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학교 교육을 배워요 『존경합니다. 선생님』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히 13:17)

『존경합니다.선생님』 자세히 보기
패트리샤 폴라코(Patricia Polacco, 1944~)는 미국 미시간주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했고, 미술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창 시절 플라코는 난독증으로 글을 배우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짓궂은 아이들의 놀림 속에 좌절할 수도 있었지만, 열정적인 선생님들 덕분에 끝내 글을 읽고 그림을 그리며 꿈을 키울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림책 작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신 선생님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그림책에 담았다. 그녀의 그림책은 실제 경험에 기반하였기 때문에 그녀가 들려주는 생생한 이야기는 깊은 울림이 있다. 그중 <존경합니다. 선생님>은 혹독하지만 진심 어린 지도로 제자를 성장시킨 켈러 선생님에 대한 헌사이다. 글쓰기에 서툴던 소녀가 눈물로 쓴 글을 통해 처음으로 A를 받는 장면은,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지 되새기게 한다. 그녀는 켈러 선생님을 떠올릴 때면 언제나 가슴이 아릿하게 저려온다고 말한다. 폴라코의 가슴속에 특별하게 남아 있는 켈러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고약하기로 소문난 ‘마녀 켈러’ 선생님의 글쓰기 반 수업 첫날, 깡마른 체격의 노려보는 듯한 눈초리로 말하는 켈러 선생님의 엄포에 패트리샤는 잔뜩 기가 죽는다. 첫 번째 과제가 수필이다. 세 쪽 가득 채워 오고, 문법은 하나라도 틀리면 안 되고, 기한은 바로 내일까지다. 패트리샤는 최선을 다했지만 선생님의 혹평만이 이어진다. 패트리샤는 친구이자 멘토인 제빵사 슐로스 할아버지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 할아버지는 아들들이 사용했던 유의어 사전을 찾아주며 응원했지만 켈러 선생님의 수업은 날이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고 온갖 종류의 글쓰기 훈련이 이어진다. 패트리샤는 온 마음을 담아 글을 써 갔지만 선생님의 평가는 여전히 엄격하다. 마지막 기말 과제를 남겨 놓은 어느 날, 사랑하는 슐로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패트리샤는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그날 밤 패트리샤는 할아버지를 기억하며 정신없이 글을 쓰고 또 쓰고, 또 썼다. 과제를 제출한 며칠 뒤, 켈러 선생님께서 패트리샤를 부르셨다. 떨리는 가슴으로 교실에 들어서자, 켈러 선생님이 패트리샤의 두 손을 꼭 잡고, 끌어안으며 나직이 속삭이셨다. “슐로스 할아버지에게 바치는 글은 정말 놀라웠다. 모범으로 삼아도 좋을 만큼 말이다.” 패트리샤가 기대감으로 펼친 기말 과제 맨 위쪽에는 A라는 점수와 함께 빨간색 글씨가 적혀 있었다. ‘패트리샤, 맞춤법은 아직 손보아야 할 곳이 많지만, 낱말에 날개가 달려 있구나. 글쓰기 반 최초로 A 점수를 주마.’ 패트리샤는 지금도 슐로스 할아버지와 켈러 선생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찰 만큼 갖가지 낱말이 떠오른다고 한다.
패트리샤가 글을 배우기 힘들었던 시기를 지나 켈러 선생님을 만난 때는 고등학생 무렵으로 보인다. 어렵사리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된 패트리샤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소녀가 되었다. 글쓰기 수업 첫날, 켈러 선생님은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을 완전히 뜯어고쳐서 진짜 멋진 작가로 만들어 줄 생각이다”라고 엄포를 놓는다. 엄포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달콤하고 감사한 말씀 아닌가. 교육자라면 학생들의 방만한 것들을 바로 잡아 질서를 세우고, 학습을 증진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나라 공교육의 현실은 이와 정반대로 나아가고 있다.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서 선생님들이 학생과 학부모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교사로서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대한민국의 학교 교육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학교의 역할, ‘학생인권’ 폐기
오늘 우리의 학교 교육을 훈육, 과제, 시험이 사라진 ‘3無 교육’이라고 한다. 공교육이 이렇게 무너진 것은 ‘학생인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전교조식 교육관이 그대로 정책이 되어 학교 현장에서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참교육을 외치며 등장한 전교조는 ‘학생인권조례’를 만들어 내었고, 학교를 놀이 위주의 행복을 느끼는 곳이라고 선동하며 공부하지 않는 활동 위주의 학교로 바꾸어 버렸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교사와 학교의 역할은 지식을 전달하고,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이 되도록 돕는 것이다. 학생에게는 마땅한 과제와 시험이 있어야 공부가 이루어지며, 보편적 규범에 맞는 윤리 교육으로 지속적인 훈련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전교조식 참교육은 ‘학생인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들의 행동을 바로잡거나 훈육하는 일이 ‘인권침해’가 되고, 교사의 적절한 제재가 ‘학교폭력’이 되는 참담한 결실을 보고 있다. 켈러 선생님과 같은 열정으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아마도 민원과 아동 학대 신고에 시달리며 현실에 좌절하거나 그저 무기력한 한 명의 공무원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켈러’ 선생님들이 걱정을 내려놓고 오직 교육에만 힘쓸 수 있도록 학교에서 ‘학생인권’이라는 구호가 사라져야 학교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의 역할, ‘학교의 자율성’ 보장
평등을 강조하는 시대 퇴행적인 획일화 교육 정책은 국가 정체성과 경쟁력을 악화시키는 전교조의 만행 중 하나다. 학교에서 각 학생의 재능과 노력에 따라 격차가 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차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교조식 참교육은 시험이나 평가 자체를 회피하고, 형평성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열심히 공부한 학생이나 안 한 학생이나 차등을 두지 않는다. 이처럼 경쟁 없는 교육의 결과, 교사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학생은 제대로 배우지 않아 모두가 똑같이 공평하게 열심히 하지 않는 황량하고 무기력한 학교 분위기가 되었다. 결국 교육의 공정을 위한다는 명분이 무색하게도 학생들은 사교육 시장으로 몰려갔고, 2010년도부터 2024년도까지 사교육비는 지속적으로 상승해 왔다.”


