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움으로 가득한 주님의 솜씨, 『나 진짜 궁금해!』
저는 아이와 함께 길을 걸으며 자연을 바라보는 시간이 참 좋습니다. 자연 그대로 펼쳐지는 산길도 좋고, 잘 정돈된 공원 길도 좋고, 아니면 아파트 오솔길도 좋습니다. 도로 옆에 난 풀과 가로수만 보아도 싱그럽고 생생해서 자연은 꼭 살아있는 미술관 같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로 시작되는 시편 8편이 절로 흥얼거려집니다.
그런데 홀로 길을 걸을 때와 아이와 길을 걸을 때는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홀로 길을 걸을 때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눈이 가려질 때가 많지만 아이와 함께 길을 걸을 때는 아이의 수많은 질문이 저의 눈을 깨우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위대한 발견자이고 탐험가이며 탐구자입니다. 어느새 단풍이 든 나무, 길가 수풀에 숨어 있는 사마귀, 나뭇가지 사이에 만들어진 거미줄 등 많은 것들을 발견합니다. 분명 그저께도 보았고, 어제도 보았는데, 오늘 아침에 보면 다시 새롭게 느껴지는가 봅니다. “엄마, 저것 좀 봐! 정말 대단하지 않아?”
공원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도토리를 찾고 있는 아이의 모습 / 공원에서 사마귀를 발견하고 아이가 직접 찍은 사진
2022년 칼데콧 아너상을 받은 <나 진짜 궁금해!>는 자연을 누비며 자연을 노래하는 그림책입니다. 이 책의 원제는 Wonder Walkers 인데, wonder가 궁금하다, 놀라다, 감탄, 경이, 기적이라는 뜻을 갖고 있고, walker는 걷는 자들을 뜻하므로 원제의 뜻은 궁금해하며 걷는 사람들 또는 감탄하며 걷는 사람들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제목처럼 이 책의 표지에는 커다란 바위 위를 마음껏 누비는 두 명의 꼬마 walkers가 보입니다. 이들의 자유로운 몸짓과 밝은 표정은 독자들의 마음까지 들뜨게 만듭니다. 아이들 뒤로 펼쳐지는 바닷가의 풍경을 보노라면 아이들의 감탄에 동조하며 파도가 잔잔히 배경음악을 깔아줄 것만 같습니다. 분명 종이로만 만들어진 그림책인데 어쩐지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습니다.
표지를 넘기면 앞면지는 따뜻한 아침 빛을 나타내듯 연한 노란 색으로 되어 있습니다. 표제지에는 해 아래 환한 세상이 펼쳐집니다. 커다란 나무와 들판, 수풀 위로 옅게 안개가 깔려 있으며 이러한 그림은 다양한 색깔과 모양의 종이를 오리거나 찢어 붙여서 만들어졌습니다. 작가의 이러한 독특한 그림 기법은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도 색깔이나 모양, 크기가 일률적이지 않고 고유하게 지어졌음을 보여주어 그림책의 또 다른 매력을 선사합니다.
본문 첫 장면의 그림은 양쪽으로 펼쳐진 면에 꽉 차게 그려져 있으며, 기다란 초록색 소파 위에서 여자아이는 엎드려 책을 읽고 있고, 남자아이는 등을 대고 누워서 배 위에 고양이를 올려놓고 있습니다. 남자아이의 입 모양을 따라 시선을 위로 옮기면 단 세 글자로 되어 있는 이 장면의 글이 보입니다. “심심해.” 아이의 시선이 여자아이를 향해 있는 것인지, 창밖을 향해 있는 것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심심해.”라는 글자가 걸려 있는 창밖으로 바닷가 풍경이 보입니다. 그림책 읽기도, 고양이와 노는 것도 좋지만 역시 밖에 나가 노는 것이 가장 재미있겠지요? 다음 장면에서는 아이들이 창밖을 바라보며 “우리 산책 갈까?” “좋아.”하며 대화를 나눕니다.
