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딜쿠샤를 어떻게 추억하는가? 『딜쿠샤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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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종로구 행촌동 1번지에 있는 붉은 벽돌로 된 아주 특별한 2층집 ‘딜쿠샤'를 아는가? 그림책 『딜쿠샤의 추억』은 바로 그 집에 관한 이야기이자 기억해야 할 우리의 역사이기도 하다. 누가, 왜 건축하였고,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딜쿠샤'의 지나온 이야기가 담겨 있다. 모든 이야기에는 미처 알려지지 않았던 진실과 감동을 주는 특별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딜쿠샤라는 원석을 알아보고 소중하게 빛을 내어 보석처럼 세상에 전해준 이는 건축과 역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작가와 프로듀서였다. 저자는 2005년 ‘딜쿠샤'를 만나자마자 첫눈에 매료되었고, 그때부터 딜쿠샤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해 오다가 2013년에 <희망의 궁전, 딜쿠샤>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2017년 그림책으로 출간했다. 다큐멘터리 작가와 프로듀서로서의 재능이 ‘그림책’이라는 매체를 만나 시너지를 발휘한다. 진리, 우정, 사랑, 역경, 용기와 같은 아름다운 성품을 고양시키는 진실된 이야기가 예술적인 글과 그림의 조화를 이루며 감동으로 밀려온다. 100여 년을 이 땅에서 함께한 ‘딜쿠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딜쿠샤의 이야기
1917년 어느 날. 인왕산 성벽을 따라 산책을 하고 있던 신혼부부,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 1875년~1948년)와 영국인 메리 테일러(Mary Linley Taylor, 1889년~1982년)는 커다란 은행나무를 보고 마음을 빼앗겨 그 옆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메리는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의 ‘딜쿠샤'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앨버트는 건물 밑에 성경의 시편 127장 1절을 새겼다.
“건축가가 집을 지어도 하나님이 짖지 않으면 헛되고
파수꾼이 성을 지어도 하나님이 짖지 않으면 헛되고 헛되다.” 시편 127:1
‘딜쿠샤'는 발밑에 새긴 이 구절이 파란만장한 자기의 삶을 지켜 줄 줄은 그때만 해도 알지 못했다. 1923년 붉은 벽돌로 쌓은 아름다운 집 ‘딜쿠샤'가 완성되었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도, 서울에 사는 외국인들도 모두 구경하러 올 정도로 크고 훌륭한 서양식 건물이었다. 이때는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점령하고 있던 시절이다. 앨버트는 한국의 상황과 독립에 무척 관심이 많아서 한국에 관한 기사를 많이 써왔다. 테일러 부부에게 ‘브루스’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한국과 특별한 운명으로 맺어진 아들 브루스의 탄생 이야기는 두 부부에게 매우 중요했다.
브루스는 1919년 2월 28일 3.1운동 하루 전날 태어났다. 병원에서 브루스를 낳은 메리는 앨버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병원이 소란스러워지더니 간호사들이 메리의 침대에 종이 뭉치를 숨기고는 재빨리 사라졌다. 간호사들이 사라지자마자 일본 경찰들이 들이닥쳐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지만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날 밤, 앨버트가 브루스를 안아 올리자 종이 뭉치가 발밑에 떨어졌다. 종이를 들여다보던 앨버트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그 종이 뭉치는 바로 3.1 독립 선언서였다. 앨버트는 동생 빌을 불러 독립선언서를 신발 뒤축에 숨겨 몰래 한국을 빠져나가게 했다.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다. 전 세계 신문에 한국의 3.1운동에 대한 기사가 실렸고, 그와 함께 독립선언서가 한 글자도 빠지지 않고 실렸는데 바로 앨버트가 보낸 독립선언서였다.
세월이 흘러 브루스는 멋진 청년으로 자랐다. 브루스가 스물한 살이 되던 1940년 어느 날, 브루스는 군대에 입대하기 위해 집을 떠나야 했다. 메리는 정원으로 브루스를 불러 말했다. “브루스야, 네가 어디를 가더라도 언젠가는 꼭 돌아와야 할 너의 집은 바로 이곳이란다.” 그날의 작별이 6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어지게 된다. 1941년 12월, 미국과 일본 사이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다. 브루스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면서 생사조차 확인이 되지 않았고, 일본 경찰들이 독립운동을 도왔던 앨버트를 체포해 갔다. 메리에게는 가택연금 조치가 내려졌고, 앨버트는 체포된 지 6개월 만에 돌아올 수 있었다. 테일러 부부는 브루스가 살아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랬지만, 브루스가 돌아오기 전에 일본 정부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아 모든 것을 남겨 둔 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딜쿠샤'는 테일러 가족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도 돌아오지 않았다. 돌보는 손길이 사라진 ‘딜쿠샤'는 폐허처럼 변했다.
1945년 8월 15일. “대한 독립 만세!”라는 거대한 함성 소리에 ‘딜쿠샤'는 잠을 깼다.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한국인들은 나라를 되찾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딜쿠샤' 안에 있던 물건들을 모조리 팔아버리고 떠났고, 텅 빈 건물 안으로 북쪽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피난민들은 주인 없는 집을 지탱하고 있던 나무들을 베어 장작으로 썼고, 건물을 휘감고 있던 파이프와 전선을 팔아 필요한 물건을 구하기도 했다. ‘딜쿠샤'는 온통 헤집어지고 뜯긴 채로 테일러 가족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1948년 가을 어느 날, 커다란 은행나무 뒤로 메리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메리 혼자였다. 메리는 ‘딜쿠샤'에게 앨버트의 마지막 순간을 들려주었다. “우린 추방당한 다음에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살았어. 매일 한국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지. 앨버트는 태평양 너머에 자기 나라가 있고, 자기 집이 있다고 늘 얘기했단다. 그러면서 만약 자기가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죽거든 자기의 재를 한국 땅에 묻어 달라고 부탁했지. 힘들게 한국으로 돌아갈 날을 잡았는데… 앨버트는 그날을 얼마 앞두고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단다. 난 앨버트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어렵게 한국으로 떠나는 미국 군함을 얻어 탔어. 그리고 저 아래 한강이 보이는 양화진 묘지에 앨버트를 묻었지.”
1950년 여름, 남한과 북한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밀려오는 피난민들이 ‘딜쿠샤'로 찾아들었다가 다시 또 어디론가 떠나갔다. 3년간의 전쟁이 끝난 후 수많은 건물들이 사라졌지만 ‘딜쿠샤'는 운 좋게도 살아남았다. 폐허가 되었던 도시는 빠르게 복구되기 시작했고 높은 건물들이 서울을 뒤덮기 시작했다. 1960년이 지나가자 사람들이 ‘딜쿠샤'를 허물고 그 자리에 멋진 빌딩을 짓겠다고 했다. 하지만 기적처럼 ‘딜쿠샤' 밑으로 터널이 지나간다는 소식이 들렸다. 터널 위에 집을 고쳐 지을 수 없는 법 때문에 위기 속에서도 살아남게 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딜쿠샤'는 점점 낡아 갔다. 오랫동안 방치된 건물을 두고 사람들의 무성한 추측과 소문만 퍼져갔다. 역사가들과 건축가들이 조사를 하다가 ‘DILKUSHA 1923’라고 새겨진 글씨를 발견한다. 오랫동안 잊혀진 ‘딜쿠샤'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러나 낯선 이름을 만난 사람들은 이런저런 추측을 할 뿐이었다. 이 도시에서 테일러 가족을 기억하는 건 ‘딜쿠샤’와 은행나무뿐이었다.