놀랍게도 2025년 교육부 예산은 104조 8,767억 원이었고, 내년에도 증액 예정이라고 한다. 2025년 유·초·중·고 학생 수가 약 5,551,250명이라고 보도되니, 대략 일 인당 연 이천만 원 수준이다. 엄청난 예산을 들여 전교조식으로 운영한 결과 학생들이 떠나는 죽은 학교가 되어간다. 아이들이 학교로 돌아와 활기찬 학교가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학교 현장을 정부 주도의 통제에서 풀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작게는 선생님들의 수업에서, 크게는 학교 교육 과정까지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학생 개개인이 가진 재능과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다양한 학교들이 개척된다면, 이 분야만큼은 우리 학교가 최고라는 자부심을 갖는 학교와 선생님들이 세워질 것이다. 또한 바우처 제도(교육 예산을 학생 수대로 나눈 금액을 부모들에게 배분해 주고 부모들이 선택한 학교에 납부하는 방식)를 도입하여 학부모에게 선택권을 주어 다양한 형태의 학교 중에서 우리 아이에게 가장 적합한 학교를 사립, 공립 예외 없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학부모와 학생들은 켈러 선생님처럼 사명감을 가지고 과제와 훈련과 시험을 통해 가르치고 실력을 쌓을 수 있도록 훈육하는 선생님이 계시는 학교로 몰려갈 것이다.
심지어 대학도 획일화 교육의 연장선에 있다. 정부가 등록금을 동결한 대학에만 지원금을 주는 방식으로 16년째 등록금을 동결하여 대학 재정이 크게 악화되었고, 이는 대학의 연구 기능을 마비시켰다. 지원을 빌미로 대학을 통제하여 교육의 자율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대학은 대한민국의 상아탑이 되어 시대를 선도하고 전 세계 인재가 찾는 대학교로 수준을 높여가야 한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많은 대학이 재정의 어려움 속에 외국인 유학생들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따라서 교육의 수준도 크게 떨어지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국민이 낸 세금의 혜택을 외국인 유학생도 똑같이 받고 있어 내국인 역차별이 일어나고 있으며, 유학 비자 취득 후 불법 체류하는 비율이 급증하는 것 역시 사회적 병폐가 아닐 수 없다. 초중고를 비롯하여 대학도 자율성을 보장하여 교육 다양성과 우수성을 확보한 대학을 통해 각 분야 차세대 리더들을 양성하고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기반이 되길 바란다.
부모의 역할, ‘전교조’ 바로 알기
대한민국의 초·중·고 부모라면 학교와 자녀를 지키기 위해 무엇보다 전교조의 태생부터 바로 알아야 한다. 전교조는 1989년에 ‘참교육’을 내세우며 학부모의 지지를 받으며 창립했다. 그러나 ‘참교육’의 실체는 놀랍게도 ‘공산혁명교육’ 이었다. 전교조 규약 제2조는 ‘교육 노동자로서의 기본 권익을 바탕으로 민주교육 발전에 기여를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월드뷰 2024년 5월 호, 이계성). ‘참교육’ 구호가 민족교육·민주교육·인간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지만, 실제로 민족교육은 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반미·좌경적 교육이었고, 민주교육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민중민주주의, 즉 공산 혁명적 성격을 띤 교육이었으며, 인간화 교육은 북한식 연방제 통일을 지향하는 교육이었다. 이후 창립선언문이 이적 단체임이 밝혀져 강제 해산되었고, 주동자 700여 명은 파면, 해임되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에서 민주화란 이름으로 파면된 전교조 교사를 사면 복권했고, 1999년 김대중 정권이 전교조를 합법화시키면서 파면되었던 전교조 교사를 민주화 유공자로 둔갑시켜 연금까지 주었다.