이후 장면부터 두 아이는 집 밖을 나와 걸으며 마음껏 자연을 누빕니다. 각 장면마다 글은 대체로 한 두 문장으로 되어 있으며 자연을 비유하는 질문의 형태로 나옵니다. 눈이 부신지 눈을 감고 해를 올려다보면서는 “해는 세상의 전등일까?” 하고 질문하고, 강물을 아련하게 덮고 있는 물안개를 내려다보면서는 “물안개는 강의 이불일까?” 하고 질문합니다. 장엄하게 펼쳐진 산 앞에서는 산등성이를 산의 등줄기로, 숲을 산의 털옷으로 비유하여 질문하지요. 이쯤 되면 우리 아이들이 자연을 탐험할 뿐만 아니라 그 모습과 속성을 파악하며 감탄할 줄 아는 멋진 시인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은 들판을 달리기도 하고, 또 수풀 속에 누워 얼굴을 들꽃에 가까이 대보며 우리에게 주어진 창조 세계에 대해 계속해서 궁금해합니다. 땅 위로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나무들을 바라보며 “나무는 하늘의 다리일까?” 질문하고, 나무 위로 올라가 나뭇가지에 매달리고 또 앉으며 “나뭇가지는 나무의 팔일까?” 질문합니다.
아이들의 질문과 탐색은 바닷가에서도 이어집니다. 동굴도 입이 있을지, 조가비는 해변의 목걸이인지, 바다는 세상의 욕조인지 묻고 또 묻습니다. 아이들은 바람을 세상의 숨결로, 비를 땅이 그리워 흘리는 하늘의 눈물로 느끼면서 이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노을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질문합니다. “달은 지구의 가로등일까?”
그림책의 마지막 장면은 어느덧 어스름한 저녁 시간이 된 마을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의 가운데 위치한 이층집의 다락방 창문에 불이 켜져 있고 창가에 두 사람의 실루엣이 보입니다. 아마도 “나 진짜 궁금해.” “나도!”하고 서로 동조하며 대화를 나누는 남매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본문이 끝나면 뒤면지는 검푸른 색상으로 되어 있어 앞면지와 대조적으로 어둠을 표현한 것 같습니다.
처음 이 글을 쓸 때, 이 책을 정보책으로 소개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정보책은 정보 전달을 주목적으로 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는 자연에 대한 사실적인 정보가 들어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책의 글은 비유로 가득한 시에 가깝지요. 그러나 자연을 소재로 하는 많은 정보책이 객관주의(1)적인 관점에서 자연에 대한 정보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컸기에 이 책을 정보책의 관점에서 소개해보고 싶었습니다.
먼저, 이 책에서 아이들이 해를 바라보고 “해는 세상의 전등일까?” 하고 물을 수 있었던 것은 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해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이루어졌기에 던질 수 있는 물음입니다. 해가 온 세상을 비춘다는 것과 전등이 무언가를 비추는 빛을 발한다는 것, 둘 다를 온전히 이해하고 둘 사이의 유사점을 발견했기에 가능한 고차원적인 질문입니다.
또한, 이 책에서 아이들은 인식의 주체로서 인식의 대상인 자연을 서로의 관계에서 분리하거나 배제하지 않습니다. 집 안에 머물러 있던 아이들은 집 밖으로 나가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그리고 자연을 자신에게 친숙하고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대상으로 비유합니다. 해를 전등으로, 물안개를 이불로, 숲을 털옷, 조가비를 목걸이, 바다를 욕조, 달을 가로등으로 비유한 것은 자연을 일상적인 도구로 연결한 것을 보여줍니다. 또, 나무는 다리로, 나뭇가지는 팔로, 뿌리는 발가락, 동굴은 입, 시내는 실핏줄, 바람은 숨결, 비는 눈물로 비유한 것은 자연을 우리 몸의 각 부위로 상상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내가 잘 아는 나의 몸으로, 또는 내가 가까이에서 보고 사용하며 자주 경험해 본 일상의 도구들로 자연을 비유한 것은 아이들이 자연을 추상적인 무언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이고 실제적인 살아있는 지식으로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성경에서도 자연은 다양한 비유법으로 묘사되곤 합니다.
