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닝햄의 백일몽을 꾸는 아이들
존 버닝햄(John Burningham)(1936-2019)의 작품 대부분은 판타지 그림책으로 분류된다. 판타지는 문학 용어로서 불가능하고 초자연적인 캐릭터나 사건, 배경을 다루는 모든 서사를 의미한다. 그림책에 판타지가 많은 이유는 어린이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상상 세계를 즐긴다는 통념 때문일 것이다. 존 버닝햄의 대표적인 판타지로는 『지각대장 존』(John Patrick Norman McHennessey: The boy who was always late)(1987/1996), 『알도』(Aldo)(1992/1996), 『셜리야, 물가에 가지마』(Shirley, come away from the water)(1978/2003), 『셜리야, 목욕은 이제 그만!』(Time to get out of the bath, Shirley)(1979/2004), 『구름나라』(Cloud land)(1996/1997) 등을 들 수 있다.
『지각대장 존』은 존 버닝햄의 작품 중에서 국내에 가장 먼저 소개된 작품이다.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존이라는 아이는 등굣길에 매번 여러 가지 사건을 만나서 지각하게 되고 그때마다 교사로부터 과도한 벌을 받는다. 하루는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무사히 학교에 도착했지만 이번에는 교사가 교실 천장 위에 고릴라에 의해 붙들려 있다. 존은 교사의 구조 요청에도 불구하고 교사가 자신에게 한 것과 똑같이 응대하고는 가버린다. 존은 그 다음 날 아침에도 등굣길에 나선다. 이 작품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존이 당한 일이 실제인지 아니면 존의 상상인지 판단할 수 없어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나 하수구에서 나온 악어가 존의 책가방을 물거나, 덤불에서 나온 사자가 바지를 물어뜯거나, 다리에서 큰 파도가 덮치는 등의 사건, 그리고 고릴라가 선생님을 천장에 매단 사건은 현실에서 있음직한 일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알도』에서 알도는 어떤 소녀의 상상 속 친구의 이름이다. 이 스토리는 소녀의 일인칭 화법으로 진행되는데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인공은 소녀가 아니라 알도이다. 소녀는 마치 일인극의 등장인물처럼 자신을 소개한다. “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라고 자신을 소개한 소녀는 자기에게는 TV도 있고 장난감도 많지만 같이 놀 친구가 없다고 말한다. 그렇게 혼자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던 소녀에게 의인화된 토끼가 나타난다. 토끼는 소녀만큼 크고 소녀의 침대 옆의 깔개와 흡사한 패턴과 색의 목도리를 하고 있다. 그 색이 푸른빛을 띠고 있으므로 색이 성을 상징한다는 암묵적 지식으로 인해 독자들은 의인화된 토끼를 남성으로 보게 된다. 알도는 다른 아이들의 괴롭힘으로부터 소녀를 구해주고, 밝은 낮이나 어두운 밤에도, 빙판에서 스케이트를 탈 때에도 소녀와 함께 한다. 알도는 한밤 중 소녀가 침대 맡에서 책을 읽어주기도 한다. 이렇게 알도는 소녀의 친구, 보호자, 그리고 부모의 대리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소녀는 자신이 알도를 잊고 지내는 때도 있겠지만 알도가 항상 자신 곁에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셜리야, 물가에 가지마』는 셜리와 부모, 세 명이 해변으로 가는 장면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헤엄치기 쌀쌀한 날씨이므로 부모는 바닷가에 자리를 잡고 앉고, 셜리는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홀로 서 있다. 엄마는 셜리에게 다른 아이와 같이 놀라고 권유하지만 셜리는 이미 자신의 상상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중이다. 페이지를 넘기면 화면 왼편에서는 비치 의자에 앉아있는 엄마의 독백과 같은 잔소리가 이어지고, 오른편에는 셜리의 신나는 상상 세계가 전개된다. 셜리는 해변에서 만난 강아지를 쪽배에 태우고 해적선에 접근하였다가 해적들에게 붙들려 한바탕 격투를 벌인다. 용감한 셜리는 해적들의 보물섬 지도를 탈취하고 섬에 가서 보물함에 있던 왕관을 쓰고 쪽배를 저어 돌아온다. 날이 어두워지자 엄마는 잠자고 있는 아빠를 깨우고 세 식구는 해변을 떠난다. 셜리의 손은 엄마의 손에 단단히 쥐어져 있어서 엄마가 셜리를 억지로 잡아끄는 듯한 느낌을 준다.
