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의 길로 가는 ‘공유 경제’

2022-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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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의 길로 가는 ‘공유 경제’



토머스 모어의 소설 『유토피아』를 프랑스 작가 시몽 바이어가 그림책으로 각색하여 그림책 『유토피아』를 2019년에 출간했다. 우리나라에는 그다음 해 이숲아이 출판사에서 번역되었다. 유토피아(utopia)는 토머스 모어가 1516년에 만들어낸 말로, 라틴어로 쓰인 그의 저작 『유토피아』에서 유래되었다. 그리스어의 ‘ou(없다)’, ‘topos(장소)’를 조합한 말로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는 뜻으로, '현실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사회'를 일컫는 말이다. 이상향(理想鄕)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반댓말로는 디스토피아가 있다. 

대한민국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기본소득, 공공 주택, 6시간 노동, 경제적 평등, 공유 사회…’ 등과 같은 내용들을 토머스 모어는 소설 『유토피아』에서 500년 전에 제시했다. 모어가 제시한 가치와 체제는 많은 사람들을 ‘유토피아’의 세계로 유혹했지만 단 한 군데에서도 성공하지 못하고 ‘디스토피아’로 결론이 났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지금도 ‘유토피아’를 꿈꾸며 ‘사적 소유’ 보다는 ‘공유’라는 개념이 더 매력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듯하다. 먼저 그림책 『유토피아』를 살펴보기 전에 소설 『유토피아』를 창조해낸 영국의 사상가 토머스 모어에 대해 알아보자.

토머스 모어(Sir Thomas More, 1478~1535)는 법학자였던 존 모어의 아들로 태어나 열세 살 때부터 켄터베리 대주교이자 대법관이었던 존 모튼의 집에서 비서로 일했다. 모튼은 총명한 모어를 무척 아꼈고, 그가 옥스퍼드에서 공부할 수 있게 여러 가지 도움을 베풀었다. 아들이 자기 뒤를 이어 법학자가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는 모어를 런던 법학전문학교에 들어가 공부하게 했다. 모어는 이 학교에서도 재치 있고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인기가 많았지만, 법학자보다는 성직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어는 자기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녀 제인 콜트를 만나 사랑에 빠져 수도승의 꿈을 버리고 결혼했다. 두 사람은 딸 셋과 아들 하나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지만 얼마 뒤에 제인은 세상을 떠나고 만다. 모어는 자녀들에게 어머니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앨리스 미들턴이라는 부유한 여성과 재혼한다. 앨리스는 세상을 떠난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셋이나 있었지만 모어의 세 자녀도 친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26살 국회의원 시절에 토머스 모어는 당시 왕이었던 헨리 7세가 세금을 너무 많이 걷는다며 격렬히 항의했다. 몹시 화가 난 헨리 7세는 토머스 모어의 아버지를 런던탑에 가두고, 모어에게는 벌금을 내게 했다. 모어는 미련 없이 정계를 떠나 변호사 생활에 열중했다. 하지만 모어의 능력을 믿었던 헨리 8세는 왕이 되자 그를 다시 불러내 일하게 했다. 모어는 정직하고 능력 있는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전 유럽을 돌아다니며 외교 업무를 맡기도 했다. 이처럼 공을 많이 세워 왕실에서 귀족 작위를 받기도 했다. 헨리 8세의 비서였던 모어를 캐서린 왕비도 좋아했고, 모어가 대법관이 되자 런던의 제빵사였던 할아버지와 법학자였던 아버지의 자랑거리가 된다.

젊은 시절 모어가 상상한 ‘유토피아’라는 섬에서는 권력이 어느 한 곳에 집중되지도 않고, 남자와 여자가 똑같이 교육받고, 자유롭게 종교를 선택할 수 있었다. 돈도 필요 없고 자기 땅도 필요 없이 모두가 똑같은 집에서 살면서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놀고, 농사지은 것을 시장에 가져가 무료로 나눠준다. 평등하고 공정한 카톨릭 공동체를 꿈꿨던 모어의 생각은 소설에 그대로 반영됐고, 『유토피아』는 당시 유럽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카톨릭 성향이 강했던 그는 신교주의자 마틴 루터와 논쟁을 벌였고, 루터와 개신교를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악의 무리로 지목했다. 

