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세상을 위한 ‘성인지 감수성'

2023-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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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세상을 위한 ‘성인지 감수성'


<줄리의 그림자> 자세히보기


    얼마 전 오랫동안 그림책 강의를 해오신 분과 ‘성인지 감수성(gender sensitivity)’’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분이 ‘성인지 감수성’을 건강한 ‘양성평등’의 개념으로만 이해하시기에 부도덕한 성윤리와 동성애를 조장하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고 하니 깜짝 놀라신다. 한편으로는 동성애를 조장한다니 너무 지나치다는 표정이시다. 그림책 전문가도 ‘성인지 감수성'에 대해 이만큼 관심이 없는 것을 보며, 일부 그림책을 통해 ‘글로벌 성 혁명’을 이루기 위한 의도들을 더 적극적으로 알리지 못한 것을 반성하게 되었다. ‘성인지 감수성'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좋은' 가치로 생각한다면, <줄리의 그림자>를 통해 ‘성인지 감수성'이 교육할만한 가치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서 이와 관련된 사상들을 살피고자 한다. 


그림책 <줄리의 그림자> 


    그림책 <줄리의 그림자>의 표지를 보면 여자아이가 인형이나 공을 가지고 놀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림자는 남자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첫 장면은 주인공 줄리가 자기 방 침대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롤러스케이트를 신고 있다. 엄마와 딸의 대화 내용이다. 

“말 좀 해봐. 도대체 왜 롤러스케이트를 신고 책을 읽니?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굴 수는 없어?”
“나는 다른 아이들과 달라요, 엄마. 나는 줄리라고요!” 

부모와 딸의 대화는 그림책이 끝날 때까지 이런 식이다. 줄리는 단정하지 않고 머리 빗는 걸 싫어하고 목욕하는 것도 싫어한다. 반면 부모는 적절한 훈육 대신 이렇게 말하며 팔짱을 끼고 굳은 표정으로 화를 낼 뿐이다.

“지금 네 꼴 좀 봐! 얘 때문에 못 살겠네! 여보,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줄리, 엄마 말씀이 맞다. 넌 정말 문제야. 늘 거칠게 말하고, 툭하면 넘어지고, 바보 같은 행동만 하다니! 이런 선머슴 같은 녀석!”


 어느 날 줄리는 자기 그림자가 남자로 변한 것을 발견한다. 줄리는 자신이 여자의 모습을 한 남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한다. 줄리는 그림자를 없애기 위해 삽으로 땅을 파고 그 안으로 들어가 숨는다. 한 남자아이가 지나가다가 “구덩이 속에서 뭐 하는 거야?”라고 묻는다. 줄리와 반대로 몸은 남자이지만 여자아이처럼 운다고 놀림받는 소년이다. 둘은 이렇게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되고, “우리에게는 우리 다울 권리가 있어.” “당연하지! 우리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어.’라고 말한다. 마지막 장면은 삽을 들고 집으로 향하는 줄리의 모습이 보이고, 밑으로 
‘나부대는 줄리, 말 안 듣는 줄리, 줄리는 줄리’ 라는 문장으로 그림책이 끝난다


‘성인지 감수성'을 이해하는 첫 단계

    ‘성인지 감수성' 하면 무언가 감성을 자극하는 좋은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는 ‘젠더 이데올로기’의 주류화(mainstreaming)를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용어라는 것을 설명하고자 한다. 참고로 ‘성인지 감수성’의 사전적 해설은 ‘일상생활에서 성별 차이로 인한 차별과 불균형을 감지해 내는 민감성’이고, ‘젠더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성정체성을 생물학적인 남녀의 성별에 따라 구분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학습되는 성(Gender)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즉 타고난 성이 아니라 본인의 '느낌'만으로 성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젠더’ 개념이 대두된 사상적 배경을 살펴보면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는 단어 속에 이 시대의 숨은 의도가 담겨 있음을 분별할 수 있다.