『셜리야, 목욕은 이제 그만!』에서도 셜리와 엄마가 등장한다. 셜리는 지금 물이 반쯤 채워진 욕조 안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목욕수건을 들고 수도꼭지를 잠그고 있는 엄마는 물 위에 떠있는 장난감들을 쳐다보고 있는 셜리에게 “셜리야, 너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는 거니?”라며 핀잔을 준다. 그 후로 화면 왼편에서는 엄마의 독백과 같은 잔소리가 이어지고, 오른편에는 욕조의 배수구를 통해 밖으로 나가버린 셜리의 신나는 모험 이야기가 그림으로만 펼쳐진다. 셜리는 엄마가 가져온 목욕수건을 몸에 감고 장난감 오리를 타고 강으로 흘러 내려가 말 탄 기사를 만난다. 세 마리의 말에는 기사와 함께 각각 셜리, 왕, 왕비가 타고 있다. 성에 도착한 후 왕과 왕비도 각자 비닐 오리를 크게 만들어 강 위에서 셜리와 밀치기 놀이를 한다. 셜리의 막대에 밀려서 물에 빠진 왕과 왕비는 웃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셜리는 물이 빠진 욕조 안에서 수건을 감고 서 있고 욕조 밖의 엄마와 셜리는 서로 아무 말도, 아무 표정도 없이 마주 보고 있다. 욕조 바닥에는 셜리의 오리 장난감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구름 나라』에서는 앨버트라는 소년이 등장한다. 이 스토리는 앨버트네 가족이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절벽 아래로 떨어진 앨버트는 구름 위에 사는 아이들의 주문으로 몸이 가벼워져서 공중에 뜨게 되었다. 앨버트와 구름나라 아이들은 같이 식사도 하고 높은 구름 위에서 뛰어내리기 놀이와 공놀이를 하며 신나게 놀았다. 천둥 번개가 치자 아이들은 신나게 소리 지르며 악기를 두드리고 비가 오자 수영하고 무지개가 뜨자 그림을 그리고 바람이 세게 불자 달리기 시합을 하며 놀았다. 그러다가 혼자 뒤처진 앨버트는 잠시 당황했으나 비행기가 남긴 작은 구름을 따라 아이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한참 아이들과 놀던 앨버트가 집에 가고 싶어하는 것을 알아챈 여왕님의 배려 덕분에 앨버트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자기 방의 침대에서 깨어난 앨버트의 옆에서는 부모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보고 있다. 그 후 그는 가끔 구름 나라로 돌아가 그곳 친구들과 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도 창밖을 내다보며 구름 나라에서 들은 주문을 기억해내려 중얼거리는 앨버트를 보고 아이들은 “재 좀 봐. 또 시작이다. 저 앤 만날 저렇게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한다니까.”라고 흉을 본다.
그림책에 그려진 아이들의 상상 놀이는 그림책 연구자들의 주된 연구주제이기도 하다(1). 히로꼬 사사키는 어린이의 상상놀이를 다룬 장(chapter)에서 존 버닝햄의 작품 다수를 언급하고 있다. 특별히, 『셜리야 목욕은 이제 그만!』에서는 단조로운 모노톤의 엄마의 세계는 왼편에, 밝은 색조의 판타지인 셜리의 세계는 오른편으로 분리됨으로써 셜리와 엄마의 심리적 세계의 단절을 효과적으로 그려내고 있다고 평론한다. 창작 그림책에 그려진 아동의 놀이 184종을 내용 분석한 연구(2)는 그림책에서 아이들의 단독놀이가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대부분은 상상놀이임을 보고하였다. 아이들이 즐기는 상상놀이 대부분은 여럿이 하는 사회극놀이의 형태를 띄므로 이러한 연구 결과는 그림책 작가들이 아이들의 단독 상상놀이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놀이들은 대부분 주변의 놀이 소재, 놀이공간, 형제, 자매, 성인, 부모 등의 인적 요인, 그리고 개인적 요인이라는 네 가지 요인으로 인해 촉발되고 있었으며, 개인적 요인에는 부정적, 긍정적 심리가 포함되었다.
