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그림책
생태 그림책에 대한 비판적 읽기(3) 『마지막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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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2025-02-24 23:34
저 할아버지는 하얀 머리로 뭔가 멋스럽게 그려졌지만,
그림책에서 할아버지의 삶을 보니
TV 프로인 "나는 자연인이다"가 생각나면서 혼자 웃었습니다.
(모든 아저씨들의 로망(?)이지만 아주머니들은 극혐 하신다는 그 프로..)
자연과 하나 됨? 자연과 하나 되는 삶보다, 인간이 인간 답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한 삶일텐데,
단순히 동물들과 자연에 해를 끼치지 않는 삶이 선한 삶이라고 이야기 하고
산업화의 결과물들은 악이라고 하는 책들을 보면서 이 세계관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스스로 "선"과 "악"을 정하기 시작한 타락의 결과물인 것 같습니다.
저는 자연과 동물들을 "선"으로 그리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플라스틱과 비닐을 "악"으로 그리는 건 더 이상하죠.
이 또한 미디어의 영향이겠죠; 마치 동물들의 생각과 말을 번역해 주는 것처럼 자막을 입혀서
동물들을 (인간보다 나은...) 선한 이미지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림책도 한 몫하죠. ㅎ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들의 공통점은
"진리"를 공격합니다. 진리가 존재하지 않거나, 틀렸다고 말하죠.
환경주의 그림책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서 세상을 다스리라고 명하신 것을 지워버리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를 지워버리고 싶은 거겠죠.
아직 환경 주의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없지만,
서평을 읽으며 힌트를 얻어 더듬어 찾아가는 느낌입니다.
베이직이 있어서 참 감사합니다. ^-^
그림책에서 할아버지의 삶을 보니
TV 프로인 "나는 자연인이다"가 생각나면서 혼자 웃었습니다.
(모든 아저씨들의 로망(?)이지만 아주머니들은 극혐 하신다는 그 프로..)
자연과 하나 됨? 자연과 하나 되는 삶보다, 인간이 인간 답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한 삶일텐데,
단순히 동물들과 자연에 해를 끼치지 않는 삶이 선한 삶이라고 이야기 하고
산업화의 결과물들은 악이라고 하는 책들을 보면서 이 세계관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스스로 "선"과 "악"을 정하기 시작한 타락의 결과물인 것 같습니다.
저는 자연과 동물들을 "선"으로 그리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플라스틱과 비닐을 "악"으로 그리는 건 더 이상하죠.
이 또한 미디어의 영향이겠죠; 마치 동물들의 생각과 말을 번역해 주는 것처럼 자막을 입혀서
동물들을 (인간보다 나은...) 선한 이미지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림책도 한 몫하죠. ㅎ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들의 공통점은
"진리"를 공격합니다. 진리가 존재하지 않거나, 틀렸다고 말하죠.
환경주의 그림책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서 세상을 다스리라고 명하신 것을 지워버리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를 지워버리고 싶은 거겠죠.
아직 환경 주의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없지만,
서평을 읽으며 힌트를 얻어 더듬어 찾아가는 느낌입니다.
베이직이 있어서 참 감사합니다. ^-^
hyojin2025-02-25 09:14
이 그림책을 보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제가 기억하고 있는 바는 투발루 섬과 같이 지구에서 사라질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한 자연을 보호하자. 그리고 갈 곳이 없어진 난민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이자.
라는 두 가지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표현했다고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생태 그림책은 자연을 보호하자는 큰 범주 안에 있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고 나니 청지기적 사명을 올바르게 받아들여 다스리고 지키는 것과 인간이 하는 모든 생산활동을 악으로 간주하고
결국 그것으로 인해 세상을 멸망할 것이라는 위기 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이 과연 옳은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문제의식을 갖는 것과 문제로 인한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겠지요.
바른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자연을 바라보고 바르게 다스리는 것은 어떤 것일까를 먼저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가치관을 아이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좋은 생태 그림책도 찾아봐야겠습니다.
라는 두 가지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표현했다고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생태 그림책은 자연을 보호하자는 큰 범주 안에 있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고 나니 청지기적 사명을 올바르게 받아들여 다스리고 지키는 것과 인간이 하는 모든 생산활동을 악으로 간주하고
결국 그것으로 인해 세상을 멸망할 것이라는 위기 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이 과연 옳은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문제의식을 갖는 것과 문제로 인한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겠지요.
