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그림책
종말론적 환경주의 그림책 비평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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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연2025-07-17 13:04
학교에는 늘 환경주간이 있고, 도서관에 새로 나온 책들을 사려고 보면 KDC 500번대의기술과학과 관련된 책들은 환경보호와 관련된 책들이 늘 많습니다. 수요자가 있기도 하고, 공급량이 많기도 해서 저도 환경보호에 관련된 책들을 많이 사는 편입니다. 그러면서 보게 되는 책들은, 정말 우리 지구가 곧 망할것 같이.. 보여주는 책들이 실제로 정말 많습니다. 그리고 제 주변에도 지구가 곧 멸망할거고, 그래서 자기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 라고 한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평론을 읽으면서 저는 처음으로 "기후 위기 회의론"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후 위기론이..정말 가설의 하나일 뿐인것도요.
학교에서는 창조론대신 진화론만 가르치는 것처럼, 기후 위기론만 가르치고 이것또한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처음 알게된 사실에 많은 생각이 드네요. 정말 깨어있어야 할듯 합니다.
그런데 이 평론을 읽으면서 저는 처음으로 "기후 위기 회의론"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후 위기론이..정말 가설의 하나일 뿐인것도요.
학교에서는 창조론대신 진화론만 가르치는 것처럼, 기후 위기론만 가르치고 이것또한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처음 알게된 사실에 많은 생각이 드네요. 정말 깨어있어야 할듯 합니다.
고진슬2025-07-21 12:27
그 내용이 완전히 검증된 진실이 아님에도 마치 전체의 진실인 것처럼 가르치려는 자들에 의해 종말론적 환경주의가 확산되어 너무나도 많은 어린아이들이 환경과 세상을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보고 부정적인 인간관, 자유시장경제체제에 대한 반감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비성경적인 종말론을 확대 재생산하여 지식뿐 아니라 어린아이들의 영혼에도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지요.
어릴 때만해도 '지구 온난화'라는 말을 많이 썼었는데, 요즘에는 이 말을 많이 안 쓰지요? 기후가 온난해지지만은 않고 때로는 더 추워지거나 하는 현상이 반복되자 온난화라는 말을 슬쩍 '기후 변화'로 바꾼 것도 기후 위기가 단지 하나의 만들어진 '설'에 불과하다는 주장에 힘을 싣는 것 같습니다.
어릴 때만해도 '지구 온난화'라는 말을 많이 썼었는데, 요즘에는 이 말을 많이 안 쓰지요? 기후가 온난해지지만은 않고 때로는 더 추워지거나 하는 현상이 반복되자 온난화라는 말을 슬쩍 '기후 변화'로 바꾼 것도 기후 위기가 단지 하나의 만들어진 '설'에 불과하다는 주장에 힘을 싣는 것 같습니다.
김은수2025-07-21 23:29
다큐멘터리 AGENDA 를 보면서, 다른 사항들에 대해서는 당연하고도 깊이 공감이 가는데, 환경운동에 대한 부분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말론적 환경주의나 기후위기론의 주장에 대해서는 물론 동의하지 않는 바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이 눈앞의 이익을 위해 무분별하게 환경을 파괴하고, 물질만능주의와 황금주의에 빠져 더 빠르게 보다 많은 이익을 추구하려는 자본주의 한켠의 추악한 모습도 사실이기에 생각이 많아집니다.
로마서 1장 19-20절 말씀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새번역)'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두신 달과 별들을'(시편 8:3) 볼 때마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심을 느끼며 감탄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오늘의 '제자리'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야지, 생각합니다.
로마서 1장 19-20절 말씀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새번역)'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두신 달과 별들을'(시편 8:3) 볼 때마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심을 느끼며 감탄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오늘의 '제자리'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야지, 생각합니다.
이정아2025-07-22 15:43
3가지 생각이 든다.
복잡하다.
표현방법이 상당히 복잡하고, 기괴해서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 지 눈이 머물러야 할 곳을 찾기 힘들다.