이 연구의 분류법을 따른다면 존 버님햄의 작품에서 그려지는 상상 놀이는 혼자 놀이이며 주로 부정적 정서로 인해 촉발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될 수 있다. 존, 알도의 소녀, 셜리, 앨버트는 외부의 자극 없이 혼자 상상의 세계에 빠져 들어가며, 그들의 세계는 외로움이라는 부정적인 정서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등굣길에서, 해변에서, 욕조 안에서, 교실에서 등 혼자 있는 공간에서 손쉽게 상상의 세계에 탐닉한다. 따라서 이 아이들의 상상 세계는 백일몽(daydream)에 가깝다. 백일몽의 사전적 의미는 “한낮에 꾸는 꿈이란 뜻으로, 헛된 공상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몽상이나 망상과도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3)로 되어 있다. 이 정의를 제공한 위키백과는 백일몽과 관련한 전문가들의 견해도 소개하고 있는데, 가령, 칙센트미하이의 『몰입』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물론 TV 시청처럼 어떤 외적 자극에 정신을 내맡기기보다는, 습관을 통해서 정신을 통제하는 것이 의식의 혼돈 상태를 피하는 바람직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하며, 플로우(몰입) 활동에 으레 따르는 목표와 규칙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정신을 이용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 가운데 하나로 공상을 들 수 있다. 이는 마음속에서 가상으로 어떤 일련의 사건들을 그려보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정리하는 일에 이처럼 쉬워 보이는 방법조차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공상 및 정신적 심상에 대해 다른 어떤 학자보다 많은 연구를 한 예일 대학의 싱어 교수에 따르면, 전혀 공상을 할 줄 모르는 아이들도 많다고 한다. 공상은 유익한 점이 많다. 먼저, 공상 속에서나마 불쾌한 현실을 보상함으로써 감정의 질서를 수립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공상은 의식의 복합성을 높이는 일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예컨대 아이들이 ㅡ어른들도 마찬가지로ㅡ 상상을 통해서 당시 상황을 반복적으로 재현해 봄으로써 지금껏 문제 해결에 최선이라고 생각해 왔던 방법을 수정할 수도 있고, 다른 대안도 생각해 보며, 예상치 않은 결과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기술을 닦는다면 공상도 매우 즐거운 것이 될 수 있다.(4)
하버드대 정신과 의사인 스리니 필레이의 책에서의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 일하다가 무심코 창문 밖을 내다보면 즐거울지는 모르지만 창의성이나 생산성을 증가시키는 이상적인 방법은 아니다. 공상에 빠져드는 것은 인지 실패나 인지 피로의 신호이고, 이때 뇌는 휴식이 필요하므로 무단으로 휴식을 취한다. 이것은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계획해서 공상을 하는 것은 건설적이고 원기를 회복시키는 행위이다. 이것은 낭떠러지에서 물웅덩이로 다이빙하는 것과 같다.
이들의 견해는 백일몽의 가치와 긍정적인 측면을 상술하고 있는 동시에 부정적인 측면도 지적하고 있다. 즉, 공상에는 기분을 전환하고 감정의 질서를 회복하고 인지적 피로를 해소하고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나, 공상이 그러한 긍정적인 효과를 낳기 위해서는 목표와 규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백일몽에 대한 심리학과 정신의학적 견해라면, C.S. 루이스의 견해는 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문학비평서(5)의 ’판타지‘ 장에서 꽤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백일몽 혹은 공상을 다루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백일몽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기 본위의 공상이고, 또 하나는 사심 없는 공상이다. 전자는 백일몽을 꾸는 사람이 언제나 주인공이고 모든 것을 자기 눈을 통해 바라보지만, 후자는 백일몽을 꾸는 사람이 백일몽의 주인공이 아니며, 그 속에 등장하지 않을 수도 있다. 경치좋은 곳에 가서 그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의 경우가 그것에 해당한다. 또한, 전자에서 찬사를 받는 것은 본인이지만, 후자에서 백일몽을 꾸는 사람은 주인공이 아니라 대부분 구경꾼으로 그 자리에 있게 되므로 그 대상이 찬사를 받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후자의 경우는 문학적 창작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백일몽에 대한 루이스의 분류에 따르면 존 버닝햄이 그리는 아이들의 백일몽은 전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백일몽에서는 항상 자신들이 주인공이며 그들은 그 안에서 자기 중심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존 버닝햄은 백일몽을 꾸는 아이들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작가의 성장배경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그림책 작가들은 작가 내면에서 아직도 숨 쉬고 있는 아이들을 그리곤 하기 때문이다(6). 존 버닝햄은 국내에 잘 알려진 만큼 그에 관한 정보도 꽤 많은 편이다.(7)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학교 친구들하고 어울리지 않고 무심한 얼굴로 자기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아이였다고 한다. 또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답게 청년 시절에는 병역을 기피하였으며 그 대신 학교 건설이나 산림관리와 소작일을 하기도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세일즈맨이었기 때문에 그의 가족들은 자주 이사를 다녔고 그로 인해 버닝햄은 열 번이나 학교를 전학해야 했다. 그 학교 중에는 닐이 설립한 서머힐 스쿨도 있었는데, 서머힐은 영국학교의 전통과 관습을 따르지 않는 학교로 유명하다. 