바른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자연을 바라보고 바르게 다스리는 것은 어떤 것일까를 먼저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가치관을 아이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좋은 생태 그림책도 찾아봐야겠습니다.
김선옥2026-04-20 18:01
그림책 가운데 글 없는 그림책을 읽고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워 일부러 찾아 보지 않는 편이다. 그림으로만 전달하는 메세지를 이해하기에는 아직 이해가 부족하기도 그렇고 책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확실한 메세지(?)를 내가 잘 못 이해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이유가 크다. 그래서 이 책도 평론과 책을 계속 비교해 봤지만 책 속에 내용을 이해 하려면 아직 많은 공부를 해야 겠다고 느꼈다.
평론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면서 사람에게 문화명령을 내리셨는데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생육하고 번성하며 그 모든 것을 다스리는 권한을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사람을 동물과 평등한 존재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자연을 아름답게 가꾸고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자연과 일체하는 삶을 사는 것 만이 능사가 아니다. 밤새 돌아가는 공장이 결코 나쁜 것 만은 아니다. 그런데 요즘 환경에 대해서는 선 vs 악의 구조로 이야기 하며, 악하다고 치부하고 있는 것(예: 플라스틱 등)은 과도한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
결국 그리스도인은 올바른 기독교 세계관으로 이 세상을 이해해야 하며 아이들에게도 바른 세계관을 잘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에 하나님에 대한 지혜와 지식, 명철함이 다른 피조물보다 월등하며 결코 동등한 위치에 놓여 있을 수 없다. 그것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복'이기 때문이다.
평론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면서 사람에게 문화명령을 내리셨는데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생육하고 번성하며 그 모든 것을 다스리는 권한을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사람을 동물과 평등한 존재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자연을 아름답게 가꾸고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자연과 일체하는 삶을 사는 것 만이 능사가 아니다. 밤새 돌아가는 공장이 결코 나쁜 것 만은 아니다. 그런데 요즘 환경에 대해서는 선 vs 악의 구조로 이야기 하며, 악하다고 치부하고 있는 것(예: 플라스틱 등)은 과도한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
결국 그리스도인은 올바른 기독교 세계관으로 이 세상을 이해해야 하며 아이들에게도 바른 세계관을 잘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에 하나님에 대한 지혜와 지식, 명철함이 다른 피조물보다 월등하며 결코 동등한 위치에 놓여 있을 수 없다. 그것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복'이기 때문이다.
전보람2026-04-20 21:53
이상주의자(?)들의 착각 중의 한가지는 자연에서 살면 평화롭고 행복하고 인간으로서 본연의 모습으로 살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 나타나는 지방소멸만 보더라도 인프라 없는 곳에서는 살기 어렵고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볼 수 있음에도 말이다. 조막만한 천막을 치고 내추럴하지만 편안하게, 필요한 만큼만 자연의 산물을 얻어내어 소박하지만 배부르게 먹고, 자연만물과 하나 되어 소통할 사람은 없지만 외롭지는 않은 파라다이스는 이 지상에는 없다. 자연의 광활함과 때로는 모든것을 앗아가기도 하는 무서운 면은 어디가고 소꿉놀이하듯 인생을 쉽게 생각하는 모습이 매우 철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 점이 이 책에서 잘 드러나 보여 뒷 얘기가 무엇이든 너무 예상되었다. 티비를 보고 있다 자연인(?)과 마주하는 장면에서는 마치 그 티비를 보던 사람이 자연을 망치는 주범인 나 이고 이 자연이 파괴된것은 나의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언짢아졌다. 자연을 망치는 인간들에게 죄책감이 들게 하려는 대목이었던것 같다. 극단적 기후론자들은 이 자연이 망가지는 원인은 결국 인간이라며 인간수를 인위적으로 줄여야한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자연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가? 인간이 자연을 위해 존재하는가? 인간은 자연에게, 자연은 인간에게 어떤 존재인지 세계관이 확립되지 않는다면 기후론자들의 주장과 세뇌로 아이들의 인생을 낭비하게 될것이라는 생각에 경각심이 든다.
곽서연2026-04-20 23:32
요즘 초록초록한 나무들과 몽실몽실 피어있는 철쭉을 바라보며 산책하는 일이 참으로 감사하다. 거기에다가 뭔지는 모르지만 꽃향기가 콧속으로 스며들어 기분이 좋아질 때 자연이 있어 너무 좋다.