    ‘성인지 감수성'을 이해하는 첫 단계는 ‘젠더 이데올로기’의 기원이 되는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자본주의를 무너뜨리고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했다. 특히 자본주의를 견고히 하는 가족, 교회, 국가체제를 부정하고 과거의 모든 종교와 도덕을 폐지하고자 했다. 마르크스 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모든 억압과 착취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도대체 ‘마르크스’와 ‘성인지 감수성’과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것인가? 그러나 마르크스의 세례를 받은 인물들의 사상을 따라가 보면 ‘젠더 이데올로기'의 흐름이 정리된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그림책들이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용어를 통해 어떤 세상을 꿈꾸고 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먼저 ‘마르크스’라는 인물에 대한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많은 추종자들이 오해하듯 마르크스는 가난한 노동자 계급을 해방시키기 위해 헌신한 사람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상류층의 삶을 포기한 적이 없으며, 도덕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타인을 착취하던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가 착취한 첫 번째 대상은 부모였다. 아버지가 죽어갈 때 그가 부친에게 쓴 편지 내용은 생활비가 부족하다는 투정뿐이었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목돈을 뜯어내는 아들에게 지친 어머니가 그의 빚을 갚아주지 않자 모친과 의절했다. 마르크스 부부가 늘 빚에 허덕인 이유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부부가 똑같이 게으르고 낭비벽이 컸기 때문이다. (아내와 세 딸 역시 그의 희생양이지만 지면상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또 다른 착취 대상은 마르크스 집안의 하녀로 45년간 헌신한 헬렌 데무스라는 여인이다. 데무스는 마르크스의 처가에서 딸이 안쓰러워 보낸 하녀였다. 그녀는 45년간 부지런히 일했지만 사망할 때까지 마르크스에게 동전 한 닢 받아 본 적이 없다. 노동력 착취는 물론이고 마르크스의 사악함은 이 여인을 겁탈하여 육욕을 채웠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그로 인해 데무스는 사생아를 낳아야 했다. 마르크스는 평생 아들을 찾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 헬렌 데무스나 아들 프레드릭은 마르크스의 유일한 '노동자 계급' 가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이런 인간이 노동자의 착취, 억압, 해방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모순과 위선으로 가득한 마르크스의 망령은 ‘젠더 이데올로기’로 옷을 갈아입고 지금도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젠더 이데올로기'가 대두된 사상적 배경

    제1차,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마르크스 추종자들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렇다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런 방황의 때에 희망의 단초를 제공한 이들이 바로 독일의 철학자 ‘니체'와 ‘프로이트'이다. 니체는 그가 살던 19세기보다 오늘날 더욱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 이유는 현대문화의 특징이 ‘이성'보다는 ‘본능'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선과 악을 구분하는 ‘절대 도덕'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 낡은 가치이기 때문에 기존의 가치는 허물고 자신만의 길을 가라고 외쳤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구호가 아닌가?  ‘줄리는 줄리'라며 ‘나다움'의 가치를 최고의 가치로 두는 오늘날의 문화, 어린이 그림책 마저도 다 함께 외치고 있는 바로 그 ‘나다움'이다. 타인을 의식하지 말고 자기 마음대로 살라는 니체의 사상은 오늘의 ‘성문화'와 너무도 닮아있다. 현대인들에게 참으로 달콤한 속삭임이다.

