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 독자와 평론가는 그림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2022-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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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 독자와 평론가는 그림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그림책 베이직을 발행한 지도 벌써 1년이 지났다. 그동안 ‘그림책의 세계관’ 코너를 방문한 독자들은 이 글들이 ‘그림책 비평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임을 눈치챘을 것이다. 기독 평론가로서 나의 첫 번째 관심은 그림책에 투영된 세계관이 기독교 신앙과 일치하는지 여부를 살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 신자(bible believer)라면 누구나 말씀의 빛으로 모든 생각과 이론을 비추어 판단하려고 노력할 것이다(고후 10:3-6). 진정으로 성경 말씀이 진리라고 믿는 사람들은 포스트모던 시대사조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 때에 그림책 비평에서도 분별력이 필요함을 자각하게 된다. 그러나 신앙의 관점으로 그림책을 비평한다는 행위가 비기독인과 다른 읽기 기술을 요구하거나 그 안에 신비한 요소가 있음을 시사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탐구 과정의 본질은 연구자의 신앙 여부를 떠나 동일한 종류의 활동이다. 물리학의 본질은 물질과 그것의 시공간에서의 운동을 정확히 보는 것이며, 생물학의 본질은 식물이나 동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며, 심리학의 본질은 보이지 않는 인간 내면을 보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림책 비평의 본질도 그림책을 잘 읽어 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책을 잘 읽어내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나는 이것을 묘사 혹은 기술(description), 해석(interpretation), 판단(judge), 이 세 요소로 나누어 살펴 보고자 한다.[1]

첫째, 묘사는 비평가가 어떤 작품에 대한 정보를 독자에게 제공하는 첫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그림책 비평에서 묘사의 역할은 글과 그림, 페리텍스트를 촘촘하게 읽어내어 그 책을 보지 않은 사람도 그림책의 특징과 서사를 파악하고 감상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좋은 묘사는 서술에서 끝나지 않으며 독자들을 위해 글을 다듬고 해석과 판단의 발전된 형식으로 나아간다. 평론가가 묘사한 정보가 부정확하거나 심하게 완성도가 떨어지면 해석과 판단의 신빙성이 떨어지게 된다. 좋은 묘사는 해석과 판단의 기초가 되며 그것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이것은 C.S. 루이스(2002)가 촉구하는, 텍스트에 대해 선입견을 버리고 수용(reception)하는 태도로 읽는 것이다. 수용이란 “그 작품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행하기를 기다리는 것”[2] 이다. 즉 자신의 관심사와 취향과 선입견을 내려놓고 그 작품이 우리에게 무엇을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용한다는 것이 꼭 텍스트가 말하는 바를 무조건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 자신이 읽기에 방해물이 되지 않도록 자신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후에야 그 텍스트가 우리에게 행하고자 하는 것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으며 그것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반대로 ‘나쁜 독서’ 태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책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것”이며[3]  “텍스트라는 거울에서 오직 자신만을 보는, 자신의 가치관이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이데올로기만을 보는”[4] 것이다. 그것은 심리학적으로는 읽기의 나르시시즘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신학적으로는 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사사기 21:25)와 흡사한 것이다. 

