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행복이란” 『행복을 나르는 버스』

『행복을 나르는 버스』 자세히 보기
지난 여름 교육계에 ‘교권 침해’의 문제로 우리 모두는 가슴이 아프고 답답하여 더욱 지친 시간을 보낸 듯합니다. 여전히 선생님들에게, 학부모에게, 학생에게 아직 풀리지 않는 숙제에 마음은 여전히 무겁습니다. 사실 교육의 현장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언젠가는 터질 문제라는 사실을 예상했을 것입니다. 지나치게 왜곡 돼버린 아동의 인권, 학생의 권리와 관련된 조례들은 비단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사들의 교권만을 침해하지 않습니다. 부모의 권리는 어떻게 될까요? 저는 한 지인의 자녀가 중학교에 들어간 후 권리를 내세워 부모의 어떤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하소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훈육하자 아이는 부모를 학교에 신고했고, 부모는 학교에 면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학교측은 이런 일이 한 번 더 있으면 바로 아동학대와 관련 사건으로 교육청으로 신고되고, 그 즉시 부모와 아이는 격리조치가 들어간다고 합니다. 이 일을 겪은 어머님은 선생님들도 아이들을 어찌하지 못하고, 부모도 아이들을 어찌하지 못하면 도대체 아이들은 누가 기르냐며 한참 하소연을 했습니다. 오늘날 아이들이 삶에 대한 바른 태도와 가치를 어디서 배울 수 있을까요? 이번 달 함께 나눌 그림책 『행복을 나르는 버스』에서 소년과 할머니의 대화를 함께 읽으며, 정말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누가 알려 줄 수 있을지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행복을 나르는 버스』는 2016에 그림책 최초로 뉴베리 상과 칼데콧 명예상을 동시에 받고, 뉴욕 타임스 ‘2015 눈에 띄는 어린이책’, 월 스트리트 저널 ‘2015 올해의 어린이책’, 퍼블리셔스 위클리 ‘2015 올해의 책’, 북페이지 ‘2015 올해 꼭 읽어야 할 그림책’에 선정되는 등 미국과 해외의 수많은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 작품은 맷 데 라 페냐가 글을 쓰고 크리스티안 로빈슨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맷 데 라 페냐는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이자 뉴베리상을 수상한 작가로 7권의 청소년 소설과 6권의 그림책을 집필했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고, 현재 남부 캘리포니아에 살며 전국의 학교와 대학에서 글쓰기 창작을 가르칩니다. 그는 현실 세계에서 이야기와 캐릭터에 대한 영감을 얻으며, 작품 안에 경이로움, 감사, 사랑과 같은 주제를 반복하여 다룹니다. 특히 멕시칸계 혼혈로 자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 속 주인공들은 다문화 아동의 경우도 많습니다.
그림작가 크리스티안 로빈슨은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 거주하는 일러스트레이터, 작가, 애니메이터, 디자이너입니다. 그는 그림을 통해 자신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를 창조합니다. 그는 애니메이션을 공부한 후 세사미와 픽사에서 일하다가 어린이 책의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일러스트레이터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의 예술은 기술의 숙달에서 나아가 재미와 결합시키고 싶다고 합니다. 즉, 일을 하면서 즐겁게 노는 것을 추구하며 자신의 그림을 통해 즐거움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져서 독자들의 기분도 좋게 하고 싶다고 합니다. 특히 그는 꼴라주 기법을 즐겨 사용합니다. 이렇듯 밝고 긍정적이고, 삶의 작고 소소한 데서 의미를 발견하는 두 작가는 협업으로 여러 작품들을 펴냈습니다. 두 작가의 밝고 긍정적인 이미지가 가득 담겨 있는 『행복을 나르는 버스』는 표지부터 아기자기 하고, 귀여운 꼴라주와 밝은 색감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밝은 그림 때문인지 다소 무겁게 느껴지는 원제 『Last Stop on Market Street』를 『행복을 나르는 버스』라고 번역했나 봅니다. 이 작품은 아름다운 그림과 더불어 아동의 시각에서 작가의 철학을 담아서 인지 내용에 있어서도 깊이가 느껴집니다. 