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다비드 칼리의 『나는 기다립니다.....』

2024-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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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다비드 칼리의 『나는 기다립니다.....』  (2005/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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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 칼리가 글을 쓴 이 작품은 어린이보다는 성인 독자가 더 사랑하는 그림책이 아닐까 싶다. 그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1972년 스위스에서 태어나 이탈리아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나는 기다립니다...』으로 2005년 바오밥상을 받았으며 『피아노 치기는 지겨워』로 2006년 볼로냐 라기치상을 받았고 『적』, 『나도 가족일까?』, 『사랑의 모양』 등을 비롯하여 20여 개의 작품이 있다.[1]

책의 형태는 가로로 긴 직사각형이며 크기는 두 손에 들어갈 정도로 작다. 2007년의 번역 초판본의 앞표지에는 책의 형태와 비슷한 작고 큰 두 개의 직사각형 안에 각각 “나는” “기다립니다...”라는 제목이 들어가 있고, 그 아래 네모 칸에 그려진 어린아이의 얼굴 밑에는 빨간 실타래가 그려져 있다. 뒤표지의 중앙에는 하트 모양의 빨간 끈이 그려져 있고 “삶의 끈을 따라서...”라는, 말 줄임표로 끝나는 문장이 있다. 표지 다음의 면지 전체는 끈과 같은 온통 붉은색이다. 표제지의 오른편 구석에는 빨간 끈이 한 줄 늘어져 있으며, 본문 화면의 오른쪽에서는 한 어린이가 그 끈을 힘껏 잡아당기고 있는 중이다. 그 화면의 왼쪽 위에는 “나는 기다립니다. 어서 키가 크기를”이라는 글 텍스트가 있다. 즉, 글은 제목과 같이 1인칭 화법으로, 정면에 그려진 그림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으므로 독자들은 객관적 시점으로 그의 이야기를 듣고 보게 된다.

그 다음 화면의 왼편에는 조금 열린 방문이, 오른편에는 작은 침대에 누워 방문 쪽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는 작은 아이가 있는데 이 아이의 코 밑에는 붉은 색 실타래가 늘어져 있다. 그 다음 화면의 글텍스트는 “잠자기 전 나에게 와서 뽀뽀해 주기를” 는 미완성 문장인데, 책 제목인 “기다립니다”로 완성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후 “케이크가 다 구워지기를”, “비가 그치기를...”, “크리스마스가 오기를” 과 같은 글귀와 그림이 연속되며, 그 다음 화면에서는 이제 성인이 된 아이가 오른쪽으로 걸어가고 그 뒤를 구불구불한 끈이 뒤따른다. “나는 기다립니다. 사랑을”이라는 글텍스트는 그의 삶에서 또 다른 국면이 펼쳐질 것임을 암시한다. 그는 영화관에서 어떤 여성을 만나고, 참전으로 인해 그녀와 헤어지게 되고,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한 그는 침상에서 그녀의 편지를 기다리고, 자신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인다는 그녀의 답을 기다린다. 그 다음 화면에서 그는 “나는 기다립니다. 우리 아기를”라고 독백한다. 임신한 아내의 뜨개질 실에서 이어지는 끈은 지금까지보다 훨씬 굵게 그려져 있다. 그녀는 자신의 신체와 연결된 빨간 끈을 달고 나오는 아기를 출산한다. 이제 아버지가 된 주인공은 두 아이와 놀아주며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린다. 부부는 때로는 다투고 외면하기도 하고, 상대가 먼저 “미안해”라는 말을 해주기를 기다린다. 그 다음 화면에서는 그의 아내가 전화기를 들고 있으며. 그녀의 귀에서는 빨간 끈이 구불구불 화면 밖으로 이어지고 있다. “나는 기다립니다. 아이들의 안부 전화를”이라는 글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이 자녀들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중임을 알 수 있다. 