전교조식 역사교육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북한을 합법적이고 정통성 있는 국가’로 묘사한다. 태극기를 분단의 상징이라 하여 철거하거나, 애국가를 친일 작곡가의 작품이라며 부르지 않게 하는 등의 행위가 여러 차례 보고되었다. 심지어 전교조 교사들에 의해 촛불집회, 퀴어축제를 다녀오면 봉사 점수를 준다거나, 국부 이승만과 같은 특정 정치 지도자에 대해 긍정적 발언을 하면 학생들에게 모멸감을 주는 등 이념적 편향이 강하게 드러났다. 결과적으로 지금 전교조는 학생들에게 대한민국의 건국과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사고를 심은, 반대한민국 세력일 뿐만 아니라 ‘학생인권조례’를 만들고 적극 추진하여 학교 교육을 망친 세력이다. 더 이상 학교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을 망가뜨리지 못하도록 전국 학부모가 깨어 있어야 한다.
교사의 역할, 마땅히 가르쳐야 할 교육의 회복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우리는 어려서부터 마땅히 기뻐해야 할 것에 기뻐하고, 마땅히 싫어해야 할 것에 괴로워하도록 길러져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교육이다”라고 했다. 올바른 교육은 보편적 규범에 맞는 마땅한 내용, 즉 인간다움의 원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원형, 가정의 원형,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선생과 학생의 원형 말이다. 그러나 전교조는 인간다움의 원형을 해체하고 마르크스주의 인간을 양성한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관계를 지배와 피지배로 규정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추동하여 적이 누구인지 인식하게 하고, 적들이 만든 문화를 해체하기 위한 집단적 투쟁을 하도록 의식화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다. 실제로 의식화 교육을 받은 홍위병들이 일어나 중국, 남미, 캄보디아, 러시아 등에서 수많은 지식인과 철학 사상을 파괴해 버렸고, 무차별 살육의 역사를 남겼다.
현재 우리 사회의 학교 교육은 이러한 마르크스주의 교육이 전교조에 의해 적극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교육의 회복은 이러한 사상적 왜곡을 바로잡는 일에서 출발한다. 교육을 망친 원인이 마르크스주의에서 나오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폐기한 반공교육과 사상교육을 다시 시작해야 하며,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와 자유민주주의, 올바른 경제관과 가정의 소중함을 가르쳐야 한다. 교사와 학부모는 학생과 학교를 지키는 파수꾼이다. 교사와 학부모가 존중하고 협력하여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놓지 않기를 기대한다.
마땅히 가르쳐야 할 교육의 핵심 영역을, 그림책을 통해 정리하였다.
1) 진화론과 창조론
→ ‘진화론’은 과학이 아니라 하나의 부정확한 가설일 뿐임을 가르쳐야 한다.
○ 진화론 그림책, 과학일까? 믿음일까?
○ <노랑이와 분홍이> : 노랑이의 ‘진화론’ & 분홍이의 ‘창조론’
2) 참된 자유
→ ‘자유’란 양도할 수 없는 천부 인권에서 기원하는 것이며,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질서 안에서 누리는 축복임을 가르쳐야 한다.
○ <물고기는 물고기야> : 경계 안의 자유
○ <자유를 향한 탈출> :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3) 대한민국 건국과 자유민주주의
→ 이승만 대통령이 세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건국의 의미를 가르쳐야 한다.
○ <딜쿠샤의 추억> : 해방 이후 기독교 선교사의 역사
○ <애국자가 없는 세상> : 가짜 평화주의 비판, 6·25 전쟁의 진실
○ <나무 도장> : 제주 4·3 사건 이해하기
4) 자유시장경제와 공산주의
→ 사회주의, 공산주의 체제의 위험성을 가르치고 자유시장경제가 성경적 경제관임을 가르쳐야 한다.
○ <유토피아> : 공유경제와 보편적 복지의 허상
○ <달구지를 끌고> : 기독교 세계관과 조화되는 자유시장경제
5) 젠더 이데올로기
→ 젠더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LGBTQ, 급진 페미니즘, 낙태, 피임, 성적 자기결정권 등 잘못된 ‘성교육’을 뿌리 뽑고, 보건·위생·생명·순결 등 올바른 성품교육을 가르쳐야 한다.
○ <줄무늬가 생겼어요> : 나다움으로 포장된 젠더 이데올로기
○ <줄리의 그림자> : 성인지 감수성 교육의 문제
○ <나다움 어린이책>의 원조는 독일 68 좌파 교육학
6) 결혼과 가정
→ 하나님이 설계하신 결혼과 가정의 소중함, 순결의 가치와 자녀 양육의 소중함을 가르쳐야 한다.
○ <우리는 가족> : 가족 해체로 가는 ‘다양한 가족’
○ <어린 엄마> : 미혼모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
○ <윌리엄의 인형> : 멋진 아버지가 될 윌리엄을 응원하며…
7) 도덕적 상대주의
→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도덕적 상대주의를 비판적으로 가르치고 절대적인 진리를 붙잡도록 가르쳐야 한다.
