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름다운 책』일까?

2022-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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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름다운 책』일까?


클로드 부종의 『아름다운 책』에는 그림책을 읽는 두 마리의 토끼 형제가 등장합니다. 형의 이름은 ‘에르네스트’, 동생의 이름은 ‘빅토르’입니다. 형이 어디에선가 책을 발견하고 집으로 가져오자 동생인 빅토르가 달려듭니다. 그러자 형이 “안돼 손 치워! 책은 조심해서 다루는 거야!”라고 주의를 줍니다. 동생이 “그게 뭐 하는 건데?” 라고 묻자 에르네스트는 “책은 읽는 거야. 글씨를 읽을 줄 모르면 그림을 보는 거고... 자, 형이랑 같이 한번 볼래?”라고 다정스레 권합니다. 에르네스트는 이미 글을 읽을 줄 아는데다가 그림책이 어떤 책인지도 파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책은 “읽는” 것이라고 했다가 글자를 모르는 동생을 위해 얼른 책을 “보자”고 바꾸어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형이 가져온 책은 글없는 그림책이었거든요.

『아름다운 책』은 판형도 크고 등장인물인 토끼 두 마리의 윤곽선도 굵고 시원하며 배경도 단순하고 글밥도 많지 않아 빅토르처럼 아직 글을 익히지 못한 유아들에게 강추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게다가 힘없는 토끼 형제가 자신들을 잡아먹으려던 여우를 책으로 물리쳤다는 통쾌한 해피엔딩 스토리는 어린 독자들에게 만족감을 선사하게 되지요. 그런데 이 책에는 놓치기 아까운, 매우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가 몇 가지 있습니다. 제일 먼저, 시점의 변화입니다. 서두에서 독자들은 토끼 형제가 책을 보는 모습을 앞에서 보다가, 몇 장을 넘기면 그들과 같은 시점을 공유하게 됩니다. 즉, 토끼 형제들이 보고 있는 그림책을 우리도 보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시점은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는 것을 도와줍니다. 그 다음의 근거리 시점을 통해 우리는 주인공이 점점 더 책에 몰입해 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서두에서는 형이 왼팔로 동생의 어깨를 감싼 자세로 옆으로 나란히 앉아 책을 보다가, 몇 장면 지나지 않아 동생은 형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 몸을 구부려 책을 보고 있습니다. 마치 둘이 혼연일체가 되어 책 속에 빠져들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의 관전 포인트는 문법적 형태는 단순해 보이지만 다층적 의미를 담고 있는 글텍스트입니다. 즐겁게 구슬치기를 하는 책 속의 토끼들을 보고 빅토르가 부러워하자 에르네스트가 “그래, 눈알 굴리기 운동으론 최고지”라고 대꾸합니다. 그런데 지금 책을 보고 있는 토끼 형제나 독자인 우리들도 눈알 굴리기 운동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눈알을 굴리면서요. 또한 그들의 대화는 픽션을 대하는 두 종류의 읽기 태도를 보여줍니다. 책 속의 여우가 토끼들 앞에서 당근을 한 보따리 가져와 쏟아 보이자 빅토르는 여우를 대신해서 “토끼 여러분, 맛있게 드세요!”라고 소리 지릅니다. 토끼들에게는 매우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지요. 그러자 형은 기뻐하는 동생에게 “흠, 나라면 그렇게 마음을 놓지 않겠어. 어떤 일이 있어도, 토끼는 여우한테서 도망을 쳐야 해. 이것은 절대 변할 수 없는 법칙이라고.” 라고 주의를 줍니다. 순진한 동생 빅토르는 책의 이야기를 실제로 여기는 반면. 형 에르네스트는 책의 스토리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책 속의 토끼가 용을 때려눕힌 장면을 보고 빅토르가 황홀해하자 에르네스트는 동생을 흔들어 깨우고 “책에 나오는 걸 그대로 다 믿으면 안돼” 라고 훈계합니다. 계속되는 형의 경고에, 빅토르가 드디어, “... 믿는 척하면서 재미있어 하는 것은 돼?”라고 묻습니다. 빅토르의 천진난만함이 드러나는 질문이지만 실은 “믿는 척하면서 재미있어한다”라는 것은 픽션을 읽는 독자들의 ‘불신을 잠시 거둔’ 상태를 뜻하는 문장입니다. 책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빅토르가 픽션의 본질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사실 어떤 상황에서는 불신을 거둔 상태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토끼 형제들이 그림책의 토끼가 콩알만한 여우들을 마음껏 부리는 모습을 보고 통쾌함을 만끽하고 있는 동안 어느 사이 토끼 굴 속으로 들어온 여우가 그들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여우가 그림책에 몰입하고 있는 토끼들을 잡아먹으려고 달려들자 그 와중에도 동생을 끌어안고 있던 에르네스트는 정신을 차리고 읽던 책을 들어 여우의 머리통을 내리쳤습니다. 그리고 뜻밖의 반격에 혼이 나간 여우의 주둥이에 책을 쿡 쑤셔 박아 버립니다. 이빨에 큰 책이 박혀버린 여우는 책을 물고 줄행랑을 칠 수밖에요. 여우를 퇴치한 토끼 형제는 한껏 고무되었습니다.   