뉴베리 금메달과 칼데콧 은메달, 코레타 스콧킹 상까지, 표지 그림부터 이 작품이 찬사를 받은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표지를 펼치면 앞표지와 뒤표지에 이어져 있는 버스가 길쭉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앞쪽에 백발의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다가오는 버스를 바라보는 노란 티를 입은 소년이 서 있습니다. 이곳은 버스 정류장입니다. 버스 안에는 피부색이 다르고, 눈동자 색도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타고 있습니다. 밝은 개나리색 면지를 넘기면 손을 잡고 급히 어딘가로 향하는 할머니와 소년의 모습이 보이고, 다음 장에는 펼친 면을 가로지르는 대로에 건물이 늘어서 있고, 상단에 ‘할머니에게’라는 글 작가, 그림작가의 헌정사가 나옵니다. 헌정사에서 작품에 등장하는 할머니를 향한 두 작가의 애정 어린 마음이 느껴집니다. 다음 장은 언덕 길을 따라 한 교회에 다다릅니다. 어쩌면 건물도 이렇게 알록달록 밝고 예쁜 색일까요. 노란색 오렌지색 건물 사이로 흰 외벽에 스테인드 글라스의 창이 있는 교회 건물이 있고, 문 아래 계단으로 노란티를 입은 소년이 내려오고 그 뒤로 한결같은 미소의 할머니가 보입니다.
서사는 시제이가 교회를 나서 계단을 내려오며 시작합니다. 바깥 공기는 시원하고 상쾌했고, 시제이는 비 냄새가 나는 공기를 깊게 들이 마십니다. 똑똑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옷도 비에 젖어 축축해집니다. 중앙에 나무가 있고, 벌써 물이 길 위에 고여 웅덩이가 되어 걸어가는 시제이와 할머니를 비칩니다. 여느 어린아이처럼 할머니의 우산속에 쏙 들어온 시제이는 “왜 비가 많이 와요? 옷이 다 축축해졌어요”라고 말합니다. 할머니는 빙그레 웃는 표정으로 “나무도 목이 많이 마르거든”이라며, 나무도 비를 쭉쭉 빨아 마신다고 답합니다. 펼친 면의 정 중앙에 위치한 하얀 나무는 정말 비를 맞아 기분 좋은 듯 초록 나뭇잎을 늘어뜨리고 있습니다. 버스를 기다리던 시제이에게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던 친구가 손을 흔듭니다. 시제이는 친구를 보며 “할머니! 왜 우리는 자동차가 없어요?”라고 묻습니다. 할머니는 “뭐 하러 자동차가 필요하겠니? 너가 좋아하는 불 뿜는 악어버스가 있는데! 그리고 데니스 기사 아저씨가 시제이 너를 위해 늘 마술을 보여 주시잖아”라고 대답합니다.
정말 악어 그림이 옆에 있는 커다란 버스가 도착했습니다. 『Last Stop on Market Street』이라는 제목으로 미루어 보아 소년과 할머니는 악어 버스를 타고 마지막 정류장까지 가서 내릴 것입니다. 할머니의 말처럼 기사 아저씨가 시제이를 위해 동전으로 마술을 보여 주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할머니와 시제이는 정기적으로 혹은 매주 주일 예배를 마치고 같은 시간 버스를 타고 마지막 정류소까지 갔을 것입니다. 버스에 올라탄 할머니가 버스에 있는 모든 승객들에게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시제이도 할머니를 따라 인사를 합니다. 미국의 버스 내부의 모습은 마치 한국의 지하철 같습니다. 가운데가 비어 있고 양 옆 창 쪽으로 의자가 마주 놓여 있습니다. 시제이와 할머니가 창문을 뒤로하고 자리에 앉습니다. 좀더 확대된 할머니의 팔자 주름이 할머니의 미소를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왜 친구들은 안가는 곳에 자신만 가냐는 시제이의 질문에 할머니는 그곳 사람들을 보지 못하는 그 친구들이 안타깝다고 이야기해줍니다. 하지만 시제이는 안 된 건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버스 안에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타고 있습니다. 선글라스를 쓴 아저씨는 사람은 꼭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귀로 본다고 합니다. 시제이가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는 형들을 부러워하자 기타를 들고 있던 아저씨의 버스킹 연주가 즉석에서 벌어집니다. 시각장애인과 함께 두 눈을 감고 음악을 듣습니다. 시제이는 눈을 감고 어둠 속에서 음악을 따라 버스 밖, 도시 밖으로 나가 붉은 노을을 바라봅니다. 음악 소리는 아름다운 마법 같습니다. 어느덧 시제이와 할머니의 목적지가 있는 마지막 정류소에 다다릅니다. 지저분한 마을과 길 잃은 고양이, 줄 서서 무료급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시제이 눈에는 볼품없고 불쌍해 보입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시제이에게 이야기해 줍니다.
