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의 세계관
기다림에 관하여: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케빈 행크스의 『Wai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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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연2022-12-01 20:27
그림책 공부에 입문한 학부생으로서도, 이번 가을이 되어서야 진심으로 교회에 나아가 기도드리는 한 20대 청년으로서도 많은 깨달음을 얻어가는 글이었던 것 같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와 'waiting'을 함께 나열하여 살펴보니 그제서야 알 수 없는 모호함이 허무한 순환의 구조였음을 알게 되었는데, 삶의 목적을 상실하게 되는 허무주의의 어떠한 공허한 구멍을 느낀 것 같습니다. 주님 없이 목적성을 잃은 삶이 세계가 얼마나 위태로운지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스스로 생각해보게 되는 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독자들은 이 글을 통해 변별되지 못한 위험한 사고들과 주제들로 가득한 현대 사회에서 다시 한번 기둥이자 기준이 되는 것이 무엇일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의미있는 시간이었을 것 같습니다. 덕분에 의미있는 사고가 가능한 시간이었습니다.
hyojin2025-02-10 10:49
저희집 막내가 귀엽고 사랑스러운 주인공들을 보고 신이 나서 집어들었다가 이내 '재미없네'하던 그림책이예요 ㅎ 본격적인 사건이 나올줄 알았는데 계속 기다리기만 해서 별로라나요.
생명의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무엇을 기다리는것이 삶이라고 말하는듯 느껴집니다. 무언가를 소망하고 또 그것을 함께 기다리다가 마침내 그것을 만났을 때 마음껏 누리고(!) 함께 기뻐하는 모습이 그려졌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교수님의 글을 읽으며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르는 채, 마냥 기다리고만 있는 모습과 직접 경험할수도 없는 것들을 향해 목을 쭈욱 빼놓고 기다리며 옆에 있는 누군가와 소통도 눈맞춤도 없는 모습이 정말 네모난 화면에 갖힌 현대인들의 모습인것 같아 씁쓸해집니다.
생명의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무엇을 기다리는것이 삶이라고 말하는듯 느껴집니다. 무언가를 소망하고 또 그것을 함께 기다리다가 마침내 그것을 만났을 때 마음껏 누리고(!) 함께 기뻐하는 모습이 그려졌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교수님의 글을 읽으며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르는 채, 마냥 기다리고만 있는 모습과 직접 경험할수도 없는 것들을 향해 목을 쭈욱 빼놓고 기다리며 옆에 있는 누군가와 소통도 눈맞춤도 없는 모습이 정말 네모난 화면에 갖힌 현대인들의 모습인것 같아 씁쓸해집니다.
leejihye2025-02-10 15:55
계속되는 기다림의 반복이지만 그 기다림 끝에 얻는 것은 매우 피상적 결과입니다. 직접 눈을 밟을 수도, 내리는 비를 우산으로 막아볼 수도 없습니다. 창 밖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것을 내가 누리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요.
<조금만 기다려 봐> 그림책 뒷 면지에서 작품 소개가 한 페이지를 이루고 있습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기다림의 의미를 전하고, 긍정적인 인내심과 자제력을 심어줄 수 있다고 쓰여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맹목적인 기다림과 피상적인 결과가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것으로 발현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삶의 의미와 행복은 내게 주어진 것을 누리는 데에 있고, 그것을 깨닫는 것이 은혜일 것입니다.
무의미한 기다림과 삶의 목적 및 가치를 상실한 채 반복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주님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자들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더불어 먼저 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사명을 떠올리게 됩니다. 실존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조금만 기다려 봐> 그림책 뒷 면지에서 작품 소개가 한 페이지를 이루고 있습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기다림의 의미를 전하고, 긍정적인 인내심과 자제력을 심어줄 수 있다고 쓰여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맹목적인 기다림과 피상적인 결과가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것으로 발현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삶의 의미와 행복은 내게 주어진 것을 누리는 데에 있고, 그것을 깨닫는 것이 은혜일 것입니다.
무의미한 기다림과 삶의 목적 및 가치를 상실한 채 반복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주님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자들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더불어 먼저 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사명을 떠올리게 됩니다. 실존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수형2025-02-10 18:24
교수님. 번역에 따라 이해의 폭이 달라진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우리말 번역자는 우리나라의 정서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 민족은 친구라는 다정함을 좋아하는 그 정서로 스스로 해석하고 친구를 넣어 번역했을 것이라 추측해 봅니다. 저의 지인들도 모든 그림책들을 따스하고 아름답게 보며 늘 긍정적인 요소들을 찾아 해석하는 경향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림책 자체를 어린이의 것으로 이미 마음속에 산정하고, 작가를 무한히 신뢰하곤 합니다. 또한 작고 예쁜 등장인물들에 매료되어 귀여운 그림책이라는 이미지를 가지면 그것으로 책 자체의 내용도 귀엽다는 것을 가미해 해석하곤 합니다. 그래서 교수님의 비평이 더욱 소중한 것 같습니다. 시대적 배경, 원작의 의미, 작가의 의도, 인물이 하는 말들에 대한 해석 등 종합적이고 다층적인 해석은 우리가 옥석을 가리는데 중요한 작용을 합니다.
내가 매일 기도하고, 때로는 울거나 흥겹게 노래하며 예배에 참여하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회개하는 긴 시간을 통해 신앙인이라고 믿지만, 신앙을 저해하는 것을 만났을 때 인지하지 못할뿐더러 좋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잘못된 것일까요...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의 포스터가 너무 재미나 보여서 보러가고 싶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문화-예술-문학을 즐기는 것과 분별은 불가분의 관계임에도 분별없이 즐기는 저를 발견하곤 합니다. 이제부터 저는 관심이 가는 것이 있다면 먼저 양질의 평론과 해석 및 작가의 의도를 살펴볼 자료들을 찾아보고 분별해보려고 합니다.
내가 매일 기도하고, 때로는 울거나 흥겹게 노래하며 예배에 참여하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회개하는 긴 시간을 통해 신앙인이라고 믿지만, 신앙을 저해하는 것을 만났을 때 인지하지 못할뿐더러 좋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잘못된 것일까요...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의 포스터가 너무 재미나 보여서 보러가고 싶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문화-예술-문학을 즐기는 것과 분별은 불가분의 관계임에도 분별없이 즐기는 저를 발견하곤 합니다. 이제부터 저는 관심이 가는 것이 있다면 먼저 양질의 평론과 해석 및 작가의 의도를 살펴볼 자료들을 찾아보고 분별해보려고 합니다.
youmi2025-02-10 23:24
나의 기다림은 무엇일까? 생각하며 그림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창틀 선반에 앉아 나갈 수도 없고, 네모난 창문으로만 밖을 보고 있는 인형들은 자신이 기다리는 것이 나오면 행복한 표정을 짓습니다.
하지만, 창문 밖으로는 나갈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나갈 수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수동적인 행동에서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 주님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 올랐습니다.
1월 한달간 여섯 번의 장례식에 참석을 하면서 죽음과 삶의 경계에 대해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이때
이 그림책은 나에게 많은 질문을 던져주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나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영혼을 향한 안타까움과 주님께로 인도하고자 하는 소명감을 다짐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다른 기다림도 있지만,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림이 가장 귀한 기다림으로 나의 마음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점검해 봅니다.
창틀 선반에 앉아 나갈 수도 없고, 네모난 창문으로만 밖을 보고 있는 인형들은 자신이 기다리는 것이 나오면 행복한 표정을 짓습니다.
하지만, 창문 밖으로는 나갈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나갈 수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수동적인 행동에서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 주님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 올랐습니다.
1월 한달간 여섯 번의 장례식에 참석을 하면서 죽음과 삶의 경계에 대해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이때
이 그림책은 나에게 많은 질문을 던져주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나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영혼을 향한 안타까움과 주님께로 인도하고자 하는 소명감을 다짐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다른 기다림도 있지만,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림이 가장 귀한 기다림으로 나의 마음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점검해 봅니다.
정민2025-02-10 23:55
이 글을 읽고 "조금만 기다려 봐" 그림책이 너무 궁금해서 찾아봤습니다.
교수님 글을 읽지 않았다면 저는 이 책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냥 장난감 설정이니까... 정도로 생각했을까요?
왜 장난감들로 주인공을 설정했는지, 무얼 말하고 싶은지는 깊게 생각해보지 않고 지나쳤을 것입니다.
지식이 없는 게 곧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없는 것이고 무지가 정말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에 허무주의에 대해 찾아보며 배웠습니다; ㅠ)
그림책을 보는 내내 답답함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쓰신 것처럼 사각형 유튜브 화면에 빠진 아이들이 생각나고 타인의 경험을 자신이 경험한 것처럼 느끼면서 즐거워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 무감각해고 감정은 메말라가는,,,
작가는 허무주의를 꼬집고 싶었던 걸까요, 아니면 허무주의를 아이들에게 심고 싶었던 걸까요, 궁금합니다.
유명작가들 책 뒤에는 늘 책에 대한 설명글이 있는데,("알고 보면 더 재미난 그림책"이라고 적혀있네요.)
이건 출판사에서 넣는 거겠죠?
이 내용에 따라 사람들이 이 그림책을 이해하는 방향을 정하는 느낌입니다. (온라인 리뷰들이 비슷비슷)
이런 사족이 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렵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교수님 글을 읽지 않았다면 저는 이 책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냥 장난감 설정이니까... 정도로 생각했을까요?
왜 장난감들로 주인공을 설정했는지, 무얼 말하고 싶은지는 깊게 생각해보지 않고 지나쳤을 것입니다.
지식이 없는 게 곧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없는 것이고 무지가 정말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에 허무주의에 대해 찾아보며 배웠습니다; ㅠ)
그림책을 보는 내내 답답함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쓰신 것처럼 사각형 유튜브 화면에 빠진 아이들이 생각나고 타인의 경험을 자신이 경험한 것처럼 느끼면서 즐거워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 무감각해고 감정은 메말라가는,,,
작가는 허무주의를 꼬집고 싶었던 걸까요, 아니면 허무주의를 아이들에게 심고 싶었던 걸까요, 궁금합니다.
유명작가들 책 뒤에는 늘 책에 대한 설명글이 있는데,("알고 보면 더 재미난 그림책"이라고 적혀있네요.)
이건 출판사에서 넣는 거겠죠?