누군가 나에게 ~그러니 이 모든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산에 들어가서 마음껏 자연을 누리며 살아라~ 라고 한다면 바로 NO 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미 나는 문명의 혜택을 넘칠 만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문명을 벗어나서는 나의 생활을 할 수가 없다. 문명의 맛을 많이 보았다.
또한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도 충분히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생태주의자들이나 종말론자들도 문명을 누리며 살고 있다. 그런데 안 좋은 면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하는 것인가?
어느 운동가는 미국을 비판하며 안 좋은 면만 사람들에게 발설을 하는 듯하다.. 그런데 그의 자녀는 거액의 학비가 들어가는 아트스쿨에 다니게 했고 또 다른 운동가의 자녀도 미국시민권을 신청했다.
누군가 나에게 ~그러니 이 모든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산에 들어가서 마음껏 자연을 누리며 살아라~ 라고 한다면 바로 NO 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미 나는 문명의 혜택을 넘칠 만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문명을 벗어나서는 나의 생활을 할 수가 없다. 문명의 맛을 많이 보았다.
또한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도 충분히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생태주의자들이나 종말론자들도 문명을 누리며 살고 있다. 그런데 안 좋은 면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하는 것인가?
어느 운동가는 미국을 비판하며 안 좋은 면만 사람들에게 발설을 하는 듯하다.. 그런데 그의 자녀는 거액의 학비가 들어가는 아트스쿨에 다니게 했고 또 다른 운동가의 자녀도 미국시민권을 신청했다.
지민규2026-04-21 00:32
사람을 비롯해 모든 생물들은 피조물이지만 그렇다고 모두 같은 위계인 것은 아니다라는 것.
이런 세계관의 책들을 아이들이 접할 때, 이런 명확한 사람의 다른 피조세계에 대한 위치와 질서의 기준을 자녀들이 잘 갖추도록 가이드해주며 읽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구조와 분위기를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등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많이 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런 세계관의 책들을 아이들이 접할 때, 이런 명확한 사람의 다른 피조세계에 대한 위치와 질서의 기준을 자녀들이 잘 갖추도록 가이드해주며 읽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구조와 분위기를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등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많이 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생태 그림책에 대한 비판적 읽기(3) 『마지막 섬』
“그림책 베이직”의 <정보 그림책> 세션에서는 2024년 상반기 동안
생태 그림책에 나타난 종말론적 환경주의 시각을 비판하는 글을 연재하고자 한다."
『마지막 섬』 그림책 자세히 보기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의 유명한 저서 『침묵의 봄』(1962)은 미국의 생태주의 환경 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환경학 도서임에도 첫번째 챕터가 ‘내일을 위한 우화’라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바로 이 이야기에서 이 책의 제목이 지니는 의미를 알 수 있는데, 봄이 고요한 이유는 새들이 자취를 감추어서 새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이고,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몇 마리의 새조차 다 죽어가는 듯 격하게 몸을 떨었고 날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서 카슨은 세상이 이토록 비탄에 잠긴 것은 사악한 마술이나 악독한 적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 바로 사람들이 스스로 저지른 일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살충제의 해로움에 대해서 설명한다.
이와 같이 환경의 재앙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 문학적인 장치는 환경 디스토피아, 환경 아포칼립스(종말론) 등의 이름으로 문학 작품에서 사용되곤 한다. 이러한 이야기에는 독자들로 하여금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게 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으며, 특히 인간을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이 나타난다. 환경 종말론적인 내러티브에서는 인간을 어떤 존재로 바라볼까? 이 글에서는 환경 종말론 그림책의 인간관을 기독교의 인간관과 비교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마지막 섬
이지현 작가가 지은 <마지막 섬>(창비, 2021)은 글 없는 그림책이다. 앞표지와 뒤표지를 함께 펼치면 집 한 채와 여러 그루의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는 작고 푸른 섬에 한 노인이 서 있다. 그런데 노인의 발목까지 물이 차올라 있고, 섬이 일부 잠겨 있으며 얼굴을 찡그린 노인은 손을 이마에 대고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면지를 넘기면 표제지가 나오기 전에 한 장면이 나타나는데 거기에는 물에 잠기기 전의 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표제지를 지나면 노인이 기지개를 켜며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상의는 입지 않고 하얀 바지만 입은 노인은 망태기를 두르고 편안한 표정으로 물속으로 들어간다. 물속에서 통발을 건지는 노인 주변으로 색색깔의 물고기들과 해초들이 아름답게 어우러지고 있다. 노인은 잡은 물고기를 말리는 한편 수평선 너머에서 올라오는 검은 연기를 일그러진 얼굴로 바라본다. 섬 안쪽으로 걸어 들어간 노인은 숲에서 새와 곤충, 풀과 나무, 열매 사이에서 다시 편안한 표정을 찾게 된다. 새와 곤충, 동물들은 익숙하지 않은 외양을 하고 있어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노인이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노인과 열매를 나눠 먹거나 노인의 가무에 동참하여 즐겁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보아서 노인과 이 섬의 자연은 친밀한 관계에 놓여 있는 듯하다. 노을이 질 때쯤 노인은 집으로 돌아온다. 노인의 집 안에는 단순하고 간소한 살림이 몇 가지 있을 뿐이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집이 물에 잠기고, 물이 발목까지 차오르자 노인은 당황한다. 노인은 큰 돌들을 집 주변에 쌓고, 섬 안쪽 숲의 상황도 살펴본다. 노인은 전 날과 다른 풍경에 속이 상한 듯 주변을 둘러 보다 작고 붉은 동물을 구조하여 집으로 돌아온다. 노을이 지는 풍경과 함께 노인은 수평선 너머로 검은 연기가 더 많아진 것을 바라본다.