그러다가 헨리 8세는 교황과 갈등을 겪게 된다. 헨리 8세가 캐서린 왕비와 이혼하고 앤 볼린과 재혼하겠다고 하자, 교황은 물론이고 신하들도 모두 반대했다. 모어는 헨리 8세에게 충성을 바쳤지만, 끝내 헨리 8세가 신교 세력을 지원하고 교황권을 부정하자, 더 이상 헨리 8세를 인정할 수 없었다. 게다가 헨리 8세가 스스로 교회의 우두머리가 된다는 수장령을 선포하자 모어는 이를 ‘전제 군주’가 되려는 의도로 파악했다. 모어는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 취소를 요청하는 편지에 서명하기를 거부했고, 헨리 8세는 교황을 지지하는 성직자들을 숙청했다.

결국 모어는 건강을 이유로 사임을 요청한다. 그리고 앤 볼린의 왕비 대관식 참석을 거부하자 정적들은 이를 빌미로 모어를 모함했고 모어는 정치적으로 완전히 고립됐다. 그리고 앤 볼린을 왕비로 인정하는 의회 선언에 동참하지 않자 결국 왕의 명령으로 런던 탑에 갇힌다. 1535년 7월 1일, 모어는 재판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닷새 뒤에 사형이 집행됐다. 반역죄로 처형당한 모어의 머리는 런던 브리지에 한 달 넘게 걸려 있었다. 모어는 처형장에서 사라졌지만 그의 작품 『유토피아』는 여전히 전 세계인이 읽는 고전으로 남았다.

원작과 조금 다르게 각색된 그림책에서는 토머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왕의 전속작가인 주인공 토머스는 왕과 서로 존경하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은 두 번째 성을 짓는 데 필요한 돈을 모으기 위해 세금을 올리기로 했다. 이에 토머스가 항변하자 왕은 토머스를 성 밖으로 내쫓도록 명령했다. 토머스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글을 써서 다음 날 성으로 달려가 경비병들에게 새로운 법령이니 방방곡곡에 붙이라고 했다. 토머스가 쓴 글을 읽은 왕은 당장 토머스를 잡아 오라 명령했지만 토머스는 이미 배를 타고 멀리 달아났다. 토머스가 탄 배가 폭풍을 만나 난파하여 어느 낯선 섬에 겨우 도착한다. 토머스는 그 낯선 섬의 왕자로부터 초대를 받고 ‘유토피아’라는 섬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게 된다. 이 섬에 사는 주민들은 모두 똑같은 집에서 살며, 능력껏 함께 일하고, 재량껏 공부하며, 모두가 함께 잔치하며 풍성하게 모든 것을 공유하는 천국과 같은 섬이었다. 토머스는 유토피아가 마치 고향처럼 여겨져 유토피아를 떠나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토머스를 붙잡기 위해 왕은 유토피아에 전쟁을 선포한다. 유토피아의 왕자는 토머스를 내주는 대신 끝까지 싸워 굴복하지 않기로 하고 전쟁을 대비한다. 

유토피아의 왕자는 섬을 포위한 수많은 왕의 함대를 향해 금덩이를 쏘았다. 금빛 불덩이가 밤하늘을 가득 메웠다. 발밑에 떨어진 것이 황금인 것을 깨달은 왕은 병사들에게 금덩이들을 모두 주워서 가져오라고 명령한다. 왕의 병사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차고 어두운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토마스는 왕의 병사들이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깨닫고 큰 소리로 외친다. “병사들이여, 유토피아로 헤엄쳐 오세요. 이곳에서 여러분은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병사들은 배 위의 왕만 남겨두고 모두 유토피아를 향해 헤엄쳐 왔다. 왕자는 유토피아 주민이 되고 싶어하는 병사들을 모두 받아주었고, 사로잡은 왕도 자기 나라로 돌려보낸다. 몇 년 뒤 왕은 편지와 함께 작은 책을 받았는데 그 책이 바로 『유토피아』였다. 왕은 길길이 날뛰었지만 이미 토머스는 먼 곳에 있었다. 