이 내용에 따라 사람들이 이 그림책을 이해하는 방향을 정하는 느낌입니다. (온라인 리뷰들이 비슷비슷)
이런 사족이 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렵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twinkleLee 민옥2025-02-11 02:15
우선 번역자의 책무가 가볍지 않음을 통감합니다. 이 책의 번역자가 궁금하여 찾아 보니 전문 번역인이라기 보다 작가에 가깝다 보니 작가적 상상력이 더해진 것 같습니다. 참으로 경계해야 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번역의 목적은 출발어 독자가 그림책을 통해 느끼는 반응을 도착어 독자도 느끼도록 하는 것(김도훈, 2005)인데 어떠한 형태로든 변형을 통해 출발어 독자가 그림책을 통해 누리던 의미와 즐거움을 도착어 독자가 충분히 누리지 못하거나 다른 방향으로 반응을 하게 된다면 매우 안타까운 일이 될 것이다(정미림, 2017)'라는 것처럼 변형되어 소개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책소개 글에 "아기자기한 장난감들이 좋아하는 것을 기다리며 느끼는 설렘과 행복을 들려주어 아이들에게 ‘기다림의 의미’를 쉽게 이해시켜 줍니다."라고 하는데 무표정한 인형들에게서 느껴지는 것이 무엇이었나 하는 안개 낀 것 같은 느낌이 교수님 서평으로 맑아졌습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은 어떤지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번역의 목적은 출발어 독자가 그림책을 통해 느끼는 반응을 도착어 독자도 느끼도록 하는 것(김도훈, 2005)인데 어떠한 형태로든 변형을 통해 출발어 독자가 그림책을 통해 누리던 의미와 즐거움을 도착어 독자가 충분히 누리지 못하거나 다른 방향으로 반응을 하게 된다면 매우 안타까운 일이 될 것이다(정미림, 2017)'라는 것처럼 변형되어 소개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책소개 글에 "아기자기한 장난감들이 좋아하는 것을 기다리며 느끼는 설렘과 행복을 들려주어 아이들에게 ‘기다림의 의미’를 쉽게 이해시켜 줍니다."라고 하는데 무표정한 인형들에게서 느껴지는 것이 무엇이었나 하는 안개 낀 것 같은 느낌이 교수님 서평으로 맑아졌습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은 어떤지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love022025-02-11 08:07
기다린다는 것은 참고 견디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즉 참을성과 인내심이 결여된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더군다나 성장과정에서 행동장애를 겪는 아이들은 기다림이라는 자체가 곤욕이고 힘든 과정으로 간주되어 있다. 교수님의 서평을 읽으며 기독인으로서 이 땅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기다리며 또는 혹 밤에 혹 낮에라도 항상 기다리며 내세에 대한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신은 없다고 말한 니체나 탈의 시대를 연 푸코에 의해 사회의 구조가 해체되고 폭파되고 또 얼마만큼 나락의 깊은 곳으로 가게 될까라는 생각이 암담하기만 하다. 교수님께서는 기독교 정신을 잃어버리고 실제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론적, 가치론적 신념이 무너진 시대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고도를 기다리며>에는신을 부인하고 있으며 <조금만 기다려 봐> 그림책에는 능동성 결여와 무력한 존재들 그리고 상호작용의 결핍됨 알 수 있었다. 허무한 결말과 부조리로 가득한 책을 토대로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분별력 있게 책을 바라 보는 것은 아주 중요하며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기다림 후 영생과 구원을 맛보길 희망하며……
yunkyung2025-02-16 20:44
『조금만 기다려봐』 그림책에서 말하는 기다림이 창문 밖 자연의 변화에 따른 기다림을 얘기하는 것이라면 언젠가 반드시 올 순간에 대한 기다림을 얘기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장난감들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고, 기다렸던 순간이 와도 여전히 창 안쪽에 있을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는 결국 그 기다림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또한 장난감들 사이에는 유기적인 움직임이 없으며, 예상치 못하게 누군가 사라지거나 새롭게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를 통해 존재는 영원하지 않다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책에서 말하는 기다림은 막연한 기다림이며, 실존적 허무주의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아이들에게 ‘기다림’이라는 개념을 쉽게 이해 시키고자 고민했다던 작가는 어쩌면 기다림이라는 단어 뒤에 허무함을 감추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기다림은 이와 다릅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의미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 그저 흘려보내는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확실한 약속을 향한 기다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가지고,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기다림은 수동적 기다림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 오늘 주신 만나를 감사히 누리고, 맡겨진 일들을 겸손하고 성실하게 이루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기다림 속에서 이 시대를 분별하는 지혜와 통찰력을 가지고, 의미 있는 그림책 읽기를 이어나가길 소망 합니다.
아이들에게 ‘기다림’이라는 개념을 쉽게 이해 시키고자 고민했다던 작가는 어쩌면 기다림이라는 단어 뒤에 허무함을 감추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기다림은 이와 다릅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의미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 그저 흘려보내는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확실한 약속을 향한 기다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가지고,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기다림은 수동적 기다림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 오늘 주신 만나를 감사히 누리고, 맡겨진 일들을 겸손하고 성실하게 이루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기다림 속에서 이 시대를 분별하는 지혜와 통찰력을 가지고, 의미 있는 그림책 읽기를 이어나가길 소망 합니다.
이영진2025-08-01 17:12
[조금만 기다려봐]의 주인공들은 모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빛날 순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토끼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 없다고 하는데요. 쭉 늘어날 수 있는 목을 가지고 토끼는 어쩌면 기다림에 최적화된 모습을 가지고 있어서 별도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없는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빛이 날 것 같은 그 순간이 온다 할지라도 창문 밖의 그들에게는 무용한 순간일 뿐입니다. 새로운 코끼리 장난감이 오는 것을 환영했지만 그 장난감이 사라질 때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혹은 할 수 없고 그 다음만을 기다리는 모습은 이 책의 무기력함이 절정에 달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엇을 위한 기다림일까요. 무기력함과 허무함이 느껴집니다.
이 책을 읽는 아이들은 무엇을 느끼게 될까요...?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부분들을 평론을 통해 보게 됩니다. 언급된 바와 같이 지적, 영적 훈련들을 통해 분별력을 키워 좋은 그림책들을 선별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무엇을 위한 기다림일까요. 무기력함과 허무함이 느껴집니다.
이 책을 읽는 아이들은 무엇을 느끼게 될까요...?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부분들을 평론을 통해 보게 됩니다. 언급된 바와 같이 지적, 영적 훈련들을 통해 분별력을 키워 좋은 그림책들을 선별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고진슬2025-08-03 22:30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서평을 읽고 성경의 맨 마지막에는 어떤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다 아멘."(계22:20~21)
다시, 속히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삶,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은
결코 헛되고 헛된 것을 좇지 않는 삶이며 이런 삶을 사는 우리에게 주 예수의 은혜가 있을 것이라는 성경의 마지막장은
결국 인간이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을 얻고, 그 안에서 참소망을 얻어야 바른 기다림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이런 존재론적 통찰과 여기에서 비롯된 소망이 없는 작가가 그런 책을 쓸 수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책 작가라면 무릇 희망과 도전 정신을 주는 책을 써야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린이책에 허무, 체념을 한 스푼씩 넣는 이유가 뭘까요?
체념하는 어린이로 자라길 바라는 걸까요?
물론 이 책도 어린이책으로 출간된 만큼, 어울리는 쓰임이 있을테지만
책을 쓰임의 기준으로만 바라보고
책에 담겨 있는 작품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지 않고 어린이책을 읽는 풍조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책을 비롯한 모든 예술작품은 작가의 인격을 담고 있기에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새로운 인격과 교류하는 시간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책을 단순히 쓰임의 기준으로, 도구로 보는 경향이 더욱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독서는 결국 하나의 방법, 수단이 되어 버립니다.
이는 인격을 도구나 방법으로 치환하려는 세상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인격을 인격적인 존재로 보지 않고 방법론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요즈음의 독자 태도에도 담겨 있기에
어린이책에 담기기 적합하지 않은 허무주의 한 스푼이 살짝씩 담겨 출판되어도 시장에서 좋은 평을 받는 듯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인격을 방법론으로 보는 시각도 막시즘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도 조심스레 해 봅니다.
서평을 읽고 성경의 맨 마지막에는 어떤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다 아멘."(계22:20~21)
다시, 속히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삶,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은
결코 헛되고 헛된 것을 좇지 않는 삶이며 이런 삶을 사는 우리에게 주 예수의 은혜가 있을 것이라는 성경의 마지막장은
결국 인간이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을 얻고, 그 안에서 참소망을 얻어야 바른 기다림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이런 존재론적 통찰과 여기에서 비롯된 소망이 없는 작가가 그런 책을 쓸 수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책 작가라면 무릇 희망과 도전 정신을 주는 책을 써야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린이책에 허무, 체념을 한 스푼씩 넣는 이유가 뭘까요?
체념하는 어린이로 자라길 바라는 걸까요?
물론 이 책도 어린이책으로 출간된 만큼, 어울리는 쓰임이 있을테지만
책을 쓰임의 기준으로만 바라보고
책에 담겨 있는 작품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지 않고 어린이책을 읽는 풍조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책을 비롯한 모든 예술작품은 작가의 인격을 담고 있기에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새로운 인격과 교류하는 시간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책을 단순히 쓰임의 기준으로, 도구로 보는 경향이 더욱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독서는 결국 하나의 방법, 수단이 되어 버립니다.
이는 인격을 도구나 방법으로 치환하려는 세상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인격을 인격적인 존재로 보지 않고 방법론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요즈음의 독자 태도에도 담겨 있기에
어린이책에 담기기 적합하지 않은 허무주의 한 스푼이 살짝씩 담겨 출판되어도 시장에서 좋은 평을 받는 듯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인격을 방법론으로 보는 시각도 막시즘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도 조심스레 해 봅니다.
이정아2025-08-04 14:33
기다림은 다양한 감정과 삶의 형태를 제공한다.
어떨 때는 두근거림을, 어떨 때는 방향을 잃은 상실감을 제공한다.
그러한 기디람 끝에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두근거림을 갖고 기다린 사람은 환희와 안도 혹은 그 반대로 내가 기다린 사람이 아니라고 부정해버리기도 한다.
방향을 잃은 상실감을 갖고 기다린 사람은 왜 이제 왔는가 따지거나 혹은 그 반대로 이전의 삶의 방향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기다림은 만남이라는 것과 절대 떨어질 수 없다.