찬바람으로 매섭던 어느 겨울날, 은행나무 뒤로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노인과 금발의 젊은 여자였다. 바로 브루스와 아내 조이스, 그리고 두 사람의 딸 제니퍼였다. 브루스는 주위를 둘러보다 ‘딜쿠샤'를 발견하고 멈추어 섰다. 꼬마 브루스가 여든일곱 살의 노인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브루스는 어머니 메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머니는 이 집이 우리 가족의 희망의 궁전이 되길 바랐던 것처럼 오래도록 한국인들의 희망의 안식처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고 말씀하셨지.” 브루스는 마지막이 될 만남을 뒤로하고 딸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떠나갔다. 행촌동 언덕 위에서 10년을 버티던 어느 날 ‘딜쿠샤'를 문화재로 지정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테일러 가족의 희망 ‘기쁜 마음의 궁전’
‘딜쿠샤'의 이야기는 일제시대부터 독립과 대한민국 건국, 그리고 6.25를 거쳐 오늘날까지 우리의 근현대사를 서울이 내려다보이는 행촌동 언덕의 아주 특별한 집 ‘딜쿠샤'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책이다. 창문 밖 풍경을 통해 테일러 가족의 평화로운 시절, 독립의 함성이 들리는 듯 태극기가 휘날리는 광경, 전쟁의 한복판에서 폐허가 된 서울의 풍경과 빠르게 복구되어 빌딩으로 가득 차는 풍경까지 독자는 딜쿠샤의 눈이 되어 묵묵히 우리 역사를 바라보고 마주하게 된다. 테일러 부부는 왜 멀고 먼 어느 식민지 나라에 와서 이렇게 아름다운 집을 짓고 살았을까? 무엇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힘을 다했을까? 왜 가난하고 희망이 없어 보이는 이 땅을 언젠가 꼭 돌아와야 할 나의 집이라고 여겼을까? 더군다나 황망하게 쫓겨났던 나라에 자신의 재를 묻기 위해 다시 돌아왔을까?
단순한 사업가라면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질 필요도, 그로 인해 모든 것을 남겨두고 추방당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을 딜쿠샤에서 보낸 아들 브루스가 평생을 그리워하며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 할아버지가 되어 다시 찾을 이유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테일러 부부의 손녀이자 브루스의 딸인 제니퍼가 ‘딜쿠스'와 관련된 모든 자료들을 기증하여 복원할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도울 이유도 없을 것이다. 오직 메리의 바람처럼 ‘딜쿠샤'가 한국인들의 희망의 안식처가 되길 간절히 바라는 진실한 마음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 마음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앨버트가 양화진 묘지에 묻혔다는 사실과 ‘딜쿠샤'에 새겨진 시편 127장 1절의 말씀이 없었다면 아마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
우리들의 아픈 근대사에 낯선 서양인들이 등장한다. 하나님을 전하고자 성경을 들고 이 땅에 도착한 선교사들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생생한 고대 근동의 역사는 잘 알고 있다. 2,000여 년 전 이스라엘에 예수라는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3일 만에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명하고 승천하였다. 예수의 마지막 말씀은 ‘가서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돼라’는 것이었다. 예수를 직접 경험했던 사람들이 생명을 걸고 십자가의 복음을 들고 모든 민족, 모든 열방으로 나아갔고, 역사를 이어 그 발걸음이 한반도 땅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은 1890년 한국을 위해 공헌한 외국인 묘지로 시작했지만 안장된 거의 대부분은 기독교 선교사들이었다. 앨버트는 한국에서 기업인으로, 기자로 활동했지만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사업만을 위해 척박한 식민지 조선에 온 것이 아니라 신앙인으로서 선교사와 같은 마음으로 진실하게 조선을 사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무 희망이 없어 보이는 이 땅에서 선교사들은 빛을 보았고 꿈을 꾸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조선을 향해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는 놀랍게도 이런 기도를 했다. ‘지금은 예배 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는 31년간 교육과 의료 선교에 헌신하며 연세대학교를 이 땅에 심었다. 메리도 똑같은 소망으로 딜쿠샤가 한국인들에게 기쁨의 궁전이 되고 희망의 안식처가 되길 바랐다.
이땅의 선교사들 :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유능하고 열정적인 수많은 젊은이들이 조선 땅에 선교사로 자원하여 생명을 바치며 특별한 역사를 이루어갔다. 1866년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를 시작으로 한반도에 기독교 역사가 시작된다. 기독인이 아니어도 1885년 공식 선교사 자격으로 조선에 도착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 1858~1902)에 대해 들어보았을 것이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후손들은 4대째 한국을 위한 선교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언더우드 2세는 1949년 자택에서 공산당의 흉탄에 아내를 잃었다. 이 일로 심장에 병을 얻어 미국으로 요양을 갔으나 6.25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주변의 모든 만류를 물리치고 한국전쟁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급히 돌아온다.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한국의 비극과 믿음(The Tragedy and Faith in Korea)>이라는 글을 어떤 참고 자료도 없이 써 내려갈 정도로 한국학에 정통했다. 아펜젤러는 1886년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배재학당’을 설립하고 교육에 힘썼다. 청년들에게 기독교 정신과 함께 민주주의, 근대식 문화, 자유주의 사상을 자연스럽게 가르치면서 ‘欲爲大者當爲人役(욕위대자당위인역 : 크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섬겨야 한다)’이라는 성경 말씀(마20:26~28)을 의미하는 교훈으로 전인교육에 힘썼다. 그로 인해 많은 애국지사들이 배출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또 순 한글신문 <독립신문>과 성경, 찬송가 등 많은 문서들을 출판하여 한국인들이 오히려 한글의 우수성을 깨닫고 연구하도록 도왔다.
윌리엄 스크랜턴과 메리 스크랜턴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1856~1922)은 그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Mary F. Scranton, 1832~1909)과 함께 조선 땅에 왔다. 남편을 잃고 선교사가 되기로 기도하던 어머니와 함께 의사인 29살의 아들이 함께 조선으로 오게 된 것이다.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은 53세로, 당시로서는 고령의 나이였다. 그들은 살고 있던 한옥집을 개조하여 환자들을 돌보았는데, 당시 조선 사람들은 죽어가는 중환자를 길바닥에 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스크랜턴은 이런 환자들을 집으로 데려와 극진히 돌봐주었다. 그들은 조선 최초의 개신교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꽤 큰 규모의 병원을 설립하여 개원하게 되는데, 1887년 그들의 헌신적인 활동에 감동을 받은 고종이 ‘시병원(施病院, 만민을 구하는 병원)'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알렌이 고종황제의 신임을 받아 세운 ‘제중원'은 비교적 상류층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었으나, ‘시병원’은 정말 시골 골짜기 같은 곳에 사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병원이었다. 약값 외에는 무료 진료였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약 값도 무료였기에 사람들은 그 은혜를 표현하고자 과일과 달걀, 한국음식을 가지고 왔다. 당시 조선은 가난함이 비참하다고 할 시절이라 여자아이들을 길거리에 버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1886년 6월 메리 스크랜턴은 길에 버려진 소녀 2명을 데려와 가르치기 시작한다. 11월에는 4명, 1887년 1월에는 7명으로 늘면서,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인 ‘이화학당(梨花學堂, 배꽃)’이 탄생한다. 한글, 한문, 영어를 읽고 쓸 수 있도록 가르쳤고, 특히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는 사고력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하여 많은 여성들이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지성과 인품을 겸비한 지어미들이 되었다. 메리 스크랜튼은 <The Goespel in all Lands for 1888>에 이런 글을 남겼다. “우리의 목표는 여인들로 하여금 우리 외국인들의 생활양식, 의복 및 환경에 맞추어 바꿔지기를 바라는 데 있지 않다. 다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하여 보다 나은 ‘진정한 한국인'으로 당당하게 서도록 하는 것이다.”
