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의 세계관


좋은 상상. 나쁜 상상, 추한 상상

2024-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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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상상. 나쁜 상상, 추한 상상


채식주의자』의 작가인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매우 떠들썩하다. 나는 몇 년 전 부커상 수상소식을 듣고 그 책을 읽어보다가 중단한 기억이 있다. 무엇보다 그 안의 묘사가 너무나 역겨웠기 때문이다. 그 낱말과 문장이 불러일으키는 가학(加虐)적이며 음란한 상상들이 나를 매우 힘들게 했다. 한강 작가는 어떻게 이런 추한 상상을 할 수 있었을까 신기할 정도였다. 최근 어떤 권사님이 서점에서 이 책을 못 구했다고 아쉬워하시기에 빌려드릴 순 있지만 아마도 권사님의 영혼은 매우 힘드실 것이라고 하였더니 읽지 않겠다고 하신다.   

나는 이번 일을 계기로 문학적 상상력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상상력이 풍부하다”라는 것은 대체로 긍정적인 함의(含意)를 지니는 반면, “상상력이 빈약하다”는 부정적인 함의를 갖는다. 그런데 상상력이란 무엇이며, 이에 대해 기독인은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할까? 상상력의 영어단어는 “imagination”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는 이 단어의 정의를 “the faculty or action of forming new ideas, or images or concepts of external objects not present to the senses”(“감각적으로 인지되지 않는 새로운 아이디어, 이미지, 혹은 개념을 형성하는 능력 혹은 행위”)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상상력 자체는 ‘좋다’ ‘나쁘다’의 가치판단의 대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나는 이번 일을 계기로 문학적 상상력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상상력이 풍부하다”라는 것은 대체로 긍정적인 함의(含意)를 지니는 반면, “상상력이 빈약하다”는 부정적인 함의를 갖는다. 그런데 상상력이란 무엇이며, 이에 대해 기독인은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할까?


인간의 문화 활동에는 필연적으로 상상력이 수반된다. 인공지능, 로봇, 나노기술 등의 과학기술이 인류의 발전을 이끌어가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 과학 기술도 누군가의 상상이 구현된 것이다. 프랑스 작가 쥘 베른(1828-1905)의 『해저 2만리』(1870)와 『80일간의 세계일주』(1873)를 비롯한 공상과학소설은 그 후 하나씩 실제로 구현되었다. 그는 비행기나 잠수함, 우주선이 발명 및 상용화되기 전에 이미 우주, 하늘, 해저 여행에 대한 글을 썼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유년기에 공상을 즐기는 소년이었는데 그 때 주로 했던 공상이 빛을 타고 여행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현대 물리학자들은 그의 천재성을 말할 때 남들보다 우수한 계산 실력이나 수학적 지능이 아닌 상상력이라고 입을 모은다.[1]

그러나 인간의 상상력이 원래 높게 평가되었던 것이 아니다. 아이작 뉴턴(1643-1727)의 물리학이 추동했던 과학 혁명과 더불어 이성주의와 경험주의를 지향하는 17-18세기 계몽주의 시기에 상상력은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18세기 말에서 19세기까지의 낭만주의 시대에서 상상력은 거의 신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윌리엄 워즈워스(1770-1650)와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1772-1834)와 같은 작가들은 계몽주의에 맞서 인간의 창의력을 메마른 세상에서 활력의 근원으로 평가했으며 수세기 동안 신에게만 부여했던 능력을 상상력에 부여하려고 했다[2].

상상력이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다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상대주의와 감성이 절대 진리와 이성의 자리를 대신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사사기 21:25)를 추구한다. ‘내가 옳은 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에는 상상의 자유가 선행한다. 예컨대, 마음 내키는 대로 남성이 여성으로, 여성이 남성으로, 혹은 남성도 여성도 아닌 그 무엇인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상상의 발로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식 밖의 일들이 법제화되고 있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2023년에 대한민국 법원에서도 성전환 수술을 받거나 호르몬 요법을 받지 않아도 성별 정정을 허가하는 판결을 내렸다. 너무 잦은 성별 정정이 가져오는 폐해를 줄이기 위해 어떤 국가에서는 성별 정정은 일 년에 한번만 가능하게 하는 법도 제정하려고 한다는 황당한 소식도 들린다.    