그림책 속 캐릭터도 그러하리라! 그림책 속 캐릭터는 한 없이 기다리기만 하다가 상실한다.
그러나 말씀은 기다림과 만남 그리고 만남에 대한 반응이야기가 한 가득이다.
구약에서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하고, 예정된 이야기가 사실로 드러난 순간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게 인상깊다.
마리아와 요셉은 메시아와의 만남을 당황해하고, 부정하다가 천사의 지실 순종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품는다.
세상에 나타난 예수님이 세례 요한과 만났을 때는 어떠한가?
세상에 나타난 예수님이 대제사장과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그리고 유대인을 만났을 때 반응은 더 흥미롭다. 하나님의 아들임을 사칭하는 자라고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지 않는가?
그런가 하면 사울은 이전의 삶의 방햐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예수님의 사람 스데반을 죽이고, 예수님의 사람을 죽이는 데 앞장 선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를 선교와 신학의 가장 앞자리에 서게 된다.
어떤 기다림과 만남을 이루는지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는 무기력한 기다림과 만남을 원하는 허무주의 그림책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을 통해 전혀 다른 삶의 방향으로 나아갈 또 하나의 양식을 얻는다.
어떨 때는 두근거림을, 어떨 때는 방향을 잃은 상실감을 제공한다.
그러한 기디람 끝에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두근거림을 갖고 기다린 사람은 환희와 안도 혹은 그 반대로 내가 기다린 사람이 아니라고 부정해버리기도 한다.
방향을 잃은 상실감을 갖고 기다린 사람은 왜 이제 왔는가 따지거나 혹은 그 반대로 이전의 삶의 방향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기다림은 만남이라는 것과 절대 떨어질 수 없다.
그림책 속 캐릭터도 그러하리라! 그림책 속 캐릭터는 한 없이 기다리기만 하다가 상실한다.
그러나 말씀은 기다림과 만남 그리고 만남에 대한 반응이야기가 한 가득이다.
구약에서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하고, 예정된 이야기가 사실로 드러난 순간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게 인상깊다.
마리아와 요셉은 메시아와의 만남을 당황해하고, 부정하다가 천사의 지실 순종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품는다.
세상에 나타난 예수님이 세례 요한과 만났을 때는 어떠한가?
세상에 나타난 예수님이 대제사장과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그리고 유대인을 만났을 때 반응은 더 흥미롭다. 하나님의 아들임을 사칭하는 자라고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지 않는가?
그런가 하면 사울은 이전의 삶의 방햐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예수님의 사람 스데반을 죽이고, 예수님의 사람을 죽이는 데 앞장 선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를 선교와 신학의 가장 앞자리에 서게 된다.
어떤 기다림과 만남을 이루는지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는 무기력한 기다림과 만남을 원하는 허무주의 그림책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을 통해 전혀 다른 삶의 방향으로 나아갈 또 하나의 양식을 얻는다.
김은수2025-08-04 20:22
케빈 헹크스의 『조금만 기다려 봐』는 인터넷 서점에서 아름답고 따뜻한 문장들로 추천하고 있는 그림책인데다 그림이 밝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어 읽어보았었습니다. 읽으며 별다른 감흥이 없어 아이들에게 보여주지는 않았었는데요. 평론을 통해 그림책을 촘촘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작가와 이 책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어 CHAT GPT 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케빈 헹크스의 그림책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세계관을 '다름을 인정하고 판단하지 않는 태도'로 서술하더군요. 이 세계관은 하나님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닌, 절대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태도로 보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봐』의 등장인물들이 친구관계일까?'라는 질문도 던져보았습니다. 원문 텍스트에서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friends'라는 단어가 우리나라 번역본에서는 '친구들은 함께여서 행복'했다고 표현되어지고, CHAT GPT는 그들을 친구로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전형적인 친구 관계'와는 달리 '존재를 함께하는 친구'라고 설명합니다. '말이나 큰 사건 없이도 누군가와 함께 조용히 머물며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이지요. 친구라는 관계가 그저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설명되는 것일까요? 어떤 대상을 알아가고 그와 관계를 맺어, 친밀함을 누리는 사이, '조용히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코이노니아를 경험하지 못했기 떄문일까요. 측은함이 느껴집니다. 다른 이의 삶에 깊은 관심을 두지 않는 모습을 보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창문 안에서 기다리던 것들이 창문 밖에서 이루어질 때에도 이 작은 인형들은 그것을 온전히 누리며 기뻐하지 못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로 인해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누리며 살아가지 못하는 이들이 떠오르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아름다움과 풍성함을 누리는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유다서 1:20-25]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케빈 헹크스의 그림책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세계관을 '다름을 인정하고 판단하지 않는 태도'로 서술하더군요. 이 세계관은 하나님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닌, 절대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태도로 보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봐』의 등장인물들이 친구관계일까?'라는 질문도 던져보았습니다. 원문 텍스트에서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friends'라는 단어가 우리나라 번역본에서는 '친구들은 함께여서 행복'했다고 표현되어지고, CHAT GPT는 그들을 친구로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전형적인 친구 관계'와는 달리 '존재를 함께하는 친구'라고 설명합니다. '말이나 큰 사건 없이도 누군가와 함께 조용히 머물며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이지요. 친구라는 관계가 그저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설명되는 것일까요? 어떤 대상을 알아가고 그와 관계를 맺어, 친밀함을 누리는 사이, '조용히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코이노니아를 경험하지 못했기 떄문일까요. 측은함이 느껴집니다. 다른 이의 삶에 깊은 관심을 두지 않는 모습을 보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창문 안에서 기다리던 것들이 창문 밖에서 이루어질 때에도 이 작은 인형들은 그것을 온전히 누리며 기뻐하지 못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로 인해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누리며 살아가지 못하는 이들이 떠오르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아름다움과 풍성함을 누리는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유다서 1:20-25]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현은자2025-08-05 08:55
Chat GPT에 설득당하지 않는 김선생을 칭찬하고 싶네요. 이 시대 정신은 교묘하게 믿는 자들도 미혹하고 있으니까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베전 5:8-)
손경남2026-03-29 01:36
올빼미, 꼬마 돼지, 아기곰, 강아지는 자신을 재미있고 행복(happiness)하게 해줄 무언가를 바라고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별토끼는 기다리는 대상과 목적도 없이 그냥 기다리는 것 자체를 좋아한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아무 이유와 목적 없이 기다리는 것 자체만을 좋아할 수 있을까? 짧은 시간 멍하니 기다리는 것은 모르겠으나, 오랜 시간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이 막연히 기다린다는 것은 반복적인 일상을 허무하게 흘려보내는 것이며, 소망 없이 공허함 속에 머무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의미와 목적이 분명할 때, 흘러가는 시간은 비로소 가치 있는 기다림이 된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삶의 목적도 의미도 없이 죽고나면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 허무주의자도 아니며 이 세상의 즐거움만 좇는 쾌락주의자도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며, 다시 오실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기다리는 신자이다. 그 소망이 오랜 기다림 끝에 이루어지는 그날,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즐거움과 행복(happiness)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참 기쁨(joy)을 누리게 될 것을 믿으며 나는 오늘도 그 기다림의 자리에 서 있는다.
그런데 정말 아무 이유와 목적 없이 기다리는 것 자체만을 좋아할 수 있을까? 짧은 시간 멍하니 기다리는 것은 모르겠으나, 오랜 시간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이 막연히 기다린다는 것은 반복적인 일상을 허무하게 흘려보내는 것이며, 소망 없이 공허함 속에 머무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의미와 목적이 분명할 때, 흘러가는 시간은 비로소 가치 있는 기다림이 된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삶의 목적도 의미도 없이 죽고나면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 허무주의자도 아니며 이 세상의 즐거움만 좇는 쾌락주의자도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며, 다시 오실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기다리는 신자이다. 그 소망이 오랜 기다림 끝에 이루어지는 그날,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즐거움과 행복(happiness)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참 기쁨(joy)을 누리게 될 것을 믿으며 나는 오늘도 그 기다림의 자리에 서 있는다.
with Chang2026-03-29 03:46
교수님의 글을 읽으며 『고도를 기다리며』와 『Waiting』이 함께 겹쳐 보였습니다. 막연한 대상 없이 이어지는 기다림,
그리고 그 시간을 견디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Kevin Henkes의 『Waiting』은 감정을 참 섬세하게 보여주지만, 그 기다림의 대상이나 방향은 열어둔 채 남겨두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감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기다림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됩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끝내 오지 않는 존재를 기다리고, 『Waiting』은 무엇을 기다리는지 말하지 않은 채 그 감정 속에 머무르게 합니다.
두 작품 모두 기다림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만, 그 기다림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는 독자에게 맡겨져 있어요.
그래서 그림책 해석이 독자의 몫으로 남겨질 때, 그 여백이 때로는 깊은 사유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방향을 잃을 수도 있고 모호한 허무주의로 빠져들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조심스럽게 해보게 됩니다.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앞둔 이 시기에 기독교인으로서의 기다림은 얼마나 소망과 확신을 주는지요.
우리는 막연한 ‘어떤 것’을 기다리기보다, 분명한 약속과 소망을 향해 기다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림책을 읽을 때에도 공감에 머무르기보다, 이 이야기가 내 마음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 한 번 더 돌아보게 됩니다.
교수님의 글 덕분에 그 질문을 더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견디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Kevin Henkes의 『Waiting』은 감정을 참 섬세하게 보여주지만, 그 기다림의 대상이나 방향은 열어둔 채 남겨두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감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기다림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됩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끝내 오지 않는 존재를 기다리고, 『Waiting』은 무엇을 기다리는지 말하지 않은 채 그 감정 속에 머무르게 합니다.
두 작품 모두 기다림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만, 그 기다림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는 독자에게 맡겨져 있어요.
그래서 그림책 해석이 독자의 몫으로 남겨질 때, 그 여백이 때로는 깊은 사유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방향을 잃을 수도 있고 모호한 허무주의로 빠져들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조심스럽게 해보게 됩니다.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앞둔 이 시기에 기독교인으로서의 기다림은 얼마나 소망과 확신을 주는지요.
우리는 막연한 ‘어떤 것’을 기다리기보다, 분명한 약속과 소망을 향해 기다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림책을 읽을 때에도 공감에 머무르기보다, 이 이야기가 내 마음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 한 번 더 돌아보게 됩니다.