“시제이, 저길 보렴.
아름다운 것은 어디에나 있단다.”
늘 무심코 지나치다 보니 알아보지 못할 뿐이야.”
시제이는 무료 급식소 위로 둥글게 솟아오른 무지개를 봅니다. 할머니는 언제나 웃으며 아름다운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시제이는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는 할머니가 신기합니다. 그리고 어느새 시제이도 할머니의 마음을 전해 받습니다.
“할머니, 여기 오니까 좋아요.”
줄 곳 불평과 부정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시제이의 입에서 좋다는 고백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할머니의 반응이 다릅니다.
시제이는 할머니가 빙긋 웃어 주길 기다렸어요.
하지만 할머니는 웃지 않았지요.
할머니는 시제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어요.
“나도 그래, 시제이. 어서 가자꾸나.”
미소 지을 할머니의 반응을 기대했지만 이번에는 결코 웃지 않으셨습니다. 줄 곳 미소로 어린 시제이를 다독이던 할머니는 왜 이번에는 웃지 않고 시제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서 가자고 재촉했을까요?
급식소 안은 밝은 하늘색의 배경에 흰 식탁이 있고, 앞에 배식 봉사를 하는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가장 왼쪽의 사람은 초록색의 무엇인가를 배식하고, 그 다음 사람은 갈색의 음식을, 할머니와 시제이는 스프를 담고, 마지막 사람은 서 있습니다. 줄을 서고 앉아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의 식판에는 앞의 메뉴가 담겨 있지만 결코 넉넉한 양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무료 급식소까지 와서 허기를 달래는 그들의 안타까운 현실은 밝고 예쁜 색상으로도 감추어 지지 않습니다. 시제이와 할머니가 마지막 정류장에서 내린 후에도 걸어 들어간 그 골목길 끝에 있는 무료 급식소, 어쩌면 가장 가난하고 소외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닐까요? 차가 없어 버스를 타고 가는 시제이와 할머니 역시 넉넉한 형편은 아닐 것입니다. 버스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도 저마다 부유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버스는 탈 수 있을 정도이겠지요. 그런데 이곳에는 음식조차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할머니는 도저히 웃을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상황은 결코 좋은 상태는 아니었겠지요. 스프를 뜨고 있는 할머니의 마음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무료급식소에 오지 않을 정도로 형편이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어린 시제이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세상의 여러 모습을 봅니다. 할머니는 시제이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세상을 아름다운 눈으로 보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비가 내려 불편하고, 자동차를 타던 친구를 부러워하던 시제이의 마음, 버스 위 약한 사람들, 소외된 이웃들, 가난한 동네를 불편하게 여겼던 시제이의 시각은 할머니로 인해 아름다움을 보는 눈으로 변했습니다. 할머니는 부드럽고 긍정적인 시선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진정한 아름다움에 눈을 뜰 수 있도록 아이의 눈높이에서 설명합니다. 그리고 타인의 고통 앞에서는 침묵으로, 함께 아파하는 마음을 가르칩니다. 이 모든 가르침은 의도적인 말과 훈계가 아니라 할머니의 삶이고, 인생의 희로애락(喜怒哀樂) 앞에서 할머니의 태도였을 것입니다. 할머니를 통해 삶의 자세를 배운 시제이는 할머니와 같은 시각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지요.
아프리카 속담에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선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 한 사람의 성장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관심이 필요한지를 일깨워 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반대로 아이는 절대로 혼자서 성장해 갈 수 없다는 의미가 되지 않을까요? 작품 속 시제이 옆에 할머니가 없었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제이의 시각은 어땠을까요?