현대 사람들은 복잡한 것보다 단순한 것을 선호한다. 나와의 직접 관계가 아니면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무관심한 삶을 산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생각을 표현한 배경과 등장인물의 표정이 여지 없다.
인간의 무책임은 교육의 무지, 관계의 외면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여기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본다면 하나님은 창조관을 통해 피조물과의 공존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연합을 이루도록 하셨다.
여전히 교회교육은 교육을 통해, 관계를 통해 하나님 이루신 피조물과의 조화와 책임을 강조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토끼 인형이다.
인간의 손에서 토끼 인형은 애착을 이루는 관계이지만, 인간의 손에서 벗어난 인형은 피조물에게는 쓰레기이다.
작가가 종말론적 환경의 위험을 알려주고자 한다면 인형은 피조물에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 없다.
그러나 작가는 갑자기 인형에게 생명을 불어넣는다. 왜 이런 일을 하게되었을까?
공존의식을 투영한 것은 아닐까? 자신을 귀히 여겨주던 인간의 생명을 보응하는 관계로 설정된다.
여기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본다면 노아의 방주에서 하나님께서는 암수 한 쌍을 배로 부르신다. 그 이후의 생육과 번성을 위한 하나의 계획이다.
그것처럼 하나님은 토끼 인형과 아동을 한 쌍으로 여겨 한 배에 타게 하시고 또 다른 생육 혹은 무참해진 기억을 생생히 증언하는 하나의 매개로 세우셨을 것을 생각해본다.
마지막으로 부정이다.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인간의 과학이 해결할 수 없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지으시며 피조물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모든 것이 회복되어지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종말론의 한 방편으로서 환경주의를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회복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 시각을 부정하는 입장이다.
여기서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종말론적 환경주의를 생각해 본다면 어떤 말씀으로 연결시켜야 하는가?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인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 데살로니가전서 5장 2절-
어떤 형태로든 인간에게 종말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아주 오래전 교회역사에도 죄, 개인적 죽음, 여러 외부적 요인을 통해서든 종말은 찾아온다고 했고, 그로인해 종말론이 유행한 적도 있다.
다만, 그리스도이는 종말이라는 어둠이 아니라 빛에 더 집중해야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종말은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다면 긴장과 위기로 인한 것이 주는 것보다
어려서부터 공존의 동반자로 여기며 살아가는 여유와 약간의 불편을 선택하는 것이 더 건강한 종말론적 환경주의를 대하는 기독교적 삶의 태도가 아닐까 싶다.
복잡하다.
표현방법이 상당히 복잡하고, 기괴해서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 지 눈이 머물러야 할 곳을 찾기 힘들다.
현대 사람들은 복잡한 것보다 단순한 것을 선호한다. 나와의 직접 관계가 아니면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무관심한 삶을 산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생각을 표현한 배경과 등장인물의 표정이 여지 없다.
인간의 무책임은 교육의 무지, 관계의 외면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여기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본다면 하나님은 창조관을 통해 피조물과의 공존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연합을 이루도록 하셨다.
여전히 교회교육은 교육을 통해, 관계를 통해 하나님 이루신 피조물과의 조화와 책임을 강조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토끼 인형이다.
인간의 손에서 토끼 인형은 애착을 이루는 관계이지만, 인간의 손에서 벗어난 인형은 피조물에게는 쓰레기이다.
작가가 종말론적 환경의 위험을 알려주고자 한다면 인형은 피조물에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 없다.
그러나 작가는 갑자기 인형에게 생명을 불어넣는다. 왜 이런 일을 하게되었을까?
공존의식을 투영한 것은 아닐까? 자신을 귀히 여겨주던 인간의 생명을 보응하는 관계로 설정된다.
여기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본다면 노아의 방주에서 하나님께서는 암수 한 쌍을 배로 부르신다. 그 이후의 생육과 번성을 위한 하나의 계획이다.
