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 그림책에 대한 비판적 읽기(3) 『마지막 섬』

2024-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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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 그림책에 대한 비판적 읽기(3) 『마지막 섬』  



“그림책 베이직”의 <정보 그림책> 세션에서는 2024년 상반기 동안 

생태 그림책에 나타난 종말론적 환경주의 시각을 비판하는 글을 연재하고자 한다."


『마지막 섬』  그림책 자세히 보기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의 유명한 저서 『침묵의 봄』(1962)은 미국의 생태주의 환경 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환경학 도서임에도 첫번째 챕터가 ‘내일을 위한 우화’라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바로 이 이야기에서 이 책의 제목이 지니는 의미를 알 수 있는데, 봄이 고요한 이유는 새들이 자취를 감추어서 새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이고,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몇 마리의 새조차 다 죽어가는 듯 격하게 몸을 떨었고 날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서 카슨은 세상이 이토록 비탄에 잠긴 것은 사악한 마술이나 악독한 적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 바로 사람들이 스스로 저지른 일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살충제의 해로움에 대해서 설명한다.

이와 같이 환경의 재앙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 문학적인 장치는 환경 디스토피아, 환경 아포칼립스(종말론) 등의 이름으로 문학 작품에서 사용되곤 한다. 이러한 이야기에는 독자들로 하여금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게 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으며, 특히 인간을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이 나타난다. 환경 종말론적인 내러티브에서는 인간을 어떤 존재로 바라볼까? 이 글에서는 환경 종말론 그림책의 인간관을 기독교의 인간관과 비교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마지막 섬


이지현 작가가 지은 <마지막 섬>(창비, 2021)은 글 없는 그림책이다. 앞표지와 뒤표지를 함께 펼치면 집 한 채와 여러 그루의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는 작고 푸른 섬에 한 노인이 서 있다. 그런데 노인의 발목까지 물이 차올라 있고, 섬이 일부 잠겨 있으며 얼굴을 찡그린 노인은 손을 이마에 대고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면지를 넘기면 표제지가 나오기 전에 한 장면이 나타나는데 거기에는 물에 잠기기 전의 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표제지를 지나면 노인이 기지개를 켜며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상의는 입지 않고 하얀 바지만 입은 노인은 망태기를 두르고 편안한 표정으로 물속으로 들어간다. 물속에서 통발을 건지는 노인 주변으로 색색깔의 물고기들과 해초들이 아름답게 어우러지고 있다. 노인은 잡은 물고기를 말리는 한편 수평선 너머에서 올라오는 검은 연기를 일그러진 얼굴로 바라본다. 섬 안쪽으로 걸어 들어간 노인은 숲에서 새와 곤충, 풀과 나무, 열매 사이에서 다시 편안한 표정을 찾게 된다. 새와 곤충, 동물들은 익숙하지 않은 외양을 하고 있어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노인이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노인과 열매를 나눠 먹거나 노인의 가무에 동참하여 즐겁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보아서 노인과 이 섬의 자연은 친밀한 관계에 놓여 있는 듯하다. 노을이 질 때쯤 노인은 집으로 돌아온다. 노인의 집 안에는 단순하고 간소한 살림이 몇 가지 있을 뿐이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집이 물에 잠기고, 물이 발목까지 차오르자 노인은 당황한다. 노인은 큰 돌들을 집 주변에 쌓고, 섬 안쪽 숲의 상황도 살펴본다. 노인은 전 날과 다른 풍경에 속이 상한 듯 주변을 둘러 보다 작고 붉은 동물을 구조하여 집으로 돌아온다. 노을이 지는 풍경과 함께 노인은 수평선 너머로 검은 연기가 더 많아진 것을 바라본다.

다음 날, 물은 더 차올라 집의 반이 물에 잠겼고, 노인은 나무를 이용해 집을 물 위로 세우지만 검은 연기는 더 많아졌다. 밤이 되자 날씨마저 악화되어 큰 파도에 노인의 집이 휩쓸린다. 노인은 작고 붉은 동물을 품에 안고 작은 배에 몸을 의지해 바다를 건넌다. 노인이 노를 저어가는 곳은 검은 연기를 내뿜는 공장이다. 궂은 날씨에 밤도 깊었지만 공장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고 검은 연기도 쉬지 않고 나오고 있다.

그런데 노인이 이 공장을 향해 노를 저어가는 장면에는 이전 장면들과는 달리 검정색 테두리가 그려져 있다. 그 다음 장면은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와 검은 연기를 내뿜는 공장의 풍경이 검정색 테두리 안에 그려져 있는데, 그림 곳곳이 가로로 흔들리며 뭉개져 있다. 다음 장면을 보면, 지금까지 우리가 본 장면이 커다란 텔레비전의 화면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소파에 앉아 그 화면을 보고 있던 젊은 남자는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을 끈다. 젊은 남자는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하며 소파에서 일어나 걸어가는데 문득 문 밖에서 소리가 난다. 젊은 남자가 문을 열자 문 밖에는 텔레비전 화면 속의 그 노인이 서 있다. 그림책의 왼쪽 면에는 잠옷을 입은 젊은 남자가, 오른쪽 면에는 비에 흠뻑 젖은 채 작은 동물을 어깨 위에 올린 노인이 그려져 있으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둘 사이를 가로지르는 제본선은 두 사람의 ‘다른’ 삶을 더 분명하게 구분 지어준다.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현재


젊은이와 노인은 도대체 어떤 관계일까? 일단, 노인은 그동안 검은 연기를 눈여겨봐 왔고, 섬과 집이 물에 잠긴 원인을 검은 연기에서 찾는 듯 보인다. 따라서 노인은 이 일련의 일에 대해 따져 묻기 위해 이 집을 찾아왔을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노인의 표정에 화난 감정보다는 당황스러운 감정이 읽혀지는 점이 의외이다. 특히 두 사람의 머리 모양이나 눈, 코, 입 등 외양이 참으로 닮아 있다. 게다가 그림책이 시작될 무렵 노인이 아침에 기지개를 켜던 모습은 젊은이가 텔레비전을 끄고 기지개를 켜는 모습과 무척 닮아 있다.

