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놀이의 즐거움” 『단어 수집가』
『단어 수집가』 자세히 보기
인간은 다른 모든 생물과 여러가지 면에서 구별되는데, 그 중 이성적으로 사고한다는 사실은 인간만이 갖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일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합리적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촘스키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언어와 사고를 연결시켜 이해하여 언어를 생각의 도구 또는 소리를 지닌 의미로 보았습니다. 아마도 소프트웨어적인 요소가 생각이라면 언어는 하드웨어적인 요소겠지요. 20세기 후반 영국의 음성학자 데니스 프라이는 인간의 언어 구사 능력을 다른 동물과 가장 크게 구분되는 특징으로 보며 인간을 언어적 인간인 ‘호모 로퀜스(Homo loquens)’로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1] 인간은 언어로 서로 의사 소통을 합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은 현실 세계 너머를 상상해왔고, 언어를 통해 상상을 현실로 구현해 내려고 애써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언어를 사용해온 역사가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언어적 인간으로서 창조적인 활동을 하거나 풍성한 언어 유희를 누리기에 장벽이 생긴 듯 합니다.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김영하 작가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짜증난다’는 말을 졸업할 때까지 금지시켰다고 합니다. 작가가 될 학생들은 나중에 다른 사람의 심리를 대신 묘사하고 다른 사람의 감정에 언어를 부여하며 글로 표현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작가는 사람의 마음을 정확하게 쓰는 것이 중요한데 ‘짜증난다’라는 말에는 너무나 많은 감정이 뭉뚱그려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생일인데 엄마가 내 생일을 잊어 서운한 감정도, 공공 화장실에 휴지가 없을 때 황당하고 화가 나는 감정도 ‘짜증난다’는 한 마디로 다 설명된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만들어 내는 신조어나 유행어는 짧고 간결 하면서 모든 상황을 뭉뚱그려 사용할 만한 말들이나 축약형이 많습니다. 짜증난다가 부정적인 모든 것을 통칭하는 표현이라면(그 외에도 현타, 킹받네 등의 표현도 많이 쓰인다), 요즘 ‘미쳤다’ ‘개~’ 라는 말은 오히려 멋지다는 표현이 되었지요. 요즘 사람들이 SNS로 빠르게 소통하다 보니 구체적이고 자세한 언어 표현을 꺼리게 되어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더욱이 언어나 문학에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 현상이 우리 삶에 익숙하게 파고들어와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언어가 단지 사회의 구성물일 뿐이며, 그 어떤 진리나 고정된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고 믿게 만듭니다. 언어의 의미도 사용하는 문화와 시대에 따라 계속 바뀌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작품도 작가가 어떤 의도와 생각을 갖고 작품을 만들었느냐 보다는 누가 어떻게 읽느냐, 즉 독자의 반응이 중요합니다. 텍스트의 의미를 밝히는 일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텍스트는 독자가 구성하거나 해체하기 전까지는 미완료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기돼지 삼형제를 늑대의 시각에서 그려낸 그림책 『늑대가 들려주는 아기돼지 삼형제』(존 셰스카)나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마법을 건 마녀의 입장에서 재해석한 <말레피센트(2014)>와 같은 영화처럼, 기존의 작품을 다른 시각으로 읽고 해석하는 일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고의적으로 단어의 의미를 바꾸어 자신의 의도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홀리 오드웨이 교수는 “일단 언어가 일상적으로 왜곡되기 시작하면 긍정적인 단어 뒤에 숨어서 악을 정당화하고 촉진하기가 점점 쉬워진다”라고 말하며 언어 왜곡의 위험성을 경고합니다.(2) 미국 학교의 공문서에서 더이상 부모님 정보를 적는 란에 ‘mother’이나 ‘father’라는 용어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Mr. Mrs. 엄마와 아빠라는 단어까지 젠더주의 앞에 기피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다양성, 관용, 포용, 편협 등과 같은 단어도 집단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와 이해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국어 과목를 대하는 바른 태도를 어떻게 가르칠지 큰 숙제와 같았습니다. 3학년 아이들에게 국어사전에 대해 가르치려고 수업 설계를 하는데 언어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인 단어와 낱말에 대한 전제를 새롭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우리 아이들 역시 시대의 언어 문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겠다는 생각에 단순히 국어 교과를 넘어 언어에 대한 바른 세계관을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단어 수집가』를 수업에서 함께 읽으며 언어에 대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단어 수집가』는 캐나다 토론토 출신의 그림책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인 피터 레이놀즈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습니다. 그의 작품은 주로 창의성과 예술성, 자기 표현과 자존감 등의 주제를 다룹니다. 피터 레이놀즈의 단순하고 따뜻한 그림체는 그를 독특한 일러스트레이터로 사랑받게 했으며, 감동적이고 창조적인 이야기 역시 모든 연령을 위한 이야기로 전 세계에서 찬사를 받아왔습니다. 우리에게 매우 잘 알려진 『점』, 『느끼는 대로』 등은 미술과 관련된 그림책이라면, 『단어 수집가』는 언어에 대한 책입니다. 전 미국 대통령 오바마 부부의 추천으로 더욱 유명해진 책 이기도 하지요.