    니체의 사상과 더불어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준 것이 ‘프로이트’이다. 그는 ‘성욕'을 억압하면 문제가 생기므로 억압된 욕망을 적절히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억압된 성욕의 해방'이라는 개념이 좌절에 빠져 있던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새 소망을 던져 주었다. 니체와 프로이트는 철저히 본능, 육체, 세속적인 사상에 뿌리를 두고 절대 도덕과 절대 가치를 부인하고 ‘동성애'를 미화하는 이론을 태생시켰다. 이제 마르크스의 후예들이 어떻게 전 세계를 ‘젠더 이데올로기’ 세상이 되도록 이끌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신마르크스주의(네오막시즘, Neo-Marxism)’의 등장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는 정통 마르크스 이론이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통하지 않는 것을 보고 사람의 생각을 무의식에서부터 사로잡는 ‘헤게모니’ 싸움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문화적 진지를 구축하고 사람들의 ‘생각'을 개조시켜서 때가 왔을 때 결정적인 승부를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람시의 진지전을 전 세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따랐는데, 우리나라 역시 30년 동안 교육과 각 분야에서 진지를 구축해 온 세력이 있다. 그림책 분야도 그 중 하나다.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1897~1957)는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정신분석 학자이자 공산주의자로서 이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인간의 ‘성적 해방’을 주장했다. 성을 억압하는 사회구조인 가족, 교회, 국가를 파기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특히 아동과 청소년을 성도덕으로부터 해방시켜 어릴 때부터 성에 탐닉하게 만들면 가부장적 권위에 반기를 드는 '혁명적 인간 양육'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라이히에게 있어서 대중의 완전한 ‘성애화’는 가족을 파괴할 수 있는 최적의 수단이었다. 라이히의 성정치 이론은 60년대 후반 프랑크푸르트학파로 옷을 갈아입고 1968년 프랑스에서 68 혁명이 일어나는 계기를 마련하며 전 세계의 시대정신을 사로잡았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란 1923년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설립된 ‘사회연구소’에서 호르크하이머를 중심으로 아도르노, 마르쿠제, 프롬, 벤야민, 폴록, 하버마스 등의 학자들이 이룬 학풍의 총칭을 말한다. 대표적인 학자로 빌헬름 라이히의 성정치를 계승한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 1898~1979)는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를 결합시켜, 인간해방을 위한 급진사상을 미국 사회에 전파했다. 이 사상을 흔히 ‘신마르크스주의(네오막시즘, Neo-Marxism)’라 부른다. 인간이 소외와 억압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인간성의 근본적인 변혁'이고, 유토피아를 꿈꾸는 ‘개인의 자발성’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유토피아를 꿈꾸라! 그러면 소외, 억압, 착취에서 해방된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며 ‘모든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라고 외친 68 혁명의 영웅이 된다. 기존체제를 거부하고 내 속의 ‘감수성’이 우선이니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하라는 마르쿠제의 주장은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그림책 <
줄리의 그림자>에도 유효하다.

    미국의 동물 학자 알프레드 킨제이(Alfred Charles Kinsey, 1894~1956)는 원래 곤충학자이고, 변태성욕자이다. 그는 인간도 알고 보면 동물보다 천박한 성생활을 하는 존재임을 주장하며 1984년 <인간 남성의 성적 행동>, 1953년 <인간 여성의 성적 행동>이라는 킨제이 보고서를 발표했다. 30년 후에 보고서의 통계가 조작임이 밝혀졌지만 이 보고서 이후로 청교도적 성윤리를 가지고 있던 미국 시민들의 성의식이 획기적으로 바뀌게 되어 간통과 이혼, 포르노 시청이 급증하면서 혼전순결의 개념이 사라졌다. 마르크스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인 마가렛 생어(Margaret Sanger, 1883~1966)는 자유로운 성생활을 몸소 실천했으며 영향력 있는 당대의 수많은 사람들과 성관계를 가졌다.


    시몬느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는 <제2의 성>을 통해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 주장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마르크스적 계급투쟁의 관계로 보고 남성의 억압과 착취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키고 엄마로서의 여성이 아닌 인간으로서 해방된 여성을 주장했다. 초기 페미니즘은 여성들이 정당한 권리를 얻기 위한 운동으로 건전하게 시작했지만 마르크스의 세례를 받은 보부아르 이후 그 사상적 흐름은 젠더 이론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여성들이여 가부장적 압제의 사슬을 깨고 모성의 노예 상태로부터 도망쳐 직장생활에서 성공하라. 해방된 성에 탐닉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피임과 낙태는 필수적이다’고 했다. 보부아르에게 임신은 ‘불구'가 되는 것이며, 태아는 그저 살덩어리에 불과했다. 낙태를 금하던 시대에 파리에 있던 자신의 살롱에 낙태소를 설치하고 낙태 금지법 철폐운동을 벌였다.