아동에게는 올바른 가치를 전수해주고, 참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일깨워 줄 수 있는 어른이 필요합니다. “네 마음이 원하는 데로 해”, “너 자신을 찾아”, “네가 너의 주인이야. 그러니까 그 누구도 너에게 뭐라 할 수 없어”, “네가 하고싶은 대로 해”… 아동의 권리를 앞세워 훈육 받지 못하는 이 현실이 오늘날 가정과 학교의 상황이 아닐까요? 최근 아주대 조선미 교수가 한 방송에서 ‘과도한 마음읽기’는 ‘약’이 아니라 ‘독’이 될 수 있다고 하며, 마음만 읽어주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통제하고 훈육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부모의 역할은 자녀에게 선을 그어줘야 한다는 것이죠.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동의 진정한 권리는 성장을 위해 올바른 가치와 행동을 제대로 배우는데 있지 않을까요? ‘행복’이란 내 마음대로 무절제하게 하고싶은 것만 한다고 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왜곡되고 부정적인 시각이 지혜로운 어른의 온화하지만 단호한 안내를 통해 인도 받을 때 참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지요. 학교에서 제자들을 볼 때마다 아이들의 맑은 마음에 놀라곤 합니다. 자기 멋대로 친구에게 나쁘게 말하고, 서로 욕심 때문에 다투다가도 부드럽고 정확한 선생님의 가르침에 이내 고집을 꺾습니다. 그러면 곧 교실 안은 질서로 가득합니다. 서로의 언어가 달라지고 부정적인 시각이 바뀝니다. 질서 안에서 행복을 맛보며 자라난 아이들은 참된 가르침을 준 부모의 한마디, 선생님의 한마디를 잊지 못하고 가슴속에 기억할 것입니다. 이렇듯 한국 사회 속의 가정과 교육의 현장에도 어른의 이야기가 고리타분한 ‘라떼’가 아니라 기꺼이 따라야 할 참된 가르침으로 회복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 박혜련 | 더샘물학교 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교육 석사 학위를 마치고, 현재 더샘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기독교문화연구소 숨’에서 다음 세대를 위한 문화 연구와 부모교육 강사로 활동중이다. 또한 그림책 읽기를 통해 세대와 세대 간에 아름다움과 미덕이 전수 되길 꿈꾸며 그림책을 연구하며 그림책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
“진정한 행복이란” 『행복을 나르는 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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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교육계에 ‘교권 침해’의 문제로 우리 모두는 가슴이 아프고 답답하여 더욱 지친 시간을 보낸 듯합니다. 여전히 선생님들에게, 학부모에게, 학생에게 아직 풀리지 않는 숙제에 마음은 여전히 무겁습니다. 사실 교육의 현장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언젠가는 터질 문제라는 사실을 예상했을 것입니다. 지나치게 왜곡 돼버린 아동의 인권, 학생의 권리와 관련된 조례들은 비단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사들의 교권만을 침해하지 않습니다. 부모의 권리는 어떻게 될까요? 저는 한 지인의 자녀가 중학교에 들어간 후 권리를 내세워 부모의 어떤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하소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훈육하자 아이는 부모를 학교에 신고했고, 부모는 학교에 면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학교측은 이런 일이 한 번 더 있으면 바로 아동학대와 관련 사건으로 교육청으로 신고되고, 그 즉시 부모와 아이는 격리조치가 들어간다고 합니다. 이 일을 겪은 어머님은 선생님들도 아이들을 어찌하지 못하고, 부모도 아이들을 어찌하지 못하면 도대체 아이들은 누가 기르냐며 한참 하소연을 했습니다. 오늘날 아이들이 삶에 대한 바른 태도와 가치를 어디서 배울 수 있을까요? 이번 달 함께 나눌 그림책 『행복을 나르는 버스』에서 소년과 할머니의 대화를 함께 읽으며, 정말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누가 알려 줄 수 있을지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행복을 나르는 버스』는 2016에 그림책 최초로 뉴베리 상과 칼데콧 명예상을 동시에 받고, 뉴욕 타임스 ‘2015 눈에 띄는 어린이책’, 월 스트리트 저널 ‘2015 올해의 어린이책’, 퍼블리셔스 위클리 ‘2015 올해의 책’, 북페이지 ‘2015 올해 꼭 읽어야 할 그림책’에 선정되는 등 미국과 해외의 수많은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 작품은 맷 데 라 페냐가 글을 쓰고 크리스티안 로빈슨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맷 데 라 페냐는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이자 뉴베리상을 수상한 작가로 7권의 청소년 소설과 6권의 그림책을 집필했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고, 현재 남부 캘리포니아에 살며 전국의 학교와 대학에서 글쓰기 창작을 가르칩니다. 그는 현실 세계에서 이야기와 캐릭터에 대한 영감을 얻으며, 작품 안에 경이로움, 감사, 사랑과 같은 주제를 반복하여 다룹니다. 특히 멕시칸계 혼혈로 자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 속 주인공들은 다문화 아동의 경우도 많습니다.