에르네스트는 때를 놓치지 않고 말했습니다. “봤지? 책은 정말 쓸모 있는거야.” 빅토르도 맞장구쳤습니다. “맞아. 빨리 또 하나 구해 와야겠어.” 그러자 에르네스트가 덧붙여 말했지요. “그래, 껍데기가 커다랗고 딱딱한 걸로. 속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한 걸로!”. 

에르네스트는 이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동생에게 책의 내용을 무조건 믿어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주던 에르네스트가 이제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한 책을 구해와야겠다고 합니다. 또한 책을 전혀 모르던 빅토르도 책의 쓸모(?)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토끼들의 책상 위에 놓인 당근의 존재입니다. 이 당근은 에르네스트가 책을 가져오기 전에는 책상 가운데 놓여 있다가 책 때문에 모서리로 밀려났을 것입니다. 책상 말고는 가구가 거의 없는 토끼 형제의 굴 속에서 이 당근은 본문의 여러 곳에 그려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와 글텍스트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학부 수업에서 종종 이 작품을 읽어주고 당근을 보았냐고 묻곤 하는데, 놀랍게도 대부분의 학생들은 당근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곤 합니다. 한 장면에서는 방구석에 수북이 쌓여 있기까지 했는데도 말이지요. 저는 학생들에게 그림책에서 의미없는 디테일(detail)은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당근의 존재 이유를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당근과 책의 취득 경위와 역할을 비교해 보라면서요. 책은 우연히, 거저 에르네스트의 손에 들어온 것이었지만 당근은 토끼 형제가 재배한 것이거나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당근밭에서 가져온 것이겠지요. 그들은 베아트리스 포터의 『피터 토끼 이야기』의 피터처럼 당근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모험을 감행했을지도 모릅니다. 당근은 그들의 생명을 유지시켜 줄 양식이니까요. 그런데 정작 이 이야기에서 그들의 생명을 구한 것은 당근이 아니라, 어디에선가 거저 가져온 책이었습니다.  

이렇게 당근과 책의 역할을 비교해 보니,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KJV 마태복음 4:4)라는 성경 말씀이 떠오릅니다. 만약 당근을 빵에, 책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유할 수 있다면 말이지요. 그런데 사실 토끼 형제가 읽고 있던 책에는 그림만 있었지, 글은 없었으니 이것도 적합한 비유는 아닐지 모릅니다. 