○ <너도 맞고, 나도 맞아> : 도덕적 상대주의 비판
8) 난민, 다문화, PC주의
→ 난민에 대한 편향된 인권과 다문화주의를 악용하는 중국과 이슬람을 가르쳐서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게 가르쳐야 한다.
○ <밀어내라> : 다문화주의의 모순과 친이슬람 그림책
9) 생태주의와 환경주의
→ 인간 문명을 거부하는 생태주의의 모순과 거짓 공포감을 조성하는 기후·환경 그림책의 오류를 바르게 알고, 자연을 두려워하거나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돌보는 청지기 태도를 가르쳐야 한다.
○ <얘들아, 기후가 위험해> : '탄소중립'의 허구와 문명을 거부하는 '생태주의'
○ <태풍이 찾아온 날> : 성경적인 환경관
30대부터 그림책을 읽으며 지낸 지 20여 년이 훌쩍 지났다. 모든 문화 장르를 통틀어서 그림책이야말로 가장 하나님의 진리에 근접한 매체였기 때문에 그림책이 전하는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 그림책은 진리 따위는 아무 관심 없는 예술가들을 위한 유희의 매체가 되어갔다. 그림책 장르의 외연적 확장에 박수만 치고 있을 수 없었던 결정적인 사건은 여성가족부가 진행한 ‘나다움 어린이책’ 사업이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영적 전쟁 한복판에서 치러지는 세계관 전쟁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앉은 자리에서 5분, 10분이면 읽을 수 있는 그림책은 어린이들에게 성경적 세계관을 가르치기 위한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성경적 세계관 교육 콘텐츠로서 그림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대를 이어 믿음의 진리 전쟁을 할 다음세대를 교육해야 한다. 초중고 과정에서부터 성경적 세계관으로 무장시켜서 대학과 사회의 혼란스러운 진리 전쟁을 뚫고 나갈 수 있는 다음세대를 키워야 한다. 너무 미약하지만 작은 힘이라도 보탤 수 있기를 바란다.
월드뷰 2026년3월호 - 이형우 (한남대학교 교수) '교육인가 사육인가' 중 발췌
프랑스의 철학자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은 “정직한 좌파는 머리가 나쁘고, 머리가 좋은 좌파는 정직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머리 좋은 좌파는 정치인이 되고 정직한 좌파를 선동하여 권력을 유지한다. 아직도 경쟁 없는 사회에서 살고 싶은 정직한 좌파가 있다면, 허황된 교육정책을 펼치는 머리좋은 좌파의 모순적 행각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경쟁 없는 ‘혁신’ 교육을 추진하는 데에 앞장섰던 한 좌파 교육감은, 자사고와 외고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가 자기 자녀를 외고에 입학시킨 것이 들통나 망신을 당한 바 있다. 반미를 외친 정치인 중 자기 자녀가 미국에 유학하거나 심지어 시민권자인 경우가 허다하니 말이다. 사실 경쟁은 좋은 것이다. 좌파가 장악하기 전 우리 사회에서 경쟁은 덕목(virtue)이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경쟁은 기회의 평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경쟁을 통해 자원을 배분하지 않는다면 좋은 것은 모두 힘센자가 가져가게 된다. 우리의 조선 시대가 그랬고, 지금의 북한이 그렇다. 권력을 가진 자가 좋은 것을 챙기는 것은 ‘특권’이지만, 경쟁에서 이긴 자가 좋은 것을 가져가는 것은 ‘공정’이다. 둘째, 경쟁이 있어야 욕구를 절제하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는 어린 시절 부터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성실하게 노력해야 한다고 배웠다. 성실한 노력은 놀고 싶은 욕구를 절제해야 가능하다. 지금 우리의 번영을 가져온 것은 공교육을 통해 몸에 밴 절제의 미덕이었다. 절제는 인간을 짐승과 구별되는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든다. 교육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스스로 배울 수 없는 고도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사회의 공통 규범을 내재화 하는 것이다. 교육의 이 본질적 목적 때문에 학교에 앉아 있는 동안 학생들이 힘든 것은 당연하다. 남의 머리에 있는 것을 내 머리에 넣으려니 힘들 수밖에 없고, 도덕을 내재화하려면 욕구를 절제해야 하니 힘들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치열한 경쟁은 이러한 교육의 목적을 달성하기에 매우 좋은 보조적 수단이 된다. 힘든 것을 참는 인내가 교육에 있어 필수적이라면, 경쟁에 이겨 좋은 것을 얻는다는 희망이라도 있어야 그 인내가 자발적으로 이루어질 것 아닌가. 루소와 마르크스의 소설에 감동한 피해망상 환자들이 교육계를 장악한 현재 우리의 교육은 본래의 목적을 상실한 채 ‘사육’이 되어버렸다. 현재 각급학교에서 시행되는 성교육은 교육 현장을 사육장으로 만든 대표적인 사례이다. 대체 왜 아이들에게 성행위와 피임의 방법을 가르친단 말인가? 우리가 대변보는 방법을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는 이유는 때가 되면 스스로 습득하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대변과 관련하여 가르쳐야 할 것이 있다면, ‘아무 데서나 대변을 보면 안 된다’라는 도덕규범 밖에는 없다. (최근 어떤 국가의 관 광객이 문화재에다가 대변을 보는 일이 벌어지는 걸 보면 학교에서 특별히 가르쳐야 할 규범인 것 같기도 하다.) 성교육 역시 마찬 가지이다. 때가 되면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것을 굳이 학교에서 가르쳐야 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성행위와 관련하여 가르쳐야 할 내용이 있다면 ‘아무하고나 성관계를 해서는 안 된다’라는 성도덕뿐이다.