시간이 흘러 그는 병든 아내를 진찰하는 의사의 “괜찮습니다.”라는 한마디를 기다리고, 병상에 누워 죽어가고 있는 아내의 고통이 멈추기를 기다린다. 아내의 장례식을 치루고 혼자 된 그는 다시 봄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는 앉아서 손에 든 작은 붉은 끈 조각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기다립니다. 초인종 소리를” 홀로 된 그 사람은 이제 아이들의 방문을 기다린다. “아이들이 나를 보러 오기를”에 등장한 아들은 마치 아버지와 자신의 아내를 이어주려는 듯 작은 끈 조각을 아버지와 그의 아내에게 건네고 있다. 마지막 화면은 아들이 임신한 아내를 자랑하듯 앞세우고 아버지를 방문하는 모습과 함께 “새 식구가 될 손자를 나는 기다립니다“ 는 글로 마무리된다. 며느리 복부 안의 빨간 끈은 태아를 연상케 한다. 뒤 면지에는 빨간 실타래 아래 “끝”이라는 글자가 있는데, 그 글자의 받침 “ㅌ” 은 지워지고 “ㄴ”으로 바뀌어 “끈”이 되었다. 

배경이 거의 없다시피 한 백지에 배치된 등장인물은 끊어질 듯 말 듯한 가는 윤곽선으로만 그려졌다. 이 작품에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빨간 끈이다.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혹은 오른 편에서 왼편으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빨간 끈은 첫 장면에 등장했던 한 아이의 인생을 이끌어가는 동인(動因) 역할을 한다. 이 끈은 때로는 이어지기도, 꼬이기도, 엉키기도, 끊어지기도 하면서 주인공과 다른 인물들을 이어주고 있다. 병상에 누워있는 아내와 주인공을 이어주는 가느다란 빨간 끈은 끊겨 있어 아내의 죽음으로 그 둘간의 관계가 소멸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럼 이 빨간 끈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뒤표지에 그려진 붉은 실 매듭은 동양에서 ‘인연’을 상징하는 붉은 실을 연상케 한다.[2] 인터넷 사전인 나무위키에서 찾은 붉은 실 이미지는 남녀 간의 인연을 이어준다는 설화와, 여기에서 유래되어 동아시아에서 널리 믿어지고 있는 미신적 문화요소를 가리킨다. 이 붉은 실은 중국어로는 ‘훙센’(홍선), 일본어로는 아카이이토라 부른다. 도교의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 지역 전반에서 이 이야기가 출현하며, 한국, 일본, 베트남 등 나라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인도에서도 결혼식 등 행사에서 붉은 천과 견장을 사용하고, 대한민국에서는 청실과 홍실이 부부의 연을 상징하며 전통 혼례에서 자주 쓰인다. 대중 매체에서도 이 붉은 실을 이야기를 풀어내는 재료로 종종 사용하곤 한다. 일본과 한국에서 방영되었던 드라마들(예: 한국 애니메이션 tvN드라마 『도깨비』, 일본의 『Red String by Christal Chang)에서 이 붉은 실은 인간이 아무리 애써도 바꿀 수 없는 운명을 상징한다. 