혹시 두 사람은 동일 인물이 아닐까? 한 사람의 젊었던 과거와 나이든 이후의 미래가 하나의 시공간에서 만나게 된 것은 아닐까? 섬을 가라앉게 만든 사람에게 따지기 위해 다짜고짜 찾아갔는데, 그 사람이 바로 젊은 날의 자신인 것을 마주한다면 노인은 정말이지 당황스러울 것이다. 노인은 젊은 시절, 섬이 물에 잠기는 것을 나와 상관없는 일로 여기고 영화 속 이야기인 듯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저 자신의 편안한 생활에만 집중하였을 것이다. 작가는 그런 젊은이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되묻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제목인 ‘마지막 섬’은 마치 ‘마지막 경고’인 것처럼 들린다.


자연 유토피아 vs. 문명 디스토피아


브람웰(Bramwel, 2013)에 따르면 생태주의에서는 인간을 자연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대신 인간을 자연과 동등하고,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 일체가 되어야 하며, 동물의 법칙을 따라 생존해야 하는 존재로 여긴다. 특히 생태주의에서는 자연의 폐쇄적인 시스템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잘못된 것’으로 인식하는데, 인간을 자연보다 더 우월한 존재로 보지 않기 때문에 자연을 통제할 수 없다고 여긴다. 그렇기에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곧 큰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생태주의 세계관은 그림책 <마지막 섬>에도 잘 나타나 있다. 검은 연기를 내뿜는 공장과 대조적으로 노인이 살고 있는 외딴 섬은 아름다운 색깔과 생명으로 충만하다. 어찌된 영문인지 이 섬에는 노인 외에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고, 그 대신 다양한 동식물들이 가득하다. 특히 노인의 옷차림을 보면 하얀 바지 하나뿐이다. 상의도 없고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노인은 섬 곳곳을 다닌다. 옷이 인간의 문명을 상징한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노인이 최소한의 옷만 걸친 것은 문명보다 자연에 가까운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노인은 물고기를 잡고 열매를 채집하며 살아간다. 즉 현대 문명과는 거리가 먼 수렵과 채집 생활 방식을 기반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노인은 매우 간소한 삶을 살며, 노인의 집과 집에 있는 가재도구들 역시 대부분 자연물로 만든 것들이다. 자연물로 악기와 인형을 만들고, 목걸이를 걸고 치마를 두르며 동물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은 자연과의 일체된 삶이 가장 이상적인 삶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대조적으로 검은 연기를 내뿜는 공장 지역의 집에서는 자연물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대신 거실에는 커다란 텔레비전과 스탠드, 소파가 놓여 있는데 이는 현대 문명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집안의 풍경이다. 이곳은 비바람으로부터 안전하고, 휴식을 취하며 여가를 보낼 수 있는 안락한 공간이다. 그러나 이 집이 위치한 곳은 검은 연기를 내뿜는 공장이 있는 곳, 섬을 물에 잠기게 하고 노인의 거처를 빼앗아간 ‘나쁜’ 곳이다.

결과적으로 노인이 살던 섬은 물에 잠김으로써 재앙이 미친 공간- 디스토피아가 되었지만, 작가는 노인이 원래 살아가던 자연과 일체된 삶을 이상적인 장소- 유토피아로 그려낸다. 반면, 젊은이의 거실은 안전하고 안락해 보이지만, 섬을 물에 잠기게 만든 원인이 되는 공간이기에 문제시되는 장소로 그려낸다. 작가에게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가르는 기준은 자연과 문명이다. 자연과 일체된 삶이 이상적인 사회에서 인간이란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동식물과 구별된 존재가 아니라, 다른 모든 동식물들과 평등한 위치에 존재한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인간을 어떤 존재로 바라보는가? 하나님은 다른 생물들과 달리 사람을 특별한 방식으로 만드셨고, 인간과 다른 생물들과의 관계에서 특별한 질서를 세우셨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어 그들이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가축과 온 땅과 땅에서 기어 다니는 모든 기는 것을 지배하게 하자, 하시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를 창조하시고 남성과 여성으로 그들을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라. 땅을 정복하라. 또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하시니라. (창1:26~28)


기독교 세계관에서 사람이 다른 동식물들과 구분되는 존재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지으셨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자연의 일부로서 다른 동식물과 다를 것이 없다는 생태주의 세계관과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 모양을 따라 지어졌기에 다른 동식물과 구별되는 기독교 세계관의 인간관은 매우 상반된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에게 모든 생물을 ‘지배(dominion)’하게 하셨다. 이것은 생태주의 세계관에서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물들이 평등하다는 시각을 보이는 것과 대조적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시다. 사람을 비롯해 모든 생물들은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동질적인 위계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특별한 방식으로 지으셨고, 생물들 사이의 관계에 질서를 부여하시고 인간에게 생물을 지배하도록 역할을 주셨다. 따라서 사람을 자연의 일부로 보고 모든 생물이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생태주의 세계관은 기독교 세계관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하나님이 인간을 신묘막측하게 지으셨다는 것과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다.

 



김현경 | 성균관대학원 아동청소년학과 박사과정 수료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영국 캠브릿지 대학교 교육학과 the PLACE 연구소에서 Visiting Scholar를 지냈습니다. 현재 경인교육대학교 유아교육과 강사로 있으며,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과 미디어에 담긴 세계관 연구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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