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의 세계관
따뜻함 안에 숨은 함정 『뒤로 뒤로 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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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영2025-01-14 12:05
“그림책의 메시지와 세계관은 어린이의 마음에 은연중에 스며들어간다” 라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사실 어른도 마찬가지인데.. 써주신 평론을 읽으면서 문화 다원주의의 영향이 저에게 뿌리깊게 박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지 그런 방법이 아니더라도, 또 달리기라는 경기의 규칙을 위반하지 않더라도 배려와 사랑을 가르쳐줄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텐데.... 기존의 규칙을 깨서라도 쟁취하고자 하는 것 그것이 전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목표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이 작가가 어떤 구체적인 사상과 목적을 가지고 쓴 것이 아니라 그냥 자신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표현한 것일 수 있다는 점이 었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들어와 있는 문화 다원주의. 전복의 사상. 공정함보다 규칙보다 더 중요한 가치라고 사람들을 심겨져버린 배려와 포용... 이런 생각들이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크게 자리를 잡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이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그림책이기 때문에 표현방법이나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쓰여진 것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긴 했었는데 세계관의 관점에서는 더 많은 것들을 관찰하고 주의하며 평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고 중요한 것들을 배울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이 작가가 어떤 구체적인 사상과 목적을 가지고 쓴 것이 아니라 그냥 자신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표현한 것일 수 있다는 점이 었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들어와 있는 문화 다원주의. 전복의 사상. 공정함보다 규칙보다 더 중요한 가치라고 사람들을 심겨져버린 배려와 포용... 이런 생각들이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크게 자리를 잡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이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그림책이기 때문에 표현방법이나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쓰여진 것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긴 했었는데 세계관의 관점에서는 더 많은 것들을 관찰하고 주의하며 평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고 중요한 것들을 배울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김민혜2025-01-14 16:19
저는 이 그림책 작가의 의도가 달리기 시합이라는 경쟁 상황에서 친구를 위해 1등을 양보하고, 서로 협력하고, 함께 하는 우정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면,
그 의도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다른 상황을 만들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달리기라는 경기 안에서 나무늘보와 여우와 토끼와 타조는 서로 다른 능력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같은 출발선에서 같이 출발한 동물들이 한 가지의 기준으로만 평가받는다면 당연히 1등, 2등, 3등이 세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경기와 놀이는 다릅니다. 양보와 배려로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경험하는 것은 경기를 통해서가 아닌 놀이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어린이들에게 놀이의 경험이 많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술래잡기, 경찰과 도둑,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같이 달리기의 능력이 필요하지만, 1등2등3등을 세울 필요는 없는 놀이에서는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고 협력하며 우정을 보여줄 수 있지만,
달리기 시합, 달리기 경주, 달리기 경기는 다른 상황입니다.
요즘 시대를 무한경쟁 시대라고 하지요. 요즘 시대에 어린이들조차 여러가지 경쟁을 통해 등수가 매겨지고 서로 경쟁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작가는 어린이들에게 능력이 부족한 친구를 배려하고 1등을 양보함으로써 모두가 웃는 훈훈한 결말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그림책의 이야기는 경쟁에 내몰린 어린이들에게 경쟁하지 않고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며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갖는 해피앤딩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나,
친구의 양보와 배려로 등수를 바꿔준다고 해서 경쟁에 놓였던 나무늘보의 능력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1등을 해보고 싶다는 소원은 이루어졌을지 모르나, 1등이라는 의미가 사라진 이름만 1등이 되어버립니다.
