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인형들이 들려주는 창조 이야기 윌리암 스타이그의 『노랑이와 분홍이』

202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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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인형들이 들려주는 창조 이야기 
윌리암 스타이그의 『노랑이와 분홍이』



내가 그림책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보편 진리를 간명하게 전달하는 그 힘 때문이다. 이 점에서 윌리암 스타이그(1907-2003)는 단연 독보적인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시사 만화가의 경력을 쌓고 있던 그는 이순(耳順)이 넘은 60세에 그림책 창작에 입문하였다. 풍부한 삶의 경험 때문인지 그의 작품은 가족애, 사랑, 우정, 용서, 성실, 인내, 의로움, 충성됨과 같은 덕목과 더불어 삶과 죽음에 대한 인간 존재론적 주제까지 담고 있다. 진지한 철학적 사유를 요구하는 이러한 주제들은 위대한 이야기꾼(great storyteller)라는 그의 별명에 걸맞게 의인화된 동식물과 사물이 등장하는 코믹한 만화풍의 그림과 유머러스한 글에 녹아 들어가 통찰과 감동을 선사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노랑이와 분홍이』(Yellow & Pink)(1984/2005)를 소개해 볼까 한다.

표지에는 『노랑이와 분홍이』라는 제목 아래에 두 개의 나무 인형이 풀밭에 서서 위를 바라보고 있다. 왼편에는 몸과 모자가 노란색으로 칠해진 홀쭉하고 콧수염이 난 나무 인형이 오른 손을 턱밑에 대고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 서있고, 오른편에는 역시 몸과 모자가 분홍색인 통통한 나무 인형이 두 팔을 내려뜨리고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들 뒤에는 큰 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그보다 더 멀리 양옆으로는 나무들이 두세 그루씩 서 있다. 그들이 발을 딛고 서 있는 곳은 풀이 듬성듬성 나 있는 풀밭이다. 면지는 노랑이와 같은 샛노란 색지이며 그 다음 장에는 한가롭게 모이를 쪼아먹고 있는 두 마리 닭들과 날아가는 새 아래에 노란색 나무다리와 분홍색 나무다리가 나란히 놓여 있다. 한 장 더 넘겨 두 번째 표제지에는 그 다리들의 주인인 노랑이와 분홍이가 풀밭에 엎드려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이 장면에서도 노랑이는 왼팔을 턱에 괴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서사에서 사용된 3인칭 화법과 시점은 독자들로 하여금 두 인형들의 모습과 대화를 거리를 두어 보게 하는 효과를 낳는다. 본문의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어느 날, 작은 나무 인형 둘이 오래된 신문지 위에 누워서 햇볕을 쬐고 있었어. 땅달막하고 뚱뚱한 인형은 분홍이고, 길쭉하고 호리호리한 인형은 노랑이었어. 그날은 덥고 조용했지. 둘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그 다음 장에서 노랑이가 일어나 앉아 손을 턱에 괴고는 옆에 누워있는 분홍이를 쳐다보며 묻는다. “우리 아는 사이니?”(Do I know you?). 그러자 분홍이가 “아닌 거 같은데”라고 답하고는 자신도 몸을 일으켜 앉아 노랑이와 시선을 맞춘다. 그러자 노랑이가 분홍이에게 자신들이 뭘하고 있는 건지 혹시 아느냐고 묻자 분홍이가 자신도 왜 여기에 있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답한다. 