    존 머니 (John William Money, 1921~2006)는 트랜스젠더이자 전 세계 최초로 성전환 수술 병원을 개원한 성과학자이다. 그는 ‘성정체성', ‘젠더', ‘성적 지향'이라는 말들을 최초로 만들어 내며 인간의 성은 생물학적 요인이 아닌 학습에 의해 결정된다는 젠더 이론을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라이머 형제를 악랄하게 실험한 것이 훗날 밝혀졌다. 라이머 형제는 존 머니로부터 받은 상처를 회복하지 못하고 둘 다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현대 젠더 이론의 대모로 불리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Pamela Butler, 1956~)는 레즈비언으로 구질서의 산물인 이성애를 해체하고, 성의 완전한 자유를 통한 성해방 유토피아를 꿈꾼다. 여전히 활발히 활동하는 ‘젠더 이론'의 선구자이고, ‘퀴어 이론'의 실천가이다. 철학적으로는 후기구조주의자인데 구조 자체가 잘못되었으니 구조를 해체함으로써 인간 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특히 언어가 왜곡되면 우리의 사고 체계도 오염되는 언어의 힘에 주목하고, 언어를 통해 구성된 고정관념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엄마’, ‘아빠’ 대신 ‘부모 1’, ‘부모 2’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언어에 대한 실질적인 ‘정치적인 변화'가 ‘성별 질서를 해체' 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 주장한다. 이와 같은 주디스 버틀러의 체제 전복적인 젠더 이론이 전 세계의 주류가 되어 기존 체제를 뒤엎고 있는데도 이에 대해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대한민국 역시 예외가 아니고 그림책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급진적 마르크스주의자인 버틀러의 젠더 이론은 인류를 파멸로 이끌고 있는 매우 위험한 이데올로기이다.



‘성인지 감수성'을 통해 아이들이 배우는 것


    대한민국에도 주디스 버틀러를 영웅시하며 동성애를 정당화하는 젠더 이론이 밀어닥쳐 문화와 교육 전반에 퍼졌고, 그림책 분야에서는 듣기에 좋은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용어로 심겨졌다. ‘성별에 따른 역할과 행동의 고정관념을 깨는 정도의 수준이냐?’ 아니면 ‘동성애 코드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어 젠더 이데올로기로 넘어가느냐’에 따라 수위가 달라지지만, 아무리 건전한 ‘성인지 감수성'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림책의 핵심 내용을 자세히 살피고 아이들에게 전해줄 만한 가치가 있는 그림책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줄리의 그림자>를 다시 살펴보자. 이 그림책을 통해 우리 아이들이 실제로 배우는 것이 무엇인가? 결국 ‘줄리’처럼 성역할에서 벗어나 내 맘대로 신발을 신고 침대에 올라가는 것이 나다움이라는 것이다.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도 되고 그럴 권리가 나에게 있다는 것이다. 

<줄리의 그림자>는 특이하게도 번역가의 추천글이 4페이지에 걸쳐 실려있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책은 1975년, 프랑스 68 혁명 직후에 발표되었다.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를 모토로 자유와 항의를 외치던 프랑스의 이 움직임은 그동안 어린이 문학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성역할 고정관념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 뒤로 40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현실은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어떤 성별이 어떤 역할과 행동을 해야 한다는 해묵은 고정관념은 옷, 색깔, 장난감, 책, 놀이, 생필품까지 어느 것 하나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이 없다. 우리는 지금도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에 얽매여 살아간다. 어디 그뿐인가. ‘어린이답다’, ‘어른답다’, ‘엄마답다’, ‘아빠답다’. ‘선생님답다’, ‘학생답다’……. 이 수많은 ‘~다움’ 때문에 ‘나다움’을 놓친 채 살아간다. 우리 모두를 압박하는 이러한 잣대를 던져두고, ‘나답다’에 대해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다움'을 버리고 ‘나다움'만 강조하는 사회


