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하고 환한 자리” 『의자』

2024-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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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하고 환한 자리”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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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평상시에는 한 지붕 아래 살아도 아이는 아이 대로, 부모는 부모 대로 서로 참 분주하여 대화 나누는 시간도 부족하고, 여유롭게 부모님 찾아뵙는 일도 쉽지 않지만 5월 만큼은 서로를 돌아보고, 만나고, 선물도 주고 받으며 서로를 챙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을 연례 행사로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주어진 가정의 달에 다른 바쁜 일정과 일들을 잠시 멈추고 가족을 생각 하게 하니 얼마나 감사한 시간인지 모릅니다. ‘가족’이라는 이름 만큼이나 따뜻한 봄을 가족과 누리며 함께 나눌 시, 시그림책 『의자』를 읽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의자』는 2006년 이정록 시인의 시집 『의자』에 수록된 시를 주리 작가가 시화를 그려 펴낸 그림책입니다. 이정록 시인이 어린이를 위한 여러 편의 동시집을 냈는데, 바로 2006년 『의자』라는 시집을 읽은 출판사로부터 동시집의 제안을 받았고, 그 일이 변곡점이 되어 동시를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첫 동시집 『콧구멍만 바쁘다』로 시작하여 꾸준히 동시를 쓰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37년간 충남지역의 중고등학교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2022년 2월에 은퇴하고 지금은 '이정록 시인의 이발소(이야기발명연구소)'에서 계속해서 영감있는 시와 작품으로 전 세대를 아우르며 힘과 감동을 나누고 있습니다.

  시는 그림과 함께 있을 때 더욱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주리 작가의 그림으로 책이 나오기 전에도 시인의 ‘의자’라는 시는 참 많은 감동이 있었습니다. 시를 보이는 것으로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떠오르는 시상이 구체화 되고, 색감이 되고, 장면이 되어 눈 앞에 펼쳐집니다. 간결한 시구를 따라 주리 작가의 감성을 그대로 전하는 묘사력이 시각적으로 펼쳐질 때 그 감동은 더욱 배가 됩니다.

  그림책의 겉표지를 펼치면 상아색 배경에 접시꽃과 비슷한 진분홍색 꽃이 흐드러져 있고, 오른쪽 상단에 세로정렬로 책의 제목이 있습니다. 제목의 글씨체도 이리 저리 흔들리는 꽃의 줄기처럼 그림과 어루러집니다. 면지는 연한 이끼색 벽의 질감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표제지로 넘어가면 제목과 아래에 의자가 가운데 정렬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살짝 우측으로 틀어져 있는 의자 위에 황색 바둑무늬 강아지가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자는데, 강아지의 표정은 한없이 평화롭습니다. 바닥은 땅바닥임을 암시하듯 약간의 돌과 지면이 스캐치 되어 있습니다.

  첫 장면 까지도 글 텍스트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줌 아웃 되어 드 넓은 시골 풍경은 비구름 낀 흐린 하늘에 푸른 물결이 가득한 논, 야트막한 산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 논과 산의 경계가 되는 부분에 흰색 승용차 한대가 지나갑니다. 화면은 좀더 가까워 져서 꽃나무 덩굴이 늘어진 시골 집 담벼락으로 향합니다. 차가 세워져 있고, 대문 앞 두 사람에게 시선이 옮겨집니다. 중년 남성이 한손에는 빨간 우산을 들고,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든 노인의 손을 잡고 부축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모습이 얼핏 보아도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 같습니다. 시의 첫 구절이 이 그림 텍스트의 모든 정황을 설명합니다.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그림은 차 안으로 좀더 줌 인 되어 차창을 내다보는 어머니의 뒷모습으로 초점이 맞춰집니다. 차는 어느덧 시골을 벗어나 병원이 있는 읍내로 나갔나 봅니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어머니의 시선은 창밖의 꽃들을 향합니다. 표지의 그 장면, 흐드러지게 피어 이리저리 춤을 추는 듯한 꽃이 펼친 면 가득 들어옵니다. 꽃 받침은 자신의 크기보다 몇배다 더 큰 꽃을 든든 하게 받치고 있습니다. 다리가 불편하여 지팡이를 짚고 작은 지팡이에 의지하여 걸음을 옮기는 어머니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시인은 세상 모든 것이 의자로 보인다는 어머니의 말을 빌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요?