그곳에서 버닝햄이 받은 자유주의적 교육이 그의 예술 활동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는 1963년에는 『깃털 없는 거위, 보르카』로, 1970년에는 『검피 아저씨의 뱃놀이』로 두 번이나 케이트 그린어웨이 상을 받음으로써 그림책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존 버닝햄은 언젠가 “나는 어린이책을 만드는 것이 즐겁다. 그 과정은 내가 최대한 자유롭게 일하며 내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시켜 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내 작품을 읽고 보는 어린이들이 최대한 자유롭게 자기 나름의 상상을 펼 수 있도록 지나치게 형식적이거나 결말이 내려진 이야기를 그려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8) 이런 여러 정황들을 고려할 때 존 버닝햄의 몽상하는 아이들은 작가의 내면에 존재하는 어린이의 투사(投射)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루이스가 백일몽을 꾸는 사람의 두 번째 타입, 즉 자신의 백일몽을 문학적 창작으로 전환한 경우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여기에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백일몽을 꾸는 사람들이 모두 창작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모든 작가가 자신의 백일몽 안에서 이야기를 생산해 내는 것은 아니다. 재능있는 사람이라면 공상에서 문학적 창작으로 쉽게 전환이 이루어지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주인공 아이들이 꾸는 백일몽은 열린 결말과도 모종의 관계가 있다. 수용자 중심의 비평접근을 취하는 평론가들은 열린 결말이라는 문학적 전략이 독자들에게 ‘해석의 자유’를 허락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실용적, 윤리적, 그리고 현실성 혹은 가능성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실용적 측면이란 ’해석의 자유‘가 과연 독자에게 유익을 주는가의 문제이며, 윤리적 측면은 모든 해석이 동등하게 대접받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며, 현실성이란 과연 독자가 ’자유로운 해석 공간‘을 제공받는 것이 가능한가의 문제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논제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루기로 하고, 지금은 세 번째 논제만을 잠시 다루도록 한다. 결론적으로 그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작가는 항상 독자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문학적 전략(그림책의 경우에는 글, 그림, 페리텍스트)을 사용하여 독자를 설득하려고 노력한다. 그 결과 만일 독자들이 선입견 없이 텍스트를 존중하여 성실하게 읽으려고 한다면 작가의 의도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이 작품들에서 독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그 다음 줄거리는 아마도 이 두 가지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⑴존, 셜리, 알도의 소녀, 그리고 앨버트는 백일몽에서 자신의 긴장과 스트레스를 해결하였으므로 현실의 삶으로 돌아와 활달하고 즐겁게 살아갈 것이다. ⑵그들은 또 다시 혼자만의 백일몽으로 빠져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전자보다는 후자의 해석이 더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아이들의 얼굴 윤곽과 표정에서는 감정의 변화가 거의 없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상상의 놀이를 즐길 때 그들의 얼굴에는 천진함과 기쁨과 즐거움이 내비치기 때문이다. 이 아이들이 백일몽 속에서만 활기가 넘쳐 보이는 이유는 주변 캐릭터 탓일 수 있다. 교사 혹은 양육자라고 할 수 있는 성인 캐릭터는 한결같이 아이들의 상상 놀이를 이해하지 못하며 그들과 소통하려 하지 않는다(『구름나라』는 예외일 수 있다). 교사와 학생,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친밀감 대신 적대적(『지각대장 존』)이거나 냉냉한 분위기(『알도』, 『셜리 시리즈』)가 흐르고 있다. 해변에서나 목욕탕에서도 셜리와 엄마는 단 한 번도 의미 있는 대화나 눈 맞춤을 하지 않는다. 엄마는 쉼없이 셜리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거나 경고하고 있지만 셜리는 이미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해 있다. 그런데 성인 캐릭터들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알도의 이름없는 소녀의 부모는 때때로 심한 언쟁을 벌이고, 셜리의 부모들은 해변에 나란히 앉아 있지만 의미있는 상호작용은 하지 않는다. 셜리의 아빠는 의자에 앉아 신문을 펴들고 읽다가 결국은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고 깊은 잠에 빠져든다. 이렇듯 모든 캐릭터들은 물리적으로는 비록 같은 공간에 있을지라도 심리적으로는 대양에 떠 있는 작은 섬들과 같은 고독한 존재들이다. 셜리의 부모는 그 공간으로부터도 소외되어 있다. 그들의 행위는 해변과 바다라는 공간과 어떤 접촉점도 없으며 평상시의 습관적인 일들(routine)을 반복하는 것 뿐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아이들의 또래 관계이다. 그들은 전적으로 외톨이다. 존과 셜리에게는 친구가 없고 알도의 소녀의 학우들은 주인공에게 적대적이며 앨버트의 친구들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주인공을 비아냥거린다.
존 버닝햄은 자신의 그림책을 보는 어린이 독자들이 최대한 자유롭게 상상을 펼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지만 그가 그리는 것은 동심의 자유로운 상상 세계가 아니라 주위와는 단절된 외로운 아이들의 백일몽이다. 그리고 이 백일몽은 창조세계의 실재(實在)를 부정하고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린 포스트모더니즘의 허무함을 은유한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선과 점으로 이어진 무표정한 얼굴은 인간 실존의 공허함을 상징하며, 백일몽은 무의미함의 심연을 가려주는 ‘유용한 허구’일 뿐이다.
[1] 히로꼬 사시키 저(2000/2004). 『그림책의 심리학』. 고향옥, 이경옥 역.
[2] 신미성, 현은자(2019). 창작 그림책에 나타난 아동의 놀이. 『어린이문학교육연구』, 20(4), 163-191.
