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맞고, 나도 맞아』 ‘도덕적 상대주의'

2023-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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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맞고, 나도 맞아』 ‘도덕적 상대주의'


<너도 맞고,나도 맞아!> 자세히보기


『너도 맞고, 나도 맞아』 라는 제목이 보여 주듯이 오늘날 사람들은 '관용'의 태도를 가장 중요한 미덕으로 여기는 듯하다.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나의 생각만 주장하는 것은 미성숙한 태도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사회적 관용이 지나치게 강조되다 보면 ‘도덕적 상대주의'로 흐를 수 있다. 2020년에 출간된 그림책 『너도 맞고, 나도 맞아』는 배려와 관용의 미덕을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쉽고 재미있게 표현하였지만 추천할 만한 책인지 고민이 되기도 했다. 3년이 지난 지금 이 그림책이 어느 면에서 그런 고민과 염려를 주었는지, 그리고 아이들과 어떻게 함께 읽는 것이 좋을지 조금은 정리가 되어 펜을 들었다.


그림책 『너도 맞고 나도 맞아』
 

책표지를 보면 세 사람이 둥글게 마주 앉아 미소 짓고 있다. 초록색 말풍선과 노란색 말풍선이 겹쳐 교집합을 이루는 연둣빛 공간에 이 그림책의 제목인 ‘너도 맞고, 나도 맞아!’가 있다. 교집합을 이루는 말풍선 이미지는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계속 등장한다.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장면이 나오고, 그 다음 장면에선 “그래 맞아!”라는 말풍선이 나온다. 그리고 그 말풍선을 펼치면 왜 둘 다 맞는지 설명이 나오는 플랩북(Flap Book) 형식이다.

표지를 펼치면 왼쪽 면지는 한 아이가 세상을 온통 초록색으로 보고 있고, 오른쪽 면지는 다른 아이가 세상을 온통 노란색으로 보고 있다. 처음에는 서로가 맞다고 우기지만, 이야기가 끝나는 뒷면지에는 두 아이 모두 자신이 쓰던 색안경을 벗고 다양한 색깔의 세상을 함께 바라보는 모습으로 끝이 난다.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자.

“크리스마스는 추워!”, “크리스마스는 덥지!” 누구의 말이 맞는 걸까? 우리나라의 크리스마스는 춥지만, 호주의 크리스마스는 덥다. 대부분 밤은 깜깜하지만, 핀란드에서는 ‘백야’라는 현상으로 밤에도 밝을 때가 있다. 우리나라에는 자동차 운전대가 왼쪽에 있지만, 영국이나 일본은 오른쪽에 있다. 또 우리나라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건 “응”이라는 긍정의 뜻이지만, 불가리아에서는 “아니!”라는 부정의 뜻이다. 이처럼 세상에는 다양한 문화 속에서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 그림책을 다시 읽어보자고 독려하기가 어려울 만큼 이 책은 분명 사실에 근거한 정보를 담고 있고 이 책에 나타난 배려의 태도도 좋은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인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과 서로 다른 생각의 차이에 대해 '너도 맞고 나도 맞다'고 인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오늘날에 팽배한 ‘도덕적 상대주의’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자.


도덕적 상대주의 & 도덕적 절대주의

도덕(道德)’이란 사람들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 구분하는 기준이다. ‘상대주의(相對主義)’는 모든 진리나 가치의 절대적 타당성을 부인하고,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사상이다. 즉 ‘도덕적 상대주의’란 도덕적 기준이 시대와 문화, 개인의 마음과 감정, 신념에 따라 다양하게 변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도덕은 '너는 너의 기준이 있고, 나는 나의 기준이 있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고 가르친다. 