존 헤론과 올리버 애비슨
존 헤론(Heron. John W, 1856~1890)은 테네시 의대를 수석 졸업한 인재였다. 조선에서 의사를 구한다는 정보를 들은 그는 ‘이제 준비되었으니 미지의 땅으로 가라'라는 감동으로 하나님께서 왜 의학 공부를 시키시고 훌륭한 의사가 되게 하셨는지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의 조선행을 가로막는 하나의 장벽이 있었는데 바로 약혼녀 해티였다. 그녀는 미개하고 더럽기 짝이 없는 가난한 나라를 가고자 하는 그를 극구 말렸다. 존 헤론은 해티와 하나님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가지면서 해티가 조선을 사랑할 수 있도록 전적으로 기도하였다. 결국 해티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모든 민족을 사랑하시는지 깨닫고 부르심에 순종하고 태평양을 건넌다. 존 헤론은 촉망받는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제중원의 의사로 헌신하였다. 그러나 전염병이 유행하던 시기에 수많은 환자들을 돌보다가 본인이 전염병에 걸려 발병 3주만에 부르심을 받는다. 그는 임종 전에 아내와 두 딸에게 ‘한국과 한국인을 더 뜨겁게 사랑하고 싶소.’라고 말하며 함께 일하던 조선인들을 불러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라는 유언을 마치고 임종하였다. 헤론의 시신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양화진 나루터 언덕에 묻혔고, 이것이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의 시작이다. 언더우드는 사랑하는 친구를 이곳에 묻고 안식년 차 미국에 갔을 때, “나의 친구 헤론을 대신하여 조선을 섬길 의사가 필요합니다”라며 가는 곳마다 간청하였다.
이때, 토론토 대학의 교수였던 올리버 애비슨(Oliver R. Avison, 1860~1956)이 이 메시지에 반응한다. 조선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것 같았지만 선뜻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조선에 가려면 배를 타고 한 달 가까이 태평양을 건너야 하는데 그에게는 이미 세 명의 아이가 있었고, 아내는 넷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애비슨은 부르심을 놓고 기도하기 시작하는데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 하리라.' 라는 말씀을 붙잡고 세 아이와 임신한 아내를 데리고 조선으로 향한다. 먼저 일본에 도착한 뒤 다시 부산으로 건너와 잠시 정박해 있는 사이 넷째 아이를 출산 후, 애비슨 가족은 제중원을 찾아가 존 헤론의 사역을 이어간다. 너무나 열악한 병원 시설 때문에 환자들을 제대로 치료할 수가 없어서 시설이 갖춰진 병원이 반드시 필요함을 느끼고 안식년 차 미국에 갔을 때 이와 같은 사정을 주변에 알린다. 이에 기업인 루이 세브란스가 반응하여 엄청난 돈을 기부하여 세브란스 기념병원이 생기게 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조선인 의료인을 양성하기 위해 그는 ‘연희전문학교’를 세웠으며 혹독히 훈련을 시켜 1908년 최초로 조선인 의사 7명을 배출해 내었다는 사실이다. ‘연희 전문대’와 ‘세브란스 전문의대’가 병합하여 지금의 연세대학교가 세워진다.
앨리스 하몬드와 로버트 샤프
1900년 엘리스 하몬드(Alice J. Hammond Sharp, 1871~1972)가 이화학당의 교사로 온다. 1903년 로버트 샤프 선교사와 결혼하고, 공주에서 함께 사역을 한다. 로버트 샤프 선교사가 집회를 마치고 공주로 돌아오는 중 진눈깨비를 피해 잠깐 들어간 곳이 얼마 전 장티푸스로 죽은 자의 상여가 놓여있던 상엿집이었고, 안타깝게도 그는 장티푸스 감염으로 공주 땅에 묻힌다. 샤프 선교사의 무덤은 아직도 ‘영명동산’으로 불리며 보존되어 있다. 남편을 잃은 앨리스 선교사는 잠시 미국에 갔지만 다시 조선에 돌아와 한평생 결혼하지 않고 남편의 무덤 곁에서 충청도의 소녀들과 부인들을 위해 헌신하고, 1939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는 78세까지 조선민족을 섬겼다. 그녀는 강경, 보령, 홍성, 천안 등 곳곳에 교회와 학교를 세운다. 특히 1913년 천안 제령리에서 성경암송도 잘하고 영특하고 똑똑한 한 소녀를 만나 공주로 데려와 명선 여학교(영명학교 전신)에서 공부를 시키고, 서울 이화학당으로 유학을 보낸다. 그 소녀가 바로 '유관순'이다. 그러다가 3.1 운동이 일어난다. 끝까지 만세운동을 벌이는 이화학당에 휴교령이 내려져 모든 여학생들이 고향으로 내려가게 된다. 유관순은 천안에 가서도 만세운동을 이어갔고, 결국 투옥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며 꽃 같은 나이에 ‘조국을 위해 바칠 목숨이 한 개뿐이라는 것이 안타깝다'라는 말을 남기고 목숨을 잃었다.
루피 켄드릭
양화진 묘지에 루피 켄드릭(Rubye Rachel kendrik, 1883-1908) 선교사의 비문이 있다. 1907년 25세의 나이에 한국에 온 지 9개월 만에 병에 걸려 미처 선교의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26세의 나이에 순교했다. 루비 켄드릭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내게 만약 천 개의 목숨이 있다면, 그 모두를 조선에 주겠습니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만일 내가 죽으면 텍사스 청년들에게 가서 열 명씩, 스무 명씩, 오십 명씩 조선으로 오라고 일러 주십시오.” 그녀의 말은 텍사스 엡윗청년회(Epworth League) 컨퍼런스에 전달되었고, 그 자리에 참석한 수많은 젊은이의 가슴에 불씨를 지폈다. 그들 중 20여 명이 은둔의 나라 조선으로 달려왔다. 루비 켄드릭 선교사가 죽기 전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아버지, 어머니! 어쩌면 이 편지가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곳에 오기 전 뒤뜰에 뿌렸던 한 알의 씨앗으로 인해 내년이면 꽃으로 가득하겠고 또 다른 씨앗들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저도 이곳에서 작은 씨앗이 될 것입니다. 제가 씨앗이 되어 이 땅에 묻혔을 때 언젠가 하나님의 시간이 되면 조선 땅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나고 그들도 또한 여러 나라에 씨앗이 될 것입니다. 오늘 밤에는 유난히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외국인을 죽이고 기독교인들을 증오한다는 소문 때문에 부두에 서서 끝까지 만류하시던 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제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심장을 이 땅에 묻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제가 조선을 향해 가지는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선을 향해 가지신 열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
'평양외국인학교'의 루스 벨과 빌리 그레이엄
1900년에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학교가 평양에 세워진다. 학교 이름은 ‘평양외국인학교(PYENGYANG FOREIGN SCHOOL)'이다. 이 학교에서 루스 벨(Ruth Bell)이라는 여학생이 졸업하는데, 훗날 결혼을 하는데 남편이 바로 빌리그레이엄(Billy Graham) 목사이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루스 벨은 남편에게 자신이 본 평양을 증거한다. ‘내가 본 평양은 수많은 흰옷 입은 사람들이 전심으로 기도하고 예배하던 곳입니다. 그 땅이 공산화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 죽음뿐입니다.’ 그녀의 간절한 간청에 빌리 그레이엄은 당시 트루먼 대통령에게 한국을 구해야 한다는 전보를 전했고, 6.25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한국을 방문한다.
'평양외국인학교'의 윌리엄 얼쇼와 윌리엄 해밀턴 쇼
우리가 기억해야 할 ‘평양외국인학교’를 졸업한 또 한 명의 선교사 자녀가 있다. 1922년 평양에서 태어난 윌리엄 얼쇼(William Earl Shaw)의 아들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이다. 고등학교까지 평양에서 마치고 미국으로 대학을 가서 공부하던 중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곧바로 해군 장교로 자원하였고, 1947년~48년에는 한국 해안경비대 교관으로 자원하여 한국 해군과 해병대 창설에 기여했다. 그는 부모님의 뒤를 이어 한국의 선교사가 되기를 결심하고,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던 중 한국의 6.25 전쟁 소식을 접한다. ‘하나님, 한국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할까요?’ 번민중에 성경말씀을 묵상하던 그는 이 구절을 본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3)’ 그는 아내와 두 아들을 찾아가 말한다. “한국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그냥 있을 수가 없소. 군대에 재입대하겠소.” 아버지 윌리엄 얼쇼 선교사는 6.25 때 한국을 떠나지 않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사명으로 군목으로 남아 있었고,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아들의 편지 한 장이 날아온다. ‘저는 한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 저는 선교사가 되어 한국으로 가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 국민이 전쟁 속에서 고통 당하고 있는데 이를 먼저 돕지 않고, 전쟁이 끝난 후 평화가 왔을 때 한국에 선교사로 간다는 것은 제 양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1950년 8월 미 극동사령부 정보장교로 파송 받아 맥아더 사령관의 작전 참모로 한국에 온다. ‘인천상륙작전’이 기적적으로 성공한다. 정보장교로서 ‘인천상륙작전’의 임무는 마쳤지만 그는 해병대에 자원하여 또 다른 임무를 맡는다. ‘최전선에서 작전을 펼치려면 한국말을 잘하는 제가 필요할 겁니다.’ 서울 탈환 작전 때는 ‘녹번리 전투’에서 첨병으로 앞서 나갔지만, 안타깝게도 매복해 있던 괴뢰군에게 첨병 모두가 전사한다. 자식을 먼저 보낸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윌리엄 얼쇼는 아들을 먼저 보낸 후에도 이 땅에 남아 사역을 감당하다가 17년이나 먼저 보낸 양화진의 아들 무덤 곁에 묻힌다.