우리가 어린이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은 양보와 배려로 결과를 바꿔치기 해주는 것이 아니라
경쟁은 공평한 기준과 평가가 있어야 함과, 지더라도 정해진 룰을 지키며 정직하게 싸워야 함이 아닐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1등이 하고 싶다는 욕망을 이러한 방식으로 해결해 주는 것은
양보와 배려를 배우고 깊은 우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경쟁은 나쁜 것이라는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하고,
오히려 1등만이 좋은 것 훌륭한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더 갖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린이들 한 명 한 명이 모두 소중한 존재이며 각자의 달란트를 가지고 있음을,
다른 사람들이 정해 놓은 기준에 맞추기 위해 쫓아가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소명을 깨달아 모두가 다 다른 기준을 따라 살아갈 수 있음을,
경쟁할 필요 없는 놀이를 통해 양보와 배려와 즐거움을 경험하며 배울 수 있음을,
경쟁해야하는 상황에서는 정정당당하게 정해진 룰을 지키며, 승리를 기뻐하고 패배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함을
그림책을 통해 잘 드러낼 때
비로소 "달리기" 통해 작가가 이야기 하려고 했던 경쟁, 양보, 배려, 협력, 즐거움의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 의도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다른 상황을 만들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달리기라는 경기 안에서 나무늘보와 여우와 토끼와 타조는 서로 다른 능력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같은 출발선에서 같이 출발한 동물들이 한 가지의 기준으로만 평가받는다면 당연히 1등, 2등, 3등이 세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경기와 놀이는 다릅니다. 양보와 배려로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경험하는 것은 경기를 통해서가 아닌 놀이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어린이들에게 놀이의 경험이 많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술래잡기, 경찰과 도둑,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같이 달리기의 능력이 필요하지만, 1등2등3등을 세울 필요는 없는 놀이에서는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고 협력하며 우정을 보여줄 수 있지만,
달리기 시합, 달리기 경주, 달리기 경기는 다른 상황입니다.
요즘 시대를 무한경쟁 시대라고 하지요. 요즘 시대에 어린이들조차 여러가지 경쟁을 통해 등수가 매겨지고 서로 경쟁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작가는 어린이들에게 능력이 부족한 친구를 배려하고 1등을 양보함으로써 모두가 웃는 훈훈한 결말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그림책의 이야기는 경쟁에 내몰린 어린이들에게 경쟁하지 않고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며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갖는 해피앤딩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나,
친구의 양보와 배려로 등수를 바꿔준다고 해서 경쟁에 놓였던 나무늘보의 능력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1등을 해보고 싶다는 소원은 이루어졌을지 모르나, 1등이라는 의미가 사라진 이름만 1등이 되어버립니다.
우리가 어린이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은 양보와 배려로 결과를 바꿔치기 해주는 것이 아니라
경쟁은 공평한 기준과 평가가 있어야 함과, 지더라도 정해진 룰을 지키며 정직하게 싸워야 함이 아닐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1등이 하고 싶다는 욕망을 이러한 방식으로 해결해 주는 것은
양보와 배려를 배우고 깊은 우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경쟁은 나쁜 것이라는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하고,
오히려 1등만이 좋은 것 훌륭한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더 갖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린이들 한 명 한 명이 모두 소중한 존재이며 각자의 달란트를 가지고 있음을,
다른 사람들이 정해 놓은 기준에 맞추기 위해 쫓아가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소명을 깨달아 모두가 다 다른 기준을 따라 살아갈 수 있음을,
경쟁할 필요 없는 놀이를 통해 양보와 배려와 즐거움을 경험하며 배울 수 있음을,
경쟁해야하는 상황에서는 정정당당하게 정해진 룰을 지키며, 승리를 기뻐하고 패배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함을
그림책을 통해 잘 드러낼 때
비로소 "달리기" 통해 작가가 이야기 하려고 했던 경쟁, 양보, 배려, 협력, 즐거움의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국경아2025-01-16 01:07
저는 경쟁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평가에 있어서도 절대평가를 훨씬 선호하고 상대평가는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하는 면이 있습니다. 비록 상대보다 뒤쳐졌지만 자신이 최선을 다해 부끄럼 없이 노력했다면, 그리고 그 노력이 일정 기준에 부합한다면 그 노력에 대한 나름대로의 보상이 주어져야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한 경쟁으로 치닫는 우리 사회에서 뒤쳐진 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매우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작가 역시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달리기에서 1등을 하고 싶다는 나무늘보를 위해 뒤로 달리는 친구들이나 그런 광경을 응원하는 다른 친구들 모두 예쁘고 착한 마음씨를 가진 친구들입니다. 경쟁을 싫어하는 저로서는 이런 주제가 반갑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고 나서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던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작가가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지 명확한데 그 주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억지스러운 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 달리기이고 하필 나무늘보였을까를 생각해 보면 이 책의 주제는 약자를 위한 주변 사람들의 배려라는 것이 확실해집니다. 달리기는 경쟁 및 1등에게 주어지는 영예를 그려내기에 적절한 이미지를 가진 고전적인 경기이고 선천적으로 느린 나무늘보는 달리기 대회에서 절대 1등을 할 수 없는 약자로 쉽게 이미지화되기 때문이지요. 