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이야기, 강의 이야기: 『강물이 흘러가도록』

2022-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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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이야기, 강의 이야기:  『강물이 흘러가도록』



이 작품의 글 작가는 제인 욜런(1939-  )이며 그림 작가는 바바라 쿠니(1917-2000)다. 그림책 독자들에게 제인 욜런은 바바라 쿠니만큼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녀는 ‘미국의 안데르센’, ‘우리 시대의 이솝’이라는 찬사를 받는 글작가이다. 제인 욜런은 1939년 미국 맨해튼에서 태어났고 가족과 함께 주로 캘리포니아와 뉴욕에서 살다가 코네티컷 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매사추세츠주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다녔다. 졸업 후 뉴욕으로 이사한 그녀는 1960년대에 뉴욕의 여러 잡지와 출판사에서 편집직을 맡았고 22세에 아동도서 작가가 되었다. 그녀는 시, 소설, 동화, 민담, 판타지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 300여권을 남겼으며, 그 중 몇 작품은 그림책으로 제작이 되었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그림책으로는 『황제와 연』(에드 영 그림), 『부엉이와 보름달』(존 쇤헤르 그림) 『강물이 흘러가도록』(바바라 쿠니 그림) 『엘시와 카나리아』 (데이빗 스몰 그림) 등이 있다. 

그림 작가인 바바라 쿠니는 소개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잘 알려진 작가이다. 『챈티클리어와 여우』와 『달구지를 끌고』로 각각 1958년과 1979년에 칼데콧 메달을 두 번이나 수상했으며, 1983년에는 윌리암 스타이그와 함께 미국 도서상(National Book Award)를 공동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으며, 2000년에 출판된 『바구니달』은 그녀가 작고하기 6개월 전에 완성한 유작이기도 하다.(1)  그녀는 땅(land)의 작가라고도 할 만하다. 왜냐하면 그의 대표작인 『달구지를 끌고』(도날드 홀 글, 바바라 쿠니 그림), 『미스 럼피우스』(바바라 쿠니 글, 그림), 『바구니달』 (메리 린 레이 글, 바바라쿠니 그림)은 흙냄새 나는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인 욜런의 글에 그림을 그린 『강물이 흘러가도록』은 땅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삶의 터전을 이루며 살았던 땅의 추억을 강물로 흘려보내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배경으로 한 것이라 한다.  

『강물이 흘러가도록』(1992/2004)의 원제는 『Letting Swift River Go』 이다. 직역한다면 ‘스위프트 강이 가도록 놓아두기’ 가 될 것이다. 표지에는 작은 강과 그 강이 감싸고 도는 야트막한 언덕위의 마을, 그리고 그 강위에 놓인 작은 다리 위에서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소녀가 그려져 있다. 파란 하늘과 강물, 그리고 마을을 휘감으며 구불구불 흐르는 강과 언덕들이 그리는 곡선은 더할 나위없이 부드럽고 평온한 느낌을 준다. 


 


표제지에는 제목 아래의 작은 틀 안에 원경으로 그려진 아담한 마을이 있다. 한 장을 더 넘기면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 왼편에는 글, 그림 작가의 헌사(獻詞)가 들어있고 쿼빈 마을 역사연구협회가 이 책의 배경 이야기를 제공하였음을 밝히고 있어서 이 작품이 실제 이야기에 기초하고 있음을 실증한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다음과 같은 ‘작가의 말’이 실려 있다.

“우리 집 가까이에 있는 퀴빈 저수지는 뉴잉글랜드에서 가장 물이 맑다고 소문난 곳이지요. 이곳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하늘 높이 독수리들이 날고 사슴들은 길을 내지요. 그러나 한때는 바위투성이 언덕이 에워쌌던 스위프트 강이 흐르는 야트막한 골짜기였어요. 골짜기 마을마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거기서 평생을 산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지요, 하지만 1926년에서 1946년까지 물이 차 올라 집과 교회와 학교... 온갖 삶의 흔적이 영원히 물 속으로 사라졌어요. 퀴빈 저수지 때문에 스위프트강 마을이 가라앉은 건 그다지 유별난 사건이 아니었어요. 지역 이름만 다를 뿐 물이 필요한 세계 곳곳의 대도시 근처 어디서나 똑같은 일이 벌어지곤 했지요. ... ” 