부자도 없고 가난한 자도 없고, 똑같은 집에서 평등하게 살며, 함께 일하고, 공부하고, 필요한 만큼 나눠 갖는  『유토피아』를 보면서 어린이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천진한 어린이들의 동심을 지켜주고 싶지만 유아기가 지난 초등부터는 유토피아가 꿈꾸는 세상이 과연 좋은 것인지, 작가가 제시하는 세상이 정말 선한 것인지, 그런 곳에서 살고 싶은지, 어린이들도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면 좋을 것 같고,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사상적으로도 더 깊이 사유해 보면서 현대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병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그림책 속 유토피아는 모두가 함께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만큼 나누어 가지기에 돈이 필요없고, 왕자는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위해 헌신하며 평등하게 살아간다. 현실에서도 이와 같은 세상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러나 아쉽게도 ‘유토피아’가 추구하는 체제, 즉 ‘사적 소유’를 인정하지 않는 ‘공동 소유’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역사적인 실증을 살펴보자.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에 정착한 필그림들은 신실한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들은 초기에 사도행전에서 기술하는 방식과 유사한 경제 양식을 시도했다. 정착촌의 첫 지도자였던 윌리엄 브래드포드의 일기에서 그들의 실험을 엿볼 수 있는데, 그들은 땅을 공동으로 소유하며 땅의 모든 수확물을 공동의 창고로 가져와 모두에게 똑같이 배분했다. 과연 필그림들은 그런 집단주의 유토피아에서 행복하게 잘 살았을까? 기대와 달리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의 ‘공유 경제’는 첫 해에만 102명 중 5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은 농장에 늦게 나타나기 시작했고,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이에 분개해 열심히 일하고자 하는 의욕이 떨어졌다. 인간의 본성이 드러난 것이다.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기 위해서는 인간들이 철저히 이타적이어야 하는데 인간은 본성상 그런 이타심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멸종의 위기를 맞기 직전에 브래드포드는 체제를 바꿨다. 그는 ‘공동 소유’의 땅을 각 가정의 ‘사적 소유’로 분배하고 땅주인들이 원하는 작물을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길러서 생산물을 소유하거나 자유롭게 거래하도록 했다(1). 결국 이렇게 ‘사적 소유’를 인정하고 ‘자유 시장’의 조건을 마련함으로써 ‘공유 경제’의 실패를 ‘시장 경제’의 성공스토리로 바꿀 수 있었다.

모어가 그리고 있는 유토피아에는 기본적으로 ‘사적 소유’에 대한 부정이 전제되어 있다. 모어의 생각을 이어받아 이를 현실에서 실현시키고자 한 인물이 있었다. 마르크스는 억압받는 노동자가 단결하여 혁명을 일으켜 자본가를 타도하고 사적 소유가 없는 공산주의 세상을 꿈꾸었다. 이러한 급진적인 사상의 모든 실험은 역사 속에서 독재 정권이나 강제노동 수용소, 대량 학살로 귀결되었다. 소련공산당은 대략 4천만 명의 사람들을 죽였고, 캄보디아 공산정부는 인구의 사분의 일을 학살했고,  중국 공산정권은 자국민을 6천만 명 이상 무참히 죽였다. 그렇게 피투성이로 세워진 공산주의를 채택한 국가는 역사적으로 모두 실패했다. ‘내 것’이 아닌 ‘공유’의 체제에서 사람들이 능력만큼 성실하게 일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공유경제’를 현실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강제노동, 강제배급’이 불가피해진다. 공산주의의 특성은 ‘강제성’이다. 강제배급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발적이고 창의적으로 일할 의욕을 상실하게 만들어서 결과적으로 국민 전체가 평등하게 가난하고 불행한 노예로 살아가게 된다. 세계에서 가장 굶주리고 자유를 빼앗긴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북한과 전세계를 한류로 사로잡고 있는 대한민국을 비교해보아도 자명한 결론이다.

공산주의 이념은 이미 실패하여 역사에서 사라진 듯 보이지만 ‘평등’을 앞세우며, ‘복지’와 ‘인권’이라는 탈을 쓰고 부활하고 있다. ‘복지국가’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개인의 최소한의 삶을 책임져 주는 국가가 진보적이고 선한 것처럼 조장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편적 복지’는 개인의 삶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국가를 망하게 하기도 한다. ‘보편적 복지’의 해악을 잘 설명하는 예화가 있다. 영화 ‘지붕 위의 바이올린’에서 거지가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에게 늘 하던 대로 동전을 구걸한다. 누군가 동전을 준다. 거지의 반응은 ‘어제는 두 푼을 주더니 왜 오늘은 한 푼이냐?’이다. ‘경기가 안 좋아 그렇다’고 대답하자 거지의 대답이 걸작이다. ‘네가 경기가 안 좋은 것으로 왜 내가 피해를 보게 하냐?’ 웃으며 넘길 유머는 아닌 듯하다. 