겉표지는 한 아이가 눈을 감은 채 미소를 머금고 두 손을 들고 있고, 하늘에는 단어가 적혀 있는 종이가 흩날립니다. 그중 책의 제목인 ‘단어수집가’도 큰 종이에 쓰여져 중앙에 위치합니다. 면지는 앞, 뒤 모두 하늘의 색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앞 면지는 베이비블루의 하늘에 흰 뭉게구름이 떠있어 낮의 하늘을 표현한다면, 뒷 면지에는 별이 총총히 떠있는 보랏빛 밤 하늘입니다. 앞 면지는 노란 단어 카드들이 줄지어 날아가고, 뒷 면지에는 카드가 날아가면서 몇몇 장들은 일렬로 늘어져 작가의 마지막 마음을 전합니다.
“너만의 단어에 손을 뻗어 봐.
네가 누구인지 세상에 말해 봐.
그러면 세상은 더 멋진 곳이 될 거야
- 피터 레이놀즈
자, 시작!”
두 면지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낱말과 하늘 별과 문장… 그 안의 이야기가 궁금해 집니다.
표제지로 넘어오면 하늘에 날리던 단어카드는 엄청난 양으로 펼친 면을 가득 채웁니다. 마치 깊은 가을 바닥에 떨어져 있는 노란 은행잎처럼 단어카드가 수북이 쌓여 있습니다. ‘빙글빙글’, ‘향기로운’, ‘바삭바삭한’처럼 어린 독자들이 알 수 있는 단어부터 ‘시추하다’, ‘서사시’, ‘직렬연결’처럼 전혀 모를 만한 낱말들, 재미있는 의성어 의태어 뿐 아니라 ‘정향나무’같은 특별한 종류의 나무 명칭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한 단어가 있습니다. 아이들과 책을 읽자 표제지부터 넘어 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여러 단어를 자기만의 수집상자에 모아보겠다며 독특한 낱말을 찾아 포스트잇에 열심이 적습니다. 처음 보는 새로운 낱말을 읽고 사전으로 찾아보는 것 자체가 아이들에게 큰 재미있는 놀이 같습니다. 뜻을 알고는 놀라고, 재밌다며 웃는 아이들의 모습 속에 언어를 알아가는 즐거움이 가득해 보입니다.
작가는 이야기를 ‘수집가’로 시작합니다. 뭔가를 모으는 수집가. 저도 어린시절 조개껍질, 보석, 크리스마스씰, 스티커와 같은 것들을 모았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아마 작품을 읽는 어린 독자들도 저마다 자신의 보물 상자를 떠올리겠지요? 그런데 이야기의 주인공 제롬은 정말 특별한걸 수집합니다. 낱말을 모으는 단어 수집가 입니다. 제롬은 이야기를 듣거나 간판을 보거나 책을 읽다가 관심이 가는 단어나 눈길을 끄는 단어를 모았습니다. ‘사랑해’, ‘사각사각’처럼 기분 좋아지는 단어, ‘설렘’, ‘보물’ 같은 소중한 단어, ‘과카몰레’, ‘개밥바라기’ 같은 노래 같은 단어, ‘명명하는’, ‘탐미주의자’ 같은 모르는 단어, ‘쭈르르’, ‘장대비’ 같은 저절로 그림이 그려지는 단어들을 모읍니다.