월드뷰 2026년3월호 - 홍후조 (고려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교실 붕괴를 유발하는 과잉감정화 교육
오늘날 학교 교육에서는 온갖 감수성 교육, 학생 인권과 행복, 배려, 관용, 기분 맞추기, 고객 만족, 마음 챙기기 등이 인지와 이성 발달을 압도하고 있다. 최근 교육학 담론에서 제기되는 ‘과잉감정화 교육(over-emotionalization of education)’ 현상에 주목해 보자. 과잉감정화란 교육적 의사결정과 수업·평가·규율 집행 과정에서 감정 규범이 인지적·이성적 기준보다 과도하게 우선되어 수업의 정상적 진행이 어려운 현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향은 청소년기에 특히 중요한 논증·실증·오류 분석· 반증 훈련 등의 이성 수련의 기회를 제약하고, 교사가 교육적으로 필요한 판단과 조치를 주저하게 만들며, 학급의 규칙과 절차를 감정적 기준에 의해 빈번히 재조정하도록 만든다. 그 결과, 교실은 학습의 인지적 도전과 공정한 규칙이라는 공적 가치를 중심으로 돌아가기보다, 정서적 갈등 관리가 상위 목표처럼 작동하게 된다.
과잉감정화의 철학적 토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주의(deconstructivism)다. 근대 계몽주의가 지향해온 보편적 이성과 절대적 진리는 거대 담론의 폭력성으로 규정되어 해체되었다. 이 과정에서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객관적 판단기준은 상실되었고, 그 자리를 개인의 주관적 ‘느낌과 경험’이 차지했다. 교육 현장에서도 교사가 전수해야 할 보편적 가치와 지식의 엄밀성은 상대주의의 파도 속에 함몰되었으며, 이는 학생의 주관적 감수성을 그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인식론적 근거가 되었다. 학교에서 이성 수련을 위한 엄밀한 훈육은 불가능해졌고, 청소년기의 감정을 적절히 절제하고 승화시키는 대신 무분별하게 분출하게 만드는 정서적 방출 문화가 확산하였다. 이성이 주도해야 할 교육 현장에 정서 과잉이 유입되면서, 청소년들이 갖추어야 할 도덕적 영성과 합리적 이성 수련의 기회는 심각하게 위축되었다. 결국 감수성이 이성을 압도하는 ‘감수성 정치’가 교육 현장을 지배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변화는 학교를 이성적 배움의 장보다는 상호간의 정서를 관리하는 공간으로 변모시켰고, 갈등을 원만하게 중재하고 학생의 정서를 수용하는 ‘정서적 교감’이 교사의 핵심역량으로 변질되었다. 합리적 논증과 실증을 통해 감정을 절제하고 보편적 가치를 체득해야 할 교육 대신, 주관적 기분과 감수성, 인권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결국, 교사는 전문적 지도를 포기한 채 소극적 행정주의에 매몰되었고, 학생들은 이성적 성찰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감정의 파편화 속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관찰은 현재 학교 현장에서 교사들이 겪고 있는 무력감과 혼란이 단순한 개인의 문제를 넘어 시대적·구조적 위기임을 시사한다. 한국에서는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통해 과잉 감정화 교육이 제도적으로 안착하였다.
월드뷰 2026년3월호 - 정호용 (자유시민교육연구소 연구원) 공교육 회복을 위한 제언
오늘날 공교육은 더 이상 ‘무엇이 참인가’를 묻지 않고, ‘무엇이 유용한가’, ‘누가 불쾌해하지 않는가’를 먼저 묻는다. 이 변화는 우연이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이 오랜 시간에 걸쳐 사회 전반에 심어 놓은 인간관과 진리관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인 공리주의는 교사의 윤리를 ‘옳고 그름’의 문제에서 ‘유용성과 안전성’의 문제로 전환한다. 어떤 행위가 교육적으로 정당한지는 그것이 학생에게 얼마나 행복을 주는지, 갈등을 유발하지 않는지, 민원을 초래하지 않는지에 따라 판단된다. 배움은 반드시 즐거워야 한다는 명제가 교육의 도덕적 전제처럼 받아들여진다. 학생이 불편함을 느끼거나 부담을 느낀다면, 그 수업은 잘못된 수업으로 간주한다. 학습의 어려움, 긴장, 인내, 훈련은 교육의 필수요소가 아니라 제거해야 할 장애물로 취급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자유주의 신학이 하나님을 ‘위로만 주는 존재’로 재구성한 방식과 정확히 닮아있다. 그러나 배움은 본질적으로 불편함을 수반한다. 이해되지 않던 것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은 긴장과 노력을 요구하며, 성취는 훈련과 반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힘든 훈련과 노력의 과정을 뚫고 나와 진정한 성취를 이루었을 때 느껴지는 즐거움이 배움에서 오는 즐거움이고, 학생이 앎의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배움의 즐거움이다. 교육학이 이 사실을 외면할 때, 교육은 성장의 과정이 아니라 기분 관리의 기술로 전락한다. 결국 자유주의 신학에 영향을 받은 교육학은 가르침을 부정하고, 진리를 상대화하며, 즐거움을 절대화한다. 이러한 교육학에 의하면 학생은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가 아닌, 개인의 만족만을 추구하는 존재가 된다.