다음 날, 물은 더 차올라 집의 반이 물에 잠겼고, 노인은 나무를 이용해 집을 물 위로 세우지만 검은 연기는 더 많아졌다. 밤이 되자 날씨마저 악화되어 큰 파도에 노인의 집이 휩쓸린다. 노인은 작고 붉은 동물을 품에 안고 작은 배에 몸을 의지해 바다를 건넌다. 노인이 노를 저어가는 곳은 검은 연기를 내뿜는 공장이다. 궂은 날씨에 밤도 깊었지만 공장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고 검은 연기도 쉬지 않고 나오고 있다.
그런데 노인이 이 공장을 향해 노를 저어가는 장면에는 이전 장면들과는 달리 검정색 테두리가 그려져 있다. 그 다음 장면은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와 검은 연기를 내뿜는 공장의 풍경이 검정색 테두리 안에 그려져 있는데, 그림 곳곳이 가로로 흔들리며 뭉개져 있다. 다음 장면을 보면, 지금까지 우리가 본 장면이 커다란 텔레비전의 화면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소파에 앉아 그 화면을 보고 있던 젊은 남자는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을 끈다. 젊은 남자는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하며 소파에서 일어나 걸어가는데 문득 문 밖에서 소리가 난다. 젊은 남자가 문을 열자 문 밖에는 텔레비전 화면 속의 그 노인이 서 있다. 그림책의 왼쪽 면에는 잠옷을 입은 젊은 남자가, 오른쪽 면에는 비에 흠뻑 젖은 채 작은 동물을 어깨 위에 올린 노인이 그려져 있으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둘 사이를 가로지르는 제본선은 두 사람의 ‘다른’ 삶을 더 분명하게 구분 지어준다.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현재
젊은이와 노인은 도대체 어떤 관계일까? 일단, 노인은 그동안 검은 연기를 눈여겨봐 왔고, 섬과 집이 물에 잠긴 원인을 검은 연기에서 찾는 듯 보인다. 따라서 노인은 이 일련의 일에 대해 따져 묻기 위해 이 집을 찾아왔을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노인의 표정에 화난 감정보다는 당황스러운 감정이 읽혀지는 점이 의외이다. 특히 두 사람의 머리 모양이나 눈, 코, 입 등 외양이 참으로 닮아 있다. 게다가 그림책이 시작될 무렵 노인이 아침에 기지개를 켜던 모습은 젊은이가 텔레비전을 끄고 기지개를 켜는 모습과 무척 닮아 있다.
혹시 두 사람은 동일 인물이 아닐까? 한 사람의 젊었던 과거와 나이든 이후의 미래가 하나의 시공간에서 만나게 된 것은 아닐까? 섬을 가라앉게 만든 사람에게 따지기 위해 다짜고짜 찾아갔는데, 그 사람이 바로 젊은 날의 자신인 것을 마주한다면 노인은 정말이지 당황스러울 것이다. 노인은 젊은 시절, 섬이 물에 잠기는 것을 나와 상관없는 일로 여기고 영화 속 이야기인 듯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저 자신의 편안한 생활에만 집중하였을 것이다. 작가는 그런 젊은이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되묻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제목인 ‘마지막 섬’은 마치 ‘마지막 경고’인 것처럼 들린다.
