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의 세계관


따뜻함 안에 숨은 함정 『뒤로 뒤로 달리기』

2025-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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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함 안에 숨은 함정 『뒤로 뒤로 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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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뒤로 달리기』(이항안 글, 보람 그림)(2024)는 얼핏 보기에는 매우 재미있고 훈훈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학교 운동회의 달리기 경주를 소재로 하고 있으며, 일등하고 싶어하는 나무늘보의 소원을 친구들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이루어주었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다. 양보와 자기희생의 미덕이 돋보이는 서사가 아닐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 서평의 사용자 총점은 10/10이며, 서평 글은 다음과 같다.


“느리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하는 나무늘보의 모습이 정말 멋져요. 나무늘보의 도전정신과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는 모습이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해 준답니다... 곁에서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친구들의 우정과 배려하는 마음을 배우고, 친구들의 협력을 통해 끝까지 도전하여 꿈을 이룬 나무늘보의 모습을 보며 아이들도 책을 통해서 자신을 믿고 노력하면서 도전해봤으면 좋겠어요. 서로 돕고 배려하는 마음과 도전하는 마음을 배울 수 있는 책이었어요”(종이책)

“친구를 배려할 줄 아는 그 예쁜 마음이 너무 기특했어요. 친구의 단점을 감싸주고 의기소침한 친구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 친구들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친구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주며 서로를 끌어줄 수 있어야 하잖아요...”(종이책)
[i]


이 ‘종이책’이라는 서평자가 올린 글의 핵심 단어(key words)는 도전정신, 우정, 배려임을 알 수 있다.     

그럼, 작품 해석의 기초단계로서 글과 그림을 세심하게 읽어보자. 표지 중앙에는 나무늘보가 땀을 흘리며 달려가는 듯한 자세를 하고 있다. 그 뒤로는 타조, 토끼, 고양이가 뒷걸음질 하고 있다. 이 장면 위에는 “뒤로 뒤로 달리기”라는 플랭카드와 만국기를 떠올리게 하는 세모난 깃발들이 걸려 있다. 면지에는 여러 동물의 얼굴이 패턴을 이루어 그려져 있는데 그에 특별한 의미는 없는 듯하다. 표제지의 그림은 나무늘보가 더디게 앞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은 동물학교 운동회 날! 토끼와 타조, 여우, 나무늘보가 달리기 시합을 하려고 출발선에 나란히 섰어.” “탕!” 화면에는 거론된 순서대로 동물들이 출발선에 서있고 호랑이가 깃발을 올리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동물학교의 학생들이 선수들을 웅원하고 있다. 그 다음 장에서는 여우, 토끼, 타조가 열심히 달려가고 있고, 글은 그들이 각종 달리기 시합에서 일등을 한 전력이 있음을 소개한다. 반면, 화면 오른 편에서는 나무늘보가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다. 그런데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가던 동물들이 어제 나무늘보가 달리기에서 일등을 해보고 싶다는 소원을 적은 글을 기억해 내고는 멈칫한다.  

여우, 토끼, 타조는 자신들은 일등은 해보았으니 이번에는 나무늘보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합의하고 일부러 아주 느리게 걷기 시작한다. 그러나 학교에서 가장 느린 나무늘보는 여전히 뒤처질 뿐이다. 이번엔 친구들이 제 자리에서 껑충껑충 뛰기 시작하지만 역시 나무늘보는 따라오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로 달리기를 하면서 나무늘보가 자신들을 제치고 앞서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느려도 너무 느린 나무늘보는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전진하지 못한다. 결국 옆에서 응원하던 동물 친구들은 지루해져서 잠이 들고, 타조, 토끼, 여우는 나무늘보의 등을 밀기 시작한다. 드디어 나무늘보는 결승선을 밟고, 그를 밀어주던 동물들은 녹초가 되어 뒤로 쓰러진다. 그 때 잠들었던 동물들이 깨어나 “와”, “나무늘보가 일등이다.” 라며 축하해준다. 마지막 화면에서는 단상의 일등 자리에 선 나무늘보와 그 주위를 둘러싼 동물 친구들이 모두들 기뻐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을 본격적으로 해석하기 전에 달리기라는 행위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사회학, 철학, 인류학, 문학 등 백과사적적인 지식인으로서 현대 프랑스의 대표적 사상가 중의 한사람으로 꼽히는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1913-78)는 그의 책 <놀이와 인간>에서 네덜란드 역사학자이자 <호모 루덴스>의 작가인 호이징가(Johan Huizinga)(1872-1945)의 뒤를 이어 문화 발전에 있어서 놀이의 본질적인 역할을 역설하였다. 그에 따르면 달리기는 놀이의 범주 중 아곤(Agon), 즉 경쟁에 속한다. 경쟁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쟁이란 이긴 자의 승리에 명확하고 이론의 여지가 없는 가치를 줄 수 있는 이상적인 조건 하에서 경쟁자들이 서로 싸우도록, 기회의 평등이 인위적으로 설정된 투쟁이다. 따라서 그것은 반드시 하나의 자질(스피드, 인내력, 체력, 기억력, 재주, 솜씨 등등)만을 대상으로 하는 적대관계로서, 일정한 한계 내에서 외부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행해지는데, 이 때문에 승자는 그 특정 종목의 경기에서는 가장 잘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스포츠 경기의 규칙은 그러한 것이며, 또 스포츠에 많은 구분이 존재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개인 대 개인이나 팀 대 팀의 경기(폴로, 테니스, 축구, 권투, 펜싱 등등)이든 아니면 불특정 다수의 경쟁자들 간의 경기(모든 종류의 경주, 사격, 골프, 육상경기 등등)이든, 사정은 마찬가지다(p. 39).