[3] https://namu.wiki/w/%EB%B0%B1%EC%9D%BC%EB%AA%BD
[4]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몰입』 (최인수 역) p. 224
[5] C.S. 루이스 『오독』 (홍종락 역). pp. 68-69.
[6] 히로꼬 사사키. 『그림책의 심리학
[7] https://ko.wikipedia.org/wiki/%EC%A1%B4_%EB%B2%84%EB%8B%9D%ED%96%84
[8] 김현희 외 (2002). 환상그림책으로의 여행. p. 170. 다음세대
|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후 Eastern Michigan University 에서 석사,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어린이문학교육학회 회장 및 한국 기독교 유아교 육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아동 청소년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대학 부설 생활과 학 연구소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기독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이해>(공저), <그림책과 예술교육>(공저>, <그림책으로 보는 아동과 우리사회>(공저), <100권의 그림책>(공저) 등 그림책 관련 저서가 있다. |
존 버닝햄의 백일몽을 꾸는 아이들
존 버닝햄(John Burningham)(1936-2019)의 작품 대부분은 판타지 그림책으로 분류된다. 판타지는 문학 용어로서 불가능하고 초자연적인 캐릭터나 사건, 배경을 다루는 모든 서사를 의미한다. 그림책에 판타지가 많은 이유는 어린이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상상 세계를 즐긴다는 통념 때문일 것이다. 존 버닝햄의 대표적인 판타지로는 『지각대장 존』(John Patrick Norman McHennessey: The boy who was always late)(1987/1996), 『알도』(Aldo)(1992/1996), 『셜리야, 물가에 가지마』(Shirley, come away from the water)(1978/2003), 『셜리야, 목욕은 이제 그만!』(Time to get out of the bath, Shirley)(1979/2004), 『구름나라』(Cloud land)(1996/1997) 등을 들 수 있다.
『지각대장 존』은 존 버닝햄의 작품 중에서 국내에 가장 먼저 소개된 작품이다.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존이라는 아이는 등굣길에 매번 여러 가지 사건을 만나서 지각하게 되고 그때마다 교사로부터 과도한 벌을 받는다. 하루는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무사히 학교에 도착했지만 이번에는 교사가 교실 천장 위에 고릴라에 의해 붙들려 있다. 존은 교사의 구조 요청에도 불구하고 교사가 자신에게 한 것과 똑같이 응대하고는 가버린다. 존은 그 다음 날 아침에도 등굣길에 나선다. 이 작품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존이 당한 일이 실제인지 아니면 존의 상상인지 판단할 수 없어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나 하수구에서 나온 악어가 존의 책가방을 물거나, 덤불에서 나온 사자가 바지를 물어뜯거나, 다리에서 큰 파도가 덮치는 등의 사건, 그리고 고릴라가 선생님을 천장에 매단 사건은 현실에서 있음직한 일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알도』에서 알도는 어떤 소녀의 상상 속 친구의 이름이다. 이 스토리는 소녀의 일인칭 화법으로 진행되는데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인공은 소녀가 아니라 알도이다. 소녀는 마치 일인극의 등장인물처럼 자신을 소개한다. “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라고 자신을 소개한 소녀는 자기에게는 TV도 있고 장난감도 많지만 같이 놀 친구가 없다고 말한다. 그렇게 혼자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던 소녀에게 의인화된 토끼가 나타난다. 토끼는 소녀만큼 크고 소녀의 침대 옆의 깔개와 흡사한 패턴과 색의 목도리를 하고 있다. 그 색이 푸른빛을 띠고 있으므로 색이 성을 상징한다는 암묵적 지식으로 인해 독자들은 의인화된 토끼를 남성으로 보게 된다. 알도는 다른 아이들의 괴롭힘으로부터 소녀를 구해주고, 밝은 낮이나 어두운 밤에도, 빙판에서 스케이트를 탈 때에도 소녀와 함께 한다. 알도는 한밤 중 소녀가 침대 맡에서 책을 읽어주기도 한다. 이렇게 알도는 소녀의 친구, 보호자, 그리고 부모의 대리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소녀는 자신이 알도를 잊고 지내는 때도 있겠지만 알도가 항상 자신 곁에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셜리야, 물가에 가지마』는 셜리와 부모, 세 명이 해변으로 가는 장면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헤엄치기 쌀쌀한 날씨이므로 부모는 바닷가에 자리를 잡고 앉고, 셜리는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홀로 서 있다. 엄마는 셜리에게 다른 아이와 같이 놀라고 권유하지만 셜리는 이미 자신의 상상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중이다. 페이지를 넘기면 화면 왼편에서는 비치 의자에 앉아있는 엄마의 독백과 같은 잔소리가 이어지고, 오른편에는 셜리의 신나는 상상 세계가 전개된다. 셜리는 해변에서 만난 강아지를 쪽배에 태우고 해적선에 접근하였다가 해적들에게 붙들려 한바탕 격투를 벌인다. 용감한 셜리는 해적들의 보물섬 지도를 탈취하고 섬에 가서 보물함에 있던 왕관을 쓰고 쪽배를 저어 돌아온다. 날이 어두워지자 엄마는 잠자고 있는 아빠를 깨우고 세 식구는 해변을 떠난다. 셜리의 손은 엄마의 손에 단단히 쥐어져 있어서 엄마가 셜리를 억지로 잡아끄는 듯한 느낌을 준다.