자연 유토피아 vs. 문명 디스토피아
브람웰(Bramwel, 2013)에 따르면 생태주의에서는 인간을 자연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대신 인간을 자연과 동등하고,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 일체가 되어야 하며, 동물의 법칙을 따라 생존해야 하는 존재로 여긴다. 특히 생태주의에서는 자연의 폐쇄적인 시스템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잘못된 것’으로 인식하는데, 인간을 자연보다 더 우월한 존재로 보지 않기 때문에 자연을 통제할 수 없다고 여긴다. 그렇기에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곧 큰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생태주의 세계관은 그림책 <마지막 섬>에도 잘 나타나 있다. 검은 연기를 내뿜는 공장과 대조적으로 노인이 살고 있는 외딴 섬은 아름다운 색깔과 생명으로 충만하다. 어찌된 영문인지 이 섬에는 노인 외에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고, 그 대신 다양한 동식물들이 가득하다. 특히 노인의 옷차림을 보면 하얀 바지 하나뿐이다. 상의도 없고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노인은 섬 곳곳을 다닌다. 옷이 인간의 문명을 상징한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노인이 최소한의 옷만 걸친 것은 문명보다 자연에 가까운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노인은 물고기를 잡고 열매를 채집하며 살아간다. 즉 현대 문명과는 거리가 먼 수렵과 채집 생활 방식을 기반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노인은 매우 간소한 삶을 살며, 노인의 집과 집에 있는 가재도구들 역시 대부분 자연물로 만든 것들이다. 자연물로 악기와 인형을 만들고, 목걸이를 걸고 치마를 두르며 동물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은 자연과의 일체된 삶이 가장 이상적인 삶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대조적으로 검은 연기를 내뿜는 공장 지역의 집에서는 자연물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대신 거실에는 커다란 텔레비전과 스탠드, 소파가 놓여 있는데 이는 현대 문명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집안의 풍경이다. 이곳은 비바람으로부터 안전하고, 휴식을 취하며 여가를 보낼 수 있는 안락한 공간이다. 그러나 이 집이 위치한 곳은 검은 연기를 내뿜는 공장이 있는 곳, 섬을 물에 잠기게 하고 노인의 거처를 빼앗아간 ‘나쁜’ 곳이다.
결과적으로 노인이 살던 섬은 물에 잠김으로써 재앙이 미친 공간- 디스토피아가 되었지만, 작가는 노인이 원래 살아가던 자연과 일체된 삶을 이상적인 장소- 유토피아로 그려낸다. 반면, 젊은이의 거실은 안전하고 안락해 보이지만, 섬을 물에 잠기게 만든 원인이 되는 공간이기에 문제시되는 장소로 그려낸다. 작가에게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가르는 기준은 자연과 문명이다. 자연과 일체된 삶이 이상적인 사회에서 인간이란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동식물과 구별된 존재가 아니라, 다른 모든 동식물들과 평등한 위치에 존재한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인간을 어떤 존재로 바라보는가? 하나님은 다른 생물들과 달리 사람을 특별한 방식으로 만드셨고, 인간과 다른 생물들과의 관계에서 특별한 질서를 세우셨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사람이 다른 동식물들과 구분되는 존재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지으셨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자연의 일부로서 다른 동식물과 다를 것이 없다는 생태주의 세계관과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 모양을 따라 지어졌기에 다른 동식물과 구별되는 기독교 세계관의 인간관은 매우 상반된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에게 모든 생물을 ‘지배(dominion)’하게 하셨다. 이것은 생태주의 세계관에서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물들이 평등하다는 시각을 보이는 것과 대조적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시다. 사람을 비롯해 모든 생물들은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동질적인 위계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특별한 방식으로 지으셨고, 생물들 사이의 관계에 질서를 부여하시고 인간에게 생물을 지배하도록 역할을 주셨다. 따라서 사람을 자연의 일부로 보고 모든 생물이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생태주의 세계관은 기독교 세계관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하나님이 인간을 신묘막측하게 지으셨다는 것과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다.
김현경 | 성균관대학원 아동청소년학과 박사과정 수료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영국 캠브릿지 대학교 교육학과 the PLACE 연구소에서 Visiting Scholar를 지냈습니다. 현재 경인교육대학교 유아교육과 강사로 있으며,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과 미디어에 담긴 세계관 연구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