그 후 그들의 대화는 왜 자신들이 그곳에 있는가라는 주제로 이어진다. 그들 주위에서는 닭들이 바쁘게 모이를 쪼고 있고 저 멀리 젖소들이 조용히 모여 있다. 노랑이가 분홍이에게 어떻게 우리가 여기에 있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다고 하며 우리가 누구냐고 묻자 분홍이는 노랑이를 훑어보고 그의 모습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면서 누군가 자신들을 만들었을 것[1]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노랑이는 자신들처럼 복잡하고 완벽한 것을 누가 만들 수 있겠느냐며 분홍이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연이어 누가 자기들을 만든 건지 어떻게 자기들이 모를 수 있겠느냐, 그리고 만약 누가 자기들을 만들었다면 설명도 없이 왜 그냥 내버려 두었겠느냐며 자신들은 그냥 우연히 생겨난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러자 분홍이는 자기가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어서 배를 잡고 마구 웃기 시작하면서 자신들같이 움직이고 숨쉬고, 걷는 정교한 존재들이 어떻게 그냥 만들어지겠느냐, 그건 터무니 없다(preposterous)고 반박한다. 

노랑이는 분홍이에게 웃지 말고 생각해 보라고 하면서 진지한 얼굴로 천년이나 백만 년, 아마 이백오십만 년 정도의 충분한 시간이면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자 분홍이도 태도를 바꾸어 진지하게 그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며 우리가 어떻게 그냥 생겨날 수가 있는지 그 과정을 설명해보라고 요구한다. 그러자 노랑이는 앞으로 걸어가며 돌멩이를 옆으로 걷어차고는 조금 자신 없는 어조로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그의 설명은 상상 주머니 안에서 전개된다. 나무에서 나뭇가지 하나가 부러져서 마침 그 아래 있던 날카로운 바위 위로 떨어졌는데 그 한쪽 끝이 쪼개져서 다리가 생겼다. 그리고 겨울이 되어 그 나무 조각이 얼어버렸는데 얼음 때문에 입이 벌어졌고, 나무 조각이 태풍에 날려서 부딪치고, 깨지고, 스치고 하면서 모양이 잡혔다, 또 바람에 날리는 모래 때문에 나무껍질이 매끄러워졌을 거다, 오랫동안 언덕 아래 내팽개쳐져 있었던 그 나무 조각에 어느 날 번개가 쳐서 팔과 손가락과 발가락이 만들어졌을 거다, 등. 

그 설명을 듣고 있던 분홍이가 그럼 눈이랑 귀랑 콧구멍은 어떻게 생긴 거냐고 묻자 노랑이는 돌 위에 걸터앉아서 생각하더니 더욱 자신 없는 어조로 눈은 벌레 혹은 딱따구리, 아니면 우박 때문에 생겨났을지 모른다고 답한다. 분홍이가 서서 뒷짐을 쥐고 단호한 태도로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딱따구리가 만든 구멍으로 보고 들을 수 있는 거냐고 묻자, 노랑이는 이번에는 분홍이를 보지 않고 “이 멍텅구리야. 그러라고 눈이랑 귀가 있는 거지. 그거 말고 또 뭘 할 수 있겠어? 저기 있는 젖소들은 큰 눈으로 보고, 여기 개미들은 쪼그만 눈으로 본다고, 그리고 우리는 이 구멍으로 보는 거야.”라고 답한다. 노랑이의 비논리적인 순환논법(循環論法)[2]에 분홍이가 “알았어. 우선은 네 말이 옳다고 치자.”라고 하더니 노랑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반문하기 시작한다. 그런 이상한 일들이 어떻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일어나서 우리 둘이 생겼느냐, 나뭇가지가 떨어져서 바위에 부딪히고,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번개에 맞고 딱따구리가 쪼아서 구멍이 뚫리는 일들이 어떻게 우리 둘에게 똑같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노랑이는 이번에는 바위에 한쪽 다리를 올리고 두 팔을 무릎에 괴고 땅을 바라보며 백만년 정도의 긴 시간이면 똑같은 일이 두 번도 넘게 일어날 수 있다고 답한다.