그림작가 크리스티안 로빈슨은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 거주하는 일러스트레이터, 작가, 애니메이터, 디자이너입니다. 그는 그림을 통해 자신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를 창조합니다. 그는 애니메이션을 공부한 후 세사미와 픽사에서 일하다가 어린이 책의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일러스트레이터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의 예술은 기술의 숙달에서 나아가 재미와 결합시키고 싶다고 합니다. 즉, 일을 하면서 즐겁게 노는 것을 추구하며 자신의 그림을 통해 즐거움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져서 독자들의 기분도 좋게 하고 싶다고 합니다. 특히 그는 꼴라주 기법을 즐겨 사용합니다. 이렇듯 밝고 긍정적이고, 삶의 작고 소소한 데서 의미를 발견하는 두 작가는 협업으로 여러 작품들을 펴냈습니다. 두 작가의 밝고 긍정적인 이미지가 가득 담겨 있는 『행복을 나르는 버스』는 표지부터 아기자기 하고, 귀여운 꼴라주와 밝은 색감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밝은 그림 때문인지 다소 무겁게 느껴지는 원제 『Last Stop on Market Street』를 『행복을 나르는 버스』라고 번역했나 봅니다. 이 작품은 아름다운 그림과 더불어 아동의 시각에서 작가의 철학을 담아서 인지 내용에 있어서도 깊이가 느껴집니다. 뉴베리 금메달과 칼데콧 은메달, 코레타 스콧킹 상까지, 표지 그림부터 이 작품이 찬사를 받은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표지를 펼치면 앞표지와 뒤표지에 이어져 있는 버스가 길쭉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앞쪽에 백발의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다가오는 버스를 바라보는 노란 티를 입은 소년이 서 있습니다. 이곳은 버스 정류장입니다. 버스 안에는 피부색이 다르고, 눈동자 색도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타고 있습니다. 밝은 개나리색 면지를 넘기면 손을 잡고 급히 어딘가로 향하는 할머니와 소년의 모습이 보이고, 다음 장에는 펼친 면을 가로지르는 대로에 건물이 늘어서 있고, 상단에 ‘할머니에게’라는 글 작가, 그림작가의 헌정사가 나옵니다. 헌정사에서 작품에 등장하는 할머니를 향한 두 작가의 애정 어린 마음이 느껴집니다. 다음 장은 언덕 길을 따라 한 교회에 다다릅니다. 어쩌면 건물도 이렇게 알록달록 밝고 예쁜 색일까요. 노란색 오렌지색 건물 사이로 흰 외벽에 스테인드 글라스의 창이 있는 교회 건물이 있고, 문 아래 계단으로 노란티를 입은 소년이 내려오고 그 뒤로 한결같은 미소의 할머니가 보입니다.