  

상상력이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다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상대주의와 감성이 절대 진리와 이성의 자리를 대신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사사기 21:25)를 추구한다. ‘내가 옳은 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에는 상상의 자유가 선행한다.


나는 이번 수상소식으로 인해 세계적인 상의 진면목이 드러나게 된 것이 작은 소득이 아닌가 싶다. 전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에서 드러났듯이 노벨상의 권위는 이미 추락한지 오래다. 평화상을 받은 그가 이 한반도에 무슨 평화를 가져왔는가? 그가 북한에 가져다 준 돈으로 북한은 열심히 핵을 개발해 왔으며 지금도 핵으로 대한민국을 위협하고 있고, 매일 서울 상공에 오물 풍선을 날려 보내어 국민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있다. 그동안 노벨 문학상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노벨문학상에는 선정 위원들의 주관적인 기준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물리학상이나 경제학상들과는 달리 문학상은 객관적인 기준 없이 평가 위원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좌우되곤 하였다.[3]  물론 예술 작품 평가의 객관적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하겠지만, 문학의 탁월성과는 무관하게 국적, 인종, 성, 등을 고려하고 있다는 의혹이 존재하며, 이번 한강의 수상과 같이 특정한 정치 이데올로기에 편향되어 있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는다.    


전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에서 드러났듯이 노벨상의 권위는 이미 추락한지 오래다. 평화상을 받은 그가 이 한반도에 무슨 평화를 가져왔는가? 그가 북한에 가져다 준 돈으로 북한은 열심히 핵을 개발해 왔으며 지금도 핵으로 대한민국을 위협하고 있고, 매일 서울 상공에 오물 풍선을 날려 보내어 국민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있다.


아동 도서상도 이와 비슷한 비판을 받는다. 아동문학의 노벨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기념상>(2002-)도, 우연의 일치는 모르겠으나, 노벨상과 같이 스웨덴에서 제정된 것이다. 이 상이 우리 사회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는 『구름빵』으로 유명한 백희나 작가의 2022년도 수상이라고 할 수 있다. 도서상의 이름이기도 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1907-2002)은 『삐삐 롱스타킹』(Pippi Longstocking) (1945)의 작가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도시 외곽의 별장에서 부모 없이 혼자 살고 있는 삐삐라는 소녀이다. 삐삐는 괴력의 소유자이기도 하고, 부유하고, 용감하며, 상상력 넘치는 캐릭터로 그려지는 반면, 그 주위의 어른들은 비겁하고, 어리석고, 허약한 인물들이다. 출간 당시 이 작품은 어린이를 그저 훈육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았던 어린이 문학의 교훈적 전통에 도전하며, 매우 독립적이고 기존사회의 가치에 저항하는 소녀를 그려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의 보수적인 교육가들은 삐삐의 자유분방한 생활 방식을 비판하였으나 그 당시 스웨덴의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독립적인 여성상과 어린이상을 제시하였다는 호평이 대세를 이루었다. 같은 스웨덴 출신이자 아동문학가인 마리아 니콜라예바(1952-)는 이 작품이 전통적인 성인의 권위에 반기를 드는 텍스트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4]

