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할 길을 가리라”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멈춰 서서』

2023-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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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할 길을 가리라”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멈춰 서서』




‘새해’ 하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나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겨울, 새 하얀 나뭇가지 위에 까치가 앉아 우는 풍경이 떠오릅니다. 또는 하얀 눈 위에 걸음을 따라 나 있는 발자국도 생각나지요. 흰 눈이 내린 장면을 생각하면, 흰 도화지처럼 눈 앞에 펼쳐진 새로운 한해를 힘차게 시작하고 싶을 것입니다. 새해에는 팬데믹으로 움츠렸던 몸과 마음을 펼치며 토끼처럼 도약하고 싶습니다. 작년 보다는 좀 더 나은 한해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결심과 계획을 합니다. 하지만 2023년의 우울한 전망은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더 높은 도약을 준비하는 검은 토끼의 해’라는 부제목의 『2023 트렌드 코리아』의 서문에서는 지난 3년 동안 우리를 흔들어온 팬데믹 사태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가운데, 세계 경기는 2023년 상반기에 둔화의 국면을 지나 3-4분기에는 바닥에 이를 것이라고 합니다.(1) 또한 영국 콜린스 사전도 ‘올해의 단어’로 ‘영속적인’을 의미하는 ‘permanent’와 ‘위기’의 뜻 ‘crisis’의 합성어 ‘permacrisis(영구적 위기)’라는 단어를 꼽았습니다.(2) 전문가들은 2023년이 되어도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고 예상합니다. 새해를 맞이하며, 이전보다는 더 나은 한 해가 될 거라는 막연한 희망마저 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어두운 전망 앞에 엄습해 오는 두려움으로 갈 길이 막막해 집니다. 이러한 시기에 담담하게 가야할 길을 가라고 말해주며 우리의 마음에 위로를 주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새하얀 도화지처럼 펼쳐진 새해를 묵묵히 살아내자고, 조금만 더 버티며 걸어가자고, 시작부터 지친 우리를 격려하는 그림책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멈춰 서서』 입니다. 

그림책의 글 텍스트는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1874-1963)의 명시입니다.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라는 시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프로스트는 퓰리처상을 네 번이나 수상했으며, 미국의 현대시를 대표하는 20세기 미국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 받았습니다. 프로스트는 미국 북동부 뉴햄프셔의 농장에서 오래 생활했습니다. 농장 생활의 체험을 통해 미국의 전원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소박한 사람들을 평이한 문체로 잔잔하게 그려냈습니다. 그의 작품은 자연의 이치를 통해 마주하는 삶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그려내기에, 언어는 쉬우면서도 인생에 대한 깊이 있는 사색과 통찰을 제공합니다.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멈춰 서서』는 눈이 내린 고즈넉한 숲을 시적 운율과 편안한 언어로 표현합니다.

프로스트의 시가 칼데콧 아너 수장작가이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로 선정된 수잔 제퍼스(Susan Jeffers, 1942-2020)의 그림과 만났습니다. 수잔 제퍼스는 말을 매우 사랑하여 종종 작품 속에 말을 세밀하게 묘사했습니다. 『블랙뷰티』의 삽화를 그리기도 했고, 말과 소녀의 사랑 이야기 『나의 조랑말』을 그렸습니다. 자연과 야생, 동물과 꽃을 향한 사랑이 그녀의 작품 가운데 녹아 있습니다. 특별히 수잔 제퍼스가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멈춰 서서』를 작업할 때 설경이 그림같이 펼쳐진 웨스트체스터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제퍼스가 그리는 겨울의 자연과 동물들은 어떤 모습일까요? 프로스트의 글 텍스트는 화가의 손길을 통해 어떻게 서사를 덧입게 될까요? 시적 언어는 그림 텍스트와 아름다운 조합을 이루며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는 한겨울의 숲으로 독자를 이끌어 갑니다.  


겉표지에는 어두운 하늘에 흰 눈이 날리고, 온통 눈으로 덮여 풍성한 자태를 드러낸 커다란 나무가 언덕의 중앙에 위치합니다. 나무 오른편 아래로 눈처럼 흰 작은 말이 끄는 마차에 붉은 플레이드 코트를 입은 한 사람이 타고 지나갑니다. 액자식의 그림 모서리 위쪽 바깥에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라는 문구가 있고,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책의 제목이자 시의 제목인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멈춰서서”가 위에서 아래로 길게 쓰여 있습니다. 그림책의 표제지는 두 장에 걸쳐 나옵니다. 첫 번째 표제지에는 외양간 앞에 머리도 수염도 흰 나이든 농부가 마차 옆쪽에 서 있고, 그의 앞뒤로 두 마리의 말이 있습니다. 주변에는 거위, 양, 닭, 송아지 등의 가축들이 농부를 향하여 있습니다. 농부는 어디론가 갈 채비를 하는 듯합니다. 다음 장의 표제지에서는 펼친 면 가득 겨울의 눈 덮인 숲이 펼쳐져 있고, 프레임 앞쪽에 여우 세 마리가 있습니다. 한 마리는 정면을 응시하고, 다른 한 마리는 옆모습, 마지막 한 마리는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습니다. 저 멀리 언덕 위로 마차를 탄 사람이 보입니다. 그림 작가는 시의 제목과 첫 소절 사이의 간격을 메꾸려는 듯, 판권면 전체에 얼어붙은 호숫가 옆 길로 마차가 지나가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마차는 무엇인가를 싣고 갑니다. 그 모습이 얼어붙은 호수 위로 비치며, 마차 위로 “보석처럼 소중한 주디스에게”라는 헌정사가 있습니다. 