1940년대만 해도 아르헨티나는 번영을 누리던 나라였다. 기회의 땅이었고 사람들은 여유가 넘쳤다. 그러던 아르헨티나에 좌파정권이 들어서면서 ‘평등’을 앞세우고 ‘복지’를 늘리면서 정작 국민은 하루가 멀다하고 시위를 벌인다. 근로자, 교사, 저소득층, 농민, 노인 등 다양한 계층이 저마다 인금인상과 생활보조금 확대, 연금 증액 등 더 많은 복지를 요구하며 시위한다. 그들이 끊임없이 혜택을 요구하는 것은 마치 바닷물을 마시면서 계속 목마름을 호소하는 것과 같다. 지금 아르헨티나는 빈곤층과 실업자가 넘쳐날 뿐만 아니라, 고질적인 인플레이션이 계속되고 사회질서는 무너지고 범죄율은 치솟고 있다(2). 과도한 복지정책의 폐해를 깨닫게 되면 정상적인 체제로 회복할 수 있어야 하는데 국가 재정이 바닥나도, 선심성 복지에 중독된 국민들은 복지 축소에 격렬하게 저항한다. 인간을 도덕적으로 타락시키는 ‘보편적 복지’는 중독성이 강해 회복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복지로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유아들이 꿈꾸는 상상속의 세상일뿐이다. 

‘보편적 복지’의 또 다른 해악은 어려운 이웃에 대한 마땅한 책임감을 국가의 책임으로 미루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도 점차 복지가 확대되면서 국가가 복지를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이 많아지는 것 같다. 한 부산대 교수가 직접 겪은 일이다. 어느 여름 방학 중 태풍이 닥쳐 많은 이재민이 생겼다. 온 국민 사이에 그들을 돕기 위한 성금을 보내는 분위기가 되자 대학 당국도 동참하였다. 교직원 당 얼마씩의 기준선을 제안하며 단과대학 및 학과별로 성금을 모아 전달하기로 했다. 그런데 어느 한 교수가 출타 중이어서 학과 조교는 우선 제 돈으로 이를 대납하고 나중에 그분에게 받기로 했다. 평소에 거대 담론으로 사회정의를 외치던 그가 정작 귀국 후 대로 하며 보인 반응은 충격적이었다. “이런 일은 국가가 해야지 왜 개인이 개입해야 하나?” 참으로 웃을 수도 없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나서서 사회정의를 외치며 복지를 외치는 자들은 본인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지 않는다. 내 호주머니에서 돈을 털어 이웃을 돕는 것은 선하고 귀한 일이지만 국가가 그 일을 하겠다고 개입하면 국가적으로 병들게 된다.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한마을의 모든 주민에게 돈을 걷어 가난한 가족의 의식주를 돕는다고 가정해 보자. 50만 원의 돈을 걷는다면 50명의 주민들은 각각 만 원씩 내면 된다. 그러나 이런 일을 마을이 아닌 국가적으로 운영하려면 이 일을 전담하는 공무원이 생겨야 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비용이 들어야 한다. 복지제도에는 많은 관료가 필요하며 그들은 결국 국민 세금으로 유지해야 한다. 그만큼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줄어들고 가난한 자를 돕는 공무원의 삭막한 행정절차가 늘어날 뿐이다(3). 복지 예산 담당 관료나 정치가처럼 타인의 돈을 타인을 위해 지출하는 형태의 복지는 도덕적 측면에서도 사람들을 타락시키는 경향이 있다. 마치 자기들이 거의 하나님 같은 권능을 지닌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고, ‘눈먼 돈인데 까짓것…’ 하는 식의 도덕적 해이도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이와 같은 국가적 손실뿐만 아니라 더욱 큰 해악은 그 본질을 넘어 포퓰리즘 정치적 득표 도구로 이용되는 것이다. 큰소리치며 사회정의를 외치지 않지만 묵묵히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수많은 개인과 종교단체들이 있다. 자선은 이와 같은 선한 의도의 개인들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대신 국가는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가난한 노인이나 장애인, 고아 등 취약 계층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선별적 복지’를 책임져야 한다. 또 스스로 열심히 일하는 자에게 노동의 열매가 돌아가는 정의로운 사회가 만들어지도록 국가시스템을 만드는데 주력해야 한다.