그림책의 그림 작가에게 주는 도서상으로는 미국의 칼데콧 상(1938- )이 대표적이다.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 시민권자에게만 수여하는 이 상은 1938년부터 올해까지 86년간 86명의 그림 작가에게  메달을, 그리고 수백명의 작가에게 영예상을 수여하였다. 초기의 수상작들은 기독교 국가인 미국답게 주로 기독교적 소재와 주제를 다룬 책들이었다. 1938년 최초의 수상작은 하와를 유혹했던 뱀과 발람의 당나귀와 같은, 성경에 등장하는 동물들을 소재로 하고 있는 흑백의 판화 작품이었다. 그 이후 얼마 동안 수상작들은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작품이거나 기도책 등이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독교적 색채를 가진 작품들은 점차 선정작 명단에서 사라졌으며 주로 일러스트레이션에서 높은 예술적 평가를 받은 책들이 수상작이 되었다[5].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칼데콧 메달 수상작으로는 모리스 센닥(1928-2012)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Where the wild things are>(1963)일 것이다. 이 작품은 출판 초기부터 미국의 보수적인 기독 부모들에게 비판을 받았으나 그림책 평론가들은 열광하였고, 1964년 메달작으로 선정되었다. 이 작품은 평론가들로부터 예술성과 더불어 그림책 언어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이유로 칭송을 받았으며, 맥스라는 주인공 캐릭터는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이 작품과 함께 그의 삼부작으로 불리는 다른 두 작품, 『어두운 밤 부엌에서』(In the night kitchen)(1970)와 『저 너머 밖에서는』(Outside over there)(1981) 역시 정신분석학 이론으로 평론되었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권이 팔린 『괴물들이 사는 나라』를 제외하고 다른 작품들은 어린이 독자들에 의해 큰 인기를 얻지 못하였다.[6]

이 작품은 2016년 오바마 대통령 부부의 부활절 행사로 인해 다시 언론의 조명을 받게 되었다. 백악관에는 매해 이스터 에그롤(부활적 달걀 굴리기) 행사의 하나로서 어린이들을 백악관에 초청하는 전통이 있는데, 그 해에는 버럭 후세인 오바마와 미셀 오바마가 백악관 정원에서 어린이들에게 맥스가 괴물들과 신나게 노는 장면을 보여주며 구연하는 모습이 언론에 비춰졌다. 그런데 나는 그 영상을 보며 대통령 부부가 어린이들과 함께 연출하는 훈훈한 분위기보다 그들이 왜 이 그림책을 읽어주었을까 궁금해졌다.

모리스 센닥은 뇌졸중으로 사망하기 5년 전인 2008년 자신이 게이였음을 커밍 아웃하였으며[7], 그 후 정신분석학자인 유진 글린(1926-2007)과 함께 50년간을 게이 커플로 동거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 연방대법원의 동성결혼 합법화는 오바마 대통령의 임기(2008-2016) 기간인 2015년에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오바마 대통령 부부의 그림책 읽기는 어린이와의 즐거운 시간(fun time) 갖기 이상의 함의를 지닌 것이 아니었을까.        


모리스 센닥은 뇌졸중으로 사망하기 5년 전인 2008년 자신이 게이였음을 커밍 아웃하였으며, 그 후 정신분석학자인 유진 글린(1926-2007)rhk 함께 50년간을 게이 커플로 동거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 연방대법원의 동성결혼 합법화는 오바마 대통령의 임기(2008-2016) 기간인 2015년에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오바마 대통령 부부의 그림책 읽기는 어린이와의 즐거운 시간(fun time) 갖기 이상의 함의를 지닌 것이 아니었을까.


다시 이 칼럼의 주제로 돌아가서, 성경은 인간의 상상과 상상력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고 있으며, 기독인은 상상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성경에서 처음으로 이미지(image)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 1장 26-27이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our image)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 ...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in his image)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으로 그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  이 짧은 구절에서 이미지라는 단어가 무려 3번이나 반복된다. 그런데 그 이미지가 시각적인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영(요 4:24)이시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란  정신적, 도덕적, 사회적인 차원의 것이라고 해석되고 있다.[8]