그의 명령을 땅에 보내시니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눈을 양털 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 같이 흩으시며
우박을 떡 부스러기 같이 뿌리시나니 누가 능히 그의 추위를 감당하리요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시편 147:15-18)
한편, 이 책에서 아이들이 자연을 마주하는 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자연은 숙제처럼 어려운 대상도 아니고 함부로 대해도 되는 하찮은 존재도, 혹은 경배의 대상도 아닙니다. 아이들은 감탄하고 궁금해하면서 자연을 만나고 자연에 대해 이해해 갑니다. 이들의 모습은 창세기 2장의 아담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창세기 2:19-20)
세상에는 당연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을 잊고 지낼 때는 입에서 불평불만이 떠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선물과 은혜로 가득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이 세상은 기적처럼 다가오고 경이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야말로 “Wonderful!” 감탄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저의 작은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성인이 되고서 건강하게 잘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천식을 앓게 되었습니다. 기침이 심해지고 밤마다 숨을 쉬기 어려워 잠을 자면서 이대로 숨이 멈추어 버리면 어쩌나 두렵곤 했습니다. 그러나 천식 치료를 받으면서 증상이 호전되자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호흡을 당연하게 생각했을 때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을 잃었다가 다시 찾았을 때는 호흡이 당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귀한 선물이고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도 우리가 계획해서 우리 능력으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육신의 부모도 아이의 출생을 완전하게 계획하거나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의지와 계획과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자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두 발로 딛고 서 있는 이 땅은 우리가 우리 손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또 자연이 스스로를 만들어낸 것도 아닙니다. 빛과 어둠이나 드높이 펼쳐진 하늘도, 하늘 밖의 광활한 우주와 별들도, 이 세상의 꽃과 나무, 동물도- 우리 사람이 그러하듯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니 태초에 이 모든 것들을 지으시고 지금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솜씨에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모든 피조물의 존재와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
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그가 또 그것들을 영원히 세우시고 폐하지 못할 명령을 정하셨도다
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와 그의 말씀을 따르는 광풍이며
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수와 모든 백향목이며
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들과 고관들과 땅의 모든 재판관들이며
총각과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그가 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그는 모든 성도 곧 그를 가까이 하는 백성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 받을 이시로다 할렐루야
(시편 148:3-14)
그러나 만일 반대로 피조 세계의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능력 밖에 있는 일들에 대해 의지할 곳을 찾느라, 또 이 세계를 이해하고 싶어서, 피조물들 가운데 무언가 하나를 선택하여 신으로 만들곤 합니다. 우리나라의 민속신앙을 돌아보아도 일월성신 천지신명에게 소원을 빌곤 했습니다. 하지만 해와 달과 별들은 스스로 나지 않았기에 그들도 스스로에 대해 알기 어렵고 당연히 사람의 일도 알 수 없습니다. 또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는 마을마다 커다란 당산나무가 있어 마을 사람들이 나무를 신성시하여 의지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무 역시 스스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를 돌보는 데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적당한 햇볕과 물, 온도, 공기 없이 존재할 수 있는 나무가 있을까요? 그러므로 자연을 바라보며 주님의 솜씨에 감탄할 수는 있어도, 자연 자체를 숭상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먼저 자연에 관심을 갖고 이해하려는 탐구자의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인식의 주체인 우리가 자연을 이해할 때는 우리 자신에게서 자연을 분리하여 접근하기보다, 우리 자신과 자연의 관계 안에서 자연을 인식해 가야 합니다. 이때 주의할 점은 우리 인간과 자연 둘 다의 창조주이시고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의 자리를 빼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 자신과 자연의 관계 안에서 자연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 자연의 관계 안에서 자연을 인식해 갈 때, 각 존재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진리를 알기 위함인데, 그 진리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진리 안에서 자연과 인간에 대해 바르게 이해해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 있는 자연 세계를 귀하게 대할 수밖에 없으며, 자연 세계에 가득한 하나님의 경이로움과 선물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
그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땅을 위하여 비를 준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시편 147:7-9)
(1) 파커 팔머(1983)는 전근대 시대에 사실적 관찰이나 논리적 분석이 아니라 주관적 기능에 의존했기에 이후 사람들이 객관성을 추구하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이 분리되고 서로에게서 소외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객관주의입니다. 객관주의는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을 예리하게 구분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출처: Palmer, P. J. (2000).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To know as we are known: Education as a spiritual journey]. (이종태 역). 서울: IVP. (원본발간일: 1983년).
