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를리외르 아저씨』 “과거를 미래로 전해주는 손”

2022-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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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를리외르 아저씨』 "과거를 미래로 전해주는 손"




최근 국내 그림책 시장에 한달에 적게는 60여권에서 많게는 100권 이상의 신간이 매달 나옵니다.  모든 분야를 통틀어 보면 얼마나 많은 신간이 매일 쏟아져 나올까요? 정보의 홍수 시대에 나에게 맞는 책을 찾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책 한권을 깊이 음미하며 읽기 보다는 책을 리뷰해주는 유투버(일명 북뷰버)의 정리로 책 내용을 파악하거나 그 달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뒤적이며 유행하는 책에 대한 정보를 얻습니다. 책을 쓰는 작가나 출판업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기가 좀 있다 하면 비슷한 종류의 책들이 무수히 나오고, 인기 작가들도 신간을 금새 선보입니다. 반면에 반짝 나왔다가 사라지는 책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책의 유통의 속도는 마치 타임랩스 기법으로 촬영된 영상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빠르게 흘러가는 화면 속에 갑자기 슬로우 모션이 나타난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천천히, 한 장면 한 장면이 아주 느리게 흘러간다면 어떨까요? 고요함 가운데 숨을 죽이며 보게 되겠지요. 시간이 멈춘 듯, 책에 대한 이야기 속에 유구한 역사의 숨결을 느끼게 해주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읽으면 당장에라도 종이책의 냄새를 맡고, 오래된 고서(古書)를 손으로 넘겨보고 싶게 하는 그램책, 바로 이세 히데코의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입니다.

이세 히데코는 스케치 여행을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며 실제 사건에 충실한 현장주의 작품을 많이 썼습니다. 일본에서 일어난 대지진 피해자를 위로하기 위해 열렸던 ‘1000인의 첼로 콘서트’를 소재로 한 『천개의 바람 천개의 첼로』(2000)라는 그림책 이후 음악, 나무, 생명은 그녀의 작품 테마였습니다. 또한 고흐와 겐지를 사랑하여 일평생 연구했고, 고흐의 해바라기와 삶의 흔적을 찾아 다니며 영감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고흐의 마지막 여생을 보낸 프랑스를 특별하게 생각하여 방문했습니다. 이세 히데코가 파리에서 도시를 걷던 중 작은 뒷골목 창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녀는 보는 순간 책과 관련된 창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리창 너머로 한 할아버지가 실을 가지고 무엇인가 수작업을 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도쿄에 돌아온 후에도 그 창문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창문 안에 무엇인가가 있어, 그 할아버지를 만나야 겠어’라는 생각으로 다시 파리로 떠났습니다. 그렇게 지낸 파리에서의 2년간의 시간을 통해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파리 여정과 를리외르 아저씨와의 만남, 그림책의 스케치의 과정은 그녀의 여행 스케치 에세이 『여행하는 화가, 파리에서 온 편지』(1) 에 담겨 있습니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를리외르의 모습이 자신의 이상향이라고 고백할 정도로 책을 고치는 노인의 삶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2).  


책의 겉싸개는 푸른 계열의 아카시아 나무로 시작합니다. 겉싸개 정 중앙의 책등을 기준으로 나무둥치가 자리잡고 앞과 뒤표지로 큰 가지를 드리웁니다. 책표지의 남색빛이 도는 아카시아 나무 아래로 치마를 입고 나무와 같은 색으로 작은 소녀의 실루엣이 보입니다. 소녀 다리는 어딘가로 뛰어가고 있습니다. 표면이 울둥불퉁한 이 나무는 수령이 400년된 아카시아 나무로 이세 히데코가 머물던 아파트 창문에서 보였다고 합니다. 매일 창문에서 아카시아 나무를 바라보면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도 보였고, 발의 수만큼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 소피에 대한 착상은 아카시아 나무 아래를 달려가는 소녀의 발로부터 얻었다고 합니다.


겉싸개를 벗겨내면 전혀 다른 스타일이지만 싸개와 통일감 있는 톤의 코발트블루의 표지에 흰색 분필로 책을 다듬는 손이 거칠게 스케치 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책은 손의 장인이 책을 좋아하는 소녀를 위해 책을 고쳐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소녀는 늘 손으로 책을 안고 다닙니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것은 손 뿐이 아니라, 겉싸개의 400년 된 아카시아 나무입니다. 이 아카시아 나무가 있기에 책을 고치는 400년의 를리외르 전통 문화가 있고, 그 사이의 무수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아카시아 나무는 고정된 장소와 시점에서 아저씨와 소피의 나이를 넘어 책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를 보고 있는 증인입니다. 겉싸개의 나무가 포개지는 위치의 표지에는 아저씨의 손이 있습니다. 장인의 손이 하는 일과, 나무로부터 나온 종이가 책이 되어 담고 있는 인류의 지혜, 그리고 험난한 세월 속에 한결같이 같은 자리를 지키며 가지를 드리운 아름드리 나무. 그리고 한권의 그림책을 위해 오랜 시간 여행을 다니며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갔던 작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과거의 아름다운 것이 미래로 전수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옅은 레몬빛의 면지에는 옛날 방식의 표지 장식이 금장 대신 흰색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판권면 하단에는 를리외르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를리외르’는 과거에 책을 수선하는 작업으로 중세시대부터 있어왔고, 예술 제본이 발달했던 프랑스에는 지금도 있답니다. 표제지 오른쪽 면에 벽에 걸린 ‘RELIEUR’ 철제 펜던트 간판이 그림책의 시작을 알립니다. 첫 장은 파리 어느 도시의 아파트단지 풍경이 펼친면에 가득 담겨 있고 앞쪽으로 나무의 가지가 아파트를 향해 뻗어 있습니다. 잘 찾아보면 왼쪽 아파트 테라스에 파란옷을 입은 꼬마 아이와 오른편 테라스에 파란 물뿌리개를 들고 화초에 물을 주는 어른이 아주 작게 보입니다. 건물들의 구조는 정확하게 표현이 되어있으나 스케치의 선들이 흐릿하게 남아 시간을 정지시키는 것 같으면서도 지금 바로 움직이는 것 같은 효과를 줍니다. 이세 히데코 만의 푸른 톤의 부드러운 색조로 입힌 수채화 그림은 아침 시간의 투명함을 더해줍니다. 앞으로 펼쳐지는 모든 장면 하나 하나는 소피와 아저씨의 발걸음에 따라 각각 장면이 전개됩니다. 