둘째, 해석은 비평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이자 가장 복잡한 활동일 것이다. 어린이가 읽는 그림책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인격체인 작가의 창작물이라면 세상과 인간과 관련된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해석의 역할은 그것을 밝히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해석에 있어서 상대주의적이거나 독자중심적인 접근과 대비된다. 포스트모던 비평가들은 텍스트의 의미는 그 텍스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창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독자가 없으면 텍스트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자의 해석에 전적으로 의존하다 보면 수많은 해석이 존재할 수 있으며 결국 해석이라는 활동은 무의미해진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제인 욜런이 글을 쓰고 바바라 쿠니가 그림을 그린, 『강물이 흘러가도록』은 스위프트 강이 흐르던 아름다운 마을이 댐 건설로 인해 강물 아래에 잠기게 되었다는, 미국 매사추세츠주에서 있었던 실화에 기반한 작품이다. 바바라 쿠니는 많은 그림책 독자들이 애호하는 작가이며 그의 작품들은 『달구지를 타고』, 『바구니달』, 『미스 럼피우스』와 같이 주로 흙냄새 나는 곳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고 살아가는 평화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래서 어떤 독자들(특히 환경보호론자의 경우)은 이 작품이 댐 건설로 인한 자연 환경과 인간의 황폐화를 고발하는 텍스트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제인 욜런이 글을 쓴 이 작품은 인생에 대한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Letting Swift River Go』(스위프트 강을 흘러가게 하기)라는 원어 제목과 본문에서 두 번 반복된, 주인공 샐리 엄마의 “놔 주렴”(Let them go)(아이들이 개똥벌레를 병에 가두었을 때와 마지막 장에서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타고 호수에 간 샐리가 강물을 두 손에 담았을 때)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이 텍스트의 의미는 ‘너의 것이 아닌 것’ 혹은 ‘과거의 것’에 집착하지 말고 그것들이 제 길을 가도록 놓아주라는 의미로 해석하게 된다.  


셋째, 판단은 그 작품이 가치있는가, 그렇다면 그 기준과 근거는 무엇인가와 관련된 문제이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그들의 글에서 직설적으로 자신의 판단을 진술하는 대신 암시하는 편을 택하지만 어느 경우에도 판단의 근거는 제공되어야 한다. 사실 비평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행위는 가치 판단을 전제로 한다. 한정된 시공간과 자원 안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미술비평가인 Barrett(2004)는 “우리 대부분은 예술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가정을 가지고 있다. 그 여러 가정들 중에 명백하게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드러내면 좋은 비평 훈련이 될 것이다(p. 250)라고 제안하며, “... 근거없는 판단은 비교육적이다”(p. 267) 라고 단언한다. 어린이 독자를 위한 그림책 평론이라면 그 텍스트를 추천하거나 혹은 그 반대의 경우라도 어린이에게 적합한 텍스트가 무엇인지에 대한 자신의 기준과 그에 따른 판단이 있어야 한다. 그림책 비평에서 이러한 기준과 근거들은 당연히 평론자의 세계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과 교육관이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평론가가 기독 신자라면 그의 신앙관이 작동할 것이며, 비기독인이라면 인본주의 세계관이 작품 평가의 기초가 될 것이다. 

이렇게 비평의 요소를 묘사, 해석, 평가로 나누어 설명하니 이 각각의 행위가 단계적으로, 혹은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오해를 받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비평 행위에서 이 세 가지 요소는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평가라는 행위는 작품 선정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작품을 평론의 대상으로 삼을 때 그의 마음 속에서는 이미 그 작품에 대한 해석과 평가가 내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기준과 근거는 이미 묘사에서부터 다루어진다. 그래서 다시금 강조하지만 기독 평론가는 다른 어떤 훌륭한 평론가와 다름없이 일차적으로 그림책을 있는 그대로 읽고 묘사하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 만약 그들이 똑같이 그림책을 있는 그대로 보고 묘사할 수 있다면 유사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비평이 주관적이 아니라 객관적인 활동이 될 수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림책 베이직에 실린 “앤서니 브라운의 『고릴라』는 어린이를 위한 텍스트인가”라는 제목의 평론은 바로 ‘그림책을 있는 그대로 읽고 묘사하기’를 시도한 것이었다.[5]  국내의 그림책 독자에게 널리 알려진 이 작품은 열린 결말(open ending), 모호함(ambiguity), 패러디(parody),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 그리고 불확정성(indeterminacy)과 같은 포스트모던 문학의 특성과 더불어 시각적 인유(visual allusions)와 글과 그림의 아이러니(irony)가 생성하는 다층적 의미로 인해 일반 독자는 물론, 평론가에게도 해석의 어려움을 안겨주고 있다. 높은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이 텍스트의 암시성은 평론가들에 의해 단편적으로 다루어져 왔으며, 작가 자신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는 『앤서니 브라운 나의 상상 미술관』(2021/2021)에서도 그에 대한 언급은 찾아보기 힘들다. 