분홍이가 이번엔 “하지만 너랑 나는 왜 이렇게 다르지?”라고 묻자 노랑이는 분홍이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자신이 말하려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소리치며 “이건 모두 우연이야. 너랑 나는 아마 다른 종류의 나무일거다. 너는 어쩌면 부드럽고 무딘 언덕 위로 굴러 떨어졌는지 모른다” 고 소리친다. 분홍이는 노랑이를 흥미로운 눈길로 쳐다보면서 그럼, 왜 우리는 이렇게 칠이 된 거야? 라고 묻자 노랑이는 자리에서 몇 바퀴나 빙글빙글 돌면서 더 자신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색은 자신들이 언덕을 구를 때, 아니면 누군가 쏟아놓은 물감 위를 굴러서 입혀진 것이라고 말꼬리를 흐린다. 분홍이가 그럼 어떻게 너의 단추 세 개는 검은 색으로, 내 단추 세 개는 하얀 물감으로 말끔하게 색칠이 되었느냐고 집요하게 반문하자 노랑이는 잠시 조용하더니 나무 둥치에 기대어 머리를 긁적이며 “나는 모든 질문에 대답할 수 없어. 어떤 것들은 비밀로 남아 있어야만 할 거야. 어쩌면 영원히 말이야.”라고 말꼬리를 흐린다. 바로 그때 머리가 텁수룩한 아저씨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풀밭을 가로질러 걸어오더니 분홍이와 노랑이를 집어서 이리저리 훑어보고는 “잘 말랐군.”이라고 하고는 둘을 겨드랑이에 끼우고 오던 길로 돌아간다. 노랑이가 분홍이에게 “이 사람 누구야?”라고 묻지만 분홍이도 누군지 알 수 없었다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그는 누구일까? 이제는 독자가 답을 할 차례이다. 

작은 나무 인형들은 지금 인간의 ‘기원’을 다루고 있는 중이다. 노랑이는 진화론을, 분홍이는 창조론을 대변하고 있다. 노랑이의 설명은 진화론적 사유의 핵심 내용을 담고 있다. 자신들이 우연하게 만들어졌으며 그 일이 가능하기 위해 아주 긴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분홍이는 창조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지만 “분명히 누군가 우리를 만들었을거야”라는 단순명료한 답을 통해 창조론을 지지하고 있는 입장임을 드러낸다. 이 우주와 인간의 기원에 대한 설명은 진화론이 아니면 창조론, 둘 중의 하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화론자들은 창조론을 믿는 사람들은 신화를 믿는 비이성적인 사람이라고 폄하하면서 자신들야말로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두 인형들의 대화는 창조론이 아니라 진화론이 터무니없는 가설임을 드러낸다. 관절이 몇 개 밖에 되지 않는 나무 인형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우연히 만들어질 수 있겠는가? 노랑이처럼 무엇인가가 우연히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얼마나 비논리적인지는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다. 미국 사우스 다코타주에는 미국 대통령 네 명(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아브라함 링컨, 테어도어 루스벨트)의 얼굴이 새겨진 러시모어산이 있다. 단단한 화강암에 얼굴 높이가 18미터에 이르는 이 조각의 기원에 대해서는 세 가지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첫 번째는 우연히 만들어졌다, 두 번째는 자연 현상(비, 바람, 눈 등의 풍화과정)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세 번째는 누군가 그것을 계획하고 조각하였을 것이다. 이 중에서 첫 번째나 두 번째가 맞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미친 사람이 아니면 바보로 여겨질 것이다. 더 나아가 밤 하늘에 떠 있는 그 수많은 별들의 기원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호주 국립대학의 천문학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망원경을 사용하여 별의 총수가 7조 곱하기 1백억개에 달한다고 밝혔다. 이 숫자는 세계의 모든 해변과 사막에 있는 모래 알갱이의 수보다 10배나 많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역시 현대의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범위 내의 별의 총수이므로 별의 실제 수는 무한대일 수 있다고 한다.[3] 그러면 이 별들의 생성과 한치 오차없는 질서있는 운행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우주가 어떤 한 점에서부터 탄생한 후 지금까지 팽창하여 오늘의 우주에 이르렀다는 빅뱅 이론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면 그 최초의 한 점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4] 

진화론에서는 인간의 기원이 단세포 동물인 아메바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한다. 그 아메바가 그들이 창안한 진화의 법칙에 의해 원숭이로, 유인원으로, 그리고 사람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긴 시간이라 할지라도 아메바가 원숭이로, 원숭이가 유인원으로, 그리고 인간으로 진화했다는 설명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최초의 아메바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그리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원숭이는 왜 아직 사람으로 진화하지 않고 원숭이 그대로 남아 있는가?