최고의 복지는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고, 개인이 스스로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1991년 영국에서 처음 창간된 <빅 이슈>는 길거리 매체다. 이를 창간한 존 버드는 본래 노숙자 출신이었다. 그는 자선의 덫에 영원히 걸리게 하는 노숙자 복지정책을 비판했다. 그는 노숙자가 판매원이 되기 위해 지켜야 할 행동수칙을 정했다. 판매 중 금주는 물론이고 구매자에게 당당하고 친절한 행동을 보여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 주요 골자였다. 노숙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존엄성과 자긍심을 되찾기를 바랐던 것이다. 처음 10권의 잡지를 무료로 제공하고 이를 팔아 생긴 수익으로 다시금 10권의 잡지를 정가의 절반 값에 살 수 있도록 했다. 판매 수익의 절반을 판매원인 노숙자가 가져갈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는 자선보다는 자립하고자 하는 의지를 강조했다. 그 결과 스스로의 힘으로 자립에 성공한 노숙자들의 만족도는 자선으로 겨우 생활하던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높았다(4). 이처럼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삶의 태도를 바꿀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가장 큰 복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 할 수 있는 건강한 사람들에게 국가가 주도하는 보편적 복지는 개인의 삶을 이롭게 하기는 커녕 해악이 될 뿐이다.

지금 한국은 사회주의 국가로 좌회전하고 있다. 갓난아기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정부가 국민들에게 현금을 마구 뿌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정치인들은 우리가 낸 세금이 마치 자기 돈인 양 국민들에게 공짜 돈을 나눠주고 있다. 2018년에 경기지사는 도내 만 24세 청년 16만 6천 명에게 연간 100만 원씩을 지급했고, 강원지사는 청년 수당으로 60만 원을 지원했다. 이런 체제에 길들여지면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할 능력을 아예 상실한다(5). 전 세계적으로 이미 기본소득제가 폐지되었음에도, 2019년 10월 서울 한복판에서 기본소득제 지지 행진이 벌어졌다. 150여 명의 젊은 사람들이 ‘모든 사람은 아무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받을 자격이 있다’라는 피켓을 들고 대학로에서 보신각까지 시위행진을 했다. 빈곤을 증명하지 않고도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본소득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금을 마구 살포하는 복지 포퓰리즘이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영혼을 얼마나 타락시켰는지 확인시켜 준 사건이다(6). 누가 싱싱한 젊은이들을 평생 낙오자로 만드는 ‘노예의 길’로 끌어들이는 것인가? ‘시장 경제’의 ‘자본주의’ 교육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시장 경제’란 무엇인가? 

어린 시절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시장’이 얼마나 인류의 원초적인 삶의 형태인지를 잘 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고 당장 끼니 걱정을 하게 될 때 사람들은 모두 뭔가를 들고 ‘시장’에 나갔다. 시장은 오랜 세월 동안 누구의 강제도 없이 자생적으로 발전되어 ‘시장 경제’를 이룬다. 인간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가족을 위하여 일할 때 가장 열심히 일한다. ‘시장 경제’는 인간 본성에 근거하여 작동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가장 자연스럽고 기능이 뛰어난 경제 질서이다. ‘공유 경제’를 추구하는 북한의 실상은 온갖 사치를 누리는 고급 간부들과 노예와 같은 하층 국민들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다. 북한이 철저한 계급 사회가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시장 경제’는 모든 고착화와 이념을 초월한다.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신뢰가 없으면 지속 가능하지 않으며, 부지런하지 않으면 망하고, 새로운 지식을 익히지 않으면 도태된다. ‘시장 경제’가 발달할수록 사람들은 독립적인 인간이 되고, 타인을 배려하는 수준 높은 시민이 되며, 거리는 활기에 넘치고, 도시는 명랑한 기운으로 가득 차게 된다(7)

답은 분명하다. 개개인이 내 삶은 내가 책임을 지고 남을 시기하거나 탓하지 않고 국가에 기대는 보편적 복지는 바라지도 않는 지혜로운 국민 의식을 가져야 한다. ‘시장 경제’는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허락하신 질서이기 때문에 인간 본성과 가장 부합하며 그렇기에 가장 선하고 정의롭고 깨끗하다.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인은 청지기로서 하나님이 주신 영역에서 사명을 다해 충성되게 일을 하고, 이웃과 사회에 부를 창출하며 유익을 미쳐야 한다.