그것처럼 하나님은 토끼 인형과 아동을 한 쌍으로 여겨 한 배에 타게 하시고 또 다른 생육 혹은 무참해진 기억을 생생히 증언하는 하나의 매개로 세우셨을 것을 생각해본다.
마지막으로 부정이다.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인간의 과학이 해결할 수 없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지으시며 피조물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모든 것이 회복되어지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종말론의 한 방편으로서 환경주의를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회복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 시각을 부정하는 입장이다.
여기서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종말론적 환경주의를 생각해 본다면 어떤 말씀으로 연결시켜야 하는가?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인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 데살로니가전서 5장 2절-
어떤 형태로든 인간에게 종말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아주 오래전 교회역사에도 죄, 개인적 죽음, 여러 외부적 요인을 통해서든 종말은 찾아온다고 했고, 그로인해 종말론이 유행한 적도 있다.
다만, 그리스도이는 종말이라는 어둠이 아니라 빛에 더 집중해야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종말은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다면 긴장과 위기로 인한 것이 주는 것보다
어려서부터 공존의 동반자로 여기며 살아가는 여유와 약간의 불편을 선택하는 것이 더 건강한 종말론적 환경주의를 대하는 기독교적 삶의 태도가 아닐까 싶다.
종말론적 환경주의 그림책 비평 『09:47』
이 글은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인 『종말론적 환경주의 그림책의 환경 위기에 대한 비판적 고찰과
인간관에 대한 기독교적 조망』(2024)의 일부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09:47』 그림책 자세히 보기
2024년 올해 여름의 더위는 유독 길게 느껴진다. 우리나라 절기 중 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가 지난 지 한참 되었지만 아직도 낮기온이 30도를 넘을 때가 많다. 날씨가 우리의 예측과 달라질 때마다 언론과 방송에 자주 오르내리는 용어가 있다. 바로 ‘기후 위기’다. 기후의 변화가 ‘위기’라는 이러한 인식은 환경문제로 비롯된 기후의 변화가 현재 ‘위기’ 상황이라고 전제하는 것이며 그러한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인간이 지목된다. 특히 인간의 산업 활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이산화탄소가 지구 기온에 영향을 끼쳐 온난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UN 세계기상기구에서는 지구 기온이 1.5℃가 더 오르면 심각한 기후 변화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보고, 탄소 발생을 억제하여 ‘탄소중립’ 사회로 전환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세계적인 환경 정책은 이러한 종말론적 환경주의를 바탕으로 한 ‘기후 위기론’을 반영하고 있다. 종말론적 환경주의란, 환경 문제로 인해 인류가 종말의 위험에 처했다고 보는 환경주의의 일종이다.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환경 문제에 대해 과장되고 비과학적인 주장을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고 무기력하게 만들며, 반산업화와 반문명적 이념에 바탕을 두는 특징을 지닌다.
하지만 기후 위기론은 하나의 이론, 가설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한 편에서는 이러한 기후 위기론의 주장이 충분한 근거를 갖지 못하고, 사실보다 과장된 부분이 많으며, 지구 온난화 현상을 예측하는 것의 불확실성이 높기 때문에 ‘기후 위기론’에 대한 ‘회의론’을 펼치기도 한다. 그래서 “기후 위기는 없다(There is no climate emergency)”라는 내용을 담은 ‘세계기후선언(WCD)’에 공동 서명한 과학자와 기후 환경 전문가들의 숫자가 점점 늘고 있으며, 2024년 9월 현재 총 서명자 수는 무려 1,944명에 이른다.