서구에서도 1850년대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믿고 있었다. 1700년대에 이신론[5]이 등장했지만 이신론자들 역시 하나님이 창조주임은 믿었다. 그런데 다윈의 진화론은 하나님을 인간의 삶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 있는 매우 좋은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1859년에 출판된 다윈의 『종의 기원』은 총 여섯 번에 걸쳐 개정되었으며 ‘진화’(evolution)이라는 단어는 6판에서 단 한 번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는 다윈이 생명이 특정한 목적과 방향성을 가지고 발전된다는 의미의 ‘진화’라는 단어보다 ‘변이를 동반한 유전’이라는 표현을 선호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정작 다윈 자신은 이 진화론의 허점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의 이론에 열광하였다. 그 당시는 과학 기술과 산업혁명의 결과로 인간이 과거 수천 년동안 누려보지 못했던 풍요를 경험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에 힘입어 이 세상이 신 없이 시작되었고 신 없이도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낙관론이 팽배하게 되었다.[6] 시간이 흐르자 진화론은 생물학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학, 심리학, 경제학, 교육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문의 기초 이론이 되었다. 진화론은 기독교의 창조론에 대항하여 인간과 동물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시작하였으나 점차 인간의 총체적인 삶을 지배하는 세계관이 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매우 분명하게 우리 인간이 이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 하나님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분명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그분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격은 세상의 창조 이후로 분명히 보이며 만들어진 것들에 의해 이해될 수 있으므로 그들이 변명할 수 없느니라.”(KJV 롬 1:19-20). 하늘을 나는 날짐승, 땅에서 자라는 동식물, 그리고 바다와 강과 호수에서 서식하는 동식물 등 어느 하나도 아름답고 신비롭고 위대하지 않은 것이 없다. 수족관에서 노니는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을 보면 그 다양한 색채와 형태에 감탄하게 된다. 예수님은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그가 입은 것이 들꽃 하나만 못하다(마 6: 28-29)고 하셨다. 이렇듯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신 창조세계를 통해 모든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고 계시므로 누구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아마존 정글에 사는 원시인이나 고대인이나 조선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 모두 하나님의 존재를 몰랐다는 변명을 할 수 없다. 다윗은 일반계시를 이렇게 노래하였다.


“하늘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고 궁창이 그분의 손으로 행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보이니 
그것들의 음성이 들리지 않은 말이나 언어가 없도다. 
그것들의 줄이 온 땅에 두루 나갔고 그것들의 말들이 세상 끝까지 나갔도다. 그분께서 해를 위해 그것들 안에 장막을 세우셨으므로 

해는 자기 침소에서 나오는 신랑같고 경주하기를 기뻐하는 힘센 자 같도다. 

해가 하늘 끝에서부터 나아가며 그것의 순환 회로는 하늘 끝들까지 이르나니 해의 열기에서 숨을 것이 없도다.”(KJV 시편 19:1-6)

다시 노랑이와 분홍이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표지에서부터 노랑이는 사색을 즐기며, 분홍이는 직관적인 타입의 캐릭터로 그려진다. 신문지 위에 누워있던 그들 중에 철학적인 문제를 먼저 제기한 인물도 노랑이였다. 그는 “우리 아는 사이니?” “우리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건지 혹시 아니?”, “우리는 누구지?”라고 묻는다. 그것에 대한 분홍이의 반응은 누군가 우리를 만들었을 거라는, 짧고 직관적인 답이다. 그러나 노랑이는 자신들같이 정교한 존재는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라는 가설을 내세운다. 그런데 그 근거가 논리와 증거가 아닌, 상상력의 산물임은 아이러니하다.  