게으른 자여, 개미가 하는 것을 잘 보고 지혜를 얻어라. 개미는 지도자도, 장교도, 통치자도 없지만, 여름에는 먹이를 준비하고, 추수 때에는 그 음식을 모은다. 게으른 자여, 네가 언제까지 누워 뒹굴겠느냐? 네가 언제쯤 잠에서 깨겠느냐? 좀 더 자자. 조금만 더 눈을 붙이자. 일손을 멈추고 조금만 더 쉬자 하면 네게 가난이 강도 떼처럼, 궁핍이 군대처럼 들이닥칠 것이다. (잠언 6:6~11)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물질이 있다면 선한 곳으로 흘려보내야 한다. 성경에 ‘부자와 가난한 자가 섞여 사니 여호와께서 그들 모두를 만드셨다 (잠언 22:1~2)’ 라고 말씀하신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의 삶이며, 우리는 각자의 형편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베풀 수 있으니 은혜이고 축복이다.


후하게 베푸는 사람은 더 많이 얻지만, 인색하게 구는 사람은 가난해질 뿐이다. 후한 사람은 잘 되고, 남을 기분 좋게 하는 자는 자기의 기분도 좋아진다. 어려움이 있을 때에 곡식을 혼자 차지하는 자는 사람들은 저주를 받지만, 기꺼이 나누는 사람은 축복을 받는다 (잠언 12:24~26) 가난한 자에게 베푸는 일은 여호와께 빌려드리는 것이니 그분이 후하게 보상하신다 (잠언 19:17)


몇 년 전부터  흙수저 금수저 하며 젊은 세대들이 계층 이동을 하는 일이 이제는 불가능하다는 식의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젊은 청년들은 그런 헛된 이야기들을 떨치고 일어서야 한다. ‘시장 경제’를 꽃피운 자본주의,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단연코 그런 일은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도 없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시장 경제’안에서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맨 손으로 기회를 만들어 내고, 부를 창출하고 위대한 업적을 이뤄낼 수 있다. 헛된 소망을 주기 위한 이야기가 아님을 지혜로운 청년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새로운 기회는 얼마든지 생겨난다. 눈을 열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사명이 무엇인지 찾고 구하고, 마음속에 감동을 주시면 담대함으로 두드리고 부지런히 도전해 보길 간절히 바란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골로새서 3:23~24)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디모데전서 4:15)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잠언 22:29) 그녀는 밭을 잘 골라 사고 손수 포도원을 가꾼다. 힘있게 허리띠를 묶고 자기 할 일을 당차게 처리한다. 자기의 일이 유익한 것을 알고 저녁에도 등불을 끄지 않는다. 손을 놀려 물레질을 하고 베를 짜며 팔을 벌려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궁핍한 자에게 후히 베푼다 (잠언31:16~20)




(1)  『예수는 사회주의자였을까?』 로렌스 W. 리드 지음 조평세 번역 p40~42
(2) 월드뷰 최승노 글  ‘일하는 자에게는 복이 넘치나니’  
https://theworldview.co.kr/archives/17419 
(3) 월드뷰 김행범 글 ‘국가주의 구빈정책의 재검토’ 글에서 인용 https://theworldview.co.kr/archives/1924
(4) 월드뷰 최승노 글 “가난한 자, 경제적 약자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 https://www.worldview.or.kr/files/uploads/e2/12502/31-34.pdf
(5) 『우리가 빵을 먹을 수 있는 건 빵집 주인의 이기심 덕분이다』 박정자 지음 p8~9
(6) 『우리가 빵을 먹을 수 있는 건 빵집 주인의 이기심 덕분이다』 박정자 지음 p53
(7) 『우리가 빵을 먹을 수 있는 건 빵집 주인의 이기심 덕분이다』 박정자 지음 p105~131 






임해영 | 그림책박물관 운영

일러스트레이터들을 위한 산그림 (picturebook-illust.com)을 운영하고 있으며, 다음세대에게 아름다운 그림책을 전하기 위하여 그림책을 역사적으로 정리하는 그림책박물관 (picturebook-museum.com)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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