제롬은 자신이 수집한 단어들을 분류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분류한 많은 낱말책들을 옮기다 그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제롬의 수집상자와 스크랩북에서 수많은 낱말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모두 뒤죽박죽 되고 말았습니다. 코뿔소 옆에 밀라노, 파랑 옆에 초콜릿, 슬픔 옆에 꿈. 이리저리 놓인 단어를 유심히 보던 제롬은 뭔가를 알았다는 듯 미소 지으며 나란히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해본 단어들을 쭉 줄에 매달았답니다. 그리고 그 단어들로 시를 쓰고, 노래도 만들었지요. 제롬의 시와 노래는 친구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어떤 간단한 단어들의 힘은 놀라웠습니다. ‘괜찮아’, ‘미안해’, ‘고마워’, ‘보고 싶었어’ 간단한 한 마디를 할 때면 제롬의 미소가 상대에게 전해집니다. 제롬은 단어를 모으고 더 모읍니다.
“더 많은 낱말을 알게 될수록
여러 생각과 느낌과 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어.”
제롬은 낱말들을 큰 주머니에 담아 수레에 싣고 높은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동안 모은 낱말들을 모두 하늘로 날려 보냅니다. 제롬의 수집상자에 담겨 있던 단어들은 바람을 타고 날아가 아래에 있는 친구들의 머리 위로 떨어집니다. 단어를 붙잡고 뛰어노는 친구들을 바라보는 제롬은 행복한 미소를 짓습니다.
제롬의 이야기는 언어의 빛나는 비밀을 보여줍니다. 제롬이 수집한 단어는 혼자만 꽁꽁 싸매고 간직하는 것 보다 시와 노래가 될 때 감동을 나눌 수 있습니다. 신기하고 새로운 단어와 단어가 이어질 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이어지고, 짧은 한마디 말로 다른 이들에게 힘을 줍니다. 이렇듯 언어란 함께 나눌 대상이 있을 때 풍성해 집니다.
그런데 흩날리는 단어카드를 줍고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가는 제롬과 친구들의 언어적 활동이 진정한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한가지를 유념해야 합니다. 피터레이놀즈의 다른 작품 『점』에서 단지 검은 점 하나일 지라도 내가 찍은 점은 훌륭한 예술품이 되고, 『느끼는 대로』에서는 다른 누군가의 기준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대로 붓을 움직였을 때 나만의 작품이 됩니다. 물론 『점』의 주인공처럼 빈 도화지에 그 어떤 시도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친구가 우연히 찍게 된 점을 칭찬하며 가치 있게 여겨준 선생님의 태도도 정말 필요합니다. 하지만 언어는 단어의 의미와 쓰임을 무시한 채 내 마음대로 의미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생소하고 낯설고 신기한 단어들을 단지 모아서 늘어놓는 것 만으로는 온전한 언어적 활동이 될 수는 없겠지요. 단어의 정의는 단순히 나의 느낌이나 생각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3학년의 국정 교과서 성취 기준 안에 포함된 국어사전에 대한 단원과 연계를 시켜보았습니다. 어휘의 다양한 활용과 창조적 활동을 위해서 무엇보다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새롭고 흥미로운 단어가 자신이 생각한 의미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아이들은 비밀을 밝혀낸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흥분합니다. 비슷한 어휘지만 세밀한 차이점을 찾아냈을 때 신나서 각각의 단어에 어울리는 다른 문장을 만들어 냅니다. 사전을 뒤적이며 단어의 정의를 찾아내자 낱말을 조합하여 문장을 만드는 일은 마치 하나의 추리게임이 됩니다. 아이들에게 사전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조선어학회 주시경 선생님이 사전 편찬을 위해 우리나라 방방 곳곳 사람들을 보내어 말을 모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우리말 첫 사전의 첫 이름이 ‘말모이’라는 사실에 신기하고 놀라워 했습니다. ‘단어 수집가’ ‘말모이’ 진정한 단어 수집가는 말모이 사전처럼 세상의 모든 말과 그 의미를 알려는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호모 로퀜스, 언어적 인간. 사람은 참 특별한 존재이지요. 새도 울음소리로 다른 새와 의사소통을 하고, 벌은 팔자 춤을 추며 꿀이 있는 자리를 동료들에게 알려 줍니다. 집에서 키우는 반려동물 개와 고양이도 주인과 오래 지내다 보면 밥달라, 간식달라, 산책하자, 놀아달라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하지요. 하지만 그 어떤 의사소통의 방법도 사람의 언어활동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언어의 섬세함과 다양함과 복잡성은 끝이 없습니다. 