자유대한민국의 거름이 된 선교 역사
이렇게 여러 선교사의 행적을 통하여 이 땅의 선교역사를 살펴보았다. 양화진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 수많은 선교사들이 묻혀 있다. 전주 예수병원, 광주 기독병원, 계성학교, 신명학교, 계명대학교, 영명학교, 숭인학교, 수피아여고, 신흥학교, 기전여고, 안동고 등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너무 방대해서 미처 언급하지 못한 선교사들의 땀과 눈물과 피의 희생으로 피어난 것이다. 세계를 품은 기독인들이 우리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물질을 보내주고, 몸소 이 땅에 와서 헌신적으로 고아와 병자와 가난한 자들을 살리고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여 이승만과 같은 지도자가 길러졌다. 곳곳에서 교육받은 젊은이들이 나라의 주역이 되어 대한민국은 성장하게 되었다. 잿더미가 된 대한민국이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국가가 된 것이다. 선교사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춘원 이광수는 <청춘>(1917년 7월 호)에 ‘야소교의 조선에 준 은혜'라는 글을 실어 예수교가 조선 문명사의 큰 은인으로 보고 그 은혜를 조목조목 정리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기독교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같은 엄연한 역사 앞에 숭고한 희생을 한 분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은 마땅한 도리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 선교사들의 역사가 가리어지고 왜곡되기 시작했다. 한편에선 선교사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싸늘하다.
역사를 기억하자
<딜쿠샤의 추억>은 출간된 지 오래되었지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다. ‘그림책박물관' 전시코너에 <딜쿠샤의 추억>을 항상 비치해 두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는 이는 별로 없다. 간혹 ‘딜쿠샤’를 안다며 운을 떼는 분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이 절로 들지만 어떤 사람들의 감상은 매우 놀랍다. 딜쿠샤 안주인(메리)이 그린 그림을 보았는데 조선인들을 매우 어둡고 불쌍하게 그리고 있는 모습에 미개인을 바라보는 제국주의자의 시선이 느껴져 슬프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을 향해 '제국주의의 앞잡이'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는 이도 있다. 선교사들에게 적대적인 감정이 드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가 공교육에서 배우는 역사 교과서가 기독교의 선교역사를 애써 지우고 폄하하는 잘못된 세계관과 역사관에 경도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독인들은 조선 땅에서 소외되고 학대받는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들을 섬겼다. 기독교를 전하자 6명의 첩을 자랑하던 할아버지가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변화되기 시작한 것이 반만년 역사가 바뀌는 기적의 시작이었다. 술 마시고, 도박판을 벌리던 게으른 젊은이와 아비들이 교회에서 가르침 받고 들었던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했을 때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시작되는 기적이 찾아왔다.
프랑스 정치 철학가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자유는 도덕성 없이 세워질 수 없고, 도덕성은 신앙 없이 세워질 수 없다'라고 말했다. 독일 나치정권의 만행을 보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자유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 지식인들이 자신들을 항상 진실의 대의에 헌신한다고 자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대학을 찾았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대학들은 침묵 속으로 도망쳤다. 그러다 나는 며칠간 빛을 발하는 사설로 자유에 대한 사랑을 선포한 위대한 신문 편집자들을 보았다. 하지만 그들도 대학들처럼 몇 주 만에 침묵을 지켰다. 나는 저술가들, 독일의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유문제와 현대 생활에서 그들의 위치에 대해 자주 논의한 사람들에게 연설했다. 그들도 깊은 침묵에 빠졌다. 교회 만이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 히틀러의 캠페인을 막고 있었다. 나는 이전에 교회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이제는 교회만이 지적 진리와 도덕적 자유를 지지할 용기와 끈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교회에 큰 애정과 감탄을 느낀다. 나는 내가 한때 멸시한 것을 이제는 전적으로 칭찬한다고 고백한다.’
독일의 교회만이 진리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듯이 진리를 발견한 이 땅의 어머니들이 깨어나고, 젊은이들이 미래를 꿈꾸기 시작하자 일본인들에게 선교사들은 눈엣가시였다.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되지 못하도록 미국 사회에 온갖 로비를 벌였다. 그때 선교사들에게 자유를 배우고 익혀 지적으로 새로워진 조선의 청년들이 유창한 영어로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사회적 분위기를 역전시켰던 위대한 역사는 가려져 있다. 1919년 4월, 미국이 독립선언문을 발표했던 바로 그 장소, 필라델피아에서 '한국의 독립'을 세계만방에 호소하기 위해 열렸던 ‘제1차 한인자유대회 (First Korean Congress)’의 놀라운 역사도 가려져 있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는 대한민국의 탄생이라는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6.25 전쟁을 자유 진영의 도움을 받아 극복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을 찾아온 선교사들의 헌신으로 한국인들의 사상과 정신이 새로워져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하게 되었고, 자본주의가 발전하여 무지와 가난을 극복하여 오늘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이루었으나, 이러한 역사를 자랑스럽게 배우지 못하고 있다.
성경에서는 ‘역사를 기억하라, 옛일을 기억하라, 네 청년의 때를 기억하라’ 누누이 강조한다. 현대사에서 지금의 대한민국이 세워지기까지 기독교가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100년도 지나지 않은 역사지만 우리는 건국 정신을 잊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람들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아무런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1억 명의 생명을 앗아간 철 지난 마르크스주의가 대두되는가 하면 북한을 옹호하는 친북 종북 사상이 유행하고, 반공정신을 시대에 뒤떨어진 정신으로 치부한다. 가정과 결혼, 성 윤리가 파괴되고, 소수자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도덕이 무너지고 있다. 한국은 역사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선교의 초창기부터 수많은 선교사들이 조선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미래를 바쳤다. 하나님을 믿던, 믿지 않던 우리가 기독교에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우방의 나라 미국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모든 국가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행한다. 그러나 미국을 천하의 제국주의 침략자라고 매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엄청난 자본을 들여 병원을 지어주고 학교를 지어주고 생명까지 다 주고 떠나가는 제국주의 침략자가 세상에 있는가?
마무리
폐허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한국인들에게 기쁨의 궁전이 되길 바랐던 ‘딜쿠샤'를 향한 메리의 진실한 마음을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받은 은혜를 진정한 자유가 필요한 어두운 곳에 흘려보내는 대한민국이 되어야 하겠다. 올바른 인간관과 세계관을 갖는 것은 역사를 바르게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올바른 역사 인식을 통하여 나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 다음 세대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힘써 계승해야 한다. 놀랍고 위대한 대한민국의 역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기적의 역사이다.
