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의 그림읽기


교육의 위기에서 선생님 이미지

2025-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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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위기에서 선생님 이미지



교육의 시작과 현재


그림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육의 변천 과정을 짧게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고대는 플라톤의 아카데미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이온 같은 철학 학교가 있었으나 가르치는 형식은 철학적 멘토였다. 중세는 수도원이 성직자 양성을 위해 학문의 중심 역할을 했고, 12세기 이후 대학, 즉 파리대학, 볼로냐대학, 옥스퍼드대학 등이 생겨나면서 교육의 깊이가 더하였다. 그 중심에는 하나님에 대한 배움의 신학자 양성이 핵심이었다. 근대에 보편적 교육이 강조되고 종교개혁은 모든 사람이 성경을 직접 읽어야 한다고 보았다. 18~19세기 근대 국가의 등장은 공교육 제도를 만들고, 선생님이 교실에서 학생을 집단으로 가르치는 형태가 확립되었다. 또한 성경을 읽고 그 지식을 배우는 것은 이 당시에도 보편적이었다.

오늘날 종교가 떨어져 나간 학교는 그 자리에 인간 중심을 넣었고, 인본주의가 토대인 68혁명, 계몽주의는 포스트모던 조건에서 교육의 역할을 바꾼다. 성품을 없애고 지식에 몰두하던 시기를 지나, 이제는 학교에서 지식을 가르쳐 자유주의 엘리트를 양성하지 않고 체제의 ‘수행성(performity)’ 증대에 필요한 스킬을 다루는 전문가와 기술가 양성을 주장한다.

혼돈의 시기에 존 듀이의 아동중심 교육철학은 학교 커리큘럼의 기존체제를 전복시켰다. 지식과 지혜의 장소로서 학교가 아니라 즐거움이 수반되는 놀이학습의 장소로 만들었다. 자아가 스스로 학습하는 듀이의 이론은 1911년 소비에트 연방공화국(현, 러시아)의 칼루가 지역을 다녀온 후 “교육이란 공동체에서 아동의 삶을 조직하는 것”으로 “선생님의 임무는 아동이 힘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자연적 본능이 발현되도록 하는 것”이란 사실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 사실은 듀이가 쓴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인상(Impressions of Soviet Russia)>(1928)에 있다. 이에 영향을 받은 듀이의 진보 교육(progressive education) 운동은 선생님을 안내자, 조직자, 촉진자로 축소시켰다. 혁신적인 아동중심의 교육철학이 도입되었으나 기대와 다르게 학생들의 실력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문맹은 더 늘어났다.

듀이의 교육관은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다. 일반적으로 마르크스주의 교육 방식은 구성주의이며, 비수동적, 협력적, 비권위적 학습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아동중심 교육과 본질적으로 유사하다. 그러다 보니 아동중심은 지적으로 뛰어난 인격의 성장점을 독려하지 않고, 감각과 감정에 따른 즐거움에 더 큰 비중을 두게 한다. 이러한 이론적 주장은 오늘날 교실에서 선생님의 역할을 축소하게 했다. 오늘날 우리나라 2019 누리과정은 듀이의 아동 중심 놀이학습이다.

한나 아렌트는 아동중심 교육으로 저하된 학력을 교육의 위기로 지적한다. 서구사회는 한나 아렌트의 주장을 받아들여 자신을 더 잘 아는 “Who I am” 주장과 ‘환경’을 통해 세계를 아는 것, 특히 인공세계(artificial world) 제작으로 문화적 실제 세계를 구성하는 ‘행위’에 대한 주장을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선생님은 “매개자”로서 세계를 열정적으로 소개하여 성찰한 개인과 연결 짓는다고 본다. 교육으로부터 선생님은 더욱 멀어졌다.


