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를 부르는가: 『HEY, AL』(새가 된 청소부)

2022-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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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를 부르는가: 『HEY, AL』 (새가 된 청소부)



우리 주변의 수많은 광고 이미지들은 우리의 망막에 맺힌 상(像)이자 쉼없이 말을 건네고 있는 목소리이다. 휴대폰이 쏟아내는 광고 동영상은 물론이고, 전철이나 버스의 광고판, 상점과 빌딩의 간판, 거리의 현수막, 심지어 티셔츠에 쓰여진 문구들도 우리를 부르고 무엇인가를 약속한다. 그것은 지금보다 더 나은 삶, 더 멋진 삶에 대한 약속이다. 

이 “호명(呼名)하기” 은유를 글과 그림으로 보여주는 그림책이 『새가 된 청소부』(HEY, AL)이다. 미국 작가인 아서 요링크스가 글을 쓰고 리처드 아겔스키가 그림을 그린 이 그림책은 1987년 칼데콧 메달을 수상하였으며 국내에는 2013년에 번역출간 되었다. 이 작품에 대한 인터넷 서평은 대체적으로 교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새로 변했던 알과 에디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게 된 것을 언급하며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고 자기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라던가 “정말 지금 삶에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아야겠다” 등, ‘현재 삶에 만족하자’ 혹은 소위 ‘소확행’을 두둔하는 글들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교훈을 넘어서는 다층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 세상은 어떤 곳인가?’,‘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이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세계관적 질문을 다룰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표지에는 고풍스러운 건물의 엘리베이터 문으로부터 한 무리의, 형형색색의 깃털과 부리를 가진 새들이 무리져 나와 있고, 오른편의 큰 새들은 물걸레로 바닥을 청소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고 있다. 물걸레를 든 그의 얼굴은 앞을 향하고 있으나 뒤에서 벌어진 일들을 감지한 듯 약간 놀란 표정이다. 그의 오른 다리에 기대어 뒤를 보고 있는 강아지의 표정에는 두려움이 깃들여 있고 앞의 오른 다리를 반쯤 들고 있어 여차하면 도망갈 태세다. 표제지에는 남자가 물걸레를 어깨에 매고 물통을 들고 앞으로 걸어가고 있고, 강아지가 그 뒤를 따르고 있다. 강아지는 그들 뒤를 따라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온, 세 마리의 파란 작은 새들을 올려다 보고 있다.  

번역본의 본문은 주인공 알과 에디의 소개로부터 시작된다. 알은 착하고 부지런한 청소부이며 애완견 에디와 모든 일을 함께 하며 힘들게 살지만 부족할 것 없는 삶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그림은 한 칸짜리 방을 반쯤 채운 일인용 침대와 금이 간 천정과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비스듬히 매달려 있는 전등과, 선반 위의 몇 개 안 되는 세간살이를 보여준다. 화장실로 통하는 문에는 알의 샤워 가운이 걸려 있다. 누가 보아도 궁색한 살림살이임에 틀림없다.  



그러던 어느 날 에디가 침대에 올라 알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런 쓰레기장 같은 집이 아니라 깨끗하고 넓은 집에서 살고 싶다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알은 전에는 더 힘들게 살지 않았냐며 에디를 달래려고 노력하지만 에디는 평생 이런 집에서 살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고 울부짖는다. 그러던 어느 날 화장실에서 수염을 깎고 있는 알의 화장실 창문으로 큰 새가 얼굴을 내밀고 “헤이, 알”(Hey, Al)하고 인사를 건넨다. 면도기를 떨어뜨릴 정도로 놀란 알에게 새는 열심히 일해도 가난해서 속상하지 않냐고, 일하지 않아도 실컷 먹고 놀 수 있는 아주 멋진 곳이 있으니 내일 그곳으로 데려가겠다고 말하고는 날아간다. 새의 제안을 문밖에서 엿듣고 있던 에디는 “일만 하면 인생의 즐거움을 맛볼 수 없어”라고 주장하며 짐을 싸서 당장 떠나자고 채근한다. 고민하던 알은 에디와 함께 새를 기다리고, 다음 날 동틀 때 새를 따라 공중에 높이 떠 있는, 신비한 섬으로 가게 된다. 섬의 산봉우리는 새의 머리의 형상을 닮았고 그곳에서 폭포수가 떨어져 섬 중앙을 가로질러 흘러가고 있다. 그 주위에는 푸르른 초목이 우거져 있으며 새들이 구름 속에서 날아다닌다.