참고도서
[1] 유성실. <대한독립을 빛낸 헐버트와 초기 기독선교사>, 도서출판 현대사포럼
[2] 월드뷰 2023년 1월호 류금주 <기독교는 대한민국 건국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3] 어원 W. 루처 <국가가 하나님을 잊을 때>. CLC
[4] 이용남. <복음에 미치다>.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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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해영 | 그림책박물관 운영 그림책을 역사적으로 정리하는 '그림책박물관' (picturebook-museum.com)을 운영하며, 그림책으로 생명을 살리는 매거진 '그림책 BASIC' (picturcebool-basic.com)을 통해 바른 성경적 세계관의 그림책을 연구하고 전하고 있으며, 좋은 그림책을 읽고 살펴볼 수 있는 '그림책박물관'이라는 북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
우리는 딜쿠샤를 어떻게 추억하는가? 『딜쿠샤의 추억』
『딜쿠샤의 추억』 자세히보기
서울시 종로구 행촌동 1번지에 있는 붉은 벽돌로 된 아주 특별한 2층집 ‘딜쿠샤'를 아는가? 그림책 『딜쿠샤의 추억』은 바로 그 집에 관한 이야기이자 기억해야 할 우리의 역사이기도 하다. 누가, 왜 건축하였고,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딜쿠샤'의 지나온 이야기가 담겨 있다. 모든 이야기에는 미처 알려지지 않았던 진실과 감동을 주는 특별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딜쿠샤라는 원석을 알아보고 소중하게 빛을 내어 보석처럼 세상에 전해준 이는 건축과 역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작가와 프로듀서였다. 저자는 2005년 ‘딜쿠샤'를 만나자마자 첫눈에 매료되었고, 그때부터 딜쿠샤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해 오다가 2013년에 <희망의 궁전, 딜쿠샤>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2017년 그림책으로 출간했다. 다큐멘터리 작가와 프로듀서로서의 재능이 ‘그림책’이라는 매체를 만나 시너지를 발휘한다. 진리, 우정, 사랑, 역경, 용기와 같은 아름다운 성품을 고양시키는 진실된 이야기가 예술적인 글과 그림의 조화를 이루며 감동으로 밀려온다. 100여 년을 이 땅에서 함께한 ‘딜쿠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딜쿠샤의 이야기
1917년 어느 날. 인왕산 성벽을 따라 산책을 하고 있던 신혼부부,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 1875년~1948년)와 영국인 메리 테일러(Mary Linley Taylor, 1889년~1982년)는 커다란 은행나무를 보고 마음을 빼앗겨 그 옆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메리는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의 ‘딜쿠샤'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앨버트는 건물 밑에 성경의 시편 127장 1절을 새겼다.
‘딜쿠샤'는 발밑에 새긴 이 구절이 파란만장한 자기의 삶을 지켜 줄 줄은 그때만 해도 알지 못했다. 1923년 붉은 벽돌로 쌓은 아름다운 집 ‘딜쿠샤'가 완성되었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도, 서울에 사는 외국인들도 모두 구경하러 올 정도로 크고 훌륭한 서양식 건물이었다. 이때는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점령하고 있던 시절이다. 앨버트는 한국의 상황과 독립에 무척 관심이 많아서 한국에 관한 기사를 많이 써왔다. 테일러 부부에게 ‘브루스’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한국과 특별한 운명으로 맺어진 아들 브루스의 탄생 이야기는 두 부부에게 매우 중요했다.
브루스는 1919년 2월 28일 3.1운동 하루 전날 태어났다. 병원에서 브루스를 낳은 메리는 앨버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병원이 소란스러워지더니 간호사들이 메리의 침대에 종이 뭉치를 숨기고는 재빨리 사라졌다. 간호사들이 사라지자마자 일본 경찰들이 들이닥쳐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지만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날 밤, 앨버트가 브루스를 안아 올리자 종이 뭉치가 발밑에 떨어졌다. 종이를 들여다보던 앨버트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그 종이 뭉치는 바로 3.1 독립 선언서였다. 앨버트는 동생 빌을 불러 독립선언서를 신발 뒤축에 숨겨 몰래 한국을 빠져나가게 했다.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다. 전 세계 신문에 한국의 3.1운동에 대한 기사가 실렸고, 그와 함께 독립선언서가 한 글자도 빠지지 않고 실렸는데 바로 앨버트가 보낸 독립선언서였다.
세월이 흘러 브루스는 멋진 청년으로 자랐다. 브루스가 스물한 살이 되던 1940년 어느 날, 브루스는 군대에 입대하기 위해 집을 떠나야 했다. 메리는 정원으로 브루스를 불러 말했다. “브루스야, 네가 어디를 가더라도 언젠가는 꼭 돌아와야 할 너의 집은 바로 이곳이란다.” 그날의 작별이 6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어지게 된다. 1941년 12월, 미국과 일본 사이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다. 브루스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면서 생사조차 확인이 되지 않았고, 일본 경찰들이 독립운동을 도왔던 앨버트를 체포해 갔다. 메리에게는 가택연금 조치가 내려졌고, 앨버트는 체포된 지 6개월 만에 돌아올 수 있었다. 테일러 부부는 브루스가 살아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랬지만, 브루스가 돌아오기 전에 일본 정부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아 모든 것을 남겨 둔 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딜쿠샤'는 테일러 가족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도 돌아오지 않았다. 돌보는 손길이 사라진 ‘딜쿠샤'는 폐허처럼 변했다.
1945년 8월 15일. “대한 독립 만세!”라는 거대한 함성 소리에 ‘딜쿠샤'는 잠을 깼다.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한국인들은 나라를 되찾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딜쿠샤' 안에 있던 물건들을 모조리 팔아버리고 떠났고, 텅 빈 건물 안으로 북쪽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피난민들은 주인 없는 집을 지탱하고 있던 나무들을 베어 장작으로 썼고, 건물을 휘감고 있던 파이프와 전선을 팔아 필요한 물건을 구하기도 했다. ‘딜쿠샤'는 온통 헤집어지고 뜯긴 채로 테일러 가족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1948년 가을 어느 날, 커다란 은행나무 뒤로 메리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메리 혼자였다. 메리는 ‘딜쿠샤'에게 앨버트의 마지막 순간을 들려주었다. “우린 추방당한 다음에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살았어. 매일 한국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지. 앨버트는 태평양 너머에 자기 나라가 있고, 자기 집이 있다고 늘 얘기했단다. 그러면서 만약 자기가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죽거든 자기의 재를 한국 땅에 묻어 달라고 부탁했지. 힘들게 한국으로 돌아갈 날을 잡았는데… 앨버트는 그날을 얼마 앞두고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단다. 난 앨버트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어렵게 한국으로 떠나는 미국 군함을 얻어 탔어. 그리고 저 아래 한강이 보이는 양화진 묘지에 앨버트를 묻었지.”
1950년 여름, 남한과 북한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밀려오는 피난민들이 ‘딜쿠샤'로 찾아들었다가 다시 또 어디론가 떠나갔다. 3년간의 전쟁이 끝난 후 수많은 건물들이 사라졌지만 ‘딜쿠샤'는 운 좋게도 살아남았다. 폐허가 되었던 도시는 빠르게 복구되기 시작했고 높은 건물들이 서울을 뒤덮기 시작했다. 1960년이 지나가자 사람들이 ‘딜쿠샤'를 허물고 그 자리에 멋진 빌딩을 짓겠다고 했다. 하지만 기적처럼 ‘딜쿠샤' 밑으로 터널이 지나간다는 소식이 들렸다. 터널 위에 집을 고쳐 지을 수 없는 법 때문에 위기 속에서도 살아남게 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딜쿠샤'는 점점 낡아 갔다. 오랫동안 방치된 건물을 두고 사람들의 무성한 추측과 소문만 퍼져갔다. 역사가들과 건축가들이 조사를 하다가 ‘DILKUSHA 1923’라고 새겨진 글씨를 발견한다. 오랫동안 잊혀진 ‘딜쿠샤'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러나 낯선 이름을 만난 사람들은 이런저런 추측을 할 뿐이었다. 이 도시에서 테일러 가족을 기억하는 건 ‘딜쿠샤’와 은행나무뿐이었다.