『셜리야, 목욕은 이제 그만!』에서도 셜리와 엄마가 등장한다. 셜리는 지금 물이 반쯤 채워진 욕조 안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목욕수건을 들고 수도꼭지를 잠그고 있는 엄마는 물 위에 떠있는 장난감들을 쳐다보고 있는 셜리에게 “셜리야, 너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는 거니?”라며 핀잔을 준다. 그 후로 화면 왼편에서는 엄마의 독백과 같은 잔소리가 이어지고, 오른편에는 욕조의 배수구를 통해 밖으로 나가버린 셜리의 신나는 모험 이야기가 그림으로만 펼쳐진다. 셜리는 엄마가 가져온 목욕수건을 몸에 감고 장난감 오리를 타고 강으로 흘러 내려가 말 탄 기사를 만난다. 세 마리의 말에는 기사와 함께 각각 셜리, 왕, 왕비가 타고 있다. 성에 도착한 후 왕과 왕비도 각자 비닐 오리를 크게 만들어 강 위에서 셜리와 밀치기 놀이를 한다. 셜리의 막대에 밀려서 물에 빠진 왕과 왕비는 웃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셜리는 물이 빠진 욕조 안에서 수건을 감고 서 있고 욕조 밖의 엄마와 셜리는 서로 아무 말도, 아무 표정도 없이 마주 보고 있다. 욕조 바닥에는 셜리의 오리 장난감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구름 나라』에서는 앨버트라는 소년이 등장한다. 이 스토리는 앨버트네 가족이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절벽 아래로 떨어진 앨버트는 구름 위에 사는 아이들의 주문으로 몸이 가벼워져서 공중에 뜨게 되었다. 앨버트와 구름나라 아이들은 같이 식사도 하고 높은 구름 위에서 뛰어내리기 놀이와 공놀이를 하며 신나게 놀았다. 천둥 번개가 치자 아이들은 신나게 소리 지르며 악기를 두드리고 비가 오자 수영하고 무지개가 뜨자 그림을 그리고 바람이 세게 불자 달리기 시합을 하며 놀았다. 그러다가 혼자 뒤처진 앨버트는 잠시 당황했으나 비행기가 남긴 작은 구름을 따라 아이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한참 아이들과 놀던 앨버트가 집에 가고 싶어하는 것을 알아챈 여왕님의 배려 덕분에 앨버트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자기 방의 침대에서 깨어난 앨버트의 옆에서는 부모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보고 있다. 그 후 그는 가끔 구름 나라로 돌아가 그곳 친구들과 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도 창밖을 내다보며 구름 나라에서 들은 주문을 기억해내려 중얼거리는 앨버트를 보고 아이들은 “재 좀 봐. 또 시작이다. 저 앤 만날 저렇게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한다니까.”라고 흉을 본다.
그림책에 그려진 아이들의 상상 놀이는 그림책 연구자들의 주된 연구주제이기도 하다(1). 히로꼬 사사키는 어린이의 상상놀이를 다룬 장(chapter)에서 존 버닝햄의 작품 다수를 언급하고 있다. 특별히, 『셜리야 목욕은 이제 그만!』에서는 단조로운 모노톤의 엄마의 세계는 왼편에, 밝은 색조의 판타지인 셜리의 세계는 오른편으로 분리됨으로써 셜리와 엄마의 심리적 세계의 단절을 효과적으로 그려내고 있다고 평론한다. 창작 그림책에 그려진 아동의 놀이 184종을 내용 분석한 연구(2)는 그림책에서 아이들의 단독놀이가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대부분은 상상놀이임을 보고하였다. 아이들이 즐기는 상상놀이 대부분은 여럿이 하는 사회극놀이의 형태를 띄므로 이러한 연구 결과는 그림책 작가들이 아이들의 단독 상상놀이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놀이들은 대부분 주변의 놀이 소재, 놀이공간, 형제, 자매, 성인, 부모 등의 인적 요인, 그리고 개인적 요인이라는 네 가지 요인으로 인해 촉발되고 있었으며, 개인적 요인에는 부정적, 긍정적 심리가 포함되었다.