그림책 속 선생님 이미지


그림책에 나타난 선생님 이미지가 어떠한지 궁금증을 품고 그림책들을 찾아보았다. 대형 포털 사이트에 ‘선생님 그림책’을 검색하고 만난 31권에서 선생님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뒤로 밀려난 선생님으로 27권이나 학교 이야기지만 존재감을 찾을 수 없는 선생님 그림책이 있었다. 이론가의 주장대로 그림책 속 선생님의 이미지는 배경이 되었다. 뒤로 밀려난 선생님에서는 공룡, 악마, 괴물.. 심지어 샌드위치가 선생님인 책들이 10권이 있었다. 특히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선생님은 악하게 변한 모습이다. 8권은 선생님의 얼굴이 없거나 한 장면에만 나오며 배경이 되었다. 선생님과 대화를 지속하는 그림책 역시 몸 일부만 나오는 정도이다. 5권은 학교 가는 길의 아이들 모습인데, 하나같이 학교는 싫은 곳으로 표현되고 가는 길에서 아이들의 상상이 더 가치 있어 보이며, 마지막 장에 선생님이 한 번 등장하고 끝난다. 4권은 조금 이례적으로 그림책에 로맨틱한 장면을 넣어 어린아이들이 서로 좋아하는 감정을 표현하였고, 어떤 그림책은 옷을 입지 않고 학교에 간 아이와 그날따라 앞으로 불러내 질문하는 선생님이 나와 당황스럽다. 다른 하나는 이와 달리 교육적이고 자상한 선생님 모습을 보이지만 아쉽게도 4권뿐이었다. 이 중 2권의 책을 자세히 보고자 한다.


그림책의 그림읽기

1. 실재하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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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한 그림책은 패트리샤 폴라코 글. 그림의 『고맙습니다, 선생님』이다. “그림책의 그림 읽기”를 위해 선생님의 얼굴표정, 옷과 태도, 학생과 상호작용이 그림에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중심으로 보는 것이 오늘의 선생님 이미지의 핵심이다.

표지는 책을 보며 심각한 표정의 소녀가 한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다른 한 손은 책 위에 올려놓고 있다. 소녀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표정은 다소 진지하다. ‘고맙습니다, 선생님’이라는 제목으로 보아 교실에서 수업 중으로 보인다. 어려움에 빠진 소녀와 “어떻게 도움을 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선생님의 모습이다.

그림책의 첫 장면은 할아버지가 식구들이 다 보는 앞에서 꿀 한 국자를 퍼서 조그만 책 표지 위에다 떨군다. 할아버지는 이제 막 일곱 살이 된 손녀에게 책을 건네며 “찍어 먹어 보렴!”이라고 권한다. 소녀는 손가락으로 꿀을 찍어서 먹고는 “달콤해요!”라고 한다. 식구들은 한목소리로 “맞다. 지식의 맛은 달콤하단다. 하지만 지식은 그 꿀을 만드는 벌과 같은 거야. 너도 이 책장을 넘기면서 지식을 쫓아가야 할 거야!”라고 말한다. 소녀는 이제 글을 읽을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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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면은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준다. 할아버지는 손녀에게도 지식이 달콤하다고 알려준다. 이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잠언 24장 13-14절이 다음과 같다.

 

 내 아들아, 너는 꿀을 먹으라. 그것이 좋으니라. 벌집을 먹으라. 그것이 네 입맛에 다니라. 지혜를 아는 것이 네 혼에 이와 같으리라. 네가 그것을 찾으면 보상이 있겠고 네가 기대하는 것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잠언 24:13-14)


말씀은 지혜(wisdom), 지식(knowledge)을 꿀과 비교해 영혼에 달콤하다고 은유하며, 그것이 내면에 주는 깊은 만족과 생명력을 상징한다. 이처럼 교육의 근원인 지식을 알고 지혜를 얻음은 성경 말씀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그림책은 첫 장면부터 이것을 강조하며 시작한다.

꿀을 먹은 막내딸 트리샤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글자 읽기는 느렸다. 빨강머리 오빠도 친구들도 격려하고 기다려주었다. 학교에 진학 해서도 여전히 책 읽기가 어렵고 스스로가 친구들과 ‘다르다’라고 느낀다. 그럴수록 트리샤는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다.