도덕 교육 역시 마찬가지다. 교육과정은 더 이상 절대적 도덕률을 가르치지 않는다. 대신 사회 정서학습, 공감 능력, 갈등 조정 능력과 같은 기능적 요소들이 도덕의 자리를 대체한다. 물론 타인을 배려하고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은 중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옳고 그름에 관한 판단을 대신하게 될 때 발생한다. 도덕은 진리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사회적 마찰을 줄이기 위한 기술로 전락한다. 이때 잘못된 행동은 ‘악’이 아 니라 ‘부적절한 선택’이 되며, 죄는 책임의 문제 가 아니라 정서 조절의 실패로 설명한다. 환경 교육에서도 동일한 패턴이 반복된다. 자연을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 자체는 정당하다. 그러나 오늘날 교육과정에 스며든 환경종말주의는 자연을 초월적 질서가 아닌, 인간이 전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이해한다. 아이들은 자연을 돌보는 청지기가 아니라, 지구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주체로 교육받는다. 이러한 교육과정은 필연적으로 개인적 특이성을 억압하고 정부가 정한 가치를 주입하게 된다.
| 임해영 | 그림책박물관 운영자 그림책을 역사적으로 정리하는 '그림책박물관' (picturebook-museum.com)을 운영하며, 그림책으로 생명을 살리는 매거진 '그림책 BASIC' (picturcebool-basic.com)을 통해 바른 성경적 세계관의 그림책을 연구하고 전하고 있으며, 좋은 그림책을 읽고 살펴볼 수 있는 'Cafe그림책박물관'이라는 북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
올바른 학교 교육을 배워요 『존경합니다. 선생님』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히 13:17)
『존경합니다.선생님』 자세히 보기
패트리샤 폴라코(Patricia Polacco, 1944~)는 미국 미시간주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했고, 미술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창 시절 플라코는 난독증으로 글을 배우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짓궂은 아이들의 놀림 속에 좌절할 수도 있었지만, 열정적인 선생님들 덕분에 끝내 글을 읽고 그림을 그리며 꿈을 키울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림책 작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신 선생님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그림책에 담았다. 그녀의 그림책은 실제 경험에 기반하였기 때문에 그녀가 들려주는 생생한 이야기는 깊은 울림이 있다. 그중 <존경합니다. 선생님>은 혹독하지만 진심 어린 지도로 제자를 성장시킨 켈러 선생님에 대한 헌사이다. 글쓰기에 서툴던 소녀가 눈물로 쓴 글을 통해 처음으로 A를 받는 장면은,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지 되새기게 한다. 그녀는 켈러 선생님을 떠올릴 때면 언제나 가슴이 아릿하게 저려온다고 말한다. 폴라코의 가슴속에 특별하게 남아 있는 켈러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패트리샤가 글을 배우기 힘들었던 시기를 지나 켈러 선생님을 만난 때는 고등학생 무렵으로 보인다. 어렵사리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된 패트리샤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소녀가 되었다. 글쓰기 수업 첫날, 켈러 선생님은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을 완전히 뜯어고쳐서 진짜 멋진 작가로 만들어 줄 생각이다”라고 엄포를 놓는다. 엄포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달콤하고 감사한 말씀 아닌가. 교육자라면 학생들의 방만한 것들을 바로 잡아 질서를 세우고, 학습을 증진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나라 공교육의 현실은 이와 정반대로 나아가고 있다.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서 선생님들이 학생과 학부모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교사로서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대한민국의 학교 교육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학교의 역할, ‘학생인권’ 폐기
오늘 우리의 학교 교육을 훈육, 과제, 시험이 사라진 ‘3無 교육’이라고 한다. 공교육이 이렇게 무너진 것은 ‘학생인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전교조식 교육관이 그대로 정책이 되어 학교 현장에서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참교육을 외치며 등장한 전교조는 ‘학생인권조례’를 만들어 내었고, 학교를 놀이 위주의 행복을 느끼는 곳이라고 선동하며 공부하지 않는 활동 위주의 학교로 바꾸어 버렸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교사와 학교의 역할은 지식을 전달하고,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이 되도록 돕는 것이다. 학생에게는 마땅한 과제와 시험이 있어야 공부가 이루어지며, 보편적 규범에 맞는 윤리 교육으로 지속적인 훈련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전교조식 참교육은 ‘학생인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들의 행동을 바로잡거나 훈육하는 일이 ‘인권침해’가 되고, 교사의 적절한 제재가 ‘학교폭력’이 되는 참담한 결실을 보고 있다. 켈러 선생님과 같은 열정으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아마도 민원과 아동 학대 신고에 시달리며 현실에 좌절하거나 그저 무기력한 한 명의 공무원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켈러’ 선생님들이 걱정을 내려놓고 오직 교육에만 힘쓸 수 있도록 학교에서 ‘학생인권’이라는 구호가 사라져야 학교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의 역할, ‘학교의 자율성’ 보장