이 연구의 분류법을 따른다면 존 버님햄의 작품에서 그려지는 상상 놀이는 혼자 놀이이며 주로 부정적 정서로 인해 촉발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될 수 있다. 존, 알도의 소녀, 셜리, 앨버트는 외부의 자극 없이 혼자 상상의 세계에 빠져 들어가며, 그들의 세계는 외로움이라는 부정적인 정서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등굣길에서, 해변에서, 욕조 안에서, 교실에서 등 혼자 있는 공간에서 손쉽게 상상의 세계에 탐닉한다. 따라서 이 아이들의 상상 세계는 백일몽(daydream)에 가깝다. 백일몽의 사전적 의미는 “한낮에 꾸는 꿈이란 뜻으로, 헛된 공상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몽상이나 망상과도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3)로 되어 있다. 이 정의를 제공한 위키백과는 백일몽과 관련한 전문가들의 견해도 소개하고 있는데, 가령, 칙센트미하이의 『몰입』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하버드대 정신과 의사인 스리니 필레이의 책에서의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이들의 견해는 백일몽의 가치와 긍정적인 측면을 상술하고 있는 동시에 부정적인 측면도 지적하고 있다. 즉, 공상에는 기분을 전환하고 감정의 질서를 회복하고 인지적 피로를 해소하고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나, 공상이 그러한 긍정적인 효과를 낳기 위해서는 목표와 규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백일몽에 대한 심리학과 정신의학적 견해라면, C.S. 루이스의 견해는 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문학비평서(5)의 ’판타지‘ 장에서 꽤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백일몽 혹은 공상을 다루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백일몽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기 본위의 공상이고, 또 하나는 사심 없는 공상이다. 전자는 백일몽을 꾸는 사람이 언제나 주인공이고 모든 것을 자기 눈을 통해 바라보지만, 후자는 백일몽을 꾸는 사람이 백일몽의 주인공이 아니며, 그 속에 등장하지 않을 수도 있다. 경치좋은 곳에 가서 그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의 경우가 그것에 해당한다. 또한, 전자에서 찬사를 받는 것은 본인이지만, 후자에서 백일몽을 꾸는 사람은 주인공이 아니라 대부분 구경꾼으로 그 자리에 있게 되므로 그 대상이 찬사를 받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후자의 경우는 문학적 창작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백일몽에 대한 루이스의 분류에 따르면 존 버닝햄이 그리는 아이들의 백일몽은 전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백일몽에서는 항상 자신들이 주인공이며 그들은 그 안에서 자기 중심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존 버닝햄은 백일몽을 꾸는 아이들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작가의 성장배경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그림책 작가들은 작가 내면에서 아직도 숨 쉬고 있는 아이들을 그리곤 하기 때문이다(6). 존 버닝햄은 국내에 잘 알려진 만큼 그에 관한 정보도 꽤 많은 편이다.(7)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학교 친구들하고 어울리지 않고 무심한 얼굴로 자기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아이였다고 한다. 또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답게 청년 시절에는 병역을 기피하였으며 그 대신 학교 건설이나 산림관리와 소작일을 하기도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세일즈맨이었기 때문에 그의 가족들은 자주 이사를 다녔고 그로 인해 버닝햄은 열 번이나 학교를 전학해야 했다. 그 학교 중에는 닐이 설립한 서머힐 스쿨도 있었는데, 서머힐은 영국학교의 전통과 관습을 따르지 않는 학교로 유명하다. 그곳에서 버닝햄이 받은 자유주의적 교육이 그의 예술 활동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는 1963년에는 『깃털 없는 거위, 보르카』로, 1970년에는 『검피 아저씨의 뱃놀이』로 두 번이나 케이트 그린어웨이 상을 받음으로써 그림책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존 버닝햄은 언젠가 “나는 어린이책을 만드는 것이 즐겁다. 그 과정은 내가 최대한 자유롭게 일하며 내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시켜 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내 작품을 읽고 보는 어린이들이 최대한 자유롭게 자기 나름의 상상을 펼 수 있도록 지나치게 형식적이거나 결말이 내려진 이야기를 그려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8) 이런 여러 정황들을 고려할 때 존 버닝햄의 몽상하는 아이들은 작가의 내면에 존재하는 어린이의 투사(投射)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루이스가 백일몽을 꾸는 사람의 두 번째 타입, 즉 자신의 백일몽을 문학적 창작으로 전환한 경우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여기에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백일몽을 꾸는 사람들이 모두 창작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모든 작가가 자신의 백일몽 안에서 이야기를 생산해 내는 것은 아니다. 재능있는 사람이라면 공상에서 문학적 창작으로 쉽게 전환이 이루어지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주인공 아이들이 꾸는 백일몽은 열린 결말과도 모종의 관계가 있다. 