그 날 아침 소피가 가장 아끼는 식물도감이 망가져 버렸습니다. 소피는 책을 들고 해결하기 위해 집을 나서고 아저씨는 계단을 내려가며 어디론가 향합니다. 소피는 책방에 들려 새로 나온 식물 도감을 훑어보지만 어떤 책도 자신의 소중한 책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쉽게 물건을 쓰다 버리고 기분 좋게 새것을 사는 우리의 모습과 참 다릅니다. 그 시각 아저씨는 우체국에 들리고 상점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빵을 사서 발걸음을 옮깁니다. 소피가 책을 고치고 싶은 마음 하나로 애타게 도시를 헤매고 있을 때 누군가가 를리외르를 찾아가라고 합니다. 이후부터 소피의 위치는 오른편으로 아저씨는 왼편으로 바뀝니다. 골목길을 지나 펜던트 간판이 달린 상점에 도착합니다. 소피는 창문 안을 들여다 보고, 아저씨는 문을 열다가 눈이 마주칩니다. 이제 두 사람은 식물도감을 중심으로 한 장면 안에 함께 들어옵니다. 소피의 눈에 아저씨의 작업실은 정리되지 않고 잡동사니로 가득해 보이지만, 그 공간에 필요 없는 물건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랜 세월을 견딘 옛 물건들로 가득합니다. 


이 순간을 위해 글 텍스트는 참고 기다렸다는 듯이 두 사람의 대화형식으로 작업 공간을 가득 채웁니다. 책을 고치는 순서를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아저씨와는 대조적으로 재잘재잘 자기 이야기를 하며 공방의 신기한 물건들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뒤적이는 소피의 모습에서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의 모습을 봅니다. 책을 뜯어내 다시 꿰매고 고치는 아저씨를 소피는 졸졸 따라다니며 떠듭니다. 저자는 를리외르의 일이 생소한 독자들을 위해 책 수선 과정을 자세히 스케치하고 친절하게 손 글씨로 설명을 덧붙입니다. 일차적인 작업을 마친 후 소피와 아저씨는 큰 나무의 가지가 드리워진 공원 벤치에서 빵을 먹습니다. 아저씨는 소피에게 아카시아 나무가 400년이 되었고, 를리외르라는 일도 400년 동안 이어져 왔다고 말해줍니다. 



를리외르 아저씨의 모습은 구텐베르그 인쇄 기술이 나오기 전까지 성경을 손으로 필사하고 제본하며 지켜왔던 사람들을 연상하게 합니다. 중세 유럽에서 수도승들이, 16세기 이후 왕립 도서관 소속인 ‘를리외르’들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책을 지켜왔습니다. 인류를 향한 창조주의 편지는 역사 속 나무옹이 손들에 의해 지금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그들은 과연 어떤 마음으로 그 일을 해왔던 것일까요? 

시간이 멈춘 것처럼 옛날 방식 그대로 묵묵히 책을 만져온 를리외르 아저씨는 자신에게 이 일을 물려준 아버지의 손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을 기억합니다.

“를리외르의 일은 모조리 손으로 하는 거란다. 실의 당김도, 가죽의 부드러움도, 종이 습도도, 재료 선택도 모두 손으로 기억하거라. 책에는 귀중한 지식과 이야기와 인생과 역사가 빼곡히 들어 있단다. 이것들을 잊지 않도록 미래로 전해 주는 것이 바로 를리외르의 일이란다.

… 이름을 남기지 않아도 좋아. 얘야, 좋은 손을 갖도록 해라.” 

그들은 역사 속에 사라져 가고 있지만, 그들의 손으로 매만졌던 책들은 지금까지 전해 옵니다. 그들의 간절함과 숭고한 정신이 우리의 가슴 속에 진(眞), 선(善), 미(美)의 빛으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1) https://blackbirdbooks.jp/?pid=145364749
(2) https://www.mitsumura-tosho.co.jp/kyokasho/s_kokugo/interview/ise/story2.html



  •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
  • 그림작가 이세 히데코/ 백순덕 감수·추천
  • 글작가 이세 히데코
  • 번역 김정화
  • 페이지 56 쪽
  • 출판사 청어람아이(청어람미디어)
  • 발행일 2007-09-10


박혜련  | 더샘물학교

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교육 석사 학위를 마치고, 현재 더샘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성서유니온 ‘큐티아이’ 집필진, ‘기독교문화연구소 숨’에서 강사로 활동중이며, 극동방송 마더와이즈 ‘그림책 속 이야기’ 출연 중이다. 그림책 읽기를 통해 세대와 세대 간에 아름다움과 미덕이 전수 되길 꿈꾸며 그림책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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