노랑이처럼 사람들이 ‘우연‘이라는 터무니 없는 가설에 끌리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죄성(sinful nature), 즉 타락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자리에 ’우연‘을 대신하고 이 세상과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제거하기를 꾀하는 교만이라는 죄성 때문이다. 교만은 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선악과를 따먹은 순간(창 3: 5-7)에 인간의 마음속에 스며들었고 아담의 후손인 인류의 마음에 전가(傳家)되었다(롬 5:12). 두 번째로는 진화론자들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거짓 증거를 날조하여 사람들을 세뇌시킨 결과라고 볼 수 있다[7]. 지금 시중의 과학서적이나 교과서들은 대부분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된 자료들(동물의 화석이나 지층 등)을 들어 진화론을 사실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각 개인이 진지하게 그 문제를 생각해 볼 여유가 없어서라는 이유도 있을 것 같다. 지금 우리는 차고 넘치는 정보의 바다 속에서 살고 있으며 노력하지 않아도 필요한 정보를 아주 빠르고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만큼 똑똑해 졌을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저자 니콜라스 카는 사람들이 인터넷 세상에서 링크와 하이퍼텍스트로 이어진 정보를 따라가느라 점차 사고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사유하는 힘과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미디어를 떠나 사색하는 시간을 마련하라고 조언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노랑이와 분홍이처럼 너른 풀밭에 앉아 생각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질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여기 있게 된 걸까?” “우리는 누굴까?” 라는 문제를 놓고 깊이 사유할 수 있게 될까? 그러나 정작 이 문제를 제기했던 노랑이는 누군가 자신들을 만들었을 거라는 분홍이의 단순 명확한 답을 거부하고 끝까지 ‘우연’이라는 자신의 생각에 집착한다. 결국 딜레마에 빠진 노랑이는 “어떤 것들은 영원히 모르고 남아 있을거야”라고 하며 인식론적 회의주의를 택하고 만다. 그의 태도는 창조주를 인정하느냐의 여부는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역시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드러낸다. 노랑이라는 캐릭터는 “그들이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으로서 그분이 받으실 영광을 그분께 돌리지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아니하며 오히려 자기들의 상상(imagination) 속에서 허망해졌고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이 어두워”(KJV 롬 1: 21)진 인간 마음의 기막힌 은유가 아닐 수 없다.

노랑이와 분홍이의 긴 논쟁은 털보 아저씨의 등장으로 인해 아주 간단히 마무리된다.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와 인형들의 마무리 상태를 확인하고 옆구리에 끼워 만족스럽게 걸어가는 털보 아저씨는 윌리엄 스타이그, 그 자신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1]  원어로는 “Someone must have made us” 즉, “누군가 우리를 만들었음이 분명해” 혹은 “틀림없이 누군가 우리를 만들었을거야.”로 번역할 수 있다.
[2] 추론자가 논증할 명제를 논증의 근거로 하는 시작하는 논리적 오류
[3] https://smartbooks1.tistory.com/1523
[4] https://astro.kasi.re.kr/learning/pageView/6381
[5] Sire, J.(1988/1995).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 사상』 3장
[6] 정소연, 이연임(2020). 『생각의 기원』 p.29.
[7] Wile, J. L. (2001/2009). 『이성적 믿음』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후 Eastern Michigan University 에서 석사,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어린이문학교육학회 회장 및 한국 기독교 유아교 육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아동 청소년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대학 부설 생활과 학 연구소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기독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이해>(공저), <그림책과 예술교육>(공저>, <그림책으로 보는 아동과 우리사회>(공저), <100권의 그림책>(공저) 등 그림책 관련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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