사건을 진행시키는 주요 문제는 그런 나무늘보가 달리기 대회에서 1등을 하고 싶어한 것이고, 그 문제는 약자인 주인공을 위해 주변의 인물들이 기꺼이 양보하고 배려하는 것으로 것으로 해결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약자를 배려하는 따뜻하고 착한 인물들로 가득한 아름다운 세계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배려와 양보가 판을 유지시키는 원칙과 질서를 깨뜨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그 배려와 양보를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뒤로 달리기를 한 친구들을 제치고 나무늘보가 차지한 1등은 결코 정당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말은 달리기이지만 이미 달리기라는 형식을 유지시켜주는 원칙과 질서는 깨졌고 그런 방식으로 차지한 1등이 과연 나무늘보가 진정 원한 것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책에서는 나무늘보와 모든 동물 친구들이 기뻐하는 모습으로 그려졌지만 그렇게 모두가 행복했습니다로 끝나는 것이 만족스럽고 바람직한 것이 맞는지 다시 한번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원칙과 질서를 무시한 채 배려와 양보만이 우선시되는 것은 이미 균형을 잃은 전개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약자를 위한 양보와 배려는 이 책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단순한 성격의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다. 정당한 노력을 기울인 이들에 대한 존중도 고려되어야 하고, 약하고 뒤쳐진 이들이 보이는 노력 자체에 대한 존중 역시 중요한 고려사항입니다. 비록 그들이 얻으려 한 성과를 못 이루어내더라도 그 과정 자체에 최선을 기울인 것이 더 중요하게 평가 받고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 자체를 응원하는 시선이야말로 실질적으로 더 중요한 배려와 마음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큽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하여 약자를 배려하고 그 가운데 중요한 원칙과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제로 배려와 양보는 따뜻한 마음 뿐 아니라 정교한 지혜가 필요한 영역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혜 없는 배려가 초래한 이 책의 결말에서 오는 씁쓸함은, 실제로 한 사람을 위한 배려에도 얼마나 세심한 관심과 고민이 필요한지, 따뜻한 마음 뿐 아니라 신중한 판단과 다양한 입장에 대한 고려가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이 책의 작가 역시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달리기에서 1등을 하고 싶다는 나무늘보를 위해 뒤로 달리는 친구들이나 그런 광경을 응원하는 다른 친구들 모두 예쁘고 착한 마음씨를 가진 친구들입니다. 경쟁을 싫어하는 저로서는 이런 주제가 반갑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고 나서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던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작가가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지 명확한데 그 주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억지스러운 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 달리기이고 하필 나무늘보였을까를 생각해 보면 이 책의 주제는 약자를 위한 주변 사람들의 배려라는 것이 확실해집니다. 달리기는 경쟁 및 1등에게 주어지는 영예를 그려내기에 적절한 이미지를 가진 고전적인 경기이고 선천적으로 느린 나무늘보는 달리기 대회에서 절대 1등을 할 수 없는 약자로 쉽게 이미지화되기 때문이지요. 사건을 진행시키는 주요 문제는 그런 나무늘보가 달리기 대회에서 1등을 하고 싶어한 것이고, 그 문제는 약자인 주인공을 위해 주변의 인물들이 기꺼이 양보하고 배려하는 것으로 것으로 해결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약자를 배려하는 따뜻하고 착한 인물들로 가득한 아름다운 세계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배려와 양보가 판을 유지시키는 원칙과 질서를 깨뜨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그 배려와 양보를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뒤로 달리기를 한 친구들을 제치고 나무늘보가 차지한 1등은 결코 정당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말은 달리기이지만 이미 달리기라는 형식을 유지시켜주는 원칙과 질서는 깨졌고 그런 방식으로 차지한 1등이 과연 나무늘보가 진정 원한 것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책에서는 나무늘보와 모든 동물 친구들이 기뻐하는 모습으로 그려졌지만 그렇게 모두가 행복했습니다로 끝나는 것이 만족스럽고 바람직한 것이 맞는지 다시 한번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원칙과 질서를 무시한 채 배려와 양보만이 우선시되는 것은 이미 균형을 잃은 전개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약자를 위한 양보와 배려는 이 책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단순한 성격의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다. 정당한 노력을 기울인 이들에 대한 존중도 고려되어야 하고, 약하고 뒤쳐진 이들이 보이는 노력 자체에 대한 존중 역시 중요한 고려사항입니다. 비록 그들이 얻으려 한 성과를 못 이루어내더라도 그 과정 자체에 최선을 기울인 것이 더 중요하게 평가 받고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 자체를 응원하는 시선이야말로 실질적으로 더 중요한 배려와 마음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큽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하여 약자를 배려하고 그 가운데 중요한 원칙과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제로 배려와 양보는 따뜻한 마음 뿐 아니라 정교한 지혜가 필요한 영역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혜 없는 배려가 초래한 이 책의 결말에서 오는 씁쓸함은, 실제로 한 사람을 위한 배려에도 얼마나 세심한 관심과 고민이 필요한지, 따뜻한 마음 뿐 아니라 신중한 판단과 다양한 입장에 대한 고려가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따뜻함 안에 숨은 함정 『뒤로 뒤로 달리기』
그림책 자세히 보기
『뒤로 뒤로 달리기』(이항안 글, 보람 그림)(2024)는 얼핏 보기에는 매우 재미있고 훈훈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학교 운동회의 달리기 경주를 소재로 하고 있으며, 일등하고 싶어하는 나무늘보의 소원을 친구들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이루어주었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다. 양보와 자기희생의 미덕이 돋보이는 서사가 아닐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 서평의 사용자 총점은 10/10이며, 서평 글은 다음과 같다.