그렇다고 해서 기후 위기 회의론이 환경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외면하거나 기후 변화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기후 위기 회의론에서는 기후가 조금씩 변화하고는 있으나 이것은 지구의 커다란 역사 안에서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왔던 자연현상으로 보는 것이 더 과학적 사실에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의 산업활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탄소가 지구를 뜨겁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그동안 환경의 역사에서 무분별한 동물 포획과 같은 잘못된 선택들이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인간의 반성과 노력으로 현재는 여러 문제들이 개선되고 있다. 기후 위기 회의론자들은 환경오염으로 인해 지구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어서 ‘인간 때문에’ 순식간에 재난 상황이 펼쳐지고 지구의 종말이 도래할 것이라는 주장은 너무 과장되었고, 극단적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기후 위기 회의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은 기후 변화로 초래되는 어려움들은 인간이 극복할 수 있고 관리할 수 있는 수준일 뿐 아니라, 기후 위기론자들이 주장하듯 과학 기술이나 인간의 문명은 폐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 기술과 문명으로 그 어려움들에 대응해 나갈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환경과 생태에 대한 이슈는 유아 교육기관에서도 큰 관심을 갖고 있으며 관련 교육이 활발하게 행해지고 있다. 특히 ‘그림책’은 환경 교육에서 자주 활용되고 있다. 우리나라 환경부에서도 격년으로 우수환경도서를 연령별로 선정하여 추천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종말론적 환경주의 메시지가 담긴 그림책들이 출간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종말론적 환경주의 그림책이 환경문제를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그에 대한 해결책은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지, 또한 인간의 역할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림책의 제목인 ‘09:47’은 디지털시계 방식으로 표현되었는데 숫자 일부가 소멸하고 있어 시간이 계속해서 흐르고 있음을 암시한다. 제목은 마치 띠를 두른 듯 그림의 위와 아래를 가로지르는 하얀색 위에 쓰여 있다. 이 띠를 기준으로 위에는 갈매기들과 토끼 인형이 하늘에 있고 아래에는 토끼 인형을 향해 손을 뻗는 소녀가 바다의 쓰레기 더미 위에 서 있어, 위는 하늘과 동물, 아래는 쓰레기와 인간으로 나뉜다.
뒤표지에는 이 책의 제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주는 문장이 제시된다: ‘지구 환경위기시계 현재 시각 9시 47분, 12시에 이르면.....!’ ‘지구 환경위기시계’란 지구 환경 파괴가 가속화됨에 따라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인류 생존의 위기감을 시간 개념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그림책의 제목 09:47은 2020년 당시 지구 환경위기시계의 시각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책은 ‘매우 불안한’ 환경 위기의 현실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야기는 제목이 나오기 전, 08:50부터 시작된다. 통영항 여객터미널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여객선에 오르고 있다. 많은 이들이 얼룩말, 토끼, 소와 돼지, 호랑이 등 몸은 사람인데 머리가 다양한 동물로 그려졌다. 아이 셋과 함께 배에 오르는 부모의 모습도 보인다. 주인공 여자아이는 이 세 명의 아이 중 막내인데 머리에 이미 수경을 올려 쓰고 분홍색 토끼 인형을 들고 있어 여행지로 향하는 들뜬 마음이 엿보인다. 사람들이 여객선에 모두 오르자, 배가 비진도를 향해 출발한다. 그림책은 시간이 9시임을 알려준다. 여객선 뒤로 보이는 바다에는 화물선과 크레인이 즐비하다.
표제지에는 여객선에서 바라보는 시점으로 바다의 풍경이 펼쳐진다. 멀리 보이는 것은 화물선과 크레인, 가까이 보이는 것은 바다 위를 날아다니는 갈매기들이다. 배가 출발하고 사람들은 사진을 찍거나 갈매기에게 과자를 주며 시간을 보낸다. 주인공 아이도 아빠에게 안아달라고 하여 갈매기들이 과자를 받아먹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본다.
09:30. 아빠와 함께 바다를 내려다보던 아이는 넘실거리는 바닷물 속에서 자기 자신과 토끼 인형의 모습을 발견한다. 놀란 아이는 아빠에게 말해 보지만 다시 들여다본 바닷속에는 이제 아이와 인형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문득 화장실에 가고 싶어진 아이는 엄마 손을 잡고 실내에 들어가, 토끼 인형은 잠시 엄마에게 맡겨놓고 아이 혼자서 여자 화장실에 들어간다. 조금 후 아이는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의 모습과는 달리, 수경을 쓰고 물에 흠뻑 젖은 채로 나와 엄마를 바라본다.