하나님으로부터 지적 능력을 부여 받은 아담은 하나님의 명에 따라 세상의 모든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창 2: 19). 누군가의 이름을 짓는(naming)는 행위는 ‘언어’, 즉 기호(sign)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사물을 기호화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아기의 이름에는 그를 향한 부모의 소망이 담겨 있다. 부모는 그 아이에게 앞으로 일어날 좋은 일들을 기대하고, 상상하고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아담의 이름 짓기는 동물에서 멈추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을 좋게 보지 아니하시고 그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어 그에게 데리고 오셨을 때 아담은  “이제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그녀를 남자(Man)에게서 취하였으니 여자(Woman)라 부르리라”라고, 그에게 “여자”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러나 곧 그들은 간교한 뱀의 언어에 넘어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창 3: 5)라는 유혹을 받고 하와는 마음(heart) 속에서 하나님과 동등해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었다. 영성 신학자요, 교육학자인 파커 팔머(Parker Palmer)는 그의 책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To know as we are known)(1993/2000)에서 최초의 인간의 죄는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인식론적인 것이라고 하였지만, 상상력이 배제된 인식 능력이 있을 수 있을까.[9] 창세기 3장 6절에는 “여자가 보니 그 나무가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good for food, and that it was pleasant to the eyes and a tree to be desired to make one wise)이므로 그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한 자기 남편에게도 주매 그가 먹으니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열매를 맛보기 전 이미 하와는 그것이 줄 쾌락과 하나님만큼 높아져 있을 자신들의 모습을 마음 속으로 상상했을 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창 3: 5)라는 유혹을 받고 하와는 마음(heart) 속에서 하나님과 동등해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었다. 영성 신학자요, 교육학자인 파커 팔머(Parker Palmer)는 그의 책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에서 최초의 인간의 죄는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인식론적인 것이라고 하였지만, 상상력이 배제된 인식 능력이 있을 수 있을까.


그 이후의 인간 역사는 자신의 마음이 낳은 악한 상상이 초래한 비극적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이스라엘인이 바벨론에 끌려가 70년간 비참한 포로 생활을 하기 전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그들의 마음의 상태에 대해 이렇게 탄식하셨다.  


 “오히려 자기들의 마음에서 상상한 것(imagination of own heart)을 따라 걸으며 ...”,( 9:14)  

“그들이 순종하지도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저마다 자기의 악한 마음이 상상하는 대로 걸었으므로 (the imagination of their evil heart) (11:8)

 이 악한 백성이 내 말을 듣기를 거부하고 자기 마음에서 상상하는 대로 걸으며 다른 신들을 따라 걷고 그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경배하나니... (walk in the imagination of their heart and walk after other gods.) (13:10)

그들이 말하기를 소망이 없으니 오직 우리는 우리 계획대로 걸으며 저마다 자기의 악한 마음이 상상하는 것을 (the imagination of his evil heart) 행하리라, 하였도다. (18: 12) 


문학 작품에는 인간의 이러한 죄악된 본성이 구체적으로, 혹은 은유적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문학 작품이 인간의 죄악된 행위를 보여준다고 해서 그 텍스트가 곧 나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성경은 간음, 강간, 살인, 거짓, 속임수 등 인간의 부도덕성을 감추지 않고 드러낸다. 심지어 위대한 왕, 다윗의 간음과 살인도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그렇다고 사람들은 성경이 부도덕한 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성경이 그러한 부도덕성을 묘사하는 의도와 목적은 우리에게 진리와 통찰력을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성경 이야기는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주제로 펼쳐지는 거대 서사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로 인해 시작되었고, 그들으로 인해 곧 망가졌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의해 회복되기 시작하였으며,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한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 ‘새 하늘과 새 땅’(New heaven and New earth)으로 완성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지금부터 약 6000년 전인 B.C. 4000 년경에 시작되었으며, 이제 그 결말에 가까이 와 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오래 전부터 마지막 날의 이미지를 보여주셨다. “(그 때에는) 이리도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염소 새끼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젊은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인도하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들이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으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놀며 젖 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로되...”(이사야 11: 6)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리라. 다시는 사망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으며, 또 아픔도 다시는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이 지나갔기 때문이라.”(계 21:4)