각 낱말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가고 나의 언어가 되면 그 단어는 이제 나의 표현을 통해 글이 됩니다. 이 세상을 우리의 언어로 표현해 보고, 우리의 마음과 감정을 더욱 풍성히 자세하게 언어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깊은 감정선이 언어로 세밀하게 표현된 소설을 읽으며 그 안에서 나의 감정을 발견합니다. 합리적 인간은 분석적인 사고로 사물의 이치를 밝혀 학문의 언어로 풀어냅니다. 단어 하나에 절제된 의미와 감정을 축약하여 시적 언어로 표현합니다. 그 시에 음을 달면 노래가 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필요나 욕구를 위해서만 언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언어로 예술을 창조하는 고차원적인 존재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한복음 1:1-3)
온세상을 만드신 창조주가 언어로 세상을 창조한 사실을 아십니까? 그리고 오직 사람은 모든 피조물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듯,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 하나님과 언어가 통하고 하나님처럼 언어로 창조적 활동을 합니다. 『단어 수집가』를 아이들과 함께 읽으며 창조주가 우리에게 고유하게 허락하신 이 언어의 모든 영역을 의미 있게 발견하고 창조해 가면 좋겠습니다. 빠르게 전환되는 영상에 익숙한 아이들, 한두마디의 단어로 자신의 온 감정을 뭉뚱그리고, 축약어 사용이 편하여 깊게 사유 하기를 거부하는 이 시대를 거슬러 인간 안에 심겨져 있는 언어적 본성이 풍부하게 발휘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진정한 단어 수집가가 되기를 꿈꿉니다.
(1) Fry, D.B. (1977). Homo loquens: man as a talking animal.
(2) '세상으로 달려가는 아이, 신앙 위에 세우려는 엄마' (힐러리 모건 페러, 디모데) 4장 단어도둑 참고.
| 박혜련 | 더샘물학교 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교육 석사 학위를 마치고, 현재 더샘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기독교문화연구소 숨’에서 다음 세대를 위한 문화 연구와 부모교육 강사로 활동중이다. 또한 그림책 읽기를 통해 세대와 세대 간에 아름다움과 미덕이 전수 되길 꿈꾸며 그림책을 연구하며 그림책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
“말 놀이의 즐거움” 『단어 수집가』
『단어 수집가』 자세히 보기
인간은 다른 모든 생물과 여러가지 면에서 구별되는데, 그 중 이성적으로 사고한다는 사실은 인간만이 갖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일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합리적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촘스키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언어와 사고를 연결시켜 이해하여 언어를 생각의 도구 또는 소리를 지닌 의미로 보았습니다. 아마도 소프트웨어적인 요소가 생각이라면 언어는 하드웨어적인 요소겠지요. 20세기 후반 영국의 음성학자 데니스 프라이는 인간의 언어 구사 능력을 다른 동물과 가장 크게 구분되는 특징으로 보며 인간을 언어적 인간인 ‘호모 로퀜스(Homo loquens)’로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1] 인간은 언어로 서로 의사 소통을 합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은 현실 세계 너머를 상상해왔고, 언어를 통해 상상을 현실로 구현해 내려고 애써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언어를 사용해온 역사가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언어적 인간으로서 창조적인 활동을 하거나 풍성한 언어 유희를 누리기에 장벽이 생긴 듯 합니다.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김영하 작가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짜증난다’는 말을 졸업할 때까지 금지시켰다고 합니다. 작가가 될 학생들은 나중에 다른 사람의 심리를 대신 묘사하고 다른 사람의 감정에 언어를 부여하며 글로 표현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작가는 사람의 마음을 정확하게 쓰는 것이 중요한데 ‘짜증난다’라는 말에는 너무나 많은 감정이 뭉뚱그려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생일인데 엄마가 내 생일을 잊어 서운한 감정도, 공공 화장실에 휴지가 없을 때 황당하고 화가 나는 감정도 ‘짜증난다’는 한 마디로 다 설명된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만들어 내는 신조어나 유행어는 짧고 간결 하면서 모든 상황을 뭉뚱그려 사용할 만한 말들이나 축약형이 많습니다. 