어느 날 할머니에게 자기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할머니는 트리샤가 매우 똑똑하고, 날렵하며 귀엽다고 격려한다. 그리고는 할머니는 풀밭에 트리샤와 누워 밤하늘의 별이 구멍이라며, 다른 세상에서 온 것들이라 알려준다. 그리고는 “우리 모두 언젠가는 저세상으로 가야 한단다. 풀포기를 꼭 붙들어야 해. 땅 위로 냉큼 들려 저세상으로 올라가게 될지도 모르니까!”라며 마지막 때에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리라’(데살로니가 전서 4:17)라는 천국소망을 가르쳐준다. 며칠 뒤 할머니는 정말로 떠나고, 할아버지도 떠나셨다. 트리샤는 학교생활이 더욱 힘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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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일상에서 트리샤의 스승이었다. 그들은 성경의 지혜로 삶을 살아감을 가르쳐주었다. 학교 교육뿐만 아니라 아이들은 삶에 대한 소망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말씀의 지혜를 알려주는 가르침의 필요성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트리샤는 글을 읽기 어려워했다. 수학도 마찬가지였고, 더하기를 한 번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자상하게 방법을 설명해주었지만, 트리샤는 자신이 벙어리 같이 느껴졌다. 트리샤의 선생님은 하얀 브라우스와 올린머리, 안경을 쓰고 진주 귀걸이와 목걸이를 한 매우 우아한 모습이다. 가슴에 스카프 브롯치를 단 선생님은 지긋이 트리샤를 바라본다. 시골학교에 있는 선생님일지라도 단정하고 우아함이 느껴지는 이미지이다. 그러나 트리샤는 자동차로 닷새를 달려 멀리 이사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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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교에서도 트리샤는 책을 읽으려면 언제나 말을 더듬었다. 운동장에서 남자아이들이 벙어리냐고 소리를 친다. 트리샤는 타는 듯한 눈물을 쏟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셨던 미시간의 시골집으로 너무나 돌아가고 싶었다. 그림에는 철창 너머 세 명의 남학생이 놀리고 트리샤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귀를 막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너무나 갸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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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샤는 더욱 학교 가기가 싫었다. 엄마에게 아프다고 핑계를 대거나, 점점 공상에 빠져들었고, 그림 그리기에만 열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5학년이 되었다. 학교에 새로운 선생님이 오셨다. 키가 크고 멋진 남자선생님 이었다. 옷을 아주 깔끔하게 차려입은 선생님을 모두 좋아했다. 늘 그렇듯 선생님의 아첨꾼인 스티비와 마리, 데이비와 마이클이 몰려와 선생님 주변을 채웠으나, 새로 오신 폴커 선생님은 아예 관심이 없어 보였다. 누가 똑똑하건, 누가 최고이건 상관하지 않은 듯했다.

그림에서 보듯 선생님은 단정한 짧은 머리에 수염도 없이 깔끔하게 면도를 하였고, 줄무늬 수트에 노란 셔츠와 파란 타이가 색의 대조를 이루며 잘 어울린다. 가슴에 카네이션 브롯지와 포켓에는 포켓 손수건이 타이색과 맞추어 꽂혀있다. 그리고 밝게 미소짓는 모습이 긍정적인 인상을 주며, 한 손에는 책을 들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연연하지 않은 모습이다. 바로 옆에 트리샤는 관찰하듯 폴커 선생님을 바라본다.

다음 장면은 트리샤가 앞에 나와 섰고 폴커 선생님이 그림을 들어 올려 친구들에게 보여주는 모습이다. 정장은 다른 색으로 바뀌어 다른 날임을 보여준다. 의자에 앉아 있는 아이 한 명이 손으로 그림을 가리킨다. 폴커 선생님은 트리샤가 그림을 그릴 때마다 항상 뒤에 서서 속삭였다. “대단한데… 아주 훌륭해. 넌 네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고 있니?”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하자 트리샤를 놀리던 아이들조차 앉은 자리에서 몸을 돌려 그림을 보았다. 다음 날 트리샤는 ‘샬롯의 거미줄’ 한 페이지를 더듬더듬 읽어 내려갔다. 아이들은 낄낄거리기 시작하자 폴커 선생님은 “그만! 여러분 모두가 다른 사람을 평가할 만큼 완벽해서 지금 트리샤를 흉보고 있는 겁니까?”라고 지적했다. 이 훈계는 듣는 사람에게 위화감을 주지 않으며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적절함이 있었다. 선생님은 성품까지 함께 가르치셨다.

그 이후로는 아무도 크게 소리내어 웃지 않았고, 놀리지 않았지만, 에릭은 달랐다. 2년 내내 트리샤의 뒷자리에 앉아 아주 싫어하는 듯 행동했다. 트리샤는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트리샤는 그런 에릭을 피하기를 반복하고 이윽고 완전히 혼자가 된 듯했다. 트리샤가 행복한 시간은 폴커 선생님 주변에 있을 때뿐이었다. 하지만 폴커 선생님이 트리샤에게 잘하면 할수록, 에릭은 트리샤를 못살게 굴었다. 트리샤는 그를 피해 계단 아래 빈 공간에 숨었다.

