 이혼을 결단한 성인들은  그들의 커밍아웃에 대해 칭찬을 받고 그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Them Before Us 웹사이트(thembeforeus.com)상의 이야기들은 40대, 50대, 60대 그 이상의 사람들이 쓴 글이 대부분이다. 그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 모두 어린 시절 성인들에게 맞추기 위해 희생을 강요당했다는 것이다. 파우스트와 매닝이 주장하듯 이것은 매우 비도덕적인 일이다. 아직 발달적으로 미숙하고 힘없는 아이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면 안된다. 자신들은 자녀를 사랑하지만 더 이상 서로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상투적인 언술로 아이들의 이해를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아이들은 성인들의 자아실현을 위한 단순한 부속품이 아니다. 자신들이 생명을 주었으며, 앞으로 자신들보다 더 오랜 시간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자녀에게 그 무거운 짐을 지워서는 안된다. 자녀를 진정 사랑한다면 부모들이 그 짐을 져야 한다.

이 책이 지금 우리 사회에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시사점으로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반복적인 가정폭력이나 배우자의 외도 등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자녀에게 부모의 ‘좋은 이혼’은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친아버지의 역할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다. 자녀 양육에 있어서 어머니의 역할은 칭송받지만, 아버지의 부재는 종종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미국의 통계이기는 하지만, 사회 문제의 절대 다수는 아버지의 부재에 기인한다고 한다. 노숙자 문제, 인신매매, 높은 범죄율, 자살, 10대 임신, 고등학교 중퇴 등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의 70~80%는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서 자라났다.(2)  아버지는 아동에게 생명을 준 두 명 중 한 명일 뿐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어머니가 대신할 수 없는 역할을 수행한다. 아버지가 떠나게 되면 가정의 안정성 역시 그 아버지와 함께 떠나게 된다. 저자들은 결혼에 관한 국가 연구(National Marriage Project)의 공동 창립자인 데이빗 포페노의 말을 아래와 같이 인용한다.

우리는 “아빠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다.”는 대중적인 생각...을 부인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엄마가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다.”는 생각 역시 거부해야 한다. 이 두 성별은 완전히 다르지만 각각은 인간을 최적으로 발달시키기 위해 문화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반드시 필요하다.(3)



(1) C.S. Lewis (1967/2017). 『오독』 홍성사.
(2) 같은 책. p. 54.
3) 같은 책. p. 128.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후 Eastern Michigan University 에서 석사,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어린이문학교육학회 회장 및 한국 기독교 유아교 육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아동 청소년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대학 부설 생활과 학 연구소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기독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이해>(공저), <그림책과 예술교육>(공저>, <그림책으로 보는 아동과 우리사회>(공저), <100권의 그림책>(공저) 등 그림책 관련 저서가 있다.

19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