이때의 시각은 09:47, 지구의 현재 환경위기 시각이다. 물에 젖은 아이를 보고 당황한 엄마는 아이를 안고 화장실에 들어가 살펴본다. 열려 있는 창문 안으로 물이 철철 흘러내린다. 엄마는 창문을 닫고 가족에게 돌아와 상황을 설명한다. 아빠가 아이의 머리를 수건으로 닦아주는 사이에 갈매기 한 마리가 다가와 아이의 토끼 인형을 낚아챈다. 그리고 갈매기는 인형을 바다에 떨어뜨린다.
10:00. 가족들은 속상하다는 듯 바다에 빠진 토끼 인형을 바라보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가족들이 아이를 위로하는 사이 여객선은 섬에 도착한다.
11:00. 가족들은 해변에 텐트도 설치하고 튜브에 바람도 넣는다. 언니와 오빠, 아빠는 바다에 들어가 놀기 시작하지만, 마음이 상한 주인공 아이는 아직 놀 기분이 아닌지 모래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잠시 엄마가 텐트에 간 사이, 아이는 파도에 떠밀려온 토끼 인형을 발견한다.
11:50. 아이는 토끼 인형을 잡기 위해 수경을 쓰고 바닷속에 들어간다. 물속 가까이에 토끼 인형이 있는 것을 확인한 아이는 아빠에게 큰 소리로 알리지만 아빠는 듣지 못한다.
11:55. 토끼 인형을 바라보던 아이는 직접 인형을 건지러 바닷속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간다.
11:59. 토끼 인형을 따라가던 아이는 거대한 눈알을 맞닥뜨린다.
12:00. 지구 환경위기시계는 12시까지로 설정되어 있다. 즉, 12시는 ‘인류 멸망 시각’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그림책 속의 시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책의 이야기는 계속 진행되어서 인류 멸망의 때를 묘사한다. 아이는 토끼 인형과 함께 수면 위로 올라와 허우적거린다. 아이가 본 거대한 눈은 거대한 고래의 눈이었다. 놀랍게도, 아이의 가족과 사람들이 찾아간 휴양지 비진도는 섬이 아니라 거대한 고래등이었다. 고래가 요동치자 비진도와 사람들도 거대한 물결에 휩싸이고, 고래가 바닷속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비진도도 함께 물속으로 사라진다. 섬에 있던 온갖 물건들도 바다에 휩쓸리고 아이와 토끼 인형도 같이 휩쓸린다. 토끼 인형을 겨우 되찾은 아이는 갈매기들을 피해 달아나다가 거대한 ‘전설 속 물고기’의 지느러미에 그물이 감겨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 물고기는 작가의 전작인 『빅 피쉬』(2014)에 등장하는, 물을 뿜어내는 커다란 물고기이다. 아이와 토끼 인형은 그물을 풀어 전설의 물고기를 도와주고 바다 위와 바닷속을 오르내리다 고래가 잠잠해지자 비로소 물속에 가라앉은 여객선과 비진도를 찬찬히 둘러본다. 가족들과 함께 텐트를 쳤던 모래사장에도 가 보고, 섬에 있던 식당도 둘러보지만, 가족은 보이지 않는다.