짜증난다가 부정적인 모든 것을 통칭하는 표현이라면(그 외에도 현타, 킹받네 등의 표현도 많이 쓰인다), 요즘 ‘미쳤다’ ‘개~’ 라는 말은 오히려 멋지다는 표현이 되었지요. 요즘 사람들이 SNS로 빠르게 소통하다 보니 구체적이고 자세한 언어 표현을 꺼리게 되어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더욱이 언어나 문학에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 현상이 우리 삶에 익숙하게 파고들어와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언어가 단지 사회의 구성물일 뿐이며, 그 어떤 진리나 고정된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고 믿게 만듭니다. 언어의 의미도 사용하는 문화와 시대에 따라 계속 바뀌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작품도 작가가 어떤 의도와 생각을 갖고 작품을 만들었느냐 보다는 누가 어떻게 읽느냐, 즉 독자의 반응이 중요합니다. 텍스트의 의미를 밝히는 일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텍스트는 독자가 구성하거나 해체하기 전까지는 미완료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기돼지 삼형제를 늑대의 시각에서 그려낸 그림책 『늑대가 들려주는 아기돼지 삼형제』(존 셰스카)나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마법을 건 마녀의 입장에서 재해석한 <말레피센트(2014)>와 같은 영화처럼, 기존의 작품을 다른 시각으로 읽고 해석하는 일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고의적으로 단어의 의미를 바꾸어 자신의 의도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홀리 오드웨이 교수는 “일단 언어가 일상적으로 왜곡되기 시작하면 긍정적인 단어 뒤에 숨어서 악을 정당화하고 촉진하기가 점점 쉬워진다”라고 말하며 언어 왜곡의 위험성을 경고합니다.(2) 미국 학교의 공문서에서 더이상 부모님 정보를 적는 란에 ‘mother’이나 ‘father’라는 용어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Mr. Mrs. 엄마와 아빠라는 단어까지 젠더주의 앞에 기피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다양성, 관용, 포용, 편협 등과 같은 단어도 집단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와 이해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국어 과목를 대하는 바른 태도를 어떻게 가르칠지 큰 숙제와 같았습니다. 3학년 아이들에게 국어사전에 대해 가르치려고 수업 설계를 하는데 언어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인 단어와 낱말에 대한 전제를 새롭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우리 아이들 역시 시대의 언어 문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겠다는 생각에 단순히 국어 교과를 넘어 언어에 대한 바른 세계관을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단어 수집가』를 수업에서 함께 읽으며 언어에 대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단어 수집가』는 캐나다 토론토 출신의 그림책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인 피터 레이놀즈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습니다. 그의 작품은 주로 창의성과 예술성, 자기 표현과 자존감 등의 주제를 다룹니다. 피터 레이놀즈의 단순하고 따뜻한 그림체는 그를 독특한 일러스트레이터로 사랑받게 했으며, 감동적이고 창조적인 이야기 역시 모든 연령을 위한 이야기로 전 세계에서 찬사를 받아왔습니다. 우리에게 매우 잘 알려진 『점』, 『느끼는 대로』 등은 미술과 관련된 그림책이라면, 『단어 수집가』는 언어에 대한 책입니다. 전 미국 대통령 오바마 부부의 추천으로 더욱 유명해진 책 이기도 하지요.
겉표지는 한 아이가 눈을 감은 채 미소를 머금고 두 손을 들고 있고, 하늘에는 단어가 적혀 있는 종이가 흩날립니다. 그중 책의 제목인 ‘단어수집가’도 큰 종이에 쓰여져 중앙에 위치합니다. 면지는 앞, 뒤 모두 하늘의 색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앞 면지는 베이비블루의 하늘에 흰 뭉게구름이 떠있어 낮의 하늘을 표현한다면, 뒷 면지에는 별이 총총히 떠있는 보랏빛 밤 하늘입니다. 앞 면지는 노란 단어 카드들이 줄지어 날아가고, 뒷 면지에는 카드가 날아가면서 몇몇 장들은 일렬로 늘어져 작가의 마지막 마음을 전합니다.
두 면지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낱말과 하늘 별과 문장… 그 안의 이야기가 궁금해 집니다.