이렇듯 붉은 실은 운명론적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위키백과[3]에 따르면 운명론이란 세상의 모든 사건은 이미 정해져 있고 인간의 노력으로 그것을 바꿀 수 없다는 세계관이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일에는 논리적인 인과관계 같은 것을 전혀 없으며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과 행동들 모두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는 존재는 누구일까. 다신교를 믿었던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그 것을 다신(多神)에서 찾았으며, 동양에서 운명을 지배하는 힘은 형태가 없는 비인격적이고 초월적 존재로 여겨졌다. 주역에서는 그것을 사주 혹은 팔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운명론이 함축하는 인간관은 인간은 운명에 의해 지배되는 수동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궁금하여 인터넷 서평란을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작품 자체의 평론보다는 매우 다양한 독후 활동들이 소개되어 있었다. 지금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쓰기, 그것을 그리기, 몸으로 표현하기, 과거에 무엇을 기다렸으며, 지금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그리고 이후에는 무엇을 기다릴 것인지를 말하기, 자신의 인생 곡선을 그려보기,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경험을 비교해 보기, 등 실로 다양한 활동들이 소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활동들은 아이들에게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성찰하도록 격려하며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도록 돕는 효과가 있다는 보고도 있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초등 고학년 정도의 아이들에게(연령은 정확하게 소개되어 있지 않았음.) ‘나는 열 다섯 살이 되면 어떠할까’, 그리고 ‘스무살일 때 어떤 모습일까’를 몸으로 표현하게 하였더니, 열 다섯이 되었을 때 술 마시는 모습, 담배 피는 모습, 한쪽 구석에 가서 우울하게 있는 모습을 표현하는 아이들이 꽤 많았다는 것이다. 스무살로 상상해 보게 했을 때에도 그들 중 많은 아이들이 어두운 미래를 표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독서지도사는 아이들의 이런 모습을 성인들의 책임이라고 여겨 아이들에게 작은 꿈을 품게 하는 일들을 해보게 했고, 그 결과 긍정적인 효과를 얻었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를 요약하면, 이 작품은 다양한 연령의 독자가 ‘끈에 대해 이야기하기’와 ‘끈을 소재로 이야기하기’의 길을 열어 주고 있었다. 기다림의 연속으로 그려지고 있는 한 인간의 삶이 독자의 존재론적 사유를 촉발하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나는 기다립니다...』는 심리치료 현장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작품이라고 한다.  그러나 독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읽고 자신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도록 하기 전에, 작품의 글과 그림을 촘촘히 보게 하고, 주인공의 이야기를 이어보게 하면 어떠할까. 즉, 마지막 에피소드인 손주를 기다리는 그의 삶 이후를 상상하고 그려보게 하는 것이다. 그는 남은 시간 동안 계속 무엇을 기다리며 살게 될까. 그리고 결국 그의 이야기의 종말은 ‘나는 죽음을 기다립니다’가 되는 될까.  

그런데 뒤표지를 덮으며 드는 이 쓸쓸함은 무엇 때문일까. 결국 인간은 운명이라는 실에 매어서 살다가 사라지는 존재인가? 이 작품에서 말 줄임표 없는 문장은 주인공이 생의 다른 국면(局面)을 맞았다는 것을 함축한다. 여섯 개로 구성된 국면들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어서 키가 크기를”, “사랑을” “우리 아기를”, “아이들의 안부 전화를” “초인종 소리를”, “새 식구가 될 손자를” 첫 번째 국면은 성장기 아동의 기다림을 표현한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결혼과 출산을, 네 번째는 자녀의 출가 이후,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는 노년기를 가리킨다. 이러한 국면의 전환은 모두 가족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과의 만남은 운명의 실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이란 운명의 실타래가 풀어내는 태어나고 만나고 헤어지고 죽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가. 