어느덧 거대한 고래들이 떼를 지어와 요동친다. 쓰레기와 고래들이 바다에서 혼란 속에 뒤엉키자 어마어마한 해일이 일어나 어선과 해안 도시를 덮친다. 해일과 고래들은 차들이 지나가는 도로를 덮치고 도시의 빌딩 숲과 기차도 덮친다. 모든 것이 가차 없이 파괴되는 중에도 아이와 토끼 인형은 서로를 꼭 붙잡고 의지한다. 어느 순간 고래들이 일제히 자취를 감추고 깊은 바다 어둠 속에 아이와 토끼가 남아 있다. 그리고 갑자기 모여든 정어리 떼 위로 배가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토끼 인형과 아이는 가까스로 배를 따라잡아 물 위로 올라오고 선박에 달린 부표와 밧줄을 잡아타고 위로 올라간다. 배에 탄 동물들은 고개를 내밀고 아이와 토끼 인형을 바라본다. 노아의 가족과 동물들을 태웠던 방주처럼, 이 배도 재앙 속에서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것만 같다. 그런데 열려 있는 창문을 밀고 여자아이가 들어가자마자, 갈매기들은 또다시 토끼 인형을 낚아챈다. 아이가 창문 밖으로 손을 뻗어보지만 토끼 인형을 다시 잃어버리고 만다. 아이가 지친 모습으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토끼 인형을 들고 있던 엄마가 놀란 눈으로 아이를 바라본다. 시간은 다시 09:47.
이 그림책의 배경이 되는 ‘통영항 여객터미널’과 ‘비진도’는 모두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장소이다. 우리나라의 유명하고 아름다운 관광지를 배경으로 하는 데다가 이기훈 작가 특유의 매우 세밀한 사실주의적인 그림 기법이 어우러져, 이 그림책에 표현된 미래에 관한 종말론적인 상상이 마냥 허구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또, 그림책의 시간적인 흐름을 정리해 보면, 사람들이 여객선에 오른 시각은 08:50이었고, 9:00에 배가 출발했으며, 09:30에 아이는 배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다 물속에 자기 자신과 토끼 인형이 있는 것을 목격한다. 09:47에는 아이가 화장실에 갔다가 물에 흠뻑 젖은 채로 나오고, 10:00에는 갈매기 때문에 토끼 인형이 바다에 빠지고 만다. 어느새 비진도에 도착한 가족들은 11:00에 바닷가에 텐트를 치고 놀기 시작하고, 11:50에 아이는 파도에 밀려온 토끼 인형을 따라 바닷속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며, 12:00가 되자 종말이 임한다. 인류 종말의 모습은 처참하다. 비진도와 사람들이 모두 물에 잠기고, 섬 뿐만 아니라 도로와 도시도 모두 물에 잠긴다. 대혼란 속에서 아이와 토끼 인형은 구사일생으로 바다 위를 지나가는 배를 발견하고, 배에 기어올라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아이가 화장실 밖으로 나온 시간은 다시 09:47. 즉, 이야기는 08:50에 시작되어 09:47 현재 지구의 환경위기 시각을 지나 12:00 종말을 경험하고서 다시 09:47 현재로 돌아와서 마무리된다.
인간(특히 성인)의 무책임함과 무관심
무엇이 비진도를 받치고 있던 거대한 고래를 깨운 것인지, 그 원인이 명확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쓰레기 문제와 함께 인간의 무책임함과 무관심이 문제의 핵심임을 그림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 그림책은 글 없는 그림책인 데다가, 종말 직전의 시점부터 종말의 때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어서 섬이 뒤집히고 도시가 거대한 해일에 뒤덮이는 환경 위기의 원인이 되는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비진도를 받치고 있던 거대한 고래의 모습이 각종 잡다한 인간의 쓰레기로 보인다는 점에서 어마어마한 쓰레기들을 만들어 내고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인간의 무책임한 모습을 환경 위기의 원인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주인공 아이와 대비되는 어른들의 모습에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무관심한 태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주인공 아이는 비진도로 가는 배 위에서 물속에 자신과 토끼 인형이 있는 것을 본다. 그러나 아이와 달리 어른들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 또, 주인공 아이가 토끼 인형을 잃어버린 후 침울하게 비진도 바닷가에 앉아 있다가 다시 토끼 인형을 발견하고 아빠를 불렀을 때도 아빠는 아이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더 나아가서 이 그림책의 제목과 같이 현재의 환경위기시계가 09:47으로 매우 불안한 시각을 가리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배에 올라 비진도로 나들이를 떠나는 모습은 환경문제에 대한 인간의 무관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 그림책에서 작가는 ‘시간’을 매우 잘 활용한다. 제목인 ‘09:47’도 지구환경위기시계를 가리킨 것이었지만, 종말의 시점을 12시라고 하였을 때 종말 이전과 이후의 모습을 시간대별로 알려줄 뿐만 아니라, 시간을 되돌려 다시 주인공을 09:47으로 데려다 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종말 직전의 시간부터 시작하여 끔찍하고 무서운 종말을 자세하게 묘사한다. 따라서 환경 위기의 해결책은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환경 위기의 결과인 종말의 모습이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다만, 작가는 시간을 다시 09:47 현재로 돌려놓음으로써 주인공과 또 이 그림책을 읽는 독자들을 위기의 현실 앞에 세워 놓으며 숙제를 남긴다.