어느 날 에릭이 트리샤의 비밀 장소를 따라와 비웃었다. 트리샤는 팔 속에 고개를 파묻고 몸을 공처럼 둥글게 웅크렸다. 그때 갑자기 발소리가 났다. 폴커 선생님이었고 에릭을 교무실로 데려갔다. 선생님은 다시 돌아와 트리샤를 안심시키고, 이유를 물었다. 트리샤는 모르겠다고 어깨를 으쓱했다. 트리샤가 보기에, 폴커 선생님은 트리샤가 글을 읽을 수 있다고 믿는 게 틀림없었다. 트리샤는 친구가 읽은 것을 기억하거나, 폴커 선생님이 한 문장씩 읽어주면 똑같이 따라 했다. 선생님은 잘했다고 말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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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 폴커 선생님은 트리샤에게 수업이 끝나면 남아서 칠판 닦는 걸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날 칠판을 닦으며 선생님이 내기를 제안한다. 선생님이 글자를 읽으면 젖은 스펀지로 칠판에 글자를 쓰는 것이다. 트리샤는 열심히 글자를 썼다. 칠판은 온통 물에 젖어 엉망이었다. 트리샤는 도망가고 싶었다. 트리샤는 흐느껴 울었다. “가엾은 트리샤. 네가 벙어리라고 생각하는구나, 그렇지? 네가 그렇게 쓸쓸해하고 두려워하다니, 내 마음이 참 아프구나. 하지만 트리샤, 넌 이걸 모르고 있구나. 너는 숫자나 글자를 다른 사람하고는 다르게 보고 있어. 너는 이때까지 학교를 죽 다니면서, 그 많고 많은 좋은 선생님을 놀렸구나!” 선생님은 트리샤를 보고 씩 웃었습니다. “그건 영리하고, 똑똑하고, 그런 용기 있는 아이만이 할 수 있는 일이란다.” 그리고나서 선생님은 “트리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어. 넌 읽을 수 있어. 틀림없어.”라고 격려한다. 이후 트리샤는 폴커 선생님과 독서 지도 담당 선생님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책 읽기를 수업하며 마침내 한 문단을 다 읽었고, 그 글이 무슨 뜻 인지도 모두 이해했다.

그 날 밤, 트리샤는 집에 와 거실로 가서 선반에 할아버지가 몇 년 전에 보여주었던 책을 찾았고, 표지에 꿀을 발라 달콤함을 맛보았다.


   “꿀은 달콤해. 지식의 맛도 달콤해. 하지만 지식은 그 꿀을 만드는 벌과 같은 거야. 이 책장을 넘기면서 쫓아가야 얻을 수 있는 거야!”


트리샤는 행복의 눈물을 흘렸다. 너무너무 행복했다. 이 소녀는 학교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트리샤는 30년 뒤 폴커 선생님을 어느 결혼식장에서 다시 만났다. 지금 무슨 일을 하냐고 묻는 선생님께 나(트리샤)는 “어린이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폴커 선생님”하고 대답했다. 이 그림책을 만든 패트리샤 폴라코가 바로 그림책 주인공 트리샤인 것이다. 각 장면은 폴커 선생님의 생생한 표정과 선생님으로서 갖추어야 할 태도, 복장, 교실에서 행동, 학생과의 관계 등을 그림이 잘 보여준다. 실제로 있던 사실의 이야기는 학교와 학생, 선생님의 모습을 바람직하게 보여주었다.