섬에 도착한 알과 에디는 그곳의 모든 새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이 새들은 표지에서 보았던 새들이다. 그런데 맨 왼쪽의 대머리 독수리처럼 생긴 새의 모습이 심상치 않다. 날개 끝에 인간의 손이 달려 있는 그 새는 오른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있다. 새들이 만들어준 꽃목걸이를 목에 건 알이 새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폭포에 몸을 담그고 온갖 열대 과일을 먹으며 즐거워하고 있는 동안 에디는 물가에서 나비들을 뒤쫓으며 놀고 있다. 알은 더 없이 만족한 얼굴로 “정말 좋은 곳이에요. 평생 이렇게 살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힘들었던 과거를 잊어버리고 섬의 생활에 빠져들어간다.  





하지만 그 기쁨은 머지않아 공포로 변한다. 어느 날 아침, 알은 일어나자마자 자신이 새로 변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비명을 지른다. 알과 에디의 눈은 구슬같이 변했고 코는 불쑥 나와 곡괭이처럼 휘어져 있고, 팔도 날개로 변해가기 시작했고, 에디의 꼬리에는 깃털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새들의 반응이다. 그동안 친절과 호의를 베풀던 새들은 일제히 그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그들의 비명을 못 들은 척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알과 에디가 그 섬을 탈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날개로 변한 팔을 움직이자 둘의 몸은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앞서 날아가던 알은 에디에게 어서 따라오라고 소리치며 바다 위를 펄럭이며 날아가지만 에디는 너무 지쳐서 바다에 빠지게 된다. 그들이 날아가는 동안 몸에 생겨났던 새의 깃털은 떨어져 나가고 알은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와 화장실 창문을 통해 집으로 돌아온다. 에디가 없어진 것을 안 알은 매우 슬퍼하지만 수영을 잘하는 에디는 바다를 헤엄쳐 집으로 돌아와 두 친구는 재회의 기쁨을 만끽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알은 꽃무늬 하와이안 티셔츠를 입고 집안을 청소하고 있다. 알은 문밖에 쌓여 있던 신문을 침대 위에 깔고 아파트 벽을 노란색으로 페인트칠하면서 에디와 눈을 맞추며 기뻐하고 있다. 여기저기 금이 갔던 천정도 말끔하게 수리되었고, 선반 위에 두서없이 놓여있던 물건들도 박스에 담겨 문밖으로 내놓아져 있으며. 밖의 쓰레기통에는 창문에 걸려 있던 나무 블라인드가 담겨 있다. 마지막 글텍스트는 “알과 에디는 이곳에 천국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이제 둘은 행복해요”이다.


앞서 밝혔듯이,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이 마지막 문장으로부터 교훈을 얻고 있는 듯하다. 옛이야기의 경우 그런 식의 해석이 적합할지 모르지만, 현대 그림책을 단순한 교훈 찾기를 위한 텍스트로 읽게 되면 텍스트의 표면 의미(surface meaning)에만 머물게 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텍스트의 표면 의미에 머무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심층 의미(deep meaning)를 발견하려고 노력할 때 그 작품이 투영하는 세계관에 가까이 다다갈 수 있다.   


글과 그림의 레이아웃 


우선 그림책의 글과 그림의 레이아웃을 살펴보자. 이 작품에서는 액자식 프레임(frame)을 사용하였다. 이는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효과를 낳는 시각적 장치이나, 이 작품에서는 현실 세계와 환상 세계의 구분을 명확히 하는데 사용되었다. 첫 몇 화면에서 그림은 프레임에 갇히고 글 텍스트와 분리되어 있으나 낙원 섬으로 떠나는 장면부터 그곳을 탈출하는 장면까지의 그림의 프레임은 화면 전 화면에 펼쳐져 있다. 그리고 알과 에디가 집에 돌아오는 사건을 담은 두 화면은 다시 글과 그림이 다른 페이지로 나뉘어서 배치되었다. 그러나 집을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화장실 창문을 통해 집으로 돌아온 주인공의 모습은 도입 부분과는 다르게 화면 오른편에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그림이 처음과 같이 왼편에 배치되어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만족감과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작품의 장르