교수님의 글 덕분에 그 질문을 더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강다혜2026-03-29 17:01
이 그림책은 그림체도 아기자기 하고 예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작가를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다른 한 편으로 저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볼 때 공교롭게도 어린이집에서 단체 관람을 온 유아들과 함께 봤습니다. 그때 유아들이 계속 울고, 지루해하고, 짜증내고 ^^ 교사들은 당황하고 어쩔 줄을 몰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연극을 보았습니다. 그 때 한 교사가 "왜 이 연극이 유명해요? 아무 내용도 없는데.."라고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아이들이랑 유명한 연극이라고 해서 보러 왔는데, 유아들에게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내용이라 교사들이 얼마나 당황스럽고 힘들었을까요 ㅎㅎ 저는 사실 연극이 시작하기 전, 왜 어린이집에서 이 연극을 단체관람으로 왔는지... 교사들이 큰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저의 생각이 맞았습니다.
교수님의 글처럼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은 삶의 소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기다림의 이유와 근거도 없고 기다림의 소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의 끝은 참으로 의미가 없고 허무하기만 합니다. 자신들이 왜 살아가야 하는지, 왜 열심을 다해야하는지 그들을 알지 못한 채 그저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자신도 강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그저 따라갑니다.
이 그림책을 보고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와 관련지어 현대인의 허무함을 표현하신 교수님의 글에 참으로 감명을 받았습니다. ^^
내일부터 고난주간이 시작인데, 나의 삶은 무엇을 향해가고 있는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교수님의 글처럼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은 삶의 소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기다림의 이유와 근거도 없고 기다림의 소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의 끝은 참으로 의미가 없고 허무하기만 합니다. 자신들이 왜 살아가야 하는지, 왜 열심을 다해야하는지 그들을 알지 못한 채 그저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자신도 강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그저 따라갑니다.
이 그림책을 보고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와 관련지어 현대인의 허무함을 표현하신 교수님의 글에 참으로 감명을 받았습니다. ^^
내일부터 고난주간이 시작인데, 나의 삶은 무엇을 향해가고 있는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지상선2026-03-29 19:38
”다음과 같은 학문적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 그림책의 매체적 특성, 예술 행위에 대한 본질주의적 접근, 문학과 서사에 대한 이해, 바른 성경 교리(doctrine)에 입각한 기독교 세계관 등.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 무엇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지를 자문해 보는 것이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나를 사로잡는 것을 고백합니다. 강의를 할 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렇기에 눈치도 봅니다. 믿고 싶은 것만 믿기에, 정말 논리적리며 감동적으로 다가가지 않으면 강의의 진실이 왜곡 되기도 하거든요… 더 단단한 지혜가 필요한 세대에 살고 있는 것 같아요. 말씀 중에 다음과 같은 귀절을 되새겨봅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태복음 10장 16절)
이 말씀을 묵상하며 나를 사로잡는 것을 고백합니다. 강의를 할 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렇기에 눈치도 봅니다. 믿고 싶은 것만 믿기에, 정말 논리적리며 감동적으로 다가가지 않으면 강의의 진실이 왜곡 되기도 하거든요… 더 단단한 지혜가 필요한 세대에 살고 있는 것 같아요. 말씀 중에 다음과 같은 귀절을 되새겨봅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태복음 10장 16절)
김하순2026-03-30 20:57
교수님의 평론을 읽고 드는 생각을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첫째, 교수님은 '조금만 기다려봐 '라는 그림책에 허무주의가 들어 있다고 얘기하셨는데 제가 아직 눈이 덜 열려서 그러겠지만, 납득이 안 가는 것이 솔직한 제 마음입니다.
이 그림책 뒤에 번역자가 써 놓은 것인지는 모르겧으나, 아이들에게 기다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기다 인내심과 자제력을 가르치기에 좋은 그림책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저도 교수님의 평론 이야기를 읽지 않았다면, '아이들에게 기다림에 대해서 가르치는 책이겠구나.' 이렇게 생각이 들었을 것 같아요.
두 번째, 등장인물이 인형을 사용한 것에 대하여 교수님은 닫힌 세계 그리고 능동적이지 않은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없는 뭐 그 인형의 주인 주인이 움직여줘야만 움직일 수 있는 무력한 존재로 얘기하셨는데,
역자의 평론처럼 아이들이 인형을 좋아하니까 아이들이 좋아하는 소재를 사용했다는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 됩니다.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드러난 것만 보게 되는데
교수님의 평론은 몇 번 껍질을 까서 속으로 들어가야만 보여지고 알아지는 것이어서,
그냥 애들에게 모든 순간에는 기다림이 존재한다. 그러니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을 잘 배워야돼
이런 메세지를 전달하는 용도로 활용하면 되는거 아닐까 이런 생각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 마음은 교수님의 평론에 반론을 제기하려는 것이 아니고은 아직 제가 뭔가 눈이 가려져 있어서 크리스찬으로서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이번 기회에 제가 교수님을 통해서 소경된 논이 열려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하나 여기서 제가 교수님 평론을 보면어떤 텍스트를 세계관적으로 읽는 작업은 그 텍스트에 투영된 미처, 우리가 인식하지도 못했던 시대 정신을 파악할 수 있고 기독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기독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다는 얘기에 가슴이 뛰었고요,
그러기 위해서 그림책의 매체적 특성, 예술 행위에 대한 본질주의적 접근, 문학과 서사에 대한 이해, 바른 성경, 교리에 입각한 기독교 세계관 등 을 아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그림책의 매체적 특성이나 예술 행위에 대한 본질주의적 접근, 문학과 서사에 대한 이해, 이런 것은 배워보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전보람2026-03-30 22:45
일단 제목부터 '기다리기'와 '조금만 기다려봐'는 너무 다른 뉘앙스가 느껴지는것 같습니다. 조금만 기다려봐 라는 제목을 보면 무언가 일어날것 같고 그 일은 꽤나 긍정적일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도 책을 읽으면서 긍정적이거나 밝은 느낌은 받지 못하였습니다. 달님을 기다리고 비를 기다리고 바람을 기다리고 눈을 기다리지만 정작 자신들과는 아무 관련없는 창밖의 일이며 더 나아가지 못하고 언제나 그 자리에 있기만 한 모습이 왠지 처량하고 소망이 없어보입니다. 그리고 표지에 있는 그림에서 구름의 모양이 각자 자신이 바라는 소망이 어떤건지 나타내주는 것 같습니다. 힘차게 날개를 펴고 훨훨 날아가거나 썰매에서 벗어나 세상에서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하는 그런 소망을 그려보지만 그저 창문 안쪽에서 아무 힘없이 바라만 볼 뿐 할수있는것도 어떤 특별한 방법도 없어보이네요.중간 중간 너무 의역된 내용을 보며 다시금 제대로 번역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그림이 예쁘고 귀여운 것에 속으면(?)안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곽서연2026-03-31 02:36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34:8) 라는 말씀이 떠올랐어요.
이렇게 좋고 아름답고 즐거운 것들이 많은데 인형()은 생명이 없기에 그것들을 즐기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랄까...
물론 비가 오니 행복했고 달이 뜨니 기뻐했다고는 하지만 '~인 척 ' 이지 진정으로 기쁨도 즐거움도 행복도 없는 기다림과 일상.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소망이 없는 청소년과 어른들 모습이 연상 됩니다.
이렇게 좋고 아름답고 즐거운 것들이 많은데 인형()은 생명이 없기에 그것들을 즐기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랄까...
물론 비가 오니 행복했고 달이 뜨니 기뻐했다고는 하지만 '~인 척 ' 이지 진정으로 기쁨도 즐거움도 행복도 없는 기다림과 일상.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소망이 없는 청소년과 어른들 모습이 연상 됩니다.
지민규2026-03-31 03:37
그림책을 먼저 보면서 느껴진 무의미함의 정체를 평론을 보며 세계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림책이 전달하는 작은 이야기조차도 우리의 내밀한 부분을 건드리는 영적인 힘이 있다는 말씀이 많이 와닿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설, 드라마, 영화도 세계관적으로 읽는 작업이 어떤 유익이 있고 하나님 나라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잘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림책이 전달하는 작은 이야기조차도 우리의 내밀한 부분을 건드리는 영적인 힘이 있다는 말씀이 많이 와닿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설, 드라마, 영화도 세계관적으로 읽는 작업이 어떤 유익이 있고 하나님 나라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잘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Joy2026-03-31 05:08
고도를 기다렸지만, 결국 고도를 만나지 못한다.
조금만 기다려봐 에서
기다리는 것들과 조우하며 기뻐하는 해피앤딩 같았지만,
유리창속에 갖혀있을 뿐이다.
코끼리는 왜 깨졌는가
우리는 질그릇과 같은 존재임을 알리는 것은 아닐까 ( 고후 4: 7 )
우리는 누구를 기다려야 하며, 누구와 함께하여야 진정 행복을 누릴수 있는가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디로 가는가 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지금도 누구를 기다려야 할지 모른채
누군가를 끊임없이 기다리는 수많은 이웃들에게
나는 어떠해야 하는지 ....이기적인 내 모습, 돌아보게 된다.
인내하며 기다리시는 하나님아버지의 마음,,,
조금만 기다려봐 에서
기다리는 것들과 조우하며 기뻐하는 해피앤딩 같았지만,
유리창속에 갖혀있을 뿐이다.
코끼리는 왜 깨졌는가
우리는 질그릇과 같은 존재임을 알리는 것은 아닐까 ( 고후 4: 7 )
우리는 누구를 기다려야 하며, 누구와 함께하여야 진정 행복을 누릴수 있는가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디로 가는가 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지금도 누구를 기다려야 할지 모른채
누군가를 끊임없이 기다리는 수많은 이웃들에게
나는 어떠해야 하는지 ....이기적인 내 모습, 돌아보게 된다.
인내하며 기다리시는 하나님아버지의 마음,,,
Cathy2026-03-31 09:31
숨어있는 간극을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함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림책을 만나면 만날수록, 문학과 비문학을 만나면 만날수록.. 성경을 더 깊이 읽어야 하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김선옥2026-03-31 11:00
우리는 인생 가운데 수많은 기다림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좋은 것일까? 아닐까?
여러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좋은 기다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무엇을 기다리며 살까?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는 말하는데 이게 맞는 것일까?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또 평론에서 그림책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가 통합적 사고를 하지 못 한다면 결국 그림책의 단편만 볼 수 밖에 없음을 알았습니다.