성경에 그려진 세상의 창조와 악의 침입으로 인한 망가짐, 그리고 궁극적인 선의 승리와 천국의 이미지에 사로잡힌 루이스(C.S. Lewis)와 톨킨(J. R. R. Tolkin)과 같은 기독 소설가들은 “세례받은 상상력”[10] 으로 문학의 언어를 사용하여 그 이야기를 재화하였다. C.S. Lewis 의 『마지막 전투』의 결말 부분에서 진짜 나니아(천국)로 전속력으로 달려가며 유니콘은 다음과 같이 소리질렀다. “드디어 고향에 왔습니다! 이곳이 진정한 내 땅입니다! 이곳은 내 고향입니다. 지금까지는 모르고 지냈지만 평생동안 우리가 찾던 땅입니다. 우리는 옛 나니아가 가끔씩 이곳과 비슷해 보였기 때문에 그 곳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히히히힝! 더 높은 곳으로, 더 깊은 곳으로!”[11]      

기독교 문학평론가인 갈라허와 린덴은 『신앙의 눈으로 본 문학』에서 기독인들이 문학에 대해 취해야 할 태도를 이렇게 말한다. “기독인들이 이 세상에는 아름다움과 질서가 있으며 우리는 그것에 반응하도록 부름받은 존재임을 인정해야만 문학에 대한 생각을 시작할 수 있다”. 그들은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상상력을 신성시하는 문학 이론들은 “너는 나 이외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는 십계명의 제 1계명을 어기는 위험에 처하는 것이다라고 경고한다[12].

한강의 문학이 보여주는 상상은 나쁘기도 하지만 추하기도 하다. 작가가 어떤 행위를 묘사한다는 사실 자체가 작가가 그 행위를 긍정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소설의 결말은 작가가 그 행위들에 대해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를 해석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13]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근친상간과 성폭력, 가학적 행위의 묘사는 역겨움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그 비극적 결말에는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혐오와 허무가 짙게 깔려있다. 이 어두움의 영, 죽음의 영은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다. 청소년 자살률이 OECD 국가 1위라는 통계 수치가 보여주듯, 이 어두운 악의 세력은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의 한 구석에서 또아리를 틀고 몸집을 불려 우리의 젊은이들을 집어 삼키고 있다. 기독인으로서 우리는 채식주의자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진한 동정과 연민을 느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에게 닥칠 비극적인 종말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때에 우리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이 사회와 다음 세대를 어두움의 영으로부터 건져내기 위해 우리에게는 매일 하나님의 전신 갑주가 필요하다 (엡 6: 13)


한강의 문학이 보여주는 상상은 나쁘기도 하지만 추하기도 하다. 작가가 어떤 행위를 묘사한다는 사실 자체가 작가가 그 행위를 긍정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소설의 결말은 작가가 그 행위들에 대해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를 해석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


 


  


[1] https://blog.naver.com/justplan/223157449873
[2] Gallagher, S.V. & Lundin, R. (1989/1995) 신앙의 눈으로 본 문학. 서울: IVP. 
[3] https://www.popcorn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66659
[4] Nikolajeva, M.(2010/1012). 어린이문학에 나타난 힘과 목소리, 주체성. 고선주외 역. 서울: 교문사. 원제: Power, Voice, and Subjectivity in Literature for Young Readers. 
[5] 현은자 외 (2008). 세계 그림책의 역사. 학지사
[6] 현은자 외 (2008). 세계 그림책의 역사. 학지사
[7]  https://namu.wiki/w/%EB%AA%A8%EB%A6%AC%EC%8A%A4%20%EC%84%BC%EB%8C%81
[8] https://www.gotquestions.org/Korean/Korean-image-God.html
[9] Palmer, P. (1993/2003).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서울: IVP.
[10] https://www.youtube.com/watch?v=d_irbfLizvg
[11] Lewis, C. S. 글, Baynes. P. 그림(1956/2001). 마지막 전투. 서울: 시공주니어.p. 237.
[12] Gallagher, S.V. & Lundin, R. (1989/1995) 신앙의 눈으로 본 문학. 서울: IVP.
[13] Lyken, R. (1985/1991) 기독교와 문학. 서울: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후 Eastern Michigan University 에서 석사,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어린이문학교육학회 회장 및 한국 기독교 유아교 육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아동 청소년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대학 부설 생활과 학 연구소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기독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이해>(공저), <그림책과 예술교육>(공저>, <그림책으로 보는 아동과 우리사회>(공저), <100권의 그림책>(공저) 등 그림책 관련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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