찬바람으로 매섭던 어느 겨울날, 은행나무 뒤로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노인과 금발의 젊은 여자였다. 바로 브루스와 아내 조이스, 그리고 두 사람의 딸 제니퍼였다. 브루스는 주위를 둘러보다 ‘딜쿠샤'를 발견하고 멈추어 섰다. 꼬마 브루스가 여든일곱 살의 노인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브루스는 어머니 메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머니는 이 집이 우리 가족의 희망의 궁전이 되길 바랐던 것처럼 오래도록 한국인들의 희망의 안식처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고 말씀하셨지.” 브루스는 마지막이 될 만남을 뒤로하고 딸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떠나갔다. 행촌동 언덕 위에서 10년을 버티던 어느 날 ‘딜쿠샤'를 문화재로 지정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테일러 가족의 희망 ‘기쁜 마음의 궁전’
‘딜쿠샤'의 이야기는 일제시대부터 독립과 대한민국 건국, 그리고 6.25를 거쳐 오늘날까지 우리의 근현대사를 서울이 내려다보이는 행촌동 언덕의 아주 특별한 집 ‘딜쿠샤'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책이다. 창문 밖 풍경을 통해 테일러 가족의 평화로운 시절, 독립의 함성이 들리는 듯 태극기가 휘날리는 광경, 전쟁의 한복판에서 폐허가 된 서울의 풍경과 빠르게 복구되어 빌딩으로 가득 차는 풍경까지 독자는 딜쿠샤의 눈이 되어 묵묵히 우리 역사를 바라보고 마주하게 된다. 테일러 부부는 왜 멀고 먼 어느 식민지 나라에 와서 이렇게 아름다운 집을 짓고 살았을까? 무엇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힘을 다했을까? 왜 가난하고 희망이 없어 보이는 이 땅을 언젠가 꼭 돌아와야 할 나의 집이라고 여겼을까? 더군다나 황망하게 쫓겨났던 나라에 자신의 재를 묻기 위해 다시 돌아왔을까?
단순한 사업가라면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질 필요도, 그로 인해 모든 것을 남겨두고 추방당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을 딜쿠샤에서 보낸 아들 브루스가 평생을 그리워하며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 할아버지가 되어 다시 찾을 이유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테일러 부부의 손녀이자 브루스의 딸인 제니퍼가 ‘딜쿠스'와 관련된 모든 자료들을 기증하여 복원할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도울 이유도 없을 것이다. 오직 메리의 바람처럼 ‘딜쿠샤'가 한국인들의 희망의 안식처가 되길 간절히 바라는 진실한 마음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 마음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앨버트가 양화진 묘지에 묻혔다는 사실과 ‘딜쿠샤'에 새겨진 시편 127장 1절의 말씀이 없었다면 아마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
우리들의 아픈 근대사에 낯선 서양인들이 등장한다. 하나님을 전하고자 성경을 들고 이 땅에 도착한 선교사들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생생한 고대 근동의 역사는 잘 알고 있다. 2,000여 년 전 이스라엘에 예수라는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3일 만에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명하고 승천하였다. 예수의 마지막 말씀은 ‘가서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돼라’는 것이었다. 예수를 직접 경험했던 사람들이 생명을 걸고 십자가의 복음을 들고 모든 민족, 모든 열방으로 나아갔고, 역사를 이어 그 발걸음이 한반도 땅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은 1890년 한국을 위해 공헌한 외국인 묘지로 시작했지만 안장된 거의 대부분은 기독교 선교사들이었다. 앨버트는 한국에서 기업인으로, 기자로 활동했지만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사업만을 위해 척박한 식민지 조선에 온 것이 아니라 신앙인으로서 선교사와 같은 마음으로 진실하게 조선을 사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무 희망이 없어 보이는 이 땅에서 선교사들은 빛을 보았고 꿈을 꾸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조선을 향해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는 놀랍게도 이런 기도를 했다. ‘지금은 예배 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는 31년간 교육과 의료 선교에 헌신하며 연세대학교를 이 땅에 심었다. 메리도 똑같은 소망으로 딜쿠샤가 한국인들에게 기쁨의 궁전이 되고 희망의 안식처가 되길 바랐다.
이땅의 선교사들 :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유능하고 열정적인 수많은 젊은이들이 조선 땅에 선교사로 자원하여 생명을 바치며 특별한 역사를 이루어갔다. 1866년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를 시작으로 한반도에 기독교 역사가 시작된다. 기독인이 아니어도 1885년 공식 선교사 자격으로 조선에 도착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 1858~1902)에 대해 들어보았을 것이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후손들은 4대째 한국을 위한 선교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언더우드 2세는 1949년 자택에서 공산당의 흉탄에 아내를 잃었다. 이 일로 심장에 병을 얻어 미국으로 요양을 갔으나 6.25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주변의 모든 만류를 물리치고 한국전쟁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급히 돌아온다.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한국의 비극과 믿음(The Tragedy and Faith in Korea)>이라는 글을 어떤 참고 자료도 없이 써 내려갈 정도로 한국학에 정통했다. 아펜젤러는 1886년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배재학당’을 설립하고 교육에 힘썼다. 청년들에게 기독교 정신과 함께 민주주의, 근대식 문화, 자유주의 사상을 자연스럽게 가르치면서 ‘欲爲大者當爲人役(욕위대자당위인역 : 크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섬겨야 한다)’이라는 성경 말씀(마20:26~28)을 의미하는 교훈으로 전인교육에 힘썼다. 그로 인해 많은 애국지사들이 배출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또 순 한글신문 <독립신문>과 성경, 찬송가 등 많은 문서들을 출판하여 한국인들이 오히려 한글의 우수성을 깨닫고 연구하도록 도왔다.
윌리엄 스크랜턴과 메리 스크랜턴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1856~1922)은 그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Mary F. Scranton, 1832~1909)과 함께 조선 땅에 왔다. 남편을 잃고 선교사가 되기로 기도하던 어머니와 함께 의사인 29살의 아들이 함께 조선으로 오게 된 것이다.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은 53세로, 당시로서는 고령의 나이였다. 그들은 살고 있던 한옥집을 개조하여 환자들을 돌보았는데, 당시 조선 사람들은 죽어가는 중환자를 길바닥에 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스크랜턴은 이런 환자들을 집으로 데려와 극진히 돌봐주었다. 그들은 조선 최초의 개신교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꽤 큰 규모의 병원을 설립하여 개원하게 되는데, 1887년 그들의 헌신적인 활동에 감동을 받은 고종이 ‘시병원(施病院, 만민을 구하는 병원)'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알렌이 고종황제의 신임을 받아 세운 ‘제중원'은 비교적 상류층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었으나, ‘시병원’은 정말 시골 골짜기 같은 곳에 사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병원이었다. 약값 외에는 무료 진료였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약 값도 무료였기에 사람들은 그 은혜를 표현하고자 과일과 달걀, 한국음식을 가지고 왔다. 당시 조선은 가난함이 비참하다고 할 시절이라 여자아이들을 길거리에 버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1886년 6월 메리 스크랜턴은 길에 버려진 소녀 2명을 데려와 가르치기 시작한다. 11월에는 4명, 1887년 1월에는 7명으로 늘면서,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인 ‘이화학당(梨花學堂, 배꽃)’이 탄생한다. 한글, 한문, 영어를 읽고 쓸 수 있도록 가르쳤고, 특히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는 사고력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하여 많은 여성들이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지성과 인품을 겸비한 지어미들이 되었다. 메리 스크랜튼은 <The Goespel in all Lands for 1888>에 이런 글을 남겼다. “우리의 목표는 여인들로 하여금 우리 외국인들의 생활양식, 의복 및 환경에 맞추어 바꿔지기를 바라는 데 있지 않다. 다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하여 보다 나은 ‘진정한 한국인'으로 당당하게 서도록 하는 것이다.”