특히 번역본은 원작의 의미를 완벽이 변역한 것이 아니라 변역가나 변역된 나라의 문학적(?) 문화적 사고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원작과의 비교가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여러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좋은 기다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무엇을 기다리며 살까?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는 말하는데 이게 맞는 것일까?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또 평론에서 그림책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가 통합적 사고를 하지 못 한다면 결국 그림책의 단편만 볼 수 밖에 없음을 알았습니다.
특히 번역본은 원작의 의미를 완벽이 변역한 것이 아니라 변역가나 변역된 나라의 문학적(?) 문화적 사고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원작과의 비교가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김주경2026-07-10 01:21
책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책의 뒷표지였다. 분홍색으로 쓰인 “칼데콧 명예상 수상작!”이라는 문구와 그 아래 줄줄이 적힌 수상 및 선정 이력들이 앞표지의 제목과 그림보다 더 눈에 띄었다. 한국에서 출판된 책은 그런 인상이 컸던 반면 영어 원본 표지는 토끼 인형 하나만 그려져 있고, 수상 목록도 없으며, 심지어 제목도 보이지 않았다. 그 여백이 오히려 이 책의 텅 빈 정서를 더 잘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든 질문은 이것이었다. 왜 이 장난감들은 방 안을 바라보지 않고, 모두 등을 돌린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을까? 장난감들의 세상은 본래 창밖이 아니라 방 안이어야 하지 않을까. 토이 스토리의 장난감들처럼, 그들의 세계는 자신들의 주인일 어린아이와 함께 놀고 관계 맺는 데 있어야 하지 않은가.
번역본의 마지막에는 아마도 출판사에서 덧붙인 것으로 보이는 해설이 실려 있다. 그 글은 아이의 인내심과 자제력을 키워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 이 순간을 참아야 하는지, 왜 당장 하고 싶은 것을 하면 안 되는지를 아이 스스로 이해해야 인내심과 자제력을 기를 수 있으며, 이 그림책이 그 방법을 알려준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나는 그 해석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이 그림책은 왜 이 순간을 참아야 하는지, 왜 기다려야 하는지를 알려주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칼럼에 쓰인 것처럼 인형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비를 직접 맞을 수 없고, 바람 부는 날에 연을 날릴 수 없으며, 함박눈 속에서 썰매를 탈 수 없다. 장난감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그것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기다림은 인내심과 자제력 훈련이라기 보다 관망, 체념에 가깝다.)
칼럼을 읽으며 특히 의아했던 부분은 원본 전체에서 “friends”라는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같은 자리에 나란히 서있지만 친구라고 불리울 만한 관계가 아니라니, 원본 표지처럼 작가는 공허한 내면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만약 장난감들이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면, 그들은 창문을 열고 달빛과 비와 바람과 눈을 직접 몸으로 느끼고 싶었을까? 이 질문을 생각 하다가 문득 친구와 정동진에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바다에 가도 물에 들어가는 것을 질색하는 반면 내 친구는 바다를 보면 팔을 벌리고 뛰어가 온몸을 적신다. 그리고 멀찍이 서 있는 나를 끌고 가 기어이 내게 물을 몇 번은 뿌리고 만다. 왜 이 장면이 떠올랐을까.
나는 이 책이 잘 쓰였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책이 지금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칼럼에서 말한 대로 밝고 부드럽고 행복해 보이는 표면 뒤에, 허무주의의 음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기다리지만 왜 기다리는지 모르고,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르는 텅 빈 지금 세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그래서 나는 오히려 번역본처럼 표지에 수상 목록을 돋보이게 나열하거나, 책 뒤에 교육적 해설을 덧붙이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본처럼 텅 빈 표지 그대로 출간되었다면, 이 책이 가진 공허한 정서가 더 선명하게 다가왔을 것 같다. 더 나아가 이 책을 1권으로 두고, 2권에서 반전을 줄 수 있다면 어떨까 상상해 보았다. 아니면 내가 직접 그다음 이야기를 상상해 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에 내가 아이를 양육한다면, 나는 이런 책을 읽어줄 것 같다. 다만 이 책만 읽어주기보다는, 이 책과 대비되는 이야기책을 하나 더 읽어주거나 성경 그림책을 함께 읽어주고 싶다.
칼럼 후반에 세계관적으로 텍스트를 읽기 위해서는 여러 학문적 지식이 필요하며 동시에 그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지금 무엇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라는 말에 동감한다. 이를 위해 나 자신이 전신갑주를 입고 단단하게 서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느낀 점을 다 써내려가는 지금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나는 엄마에 의해, 치기 싫어도 피아노를 쳐야 했다. 입시를 위해 하루에 기본적으로 네다섯 시간씩 연습해야 했는데, 방음이 된 연습실은 늘 고무와 접착제 냄새가 났다. 그래서 나는 겨울에도 창문을 열어 둔 채 피아노를 쳤었다. 그때 창밖을 바라보며 나는 왜 피아노를 쳐야 할까. 이런 생각을 자주 했던 내가 떠오른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니, 나는 기어코 그 창문 너머의 세상으로 뛰어나온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바닷물에 몸을 담그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나도 온몸을 확실히 적시는 사람이었다. 다행이다.
그리고 이 책을 덮으며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창조물들이 장난감처럼 가만히 놓여 있는 것을 그저 보고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확신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든 질문은 이것이었다. 왜 이 장난감들은 방 안을 바라보지 않고, 모두 등을 돌린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을까? 장난감들의 세상은 본래 창밖이 아니라 방 안이어야 하지 않을까. 토이 스토리의 장난감들처럼, 그들의 세계는 자신들의 주인일 어린아이와 함께 놀고 관계 맺는 데 있어야 하지 않은가.
번역본의 마지막에는 아마도 출판사에서 덧붙인 것으로 보이는 해설이 실려 있다. 그 글은 아이의 인내심과 자제력을 키워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 이 순간을 참아야 하는지, 왜 당장 하고 싶은 것을 하면 안 되는지를 아이 스스로 이해해야 인내심과 자제력을 기를 수 있으며, 이 그림책이 그 방법을 알려준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나는 그 해석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이 그림책은 왜 이 순간을 참아야 하는지, 왜 기다려야 하는지를 알려주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칼럼에 쓰인 것처럼 인형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비를 직접 맞을 수 없고, 바람 부는 날에 연을 날릴 수 없으며, 함박눈 속에서 썰매를 탈 수 없다. 장난감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그것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기다림은 인내심과 자제력 훈련이라기 보다 관망, 체념에 가깝다.)
칼럼을 읽으며 특히 의아했던 부분은 원본 전체에서 “friends”라는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같은 자리에 나란히 서있지만 친구라고 불리울 만한 관계가 아니라니, 원본 표지처럼 작가는 공허한 내면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만약 장난감들이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면, 그들은 창문을 열고 달빛과 비와 바람과 눈을 직접 몸으로 느끼고 싶었을까? 이 질문을 생각 하다가 문득 친구와 정동진에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바다에 가도 물에 들어가는 것을 질색하는 반면 내 친구는 바다를 보면 팔을 벌리고 뛰어가 온몸을 적신다. 그리고 멀찍이 서 있는 나를 끌고 가 기어이 내게 물을 몇 번은 뿌리고 만다. 왜 이 장면이 떠올랐을까.
나는 이 책이 잘 쓰였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책이 지금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칼럼에서 말한 대로 밝고 부드럽고 행복해 보이는 표면 뒤에, 허무주의의 음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기다리지만 왜 기다리는지 모르고,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르는 텅 빈 지금 세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그래서 나는 오히려 번역본처럼 표지에 수상 목록을 돋보이게 나열하거나, 책 뒤에 교육적 해설을 덧붙이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본처럼 텅 빈 표지 그대로 출간되었다면, 이 책이 가진 공허한 정서가 더 선명하게 다가왔을 것 같다. 더 나아가 이 책을 1권으로 두고, 2권에서 반전을 줄 수 있다면 어떨까 상상해 보았다. 아니면 내가 직접 그다음 이야기를 상상해 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에 내가 아이를 양육한다면, 나는 이런 책을 읽어줄 것 같다. 다만 이 책만 읽어주기보다는, 이 책과 대비되는 이야기책을 하나 더 읽어주거나 성경 그림책을 함께 읽어주고 싶다.
칼럼 후반에 세계관적으로 텍스트를 읽기 위해서는 여러 학문적 지식이 필요하며 동시에 그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지금 무엇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라는 말에 동감한다. 이를 위해 나 자신이 전신갑주를 입고 단단하게 서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느낀 점을 다 써내려가는 지금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나는 엄마에 의해, 치기 싫어도 피아노를 쳐야 했다. 입시를 위해 하루에 기본적으로 네다섯 시간씩 연습해야 했는데, 방음이 된 연습실은 늘 고무와 접착제 냄새가 났다. 그래서 나는 겨울에도 창문을 열어 둔 채 피아노를 쳤었다. 그때 창밖을 바라보며 나는 왜 피아노를 쳐야 할까. 이런 생각을 자주 했던 내가 떠오른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니, 나는 기어코 그 창문 너머의 세상으로 뛰어나온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바닷물에 몸을 담그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나도 온몸을 확실히 적시는 사람이었다. 다행이다.
그리고 이 책을 덮으며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창조물들이 장난감처럼 가만히 놓여 있는 것을 그저 보고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확신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이아름2026-07-11 22:25
일단 그림책의 그림이 귀엽고, ‘조금만 기다려봐’ 제목 속에 뭔가 기대했던 일이나 또는 예상치 못했던 신나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데 막상 그림책을 펼쳐보니 목적없이·의미없이 기다리고, 기다림 끝에 각자가 원했던 것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기다린다고 합니다. 책을 읽고 나서 의문점이 들었습니다.
책 마지막에 ‘또 무언가 두근두근 재밌고 행복한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린다’고 하는데,
이렇게 목적없는 기다림이 아이들에게 또 어른들에게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을까? 기독교인으로서 이러한 인내를 기르는 것이 맞을까?
라고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냥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인내라는 성품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림책 속에서는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일상에서의 기다림이 나왔습니다.
당연히 밤이 되면 달이 뜨고, 여름이 되면 비가 내리고, 가을이 되면 바람이 불고,
겨울이 되면 눈이 내리는 시간이 흐르면 당연히 오게 되는 것들이요.
이런 것은 인내라기보다는 그저 흘러가는 대로 맡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무기력하게요.