수용자 중심의 비평접근을 취하는 평론가들은 열린 결말이라는 문학적 전략이 독자들에게 ‘해석의 자유’를 허락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실용적, 윤리적, 그리고 현실성 혹은 가능성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실용적 측면이란 ’해석의 자유‘가 과연 독자에게 유익을 주는가의 문제이며, 윤리적 측면은 모든 해석이 동등하게 대접받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며, 현실성이란 과연 독자가 ’자유로운 해석 공간‘을 제공받는 것이 가능한가의 문제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논제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루기로 하고, 지금은 세 번째 논제만을 잠시 다루도록 한다. 결론적으로 그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작가는 항상 독자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문학적 전략(그림책의 경우에는 글, 그림, 페리텍스트)을 사용하여 독자를 설득하려고 노력한다. 그 결과 만일 독자들이 선입견 없이 텍스트를 존중하여 성실하게 읽으려고 한다면 작가의 의도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이 작품들에서 독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그 다음 줄거리는 아마도 이 두 가지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⑴존, 셜리, 알도의 소녀, 그리고 앨버트는 백일몽에서 자신의 긴장과 스트레스를 해결하였으므로 현실의 삶으로 돌아와 활달하고 즐겁게 살아갈 것이다. ⑵그들은 또 다시 혼자만의 백일몽으로 빠져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전자보다는 후자의 해석이 더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아이들의 얼굴 윤곽과 표정에서는 감정의 변화가 거의 없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상상의 놀이를 즐길 때 그들의 얼굴에는 천진함과 기쁨과 즐거움이 내비치기 때문이다. 이 아이들이 백일몽 속에서만 활기가 넘쳐 보이는 이유는 주변 캐릭터 탓일 수 있다. 교사 혹은 양육자라고 할 수 있는 성인 캐릭터는 한결같이 아이들의 상상 놀이를 이해하지 못하며 그들과 소통하려 하지 않는다(『구름나라』는 예외일 수 있다). 교사와 학생,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친밀감 대신 적대적(『지각대장 존』)이거나 냉냉한 분위기(『알도』, 『셜리 시리즈』)가 흐르고 있다. 해변에서나 목욕탕에서도 셜리와 엄마는 단 한 번도 의미 있는 대화나 눈 맞춤을 하지 않는다. 엄마는 쉼없이 셜리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거나 경고하고 있지만 셜리는 이미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해 있다. 그런데 성인 캐릭터들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알도의 이름없는 소녀의 부모는 때때로 심한 언쟁을 벌이고, 셜리의 부모들은 해변에 나란히 앉아 있지만 의미있는 상호작용은 하지 않는다. 셜리의 아빠는 의자에 앉아 신문을 펴들고 읽다가 결국은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고 깊은 잠에 빠져든다. 이렇듯 모든 캐릭터들은 물리적으로는 비록 같은 공간에 있을지라도 심리적으로는 대양에 떠 있는 작은 섬들과 같은 고독한 존재들이다. 셜리의 부모는 그 공간으로부터도 소외되어 있다. 그들의 행위는 해변과 바다라는 공간과 어떤 접촉점도 없으며 평상시의 습관적인 일들(routine)을 반복하는 것 뿐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아이들의 또래 관계이다. 그들은 전적으로 외톨이다. 존과 셜리에게는 친구가 없고 알도의 소녀의 학우들은 주인공에게 적대적이며 앨버트의 친구들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주인공을 비아냥거린다.
존 버닝햄은 자신의 그림책을 보는 어린이 독자들이 최대한 자유롭게 상상을 펼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지만 그가 그리는 것은 동심의 자유로운 상상 세계가 아니라 주위와는 단절된 외로운 아이들의 백일몽이다. 그리고 이 백일몽은 창조세계의 실재(實在)를 부정하고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린 포스트모더니즘의 허무함을 은유한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선과 점으로 이어진 무표정한 얼굴은 인간 실존의 공허함을 상징하며, 백일몽은 무의미함의 심연을 가려주는 ‘유용한 허구’일 뿐이다.
[1] 히로꼬 사시키 저(2000/2004). 『그림책의 심리학』. 고향옥, 이경옥 역.
[2] 신미성, 현은자(2019). 창작 그림책에 나타난 아동의 놀이. 『어린이문학교육연구』, 20(4), 163-191.
[3] https://namu.wiki/w/%EB%B0%B1%EC%9D%BC%EB%AA%BD
[4]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몰입』 (최인수 역) p. 224
[5] C.S. 루이스 『오독』 (홍종락 역). pp. 68-69.
[6] 히로꼬 사사키. 『그림책의 심리학
[7] https://ko.wikipedia.org/wiki/%EC%A1%B4_%EB%B2%84%EB%8B%9D%ED%96%84
[8] 김현희 외 (2002). 환상그림책으로의 여행. p. 170. 다음세대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후 Eastern Michigan University 에서 석사,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어린이문학교육학회 회장 및 한국 기독교 유아교 육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아동 청소년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대학 부설 생활과 학 연구소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기독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이해>(공저), <그림책과 예술교육>(공저>, <그림책으로 보는 아동과 우리사회>(공저), <100권의 그림책>(공저) 등 그림책 관련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