이 작품의 장르가 판타지라는 사실은 주제와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을 드러낸다. 판타지 문학은 캐릭터, 배경, 플롯이라는 서사적 요소에서 비현실적이거나 비과학적이라는 특성을 지닌다. 이 작품의 경우는 애완견 에디와 낙원의 새들이 의인화되었으며, 알과 에디가 사는 공간적 배경은 지극히 현실적인 반면, 낙원섬은 판타지 세계이다. 주인공이 사는 현실 세계와 공중의 낙원섬이라는 판타지 세계를 잇는 통로는 앵무새를 닮은 신비한 큰 새이다. 좋은 판타지는 허구를 이야기하지만 오히려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을 비추는 등불과 같은 역할을 함으로써 인생의 진실을 드러낸다는 장르적 특성을 갖는다. 우리는 그 좋은 예를 C.S.Lewis의 기독교 판타지 『나니아 이야기』 시리즈의 제 2편 『사자, 마녀, 옷장』에서 볼 수 있다. 소년 레드몬드의 타락이 가져온 비극적 사건들과 아슬란의 대속의 죽음, 그리고 부활로 인한 선의 승리와 흰 마녀로 대변되는 악의 멸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의 알레고리로서 기독교의 진리를 이야기한다.    


영어 원문으로 읽기


지금부터 영어 원문으로 이 작품을 다시 읽어보겠다. 다루어질 부분은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 그리고 표지의 제목이다.


    첫 장면의 주인공 소개 


우선, 첫 장면에서 작가는 주인공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Al a nice man, a quiet man, a janitor, lived in one room on the West Side with his faithful dog, Eddie.”이다. 이 문장에서 알이 “the West Side”(서쪽)에 살고 있다는 구절이 번역본에서는 누락되었다. 첫 글자가 대문자로 쓰였으므로 이 단어는 방위의 명칭이 아니라 특정한 장소를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미국에서 웨스트사이드란 뉴욕 맨해튼 섬의 한 구역을 가리킨다. 이 지명은 1957년 제작된 뮤지컬의 제목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맨해튼 섬의 서쪽에 위치한, 허드슨강에 인접한 곳으로, 지금은 부유층의 주거지이지만, 2005년 대규모의 개발이 시작되기 전에 주로 유럽의 이민자들이 미대륙에 도착하여 처음 정착하였던 낙후된 지역이었다. 이 작품은 1986년에 출판되었으므로 개발이 이루어지기 훨씬 전의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알과 에디가 살고 있는 곳이 뉴욕 맨해튼임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증거는 도시의 스카이라인이다. 그 스카이라인은 섬을 탈출한 알과 에디가 바다를 건너는 장면에 그려져 있다. 오른편부터 UN 빌딩,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원 월드 와이드 빌딩, 그리고 2001년의 9·11 테러 시 파괴된 세계무역센터의 110층짜리 쌍둥이 빌딩 한 동으로 보이는 건물들의 윤곽이 보인다. 작품이 출판된 이후 거의 40년이 지났지만 이 건물들은 여전히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형성하고 있다. 


    마지막 문장



이 부분은 “The paradise lost is sometimes the heaven found”로 되어 있다. 이 문장을 직역한다면, “잃어버린 낙원은 때때로 발견한 천국이지요“가 되는데 문법으로는 맞는 문장이지만 의미상으로 좀 어색하다. 여기에서 ‘잃어버린 낙원’이란 그들이 다녀온, 인간 존재가 새로 변질되어 버리는 마법의 섬을 가리키는 것일 테고, ‘발견된 천국’은 다시 찾은 현실의 삶을 뜻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번역자는 이 문장을 “알과 에디는 이곳이 천국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이제 둘은 행복해요”라고 번역한 듯 싶다.