| 김현경 | 성균관대학원 아동청소년학과 박사과정 수료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영국 캠브릿지 대학교 교육학과 the PLACE 연구소에서 Visiting Scholar를 지냈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과 미디어에 담긴 세계관 연구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
놀라움으로 가득한 주님의 솜씨, 『나 진짜 궁금해!』
저는 아이와 함께 길을 걸으며 자연을 바라보는 시간이 참 좋습니다. 자연 그대로 펼쳐지는 산길도 좋고, 잘 정돈된 공원 길도 좋고, 아니면 아파트 오솔길도 좋습니다. 도로 옆에 난 풀과 가로수만 보아도 싱그럽고 생생해서 자연은 꼭 살아있는 미술관 같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로 시작되는 시편 8편이 절로 흥얼거려집니다.
그런데 홀로 길을 걸을 때와 아이와 길을 걸을 때는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홀로 길을 걸을 때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눈이 가려질 때가 많지만 아이와 함께 길을 걸을 때는 아이의 수많은 질문이 저의 눈을 깨우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위대한 발견자이고 탐험가이며 탐구자입니다. 어느새 단풍이 든 나무, 길가 수풀에 숨어 있는 사마귀, 나뭇가지 사이에 만들어진 거미줄 등 많은 것들을 발견합니다. 분명 그저께도 보았고, 어제도 보았는데, 오늘 아침에 보면 다시 새롭게 느껴지는가 봅니다. “엄마, 저것 좀 봐! 정말 대단하지 않아?”
공원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도토리를 찾고 있는 아이의 모습 / 공원에서 사마귀를 발견하고 아이가 직접 찍은 사진
2022년 칼데콧 아너상을 받은 <나 진짜 궁금해!>는 자연을 누비며 자연을 노래하는 그림책입니다. 이 책의 원제는 Wonder Walkers 인데, wonder가 궁금하다, 놀라다, 감탄, 경이, 기적이라는 뜻을 갖고 있고, walker는 걷는 자들을 뜻하므로 원제의 뜻은 궁금해하며 걷는 사람들 또는 감탄하며 걷는 사람들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제목처럼 이 책의 표지에는 커다란 바위 위를 마음껏 누비는 두 명의 꼬마 walkers가 보입니다. 이들의 자유로운 몸짓과 밝은 표정은 독자들의 마음까지 들뜨게 만듭니다. 아이들 뒤로 펼쳐지는 바닷가의 풍경을 보노라면 아이들의 감탄에 동조하며 파도가 잔잔히 배경음악을 깔아줄 것만 같습니다. 분명 종이로만 만들어진 그림책인데 어쩐지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습니다.
표지를 넘기면 앞면지는 따뜻한 아침 빛을 나타내듯 연한 노란 색으로 되어 있습니다. 표제지에는 해 아래 환한 세상이 펼쳐집니다. 커다란 나무와 들판, 수풀 위로 옅게 안개가 깔려 있으며 이러한 그림은 다양한 색깔과 모양의 종이를 오리거나 찢어 붙여서 만들어졌습니다. 작가의 이러한 독특한 그림 기법은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도 색깔이나 모양, 크기가 일률적이지 않고 고유하게 지어졌음을 보여주어 그림책의 또 다른 매력을 선사합니다.
본문 첫 장면의 그림은 양쪽으로 펼쳐진 면에 꽉 차게 그려져 있으며, 기다란 초록색 소파 위에서 여자아이는 엎드려 책을 읽고 있고, 남자아이는 등을 대고 누워서 배 위에 고양이를 올려놓고 있습니다. 남자아이의 입 모양을 따라 시선을 위로 옮기면 단 세 글자로 되어 있는 이 장면의 글이 보입니다. “심심해.” 아이의 시선이 여자아이를 향해 있는 것인지, 창밖을 향해 있는 것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심심해.”라는 글자가 걸려 있는 창밖으로 바닷가 풍경이 보입니다. 그림책 읽기도, 고양이와 노는 것도 좋지만 역시 밖에 나가 노는 것이 가장 재미있겠지요? 다음 장면에서는 아이들이 창밖을 바라보며 “우리 산책 갈까?” “좋아.”하며 대화를 나눕니다.