나는 모든 텍스트에는 작가가 의도한 의미가 있다는 실재론적 전제 위에서 이 텍스트의 글과 그림을 있는 그대로 읽어보기로 하였다. 일반 독자들의 인터넷 서평과 전문가들의 평론에서는 이 작품이 그 메시지의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애정에 굶주려 있는 한나라는 소녀의 소원성취 서사로 해석되고 있는 듯하였다. 그 이유는 소녀가 등장하는 이 텍스트가 어린이 독자용이라는 선입견과 함께 세계적인 어린이 도서상을 여러 차례 수상한 작가에 대한 신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평론에서 나는 명화 패러디 두 점(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휘슬러의 『어머니』), 공산 혁명가였던 ‘체 게바라’와 공산주의자로 오인되기도 했던 배우, ‘챨리 채플린’의 포스터 패러디, 서양의 비밀 결사조직인 프리 메이슨의 상징들(표지에 그려진 피라미드, 영화관 화면에서의 자유의 여신상, 한나가 혼자 TV를 보고 있던 방의 벽지에 그려진 마녀, 박쥐, 용의 검은 실루엣들, 석공들의 직각자와 컴퍼스, 영국왕실문양 등), 그리고 고릴라와 한나의 심야 외출의 동선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 여러 자료를 참고하여 그것이 함축하는 바를 찾으려 노력하였다. 그 결과 이 텍스트가 문화막시즘이라는 이데올로기와 소아성애를 암시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때로는 한 작가의 여러 작품을 같이 읽어보는 것이 창작 의도에 다가갈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만일 그 안에서 일관된 서사 형식과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작가의 사소한 관심사가 아니라 모종의 세계관의 투영이라는 추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존 클라센의 『모자 삼부작』 평론이 그런 예이다.[6]  『모자 삼부작』이란 모자를 모티브로 한 일련의 작품인 『내 모자가 어디 갔을까』(2011), 『이건 내 모자가 아니야』(2012). 『모자를 보았어』(2016)를 가리키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 2013년도 칼데콧 수상작인 『이건 내 모자가 아니야』을 읽었을 때 그 작품이 적자생존의 진화론적 세계관을 투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작은 물고기가 신뢰했던 꽃게의 배반에 힘입어 큰 물고기가 어두운 물풀 숲 속에 잠입했던 작은 물고기를 응징한 것, 그리고 검은 색과 짙은 회색의 어두운 바닷속 풍경과 큰 물고기의 가는 눈에 서린 냉혹함은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세 작품 모두의 공통점인 아이러니와 블랙 코미디라는 장르적 특성은 허무주의 세계관을 부각시키는데 효과적이었다. 마지막 작품인 『모자를 보았어』 결론에서 그러한 해석은 더욱 굳어졌다. 이 텍스트는 사막에 놓인 모자 한 개를 놓고 암투를 벌이던 두 거북이가 각자 모자를 머리에 얹은 채 어두운 밤하늘로 날아가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아이러니는 바로 이 판타지적 결말에 있다. 두 거북은 갈망했던 모자를 소유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작은 머리를 덮어버린 모자는 입이 없는 그들의 유일한 소통의 수단이었던 눈을 가려 버린다. 앞 못보는 신세가 되어 나란히 어두운 하늘로 부유하는 그들의 모습은 허무주의의 탁월한 시각적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림책 베이직 9월호에서는 토미 웅거러의 작품인 “토미 웅거러의 소녀들: 제랄다, 티파니, 알뤼메트”를 다루었다. 이 세 작품은 토미 웅거러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고 있지만 세계관적 접근을 통해 문화막시즘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투영되고 있음이 지적되었다. 세 작품 모두에서 그려지는 가족, 소녀, 성인의 이미지에서는 전통적인 ‘가족’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친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이 등장하지 않으며, 각각의 소녀들은 지혜롭고, 자비심이 있고, 때로는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는 반면, 성인들은 어리석고 폭력적이며 위선적이다. 세 소녀들은 아동인 동시에 여성 캐릭터라는 점에서 백인 남성을 권력자로, 여성과 아동은 약자로 나누어 그 힘의 관계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문화 막시즘의 도식에 들어맞는다.[7]