찰스 콜슨(Charles W. Colson)은 <참으로 가벼운 세상 속에서의 진리>에서 스콧이라는 젊은 남자를 예로 들어 도덕적 상대주의의 현실을 전하고 있다. 스콧은 태아가 인간이라고 맹렬히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낙태는 법적으로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일까? 본인에게는 태아가 사람이지만, 그 어머니에게는 뱃속의 태아가 사람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1] 이것이 도덕적 상대주의다. 이것이 과연 배려와 관용의 태도라고 생각되는가?

도덕이 정말 문화에 따라 변하는 현상이라면 어느 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다른 문화권 사람들의 도덕성을 비판할 근거가 전혀 없게 된다. 이 문제가 나치의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도 드러나게 되는데, 나치 전범들은 당시 자신들의 문화의 도덕규범을 따른 것일 뿐이라면서 외부인들이 어떤 권리로 자기들을 재판할 수 있느냐며 항변했다. 도덕적 상대주의가 강화될수록 이런 문제는 해결이 불가능해진다. 선과 악의 기준이 모호해지면서 자기 자신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므로 내가 좋으면 선이고, 내가 싫으면 악이 되는 상황이 된다. 경쟁에서 이긴 최후의 기준만 남게 되고, 결국 권력을 가진 자의 기준이 '도덕'이 될 수 있다. 또한 도덕성이 땅에 떨어져 악인이 매력적으로 연출되는 문화를 양산하게 되고, 대중문화는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하여 더 강도 높은 새로운 '도덕'을 찾게 만들 위험이 있다. 대중매체나 영화만의 문제가 아니라 문학, 예술, 어린이들이 보는 그림책도 마찬가지다.

반면 ‘도덕적 절대주의’는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도덕적 기준이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태아가 사람인가 아닌가는 스콧이나 그 태아의 어머니의 의견과는 관계없는 것이다. C.S. 루이스는 사람 안에 내재된 선과 악의 개념을 부인할 수 없음을 깨닫고, <인간 폐지>를 통해 도덕적 가치관은 시대나 문화에 따라 다르게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와 민족과 문화를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동서고금의 수많은 문서들을 증거 자료로 제시하고 있다. 책 내용 중 한 부분을 살펴보자.[2]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덕 virtue을 오르도 아모리스 ordo amoris 즉, 모든 대상이 그 가치와 정도에 합당하게 사랑받는 애정의 질서 상태라고 정의했습니다. 교육의 목적은 마땅히 좋아해야 할 것은 좋아하고 싫어해야 할 것은 싫어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합니다. 반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그간 ‘질서 있는 애정'이나 ‘정당한 감정'을 갖도록 훈련 받아 온 학생은 윤리학의 제일 원리를 쉽게 발견하는 반면, 부패한 사람은 그런 원리를 전혀 보지 못하며, 따라서 그 학문에서 전혀 진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플라톤도 동일한 말을 했습니다. 아직 어린 인간이 처음에는 제대로 반응할 줄 모르기에, 정말로 즐겁고, 좋고, 혐오스럽고, 미운 것을 각각 즐거워하고, 좋아하고, 혐오하고, 미워하는 법을 훈련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화국 Republic>을 보면, 잘 양육 받은 젊은이란 “인간이 잘못 만든 작품이나 자연이 잘못 길러낸 작품을 보면서 무엇이 부족한지 분명하게 알고, 어렸을 때부터 추한 것을 정당한 혐오로써 비판하고 미워할 줄 알며, 아름다운 것을 즐겁게 칭찬하고 그것을 영혼의 영양분으로 삼아서 온화한 마음을 갖게 된 사람이다. 이 모든 일은 그의 이성 reason이 깨어나기 전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이성이 깨어 찾아올 때, 그는 친근감을 느끼며 그간 양육받은 대로 두 팔을 벌려 이성을 맞이하여 알아볼 것"이라고 말합니다.’ 


C.S. 루이스는 이처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기독교, 동양 등의 모든 다양한 형태로 전해지는 자연적 도덕률을 설명하면서 가슴과 배를 비유로 사용한다. 