지금껏 교육이 학습으로 변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선생님의 역할을 약화시키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를 선생님 중심의 학습이 전체주의와 같고, 획일적으로 성취(1등, 졸업장 등) 목표가 같으며, 목표를 획득하지 못한 사람들은 좌절과 멸시를 받고 적은 급여의 일자리를 얻는 등의 이분법적인 헤게모니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막시즘을 기반한 아동중심은 선생님이 보조자, 촉진자, 돌보는 자로 변화하게 했고, 선생님이 삼자로서 학생의 어려움과 지도를 위한 개입을 어렵게 했다. 교육을 받으며 상처받는 것은 아동권리에 위반되는 큰 사건으로 번져,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한 초등학교 선생님은 떨어진 교권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도 발생하게 되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은 이러한 모든 것을 종식시키는 내용이다. 선생님은 학생에게 필요한 것을 지도하고 그 감정과 어려움을 이해하면서 그것을 극복하도록 성장시킬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이것은 허구가 아닌 경험의 사실이라는 점에서 선생님을 정의하고 있다. 선생님은 지혜와 지식의 중요성뿐 아니라 그것을 습득하는 과정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지식의 중요성을 알려주었다면, 아이가 지식을 알아가도록 지도하는 과정에 선생님이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학업의 과정에서 교사의 필요성이다.


2. 이론가들이 추구하는 허상의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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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함께 볼 그림책은 사비나 콜레로도 글, 세레나 마빌리아 그림의 『안녕, 나의 선생님』이다. 첫 표지에 그림은 오일파스텔로 그려졌으며, 따뜻한 노란 스웨터와 청바지를 입은 여자가 큰 꽃들을 모아 나무처럼 생긴 다발을 안고 있다. 꽃은 페이지의 반을 차지하며 발그레한 여자와 잘 어울린다. 제목에 선생님이 있으니, 여자는 선생님으로 추측할 뿐이다.

면지도 표지와 같은 매체로 세계 여러나라의 언어가 쓰인 책들과 메모지 편지, 기념품, 카메라, 지구본 등이 즐비하게 그려졌다. 첫 장에는 “학생이 없는 선생님이 있었어요.”라고 시작된다. 바닷가 마을 풍경이 멋들어진 그림에 유일한 사람 둘이 대화를 나눈다. 선생님은 어부에게 가르칠 학생이 있는지 묻는다. 어부는 학생들이 학교 대신 낚시를 간다고 한다. 선생님의 표정은 잘 볼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점찍힌 눈과 입만 보인다.

다음 장의 그림은 더 수려하고 아름답다. 돌과 그 사이로 핀 설강화가 돌 사이로 걸어가는 뒷모습의 선생님의 3~4배 정도로 크게 듬성듬성 나 있다. 설강화는 겨울에 피는 흰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눈풀꽃이라 한다. 돌 사이에 산양과 마멋이 여럿 흩어져 있고, 글에는 산으로 간 선생님이 마을 이장에게 가르칠 학생이 있는지 물으니 이곳에는 동물만 있다고 답했다. 어쩔 수 없이 선생님은 도시로 향한다.

여러 가지 아이들 용품들이 즐비하다. 이어폰, 고체물감, 시계, 테니스 공, 노트, 계산기, 안경, 자, 가위 지우개. 바나나, 연필과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다. 도시에 가니 별의별 학교가 다 있었지만,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고, 선생님은 학생을 찾을 수 없었다. 여기에 선생님은 그려지지 않았고 글로만 나온다.

길에 서 있는 선생님의 뒷모습은 커다란 배낭을 맨채 지도를 펼쳐 보고 있다. 바다, 산, 도시에서 학생을 찾진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한 명의 아이라도 만나면 내가 선생님이 되어줄거라고 생각했다. 다음 장에는 세계 여러 나라를 들러 기념품으로 사 온 듯한 물품들이 그려있고, 몇 해가 흘렀다고 적혀 있다. 세상의 절반을 누비며 다니느라 왜 여행을 왔는지도 까맣게 잊었다고 한다. 그녀의 그림은 여기에도 없다.

집 앞에 소년이 가방을 내려놓고 앉아 있다. 집으로 돌아온 선생님은 언제 떠났는지 아득할 만큼 오래되었다고 한다. 선생님은 집 앞에 있는 아이에게 무얼하는지 물었다. 선생님은 몹시 피곤했다는 글이 있지만, 여전히 그림에 모습은 없다.

다음 장에는 땅과 바다와 산이 펼쳐지고, 여러 나라에서 봄 직한 집들이 한 채씩 그려졌다. 선생님은 뒷모습으로 작게 그려있는데, 같은 옷, 같은 배낭, 옆에는 늘 함께한 강아지가 있다. 글은 “선생님을 찾는 중이예요!” 아이가 외쳤다. “아무리 찾아도 없어요” 선생님은 도와줄 수가 없다며, 자신은 선생님이 아니라 여행자라고 대답한다. 아이는 여행길에서 보고 들은 걸 가르쳐달라고 요청한다.