운명론적 세계관의 대척점에 자유의지의 관점이 있다. 이 자유의지는 기독교의 인간관을 논할 때 예외없이 거론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이미지(image)에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창 2장)에는 이 자유의지도 포함되었다. 하나님은 자신과 같은 인격체로서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이 자유의지로 말미암아 인간은 뱀으로 위장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금지된 과일을 먹고 그 때문에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결국 어두움의 세력 밑에서 살게 되었지만 이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어두움 가운데 그냥 두지 않으셨다. 죄많은 인간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엡 2: 1-5). 그런데 이 구원은 자동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 과정에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필요하다. 즉, ‘구원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로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믿음으로 받아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노예가 아닌 자유로운 존재로 만드셨고 그렇게 살기를 원하신다. 킹제임스 성경(KJB)의 갈라디아서 5장 1절 “그리스도께서 자유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으니 그러므로 그 자유 안에 굳게 서고 다시 속박의 멍에를 매지 말라.”(Stand fast therefore in the liberty wherewith Christ hath mad us free, and be not entangled again with the yoke of bondage)에서 “그 자유 안에”는 영어로 “in the liberty”이다. liberty와 같이 자유로 번역되는 단어가 freedom이 있다. 그러나 liberty와 freedom간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freedom은 의지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이며, 행위할 수 있는 힘을 가짐을 말한다. 반면, liberty는 자의적인 의지로 행해지는 억압을 봉쇄하는 것에 관심을 갖기에 연루된 모든 이의 권리를 고려한다.” 성경 말씀에서 ‘속박의 멍에’란 바울 사도가 서신을 작성할 때의 맥락 안에서는 유대인들의 전통인 할례,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었다[4]. 그러나 광의의 개념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 된 우리를 얽어매는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산주의 이념에 맞서 기독교 정신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하신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유언처럼 이 성경 말씀을 남기셨다. 그 ‘속박의 멍에’란 하나님이 세우신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무너뜨리고 우리를 노예 삼으려는 공산주의의 영을 가리킨다.   

결론적으로, 기독 신앙은 붉은 실이 함축하고 있는 동양의 운명론을 배격한다. 우리의 삶은 운명이라는 비인격적인 힘에 메어 있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된 우리에게는 ‘양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다. 이 자유는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대한민국 헌법 9조와 10조에 각각 명기되었다. 단, 우리의 자유의지로 행한 자유로운 행위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극도의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살고 있다. 게다가 굳이 진실과 거짓, 사실과 허구를 구별하지 않으려는 시대 정신은 진리를 선포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분위기이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4·10 총선 결과 국회를 장악한 좌익 정권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를 더 옥죄어 올 것이다. 그보다 더 참담한 것은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면 닿을 수 있는 북한 땅에서 해방 후 약 80년 동안 김씨 일가의 우상 숭배라는 흑암의 권세 하에서 복음을 듣지도 못한 채 죽어가고 있는 북한 주민들이다. 이제 국회에서도 사회주의, 공산주의자들의 입법 독재를 제어하기 힘들게 되었으니, 자유 통일의 그 날은 더 멀어진 것이 아닐까. 영육간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신음하고 있는 이천 오백만 북한 주민들은 언제 사탄의 올무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역사의 주관자이신 주님만이 그 날을 알고 계실 것이다. 하늘들이 땅보다 먼 것 같이 내 길들은 너희 길들보다 높으며 내 생각들은 너희 생각들보다 높다 (KJB 55:9)고 하신 하나님, 지금은 하나님의 뜻은 알 수 없으나 주님이 주신 이 아름다운 비전을 붙들고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세요. 



“주께서 시온의 포로된 것을 되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자들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노래가 가득하였도다. 

그 때에 이교도들 가운데 거하는 자들이 이르기를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들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들을 행하셨으니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즐겁도다. 

오 주여, 남쪽에 있는 시내들을 되돌리시듯 우리의 포로 된 것을 되돌리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들은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귀중한 씨를 가지고 나아가 우는 자는 

반드시 기뻐하며 자기의 곡식 단들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KJB 시편 126편)




[1] https://www.kyobobook.co.kr/service/profile/information?chrcCode=2000522201

[2] 운명의 붉은 실 - 나무위키 (namu.wiki)

[3] https://ko.wikipedia.org/wiki/%EC%9A%B4%EB%AA%85%EB%A1%A0

[4] https://m.cafe.daum.net/ReformedChurch/4lXa/503?listURI=%2FReformedChurch%2F4lXa



현은자 |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후 Eastern Michigan University 에서 석사,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어린이문학교육학회 회장 및 한국 기독교 유아교 육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아동 청소년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대학 부설 생활과 학 연구소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기독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기독교 세계관으로 아동문학보기>, <그림책의 이해>(공저), <그림책과 예술교육>(공저>, <그림책으로 보는 아동과 우리사회>(공저), <100권의 그림책>(공저) 등 그림책 관련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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