하지만 우리의 인내는 수동적인 시간보내기가 아니라, 능동적인 신뢰를 따라가야 함을 느꼈습니다.
내가 처한 환경을 수용하는 것을 넘어서, 환난과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적극적으로 견뎌내고
고통스러운 기다림의 시간을 통과하여 내 안에 있는 불순물이 빠지고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영적훈련과정이야 말로 인내의 열매를 맺어나가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그런데 막상 그림책을 펼쳐보니 목적없이·의미없이 기다리고, 기다림 끝에 각자가 원했던 것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기다린다고 합니다. 책을 읽고 나서 의문점이 들었습니다.
책 마지막에 ‘또 무언가 두근두근 재밌고 행복한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린다’고 하는데,
이렇게 목적없는 기다림이 아이들에게 또 어른들에게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을까? 기독교인으로서 이러한 인내를 기르는 것이 맞을까?
라고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냥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인내라는 성품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림책 속에서는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일상에서의 기다림이 나왔습니다.
당연히 밤이 되면 달이 뜨고, 여름이 되면 비가 내리고, 가을이 되면 바람이 불고,
겨울이 되면 눈이 내리는 시간이 흐르면 당연히 오게 되는 것들이요.
이런 것은 인내라기보다는 그저 흘러가는 대로 맡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무기력하게요.
하지만 우리의 인내는 수동적인 시간보내기가 아니라, 능동적인 신뢰를 따라가야 함을 느꼈습니다.
내가 처한 환경을 수용하는 것을 넘어서, 환난과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적극적으로 견뎌내고
고통스러운 기다림의 시간을 통과하여 내 안에 있는 불순물이 빠지고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영적훈련과정이야 말로 인내의 열매를 맺어나가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하은혜2026-07-12 00:37
우선, 원본의 책 표지를 보면 토끼만 보인다. 앞표지도 뒷표지도 토끼는 목을 길게 내밀고 무언가를 쳐다보고 있다. 그 모습을 보니 무엇을 저렇게 쳐다보고 있을까,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 궁금해졌다.하지만 내용을 봐도 결국 무엇을 기다리는 것인지 끝내 알 수가 없다. 잠시 누군가가 자리를 이탈해도 상관없이 목을 내빼고 창 밖을 바라보는 데에 집중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다른 인형들보다 더 뚜렷한 무언가를 좋아해 보이는데도 말이다.
다같이 잘 때 몸을 선반 모양에 맞춰 추욱 늘어뜨린 모습, 뜻밖의 선물(도토리,조개,구슬)이 놓여질 때 허리를 숙이는 모습, 코끼리가 떨어져 깨져 버렸을 때 확실히 몸을 꺾어 쳐다보는 모습, 봄 꽃이 폈을 때 몸을 높-이 세워 관찰하는 모습, 번개 칠 때 몸을 아주 낮게 낮추는 모습, 고양이가 나타났을 때 면밀히 보기 위해 또는 아기 고양이들이 생겼을 때 선반에 몸을 바짝 엎드려 눈높이를 맞추는 모습 등.. 가장 확실히 반응하며 액션을 취하는 듯 보이는 토끼는 분명 무언가를 기다릴만한 캐릭터로 보인다. 물론 각각의 인형들마다 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형태나 모습이 있고, 생김새에 맞춰진 특징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토끼의 움직임이 유달리 남달라 보였고 눈에 띈다.
그 모습을 보며, 무언가를 대할 때 나의 태도는 어떠한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내 것 외에는 방관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인지, 매사에 적극적인 사람인지. 원래도 주저함이 많고 소극적인 성향이지만 개인주의가 강해진 사회 흐름에 따라 더 더 내 좁은 바운더리에만 집중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 나의 시선과 행함이 어디를 향해 적극적이어야 하는지, 주님의 지혜와 용기를 구해야겠다는 생각까지 이른다.
또 한편으로는 다른 인형들이 기다리던 어떠한 것 그 하나 만으로도 행복함을 느꼈다면, 어쩌면 토끼는 매번 달라지는 창밖의 상황 속에서 얻어지는 새로운 즐거움들을 추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께서 창밖을 마치 '미디어'로 해석해내신 점이 매우 놀라운 시선이었는데, 그 관점으로 바라보자면, 토끼는 어쩌면 미디어와 같은 매체 혹은 트렌드라 여겨지는 것들에 쉽게 휩싸여 도파민을 쫓는 이들의 모습으로 까지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교수님의 해석은 나의 생각을 확장하게 되는 지점이었다. 교수님의 글에서 가장 포인트로 느껴진 '지금 무엇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지 자문해보기' 로도 내용이 적용 되었다. 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생명력이 있는 것 그 한가지 일까. 아님, 세상의 풍파에 토끼처럼 이리저리 반응하며 살아가는 자갈밭 같은 마음일까. 오직 영원한 생명의 길, 예수님의 재림 그것 하나 만을 바라보며 준비된 자로 살기를 바란다.
또한, 전반적으로 한계가 느껴지는 상황과 환경으로 그려져서인지, 이 인형들이 기대하며 기다리는 그 무언가를 진정으로 만날 수 있을까? 에 대한 의문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번역본의 마지막 책 설명 글에서는 '긍정적인 기다림의 의미', '자제력과 인내심', '자연의 법칙', '사계절의 아름다움' 등 따뜻한 내용들로 책을 설명하고 있지만, 그림에 쓰여진 색감이나 귀여운 그림체만 따뜻할 뿐이다. 교수님의 글처럼, 결국에 자신들이 기다리던 것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누리진 못한다. 이런 내용을 과연 아이들에게 기다림 끝에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설명 글에서 말한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실제로 누리지도 못하는 환경. 안전하다는 창 안쪽이지만 언제든 선반에서 떨어져 망가지고 깨질 수도 있는 그 위태로운 곳. 놓여진 그 곳에서만 지내고 있으라고,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친구들과 지내며, 창 밖만 바라보고 있으라고 말하게 되는 책은 아닐까. 어느 날 갑자기 놓여진 선물들은 과연 그 아이들에게 정말 선물이 맞을까? '달과 비와 바람과 눈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것'이 행복인 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것들을 직접 보고 만지고 느끼면서 움직이며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마지막으로, 고양이의 존재는 무엇을 뜻하는 걸까 생각해보게 된다. 번역본의 뒷표지에는 고양이만 그려질 정도로 존재감이 꽤 있는 캐릭터로 보이는데, 내용의 흐름상으로는 다소 뜬금없이 느껴진다. 고양이는 다른 인형들과 달리 특별히 기다리는 것도 없다는데, 갑자기 다섯 마리가 될 수 있는 'She'로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두근두근 재밌'는 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까? 같이 창 밖을 바라보는 존재들을 많이 만든 것만으로도 원래 있던 인형들에게 두근두근 재밌는 일이 되는 걸까? 함께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의미 있는 캐릭터가 되는 것일까?
더 늘어난 그 존재들이 바라보는 창밖에는 굉장히 많은 나비가 팔랑팔랑 날아다닌다. 나비들이 그렇게 많이 날아다니는 곳은 흔치 않다. 실제로 공원을 가봐도, 나비 정원을 가봐도,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모습은 잘 보지 못했다. 몇 마리 정도만 날아다닐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바라보고 있는 그 창 밖은 허상을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정해진 규제 안에 가둬 놓고, 마치 너희는 파라다이스에 있는 것이라고 세뇌 당하는 체제가 연상 되기도 하는 부분이다.
여러 갈래의 생각을 하게 되는 책이었는데, 따뜻해보이는 것과 달리 허무하고 우울감까지 느껴지는 것을 경험하며, 겉으로 보이는 것 이면에 내포된 것들을 잘 알아채기 위해서는 올바른 세계관을 갖고 있어야겠다는 결심이 다시금 든다.
다같이 잘 때 몸을 선반 모양에 맞춰 추욱 늘어뜨린 모습, 뜻밖의 선물(도토리,조개,구슬)이 놓여질 때 허리를 숙이는 모습, 코끼리가 떨어져 깨져 버렸을 때 확실히 몸을 꺾어 쳐다보는 모습, 봄 꽃이 폈을 때 몸을 높-이 세워 관찰하는 모습, 번개 칠 때 몸을 아주 낮게 낮추는 모습, 고양이가 나타났을 때 면밀히 보기 위해 또는 아기 고양이들이 생겼을 때 선반에 몸을 바짝 엎드려 눈높이를 맞추는 모습 등.. 가장 확실히 반응하며 액션을 취하는 듯 보이는 토끼는 분명 무언가를 기다릴만한 캐릭터로 보인다. 물론 각각의 인형들마다 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형태나 모습이 있고, 생김새에 맞춰진 특징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토끼의 움직임이 유달리 남달라 보였고 눈에 띈다.
그 모습을 보며, 무언가를 대할 때 나의 태도는 어떠한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내 것 외에는 방관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인지, 매사에 적극적인 사람인지. 원래도 주저함이 많고 소극적인 성향이지만 개인주의가 강해진 사회 흐름에 따라 더 더 내 좁은 바운더리에만 집중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 나의 시선과 행함이 어디를 향해 적극적이어야 하는지, 주님의 지혜와 용기를 구해야겠다는 생각까지 이른다.
또 한편으로는 다른 인형들이 기다리던 어떠한 것 그 하나 만으로도 행복함을 느꼈다면, 어쩌면 토끼는 매번 달라지는 창밖의 상황 속에서 얻어지는 새로운 즐거움들을 추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께서 창밖을 마치 '미디어'로 해석해내신 점이 매우 놀라운 시선이었는데, 그 관점으로 바라보자면, 토끼는 어쩌면 미디어와 같은 매체 혹은 트렌드라 여겨지는 것들에 쉽게 휩싸여 도파민을 쫓는 이들의 모습으로 까지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교수님의 해석은 나의 생각을 확장하게 되는 지점이었다. 교수님의 글에서 가장 포인트로 느껴진 '지금 무엇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지 자문해보기' 로도 내용이 적용 되었다. 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생명력이 있는 것 그 한가지 일까. 아님, 세상의 풍파에 토끼처럼 이리저리 반응하며 살아가는 자갈밭 같은 마음일까. 오직 영원한 생명의 길, 예수님의 재림 그것 하나 만을 바라보며 준비된 자로 살기를 바란다.