‘가슴이란 정착된 가치관의 형성과 그 가치관에 따라 훈련된 감정 trained emotion을 뜻한다. 이 가치관은 사람마다 다른 기준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악한 것은 악으로, 선한 것은 선으로 인정하고 반응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의식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훈련된 감정은 곧 살아 있는 양심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배를 따라 행동하기보다는 머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힘을 받쳐 주는 기관이 바로 가슴이다. 아울러 배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 또한 가슴이 하는 일이다. 그래서 무서운 도전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고,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내할 수 있고, 나의 권리와 이익을 떠나 배려하는 여유를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가슴이 없는 사람은 생각은 생각대로 하지만 행동은 본능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소위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훈련된 감정과 의지력이 결여된다면 신앙은 머리에서 맴돌고 행동은 여전히 본능적이며 충동적인 상태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상대주의적 교육이 무서운 것은 가슴이 없는 인간을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건전한 가치관을 상실하게 하고서, 건강한 사람들로 형성된 건강한 사회를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상대주의자들은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 심지어 자기 자녀에게도 도덕성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교육 철학이 의미하는 것은 교육 현장에서 '학생을 교육하는데 윤리나 도덕의 잣대를 엄격하게 가르치지 말라'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가르치지 말고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여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경쟁하는 여러 가치와 생각들을 동일한 무게로 교육하지도 않는다. 지켜야 할 분명한 예의범절과 절제, 용기와 같은 도덕적 가치와 기준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보다 시대적으로 유행하는 나다움, 도덕적 상대주의, 학생인권조례를 가르친다. 교권이 추락한 우리나라의 공교육 현장에서 벌어지는 실상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수업 중에 잠을 자고 심지어 수업을 방해하고 선생님께 무례하게 행동해도 처벌하지 못하고, 가방 속에 무엇을 넣고 다니는지 검사하지 못한다. 화장하고 등교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교복을 미니스커트처럼 짧게 입고 다리를 벌리고 앉는 여학생에게 남자 선생님들은 훈계하지 못한다. 이러한 일들이 왜 일어나는 것일까? 도덕적 상대주의 철학에 경도되어 잘못된 도덕교육을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라고 권면하기 전에 학생이 지켜야 할 윤리적 기준과 바른 가치관이 무엇인지 먼저 가르쳐야 한다. 너도 맞고 나도 맞다는 관용을 가르치기 전에 너와 나의 생각과 태도가 도덕적인 기준에 비추어 적절한지 점검받아야 하고 적절하지 못하다면 교정 받아야 한다. 그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부모와 선생님과 어른들이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노력해야 할 일이다.

훈육과 처벌을 두려워하는 부모

조던 B. 피터슨은 <12가지 인생의 법칙>에서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싶다면 처벌을 망설이거나 피하지 말라’라고 조언한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아이들과 내버려 두는 부모들의 모습을 보면서 요즘 부모는 자녀 세대를 어려워하는 것처럼 보이고 자녀의 감정 변화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한다. 습관적으로 엄마 얼굴을 때리는 아기가 있다고 해 보자. 왜 그런 짓을 할까? 답은 분명하다. 엄마를 지배하기 위해서다. 나쁜 짓이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잘못된 행동을 지속적으로 교정해 주면 어린아이는 허용되는 한계를 알게 된다. 교정 조치가 없으면 호기심이 커져서 한계라는 신호가 분명하게 주어질 때까지 그 행동을 계속한다. 교정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3]