이 이야기는 주인공인 샐리 제인의 1인칭 화법으로 서술된다. 본문 첫 몇 화면에서는 여섯 살 소녀인 샐리 제인의 유년기 이야기가 담담하게 펼쳐진다. 그녀는 나뭇잎이 붉게 물든 가을날 학교에 가는 길에서 만나는 친구들, 푸른 빛이 가득한 맑은 여름날에 즐기던 강 낚시, 공원묘지에서의 도시락 먹기, 여름날 밤 강가 호숫가에서의 잠자리, 그 밤에 듣던, 멀리서 들려오는 기차의 기적 소리, 그 소리에 놀라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올빼미, 깜빡깜빡 빛을 내며 하늘을 나는 개똥벌레의 이야기를 연이어 들려준다. 그러다가 자그마한 사건 하나가 일어난다. 어느 날 밤 그 동네 아이들이 도시에서 놀러온 아이가 가져온 유리병에 개똥벌레를 잡아 가둬 놓았고, 그것을 본 제인의 엄마는 머리를 흔들며 “놔 주렴, 셀리 제인”(You have to let them go, Sally Jane)이라고 하셨고, 나(제인)은 곧 엄마의 말에 순종했다. 겨울이면 집안의 난롯불은 훨훨 타오르고 아이들은 이불을 몇 채나 덮고 잠을 자곤 했다. 그리고 아직 눈 덮인 3월에는 단풍나무에 물통을 걸어서 나무즙의 단맛을 맛보곤 했다. 



그런데 조용하고 평온하기만 했던 이 마을에 변화가 일어났다. 어른들이 댐 건설을 두고 회의를 하더니 보스턴에 물을 대기 위해서는 스위프트 마을의 강을 막아 댐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보스턴 사람들은 그에 대한 보상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돈과 새로운 집, 그리고 더 넉넉한 생활을 약속했다고 하였다. 그 후 이 마을의 모든 것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묘지는 옮겨지고 나무들은 베어지고 집들은 파괴되었다. 주인공 소녀의 가족도 겨울에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아담한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소녀의 놀이 친구들 몇몇은 작별 인사를 할 새도 없이 각자 다른 도시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 후 7년이라는 시간 동안 댐이 건설되고 그로 인해 물길이 막히고, 강물이 소리없이 천천히 흘러 들었고, 댐의 물은 스위프트 강의 작은 마을을 여러 개 삼켜버렸다. 



세월이 흐르고 어느덧 어른이 된 주인공 소녀는 아버지와 함께 퀴빈 저수지를 찾았다. 마지막 장면의 글 텍스트는 오후 내내 배를 젓던 아버지가 호수의 어느 지점을 가리키며 말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저길 보렴, 샐리 제인. 프레스콧 마을로 가던 길 자리야. 저건 비비 시냇가 가던 길 자리고, 저긴 네가 세례를 받은 교회가 있던 자리란다. 학교가 있었고, 마을회관이 있었고, 오래된 돌집 방앗간이 거기 있었지. 다시는 그 모든 걸 못 보게 됐구나.” 그러나 제인은 물에 잠긴 동네의 옛 모습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날이 어두워지고 별빛이 개똥벌레처럼 빛날 때 제인은 배 밖으로 손을 뻗어 강물을 두 손에 모았다. 그러자 잠시 바람소리와 기차소리와 학교 가던 길에 친구들을 만났던 네거리... 지금은 사라진 그 모든 것들이 떠올랐다. “그 때 물에 잠긴 세월 저편에서 날 부르는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놔 주렴, 샐리 제인.“ (You have to let them go, Sally Jane.) 나는 점점 캄캄해지는 깊은 물 속을 들여다보며 조그맣게 웃었어요. 그리고 엄마 말씀대로 했지요.” 이 마지막 장면에는 어두워진 강물에 어스름하게 비친 나무들과 보트, 그리고 그 보트에 탄 제인과 노젓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그려져 있다.    



나는 이 “놔 주렴 샐리 제인”이라는 구절을 읽으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아니면 빈집 증후군(empty nest syndrome)을 겪는 중일까. 딸과 아들이 모두 출가해서 남편과  한가롭게 지내던 중, 미국에 있던 딸이 임신하여 출산 준비를 하기 위해 작년에 친정에 왔다. 그리고 몇 달 후 예쁜 손녀를 출산하였고, 1년 4개월 동안 집에서 같이 키우다가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부터는 아침을 먹으며 딸과 영상 통화하는 일이 일과가 되었다. 매일 아침 영상을 통해 손녀가 밥을 먹고, 미끄럼틀에 오르내리고, 보행기를 타고 돌아다니고, 욕조에서 물놀이를 하는 모습을 본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아기의 그 부드러운 피부 촉감과 새 생명이 뿜어내는 달큰한 향기, 업어달라고 내 등을 붙잡고 기어 오를 때의 그 조그마한 손의 느낌이 너무나 그립다. 한 인간을 이렇게 그리워한 적이 있었나 싶게... 가끔은 손녀의 모습에서 오래전 딸의 모습을 본다. 유난히 활동적이던 딸아이는 어릴 때부터 아기 침대 난간을 붙들고 콩콩 뛰다가 바닥에 떨어져 응급실 신세를 지는 등 사고가 많았다. 딸은 다른 아기들보다도 일찍 걷고 달렸었고, 유치원에 데리러 가면 정글짐에 거꾸로 매달려서 “엄마 나 좀 보세요”라고 소리지르곤 했었다.  