  어머니은 아들에게 주말에 아버지 산소를 다려오라며,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라고 말합니다. 살아 생전 아버지의 기억일까요? 아들의 대학 졸업식, 아들의 학사모를 쓰고, 꽃다발을 손에 쥐고 아들의 등에 엎혀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어머니는 병원에 다녀와 참외밭의 지푸라기를 깔고 호박에 똬리를 받쳐야겠다고 말합니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이후의 장면은 행간을 채우듯, 시구 없이 그림만으로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어머니의 집 마당을 중심으로 둘레 담벼략 앞에는 꽃들이 피어 있습니다. 면지의 벽색이 바로 바깥 세상과 아늑한 집마당을 나누는 벽의 색이었을까요? 제목과 함께 의자 위에서 평안한 잠을 청하던 바둑무늬 강아지도 눈에 띕니다. 예쁜 꽃은 꽃받침 위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하늘을 향하 활짝 피어 있습니다. 파란 대문이 열리고 그리운 자녀들과 손주들이 달려옵니다. 어머니는 대청 마루를 의자 삼아 두 손을 벌려 손주들을 맞아 줍니다.

  그림 작가는 시의 3연과 4연 사이를 좀 더 채워 넣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카메라는 다시 줌인 기법으로 한 상 가득한 음식을 자세히 묘사합니다. 뚝배기의 된장찌개, 소쿠리 위에 호박전, 채반 위에 야채와 고추, 나무 도마 위에 도토리묵, 어머니의 투박한 손이 써는 토토리묵은 참 단정합니다. 온 가족이 둘러 앉아 먹을 따스한 음식도 저마다 의자가 있나봅니다.

  화면은 다시 줌 아웃으로 조금씩 멀어집니다. 이제 식구들은 함께 식탁을 옮기고, 의자와 음식을 나릅니다. 한 사람이 준비하는 식탁이 아니라 어린 손주들도 작은 의자를 나르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게 그려집니다. 가족들의 표정은 하나 같이 밝은 웃음으로 가득합니다.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게 별거냐”


  이제 온 가족이 둘러 앉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손을 부축하여 의자로 안내합니다.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화면은 가장 멀어져 담 너머 뒷산 위로 붉게 물든 노을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펼쳐집니다. 의자에 기대어 앉은 어머니는 아기를 품에 안으며 손주를 받쳐주는 또 다른 의자가 됩니다. 어머니의 시선이 꽃에서 아들, 과거에서 현재로 옮겨지듯, 그림의 시각도 가깝고 멀리 당기며 시간과 공간을 아우릅니다. 작가는 이정록 시인의 시를 그림으로 또 해석하여 독자에게 풍요로운 감동을 더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생명이 서로 기대고 받쳐주며 살아가는 것처럼, 사람도 역시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지요. 마치 두 사람이 서로 받친 형상을 본 따 만든 한자 인(人) 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의자가 되어 받쳐주고 기대는 관계… 그 안에 웃음이 있고, 온기가 있고, 배부름이 있고, 행복이 있는, 사람 사는 모습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 보다 개개인으로 파편화되고, 공동체성을 잃어버린 시대를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희생하는 일 보다는 나 혼자 즐기며 잘 살고 싶은 마음이 훨씬 큰 것 같습니다. 가정을 이루어 부부가 서로를 챙기는 일이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자녀를 낳는 일은 자신을 희생하는 일로만 여겨집니다. 하지만 한가지를 잊은 것 같습니다. 꽃 받침이 없는 꽃은 서 있을 수조차 없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안정적인 의자가 되어줄 때 세상을 버티고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사람은 결코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가족이 서로 돌아보고 섬기고 가운데 서로에게 의자가 되어 주길 바랍니다. 



박혜련  | 더샘물학교

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교육 석사 학위를 마치고, 현재 더샘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기독교문화연구소 숨’에서 다음 세대를 위한 문화 연구와 부모교육 강사로 활동중이다. 또한 그림책 읽기를 통해 세대와 세대 간에 아름다움과 미덕이 전수 되길 꿈꾸며 그림책을 연구하며 그림책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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