지금까지의 논의로 인해 그림책 비평에서 세계관의 탐구가 가장 우선되는 작업처럼 여겨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세계관적 접근에서 내용이 비평의 전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비평에서는 당연히 예술적 기교와 인간 경험과의 연관성 측면도 다루어져야 한다. 어린이가 주인공인 경우 그 텍스트가 어린이의 경험을 문자적, 시각적으로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령 존 버닝햄 작품의 경우 어린이의 상상놀이가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 주의깊게 살펴보고 그러한 표현 양식과 메시지와의 연관성을 분석해야 한다[8]. 이것 역시 묘사, 해석, 평가 모든 요소에서 다루어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평론가에게도 인간 존재론적 자각과 겸손의 태도가 필요함을 지적하고자 한다. 즉, 해석의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어떤 해석도 전적으로 옳다는 보장은 없다. 신학적인 용어를 빌자면, 해석의 확실성을 자랑하는 것은 교만의 죄를 짓는 것이며, 반대로 어떤 해석도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태만이라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9]. 하나의 해석만이 옳다는 주장은 대화의 가능성을 닫게 하며, 반대로 독자의 해석을 텍스트의 저자나 텍스트 자체보다 우위에 두는 것은 독자의 책임을 방기(放棄)하는 것이다. 인간의 유한성과 인식론적 한계로 인해 우리의 앎은 언제나 제약을 받지만, 항상 더 좋은 해석은 가능하다. 좋은 그림책 평론은 세상과 인간과 삶에 대한 대화를 진전시키고,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다. 따라서 미술평론가 Barrett(2000/2004)[10]이 제안한 것처럼 비평은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한다. 이 ‘그림책의 세계관’ 코너가 그러한 “창조적 이해”[11]의 공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1]  현은자(2017). 어린이 그림책 서평에 내포된 윤리적 속성. 『어린이문학교육연구』 18:2.207-226.                                                                
[2] C.S. Lewis (1961/2001). 『문학비평에서의 실험』 p. 35.
[3] Boorstin(1962/2004). 『이미지와 환상』
[4] Vanhoozer 외 (2007/2009). 『문화해석』 p. 653
[5] 현은자, 이지운 (2020). Anthony Browne 의 『고릴라』에 그려진 전복의 이미지. 『어린이문학교육연구』 22(1). 1-25. 현은자(2022) 앤서니 브라운의 『고릴라』는 어린이를 위한 텍스트인가. 『그림책 베이직』 9월호.
[6] 현은자, 김주아, 국경아 (2018). 존 클라센의 『모자 삼부작』에 대한 세계관적 접근. 『어린이문학교육연구』 19(4). 199-224.
[7] 정일권(2020). 『문화막시즘의 황혼』
[8] 현은자(2022) 존 버닝햄의 백일몽을 꾸는 아이들. 『그림책 베이직』 12월호

[9] K. Vanhoozer (1998/2003). 『이 텍스트에 의미가 있는가』  pp. 741-747.
[10] Barrett(2000/2004) 『미술비평』
[11] 문학이론가 바흐친(M. Bakhtin)은 공감을 통해 다른 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그가 “창조적 이해”라고 부른 것을 제안했다. 이에 따르면 거대하고 비판적인 대화에서 모든 당사자가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을 유지하지만, 다른 이들한테서 홀로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운다. (재인용, D. Naugle, 『세계관』, p. 543.)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후 Eastern Michigan University 에서 석사,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어린이문학교육학회 회장 및 한국 기독교 유아교 육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아동 청소년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대학 부설 생활과 학 연구소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기독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이해>(공저), <그림책과 예술교육>(공저>, <그림책으로 보는 아동과 우리사회>(공저), <100권의 그림책>(공저) 등 그림책 관련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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