『뒤로 뒤로 달리기』에 그려진 달리기 역시 아곤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규칙은 매우 단순하다. 같은 출발선에 선 선수들이 출발 신호와 함께 동시에 달려 나가 동일한 거리를 뛰어 가장 먼저 결승선 안에 들어온 선수가 승자가 되는 것이다. 동물학교의 달리기 경기에는 선수들과 구경꾼들이 등장한다. 선수는 나무늘보와 여우, 토끼, 타조이며, 너구리, 기린, 돼지, 토끼, 여우 등은 구경꾼이다. 나무늘보는 동물학교에서 최고로 늦은 아이지만 달리기에서 일등을 해보는 것이 소원이었고, 다른 선수들은 각종 달리기 대회에서 우승을 할 정도로 기량이 출중하다. 여우는 작년에도 달리기 대회에서 일등을 했고, 토끼는 깡충 달리기에서 일등을 했고, 타조는 겅중 달리기로 세 번이나 일등을 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 이 정도의 선수들이라면 아주 흥미진진한 경기를 기대해봄직 하다.

이 선수들의 행동을 평가해보자. 달리기 시합의 규칙은 힘껏 달려서 가장 먼저 결승선을 밟는 선수가 이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 친구들은 출발신호와 함께 달리다가 그 전날 알게 되었던 나무늘보의 소원을 기억해 내고는 나무늘보에게  일등을 양보했다. 물론 선의에서 나온 행위였지만 경쟁의 규칙을 어긴 것이다. 이 달리기 시합은 학교의 운동회에서 치러진 것이므로 교육적 측면에서도 평가해 볼 수 있다. 각 선수는 그동안 갈고 닦았던 기량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승리하면 자기 성취의 만족감을 맛볼 수 있으며, 정신적, 물질적 보상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페어플레이(fair play) 정신을 습득하는 것이다. 학교는 다음 세대에게 페어플레이를 가르치는 훈련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페어플레이에 필요한 인내, 절제, 정직, 끈기, 성실, 책임감, 협력 등은 자유 민주주의 시민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므로 교육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         

물론 경쟁자들이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친구에게 기쁨을 안겨주는 행위에서 자기희생이라는 고귀한 미덕을 찾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서사에서 궁금한 것이 있다. 왜 나무늘보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경기에서 일등을 하고자 하는 욕망을 품게 되었을까? 덧붙여, 친구들의 양보가 나무늘보에게 어떤 유익을 줄까? 단상에서 나무늘보는 잠깐 기쁨을 맛볼 수 있겠지만 자신이 그 자리에 설 자격이 없음은 스스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신체 구조는 달리기에는 맞지 않으므로 아무리 애써도 그는 달리기에 능한  친구들과 경쟁할 수는 없었다. 만약 나무늘보가 다음에는 깡충 달리기에서도 일등을 해 보고 싶다고 하자, 그리고 겅중 달리기에서도... 그럼 친구들이 그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애써 주어야 하나? 이러한 행위는 선수들 모두에게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을 것이다. 아곤, 즉 경쟁 놀이의 원동력은 주어진 분야에서 자신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이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하게 되면 경기의 존재 의미는 사라진다. 