나이든 농부가 숲에 들어서자 곧게 뻗은 나무들에 눈이 쌓여 있습니다. 쌓인 눈의 무게에 휘어 늘어진 나뭇가지 아래로 당장이라도 눈이 후두둑 쏟아져 내일 것 같습니다. 멈춰서 숲의 설경을 바라보는 농부의 빨간 코트와 초록색 머플러, 다리를 덮고 있는 담요만이 선명한 색을 나타내며, 숲과 말, 눈 모두 흑백입니다. 숲을 바라보는 이는 비단 화자 뿐이 아닌 것 같습니다. 프레임의 오른쪽 앞에 흰 부엉이가 나뭇가지에 앉아 정면을 응시합니다. 설경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농부는 마차에서 내려 눈밭에 누워 봅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그 움직임의 소리에 놀란 토끼, 다람쥐, 여우, 산새 등 숲속 동물들은 이리저리 뛰며 날아갑니다. 무채색으로만 표현된 겨울 숲이지만, 결코 심심하거나 단조롭지 않습니다. 숲의 정경, 수 많은 나무들, 숨어 있다가 등장하는 동물들, 그림에서 튀어 나올 것 같은 어린 말… 그림 텍스트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농부와 말은 아름다운 겨울의 숲을 멀리 바라봅니다. 그는 왜 멈춰 선 것일까요? 시인은 고요한 숲, 평온이 깃든 숲이 어둡고 꽁꽁 얼어붙어 있다고 말합니다. 


“한해 중 가장 어두운 저녁,

슬퍼 꽁꽁 얼어붙은 호수 사이에 서서“


과연 그는 숲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시가 말해주지 않는 행간을 그림이 채우며 서사를 이끌어 갑니다. 농부는 숲속 동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차에서 건초 덤불과 곡식 통을 품에 가득 꺼내 옵니다. 숲은 얼마나 고요한지 말에서 흔들리는 방울 소리와 바람소리, 폴폴 날리는 눈송이 소리까지 들릴 정도입니다. 비현실적으로 확대되어 표현된 눈의 결정체 뒤로 보이는 모자를 눌러쓴 농부의 입가는 미소를 머금고 있습니다. 어느새 소리 없이 건초 더미 주위로 숲속 동물들이 몰려왔습니다. 화자는 말의 고삐를 쥐고 흐뭇한 표정으로 몰려드는 동물들을 바라봅니다.


“숲은 무척이나 아름답고 어둡고 깊지만”


어둡고 깊은 숲에 홀로 있다면 두려울 것 같지만 시인은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숲에 더 이상 가만히 머물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난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시만으로는 그 약속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림작가는 상상력으로 약속의 정체를 그려냅니다. 그림 텍스트는 시인의 집, 사랑하는 가족과 만나는 장면으로 향합니다. 모든 일을 마친 후, 나이든 농부는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가 있는 그곳, 쉼과 안식이 있는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숲속 동물들을 뒤로하고 다시 어두워진 숲길을 향해 묵묵히 나아갑니다. 


눈보라 속으로 묵묵히 가야 할 길을 가는 장면으로 그림책을 맺는 장면은 말할 수 없는 뭉클함과 여운을 남깁니다. 그는 편안한 잠자리에 눕기 전에 지켜야할 약속을 따라 어둡고 눈보라치는 인생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겠지요. 

로버트 프로스트는 시인으로서의 명성과는 달리 한 사람으로서 고독하고 외로운 길을 걸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병으로 아버지를 잃고 뒤이어 어머니와 자매 마저 잃었습니다. 결혼 후 가정을 꾸렸지만 아내와 자녀들 마저 정신증과 질병으로 떠나 보내야 했습니다. 그는 상실의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의 삶은 마치 홀로 숲길을 떠나는 나그네와 같았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우리에게 또다시 2023년 새해가 찾아왔습니다. 새해는 어쩌면 시인이 말하는 “한 해 중 가장 어두운 저녁”일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둡고 깊은 숲에서 멈추고 주저앉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각자 처한 상황은 다르겠지만 어린이는 어린이라 힘들고, 청년은 청년이라서 힘들고, 어른은 어른이라 힘들다고 합니다. 저마다 삶의 무게는 우리를 피곤하게 합니다. 나의 짐을 그 누구도 대신 져 줄 수도, 내가 해야 할 일을 누군가 대신 해 줄 수 없습니다. 그때에 묵묵히 눈보라 속을 걸어가는 마지막 대목은 우리에게 위로를 줍니다. 


“숲은 무척이나 아름답고 어둡고 깊지만

난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자리에 누우려면 한참 더 가야 하네.

한참 더 가야한다네.”


지켜야 할 약속을 바라보며,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 길을 멈추지 말고 담담히 걸어가라고 말하는 농부의 목소리가 들리는듯 합니다. 우리의 삶은 눈보라 치는 숲에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봄은 반드시 올 것이기에, 우리가 지금 걸어가는 어둡고 꽁꽁 얼어붙은 겨울도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시간일 것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1]  김난도 외, 『트렌드코리아 2023』, 미래의 창, 5-7쪽
[2]  콜린스 사전 발행사는 11월 1일 “전쟁과 인플레이션, 정치적 불안정을 견디며 살아가는 감정을 표현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2022년이 정말 얼마나 끔찍했는지 간결하게 압축한다”며 올해의 단어로 뽑았다고 <워싱터 포스트>가 보도했다. https://www.washingtonpost.com/lifestyle/2022/11/01/permacrisis-2022-word-year-collins-dictionary/


박혜련  | 더샘물학교

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교육 석사 학위를 마치고, 현재 더샘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기독교문화연구소 숨’에서 다음 세대를 위한 문화 연구와 부모교육 강사로 활동중이다. 또한 그림책 읽기를 통해 세대와 세대 간에 아름다움과 미덕이 전수 되길 꿈꾸며 그림책을 연구하며 그림책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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