표제지로 넘어오면 하늘에 날리던 단어카드는 엄청난 양으로 펼친 면을 가득 채웁니다. 마치 깊은 가을 바닥에 떨어져 있는 노란 은행잎처럼 단어카드가 수북이 쌓여 있습니다. ‘빙글빙글’, ‘향기로운’, ‘바삭바삭한’처럼 어린 독자들이 알 수 있는 단어부터 ‘시추하다’, ‘서사시’, ‘직렬연결’처럼 전혀 모를 만한 낱말들, 재미있는 의성어 의태어 뿐 아니라 ‘정향나무’같은 특별한 종류의 나무 명칭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한 단어가 있습니다. 아이들과 책을 읽자 표제지부터 넘어 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여러 단어를 자기만의 수집상자에 모아보겠다며 독특한 낱말을 찾아 포스트잇에 열심이 적습니다. 처음 보는 새로운 낱말을 읽고 사전으로 찾아보는 것 자체가 아이들에게 큰 재미있는 놀이 같습니다. 뜻을 알고는 놀라고, 재밌다며 웃는 아이들의 모습 속에 언어를 알아가는 즐거움이 가득해 보입니다.
작가는 이야기를 ‘수집가’로 시작합니다. 뭔가를 모으는 수집가. 저도 어린시절 조개껍질, 보석, 크리스마스씰, 스티커와 같은 것들을 모았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아마 작품을 읽는 어린 독자들도 저마다 자신의 보물 상자를 떠올리겠지요? 그런데 이야기의 주인공 제롬은 정말 특별한걸 수집합니다. 낱말을 모으는 단어 수집가 입니다. 제롬은 이야기를 듣거나 간판을 보거나 책을 읽다가 관심이 가는 단어나 눈길을 끄는 단어를 모았습니다. ‘사랑해’, ‘사각사각’처럼 기분 좋아지는 단어, ‘설렘’, ‘보물’ 같은 소중한 단어, ‘과카몰레’, ‘개밥바라기’ 같은 노래 같은 단어, ‘명명하는’, ‘탐미주의자’ 같은 모르는 단어, ‘쭈르르’, ‘장대비’ 같은 저절로 그림이 그려지는 단어들을 모읍니다.
제롬은 자신이 수집한 단어들을 분류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분류한 많은 낱말책들을 옮기다 그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제롬의 수집상자와 스크랩북에서 수많은 낱말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모두 뒤죽박죽 되고 말았습니다. 코뿔소 옆에 밀라노, 파랑 옆에 초콜릿, 슬픔 옆에 꿈. 이리저리 놓인 단어를 유심히 보던 제롬은 뭔가를 알았다는 듯 미소 지으며 나란히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해본 단어들을 쭉 줄에 매달았답니다. 그리고 그 단어들로 시를 쓰고, 노래도 만들었지요. 제롬의 시와 노래는 친구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어떤 간단한 단어들의 힘은 놀라웠습니다. ‘괜찮아’, ‘미안해’, ‘고마워’, ‘보고 싶었어’ 간단한 한 마디를 할 때면 제롬의 미소가 상대에게 전해집니다. 제롬은 단어를 모으고 더 모읍니다.
제롬은 낱말들을 큰 주머니에 담아 수레에 싣고 높은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동안 모은 낱말들을 모두 하늘로 날려 보냅니다. 제롬의 수집상자에 담겨 있던 단어들은 바람을 타고 날아가 아래에 있는 친구들의 머리 위로 떨어집니다. 단어를 붙잡고 뛰어노는 친구들을 바라보는 제롬은 행복한 미소를 짓습니다.
제롬의 이야기는 언어의 빛나는 비밀을 보여줍니다. 제롬이 수집한 단어는 혼자만 꽁꽁 싸매고 간직하는 것 보다 시와 노래가 될 때 감동을 나눌 수 있습니다. 신기하고 새로운 단어와 단어가 이어질 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이어지고, 짧은 한마디 말로 다른 이들에게 힘을 줍니다. 이렇듯 언어란 함께 나눌 대상이 있을 때 풍성해 집니다.