이 ‘종이책’이라는 서평자가 올린 글의 핵심 단어(key words)는 도전정신, 우정, 배려임을 알 수 있다.
그럼, 작품 해석의 기초단계로서 글과 그림을 세심하게 읽어보자. 표지 중앙에는 나무늘보가 땀을 흘리며 달려가는 듯한 자세를 하고 있다. 그 뒤로는 타조, 토끼, 고양이가 뒷걸음질 하고 있다. 이 장면 위에는 “뒤로 뒤로 달리기”라는 플랭카드와 만국기를 떠올리게 하는 세모난 깃발들이 걸려 있다. 면지에는 여러 동물의 얼굴이 패턴을 이루어 그려져 있는데 그에 특별한 의미는 없는 듯하다. 표제지의 그림은 나무늘보가 더디게 앞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은 동물학교 운동회 날! 토끼와 타조, 여우, 나무늘보가 달리기 시합을 하려고 출발선에 나란히 섰어.” “탕!” 화면에는 거론된 순서대로 동물들이 출발선에 서있고 호랑이가 깃발을 올리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동물학교의 학생들이 선수들을 웅원하고 있다. 그 다음 장에서는 여우, 토끼, 타조가 열심히 달려가고 있고, 글은 그들이 각종 달리기 시합에서 일등을 한 전력이 있음을 소개한다. 반면, 화면 오른 편에서는 나무늘보가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다. 그런데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가던 동물들이 어제 나무늘보가 달리기에서 일등을 해보고 싶다는 소원을 적은 글을 기억해 내고는 멈칫한다.
여우, 토끼, 타조는 자신들은 일등은 해보았으니 이번에는 나무늘보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합의하고 일부러 아주 느리게 걷기 시작한다. 그러나 학교에서 가장 느린 나무늘보는 여전히 뒤처질 뿐이다. 이번엔 친구들이 제 자리에서 껑충껑충 뛰기 시작하지만 역시 나무늘보는 따라오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로 달리기를 하면서 나무늘보가 자신들을 제치고 앞서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느려도 너무 느린 나무늘보는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전진하지 못한다. 결국 옆에서 응원하던 동물 친구들은 지루해져서 잠이 들고, 타조, 토끼, 여우는 나무늘보의 등을 밀기 시작한다. 드디어 나무늘보는 결승선을 밟고, 그를 밀어주던 동물들은 녹초가 되어 뒤로 쓰러진다. 그 때 잠들었던 동물들이 깨어나 “와”, “나무늘보가 일등이다.” 라며 축하해준다. 마지막 화면에서는 단상의 일등 자리에 선 나무늘보와 그 주위를 둘러싼 동물 친구들이 모두들 기뻐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을 본격적으로 해석하기 전에 달리기라는 행위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사회학, 철학, 인류학, 문학 등 백과사적적인 지식인으로서 현대 프랑스의 대표적 사상가 중의 한사람으로 꼽히는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1913-78)는 그의 책 <놀이와 인간>에서 네덜란드 역사학자이자 <호모 루덴스>의 작가인 호이징가(Johan Huizinga)(1872-1945)의 뒤를 이어 문화 발전에 있어서 놀이의 본질적인 역할을 역설하였다. 그에 따르면 달리기는 놀이의 범주 중 아곤(Agon), 즉 경쟁에 속한다. 경쟁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뒤로 뒤로 달리기』에 그려진 달리기 역시 아곤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규칙은 매우 단순하다. 같은 출발선에 선 선수들이 출발 신호와 함께 동시에 달려 나가 동일한 거리를 뛰어 가장 먼저 결승선 안에 들어온 선수가 승자가 되는 것이다. 동물학교의 달리기 경기에는 선수들과 구경꾼들이 등장한다. 선수는 나무늘보와 여우, 토끼, 타조이며, 너구리, 기린, 돼지, 토끼, 여우 등은 구경꾼이다. 나무늘보는 동물학교에서 최고로 늦은 아이지만 달리기에서 일등을 해보는 것이 소원이었고, 다른 선수들은 각종 달리기 대회에서 우승을 할 정도로 기량이 출중하다. 여우는 작년에도 달리기 대회에서 일등을 했고, 토끼는 깡충 달리기에서 일등을 했고, 타조는 겅중 달리기로 세 번이나 일등을 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 이 정도의 선수들이라면 아주 흥미진진한 경기를 기대해봄직 하다.