다음 장면은 분홍의 하늘이 일출인지 일몰인지 모르겠으나 아름답게 펼쳐졌고, 하늘 아래는 대비되는 파란색의 바다와 땅의 배경이 있다. 오른쪽 지면 가득 하얀 새가 있고, 새의 등에는 작고 작은 선생님이 보인다. 글은 ‘망설이지 말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라고 하며,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지만 잊었던 것의 흐릿한 기쁨이 기억난다고 한다.

어린이 다섯이 있다. 서 있는 여자아이, 손잡은 남자와 여자아이, 그 뒤로 자전거를 타고 막 도착한 아이둘이 있다. 글은 ‘이야기에 이끌려 다가온 아이들’이라고 설명하고, ‘선생님은 아이의 옆에 털썩 앉아 “한번 해 볼게!”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라고 써있다. 그림은 선생님도, 이야기를 들려달라던 소년도 없다.

잔디가 무성하게 자란 정원에 앉아 선생님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모두가 귀를 쫑긋 기울인다. “우린 모두 한 반이에요!” 한 여자아이가 기분 좋게 손뼉을 치며 외쳤다. 넓은 잔디에 모여든 9명의 아이와 선생님이 옹기종기 그려져 있다. 선생님과 아이들은 미소 짓고 있다. 등장인물 모두 한가지 표정이다.

다음 장에는 왼편에 실제 하얀 꽃이 오른편에는 자신보다 크고 많은 꽃을 안고 있는 표지속 선생님 그림이 다시 등장한다. 이후 마지막 장면에는 여행가방 위에 앉은 선생님이 책을 보며 있고, “비로소 난 진짜 선생님이 되었어요.”라는 글이 있다. 선생님 뒤로 복잡한 지도가 양쪽에 붙어 있다. 선생님의 복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청바지에 노란 스웨터만 입고 등장한다.

『안녕, 나의 선생님』의 그림은 매우 아름답다. 그러나 주인공 선생님의 얼굴이 정확히 드러나는 것은 표지와 9명의 아이와 이야기를 나눌 때, 집에 돌아와 여행가방 위에 앉아 있는 모습에서만이다. 하지만 선생님의 표정은 하나같이 똑같다. 엷은 미소를 짓는 것, 그것뿐이다. 그림책은 처음 강, 산, 도시에서 아이들을 찾는 선생님을 작은 존재로 그려서 선생님의 진정한 의미가 없다는 은유를 보여준다. 학교에 물품은 있지만 아이들이 없다는 내용이 사실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참된 가르침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선생님의 얼굴은 그려지지 않았고, 뒷모습이나 작은 사람일 뿐이었다. 그 존재의 불확실성과 불완전함을 그림은 보여준다.

여행을 다녀온 이후에 선생님은 드디어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 그녀가 알려주는 것은 세계 여러 나라의 이야기이다. 그림책은 세계의 비젼을 원 월드로 보여준다. 하나의 세계만이 가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여러 나라에 대해 알아야 하고, 민족과 민족이 섞이는 세계화를 지향한다. 가치의 비중을 세계화(Globalization)에 둘 뿐이며 이 현상(process)를 통해 원 월드(One World)를 꿈꾸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평화나 인도주의 담론에 자주 사용되는 것으로 NGO단체나 종교, 환경운동에서 자주 등장하는 슬로건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교사로서의 철학도, 아이들의 성장도 없다.


그림책에서 사라지는 선생님


『안녕, 나의 선생님』을 교육철학과 함께 살펴본 바에 의하면 매우 실망감이 든다. 그림책의 그림은 점점 수려해지며 그 표현은 다정하게 보이는 데 집중하지만, 내용은 지식이나 지혜를 다루고 있지 않으며 어떠한 교육철학을 담지도 않는다. 그저 세계화의 흐름을 가치분별 없이 담아낼 뿐이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지만 한나 아렌트의 교육철학으로 살펴본다면 그것은 ‘인공세계(artificial world)’로 가득한 문화적 실제 세계를 연결 짓는 ‘매개자’로서의 선생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다만 아이들을 세계로 안내할 뿐임에도 진짜 선생님이 되었다고 강조하며, 선생님의 가치를 변모시킬 뿐이다.