요즘 부모는 훈육과 처벌을 두려워한다. 엄격한 훈육자와 폭군이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고, 부모의 간섭이 오히려 순수한 아이를 망친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교육 철학에서는 훈육과 처벌이 가부장적 독재로 보일까 두렵다. 어린아이의 영혼은 본질적으로 순수하지만 문화와 사회 때문에 더럽혀졌다는 믿음은 18세기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의 영향이 크다. 그는 문명화 하기 전의 인간은 온화하고 경이로운 존재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수렵과 채집 시절의 인간은 산업화한 도시인 보다 살인을 훨씬 더 많이 저질렀다. 현대에도 영국의 연간 살인율은 대략 10만 명당 1명꼴이지만, 다소 낭만적이라고 묘사되고 있는 부시먼(Bushman)의 경우 연간 살인율은 10만 명당 40명에 달한다. 파푸아 뉴기니의 연간 살인율은 10만 명당 천명에 달한다. 문명화하기 전의 인간이라고 해서, 그리고 어린아이라고 해서 결코 온화하지 못하다. 온화함은 배우고 익혀야 하는 도덕적인 성품이다.

‘도덕적 상대주의’가 열매 맺은 사회 운동이 최근 등장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다. 성별, 인종, 민족 등에 대해 편견이 담긴 표현을 쓰지 말자는 운동이지만, 성소수자를 옹호하며 어른의 생각을 아이에게 가르치는 행위를 성차별, 인종 차별과 유사한 억압의 하나로 간주한다. 비판 없이 수용하기에는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주제가 많다. 사회가 강조하는 관용의 태도보다 우선해서 우리 아이들은 올바른 도덕적 기준을 먼저 배워야 한다. 헌신적이고 용기 있는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올바른 훈육이다. 이성이 깨어나기 전에 올바르게 훈육해야 한다. 플라톤이 강조한 것처럼 마침내 이성이 깨어 찾아올 때, 그는 친근감을 느끼며 그간 양육 받은 대로 두 팔을 벌려 알아볼 것이다.


마무리


<너도 맞고 나도 맞아>가 도덕적 상대주의를 강조한것이 아니고,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우리 모두에 대한 배려의 태도를 가르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가볍게 넘기기에는 아이들에게 미치는 윤리의식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책에서 다루는 정보가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의미에서 ‘맞는’ 정보이지만, ‘옳다'라는 가치 기준의 의미로 ‘너의 모든 생각이 right’하다고 읽힐 위험이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라는 측면에서 '세계관'을 ‘안경'으로 표현한 작가는 왜곡된 안경을 벗고 온전한 시력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뒷면지를 통해 전하고 있다. 노란색, 초록색 안경을 계속 쓰고 있으면서 서로가 ‘right’ 하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너도 맞고, 나도 맞아'라는 제목과는 결이 다른 이야기로로, 작가도 왜곡된 안경을 벗어야 함을 잘 알고 있다.

그림책은 어린아이들에게도 단순한 이야기를 통해 유일하고도 깊은 진리를 전할 수 있는 좋은 매체이다. ‘너도 맞고 나도 맞다'라는 상대주의적 태도가 아니라 너와 나의 생각과 감정과는 별도로 엄연히 존재하는 보편적인 도덕법이 있음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 바른 도덕을 가르치는 최선의 방법은 가정 안에서 올바른 훈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그 훈련은 일찍 시작할 필요가 있고 부모의 지속적인 사랑과 인내가 필요하다. 부모가 아이들을 직접 돌보지 않고 외부(기관)에 맡겨 버리면 보편적인 도덕의 기준이란 없으며 ‘누구든지 스스로 옳고 그른 것을 정해도 좋다’라는 학교와 사회가 가르치는 새로운 도덕법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참고도서

[1] 찰스콜슨 <참으로 가벼운 세상 속에서의 진리>
[2] CS 루이스 <인간 폐지>
[3] 조던B. 피터슨 <12가지 인생의 법칙>




임해영 | 그림책박물관 운영

일러스트레이터들을 위한 산그림 (picturebook-illust.com)을 운영하고 있으며, 다음세대에게 아름다운 그림책을 전하기 위하여 그림책을 역사적으로 정리하는 그림책박물관 (picturebook-museum.com)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2023년 4월 원흥동에 Cafe 그림책박물관(https://naver.me/GEuabso9)을 오픈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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