서사는 시제이가 교회를 나서 계단을 내려오며 시작합니다. 바깥 공기는 시원하고 상쾌했고, 시제이는 비 냄새가 나는 공기를 깊게 들이 마십니다. 똑똑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옷도 비에 젖어 축축해집니다. 중앙에 나무가 있고, 벌써 물이 길 위에 고여 웅덩이가 되어 걸어가는 시제이와 할머니를 비칩니다. 여느 어린아이처럼 할머니의 우산속에 쏙 들어온 시제이는 “왜 비가 많이 와요? 옷이 다 축축해졌어요”라고 말합니다. 할머니는 빙그레 웃는 표정으로 “나무도 목이 많이 마르거든”이라며, 나무도 비를 쭉쭉 빨아 마신다고 답합니다. 펼친 면의 정 중앙에 위치한 하얀 나무는 정말 비를 맞아 기분 좋은 듯 초록 나뭇잎을 늘어뜨리고 있습니다. 버스를 기다리던 시제이에게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던 친구가 손을 흔듭니다. 시제이는 친구를 보며 “할머니! 왜 우리는 자동차가 없어요?”라고 묻습니다. 할머니는 “뭐 하러 자동차가 필요하겠니? 너가 좋아하는 불 뿜는 악어버스가 있는데! 그리고 데니스 기사 아저씨가 시제이 너를 위해 늘 마술을 보여 주시잖아”라고 대답합니다.
정말 악어 그림이 옆에 있는 커다란 버스가 도착했습니다. 『Last Stop on Market Street』이라는 제목으로 미루어 보아 소년과 할머니는 악어 버스를 타고 마지막 정류장까지 가서 내릴 것입니다. 할머니의 말처럼 기사 아저씨가 시제이를 위해 동전으로 마술을 보여 주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할머니와 시제이는 정기적으로 혹은 매주 주일 예배를 마치고 같은 시간 버스를 타고 마지막 정류소까지 갔을 것입니다. 버스에 올라탄 할머니가 버스에 있는 모든 승객들에게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시제이도 할머니를 따라 인사를 합니다. 미국의 버스 내부의 모습은 마치 한국의 지하철 같습니다. 가운데가 비어 있고 양 옆 창 쪽으로 의자가 마주 놓여 있습니다. 시제이와 할머니가 창문을 뒤로하고 자리에 앉습니다. 좀더 확대된 할머니의 팔자 주름이 할머니의 미소를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왜 친구들은 안가는 곳에 자신만 가냐는 시제이의 질문에 할머니는 그곳 사람들을 보지 못하는 그 친구들이 안타깝다고 이야기해줍니다. 하지만 시제이는 안 된 건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버스 안에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타고 있습니다. 선글라스를 쓴 아저씨는 사람은 꼭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귀로 본다고 합니다. 시제이가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는 형들을 부러워하자 기타를 들고 있던 아저씨의 버스킹 연주가 즉석에서 벌어집니다. 시각장애인과 함께 두 눈을 감고 음악을 듣습니다. 시제이는 눈을 감고 어둠 속에서 음악을 따라 버스 밖, 도시 밖으로 나가 붉은 노을을 바라봅니다. 음악 소리는 아름다운 마법 같습니다. 어느덧 시제이와 할머니의 목적지가 있는 마지막 정류소에 다다릅니다. 지저분한 마을과 길 잃은 고양이, 줄 서서 무료급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시제이 눈에는 볼품없고 불쌍해 보입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시제이에게 이야기해 줍니다.
시제이는 무료 급식소 위로 둥글게 솟아오른 무지개를 봅니다. 할머니는 언제나 웃으며 아름다운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시제이는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는 할머니가 신기합니다. 그리고 어느새 시제이도 할머니의 마음을 전해 받습니다.
줄 곳 불평과 부정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시제이의 입에서 좋다는 고백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할머니의 반응이 다릅니다.
미소 지을 할머니의 반응을 기대했지만 이번에는 결코 웃지 않으셨습니다. 줄 곳 미소로 어린 시제이를 다독이던 할머니는 왜 이번에는 웃지 않고 시제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서 가자고 재촉했을까요?