    이와 같은 사상에 많은 사람들이 환호했고, 우리 사회는 어느 때부터인가 ‘다움’을 버리고 ‘나다움’만 강조하는 사회가 되었다. 부모가 부모 답지 못하고, 선생이 선생 답지 못하고, 학생이 학생 답지 못한 사회가 된 것이다. 언어가 왜곡되면 우리의 사고 체계도 오염된다. 이 언어의 힘에 주목한 젠더주의자들은 ‘나다움'이라는 용어를 이용하여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을 파괴해 버렸다. 가까운 지인이 남자아이에게 남자답다고 칭찬했더니 남자아이 엄마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폭력적인 말을 하느냐며 ‘너답다’라고 해야 하는 거라며 흥분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웃어 넘기기에는 이 문화의 헤게모니가 너무나 심각하여 정신이 바짝 차려진다. 온건하고 선량한 부모들도 문화적으로 부추기는 ‘성인지 감수성'과 ‘나다움'이라는 광풍으로 ‘남자답다', ‘여자답다'라는 말이 금기시되어버린 현실이다.

    <줄리의 그림자>를 쓴 크리스티앙 브뤼엘은 프랑스 작가로 심리학을 공부한 뒤 출판사를 차려 아동과 청소년을 위한 책을 출판하고 있다. 아마도 작가는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한 68 혁명의 깃발을 그대로 이어받은 후예일 가능성이 높다.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으로 글을 쓰다 보니 작가는 기성세대의 억압을 강조하기 위해 부모답지 못한 부모를 등장시켰다. 자녀를 바르게 훈육하는 부모는 신발을 신고 침대에 올라가는 딸에게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굴라'고 화내지는 않을 것이다. 딸이든 아들이든 올바른 생활습관을 갖도록 엄하지만 성숙하게 교육해야 할 문제 아닌가. 신발을 신고 침대에 올라가지 않고, 머리를 단정히 하고, 몸을 깨끗이 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보편적 교육의 문제이다. 크리스티앙 브뤼엘은 ‘성인지 감수성'을 키워야 한다며 여자답고, 남자다운 미덕을 깨고자 부모의 역할을 폄하시켰지만 건강하게 권위를 사용하는 부모는 친밀한 관계 안에서 자녀가 바른 생각, 바른 행동을 하도록 교육할 것이다.


    부모가 부모답지 못하니 딸의 대답도 “나는 다른 아이들과 달라요, 나는 줄리라고요!” 하며 엉뚱한 말을 한다. ‘줄리’ 다운 것이 모든 규범을 깨고 자기 맘대로 하겠다는 것인가? 이런 말은 자녀가 부모님에게 할 말이 아니다. 물론 학생이 선생님에게 할 말도 아니다. 보편적 규범을 가르치는데 아이가 부모님에게 불순종하며, 또는 학생이 선생님에게 불순종하며 이와 같은 말을 당당히 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이 그림책의 효과이다. 나다운 것이 신발 신고 침대에 올라가는 것인가? 책 속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가 현실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나다움'만 강조하다 보니 줄리처럼 규범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고도 그게 나의 권리라고 항변한다. 교실안에서도 선생님의 훈육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생이 늘어간다. 더 나아가 너의 느낌이 남자이길 원하면 남자로 성을 선택할 권리가 너에게 있다고 가르치는 그림책이 넘쳐난다. 우리는 남자답고, 여자답고, 엄마답고, 아빠답고, 부모답고, 선생님답고, 학생다움을 회복해야 한다.     