이후 장면부터 두 아이는 집 밖을 나와 걸으며 마음껏 자연을 누빕니다. 각 장면마다 글은 대체로 한 두 문장으로 되어 있으며 자연을 비유하는 질문의 형태로 나옵니다. 눈이 부신지 눈을 감고 해를 올려다보면서는 “해는 세상의 전등일까?” 하고 질문하고, 강물을 아련하게 덮고 있는 물안개를 내려다보면서는 “물안개는 강의 이불일까?” 하고 질문합니다. 장엄하게 펼쳐진 산 앞에서는 산등성이를 산의 등줄기로, 숲을 산의 털옷으로 비유하여 질문하지요. 이쯤 되면 우리 아이들이 자연을 탐험할 뿐만 아니라 그 모습과 속성을 파악하며 감탄할 줄 아는 멋진 시인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은 들판을 달리기도 하고, 또 수풀 속에 누워 얼굴을 들꽃에 가까이 대보며 우리에게 주어진 창조 세계에 대해 계속해서 궁금해합니다. 땅 위로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나무들을 바라보며 “나무는 하늘의 다리일까?” 질문하고, 나무 위로 올라가 나뭇가지에 매달리고 또 앉으며 “나뭇가지는 나무의 팔일까?” 질문합니다.
아이들의 질문과 탐색은 바닷가에서도 이어집니다. 동굴도 입이 있을지, 조가비는 해변의 목걸이인지, 바다는 세상의 욕조인지 묻고 또 묻습니다. 아이들은 바람을 세상의 숨결로, 비를 땅이 그리워 흘리는 하늘의 눈물로 느끼면서 이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노을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질문합니다. “달은 지구의 가로등일까?”
그림책의 마지막 장면은 어느덧 어스름한 저녁 시간이 된 마을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의 가운데 위치한 이층집의 다락방 창문에 불이 켜져 있고 창가에 두 사람의 실루엣이 보입니다. 아마도 “나 진짜 궁금해.” “나도!”하고 서로 동조하며 대화를 나누는 남매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본문이 끝나면 뒤면지는 검푸른 색상으로 되어 있어 앞면지와 대조적으로 어둠을 표현한 것 같습니다.
처음 이 글을 쓸 때, 이 책을 정보책으로 소개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정보책은 정보 전달을 주목적으로 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는 자연에 대한 사실적인 정보가 들어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책의 글은 비유로 가득한 시에 가깝지요. 그러나 자연을 소재로 하는 많은 정보책이 객관주의(1)적인 관점에서 자연에 대한 정보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컸기에 이 책을 정보책의 관점에서 소개해보고 싶었습니다.
먼저, 이 책에서 아이들이 해를 바라보고 “해는 세상의 전등일까?” 하고 물을 수 있었던 것은 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해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이루어졌기에 던질 수 있는 물음입니다. 해가 온 세상을 비춘다는 것과 전등이 무언가를 비추는 빛을 발한다는 것, 둘 다를 온전히 이해하고 둘 사이의 유사점을 발견했기에 가능한 고차원적인 질문입니다.
또한, 이 책에서 아이들은 인식의 주체로서 인식의 대상인 자연을 서로의 관계에서 분리하거나 배제하지 않습니다. 집 안에 머물러 있던 아이들은 집 밖으로 나가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그리고 자연을 자신에게 친숙하고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대상으로 비유합니다. 해를 전등으로, 물안개를 이불로, 숲을 털옷, 조가비를 목걸이, 바다를 욕조, 달을 가로등으로 비유한 것은 자연을 일상적인 도구로 연결한 것을 보여줍니다. 또, 나무는 다리로, 나뭇가지는 팔로, 뿌리는 발가락, 동굴은 입, 시내는 실핏줄, 바람은 숨결, 비는 눈물로 비유한 것은 자연을 우리 몸의 각 부위로 상상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내가 잘 아는 나의 몸으로, 또는 내가 가까이에서 보고 사용하며 자주 경험해 본 일상의 도구들로 자연을 비유한 것은 아이들이 자연을 추상적인 무언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이고 실제적인 살아있는 지식으로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성경에서도 자연은 다양한 비유법으로 묘사되곤 합니다.