평등을 강조하는 시대 퇴행적인 획일화 교육 정책은 국가 정체성과 경쟁력을 악화시키는 전교조의 만행 중 하나다. 학교에서 각 학생의 재능과 노력에 따라 격차가 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차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교조식 참교육은 시험이나 평가 자체를 회피하고, 형평성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열심히 공부한 학생이나 안 한 학생이나 차등을 두지 않는다. 이처럼 경쟁 없는 교육의 결과, 교사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학생은 제대로 배우지 않아 모두가 똑같이 공평하게 열심히 하지 않는 황량하고 무기력한 학교 분위기가 되었다. 결국 교육의 공정을 위한다는 명분이 무색하게도 학생들은 사교육 시장으로 몰려갔고, 2010년도부터 2024년도까지 사교육비는 지속적으로 상승해 왔다.”
놀랍게도 2025년 교육부 예산은 104조 8,767억 원이었고, 내년에도 증액 예정이라고 한다. 2025년 유·초·중·고 학생 수가 약 5,551,250명이라고 보도되니, 대략 일 인당 연 이천만 원 수준이다. 엄청난 예산을 들여 전교조식으로 운영한 결과 학생들이 떠나는 죽은 학교가 되어간다. 아이들이 학교로 돌아와 활기찬 학교가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학교 현장을 정부 주도의 통제에서 풀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작게는 선생님들의 수업에서, 크게는 학교 교육 과정까지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학생 개개인이 가진 재능과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다양한 학교들이 개척된다면, 이 분야만큼은 우리 학교가 최고라는 자부심을 갖는 학교와 선생님들이 세워질 것이다. 또한 바우처 제도(교육 예산을 학생 수대로 나눈 금액을 부모들에게 배분해 주고 부모들이 선택한 학교에 납부하는 방식)를 도입하여 학부모에게 선택권을 주어 다양한 형태의 학교 중에서 우리 아이에게 가장 적합한 학교를 사립, 공립 예외 없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학부모와 학생들은 켈러 선생님처럼 사명감을 가지고 과제와 훈련과 시험을 통해 가르치고 실력을 쌓을 수 있도록 훈육하는 선생님이 계시는 학교로 몰려갈 것이다.
심지어 대학도 획일화 교육의 연장선에 있다. 정부가 등록금을 동결한 대학에만 지원금을 주는 방식으로 16년째 등록금을 동결하여 대학 재정이 크게 악화되었고, 이는 대학의 연구 기능을 마비시켰다. 지원을 빌미로 대학을 통제하여 교육의 자율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대학은 대한민국의 상아탑이 되어 시대를 선도하고 전 세계 인재가 찾는 대학교로 수준을 높여가야 한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많은 대학이 재정의 어려움 속에 외국인 유학생들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따라서 교육의 수준도 크게 떨어지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국민이 낸 세금의 혜택을 외국인 유학생도 똑같이 받고 있어 내국인 역차별이 일어나고 있으며, 유학 비자 취득 후 불법 체류하는 비율이 급증하는 것 역시 사회적 병폐가 아닐 수 없다. 초중고를 비롯하여 대학도 자율성을 보장하여 교육 다양성과 우수성을 확보한 대학을 통해 각 분야 차세대 리더들을 양성하고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기반이 되길 바란다.
부모의 역할, ‘전교조’ 바로 알기
대한민국의 초·중·고 부모라면 학교와 자녀를 지키기 위해 무엇보다 전교조의 태생부터 바로 알아야 한다. 전교조는 1989년에 ‘참교육’을 내세우며 학부모의 지지를 받으며 창립했다. 그러나 ‘참교육’의 실체는 놀랍게도 ‘공산혁명교육’ 이었다. 전교조 규약 제2조는 ‘교육 노동자로서의 기본 권익을 바탕으로 민주교육 발전에 기여를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월드뷰 2024년 5월 호, 이계성). ‘참교육’ 구호가 민족교육·민주교육·인간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지만, 실제로 민족교육은 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반미·좌경적 교육이었고, 민주교육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민중민주주의, 즉 공산 혁명적 성격을 띤 교육이었으며, 인간화 교육은 북한식 연방제 통일을 지향하는 교육이었다. 이후 창립선언문이 이적 단체임이 밝혀져 강제 해산되었고, 주동자 700여 명은 파면, 해임되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에서 민주화란 이름으로 파면된 전교조 교사를 사면 복권했고, 1999년 김대중 정권이 전교조를 합법화시키면서 파면되었던 전교조 교사를 민주화 유공자로 둔갑시켜 연금까지 주었다.