응원하는 친구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그들은 달리기에 나선 선수들을 응원하고 있다가 다른 선수들의 선한 의도를 알아채고 본격적으로 나무늘보만을 응원하기 시작한다. “나무늘보 파이팅!”, “나무늘보야, 힘내!” 실제로 마라톤 대회에서 꼴찌로 달리는 선수가 들어오기를 끝까지 기다리며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 에피소드는 잔잔한 감동을 주기도 한다. 작가도 이 장면을 그릴 때 그런 이미지를 마음에 두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응원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투혼을 불사르고 있는 선수를 위한 것이다. 경쟁의 규칙을 지키지 않는 경기는 구경꾼에게 구경의 재미도, 응원의 이유도 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달리기 대회라는 소재를 사용하면서 출발점이 같은 선수들의 이야기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나님은 각 동물에게, 그리고 각 개인에게 고유한 재능을 주셨다. 나무늘보들끼리 경쟁할 수 있는 종목은 없을까. 나무에서 오래 매달려 있기라던가,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기 같은 것 등(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알려주시기를...). 출발점에서의 기회를 공평하게 하기 위해 급(級)을 나눈 운동(예: 역도, 태권도, 유도 등)같은 것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장애인들을 위한 장애인 올림픽도 출발점에서의 기회를 공평하게 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종합하면, 학교에서의 달리기 시합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경쟁 놀이의 핵심 가치인 페어플레이 정신을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 이 작품의 결론은 이성적(rational)이지도, 경험적(empirical)이지도, 실용적(pragmatic)이지도 않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누군가는 의인화된 귀여운 동물들이 벌이는 재미있고 훈훈한 이야기를 뭐 그리 신랄하게 비판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그림책이라는 매체를 대하는 합당한 자세가 아니다. 그림책 작가들과 평론가들은 그동안 끊임없이 그림책도 예술로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미국의 철학학회 회장을 지낸바 있는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월터스토프(N. Wolterstorff)는 예술 작품에는 작가의 관심사와 세계관이 투영되어 있다는 예술론을 피력한 바 있다.[ii] 그의 존재론적 예술관에 의거한다면 우리는 그림책에서도 같은 주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나 교사가 그저 ‘쉬운 책’이라는 선입견으로 그림책을 대할 때 그 메시지와 세계관은 어린이의 마음에 은연중에 스며든다. 『뒤로 뒤로 달리기』에 은밀히 스며든 세계관은 ‘다양성’, ‘배려’, ‘포용’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다원주의이다. 믿는 자들은 종교 다원주의를 경계하지만 이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문화다원주의이다. 문화다원주의는 휴머니티(humanity)의 탈을 쓰고 있으므로 알아채기 힘들기 때문이다. 문화다원주의는 공정한 경쟁과 공의, 정의보다 평등, 배려, 포용, 공감의 가치를 앞세워 역차별을 초래한다. 유럽과 미국 등, 소위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들에서는 여성으로 성전환한 트렌스젠더 남성이 여성의 경기에 출전하여 우승을 가로채가고 있다.[iii] 그들이 신체적인 수술을 받고 호르몬 주사를 맞는다 하더라도 이미 사춘기에 형성된 신체적 특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출발점이 아주 다른 선수를 같은 출발점에 세우는 경기는 역차별을 넘어서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다. 잘못된 이념이라는 것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마지막으로, 달리기라는 행위에는 신앙적 함의가 풍부하다. 신앙인의 삶은 바로 이 달리기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형제들아, 나는 내가 이미 붙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다만 이 한 가지 일을 행하나니 곧 뒤에 있는 그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그것들에 도달하려고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밀고 나아가노라. 그러므로 우리 완전한 자들은 다 이같이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서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바로 이것을 너희에게 드러내시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미 도달한 곳에서는 같은 규칙에 따라 걷고 같은 것을 생각할지니라.”(KJB 빌 3: 13-16). 


로마의 음습하고 차디찬 돌감옥 안에서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마음 안에는 이런 이미지들이 가득했을 것이다. 원형 경기장, 결승선, 푯대, 의의 관, 사력을 다해 내달리는 선수들, 환호하는 구경꾼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대한민국은 국가 존립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종중(宗中)하는 반국가세력들이 1948년 이승만 대통령과 선각자들이 기도로 세운 이 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광란의 춤을 추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윤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국회의 탄핵 소추를 계기로 하여 입법, 사법, 행정, 군, 학교, 심지어 교회까지 사회전반에 스며들어 있던 어두운 영이 밝은 빛 아래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파와 좌파의 싸움이 아니라 진실과 거짓, 합법과 불법, 상식과 비상식, 자유민주주의와 중국 공산주의 체제의 싸움이다. 싸움은 극렬하지만 우리가 낙심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구경꾼이 아니라 강력한 응원자로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리라. 참으로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내가 내 의의 오른손으로 너를 떠받쳐 주리라. 보라 네게 분노하던 모든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당황하며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되고 너와 다투는 자들이 멸망할 것이다.”(KJB 사 41:10-11).


거짓과 온갖 불법으로 우리 앞에서 달리던 자들은 언젠가 우리 뒤에서 “바람에 날리는 겨”(KJB 시1: 4)와 같이 흩날려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결승선을 밟은 우리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면류관을 받아 쓸 것이다. 아, 상상만 해도 얼마나 기쁘고 통쾌한 일인가!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이며 아동문학과 그림책 평론 작업을 하고 있다. 미국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1989년부터 2023년까지 성대 아동청소년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2021년부터 웹진 <그림책 베이직>에 '그림책의 세계관'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성균관대학교 생활과학대학연구소 부설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그림책의 세계관', '기독 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세계관>, 공저로는 <그림책의 이해>, <그림책의 그림 읽기>, <세계 그림책의 역사>, <어린이교육전문가가 엄선한 100권의 그림책>, <신앙이 자라는 그림책 읽기>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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