한편, 이 책에서 아이들이 자연을 마주하는 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자연은 숙제처럼 어려운 대상도 아니고 함부로 대해도 되는 하찮은 존재도, 혹은 경배의 대상도 아닙니다. 아이들은 감탄하고 궁금해하면서 자연을 만나고 자연에 대해 이해해 갑니다. 이들의 모습은 창세기 2장의 아담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세상에는 당연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을 잊고 지낼 때는 입에서 불평불만이 떠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선물과 은혜로 가득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이 세상은 기적처럼 다가오고 경이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야말로 “Wonderful!” 감탄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저의 작은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성인이 되고서 건강하게 잘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천식을 앓게 되었습니다. 기침이 심해지고 밤마다 숨을 쉬기 어려워 잠을 자면서 이대로 숨이 멈추어 버리면 어쩌나 두렵곤 했습니다. 그러나 천식 치료를 받으면서 증상이 호전되자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호흡을 당연하게 생각했을 때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을 잃었다가 다시 찾았을 때는 호흡이 당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귀한 선물이고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도 우리가 계획해서 우리 능력으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육신의 부모도 아이의 출생을 완전하게 계획하거나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의지와 계획과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자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두 발로 딛고 서 있는 이 땅은 우리가 우리 손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또 자연이 스스로를 만들어낸 것도 아닙니다. 빛과 어둠이나 드높이 펼쳐진 하늘도, 하늘 밖의 광활한 우주와 별들도, 이 세상의 꽃과 나무, 동물도- 우리 사람이 그러하듯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니 태초에 이 모든 것들을 지으시고 지금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솜씨에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모든 피조물의 존재와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반대로 피조 세계의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능력 밖에 있는 일들에 대해 의지할 곳을 찾느라, 또 이 세계를 이해하고 싶어서, 피조물들 가운데 무언가 하나를 선택하여 신으로 만들곤 합니다. 우리나라의 민속신앙을 돌아보아도 일월성신 천지신명에게 소원을 빌곤 했습니다. 하지만 해와 달과 별들은 스스로 나지 않았기에 그들도 스스로에 대해 알기 어렵고 당연히 사람의 일도 알 수 없습니다. 또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는 마을마다 커다란 당산나무가 있어 마을 사람들이 나무를 신성시하여 의지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무 역시 스스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를 돌보는 데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적당한 햇볕과 물, 온도, 공기 없이 존재할 수 있는 나무가 있을까요? 그러므로 자연을 바라보며 주님의 솜씨에 감탄할 수는 있어도, 자연 자체를 숭상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먼저 자연에 관심을 갖고 이해하려는 탐구자의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인식의 주체인 우리가 자연을 이해할 때는 우리 자신에게서 자연을 분리하여 접근하기보다, 우리 자신과 자연의 관계 안에서 자연을 인식해 가야 합니다. 이때 주의할 점은 우리 인간과 자연 둘 다의 창조주이시고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의 자리를 빼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 자신과 자연의 관계 안에서 자연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 자연의 관계 안에서 자연을 인식해 갈 때, 각 존재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진리를 알기 위함인데, 그 진리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진리 안에서 자연과 인간에 대해 바르게 이해해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 있는 자연 세계를 귀하게 대할 수밖에 없으며, 자연 세계에 가득한 하나님의 경이로움과 선물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1) 파커 팔머(1983)는 전근대 시대에 사실적 관찰이나 논리적 분석이 아니라 주관적 기능에 의존했기에 이후 사람들이 객관성을 추구하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이 분리되고 서로에게서 소외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객관주의입니다. 객관주의는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을 예리하게 구분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출처: Palmer, P. J. (2000).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To know as we are known: Education as a spiritual journey]. (이종태 역). 서울: IVP. (원본발간일: 1983년).
김현경 | 성균관대학원 아동청소년학과 박사과정 수료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영국 캠브릿지 대학교 교육학과 the PLACE 연구소에서 Visiting Scholar를 지냈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과 미디어에 담긴 세계관 연구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