전교조식 역사교육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북한을 합법적이고 정통성 있는 국가’로 묘사한다. 태극기를 분단의 상징이라 하여 철거하거나, 애국가를 친일 작곡가의 작품이라며 부르지 않게 하는 등의 행위가 여러 차례 보고되었다. 심지어 전교조 교사들에 의해 촛불집회, 퀴어축제를 다녀오면 봉사 점수를 준다거나, 국부 이승만과 같은 특정 정치 지도자에 대해 긍정적 발언을 하면 학생들에게 모멸감을 주는 등 이념적 편향이 강하게 드러났다. 결과적으로 지금 전교조는 학생들에게 대한민국의 건국과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사고를 심은, 반대한민국 세력일 뿐만 아니라 ‘학생인권조례’를 만들고 적극 추진하여 학교 교육을 망친 세력이다. 더 이상 학교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을 망가뜨리지 못하도록 전국 학부모가 깨어 있어야 한다.
교사의 역할, 마땅히 가르쳐야 할 교육의 회복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우리는 어려서부터 마땅히 기뻐해야 할 것에 기뻐하고, 마땅히 싫어해야 할 것에 괴로워하도록 길러져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교육이다”라고 했다. 올바른 교육은 보편적 규범에 맞는 마땅한 내용, 즉 인간다움의 원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원형, 가정의 원형,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선생과 학생의 원형 말이다. 그러나 전교조는 인간다움의 원형을 해체하고 마르크스주의 인간을 양성한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관계를 지배와 피지배로 규정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추동하여 적이 누구인지 인식하게 하고, 적들이 만든 문화를 해체하기 위한 집단적 투쟁을 하도록 의식화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다. 실제로 의식화 교육을 받은 홍위병들이 일어나 중국, 남미, 캄보디아, 러시아 등에서 수많은 지식인과 철학 사상을 파괴해 버렸고, 무차별 살육의 역사를 남겼다.
현재 우리 사회의 학교 교육은 이러한 마르크스주의 교육이 전교조에 의해 적극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교육의 회복은 이러한 사상적 왜곡을 바로잡는 일에서 출발한다. 교육을 망친 원인이 마르크스주의에서 나오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폐기한 반공교육과 사상교육을 다시 시작해야 하며,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와 자유민주주의, 올바른 경제관과 가정의 소중함을 가르쳐야 한다. 교사와 학부모는 학생과 학교를 지키는 파수꾼이다. 교사와 학부모가 존중하고 협력하여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놓지 않기를 기대한다.
마땅히 가르쳐야 할 교육의 핵심 영역을, 그림책을 통해 정리하였다.
1) 진화론과 창조론
2) 참된 자유
3) 대한민국 건국과 자유민주주의
4) 자유시장경제와 공산주의
5) 젠더 이데올로기
6) 결혼과 가정
7) 도덕적 상대주의
8) 난민, 다문화, PC주의
9) 생태주의와 환경주의
30대부터 그림책을 읽으며 지낸 지 20여 년이 훌쩍 지났다. 모든 문화 장르를 통틀어서 그림책이야말로 가장 하나님의 진리에 근접한 매체였기 때문에 그림책이 전하는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 그림책은 진리 따위는 아무 관심 없는 예술가들을 위한 유희의 매체가 되어갔다. 그림책 장르의 외연적 확장에 박수만 치고 있을 수 없었던 결정적인 사건은 여성가족부가 진행한 ‘나다움 어린이책’ 사업이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영적 전쟁 한복판에서 치러지는 세계관 전쟁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앉은 자리에서 5분, 10분이면 읽을 수 있는 그림책은 어린이들에게 성경적 세계관을 가르치기 위한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성경적 세계관 교육 콘텐츠로서 그림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대를 이어 믿음의 진리 전쟁을 할 다음세대를 교육해야 한다. 초중고 과정에서부터 성경적 세계관으로 무장시켜서 대학과 사회의 혼란스러운 진리 전쟁을 뚫고 나갈 수 있는 다음세대를 키워야 한다. 너무 미약하지만 작은 힘이라도 보탤 수 있기를 바란다.
임해영 | 그림책박물관 운영자
그림책을 역사적으로 정리하는 '그림책박물관' (picturebook-museum.com)을 운영하며, 그림책으로 생명을 살리는 매거진 '그림책 BASIC' (picturcebool-basic.com)을 통해 바른 성경적 세계관의 그림책을 연구하고 전하고 있으며, 좋은 그림책을 읽고 살펴볼 수 있는 'Cafe그림책박물관'이라는 북카페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