또한, 전반적으로 한계가 느껴지는 상황과 환경으로 그려져서인지, 이 인형들이 기대하며 기다리는 그 무언가를 진정으로 만날 수 있을까? 에 대한 의문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번역본의 마지막 책 설명 글에서는 '긍정적인 기다림의 의미', '자제력과 인내심', '자연의 법칙', '사계절의 아름다움' 등 따뜻한 내용들로 책을 설명하고 있지만, 그림에 쓰여진 색감이나 귀여운 그림체만 따뜻할 뿐이다. 교수님의 글처럼, 결국에 자신들이 기다리던 것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누리진 못한다. 이런 내용을 과연 아이들에게 기다림 끝에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설명 글에서 말한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실제로 누리지도 못하는 환경. 안전하다는 창 안쪽이지만 언제든 선반에서 떨어져 망가지고 깨질 수도 있는 그 위태로운 곳. 놓여진 그 곳에서만 지내고 있으라고,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친구들과 지내며, 창 밖만 바라보고 있으라고 말하게 되는 책은 아닐까. 어느 날 갑자기 놓여진 선물들은 과연 그 아이들에게 정말 선물이 맞을까? '달과 비와 바람과 눈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것'이 행복인 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것들을 직접 보고 만지고 느끼면서 움직이며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마지막으로, 고양이의 존재는 무엇을 뜻하는 걸까 생각해보게 된다. 번역본의 뒷표지에는 고양이만 그려질 정도로 존재감이 꽤 있는 캐릭터로 보이는데, 내용의 흐름상으로는 다소 뜬금없이 느껴진다. 고양이는 다른 인형들과 달리 특별히 기다리는 것도 없다는데, 갑자기 다섯 마리가 될 수 있는 'She'로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두근두근 재밌'는 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까? 같이 창 밖을 바라보는 존재들을 많이 만든 것만으로도 원래 있던 인형들에게 두근두근 재밌는 일이 되는 걸까? 함께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의미 있는 캐릭터가 되는 것일까?
더 늘어난 그 존재들이 바라보는 창밖에는 굉장히 많은 나비가 팔랑팔랑 날아다닌다. 나비들이 그렇게 많이 날아다니는 곳은 흔치 않다. 실제로 공원을 가봐도, 나비 정원을 가봐도,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모습은 잘 보지 못했다. 몇 마리 정도만 날아다닐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바라보고 있는 그 창 밖은 허상을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정해진 규제 안에 가둬 놓고, 마치 너희는 파라다이스에 있는 것이라고 세뇌 당하는 체제가 연상 되기도 하는 부분이다.
여러 갈래의 생각을 하게 되는 책이었는데, 따뜻해보이는 것과 달리 허무하고 우울감까지 느껴지는 것을 경험하며, 겉으로 보이는 것 이면에 내포된 것들을 잘 알아채기 위해서는 올바른 세계관을 갖고 있어야겠다는 결심이 다시금 든다.
원계실2026-07-13 10:38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처음 읽었을 때의 허무함을 잊지 못합니다.
유명세가 있던 책이기도 하고 우선 책이 두껍지 않아 '기다림'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등장인물들은 '도대체 무엇을(누구를), 왜 기다리는 것인가?' 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봐' 도 비슷합니다.
귀여움 가득한 동물 인형들과 창가라는 장소, 유리창밖의 풍경이 따뜻하고 온화한 느낌이라서 책을 열어 보았습니다.
다섯 등장인물이 각각 기다리는 상황이 다 다릅니다.
우산을 들고 옷이 젖지 않은 비 오늘날을 기다리는 아기 돼지, 바람이 불어 연을 날리고 싶은 아기 곰,
눈이 와서 썰매를 타고 싶은 강아지...
또 토끼의 경우는 창밖을 바라보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설정입니다.
그러나 결론 부터 말한다면 그들의 기다림은 실현이 불가합니다.
등장인물들이 서있는 셋팅은 약간은 서 있기 위태한 유리창 안의 선반입니다.
사실상 날씨는 이들의 상황 바깥에만 유효합니다.
성경적 기다림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의 결과를 그들의 인생가운데 받지 못하였을 지라도 평생을 적극적으로 순종해왔던 것과는 다른 느낌입니다.
바라는 것의 실상, 보지못하는 것의 증거로(히 11:1) 믿음을 사용했던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이 책에는 적극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경작하고 마침내 열매를 거두워들이는 적극적 순종(행위)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기다림이 '조금만 기다려봐' 하면서 독자를 달래고 있으나 불편한 이유입니다.
유명세가 있던 책이기도 하고 우선 책이 두껍지 않아 '기다림'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등장인물들은 '도대체 무엇을(누구를), 왜 기다리는 것인가?' 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봐' 도 비슷합니다.
귀여움 가득한 동물 인형들과 창가라는 장소, 유리창밖의 풍경이 따뜻하고 온화한 느낌이라서 책을 열어 보았습니다.
다섯 등장인물이 각각 기다리는 상황이 다 다릅니다.
우산을 들고 옷이 젖지 않은 비 오늘날을 기다리는 아기 돼지, 바람이 불어 연을 날리고 싶은 아기 곰,
눈이 와서 썰매를 타고 싶은 강아지...
또 토끼의 경우는 창밖을 바라보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설정입니다.
그러나 결론 부터 말한다면 그들의 기다림은 실현이 불가합니다.
등장인물들이 서있는 셋팅은 약간은 서 있기 위태한 유리창 안의 선반입니다.
사실상 날씨는 이들의 상황 바깥에만 유효합니다.
성경적 기다림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의 결과를 그들의 인생가운데 받지 못하였을 지라도 평생을 적극적으로 순종해왔던 것과는 다른 느낌입니다.
바라는 것의 실상, 보지못하는 것의 증거로(히 11:1) 믿음을 사용했던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이 책에는 적극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경작하고 마침내 열매를 거두워들이는 적극적 순종(행위)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기다림이 '조금만 기다려봐' 하면서 독자를 달래고 있으나 불편한 이유입니다.
기다림에 관하여: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케빈 행크스의 『Waiting』
사무엘 베케트(1906-1989)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서양의 대표적인 부조리극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작품을 오래 전 대학로의 극장에서 접했는데 최근 유튜브 영상으로 다시 보면서 그 당시의 쓸쓸하고 공허했던 느낌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었다. 스토리를 짧게 요약한다면, 무대에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명의 남자가 등장하여 고도라는 이름의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무대 조명은 어둡고, 무대 장식이라고는 휘어진 앙상한 가지가 뻗어있는 작은 나무 한 그루 뿐이다. 그런데 그들은 고도가 누구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그들이 고도로부터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도 모르며, 심지어 고도가 실존 인물인지조차 모르고 있다. 그들의 대화는 두서없고 때로는 무의미하기만 하다. 그들이 무대 위에 있는 동안 여러 인물들이 등장했다 퇴장하기도 하지만 그들 또한 고도에 대한 어떤 의미있는 정보도 주지 않는다. 고도를 기다리다 지친 에스트라공이 차라리 멀리 떠나자고 하지만 블라디미르는 내일 고도를 만나러 여기 와야 한다고 상기시킨다. 둘은 에스트라공의 허리끈으로 나무에 목이나 매어서 자살을 하려고 하나 줄이 끊어져 실행하지도 못한다. 그들은 내일은 끈을 챙겨오자고 하면서 막이 내린다. 결국 그들은 끝까지 고도를 만나지도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나지도 못한 채로 드라마는 끝난다.
밝고 부드러운 파스텔 색조의 작고 앙증맞은 인형들이 등장하는 케빈 행크스의 『조금만 기다려봐』를 보면서 이 음울한 연극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의 원제는 『Waiting』(1) 으로서 직역한다면 그냥 “기다리기”이다. 이 작품으로 케빈 행크스는 2016년에 칼데콧 아너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표지에는 독자에게 뒷모습을 보인 채 유리창 선반 위에서 창밖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올빼미, 꼬마 돼지, 아기곰, 강아지, 그리고 별토끼가 그려져 있다. 한결같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캐릭터이다. 구름들의 모양은 이 인형들과 그들이 들고 있는 사물들의 형태와 닮았다. 온종일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그들은 각각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점박이 올빼미는 달님을 기다리고, 우산을 든 꼬마 돼지는 비를 기다리고, 연을 든 아기곰은 바람을 기다리고, 썰매를 타고 있는 강아지는 함박눈을 기다린다. 그런데 목이 긴 별토끼는 특별히 기다리는 것이 없다. 그저 창밖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것 자체를 즐길 뿐이다.
달님이 둥실 떠오르자 점박이 올빼미가 기뻐하고, 주룩주룩 비가 내리면 우산을 들고 있는 꼬마 돼지가 행복해 하고, 살랑살랑 바람이 불면 아기곰이 좋아하고, 함박눈이 펑펑 내리면 강아지가 행복해 한다. 강아지는 그 선반을 떠나기도 했지만 곧 제자리로 돌아온다. 어느 날은 표제지에서 그려졌던 구슬, 도토리, 조가비 같은 작은 물건이 선물로 갑자기 선반에 올라왔으나 다음 장면에서 작은 선물들은 사라진다. 하루는 멀리서 도자기로 만든 코끼리 인형이 방문하여 얼마간 그곳에 머물렀으나 선반 아래로 떨어져 산산조각난다. 어느 날 얼룩 고양이가 선반에 놓인다. 고양이는 특별히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지 않았는데, 사실은 고양이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고양이의 윗부분이 열리더니,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그 안에서 고양이 인형 네 개가 차례대로 나타난다. 모두 열이 된 그들은 다음에 벌어질 일을 기다리며 행복해 한다.
이것이 글텍스트와 그림 이미지가 전달하는 스토리의 개요이다. 이 작품에 대한 서평을 찾아보니 기다림의 즐거움, 기다림 끝의 행복, 기다림이 있음으로써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등 감상적인 평이 대부분이다. 어떤 서평은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다. “...모든 순간에는 기다림이 존재합니다.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기다림 저 끝에 행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테니까요”.