존 헤론과 올리버 애비슨
존 헤론(Heron. John W, 1856~1890)은 테네시 의대를 수석 졸업한 인재였다. 조선에서 의사를 구한다는 정보를 들은 그는 ‘이제 준비되었으니 미지의 땅으로 가라'라는 감동으로 하나님께서 왜 의학 공부를 시키시고 훌륭한 의사가 되게 하셨는지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의 조선행을 가로막는 하나의 장벽이 있었는데 바로 약혼녀 해티였다. 그녀는 미개하고 더럽기 짝이 없는 가난한 나라를 가고자 하는 그를 극구 말렸다. 존 헤론은 해티와 하나님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가지면서 해티가 조선을 사랑할 수 있도록 전적으로 기도하였다. 결국 해티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모든 민족을 사랑하시는지 깨닫고 부르심에 순종하고 태평양을 건넌다. 존 헤론은 촉망받는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제중원의 의사로 헌신하였다. 그러나 전염병이 유행하던 시기에 수많은 환자들을 돌보다가 본인이 전염병에 걸려 발병 3주만에 부르심을 받는다. 그는 임종 전에 아내와 두 딸에게 ‘한국과 한국인을 더 뜨겁게 사랑하고 싶소.’라고 말하며 함께 일하던 조선인들을 불러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라는 유언을 마치고 임종하였다. 헤론의 시신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양화진 나루터 언덕에 묻혔고, 이것이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의 시작이다. 언더우드는 사랑하는 친구를 이곳에 묻고 안식년 차 미국에 갔을 때, “나의 친구 헤론을 대신하여 조선을 섬길 의사가 필요합니다”라며 가는 곳마다 간청하였다.
이때, 토론토 대학의 교수였던 올리버 애비슨(Oliver R. Avison, 1860~1956)이 이 메시지에 반응한다. 조선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것 같았지만 선뜻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조선에 가려면 배를 타고 한 달 가까이 태평양을 건너야 하는데 그에게는 이미 세 명의 아이가 있었고, 아내는 넷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애비슨은 부르심을 놓고 기도하기 시작하는데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 하리라.' 라는 말씀을 붙잡고 세 아이와 임신한 아내를 데리고 조선으로 향한다. 먼저 일본에 도착한 뒤 다시 부산으로 건너와 잠시 정박해 있는 사이 넷째 아이를 출산 후, 애비슨 가족은 제중원을 찾아가 존 헤론의 사역을 이어간다. 너무나 열악한 병원 시설 때문에 환자들을 제대로 치료할 수가 없어서 시설이 갖춰진 병원이 반드시 필요함을 느끼고 안식년 차 미국에 갔을 때 이와 같은 사정을 주변에 알린다. 이에 기업인 루이 세브란스가 반응하여 엄청난 돈을 기부하여 세브란스 기념병원이 생기게 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조선인 의료인을 양성하기 위해 그는 ‘연희전문학교’를 세웠으며 혹독히 훈련을 시켜 1908년 최초로 조선인 의사 7명을 배출해 내었다는 사실이다. ‘연희 전문대’와 ‘세브란스 전문의대’가 병합하여 지금의 연세대학교가 세워진다.
앨리스 하몬드와 로버트 샤프
1900년 엘리스 하몬드(Alice J. Hammond Sharp, 1871~1972)가 이화학당의 교사로 온다. 1903년 로버트 샤프 선교사와 결혼하고, 공주에서 함께 사역을 한다. 로버트 샤프 선교사가 집회를 마치고 공주로 돌아오는 중 진눈깨비를 피해 잠깐 들어간 곳이 얼마 전 장티푸스로 죽은 자의 상여가 놓여있던 상엿집이었고, 안타깝게도 그는 장티푸스 감염으로 공주 땅에 묻힌다. 샤프 선교사의 무덤은 아직도 ‘영명동산’으로 불리며 보존되어 있다. 남편을 잃은 앨리스 선교사는 잠시 미국에 갔지만 다시 조선에 돌아와 한평생 결혼하지 않고 남편의 무덤 곁에서 충청도의 소녀들과 부인들을 위해 헌신하고, 1939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는 78세까지 조선민족을 섬겼다. 그녀는 강경, 보령, 홍성, 천안 등 곳곳에 교회와 학교를 세운다. 특히 1913년 천안 제령리에서 성경암송도 잘하고 영특하고 똑똑한 한 소녀를 만나 공주로 데려와 명선 여학교(영명학교 전신)에서 공부를 시키고, 서울 이화학당으로 유학을 보낸다. 그 소녀가 바로 '유관순'이다. 그러다가 3.1 운동이 일어난다. 끝까지 만세운동을 벌이는 이화학당에 휴교령이 내려져 모든 여학생들이 고향으로 내려가게 된다. 유관순은 천안에 가서도 만세운동을 이어갔고, 결국 투옥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며 꽃 같은 나이에 ‘조국을 위해 바칠 목숨이 한 개뿐이라는 것이 안타깝다'라는 말을 남기고 목숨을 잃었다.
루피 켄드릭
양화진 묘지에 루피 켄드릭(Rubye Rachel kendrik, 1883-1908) 선교사의 비문이 있다. 1907년 25세의 나이에 한국에 온 지 9개월 만에 병에 걸려 미처 선교의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26세의 나이에 순교했다. 루비 켄드릭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내게 만약 천 개의 목숨이 있다면, 그 모두를 조선에 주겠습니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만일 내가 죽으면 텍사스 청년들에게 가서 열 명씩, 스무 명씩, 오십 명씩 조선으로 오라고 일러 주십시오.” 그녀의 말은 텍사스 엡윗청년회(Epworth League) 컨퍼런스에 전달되었고, 그 자리에 참석한 수많은 젊은이의 가슴에 불씨를 지폈다. 그들 중 20여 명이 은둔의 나라 조선으로 달려왔다. 루비 켄드릭 선교사가 죽기 전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900년에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학교가 평양에 세워진다. 학교 이름은 ‘평양외국인학교(PYENGYANG FOREIGN SCHOOL)'이다. 이 학교에서 루스 벨(Ruth Bell)이라는 여학생이 졸업하는데, 훗날 결혼을 하는데 남편이 바로 빌리그레이엄(Billy Graham) 목사이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루스 벨은 남편에게 자신이 본 평양을 증거한다. ‘내가 본 평양은 수많은 흰옷 입은 사람들이 전심으로 기도하고 예배하던 곳입니다. 그 땅이 공산화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 죽음뿐입니다.’ 그녀의 간절한 간청에 빌리 그레이엄은 당시 트루먼 대통령에게 한국을 구해야 한다는 전보를 전했고, 6.25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한국을 방문한다.
'평양외국인학교'의 윌리엄 얼쇼와 윌리엄 해밀턴 쇼
우리가 기억해야 할 ‘평양외국인학교’를 졸업한 또 한 명의 선교사 자녀가 있다. 1922년 평양에서 태어난 윌리엄 얼쇼(William Earl Shaw)의 아들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이다. 고등학교까지 평양에서 마치고 미국으로 대학을 가서 공부하던 중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곧바로 해군 장교로 자원하였고, 1947년~48년에는 한국 해안경비대 교관으로 자원하여 한국 해군과 해병대 창설에 기여했다. 그는 부모님의 뒤를 이어 한국의 선교사가 되기를 결심하고,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던 중 한국의 6.25 전쟁 소식을 접한다. ‘하나님, 한국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할까요?’ 번민중에 성경말씀을 묵상하던 그는 이 구절을 본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3)’ 그는 아내와 두 아들을 찾아가 말한다. “한국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그냥 있을 수가 없소. 군대에 재입대하겠소.” 아버지 윌리엄 얼쇼 선교사는 6.25 때 한국을 떠나지 않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사명으로 군목으로 남아 있었고,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아들의 편지 한 장이 날아온다. ‘저는 한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 저는 선교사가 되어 한국으로 가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 국민이 전쟁 속에서 고통 당하고 있는데 이를 먼저 돕지 않고, 전쟁이 끝난 후 평화가 왔을 때 한국에 선교사로 간다는 것은 제 양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1950년 8월 미 극동사령부 정보장교로 파송 받아 맥아더 사령관의 작전 참모로 한국에 온다. ‘인천상륙작전’이 기적적으로 성공한다. 정보장교로서 ‘인천상륙작전’의 임무는 마쳤지만 그는 해병대에 자원하여 또 다른 임무를 맡는다. ‘최전선에서 작전을 펼치려면 한국말을 잘하는 제가 필요할 겁니다.’ 서울 탈환 작전 때는 ‘녹번리 전투’에서 첨병으로 앞서 나갔지만, 안타깝게도 매복해 있던 괴뢰군에게 첨병 모두가 전사한다. 자식을 먼저 보낸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윌리엄 얼쇼는 아들을 먼저 보낸 후에도 이 땅에 남아 사역을 감당하다가 17년이나 먼저 보낸 양화진의 아들 무덤 곁에 묻힌다.