그렇다면 영어 단어에서 낙원과 천국은 정확히 어떤 장소를 의미하는 것일까. 흥미롭게도 이 두 단어는 성경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다. “The Lost Paradise”는 영국 시인 존 밀턴(1608-1675)의 장편 서사시인 『실락원』(1667)의 원제이기도 하다. 뱀으로 변장한 사탄의 유혹에 의해 타락한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사건과 사탄의 하나님에 대한 반항을 주제로 하고 있는 작품이다.  paradise 라는 단어는 정원, 동산, 혹은 에워싸인 장소로서 나무들과 꽃들, 과실들이 있는 매우 아름다운 장소를 뜻한다. 이 단어는 구약에 3번, 신약에 3번(눅 24:43, 벧후 12:3, 계 2:7) 등장한다.  그리고 ‘천국’으로 번역된 ‘heaven’의 정확한 번역은 ‘하늘’이다. 이 단어는 ’낙원‘보다 더 자주 성경에 등장한다. 구약에서는 “그가 아브라함을 축복하며 이르되, 하늘과 땅의 소유자 즉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창 14:19) 에서, 신약에서는 “우리의 생활방식은 하늘에 있으며”(빌 3: 80), “너희를 위해 하늘에 마련된 썩지 않고 더럽지 않으며 사라지지 아니하는 상속 유업을 받게 하였나니”(벧전 1:4), “또 너희를 위해 하늘에 쌓인 소망으로 인함인데”(골 1: 5), 등에서 사용되었다. 이 때의 하늘이란 사물의 마지막 상태로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곳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글작가인 아서 요링크스가 두 단어의 성경적 의미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으므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추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다시 번역 문장으로 돌아와서, “알과 에디는 이곳이 천국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이제 둘은 행복해요” 라는 문장은 원문의 의미를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번역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친 의역으로 인하여 텍스트의 다층적 의미의 발견을 제한할 수 있다는 우려를 하게 된다. 여덟 단어로만 이루어진 이 짧은 영문장 안에 들어간 “때때로”(sometimes)라는 부사에도 분명히 작가의 의도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sometimes‘ 의 의미를 고려한다면 이 문장은 ‘때때로 우리는 좋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어떤 것을 잃을 때 그 대신 더 좋은 것을 얻기도 합니다’ 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표지의 제목과 그림



일반적으로 책의 제목은 플롯을 예상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영어 제목은 『HEY, AL』이었는데 번역본에서는 『새가 된 청소부』가 되었다. 이처럼 주인공과 결론이 포함된 명확한 제목은 독자에게 서사에 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할 수 있지만 독자에게 선입견을 주어 오독(誤讀)하게 할 위험이 있다. 이러한 형태의 제목은 『까마귀가 된 일곱 형제』, 『소가 된 게으름장이』, 『해와 달이 된 오누이』와 같은 옛이야기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새가 된 청소부』라는 제목을 접한 독자들은 책장을 열어보기 전부터 자연스럽게 옛이야기와 같은 플롯과 교훈을 기대하게 된다. 

번역된 제목의 또 다른 문제는 그림과의 어울림이다. 그림에서는 엘리베이터 문에서 나온 새들이 청소부와 강아지를 향하고 있고, 새들의 부리는 약간 열려 있어 그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안녕, 알”이라는 원작의 제목은 새들이 알이라는 이름의 청소부의 등 뒤에서 그에게 인사를 건네는 중임을 지시하는 것이므로 그림과 잘 어울린다. 덧붙여 “Hey”는 “Hi” 보다 더 편한 관계에서 사용하는 인사말이다. 게다가 작가는 이 단어의 철자를 모두 대문자로 쓰고 있어 단순한 인사말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시사한다. 그렇다면 표지의 비현실적인 그림과 제목은 이 서사의 어떤 지점에 위치하는 것이며, 그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표지의 제목과 그림이 은유하는 세계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알이 살고 있는 세계를 다시 한번 조명해보자. 알은 맨해튼 웨스트사이드의 작고 누추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으며 맨해튼 중심부의 빌딩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다. 그가 청소하고 있는 빌딩은 복도와 엘리베이터 문의 양식으로 미루어보아 오래된 호텔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매일 호텔의 복도나 엘리베이터 안에서 사업이나 여행으로 뉴욕을 찾는 사람들을 마주칠 것이다. 돈 많은 사업가이건 여가를 뉴욕에서 누릴 수 있는 자들이건 간에 그들의 안락하고 부유하고 멋져 보이는 삶의 일편을 훔쳐보며 알은 무슨 생각을 하곤 했을까. 에디가 울부짖으며 하는 말 “평생 이렇게 살기를 원했던 건 아니라고”는 혹시 알의 내면의 소리가 아니었을까. 바로 그 때 크고 화려한 새가 출현하여 알을 호명(呼名)하고 그러한 삶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알과 에디는 그를 따라 낙원섬으로 날아갔다.    