이 선수들의 행동을 평가해보자. 달리기 시합의 규칙은 힘껏 달려서 가장 먼저 결승선을 밟는 선수가 이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 친구들은 출발신호와 함께 달리다가 그 전날 알게 되었던 나무늘보의 소원을 기억해 내고는 나무늘보에게 일등을 양보했다. 물론 선의에서 나온 행위였지만 경쟁의 규칙을 어긴 것이다. 이 달리기 시합은 학교의 운동회에서 치러진 것이므로 교육적 측면에서도 평가해 볼 수 있다. 각 선수는 그동안 갈고 닦았던 기량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승리하면 자기 성취의 만족감을 맛볼 수 있으며, 정신적, 물질적 보상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페어플레이(fair play) 정신을 습득하는 것이다. 학교는 다음 세대에게 페어플레이를 가르치는 훈련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페어플레이에 필요한 인내, 절제, 정직, 끈기, 성실, 책임감, 협력 등은 자유 민주주의 시민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므로 교육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
물론 경쟁자들이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친구에게 기쁨을 안겨주는 행위에서 자기희생이라는 고귀한 미덕을 찾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서사에서 궁금한 것이 있다. 왜 나무늘보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경기에서 일등을 하고자 하는 욕망을 품게 되었을까? 덧붙여, 친구들의 양보가 나무늘보에게 어떤 유익을 줄까? 단상에서 나무늘보는 잠깐 기쁨을 맛볼 수 있겠지만 자신이 그 자리에 설 자격이 없음은 스스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신체 구조는 달리기에는 맞지 않으므로 아무리 애써도 그는 달리기에 능한 친구들과 경쟁할 수는 없었다. 만약 나무늘보가 다음에는 깡충 달리기에서도 일등을 해 보고 싶다고 하자, 그리고 겅중 달리기에서도... 그럼 친구들이 그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애써 주어야 하나? 이러한 행위는 선수들 모두에게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을 것이다. 아곤, 즉 경쟁 놀이의 원동력은 주어진 분야에서 자신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이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하게 되면 경기의 존재 의미는 사라진다.