반면 『고맙습니다, 선생님』은 지식과 지혜에 대한 가치를 꿀에 비유한 성경을 은유하였고, 그것을 찾아가는 것은 벌꿀의 노력과도 같은 것이란 가족들의 조언이 나온다. 지식의 가치와 그것을 대하는 태도를 가르친다. 선생님은 격식을 갖춘 의복, 깔끔한 머리와 수염이 없는 단정함으로 직업에 대한 태도를 보여준다. 더하여 선생님의 표정은 각 장면에 적절한 다채로운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안타까움, 급박함, 위로, 칭찬 등 그 표정은 선생님의 성품을 드러내며 인간으로서 좋은 가치를 전달한다. 학생이 변화할 수 있었던 것은 지식, 기술, 성품을 포함한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도서관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의 도움으로 글자를 읽고, 문장의 내용을 이해했을 때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학생은 자신의 지적 성장에 감격하는 메타 인지를 보여준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련의 과정과 성취하는 감동을 함께 담고 있다.

마무리하자면, 선생님의 가치는 어딘가 그럴싸해 보이는 세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참 배움을 위한 진정한 가르침에 있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겠다. 오늘날 선생님이 나오는 그림책에서 참 가르침이 사라지고, 주변으로 밀려난 선생님의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배움의 주체는 아이이며, 그 구성은 품성, 지식, 지혜와 발전의 근간이 되는 다양한 학습이 일어나도록 선견지명을 가진 교사가 준비하고, 가르치고, 관찰하며 세심하게 이끌어주어야 한다. 이러한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세계를 지향하는 문화 현상이 실제로 인간에게 필요한 선생님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으며 오늘날 교육의 위기를 재촉하고 있다. 교육은 다시 교사중심으로 돌아와야 더 나은 방향으로의 성장이 이루어지는 참 사람교육이 이루어질 것이다. 



[1] Greene. E. A. (2022) 기독교 세계관으로 가르치기. [Reclaiming The Future Of Christian Education : A Transforming Vision] (현은자 역) CUP (원본 1998)
[2] Lyotard, J. F. (1979) 포스트모던의 조건 [La Condition postmoderne: rapport sur le savoir] (유정완 외 역) 민음사 (원본 1992).
[3] Rogacheva, Y. (2016: 79). The Reception of John Dewey’s Democratic Concept of School in Different Countries of the World. Espacio, Tiempo y Education, 3(2). 65-87.에서 (인용 Dewey, J. (1928). Impressions of Soviet Russia. In Boydston, J. A. (Ed). John Dewy: The later work, 1925-1953, vol. 3. Carbonale: Southern Illinois University press, 1984.  http://dx.doi.org/10.14516/ete.2016.003.002.003

[4] Edmondson, T. H. (2006). John Dewey & the Decline of American Education: How Patron Saint Of Schools Has Corrupted Teaching & Learning. Intercollegiate Studies Institute.
[5] 마르크스주의와 아카이브 https://www.marxists.org/subject/education/index.htm?utm
[6] 박은주 (2023) 한나 아렌트, 교육의 위기를 말하다. 학습중심의 시대, 가르침의 의미는 무엇인가? 빈빈책방
[7]  나무위키. 서울서이초등학교 교사 사망 사건https://namu.wiki/w/%EC%84%9C%EC%9A%B8%EC%84%9C%EC%9D%B4%EC%B4%88%EB%93%B1%ED%95%99%EA%B5%90%20%EA%B5%90%EC%82%AC%20%EC%82%AC%EB%A7%9D%20%EC%82%AC%EA%B1%B4

[8] 박은주 (2023)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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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형  |  안산대학교. 경민대학교 겸임교수


그림책과 미술로 자신을 돌아보는 예술치유전문센터에서 센터장을 지냈고,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박사 학위가 있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환경에서 그림책과 예술의 역할을 학문적으로 탐구하고자 세계관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 안산대학교 언어치료아동보육과, 경민대학교 아동심리보육과에서 겸임교수로 강의하고 있습니다.  저서는 [아동과 우리사회] (2016), [Art Psychology : 직장인 마음을 읽다] (2019), [신앙이 자라는 그림책 읽기] (2024)이 있으며, 현재 '그림책세계관연구소' 이사이며, '한국기독교유아교육학회' 이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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