이 작품은 두 가지의 대조적인 세계를 은유로 보여준다. 즉, 한 세계는 노동이 이어지는 고단하고 힘든 세계이며, 다른 한 세계는 일하지 않아도 안락과 쾌락을 즐길 수 있는 세계이다. 첫 번째 세계에서 살던 알은 잠시 두 번째 세계를 택하였지만 그 안에 감추어진 치명적인 악(惡)을 감지한 후 그 세계에서 도망쳐 나왔으며, 결국 세 번째 세계를 택했다. 그가 택한 세계는 비록 몸은 첫 번째 세계의 프레임 안에 존재하지만, 노동과 친구의 가치를 인식하게 된 세계이며, 물리적으로는 밝고 깨끗하고 정돈된 세계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러한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흔적을 지닌 새의 존재는 낙원섬의 새들이 두 번째 세계로 들어간 사람들임을 암시한다.  

몇 년 전, 나는 이 작품을 학부 학생들에게 보여준 다음 물어 보았다. 이 중에서 어떤 세계를 택하겠냐고. 그런데 꽤 많은 학생들이 두 번째 세계를 택하겠다고 답하였다. 치기 어린 반응이겠거니 하며 넘어가기에는 그들의 태도가 꽤 진지하였다. 이 시대 젊은이들의 삶이 얼마나 팍팍하면 그런 생각까지 할까 싶어 안쓰럽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섬뜩하기도 하였다. 생각해 보니 이 사회에는 언제부터인가 공짜를 당연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진 것 같다. 정치가들은 서로 경쟁하듯 공짜를 약속하고 있다. 아기를 출산하면 출산축하금을 주고, 양육비를 주고, 보육료도 무료이고, 유치원부터 초, 중, 고등학교까지의 교육도 무료이며, 대학교도 반값 등록금만 내고 다니게 한단다. 대학을 나오면 누구나 고연봉의 정규직을 주고, 실업하면 실업 급여를 충분히 주고 결혼하면 신혼부부를 위한 집을 제공하고, 병원비도 걱정할 필요로 없고 나이 들어도 충분한 노인수당을 주어 안락한 노후를 보장하겠단다. 그야말로 낙원과 같은 삶을 약속하고 있다. 거저 받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인가? 멀리 가지 않아도 볼 수 있다. 바로 북한이다. 북한에서는 교육비와 생활비, 의료비가 모두 무료이다. 그러나 실상은 어떠한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핍박받는 나라,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의 자유를 잃어버린 지옥이 되었다. 

표지 그림으로 다시 돌아가서, 엘리베이터에서 쏟아져 나와 알에게 인사하는 이 형형색색의 화려한 새들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그들이 알에게 친근하게 인사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은 그와 초면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리고 혹시 언제라도 그를 유혹할 수 있기에 그의 낙원 탈출을 방해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즉, 그들은 독자인 우리 주변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고 우리에게 약속하는 목소리를 은유한다. “이것 봐요. 이마에 땀 흘리지 않아도 살 수 있는 길이 있어요.” “이것을 해 보세요, 이것을 가져 보세요. 그러면 더 멋진 사람, 더 멋진 인생, 더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을 거예요...”  이 달콤한 목소리는 우리의 상상력에 불을 지피고 행동을 추동시킨다. 그러나 이 목소리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도 은밀히 스며들어 있던 비기독교적 세계관의 반복일 뿐이다.   


이 목소리에 이끌려 오늘도 우리는 이 참된 복된 소망(딛 2:13)의 약속은 잊고 사는 것이 아닐까.  


“내가 새 하늘과 새 땅(a new heaven and a new earth)을 보니 이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졌고 바다도 다시는 있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더라. 나 요한이 보매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신부가 자기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이 예비한 채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더라. 내가 하늘에서 나는 큰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성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고 그분께서 그들과 함께 거하시리라.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리라.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리라. 다시는 사망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이 없으며 또 아픔도 다시는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이 지나갔기 때문이라. 하더라. 왕좌에 앉으신 분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노라, ...(KJB 계 21:1-5)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후 Eastern Michigan University 에서 석사,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어린이문학교육학회 회장 및 한국 기독교 유아교 육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아동 청소년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대학 부설 생활과 학 연구소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기독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이해>(공저), <그림책과 예술교육>(공저>, <그림책으로 보는 아동과 우리사회>(공저), <100권의 그림책>(공저) 등 그림책 관련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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