어쨌거나 작가가 이 작품에서 토끼들의 생명을 구한 것은 책이지 당근은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해석은 그럴듯합니다. 『아름다운 책』(Un beau livre)이라는 제목에 ‘책’이 들어가 있는 것이 그 근거가 될 수 있겠지요. 일반적으로 제목에는 주인공의 이름을 사용하는데 (예를 들어, 『아모스와 보리스』, 『피터의 의자』, 『피터 토끼 이야기』 등), 이 작품에서는 의인화된 토끼 형제의 이름 대신 ‘책’(livre)을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앞에 정관사 “le”를 쓰지 않고 부정관사인 “un”을 사용함으로써 특정한 책이 아니라 보편적인 ‘책’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번역자는 왜 책의 제목에 “아름다운”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했을까요? 물론 불어의 “beau"는 우리 말로 “아름다운”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만, “아름답다”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사물의 시지각적 측면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는 단어라면 여기에서의 책과 아름다움은 별로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beau” 에는 “유용함”이라는 용례도 있으니 에르네스트가 “봤지? 책은 정말 쓸모 있는거야.”라고 한 것처럼 ‘쓸모있는 책’ 혹은 ‘유용한 책’ 으로 번역하는 것이 맥락상 더 적합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이것 또한 성급한 제안일지 모릅니다. 시편 저자는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편 8:9)라고 노래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빅토르가 한 권 더 구해오자고 하자 에르테스트가 덧붙인 마지막 문장에 다시 주목해 봅시다. “그래, 껍데기가 커다랗고 딱딱한 걸로. 속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한 걸로!”. 여기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란 ‘즐거움을 주는 이야기’라고도 바꾸어 말할 수 있겠지요. 사실 우리가 픽션을 읽는 주된 목적은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즐거움’(pleasure)란 무엇일까요. C.S. 루이스는 『네 가지 사랑』에서 즐거움을 ‘필요의 즐거움’과 ‘선물의 즐거움’, 그리고 ‘감상의 즐거움’으로 구분한 적이 있습니다 . 그런데 이 에세이에서는 현안과 직접 관련이 있는 첫 번째와 세 번째 즐거움만을 인용해 보기로 하지요(1). 필요의 즐거움(need-pleasure)는 우리가 목이 마를 때 한 컵의 물을 마시면서 경험하는 것과 같은, 자신의 필요를 충족할 때 느끼는 즐거움인 반면, 감상의 즐거움(pleasures of appreciation)은 아침 산책길에 꽃향기를 맡은 사람이 “아, 얼마나 좋은 냄새인가”라고 말할 때의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필요의 즐거움은 일단 얻고 난 다음에는 놀라울 정도로 급격히 시들해지지만, 감상의 즐거움은 감각이 만족되었다는 느낌 이상의 것으로 우리를 이끈다고 루이스는 말합니다. 감상의 즐거움은 무언가 그런 감상을 받아 마땅한 대상이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감상의 즐거움을 주는 대상들은 우리에게 그것들을 맛보고 주목하고 찬양할 의무가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루이스는 여기까지 즐거움을 구분한 다음에, 실제 삶에서는 이 두 종류의 즐거움이 순간 순간 섞이며 서로를 잇따르기도 한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어떤 것이 필요의 대상이었다가 감상의 대상이 되는 일은 종종 일어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부르짖다가도 주님이 하신 놀라운 일에 대해 감사하고 찬양드리곤 하지 않나요? 사실 우리의 기도에서는 필요의 부르짖음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것으로 우리가 비난받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상황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항구적인 빈곤함을 깨닫고 자신이 전적으로 의존적인 존재임을 기뻐하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아는 자일 것입니다.   

다시 토끼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에르테스트가 다다른 결론, “그래, 껍데기가 커다랗고 딱딱한 걸로. 속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한 걸로!”에는 루이스가 말한 ‘필요의 즐거움’과 ‘감상의 즐거움’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육식동물로부터의 ‘잡아먹힘’을 피해 항상 전전긍긍하며 살아가야 하는 토끼 형제에게 우연히 손에 들어온 책은 생명을 지킬 수 있는 ‘필요의 즐거움’을 제공하는 동시에, 찬탄을 자아내는 ‘감상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사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책”이라는 제목은 일면(一面) 타당해 보이기도 합니다.  


  (1) 『네 가지 사랑』 홍성사. pp. 31-35.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후 Eastern Michigan University 에서 석사,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어린이문학교육학회 회장 및 한국 기독교 유아교 육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아동 청소년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대학 부설 생활과 학 연구소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기독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이해>(공저), <그림책과 예술교육>(공저>, <그림책으로 보는 아동과 우리사회>(공저), <100권의 그림책>(공저) 등 그림책 관련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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