‘성인지 감수성'은 성혁명을 위한 도구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그럴듯한 용어 전술로 그림책 전문가들도 미처 분별하지 못하는 사이에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이 금기어가 되는 지경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자, 여자를 허무는 동성애 그림책이 넘쳐나고 있다. ‘동성애’는 사회 전체를 타락시킬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동성애자들은 육체적인 고통과 말할 수 없는 비참함으로  삶을 마감하고 있다. 그러한 현실은 외면하고 ‘동성애’를 미화하는 그림책만 나오고,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그림책은 전무하다.

    오늘날 서구 사회는 네오막시스트들이 오랜 세월 동안 전략적으로 젠더 이데올로기 사상을 견고히 세워왔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고 그림책 분야 역시 예외가 아니다. 출판문화계에서 활동하는 네오막시스트들이 남자와 여자의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며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용어를 홍보하고, 관련 그림책을 만들어 내면서 점진적으로 젠더 이데올로기 사상을 구축해 왔다. 마침내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의 구별이 사라진 ‘나다움'이 현대판 최고의 그림책 가치로 둔갑했고, 더 나아가 ‘남자’, ‘여자’가 사라지고, 엄마가 둘이거나 아빠가 둘이어도 좋고, 남자든 여자든 내 맘대로 성을 선택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우리 아이들에게 주입되고 있다.


    존머니가 아무리 호르몬 요법을 쓰고 심리 상담을 통해 남자아이를  여자로 키우려 했지만 쌍둥이 형제였던 데이비드  라이먼은 인형을 싫어하고 서서 오줌 싸기를 좋아했다. 시몬느 보부아르는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 주장했지만 과연 그럴까? 주변을 살펴보자.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은 예쁜 인형과 분홍색을 좋아하고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은 공과 파란색을 좋아한다. 물론 소수의 여자들은 줄리처럼 남자 같은 취향을 갖기도 하고, 소수의 남자들은 여자 같은 취향을 갖기도 한다. 그렇다고 남녀 차이를 근본적으로 없애고 부정하는 것은 오히려 대부분 사람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개인의 성향은 폭넓을 수 있지만 스펙트럼처럼 수십 가지 다양한 성이 있다고 주장하며, 더 나아가 사회가 문화적, 법률적, 정치적으로 이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마무리


    사단은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와서 그 끝을 살짝 틀어 자기의 도구로 이용한다. 원래 ‘나다움'의 원조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한 영혼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며 일대일로 관계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속성으로부터 나온다. 수백억 사람 중에 지문이 같은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개개인에게는 ‘자기다움'이 빛을 발한다. 베드로가 자기의 죽음이 어찌 될지 알고 난 후 예수님께 요한은 어찌 되는지 묻는 장면이 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라(요 21:22).' 이것이 진정한 나다움이다.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비교할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곳을 향해 나의 길을 가는 것이 진정한 ‘나다움'의 인생이다.

    수많은 그림책이 아동들을 성숙한 ‘자기다움'으로 이끌어왔다. ‘나다움'을 빙자하여 ‘젠더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그림책인지 건강한 ‘자기다움’으로 이끄는 그림책인지 자세히 읽고 분별해야 한다. ‘성인지 감수성'은 성혁명을 위한 도구임을 기억하고,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을 건강하게 회복하고 성윤리를 파괴하며 동성애 세상을 향해 독촉하는 수많은 거짓말들을 분별해야 하겠다. 



참고도서

(1) 박광서 <동성애 배후의 사상 연구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라
(2) 카브리엘 쿠비 <글롯벌 성혁명>





임해영 | 그림책박물관 운영

일러스트레이터들을 위한 산그림 (picturebook-illust.com)을 운영하고 있으며, 다음세대에게 아름다운 그림책을 전하기 위하여 그림책을 역사적으로 정리하는 그림책박물관 (picturebook-museum.com)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2023년 4월 원흥동에 Cafe 그림책박물관(https://naver.me/GEuabso9)을 오픈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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