이제 나는 제인이 아니라 제인의 아버지에게 공감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왜 딸을 데리고 그 호수에 갔을까. 바위투성이 언덕이 에워쌌던 스위프트 강과 그 야트막한 골짜기에서의 추억 때문이었을까. 그 땅에는 그의 부모님과 자신의 유년기와 장성하여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며 살았던 희로애락의 추억이 켜켜이 쌓여 있을 것이다. 물에 잠긴 마을의 곳곳을 짚어가며 그 당시를 회상하던 아버지가 “다시는 그 모든 걸 못 보게 되었구나”라고 했을 때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자꾸 과거를 회상하는 습관은 나이 들어가는 징조라고 한다. 아마도 과거에 발목 잡혀 현재를 누리지 못하고 앞으로도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꼬집는 말일 것이다. 사실 내가 놔 주어야 하는 것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이들과의 아름답고 즐거웠던 추억만이 아니다. 후회되는 일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대 학부 시절부터 교수가 된 이후에도 부족한 나를 무척 아껴 주셨던 대학교 은사님이 계셨다. 그 분은 명절 때 선물을 보내드리면 꼭 전화로 감사를 표하곤 하셨는데, 몇 년 전 전화 통화에서는 “현교수, 늙는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항상 당당하고 씩씩하던 분이셨던 터라 그 한탄 섞인 말씀에 나는 적잖이 당황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마지막 대화가 되어 버릴 줄이야. 몇 달 후, 댁에서 넘어지시는 바람에 갑작스레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듣게 되었다. 나도 나이 들어가며 몸이 예전 같지 않은 지금, 따뜻한 위로 한 마디도 못해드렸던 그 당시 나의 불찰이 후회스럽기만 하다.    

제인의 마을이 스위프트 강의 댐 건설로 인해 물 속으로 깊이 잠겨 버린 것처럼 결국 우리의 삶도 언젠가는 이 땅에서 사라질 것이다. 우리 모두는 본래 이 땅의 나그네(strangers)요 순례자(pilgrims)이기 때문이다(벧전 2: 11). 욥은 “내가 내 어머니 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또한 벌거벗은 채 그리로 돌아가리라”.(KJB 욥1:21)라고 했고 다윗은 그의 말년에 “그가 죽을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며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하리라.”(KJB 시 49:17)고 했고 지혜의 왕이라 불이었던 솔로몬은 “그가 자기 어머니 태에서 나왔은즉 온 그대로 벌거벗은 채 돌아가고 자기의 수고한 것 중에 아무것도 손에 들고 가지 못하리니” (KJB 전 5:15)라고 하였다. 나이가 들어보니 무엇보다 이 모세의 기도가 가장 마음에 와 닿는다 “우리의 햇수의 날들이 칠십 년이요, 강건하면 팔십 년이라도 그 햇수의 위력은 수고와 슬픔뿐이니 그 위력이 곧 끊어지매 우리가 날아가 버리나이다.” (KJB 시 90:10)

그러나 성경의 메시지는 ‘인생은 나그네길’이라는 대중가요가 투영하는 허무주의 혹은 염세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성경에서의 나그네는 방랑자와는 다르다. 방랑자는 아무 곳이나 떠도는 사람이지만 우리는 갈 곳이 있는 나그네다. 아브라함은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장막을 치고 평생 나그네로 살았지만 자신에게 영원한 본향이 있음을 믿고 기뻐했다. ”이들은 다 믿음 안에서 죽었으며 약속하신 것들을 받지 못하였으되 멀리서 그것들을 보고 확신하며 끌어안았고, 또 땅에서는 자기들이 나그네요 순례자라고 고백하였으니(KJB 히 11: 13).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의 복을 받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받아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다(롬 8: 17).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자신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인해 좌절되고 낙망되며, 현재 삶도 “수고와 슬픔뿐”인 것처럼 느껴질 때 “보이는 것들은 잠깐 있을 뿐이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은 영원하니라.”(KJB 고후 4:18)는 말씀은 큰 위로와 용기를 준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의의 면류관이라는 상급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딤후 4:8).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그것들에 도달하려고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밀고 나아(KJB 빌 3:13-14)갈 뿐이다. 



(1)  https://m.blog.naver.com/ysj0001/221556328723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후 Eastern Michigan University 에서 석사,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어린이문학교육학회 회장 및 한국 기독교 유아교 육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아동 청소년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대학 부설 생활과 학 연구소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기독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이해>(공저), <그림책과 예술교육>(공저>, <그림책으로 보는 아동과 우리사회>(공저), <100권의 그림책>(공저) 등 그림책 관련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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