급식소 안은 밝은 하늘색의 배경에 흰 식탁이 있고, 앞에 배식 봉사를 하는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가장 왼쪽의 사람은 초록색의 무엇인가를 배식하고, 그 다음 사람은 갈색의 음식을, 할머니와 시제이는 스프를 담고, 마지막 사람은 서 있습니다. 줄을 서고 앉아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의 식판에는 앞의 메뉴가 담겨 있지만 결코 넉넉한 양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무료 급식소까지 와서 허기를 달래는 그들의 안타까운 현실은 밝고 예쁜 색상으로도 감추어 지지 않습니다. 시제이와 할머니가 마지막 정류장에서 내린 후에도 걸어 들어간 그 골목길 끝에 있는 무료 급식소, 어쩌면 가장 가난하고 소외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닐까요? 차가 없어 버스를 타고 가는 시제이와 할머니 역시 넉넉한 형편은 아닐 것입니다. 버스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도 저마다 부유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버스는 탈 수 있을 정도이겠지요. 그런데 이곳에는 음식조차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할머니는 도저히 웃을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상황은 결코 좋은 상태는 아니었겠지요. 스프를 뜨고 있는 할머니의 마음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무료급식소에 오지 않을 정도로 형편이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어린 시제이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세상의 여러 모습을 봅니다. 할머니는 시제이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세상을 아름다운 눈으로 보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비가 내려 불편하고, 자동차를 타던 친구를 부러워하던 시제이의 마음, 버스 위 약한 사람들, 소외된 이웃들, 가난한 동네를 불편하게 여겼던 시제이의 시각은 할머니로 인해 아름다움을 보는 눈으로 변했습니다. 할머니는 부드럽고 긍정적인 시선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진정한 아름다움에 눈을 뜰 수 있도록 아이의 눈높이에서 설명합니다. 그리고 타인의 고통 앞에서는 침묵으로, 함께 아파하는 마음을 가르칩니다. 이 모든 가르침은 의도적인 말과 훈계가 아니라 할머니의 삶이고, 인생의 희로애락(喜怒哀樂) 앞에서 할머니의 태도였을 것입니다. 할머니를 통해 삶의 자세를 배운 시제이는 할머니와 같은 시각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지요.
아프리카 속담에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선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 한 사람의 성장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관심이 필요한지를 일깨워 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반대로 아이는 절대로 혼자서 성장해 갈 수 없다는 의미가 되지 않을까요? 작품 속 시제이 옆에 할머니가 없었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제이의 시각은 어땠을까요?
아동에게는 올바른 가치를 전수해주고, 참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일깨워 줄 수 있는 어른이 필요합니다. “네 마음이 원하는 데로 해”, “너 자신을 찾아”, “네가 너의 주인이야. 그러니까 그 누구도 너에게 뭐라 할 수 없어”, “네가 하고싶은 대로 해”… 아동의 권리를 앞세워 훈육 받지 못하는 이 현실이 오늘날 가정과 학교의 상황이 아닐까요? 최근 아주대 조선미 교수가 한 방송에서 ‘과도한 마음읽기’는 ‘약’이 아니라 ‘독’이 될 수 있다고 하며, 마음만 읽어주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통제하고 훈육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부모의 역할은 자녀에게 선을 그어줘야 한다는 것이죠.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동의 진정한 권리는 성장을 위해 올바른 가치와 행동을 제대로 배우는데 있지 않을까요? ‘행복’이란 내 마음대로 무절제하게 하고싶은 것만 한다고 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왜곡되고 부정적인 시각이 지혜로운 어른의 온화하지만 단호한 안내를 통해 인도 받을 때 참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지요. 학교에서 제자들을 볼 때마다 아이들의 맑은 마음에 놀라곤 합니다. 자기 멋대로 친구에게 나쁘게 말하고, 서로 욕심 때문에 다투다가도 부드럽고 정확한 선생님의 가르침에 이내 고집을 꺾습니다. 그러면 곧 교실 안은 질서로 가득합니다. 서로의 언어가 달라지고 부정적인 시각이 바뀝니다. 질서 안에서 행복을 맛보며 자라난 아이들은 참된 가르침을 준 부모의 한마디, 선생님의 한마디를 잊지 못하고 가슴속에 기억할 것입니다. 이렇듯 한국 사회 속의 가정과 교육의 현장에도 어른의 이야기가 고리타분한 ‘라떼’가 아니라 기꺼이 따라야 할 참된 가르침으로 회복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박혜련 | 더샘물학교
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교육 석사 학위를 마치고, 현재 더샘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기독교문화연구소 숨’에서 다음 세대를 위한 문화 연구와 부모교육 강사로 활동중이다. 또한 그림책 읽기를 통해 세대와 세대 간에 아름다움과 미덕이 전수 되길 꿈꾸며 그림책을 연구하며 그림책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