응원하는 친구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그들은 달리기에 나선 선수들을 응원하고 있다가 다른 선수들의 선한 의도를 알아채고 본격적으로 나무늘보만을 응원하기 시작한다. “나무늘보 파이팅!”, “나무늘보야, 힘내!” 실제로 마라톤 대회에서 꼴찌로 달리는 선수가 들어오기를 끝까지 기다리며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 에피소드는 잔잔한 감동을 주기도 한다. 작가도 이 장면을 그릴 때 그런 이미지를 마음에 두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응원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투혼을 불사르고 있는 선수를 위한 것이다. 경쟁의 규칙을 지키지 않는 경기는 구경꾼에게 구경의 재미도, 응원의 이유도 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달리기 대회라는 소재를 사용하면서 출발점이 같은 선수들의 이야기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나님은 각 동물에게, 그리고 각 개인에게 고유한 재능을 주셨다. 나무늘보들끼리 경쟁할 수 있는 종목은 없을까. 나무에서 오래 매달려 있기라던가,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기 같은 것 등(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알려주시기를...). 출발점에서의 기회를 공평하게 하기 위해 급(級)을 나눈 운동(예: 역도, 태권도, 유도 등)같은 것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장애인들을 위한 장애인 올림픽도 출발점에서의 기회를 공평하게 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종합하면, 학교에서의 달리기 시합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경쟁 놀이의 핵심 가치인 페어플레이 정신을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 이 작품의 결론은 이성적(rational)이지도, 경험적(empirical)이지도, 실용적(pragmatic)이지도 않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누군가는 의인화된 귀여운 동물들이 벌이는 재미있고 훈훈한 이야기를 뭐 그리 신랄하게 비판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그림책이라는 매체를 대하는 합당한 자세가 아니다. 그림책 작가들과 평론가들은 그동안 끊임없이 그림책도 예술로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미국의 철학학회 회장을 지낸바 있는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월터스토프(N. Wolterstorff)는 예술 작품에는 작가의 관심사와 세계관이 투영되어 있다는 예술론을 피력한 바 있다.[ii] 그의 존재론적 예술관에 의거한다면 우리는 그림책에서도 같은 주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나 교사가 그저 ‘쉬운 책’이라는 선입견으로 그림책을 대할 때 그 메시지와 세계관은 어린이의 마음에 은연중에 스며든다. 『뒤로 뒤로 달리기』에 은밀히 스며든 세계관은 ‘다양성’, ‘배려’, ‘포용’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다원주의이다. 믿는 자들은 종교 다원주의를 경계하지만 이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문화다원주의이다. 문화다원주의는 휴머니티(humanity)의 탈을 쓰고 있으므로 알아채기 힘들기 때문이다. 문화다원주의는 공정한 경쟁과 공의, 정의보다 평등, 배려, 포용, 공감의 가치를 앞세워 역차별을 초래한다. 유럽과 미국 등, 소위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들에서는 여성으로 성전환한 트렌스젠더 남성이 여성의 경기에 출전하여 우승을 가로채가고 있다.[iii] 그들이 신체적인 수술을 받고 호르몬 주사를 맞는다 하더라도 이미 사춘기에 형성된 신체적 특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출발점이 아주 다른 선수를 같은 출발점에 세우는 경기는 역차별을 넘어서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다. 잘못된 이념이라는 것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마지막으로, 달리기라는 행위에는 신앙적 함의가 풍부하다. 신앙인의 삶은 바로 이 달리기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의 음습하고 차디찬 돌감옥 안에서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마음 안에는 이런 이미지들이 가득했을 것이다. 원형 경기장, 결승선, 푯대, 의의 관, 사력을 다해 내달리는 선수들, 환호하는 구경꾼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대한민국은 국가 존립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종중(宗中)하는 반국가세력들이 1948년 이승만 대통령과 선각자들이 기도로 세운 이 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광란의 춤을 추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윤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국회의 탄핵 소추를 계기로 하여 입법, 사법, 행정, 군, 학교, 심지어 교회까지 사회전반에 스며들어 있던 어두운 영이 밝은 빛 아래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파와 좌파의 싸움이 아니라 진실과 거짓, 합법과 불법, 상식과 비상식, 자유민주주의와 중국 공산주의 체제의 싸움이다. 싸움은 극렬하지만 우리가 낙심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구경꾼이 아니라 강력한 응원자로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거짓과 온갖 불법으로 우리 앞에서 달리던 자들은 언젠가 우리 뒤에서 “바람에 날리는 겨”(KJB 시1: 4)와 같이 흩날려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결승선을 밟은 우리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면류관을 받아 쓸 것이다. 아, 상상만 해도 얼마나 기쁘고 통쾌한 일인가!
[i]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4847351
[ii] N, Wolterstorff(1980), Art in Action. Grand Rapids, MI: Eerdeman.
[iii]https://namu.wiki/w/%EC%84%B1%EC%86%8C%EC%88%98%EC%9E%90/%EC%8A%A4%ED%8F%AC%EC%B8%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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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이며 아동문학과 그림책 평론 작업을 하고 있다. 미국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1989년부터 2023년까지 성대 아동청소년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2021년부터 웹진 <그림책 베이직>에 '그림책의 세계관'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성균관대학교 생활과학대학연구소 부설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그림책의 세계관', '기독 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세계관>, 공저로는 <그림책의 이해>, <그림책의 그림 읽기>, <세계 그림책의 역사>, <어린이교육전문가가 엄선한 100권의 그림책>, <신앙이 자라는 그림책 읽기>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