성인과 아동의 역할
성인은 환경 위기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채 일상을 살아가지만, 아동은 자신의 토끼 인형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보여준다.
그림책에서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 ‘비진도’를 방문한다. 바다와 비진도 모두 자연을 대표하는 것이지만, 이 둘은 인간에게 ‘유용한’ 장소로만 작용할 뿐 특별한 관계 맺음이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나들이를 즐기는 어른들의 모습에서 환경 위기에 대한 우려나 불안감, 또는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행동 등은 찾아보기 어렵다. 어른들은 환경 위기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채 그저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인공 여자아이는 어른들과 달리 비진도로 향하는 배 위에서 바닷속에 자신과 토끼 인형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어른들은 미처 보지 못하는 환경문제가 아이 눈에는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아이와 토끼 인형의 관계는 어른들과 비진도의 관계와 사뭇 다르다. 토끼 인형은 비록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동물을 상징하는 매개체이자 아이와 애착의 관계를 맺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는 토끼 인형을 소중히 여겨 늘 갖고 다니며, 토끼 인형을 잃어버렸을 때 필사적으로 찾고자 노력한다. 만일 토끼 인형이 자연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아이는 자연을 진심으로 아끼고 돌보는 역할에 충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바닷속의 토끼 인형은 더 이상 수동적인 인형의 모습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처럼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토끼 인형은 아이와 함께 헤엄치고, 아이가 전설 속 물고기를 도와줄 때 토끼 인형도 그물을 잡으며 아이를 돕는다. 정어리 떼 위를 지나가는 배를 발견하고서 배의 부표와 밧줄을 잡고 올라갈 때는 아이가 먼저 올라가고 토끼 인형이 뒤를 따라 올라가고 있을 정도로 토끼 인형은 능동적이고 살아있는 존재로 보인다. 어둡고 위험하고 외로운 깊은 바닷속에서 둘은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주고 동반자의 관계가 된다.
따라서 토끼 인형을 포기하지 않는 아이의 모습에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감을 찾아볼 수 있고, 살아있는 듯한 토끼 인형과 아이의 관계에서 이상적인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종말론적 환경주의 그림책이 독자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첫째, 환경문제가 심각한 ‘위기’임을 넘어서서, 이대로 가다 가는 인류가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메시지는 그림책의 주요 독자인 아동에게 어떤 생각과 감정이 들도록 할까?
둘째, 환경문제가 인간, 특히 어른들의 무관심과 무책임한 모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림책 속에서 주인공 여자아이가 토끼인형을 찾기 위해 무던히 애쓰는 모습은 어른과 매우 대비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어른의 모습을 보면서 아동은 어른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앞으로 종말론적 환경주의 그림책을 찬찬히 읽어보고 종말론적 환경주의의 문제점과 아동교육과 관련하여 생각해볼 점을 논의해 보도록 하겠다.
김현경 | 성균관대학원 아동청소년학과 박사과정 수료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영국 캠브릿지 대학교 교육학과 the PLACE 연구소에서 Visiting Scholar를 지냈습니다. 현재 경인교육대학교 유아교육과 강사로 있으며,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과 미디어에 담긴 세계관 연구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