그런데 흩날리는 단어카드를 줍고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가는 제롬과 친구들의 언어적 활동이 진정한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한가지를 유념해야 합니다. 피터레이놀즈의 다른 작품 『점』에서 단지 검은 점 하나일 지라도 내가 찍은 점은 훌륭한 예술품이 되고, 『느끼는 대로』에서는 다른 누군가의 기준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대로 붓을 움직였을 때 나만의 작품이 됩니다. 물론 『점』의 주인공처럼 빈 도화지에 그 어떤 시도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친구가 우연히 찍게 된 점을 칭찬하며 가치 있게 여겨준 선생님의 태도도 정말 필요합니다. 하지만 언어는 단어의 의미와 쓰임을 무시한 채 내 마음대로 의미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생소하고 낯설고 신기한 단어들을 단지 모아서 늘어놓는 것 만으로는 온전한 언어적 활동이 될 수는 없겠지요. 단어의 정의는 단순히 나의 느낌이나 생각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3학년의 국정 교과서 성취 기준 안에 포함된 국어사전에 대한 단원과 연계를 시켜보았습니다. 어휘의 다양한 활용과 창조적 활동을 위해서 무엇보다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새롭고 흥미로운 단어가 자신이 생각한 의미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아이들은 비밀을 밝혀낸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흥분합니다. 비슷한 어휘지만 세밀한 차이점을 찾아냈을 때 신나서 각각의 단어에 어울리는 다른 문장을 만들어 냅니다. 사전을 뒤적이며 단어의 정의를 찾아내자 낱말을 조합하여 문장을 만드는 일은 마치 하나의 추리게임이 됩니다. 아이들에게 사전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조선어학회 주시경 선생님이 사전 편찬을 위해 우리나라 방방 곳곳 사람들을 보내어 말을 모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우리말 첫 사전의 첫 이름이 ‘말모이’라는 사실에 신기하고 놀라워 했습니다. ‘단어 수집가’ ‘말모이’ 진정한 단어 수집가는 말모이 사전처럼 세상의 모든 말과 그 의미를 알려는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호모 로퀜스, 언어적 인간. 사람은 참 특별한 존재이지요. 새도 울음소리로 다른 새와 의사소통을 하고, 벌은 팔자 춤을 추며 꿀이 있는 자리를 동료들에게 알려 줍니다. 집에서 키우는 반려동물 개와 고양이도 주인과 오래 지내다 보면 밥달라, 간식달라, 산책하자, 놀아달라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하지요. 하지만 그 어떤 의사소통의 방법도 사람의 언어활동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언어의 섬세함과 다양함과 복잡성은 끝이 없습니다. 각 낱말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가고 나의 언어가 되면 그 단어는 이제 나의 표현을 통해 글이 됩니다. 이 세상을 우리의 언어로 표현해 보고, 우리의 마음과 감정을 더욱 풍성히 자세하게 언어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깊은 감정선이 언어로 세밀하게 표현된 소설을 읽으며 그 안에서 나의 감정을 발견합니다. 합리적 인간은 분석적인 사고로 사물의 이치를 밝혀 학문의 언어로 풀어냅니다. 단어 하나에 절제된 의미와 감정을 축약하여 시적 언어로 표현합니다. 그 시에 음을 달면 노래가 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필요나 욕구를 위해서만 언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언어로 예술을 창조하는 고차원적인 존재입니다.
온세상을 만드신 창조주가 언어로 세상을 창조한 사실을 아십니까? 그리고 오직 사람은 모든 피조물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듯,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 하나님과 언어가 통하고 하나님처럼 언어로 창조적 활동을 합니다. 『단어 수집가』를 아이들과 함께 읽으며 창조주가 우리에게 고유하게 허락하신 이 언어의 모든 영역을 의미 있게 발견하고 창조해 가면 좋겠습니다. 빠르게 전환되는 영상에 익숙한 아이들, 한두마디의 단어로 자신의 온 감정을 뭉뚱그리고, 축약어 사용이 편하여 깊게 사유 하기를 거부하는 이 시대를 거슬러 인간 안에 심겨져 있는 언어적 본성이 풍부하게 발휘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진정한 단어 수집가가 되기를 꿈꿉니다.
(1) Fry, D.B. (1977). Homo loquens: man as a talking animal.
(2) '세상으로 달려가는 아이, 신앙 위에 세우려는 엄마' (힐러리 모건 페러, 디모데) 4장 단어도둑 참고.
박혜련 | 더샘물학교
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교육 석사 학위를 마치고, 현재 더샘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기독교문화연구소 숨’에서 다음 세대를 위한 문화 연구와 부모교육 강사로 활동중이다. 또한 그림책 읽기를 통해 세대와 세대 간에 아름다움과 미덕이 전수 되길 꿈꾸며 그림책을 연구하며 그림책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