그럼, 글과 그림을 좀 더 촘촘히 읽어보자. 우선, 캐릭터를 분석한다면 그들은 의인화된 장난감 인형이다. 아동문학에서 의인화된 인형이 등장할 경우에는 의인화된 동물과는 달리 능동성이 결여되는 특성을 보이는데 이 작품도 예외는 아니다. 이 인형들은 보이지 않는 더 큰 힘에 의해 조종당하는 무력한 존재들이다. 잠시 그 자리를 떠났던 썰매 탄 강아지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이동했던 것이고, 선반 위에 올려놓은 도자기 코끼리의 추락은 인형 주인의 실수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얼굴에는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으며 서로 대화도 눈맞춤도 하지 않는다. 작은 선물이 선반에 놓였을 때에도 인형들은 딱히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며, 그들은 멀리서 온 코끼리가 선반에 놓였을 때 그것과 거리를 두고 있다가 코끼리가 선반에서 떨어져 산산조각난 상황에서도 그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 별다른 반응이 없다. 정확히 말한다면, 그 장면에서는 오직 올빼미와 목이 긴 토끼만 등장하는데, 올빼미는 무표정하게 눈을 감고 있으며, 긴 목을 늘여 조각난 코끼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목이 긴 별토끼의 표정에서 안타까움에 가까운 정서를 읽을 수 있다.
이 부분은 조금 납득하기 어려운데, 왜냐하면 독자들은 창가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그들에게서 우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친밀한 관계를 기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원본 텍스트는 “Once a visitor arrived from far away. He stayed a while.” 인데, 직역하면, “어느 날 먼 곳으로부터 방문객이 와서 잠시 머물렀지요” 지만, 번역본에서는 “어느 날 멀리서 코끼리 아저씨가 찾아왔어요. 친구들은 함께여서 행복했지요.”로 번역되었다. 의역을 넘어서서 변개(變改)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이 문장의 의미를 바꾸어 놓았다. 사실 원본 전체에서 “friends”라는 단어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번역본에서 “친구”라고 번역된 단어는 원본에서는 “them” 혹은 “they”이다. ‘친구’와 ‘그들’이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는 매우 다르다. 즉, 그들은 좁은 선반 위에서 나란히 줄지어 서 있으나, ‘친구’라고 불리울 만한 관계는 아닌 것이다.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글과 그림이 보여주는 모순적인 관계이다. 주의깊은 독자가 아니라면 이 아이러니를 눈치채지 못할지 모른다. 그런데 몇 장면에서 보여지는 글과 그림의 불일치는 이 스토리의 해석에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무엇인가를 기다리던 인형들은 각자 기다리는 것과 조우(遭遇)하기는 하지만 정작 그것을 누리지는 못한다. 글텍스트는 “주룩주룩 비가 내리면 꼬마 돼지는 행복했어요. 우산이 옷을 젖지 않게 해 주었거든요”라고 되어 있지만 그림 이미지에서 꼬마 돼지는 여전히 집안 유리창 안에 갇혀 있을 뿐이다. 아기곰도 창밖에서 부는 바람에 연을 날리지 못하며, 강아지는 함박눈이 내려도 썰매 타기를 즐기지 못한다. 반면에 달뜨기를 기다리는 올빼미와 그냥 창밖을 내다보며 어떤 특별한 것도 기다리지 않는 별토끼의 모습에서 글과 그림은 대응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창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받는 듯 하지만 이 창은 미디어의 사각형의 형태와 닮았다. 즉, 이 인형들의 모습은 온종일 네모난 형태의 미디어를 통해 타인의 경험을 간접 경험하며 즐거워하는 사람들과 흡사하다고도 볼 수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와 『Waiting』은 매체와 문학적 장르와 내포 독자의 측면에서 매우 큰 간극이 존재하지만, 문학적 요소와 세계관적 측면에서 매우 흥미로운 유사성을 보여준다. 소설의 삼 요소라고 할 수 있는 배경(setting)과 캐릭터와 플롯을 비교해 보자. 우선, 서사가 소위 ‘닫힌 체계’(closed system)라는 공간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자의 공간적 배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무 한 그루만이 서 있는 어둡고 황량한 무대 공간이며, 후자의 경우는 작고 네모난 유리창 안 선반이다. 또한 캐릭터에 있어서 전자의 두 주인공은 고도를 만날 것이라는 공허한 기대에 사로잡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으며, 인형들은 누군가가 자신을 움직여 주기 전에는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는 수동적인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행위의 결과를 비교할 때 전자의 주인공은 결국 고도를 만나지 못하는 허무한 결말을 맞지만, 인형들은 모두들 자기들이 기다리는 것을 얻게 되므로 해피엔딩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유리창을 매개로 인지된 것으로서 직접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전자의 인물들은 서로 대화하는 듯 하지만 그것은 부조리하며 무의미한 독백에 흡사하며, 인형들도 서로 가까이 위치하고 있지만 눈맞춤이나 어떤 소통도 없이 그냥 그곳에 놓여 있을 뿐이다. 플롯도 두 작품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 간에 인과성이 거의 없는 에피소드식 연결에 가까우며, 결론도 종결감을 주기보다 열린 결말의 성격을 띠고 있다. 즉, 두 작품 모두 그들의 행위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순환구조를 보여준다. 전자의 두 인물은 여전히 고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나지도 못한 채 막이 내리며, 『Waiting』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인형들은 여전히 독자에게 등을 보인 채 창밖에서 벌어질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서 있다. 그런데 그 일들은 매일, 혹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반복되어 일어나는 일들이다. 첫 장면과의 차이라면 그들에게 다섯 개의 고양이가 합류하여 이제는 열이 되었다는 것이지만 사실, 그들도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는 존재들이다.
사무엘 베케트가 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창작하였다는 『고도를 기다리며』는 하나님을 부인한 현대인의 딜레마를 탁월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은 결국 하나님의 창조물이자 형상(God’s image bearer)인 인간의 죽음을 함축한다. 서양 문화의 기초가 되었던 기독교 정신을 잃어버리자 실재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론적, 가치론적 신념도 무너져 내렸다. 고도가 무엇인지, 과연 오는 것인지, 온다 해도 그것을 알아볼 수 있을지, 기다림의 행위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회의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신을 떠난 인간의 실존적 비극을 보여준다. 삶의 목적과 의미를 잃어버린 허무주의의 논리적인 귀결은 자신의 무화(無化)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상에서 사라지지도 못하고, 고도를 계속 기다려야 할지 여부도 판단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뿐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황량하고 불길하며 어두운 분위기와는 달리, 『Waiting』의 분위기는 밝고 부드럽고 행복해 보인다. 그러나 창틀 선반에서 의미와 목적도 없이 무언가를 반복적으로 기다리며 온종일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이 자그마한 인형들의 이야기에 허무주의의 음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은 부인하기 힘들다.
이 두 작품을 보며 지금 기독인들이 궁극적으로 갈망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여러분이 만약 성경 신자(bible believer)라면 이미 그 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성경 66권의 주제는 하나님의 왕국과 그것을 완성하기 위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으로 요약될 수 있다. 구약의 대언자들(모세, 다윗, 다니엘, 이사야, 요엘 등)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기다렸으며, 신약에서 예수님과 사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예언하였다. 구약에서는 예수님의 초림이 125회, 재림은 329회 언급되었으며, 신약에서는 재림이 318회 언급되었다. 신구약 전체를 통해 예수님의 재림이 초림보다 8배나 많이 예언된 셈이다.(2)
초림이 그러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분명히 다시 오실 것이지만 그것으로 이 광대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생의 삶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영생은 실체(實體, substance)이며, 직접 보고, 듣고, 맛보고, 만져볼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은 “...내가 반드시 속히 가리라(Surely I come quickly)”라고 약속하셨으며, 사도 요한은 그에 대해 “아멘, 주 예수님이여 과연 그와 같이 오시옵소서”(계 22:20)라고 화답하였다.
성경의 이야기는 창세 전 영원부터 시작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원한 삶으로 이어지는 메타 서사(meta narrative)이다. 그것과 비교하면 그림책에 담긴 이야기는 너무나 작고 소소한 것임에 틀림없다. 사실 이 두 종류의 텍스트는 비교 자체가 가당치 않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는 인간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맥락을 제공한다는 면에서 인간의 실존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나 플라토가 청년들에게 주어지는 이야기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것도 이러한 이야기의 힘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책이 전달하는 작은 이야기조차도 우리의 내밀한 부분을 건드리는 영적인 힘이 있다.(3) 그 증거는 『Waiting』에 대한 독자 서평,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러면 행복이 올 거예요.”와 그것에 공감하는 반응들이다.
어떤 텍스트(소설, 드라마, 영화, 그림책, 등)를 세계관적으로 읽는 작업은 몇 가지 측면에서 우리에게 유익을 제공한다. 우선, 이 텍스트에 투영된, 그러나 우리 자신도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시대 정신을 파악할 수 있으며, 기독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기독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모르는 영혼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런데 이러한 유익을 얻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학문적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 그림책의 매체적 특성, 예술 행위에 대한 본질주의적 접근, 문학과 서사에 대한 이해, 바른 성경 교리(doctrine)에 입각한 기독교 세계관 등.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 무엇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지를 자문해 보는 것이다. 나는 세상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아니라 성경의 이야기에 이끌리고 있는가? 내가 하는 일을 통해 이 위대한 이야기의 일부분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는가? “내가 반드시 속히 가리라”라는 주님의 목소리에 “아멘, 주 예수님이여 과연 그와 같이 오시옵소서”(KJB 계 22: 20)라고 기쁘게 화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바울 선생님은 로마의 감옥에서 처형을 앞두고 디모데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권면하였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끝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므로 이후로는 나를 위해 의의 왕관이 예비되어 있나니 주 곧 의로우신 심판자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요, 내게만 아니라 그 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시리라´(딤후 4: 8). 이 말씀이 그림책을 읽는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기도할 뿐이다.
(1) 이 칼럼에서는 작품의 원제를 사용함. 왜냐하면 별토끼는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고 있으나 번역본의 제목은 모든 인형이 어떤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2) 정동수(2014). 재림과 휴거 바로 알기. 그리스도 예수 안에
(3) 현은자(2017). 그림책 해석의 영성적 접근: 은혜 개념을 중심으로. 어린이문학교육연구. 18:3. 21-42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이며 그림책 평론 작업을 하고 있다. 미국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1989년부터 2023년까지 성대 아동청소년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2021년부터 웹진 <그림책 베이직>에 '그림책의 세계관'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그림책 세계관 연구소에서 운영하고 있는 '그림책 세계관 지도사 과정'에서 '그림책의 세계관', '기독 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세계관>, 공저로는 <그림책의 이해1, 2>, <그림책과 예술교육>, <세계 그림책의 역사>, <어린이교육전문가가 엄선한 100권의 그림책>, <신앙이 자라는 그림책 읽기>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