자유대한민국의 거름이 된 선교 역사
이렇게 여러 선교사의 행적을 통하여 이 땅의 선교역사를 살펴보았다. 양화진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 수많은 선교사들이 묻혀 있다. 전주 예수병원, 광주 기독병원, 계성학교, 신명학교, 계명대학교, 영명학교, 숭인학교, 수피아여고, 신흥학교, 기전여고, 안동고 등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너무 방대해서 미처 언급하지 못한 선교사들의 땀과 눈물과 피의 희생으로 피어난 것이다. 세계를 품은 기독인들이 우리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물질을 보내주고, 몸소 이 땅에 와서 헌신적으로 고아와 병자와 가난한 자들을 살리고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여 이승만과 같은 지도자가 길러졌다. 곳곳에서 교육받은 젊은이들이 나라의 주역이 되어 대한민국은 성장하게 되었다. 잿더미가 된 대한민국이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국가가 된 것이다. 선교사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춘원 이광수는 <청춘>(1917년 7월 호)에 ‘야소교의 조선에 준 은혜'라는 글을 실어 예수교가 조선 문명사의 큰 은인으로 보고 그 은혜를 조목조목 정리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기독교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같은 엄연한 역사 앞에 숭고한 희생을 한 분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은 마땅한 도리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 선교사들의 역사가 가리어지고 왜곡되기 시작했다. 한편에선 선교사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싸늘하다.
역사를 기억하자
<딜쿠샤의 추억>은 출간된 지 오래되었지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다. ‘그림책박물관' 전시코너에 <딜쿠샤의 추억>을 항상 비치해 두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는 이는 별로 없다. 간혹 ‘딜쿠샤’를 안다며 운을 떼는 분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이 절로 들지만 어떤 사람들의 감상은 매우 놀랍다. 딜쿠샤 안주인(메리)이 그린 그림을 보았는데 조선인들을 매우 어둡고 불쌍하게 그리고 있는 모습에 미개인을 바라보는 제국주의자의 시선이 느껴져 슬프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을 향해 '제국주의의 앞잡이'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는 이도 있다. 선교사들에게 적대적인 감정이 드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가 공교육에서 배우는 역사 교과서가 기독교의 선교역사를 애써 지우고 폄하하는 잘못된 세계관과 역사관에 경도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독인들은 조선 땅에서 소외되고 학대받는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들을 섬겼다. 기독교를 전하자 6명의 첩을 자랑하던 할아버지가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변화되기 시작한 것이 반만년 역사가 바뀌는 기적의 시작이었다. 술 마시고, 도박판을 벌리던 게으른 젊은이와 아비들이 교회에서 가르침 받고 들었던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했을 때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시작되는 기적이 찾아왔다.
프랑스 정치 철학가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자유는 도덕성 없이 세워질 수 없고, 도덕성은 신앙 없이 세워질 수 없다'라고 말했다. 독일 나치정권의 만행을 보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자유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 지식인들이 자신들을 항상 진실의 대의에 헌신한다고 자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대학을 찾았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대학들은 침묵 속으로 도망쳤다. 그러다 나는 며칠간 빛을 발하는 사설로 자유에 대한 사랑을 선포한 위대한 신문 편집자들을 보았다. 하지만 그들도 대학들처럼 몇 주 만에 침묵을 지켰다. 나는 저술가들, 독일의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유문제와 현대 생활에서 그들의 위치에 대해 자주 논의한 사람들에게 연설했다. 그들도 깊은 침묵에 빠졌다. 교회 만이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 히틀러의 캠페인을 막고 있었다. 나는 이전에 교회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이제는 교회만이 지적 진리와 도덕적 자유를 지지할 용기와 끈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교회에 큰 애정과 감탄을 느낀다. 나는 내가 한때 멸시한 것을 이제는 전적으로 칭찬한다고 고백한다.’
독일의 교회만이 진리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듯이 진리를 발견한 이 땅의 어머니들이 깨어나고, 젊은이들이 미래를 꿈꾸기 시작하자 일본인들에게 선교사들은 눈엣가시였다.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되지 못하도록 미국 사회에 온갖 로비를 벌였다. 그때 선교사들에게 자유를 배우고 익혀 지적으로 새로워진 조선의 청년들이 유창한 영어로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사회적 분위기를 역전시켰던 위대한 역사는 가려져 있다. 1919년 4월, 미국이 독립선언문을 발표했던 바로 그 장소, 필라델피아에서 '한국의 독립'을 세계만방에 호소하기 위해 열렸던 ‘제1차 한인자유대회 (First Korean Congress)’의 놀라운 역사도 가려져 있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는 대한민국의 탄생이라는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6.25 전쟁을 자유 진영의 도움을 받아 극복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을 찾아온 선교사들의 헌신으로 한국인들의 사상과 정신이 새로워져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하게 되었고, 자본주의가 발전하여 무지와 가난을 극복하여 오늘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이루었으나, 이러한 역사를 자랑스럽게 배우지 못하고 있다.
성경에서는 ‘역사를 기억하라, 옛일을 기억하라, 네 청년의 때를 기억하라’ 누누이 강조한다. 현대사에서 지금의 대한민국이 세워지기까지 기독교가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100년도 지나지 않은 역사지만 우리는 건국 정신을 잊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람들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아무런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1억 명의 생명을 앗아간 철 지난 마르크스주의가 대두되는가 하면 북한을 옹호하는 친북 종북 사상이 유행하고, 반공정신을 시대에 뒤떨어진 정신으로 치부한다. 가정과 결혼, 성 윤리가 파괴되고, 소수자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도덕이 무너지고 있다. 한국은 역사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선교의 초창기부터 수많은 선교사들이 조선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미래를 바쳤다. 하나님을 믿던, 믿지 않던 우리가 기독교에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우방의 나라 미국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모든 국가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행한다. 그러나 미국을 천하의 제국주의 침략자라고 매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엄청난 자본을 들여 병원을 지어주고 학교를 지어주고 생명까지 다 주고 떠나가는 제국주의 침략자가 세상에 있는가?
마무리
폐허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한국인들에게 기쁨의 궁전이 되길 바랐던 ‘딜쿠샤'를 향한 메리의 진실한 마음을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받은 은혜를 진정한 자유가 필요한 어두운 곳에 흘려보내는 대한민국이 되어야 하겠다. 올바른 인간관과 세계관을 갖는 것은 역사를 바르게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올바른 역사 인식을 통하여 나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 다음 세대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힘써 계승해야 한다. 놀랍고 위대한 대한민국의 역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기적의 역사이다.
참고도서
[1] 유성실. <대한독립을 빛낸 헐버트와 초기 기독선교사>, 도서출판 현대사포럼
[2] 월드뷰 2023년 1월호 류금주 <기독교는 대한민국 건국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3] 어원 W. 루처 <국가가 하나님을 잊을 때>. CLC
[4] 이용남. <복음에 미치다>. 두란노
임해영 | 그림책박물관 운영
그림책을 역사적으로 정리하는 '그림책박물관' (picturebook-museum.com)을 운영하며, 그림책으로 생명을 살리는 매거진 '그림책 BASIC' (picturcebool-basic.com)을 통해 바른 성경적 세계관의 그림책을 연구하고 전하고 있으며, 좋은 그림책을 읽고 살펴볼 수 있는 '그림책박물관'이라는 북카페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